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과 염소 비유(마25:31-46)
오늘은 마2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 세 번째 이야기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종말에 대한 말씀을 집중적으로 말씀하시면서 종말에 심판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내 삶을 어떻게 살아왔는가? 과연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내게 주신 사명을 다했는가? 하는 것을 뒤돌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날이 개인적인 종말이든, 모든 인류의 종말이든 종말은 바로 자기인생을 결산할 때라는 것입니다.
한 달을 결산하고 지난 전반기를 점검하고 남은 후반기를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계획하는 것처럼 우리 앞에는 분명한 결산의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점검이 없는 한 내일의 발전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두 주동안 두 가지 비유를 살펴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열처녀 비유입니다. 기름을 준비하라, 깨어있으라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 교훈은 달란트 비유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달란트를 맡겨주셨다는 것입니다.
크든 작든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이고 그것은 맡겨주신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저 나만 잘 먹고 잘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잘 사용하여 갑절을 남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목적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또 하나는 생명을 살리는 일을 위해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사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것은 분명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그 일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 번째 비유인 양과 염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때 모든 인류를 양과 염소로 나누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해하기는 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목민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친밀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양을 키울 때 양과 함께 같이 키우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개입니다. 개 한 마리 함께 키우면 양이 위험한 일을 당할 때 짓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여 양을 지키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간혹 큰 목장에서는 나귀나 말을 같이 키우기도 합니다. 그것은 넓은 곳에서 많은 양을 돌보아야하는 경우에는 필요한 장비와 함께 빨리 움직여야하는 필요성이 있고 그런 때에는 기동성이 있는 나귀나 말을 타고 달려야하기 때문입니다.
다음 또 한 가지 같이 키우는 것은 염소입니다. 어디까지나 목적은 양을 키우는 것인데 그 양들 곁에 염소 몇 마리를 반드시 함께 키우는 것입니다. 양은 대표적으로 온순한 동물입니다. 그리고 단순하며 기억력이 좋지 못하여 제집 하나도 제대로 찾아오지 못하는 동물입니다. 어쩌다가 아이들이 못살게 장난을 치더라도 물든가 떠받으며 덤벼드는 법이 없습니다. 비록 다른 짐승이 쳐들어온다 할찌라도 무방비 상태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양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말은 뒷발굽으로 찹니다. 그리고 소는 뿔로 떠받으며 개는 입으로 물어 뜯습니다. 이렇게 모두들 자신을 방어도 하고 적을 공격도 할 수 있는 요소들이 있습니다마는 양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에 있는 참으로 온순한 동물입니다.
그러면서 또한 인내하고 순종을 잘하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양이라 하더라도 목자가 앞에서 몇 마리만 인도를 하면 그대로 줄줄 목자를 따라서 다니는 것이 양의 특징인 것입니다. 여기에 비해 염소는 거칠고 이기적입니다. 염소에게는 뿔이 있어 떠받는가 하면 나누어 먹지도 않고 이기적이고 배타적이며 질투심이 강합니다.
이렇게 염소는 양에 비해 정반대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양과 염소를 함께 기르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우선 먹이를 주었을 때의 문제입니다. 들에서 그냥 풀을 뜯어 먹을 때에는 상관이 없지만 겨울이 되던가하여 먹이를 나누어 주어야하는 경우 이 양들이 미련하여 한꺼번에 와하고 몰려드는 바람에 잘못하면 앞에 있는 양들이 치어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때에 염소가 한 마리 있으면 그렇게 같이 모여드는 것을 보지 못하고 떠받아 이리 저리 흩으러 놓음으로 치어 죽는 일을 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날씨가 추울 때에는 양들이 한데 모여 서로 몸을 비비며 조여들게 되는데 이런 경우 역시 약한 것은 밟혀서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염소 몇 마리를 같이 키우면 이 염소는 질투가 심한 것이어서 양들이 같이 모여 있는 것을 보지 못하여 돌아다니며 들이 받아 전부 흩으러 놓음으로 양들이 치어 죽는 것을 면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양들은 조그마한 저항도 못하는 완전 무방비 상태인 것에 비해 염소는 이리나 맹수같은 것이 나타나면 죽을 때 죽더라도 일단 한번 반항을 하기때문에 다소간 방어도 된다는 것인데 이런 이유들로 인해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염소를 양과 함께 키운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언제나 양과 염소가 같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보통 들에서 풀을 뜯으며 목자의 뒤를 따라 다닐 때에는 같이 지내지만 대체로 우리에 들어갈 때에는 나누어 놓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순간에는 반드시 구별이 되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이 그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별하듯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인간들이 의인과 악인,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 영생을 얻을 자와 영벌에 처할 자를 명확하게 구분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31-3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1절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오실 때는 '자기의 영광으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영광이 아니라 하늘의 영광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오십니다.
