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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생명/은혜
제목 : 생명과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성경 : 욥 10:1~12
찬송 : 372장
저자 : 이삼규목사
출처 : 20240414 낙양교회 주일 낮 예배
욥 10:1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불평을 토로하고 내 마음이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욥 10:2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시옵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
욥 10:3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을 비추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
욥 10:4 주께도 육신의 눈이 있나이까 주께서 사람처럼 보시나이까
욥 10:5 주의 날이 어찌 사람의 날과 같으며 주의 해가 어찌 인생의 해와 같기로
욥 10:6 나의 허물을 찾으시며 나의 죄를 들추어내시나이까
욥 10:7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주의 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자도 없나이다
욥 10:8 주의 손으로 나를 빚으셨으며 만드셨는데 이제 나를 멸하시나이다
욥 10:9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
욥 10:10 주께서 나를 젖과 같이 쏟으셨으며 엉긴 젖처럼 엉기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욥 10:11 피부와 살을 내게 입히시며 뼈와 힘줄로 나를 엮으시고
욥 10:12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나를 보살피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
1828년 뉴욕에서 태어난 호라시오 스패포드는 유능한 변호사며 사업가였습니다. 그는 세계적인 부흥상 D. L. 무디의 사역을 물심양면으로 도왔습니다. 그런데 1870년 네 살 난 아들 호라시오를 열병으로 잃었고, 이듬해에는 시카고 대화재로 집과 재산을 잃었습니다. 그는 병약해진 아내와 가족을 유럽 무디 집회에 참여하게 하려고 유럽 여행을 계획했는데 갑자기 처리할 일이 생겨 아내와 네 딸을 배에 태워 먼저 보냈습니다. 그러나 곧 그 배가 대서양에서 영국 철갑선과 충돌해 침몰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사고로 네 딸을 잃었고 아내 애나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습니다. 스패포드는 바로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넜습니다. 자녀들의 사고 지점을 이르렀을 때 아내 애나가 말했습니다.“여보, 우리 예쁜 네 딸이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잖아요. 우리는 잠깐 헤어질 뿐 천국에서 다시 만날 거예요.”
그러나 비통함을 주체할 수 없었던 스패포드는 객실로 내려가 밤새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왜 제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아들을 데려가셔도, 집과 재산을 가져가셔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네 딸까지 데려가셨군요.”
한참 부르짖는데 갑자기 한 순간 이해할 수 없는 평안이 그의 영혼에 임했습니다. 그 순간 그는 그 자리에서 찬양시를 썼습니다.
찬송가 413장/내 평생에 가는 길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저 마귀는 우리를 삼키려고
입 벌리고 달려와도
주 예수는 우리의 대장 되니
끝내 싸워서 이기겠네
내 지은 죄 주홍빛 같더라도
주 예수께 다 아뢰면
그 십자가 피로써 다 씻으사
흰 눈보다 더 정하겠네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며
큰 나팔이 울려날 때
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해도
나의 영혼은 겁 없겠네
[후렴]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그는 처절한 상실의 고통 속에서도 사랑의 주님을 바라봄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향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욥이 빌닷에게 응답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변론하며 항변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그 내용은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무차별적인 심판을 내리신 것에 대한 탄식입니다. 이를 통해 욥은 그가 겪는 고난의 문제는 친구들과의 논쟁이 아닌 오직 하나님과의 소통으로 해결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재판장으로, 자신을 피고인으로 세우며 자신을 정죄하지 마실 것을 간구합니다. ‘무슨 까닭으로’ 자신에게 고난을 주시는지 변론해 주시기를 호소합니다. 이어서 욥은 하나님의 능력과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신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그가 겪는 고난이 부당함을 변호합니다. 그는 먼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성격이 무엇인지 답변을 요청합니다. 9장에서 하나님과 자신의 본질적인 차이를 인식하고 체념하는 자세를 취하던 욥은 10장에서는 반대로 강력히 항변하는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 요구는 자신을 향한 정죄를 잠시 유보해 주실 것과 고난의 정당성을 알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또한 욥은 신실하신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에게 생명과 은혜를 주시는 동시에 고난과 질병도 주실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하나님께 말을 걸다(1~2절)
욥의 신앙은 그렇게 쉽게 무너질 것은 아니었습니다. 욥은 고통 중에서 하나님과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욥 10:1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불평을 토로하고 내 마음이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욥의 하나님께 꾸밈없이 그저 불평하고, 괴로움을 말하겠다는 태도는 지금껏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가깝게 느끼고 있었던가를 방증합니다.
