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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마의 수도원 1
스탕달 Stendhal 1783~1842
“주인공 파브리스 델 동고는 나폴레옹을 동경하는 이탈리아 귀족 청년입니다. 그는 이상과 영광을 꿈꾸며 워털루 전투에 참여하지만, 전쟁의 혼란과 허무만을 경험합니다. 이후 그는 파르마 공국으로 돌아와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되지만, 궁정의 권력 다툼과 음모에 휘말립니다. 사랑하는 여인 클렐리아와의 비극적인 사랑, 그리고 그를 헌신적으로 보호하는 고모 지나 산세베리나 공작부인의 도움 속에서 그는 감옥 생활과 정치적 음모를 겪습니다. 결국 파브리스는 세속의 욕망과 좌절을 뒤로하고 수도원으로 들어가 고독한 삶을 선택합니다.“
[1장]
1796년 밀라노
1796년 5월 15일, 보나파르트 장군(나폴레옹)은 저 젊고 활기 있는 군대 선두에 서서 밀라노에 입성했다. 그 군대는 방금 전 로디교를 건너 들어오면서, 시저와 알렉산더 이래 수세기가 지나서야 그 후계자가 등장했음을 세상에 알렸다. ~~~
50여 년 전부터 프랑스에서는 <백과사전>과 볼테르의 영향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밀라노의 성직자들은 선량한 시민들에게, 읽는 법을 배우거나 세상의 이치를 아는 일이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짓이라고 소리 높여 외쳐왔다. 그들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사람은 제각기 자기 교회의 사제에게 십일조를 어김없이 납부하고, 자신이 저지른 아무리 작은 죄라도 낱낱이 사제에게 고백하면 죽은 후 거의 틀림없이 천당에 가서 좋은 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1796년 당시의 밀라노군이라고 해 봤자 스물네 명의 건달을 모아 붉은 제복을 입혀놓은 것에 불과했고., 이들이 헝가리의 정예 척탄병 4개 연대와 협력해서 이 도시를 지키고 있었다. 풍기의 방종은 극에 달하였으나, 어느 곳에서건 정열을 발견하기란 힘들었다. ~~
1796년 5월 프랑스군이 입성한 지 사흘 후의 일이었다. 프랑스 군대를 따라 이 도시에 들어온 좀 엉뚱한 젊은 세밀화가가 있었는데, 후일 명성을 날리게 되는 그로(프랑스 낭만주의 화가)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세르비라는 큰 카페에서 대공이 저지른 뻔뻔한 짓들에 대해 듣게 되었다. 이 대공은 아주 뚱뚱했다. 그로는 질 나쁜 누런색 종이에 인쇄된 아이스크림 메뉴를 집어 들어 그 뒷장에다가 비대한 대공을 그렸다. 한 프랑스 병사가 총검으로 대공의 배를 찌르자 피 대신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밀이 쏟아져 나오는 그림이었다. ~~~이 그림은 그날 밤 인쇄되어 다음 날로 2만 부가 팔려나갔던 것이다.
바로 그날 600만 프랑이라는 전쟁 배상금 게시문이 게시되었다. 그것은 프랑스군의 궁색함을 메우기 위해 부과된 것으로서, 여섯 번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스무 곳을 정복한 이 군대에 신발, 바지, 웃옷, 모자 따위가 부족했던 것이다.~~
장교들은 가능한 부잣집에 묵도록 배정되었다. ~~~로베르라는 중위도 델동고 후작부인 저택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 저택에 들어올 때 가진 것이라고는 피아첸차에서 받은 6프랑 금화 한 닢밖에 없었다. ~~
그 저택의 집사장이 로베르 중위의 방으로 와서 후작부인이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는 말을 전했을 때 중위는 정말이지 이만저만 낭패가 아니었다. 그는 부하와 함께 웃옷을 다시 꿰매도 보고, 신발 위로 난감하게도 두드러져 보이는 끈을 잉크로 검게 물들이기도 하면서 그 운명의 저녁 식사 때까지 두 시간을 보냈다. ~~
후작부인이 나중에 여러 번 말한 사실이지만, 사실 그녀는 조금이라도 용기를 얻으려고 당시 수녀원에 가 있던 시누이 지나 델 동고를 불러왔었어요. 이 아기씨가 나중에 저 아름다운 피아트라네라 백작부인이 된 여인인데, 화려한 시절을 누릴 때 그 어떤 이도 그녀만큼 쾌활함과 사랑스런 기지를 발휘하지는 못했어요. ~~~
지나는 당시 열세 살쯤이었을 텐데, 아시다시피 발랄하고 솔직해서 마치 열여덟 살은 된 듯이 보였어요. ~~~~일주일이 지나서....하고 로베르 중위는 말을 이었다. 프랑스군이 아무도 단두대에 올려놓고 목을 베지 않는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델 동고 후작이 코모 호수에 있는 그리앙타 성관에서 돌아왔습니다. 그 사람은 프랑스군이 가까이 오자 과감하게도 젊고 아름다운 아내와 누이동생을 전쟁의 혼란 속에 버려 둔 채 그리고 피신을 했던 거지요. ~~~