또 홀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천군천사와 함께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심판주로 오실 예수님을 위해 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영광의 보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초림의 주님은 가장 낮고 천한 곳에 임하셔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지만 재림의 주님은 영광된 모습으로 천사장의 호령과 함께 영광가운데 오실 것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때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불러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이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구별해 세우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34절,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오른편으로 구별된 백성들은 복받은 백성들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그리스도인들은 복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다 복받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가 영원히 살 우리 고향이고 우리 안식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요,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은 창세로부터 예비되어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상속은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이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아버지의 자식이면 누구든지 받게 되어 있습니다. 자식이 비록 학교를 못 나왔다 할지라도, 지능이 낮다고 할지라도 상속을 받습니다.
그러면 왼편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41절,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왼쪽에 있는 그룹은 복받은 자들이 아니라 저주를 받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저주가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분명히 이 세상에는 저주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이 사람들은 복받은 그룹이 아니라 저주받은 그룹입니다. 그들은 마귀와 마귀의 사자들, 즉 귀신들을 위해 예비된 영영한 불에 동참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을 읽다 보면 두 가지 그룹이 처음부터 계속해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3:12에는 이 세상의 사람들을 알곡과 쭉정이로 구분합니다. 세상에는 알곡과 같거나 쭉정이와 같은 두 종류의 사람이 있어서 함께 섞여 삽니다. 겉으로 보면 아무도 구분할 수 없습니다. 쭉정이들이 세상에서 더 미남이고 미녀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더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알곡과 쭉정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24-27에 보면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이 지혜로운 사람이 있고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이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자기 인생의 기초를 두어, 어떤 폭풍과 심판과 위기 속에서도 결코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모래 위에 자기의 인생을 세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그 집은 크게 무너집니다.
또 마태복음 13:24-30에서는 인생을 밀과 가라지로 구분했습니다. 어떤 농부가 밭에 밀을 심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심지 않은 가라지가 같이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가라지가 더 잘 자랐습니다. 그래서 종들이 “가라지를 뽑아 버릴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주인이 말하기를 "둘 다 추수할 때까지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가 되면 내가 추수꾼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가라지같은 인생이 있고 알곡과 같은 인생이 있습니다.
24:45-51에 보면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과 악한 종이 구분됩니다. 25장에 들어오면, 기름을 준비했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던 미련한 다섯 처녀가 있었습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슬피 울며 이를 갈고, 혼인 잔치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다섯 달란트를 가지고 가서 다섯 달란트를 벌어 와 그것을 주인 앞에 내놓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버린 악하고 게으른 종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악하고 게으른 종의 한 달란트를 빼앗아서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두 종류의 인생이 있습니다. 양이 있고 염소가 있어서 각기 오른편과 왼편에 서게 된다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면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이 비유의 뜻은 무엇입니까?