√욥 10:2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시옵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
욥은 하나님께 솔직하게 요청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욥에게 고난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말해 달라는 것입니다. 욥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고난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욥은 자신이 고난 당하는 이유를 알 수 없어서 힘들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욥도 결국 친구들과 같은 신학과 세계관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 모두는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기본 원리가 ‘인과율의 원리, 행위화복의 관계’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욥의 친구들은 이러한 기본 원리가 잘 작동한다고 생각하는 반면, 욥은 개인적 고난의 경험을 통해 이런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시 이 원리에 맞게 세상을 다스리셔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행위화복의 원리에 근거해 욥의 친구들은 고난의 이유를 욥의 죄로 돌릴 수 있지만, 욥은 도무지 자신의 죄를 찾을 수 없었기에 하나님께 처절하게 외치는 것입니다.
욥은 ‘나를 정죄하지 마시라’고 요구합니다. 이것은 ‘나를 죄인 취급하지 마십시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대체 왜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되었는지 알려 달라고 요구합니다. 욥은 하나님이 지금까지 자신을 사랑하셨고, 의인으로 인정하셨음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지금껏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가운데 있었기에 하나님께 거리낌 없이 나아가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해도, 이처럼 주님과 가깝게 교제하고 있던 사람은 하나님께 위로 받을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통을 마음에만 담아 놓기가 너무 힘들 때 차라리 불평이라도 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솔직하게 감정과 마음을 풀어서 말할 때, 우리는 감정이 해소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설 수 있습니다.
√민 11:15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
너무 힘이 드십니까? 그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감정과 마음을 토해 내십시오. 어쩌면 하나님은 우리가 나아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기다리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 묻다(3~6절)
욥은 하나님께 따지듯이 질문합니다.
√욥의 첫 번째 질문: 작동되지 않은 행위화복의 원리
하나님은 자기 피조물을 학대하고 멸시하시며 악인이 더 지혜롭게 되기를 좋아하십니까?
√욥 10:3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을 비추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
개역 개정에서는 하나님을 ‘주’라는 3인칭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히브리어에서는 하나님을 ‘당신’이라는 2인칭을 사용해 욥이 직접 하나님을 향해 말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욥은 하나님이 고난을 주시는 이유를 알 수 없었기에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런 이유와 근거도 없이 선과 악을 뒤바꿔 놓으셨다고 여깁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손으로 정성들여 지으신 것들을 이유 없이 학대하고 멸시하신다고 봅니다. 또 하나님으로부터 심판받고 징계 받아야 할 악인들의 계획은 잘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욥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그의 괴로움과 탄식은 점점 깊어 가게 된 것입니다.
√욥의 두 번째 질문 : 하나님은 사람이십니까?
하나님이 사람처럼 왜곡된 시야를 갖고 있으시냐는 것입니다.
√욥 10:4 주께도 육신의 눈이 있나이까 주께서 사람처럼 보시나이까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한계를 지닌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데 필요한 지혜와 힘을 넘치도록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악인들이 잘 먹고 잘사는 세상을 만드셨을까요? 이것이 욥의 의문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한계가 있기에 선과 악을 잘못 보고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눈이 아닌 하나님의 눈이 잘못된 판단을 내리시는 것을 욥은 이해할 수 없다고 항변합니다. 욥은 사람도 아닌 하나님이 왜 이리도 잘못된 판단을 내리시는지 여쭙고 있습니다.
√욥의 세 번째 질문 : 욥의 죄를 찾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욥의 잘못을 찾아내기 위한 시간적 압박을 받으시냐는 질문입니다.
√욥 10:5 주의 날이 어찌 사람의 날과 같으며 주의 해가 어찌 인생의 해와 같기로
욥 10:6 나의 허물을 찾으시며 나의 죄를 들추어내시나이까
계속해서 욥은 하나님을 향해 ‘주의 날과 해가 사람과 같습니까?’라고 반문합니다. 하나님은 사람과는 전적으로 다른 분이시기에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왜 전능하신 하나님이 무죄한 욥의 허물과 죄를 찾으시냐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욥에게 죄가 있기에 하나님이 찾으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욥은 계속 주장해 왔듯이 여기서도 여전히 자신의 무죄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욥이 죄를 짓지 않은 죄를 찾고 있기에, 욥은 결단코 하나님이 죄를 발견할 수 없으시리라고 확신합니다.
사실 욥은 답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마치 악하고 유한한 인간처럼 행동하신다고 말하며, 이는 하나님답지 않으니 당장 멈춰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욥이 주제넘은 말을 한 것 같지만, 사실은 욥은 그만큼 하나님을 친밀히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를 창조하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의 손길은 어떠한가요? 나는 주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온전한 신뢰가 있나요?
