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을 이틀 앞둔 13일 효창동 백범기념관을 찾았습니다. 기인이사(奇人異士) 21편에 보도한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의 행적을 추적하던중 자료가 하도 없어 김구(金九ㆍ1876~1949)선생 기념관에서 그의 자취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에서였습니다.
백범 김구선생의 자필 휘호다. 독립만세는 선생이 평생 추구해온 목표였다.
김구선생이 타고다니던 미제 뷰익 승용차다. 백범기념관에 전시돼있다.
과연 예상대로 백범(白凡)과 김원봉이 함께 한 사진 몇점을 발견하고는 기쁜 마음에 기념관 바로 옆 백범 선생의 묘소로 올라갔습니다. 백범의 묘소 옆에 누군가 발 빠르게 갖다놓은 화환이 있었는데 문재인(文在寅) 민주당 대표의 명의였습니다.
백범의 묘소다. 조국광복을 위해 평생 싸워온 그는 어처구니없게도 같은 동포에 의해 살해됐다.
부인과 함께 모셔진 백범의 묘소 인근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동녕(李東寧) 주석-조성환 군사부장-차이석 비서부장 등 독립운동가들의 무덤도 많지요. 백범기념관 바로 앞에는 폭탄을 투척하는 자세의 이봉창(李奉昌)의사 동상도 늠름히 서 있습니다.
이봉창의사의 동상이다. 윤봉길-백정기의사와 함께 삼의사로 불린다.
역사를 살펴보니 터에는 유래가 있는 모양입니다. 효창공원(孝昌公園)은 원래 5살 어린 나이에 죽은 정조(正祖)의 첫째 아들 문효세자와 몇달 후 죽은 그의 어머니 의빈 성씨의 무덤이었지요. 무덤을 서삼릉으로 강제 이장한 것은 일제입니다. 더욱이 일제는 이곳을 구(舊) 용산고지라고 부르며 숙영지(宿營地)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일제는 더 나아가 여기서 독립군 토벌 작전을 폈다니 같은 장소에 묻힌 백범과 윤봉길-이봉창-백정기 등 삼의사의 넋이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합니다.
백정기의사의 사진이다. 일제시대, 우리 민족이 견딘 것은 이런 열사들의 의거 때문이었다.
더 미묘한 것은 백범 암살의 배후라고(아무 증거가 없는데도 많은 이들이 지금도 그렇게 믿는)알려진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1956년 묘소를 이장하고 효창운동장을 건립하려다 좌절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이를 막은 것은 김두한(金斗漢) 의원이었지요. 백범과 우남 이승만 대통령은 함께 독립운동을 하고 함께 외국(하와이와 중국)에서 고생하고 함께 광복을 맞았지만 이후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백범은 모든 정치인이 첫손에 꼽는 롤모델이며 청소년들에게도 존경을 받는 민족 지도자입니다.
임시정부 요인들의 모습이다. 해방된 조국이 맞은 이들 앞에는 극심한 혼란상이 펼쳐졌다.
백범이 환국후 돌아와 절을 방문한 뒤 남긴 휘호다. '양심건국'이다.
반면 이승만은 6ㆍ25때의 도주, 부정선거, 장기집권이라는 과(過) 때문에 독립운동, 건국, 6ㆍ25라는 국난(國難)극복의 공(功)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어느 번듯한 거리에서 건국대통령 동상을 찾아볼 수 없는 게 그런 이유 아닌가 싶습니다. 대체 김구 선생이 어떤 면 때문에 국민의 열렬한 사표(師表)가 됐는지를 찾아보다 대학생 시절 읽었던 백범일지를 다시 펴보게 됐습니다. 당시에는 재미없게 읽은 기억뿐이었는데 50을 넘긴 이 시점에서 다시 보니 그렇게 흥미진진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국민이 우남(雩南)보다 백범을 좋아하는 이유가 몇 가지 차이 때문이 아닐까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 우남은 양녕대군의 후손(양반 출신)인데 비해 백범은 상놈의 집안에서 태어났지요. 그 부분은 잠시 후에 자세히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둘째 우남이 엘리트교육(배재학당-미국 프린스턴대-조지워싱턴대-하버드대)을 받은 데 비해 백범은 공부를 하긴 했지만 별 학력이 없습니다. 셋째 우남이 안전한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한데 비해 백범은 일제 추적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중국에서 활동했지요. 넷째 우남이 대통령이 된 데 비해 백범은 암살당하면서 그야말로 민족의 제단에 생명을 바친 격이 됐습니다.
임시정부의 조직표다.
