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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들어가며 2. 열녀 공주이씨 정려각 3. 명재 윤증고택 4. 나가며 |
1. 들어가며
처음 답사를 간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기쁘다는 생각보다는 당혹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전공이나 복수전공이 역사학과인 것도 아닐뿐더러 아는 사람도 없어서 멀리까지 가는 야외수업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양반들이 살던 한옥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불안감과 동시에 기대감이 부풀었다. 특히 박제된 한옥이 아닌 오늘날에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더 눈으로 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생겼다. 머뭇거림을 그만두고 버스에 올랐을 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렸을 때 나는 내 결정에 대해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2. 열녀 공주이씨 정려각
예정시간보다 30분 늦게 출발한 버스는 무려 4시간에 걸쳐 겨우 노성에 도착했다. 작년에 어린이날에 가게 되어 4시간이나 걸렸다고 말해준 역사학과 언니의 말에 우스갯소리로 우리도 주말이라 그렇게 되는 거 아니냐며 대답했는데 설마 말이 씨가 될 줄은 몰랐다. 휴게소 한번 들리지 않고 독하게 달린 버스에서 내리자 뜨거운 햇볕이 머리 위로 내리쬐었다. 이미 시간은 1시간 30분. 지체할 시간이 없어서 바로 점심을 먹었다. 50분쯤 되었을까. 식사를 마치고 박경하 교수님과 함께 명재 윤증고택으로 걸어갔다. 소화시킬 겸 느긋한 걸음으로 걸어가는데 교수님께서 앞을 가리키며 저 산이 ‘노성산성’이라고 알려주셨다.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능선이 파란 하늘 아래서 유독 짙푸르렀다. 하루 중 가장 더운 시간이어서 숨이 찼지만 그래도 날이 매우 맑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명재 윤증 고택으로 가는 길에 담장으로 둘려 쌓인 정려각이 보였다.
맑은 날씨와 노성산성 |
열녀 공주이씨 정려각 |
사면에 홍살을 설치한 팔작지붕집은 윤증의 모친인 공주이씨를 기리는 ‘열녀 공주이씨 정려각’이었다. 이씨부인은 병자호란 때 남편 윤선거를 따라 강화도로 피난을 갔지만 이내 강화가 함락되자 오랑캐의 손에 죽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며 강화도에서 순절한 여인이었다. 이후 숙종 7년에 정려를 세웠다. 그러나 관리를 잘 하지 않는 모양인지 안에 이름 모를 들꽃들이 무성했다. 무엇보다 놀란 것은 머리 바로 위에 쳐진 큰 거미줄을 발견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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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부분에 커다란 거미줄이 있는데 사진상으로는 잘 안보인다. |
그것을 깨닫고 다시 장려각을 보니 칠이 빛바랜 것이 유독 눈에 띄었다. 열녀. 열녀란 호칭은 과연 여자들에게 좋은 기능을 했을까? 개인적으로 열녀라는 관념은 남성중심주의 사회가 여성들을 억압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정절과 순결. 여성들이 절대적으로 지켜야하는 이 두 개의 가치는 거꾸로 쥔 칼과 같다. 가해자, 그것도 남편이 아닌 남자에 의해 정절이나 순결을 위협받을 경우 치욕을 당하기 전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하는 지독한 장치인 것이다. 만약 강간당할 경우 가해자가 지탄을 받는 것보다 피해자인 여성들이 손가락질 당하고 집안의 수치로 전락하는 여파가 훨씬 큰 사회를 만드는 것이 바로 ‘열녀’가 갖고 있는 이면이다. 개인의 삶보다 집안의 가문과 남편의 명예를 더 중시하는 사회. 열녀란 억압의 장치가 없었다면, 오히려 치욕을 당할지라도 살아남아서 그 치욕을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삶보다 치욕을 당하기 전의 죽음이 더 우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커다란 거미줄과 빛바랜 칠들로 인해 씁쓸해지는 풍경이었다.
3. 명재 윤증고택
장려각을 뒤로하고 본래의 도착지였던 명재 윤증고택에 도달하자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소박한 크기지만 녹음의 풍경과 푸른 하늘 아래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한옥들이 퍽 인상적이었다. 고택을 제대로 살펴보기 전에 운이 좋게도 ‘전통 혼례’를 진행하고 있어서 서둘러 안채로 들어갔다. 혼례 과정 중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청실과 홍실을 엮어 대나무에 묶는 장면이었다. 이 과정은 혼례가 단순히 개인들만의 결합이 아닌 양가의 결합을 의미한다는 뜻을 가졌다. 결혼을 양 집안의 결합으로 이해했던 조선의 사상이 묻어나는 결혼식이었다. 마지막으로 반으로 갈려진 표주박을 하나로 맞추면서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하고 결혼식은 끝을 맺었다. 참고로 악단은 장구, 가야금, 해금, 피리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본래 조선시대 혼례 악단도 이런 악기 구성이었는지, 특별히 정해진 혼례 음악이 없었는지 궁금해졌다.
전통 혼례를 하는 부부. |
혼례가 끝나고 안채를 나와 고택의 풍경을 전체적으로 살펴봤다. 사랑채에 들어가기 전 증손께서 자신의 조상님이 연구한 해시계를 보여주고, 직접 해시계를 통해 시간을 측정했다. 측정된 시간은 2시였고, 스마트폰의 시간은 2시 30분이었다. 틀린건가, 하고 당황했는데 우리나라 시간이 동경 기준으로 한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동경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30분 빠른 것을 감안한다면 해시계로 측정한 시간이 정확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증손은 측정하는 방법은 정남에 두는 것으로, 위도·경도에 따라 시간이 약간씩 다르게 측정될 수 있다고 알려주셨다.