1. 예수님의 재림은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반드시 오십니다. 주인은 늦게라도 오신다는 것입니다. 정말 마지막 때가 가까이 온 것을 우리가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R.A. 토레이 박사는 신약성경 가운데 주님의 십자가에 관해서는 375회, 부활에 관해서는 144회, 재림에 관해서는 318회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신약성경 매25절마다 한번씩 재림의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2. 이 비유에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는 반드시 양과 염소를 구분한다는, 즉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27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정하신 것입니다.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의인에게는 의의 심판이 있을 것이며, 악인에게는 악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지 아십니까? 죽음 이후의 세계가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불안해하고 죽음을 거부하는지 아십니까? 죽음 뒤에는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본능적으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죽음은 그리스도인에게는 단순히 육신의 장막을 벗는 것에 불과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영혼이 통과해야 할 문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내 아내가, 내 사랑하는 남편이, 내 자식이 죽을 때 장례식을 치르면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육신적으로 잠깐 못 보는 것이 섭섭하지만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죽음이란 하나님이 먼저 부르셔서 광야와 같은 이 땅의 삶을 정리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죽음이후에 하나님 앞에 설 것을 생각하고 오늘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이 땅에 자기 마음대로 머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언제든 가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실제로 알면서도 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 그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 앞에 후회함없이 하나님이 맡겨주신 귀한 달란트를 잘 사용하여 갑절을 남기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3. 이 비유의 메시지는 천국과 심판은 현재의 삶의 태도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다가올 미래의 심판은, 현재 내가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봉사하고 어떻게 헌신하느냐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는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와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던 다섯 처녀에 관한 것입니다.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는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갔고, 준비하지 않은 사람들은 수치를 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결론은 기름을 준비하라, 깨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는 우리가 재림을 어떻게 준비해야 되느냐에 대한 해답입니다. 즉 주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되는데 그 동안 맡겨 주신 은사들을 땅에 묻어 썩히지 말고 세상에 나가 열심히 장사해서 이익을 남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맡겨 주신 은사가 무엇이든지 간에, 가난하든지 부유하든지, 능력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최선을 다해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감당함으로써 준비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양과 염소의 비유의 핵심은 받은 은사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 준비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내용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데 그때까지 성도들은 어떻게 최선을 다해 받은 은사를 가지고 준비해야 합니까? 지금 이 세상에서 굶주리고 고통당하며 옥에 갇혀 있는 이런 현실에 직접 뛰어 들어가서 그들을 돌보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35,36절,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소외된 이웃, 상처받은 이웃, 버림받은 이웃, 아니 영적으로 힘들어 하는 이웃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을 베풀면 결단코 그 상을 잊어버리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 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고치고 생명을 세워야 합니다. 여러분 때문에 다른 사람이 살아나고 병든 자가 고침받고 눌린 사람이 자유함을 얻고 연약한 자가 세워지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생명사역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혼자 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공동체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가정도 공동체요, 교회도 공동체요,. 이 사회도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이 공동체를 통해 행복을 누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의 열매가 우리가 가진 믿음의 증거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사랑을 통해서 증거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해도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이웃을 대하는 것과 주님을 대하는 것은 같다는 것을 지금 양과 염소의 비유가운데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뭐가 심판의 기준입니까? 40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지극히 작은 형제와 주님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대하는 것처럼 이웃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때문에 내가 참고 내가 사랑한다면 그것은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게다가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하는 것은 보답할 수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얼마를 주면 저쪽에서 또 무엇으로라도 보답할 수 있는 대상이 못된다는 의미입니다. 조건없는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오늘 주님앞에 선다면 양의 편에 설수 있습니까? 염소편의 사람입니까? 내가 지금까지 누구를 위해 살아왔느냐는 것입니다. 나만을 위해 평생을 살아왔다면 죄송하지만 그는 잘 살았든 못 살았든 염소 편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염소는 자기 밖에 모릅니다. 염소는 하나로 뭉치는 것을 싫어합니다. 염소는 고집이 셉니다. 염소는 뿔로 받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양은 모이기를 좋아합니다. 양은 온순합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따릅니다.
양은 목자가 없으면 죽습니다. 자기를 방어할 무기가 없습니다. 양은 죽을 때까지 반항하지 않습니다. 어린양되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자기를 다 내어놓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 나오는 양의 편 사람들의 특징 한 가지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사랑을 실천하였다는 것입니다. 양의 편에 서려면 엄청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작은 자, 소외된 이웃, 교회안에 고통하고 눈물흘리고 아파하는 이웃을 돌아보고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섬기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해야할 일입니다. 그일이 바로 생명을 살리는 생명사역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그 사랑을 깨닫고 이웃에게 관심을 갖고 주님의 이름으로 섬기고 사랑했다면 그 모든 사랑은 주님께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상을 결단코 잊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많이 심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나만을 위해 살아왔습니까? 이제 예수님처럼 이웃의 아픔과 고통을 바라보고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사랑을 실천하며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