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세 카레라스,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는, “세계 3대 테너”로 불립니다. 이들 중, “호세 카레라스”는, 최고 성악가로서의 명성에 달하던 1987년 41세에 백혈병 진단을 받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치료가 어려웠기에, 사람들은 더 이상,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호세는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저의 생명을 연장해 주시면, 남은 평생은, 하나님을 위해 충성하겠습니다”라며, 기도했습니다. 호세는 이렇게 기도하면서, 치료를 위한 힘든 과정들을 하나하나 극복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머리카락이 빠지고, 손톱과 발톱이 떨어지는 아픔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호세의 기도는, 찬송과 함께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하나님께서 호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그 후, 호세는, 고향 바르셀로나에, “호세 카레라스 국제 백혈병 재단”을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매번 공연할 때마다 그 수익금의 절반은, 재단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호세는, 낙심의 자리에서 무기력하게 머물지 않고,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해,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한 그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우상숭배의 자리에 있을 때,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신들의 유익을 먼저 찾았습니다. 그랬기에, 백성들은 더욱더, 절망과 도탄에 깊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가장 치욕스러운 일은, 바벨론에 의해 남유다가 멸망한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신 가나안을 떠나, 이스라엘의 왕과 수많은 백성들이, 쇠사슬에 묶여, 머나먼 이국인 바벨론으로 끌려왔습니다. 북이스라엘은, 남유다가 멸망하기 전, 이미 앗수르에 의해 멸망되었습니다. 그때, 수많은 사람들이 남유다로 왔습니다. 하지만, 이젠, 어디에도 그들이 지낼 곳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의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앞날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 그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은, 우리의 욕구충족을 위하거나 마음의 평안을 위해, 단편적으로 사용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은, 성도인 우리에게 새로운 활력소이고 희망이며, 사 40: 30 – 31의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말씀입니다. 여기를 보시면,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되, 기쁨을 이기지 못하며, 즐거워하고, 기뻐하신다고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러함을 기억하여, 삶의 진자리에서나 마른자리에서나 오직,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거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5 – 16절을 보시면,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기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본문 앞의 14절을 보시면,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시온의 딸아”, “이스라엘아”, “예루살렘 딸아”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부르는 동일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여러 표현으로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이러한 부름의 호칭에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은 다정하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 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았고, 그들을 잊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비록, 하나님을 멀리 하며, 우상숭배를 함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나라가 멸망하고, 바벨론으로 끌려갔지만, 그들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각 호칭의 끝을 보면,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기쁘게 부를지어다. 노래할지어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처한 현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도저히 기뻐하거나 즐거워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들에게, “마음을 다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기쁘게 노래를 부르라”고 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그들에게 병주고 약주기 위해서 일까요?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시기에, 기뻐하며 노래 부를 수 있는 위로와 소망을 주신 겁니다. 이에 대한 증거가 본문 15절입니다. 다시 보시면,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를 쉬운 성경역으로 보시면, “여호와께서 너에 대한 심판을 그치셨고 네 원수를 쫓아 버리셨다. 이스라엘의 왕이신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니, 네가 다시는 해로운 일을 당할까봐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참된 왕은, 요시야가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왕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기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가 어디에서든 두려워하지 않는 다는 것은, 참으로 기쁘고, 감사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본문 16절을 보시면,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주십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복음성가 가운데,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가사를 보시면, “주님여 이손을 꼭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흑암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인도 하소서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주님여 날 도와 주소서 외치는 이 소리 귀기울이시사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라고 합니다. 철학에서 실존주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키에르케고르”는, 성도들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 “캄캄한 시골길에 한 농부가 등불을 켜고 마차를 몰고 간다. 불행히도 이 농부는 마차에 켜 놓은 등불 때문에, 아름답게 빛나는 밤하늘을 보지 못한다. 세상에서 누리는 즐거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즐거움은, 그것이 고급스러운 즐거움이든, 저급한 즐거움이든 간에, 이 농부가 마차에 켜고 다니는 등불과 같은 것이다”라고 합니다. 우리도 이처럼, 때때로 우리가 켜놓은 등불 때문에, 밤하늘에 무수히 빛나는 아름다운 별빛을 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곧, 세상의 즐거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언제나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담대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7절을 보시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심으로, 우리로 말미암아 기뻐하십니다.