해시계 사용법 |
윤증 고택의 모습 |
본격적으로 고택 탐방을 시작했는데 가장 먼저 들린 곳은 사랑채였다. 사랑채는 큰사랑, 작은사랑, 안사랑으로 구성되어 있고 방 안의 창문은 개폐가 가능해서 위로 올릴 수 있었다. 미닫이·여닫이가 동시에 가능한 창문도 있어서 오늘날 최신식 창문보다도 훨씬 과학적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채를 구경하면서 가장 놀라웠던 건 창문을 열 때 마다 풍경이 달라진다는 사실이었다. 풍경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좌식구조인 만큼 앉아서 봐야하는데, 눈높이를 맞추는 순간 탁 트인 녹음의 풍경이 절로 감탄사가 나올 만큼 아름다웠다. 주변에 아파트나 건물들 없이 오랜 시간을 살아온 굵은 나무들과 옹기종기 모인 장독대들, 푸른 자연으로 뒤덮여있어 정말로 예뻤다. 그리고 신기했던 건 사랑채에 앉아있는 내내 시원했다는 사실이었다.
창 밖으로 본 아름다운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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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밖으로 본 아름다운 풍경2 |
밖은 햇빛이 내리쬐어 방금 전까지 더웠는데 창문을 여니 바람이 시원하게 들어왔다. 일조량을 조절하는 과학적인 구조 덕분이었다. 시원한 바람에 지저귀는 새소리까지 그야말로 낙원이 따로 없어서 어째서 선조들이 왜 그렇게 자연풍경에 대한 시를 읊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안채에 이동하기 전 남녀호칭에 대한 동등함도 배울 수 있었다. 언니와 형제란 호칭이 본래 같은 부모 아래의 동성 형제라면 남녀구분 없이 사용가능했다는 점, 마님도 남녀 둘 다 사용이 가능했다는 점이 참 신기했다.
이제 여자들의 공간인 안채를 보기 위해 이동했다. 안채에 들어가기 전 바닥과 문틈을 보여줬는데, 안방마님은 문 틈 사이로 손님이 온 것과 그 손님의 신발을 보고 신분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오늘날과 다르게 과거에는 신발로 신분을 구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외벽이 있어서 안방마님이 허락할 때 까지 기다려야한다고 했다. 신기하게도 사랑채와는 다르게 안채의 방 안은 구경시켜주지 않았다. 사랑채를 통해 방 구조를 다 보여줘서 그런걸까? 아니면 안채는 여자들의 공간이어서 보여주면 안 되는 곳인걸까? 소소한 의문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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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에서 보이는 풍경 |
곳간과 안채 사이로 가자 초록색 천으로 덮인 부엌문이 보였다. 그 위에 올라가 부엌문의 눈높이에서 맞은편을 보자 산과 동시 탁 트인 풍경이 보였다. 밖에 나가지 않아도, 바쁜 순간에도 바깥 풍경을 보라는 여자들에 대한 배려가 녹아있는 구조였다. 여자들의 공간인 후원으로 가자 옹기종기 모인 장독대가 보였다.
후원에서 본 바깥 풍경 |
후원에서 보이는 사랑채 |
장독대 옆에는 사당이 있는데, 독을 풀 때 자연스럽게 사당에 모신 조상님께 절을 하도록 만든 구조였다. 그래서 사당을 등지고 독을 푸면 안 된다고 했다. 또한 후원에서는 사랑채 창문이 보여서 서방님이 보고플 때 얼굴을 볼 수 있고, 외부손님의 상태도 파악할 수 있었다. 낮은 굴뚝도 인상적이었는데, 연기를 보고 굶주린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하는 장치라고 했다. 또한 연기가 아래로 깔려서 벌레를 퇴치하는 기능도 있다고 했다. 전체적으로 둘러보면서 느낀 점은 한옥 자체가 인간과 자연을 배려하는 과학적인 구조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었다. 후원을 끝으로 명재 윤증고택에서 나와 버스에 올라탔다.
4. 나가며
차가 막힌 탓에 시간이 부족해서 아쉽게도 답사 예정지였던 돈암서원을 들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 대신에 명재 윤증고택을 자세하게 살펴보고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 증손 분이 언제 한번 숙박시켜준다고 하셨는데 정말로 숙박하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곳이었다. 주변에 커다란 건물들이 없어서 달 뿐만 아니라 별도 아주 잘 보일 것 같았다. 버스를 타고 빠져나오면서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굵은 줄기의 나무들이 스쳐지나갔다. 굵은 줄기만큼 오랜 세월을 품고 있는 나무. 그리고 그 나무와 함께 박제된 역사가 아닌 같이 살아 숨 쉬는 노성. 처음의 머뭇거림과 걱정이 무색하리만큼 많은 것을 얻고 돌아가는 답사였다.
*마지막으로 아름다웠던 한옥사진.
첫댓글 안방은 사생활이 현장이라 프라이버시를 위해서임. 타 고택은 처음부터 안채는 안 보여 주는 곳이 대부분임.
그래서 안방은 대청마루에만 머물었군요!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