√하나님을 알다(7~12절)
√욥 10:7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주의 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자도 없나이다
욥은 하나님이 사람처럼 부족하거나 한계를 지닌 존재가 아니기에 욥이 죄가 없음을 이미 다 알고 계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것은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욥은 더욱 이러한 하나님을 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지점에서 욥은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이 욥을 잡고 계시기에 욥은 절대로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욥의 입에서 탄식이 끊어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욥 10:8 주의 손으로 나를 빚으셨으며 만드셨는데 이제 나를 멸하시나이다
욥은 3절에서 한 말을 다시 반복함으로 하나님이 손수 지으신 존재가 바로 자신을 가리키는 것임을 명시합니다. 욥은 하나님이 정성을 들여 빚으신 자신을 이제 멸하시는 것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여기에 ‘빚으셨으며’는 히브리어 ‘아차브’인데 ‘힘써 일하다’라는 뜻이며, ‘만드셨는데’의 히브리어 ‘아사’는 예술가가 작품을 만들 듯이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의미들을 종합하면 “당신께서는 나를 손수 빚어 만드시고는 이제 마음을 바꾸시어 나를 없애 버리시렵니까?”(공동번역)라는 의미입니다. 욥은 창조주 하나님의 신실성을 강조해 자신의 무죄를 하연하면서도 결국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고 보살피시며 지키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욥 10:9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
욥은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빚으셨는지를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은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처럼 흙을 뭉쳐 정성스럽게 욥을 만드셨습니다. ‘흙을 뭉치듯’이란 ‘호메르’라고 하는데 호메르는 ‘하마르’에서 유래한 말로 ‘시멘트, 모르타르, 점토’라는 의미입니다. 특히 호메르는 팔레스타인의 붉은 점토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잘 이겨진 점토를 가지고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나중에는 어떻게 됩니까? ‘티끌’(아파르)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파르’는 ‘마른 흙, 먼지, 티끌’이란 뜻입니다. 사람은 죽으면 티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토록 정성껏 빚으신 사람을 다시 티끌로 돌려보내신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욥 10:10 주께서 나를 젖과 같이 쏟으셨으며 엉긴 젖처럼 엉기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욥 10:11 피부와 살을 내게 입히시며 뼈와 힘줄로 나를 엮으시고
욥은 다시 한 번 자신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욥을 젖과 같이 쏟으셔서 엉긴 젖처럼 만드시고, 거기에 피부와 살을 입히시고 뼈와 힘줄로 엮어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욥 10:12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나를 보살피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
욥은 창조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욥을 창조하신 후에 생명과 은혜를 주셨을 뿐 아니라 계속 지켜 주심으로 욥이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정성스럽게 지으시고 지켜 주셨음을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그랬던 하나님이 다시 욥을 파괴해 티끌로 만드시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욥의 슬픔입니다. 보통 구약에서 창조 모티브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동기가 되지만 욥에게는 오히려 탄식하는 이유로 작동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욥은 하나님께 자신의 괴로움에 대해 진솔하게 의문을 제기합니다. “무슨 까닭으로 내가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 이 같은 욥의 질문에 우리는 모두 공감합니다. 우리도 고난당할 때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같은 질문을 던질 때 생각해야 할 또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과 은혜에 관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징계와 고난에 대해 ‘왜?’라고 물을 수 있다면, 하나님이 베푸시는 생명과 은혜에 대해서도 ‘왜?’라고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형평에 맞습니다. ‘도대체 왜 나에게 건강을 주셨습니까?’, ‘왜 나에게 이런 재능을, 좋은 직장을, 아름다운 가정을 주셨습니까?’ 등 하나하나 따져 묻는다면 고난을 대하는 태도가 분명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면 더 진지하게 고난에 임할 수 있고, 더 인내하며 고통을 견딜 수 있을 것입니다. 은혜를 주신 이유를 찾다 보면 은혜에 보답하는 사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질문할 때 고통과 슬픔에만 집중하지 말고 이미 받은 은혜와 사랑에 관해 질문한다면, 어떤 고난이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인내하며 이길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욥은 두 가지 질문으로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첫째는 “무슨 까닭으로 나를 정죄하시며 고난을 주십니까?”라는 것이고(2절), 둘째는 “주의 손으로 빚으셨는데 왜 나를 멸하십니까?”(8절)라는 것입니다. 이 두 질문 사이에서 욥은 심판자이신 동시에 창조주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자신이 창조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피조물임을 깨닫습니다. 욥의 고난을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그는 생명과 은혜를 베풀어 주신 창조주 하나님을 선포합니다. 성도는 고난 가운데 있을 때 그 고난에 비할 수 없는 큰 영광과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롬 8:18). 생명과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만 바라보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