이렇게 불우하게 성장해온 이를 우리는 항상 존중하고 선택해왔지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몇 년 전 대선(大選) 때도 이런 구도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백범의 이러한 성장과정의 비밀은 어린 시절에 있었다고 보는 게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 중국으로 건너가 임시정부를 수립한 이후의 행적은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 것이기에 저는 이번 기사에서 백범의 소년기부터 스님이 되기까지를 조명해보겠습니다. 백범은 안동 김씨 경순왕(敬順王)의 자손으로 경순왕의 8세손 충렬공(忠烈公)과 그 현손인 익원공(翼元公)이 시조입니다. 백범은 익원공의 21대손이라고 백범일지에서 스스로 밝혔습니다. 그런 이 집안에 멸문에 가까운 흉액이 닥칩니다. 바로 방계 조상인 김자점(金自點)이 역적으로 몰린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백범의 11대조는 처자를 이끌고 서울에서 도망쳐 고양으로 왔다가 황해도 해주 서쪽 팔봉산 양가봉으로 갑니다. 놀랍게도 이승만 대통령의 고향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났으니 해방 후 두 민족지도자가 모두 황해도 출신인 셈이지요. 김자점은 어떤 인물일까요? 참으로 재미있는 것이 희대의 간신 김자점이 희대의 배반자 김질(金礩)의 후손(종증조부)이라는 사실입니다. 김질은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자 성삼문 등 사육신이 단종을 복위시키려 꾀했을 때 이 사실을 수양대군에 고해 바쳐 출세한 인물입니다. 이런 인물 밑에서 태어난 김자점은 광해군 대들어 인조반정의 주역이 되면서 벼슬길에 나섭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공적보다 당시 실세였던 김상궁에게 상당한 뇌물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자기 동생을 세력가 이귀(李貴)의 딸과 결혼시켰습니다. 그런데 병약한 동생이 일찍 죽자 이귀의 딸 이예순은 궁중의 무수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무수리 이예순이 김상궁의 총애를 받자 권력의 화신인 김자점이 거기 연줄을 댄 것이지요. 이렇게 출세길에 나선 김자점은 다혈질에 능력도 없었지만 운이 따랐는지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왕실을 호종한 공로로 도원수가 됩니다. 하지만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도원수로서 임진강 이북에서 청군(淸軍)을 저지하긴커녕 도망치기에 바빠 전쟁 후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형을 받게 됩니다. 인조가 강화도 아닌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그의 졸전이지요. 김자점은 재기해 영의정까지 되지만 효종 즉위 후 사림(士林)의 중심 송시열(宋時烈)ㆍ송준길(宋浚吉)에 의해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청의 앞잡이인 역관 정명수(鄭命壽)에게 북벌계획을 밀고하지요. 결국 김자점은 아들 김익(金釴)의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처형당하면서 기나긴 간신생활에 종지부를 찍습니다. 못된 선조 때문에 상놈이 된 백범은 1876년 7월11일 김순영, 어머니 현풍 곽씨 사이에서 유일한 아들로 난산(難産) 끝에 태어납니다. 얼마나 산통(産痛)이 심했는지 아버지는 소 길마를 뒤집어쓰고 지붕에 올라가 ‘음매’하는 소 울음소리를 냈다고 합니다. 가난한 집안 사정 탓에 백범이 처음 한문을 배운 것은 열두살 때였습니다. 처음 배운 말이 마상봉한식(馬上逢寒食-말 위에서 한식을 맞다)이란 다섯 글자였는데 무슨 뜻인지로 모르고 밤새도록 이 말을 외우며 배움의 기쁨을 처음 느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백범의 어머니 청동조각상이다. 어머니는 김구선생의 옥바라지부터 독립운동을 평생 도왔다.
하지만 반년도 안돼 서당에서의 배움을 끝납니다. 백범과 함께 배우는 부잣집 자식이 둔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훈장선생의 숙식을 제공하는 부잣집에서 볼 때 제 자식은 엉망이고 상놈 자식이 매번 일등을 하니 눈꼴이 사나워 볼 수 없었겠지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친이 반신불수가 돼 백범은 배움을 중단하고 소고삐를 든 채 들판을 헤매며 세월을 보냅니다. 그러다 정문재라는 선비를 만나 무료 수강생으로 한당시(漢唐詩)와 ‘대학’ ‘통감’과 ‘대고풍십팔구(大古風十八句)’를 익힙니다. 예나 지금이나 없는 집안에서 출세하는 길은 고시(考試) 같은 것에 덜커덕 붙는 것입니다. 백범 역시 1892년 우리나라에서 마지막으로 치러지는 과거에 응시하러갑니다면 현장에서 볼 꼴 사나운 모습들을 목격하고는 과거에 대한 뜻을 접게 됩니다. 즉 수십번 떨어진 늙은 선비가 큰소리로 울며 합격시켜달라고 비루하게 굴거나 대리시험을 보는가 하면 돈만 많으면 실력이 없어도 붙을 수 있다고 수군대는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그야말로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의 현장을 본 것이지요. <中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