본문은, 우리가 즐겨 부르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라는 찬양의 가사이기도 합니다. 앞의 구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계심으로, 발생되는 결과들을 열거했지만, 본문은,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가운데, 왜? 성도들 가운데, 왜? 내 안에 계시는지에 대한 물음에 답을 줍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왜? 성도가 되었는지에 대한 물음에, 답을 갖고 계십니까? 저는,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는 로마병정이 아니라, 내 자신이다”라는 생각 밖에는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는 즐겨 부르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라는 찬양의 가사였던 본문이, 설교를 준비하는 제게, “유레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저의 특정한 모습에서가 아니라, 저 자체를 하나님이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무엇 때문에 저를 사랑하는지, 또, 제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피조물서의 저를, 하나님은 사랑하신다는 겁니다. 본문의 뒷부분을 보시면,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고 합니다. 제 고민의 해답은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기에, 저와 함께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어찌, 본문의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겠습니까? 이것이 어찌, 한없이 부족한 제게만 해당되겠습니까? 하나님은 그 분의 피조물인 우리를 기뻐하며,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창 1장을 보시면, 첫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들을 기뻐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섯째 날에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는, “심히 좋았다”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첫 사람도 포함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본문을 다시 보시면,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조용하고 차분하게 너를 향하여 여호와께서 사랑을 베푸실 것이다”라는 말로 곡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히브리어 표현을 보면, “하나님이 베푸는 그 사랑 안에서 스스로 만족하시고 기뻐하시며 조용히 그 사랑을 향유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잠히 사랑하시며”라는 말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애틋한 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애틋하다”를 국어사전에서 찾으면, “안타까워 애가 타는 듯하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면, 그 사랑에 스스로 빠져서 만족과 기쁨으로 잠잠히 안식하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이보다 더 절실하게 나타낼 표현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가끔, 우리의 삶이 “실천적 무신론자”이지는 않습니까? “실천적 무신론자”란,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관념적으로는 믿지만,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삶을 살아가는 자”를 말합니다. 교회를 다니기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도 하지만, 그리고, 기도도 하지만, 삶에서는 하나님이 있으나 없으나 전혀 상관없이 산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와 함께 하셔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손이, 언제나, 우리를 덮고 있으며, 우리를 토닥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욱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9 – 20절을 보시면, “그 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에게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 내가 그 때에 너희를 이끌고 그 때에 너희를 모을지라 내가 너희 목전에서 너희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너희에게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합니다.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명성과 칭찬을 듣게 합니다.
본문에서, 우리의 눈이 멈추고, 생각이 멈추는 곳이 있습니다. 어디입니까? “수욕받는 자에게 칭찬과 명성”,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입니다. 이에 대해, 사 61: 3을 보시면,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에서 포로생활로 인해, 이스라엘이 겪었던, 온갖 수욕과 고통을, “칭찬과 명성의 화관”으로 바꾸어 주시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향한 눈물, 하나님께 간구하는 우리의 외침은 결코, 허공을 치는 메아리가 아닙니다. 다윗은 자신이 흘리는 눈물에 대해, 시 56: 8을 보시면,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흘리는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십니다. 이는, 우리를 향해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를 바라본다는 겁니다. 그러기에, 모세는, 시 90: 15에서,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모세는, 그가 힘들고 어려웠던 날들만큼, 하나님께서 기쁘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종으로 살아갈 때의 애통을 간과하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신앙 때문에, 믿음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흘리는 눈물을, 하나님은 그냥 흘려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환경으로 인해, 우리가 겪는 고통으로 인해, 우리의 손을 늘어뜨리지 말고,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심을 확신하는 믿음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와 소망으로, 세상에서 명성과 칭찬을 듣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