여기서 밝혀 두건대 필자는 많은 진지한 작가들을 본받아 우리 주인공의 이야기를 그가 출생하기 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시작했다. 우리의 주인공이란 다름 아닌 파브리스 발세라. 밀라노에서 마르케지노 델 동고라고 불리는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프랑스군이 퇴각하던 바로 그때 세상에 태어나서, 우연히도 대귀족 델 동고 후작의 둘째 아들이 되었다. 알다시피 후작은 퉁퉁하게 살찐 핏기 없는 얼굴에 억지 미소를 지으면서, 진보적인 신사상에는 끝없는 증오심을 품은 사람이었다. ~~
[2장]
후작은 계몽주의를 드러내놓고 증오하는 사람이었다. 이탈리아를 망친 것이 바로 그런 사상들이라는 것이다. 교육이라는 것을 그렇게 두려워하면서도 아들 파브리스가 제수이트 학교에서 시작한 공부를 좋은 성적으로 완성하는 것을 보고 싶다는 게 후작의 고민거리였다. ~~~그리앙타의 사제인 선량한 블라네스 신부에게 파브리스를 맡겨 라틴어 공부를 계속하게 했다. ~~~
원래 성실함과 미덕을 지닌 데다 재기를 겸비한 블라네스 신부는 사실 매일 밤을 자기 교회의 종루 위에서 보냈다. 그는 점성술에 몰두해 있었던 것이다. ~~~나폴레옹 황제의 제국과 혁명이 언제 몰락할지 그 정확한 시기를 예측하는 데 일생을 바치고 있는 사람. ~~~그는 파브리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도 라틴어로 말(馬)이 에쿠스라고 배우긴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말에 대해 더 아는 것이 뭐지? ~~~
덜 동고 후작은 단지 그를 경멸할 뿐이었는데, 그 이유는 신분이 낮은 주제에 너무 이치를 따진다는 것이었다. 파브리스는 신부를 존경하고 있었다. ~~~
델 동고 후작의 생활은 확실히 재미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런 생활을 고분고분 따르고 있는 가족을 계속해서 부자로 만들어 주는 이점이 있었다. 후작의 일 년 수입은 20만 프랑이 넘었지만 그 4분의 1도 쓰지 않았다. 그는 오직 희망만을 껴안고 살았던 것이다. 그는 1800년에서 1813년까지 13년 동안을 나폴레옹이 6개월 이내에 몰락할 거라고 끊임없이, 그리고 흔들리지 않고 믿었다. ~~1813년 초, 베레지나강의 참패 소식을 듣게 되자 그는 얼마나 감격했던지! 파리가 점령되고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그는 거의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 ~~~14년을 기다린 끝에 마침내 그는 오스트리아군의 밀라노 입성을 기쁨에 겨워 바라보았다. 빈에서 시달된 명령에 따라 오스트리아 장군은 후작을 대단히 정중하게 맞이했다. 정부의 최고위직 하나가 서둘러 그에게 마련되었고, 후작은 빌려준 돈을 받듯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의 장남은 오스트리아 왕국의 유수한 연대 중위로 임명되었다. 차남에게는 견습 사관의 자격이 주어졌지만 아들은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후작은 유례없는 오만한 태도로 이러한 승리를 누렸으나, 불과 몇 달 만에 끝나고 말았다. 원래 그는 사무적인 재능이 없는 사람이었다. ~~~황제는 후작이 제출한 행정관 사직서를 자비롭게 받아들이고 동시에 그를 롬바르디아 베네치아 왕국의 부지사장으로 임명했다. ~~
나폴레옹 몰락 후에 밀라노 유력인사 몇 명이 프리나 백작을 노상에서 살해한 것이다. 이 인물은 이탈리아 부왕의 대신을 지낸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다. 피에트라네라 백작은 목숨을 내걸고 그를 구하려 했으나, 그가 우산에 찔려 죽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불행한 대신은 한동안 길 한가운데 도랑에 버려져 있는 것을 사람들이 발견해서 성 지오바니 성당 철책 앞까지 끌어왔는데, 델 동고 후작의 고해신부였던 사람이 그 철책 문을 열어만 주었어도 생명을 구했을 것이다. ~~~여섯 달 후 후작은 흐믓한 심정으로 그 신부를 승진시킬 수 있었다.
후작은 매제인 피아트라네라 백작을 몹시 싫어했다. 백작은 연금 50루이를 받는 처지에 건방지게도 아주 만족스러워했으며, 자신이 평생 사랑해 온 것에 여전히 충실하다는 사실을 대담하게도 내세우고 있었다. ~~~
백작은 오스트리아 치하에서 관직을 거절했다. 이 거절 때문에 그는 요주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프리나가 죽은 지 몇 개월 후, 암살자들에게 돈을 지불했던 바로 그 인사들은 피에트라네라 장군의 투옥 허가를 받아냈다. 아내인 백작 부인은 여행 증명서를 만들고 역마차를 불러 빈으로 가서 황제에게 진상을 호소하려 했다. ~~~
이런 소동은 백작부인의 굳센 성격 덕분에 가라앉았고~~~백작부인은 5, 6년 전부터 아주 부유한 한 청년과 친하게 지내왔는데, 이 청년은 또한 백작과도 가까운 친구였으므로, 영국 말이 끄는, 당시 밀라노에서 가장 호사스러운 자신의 마차와 스칼라 극장의 특등 좌석과 시골에 있는 자신의 성관을 부부가 마음대로 쓰도록 제공해 주었다. ~~~
어느 날 그는 청년들과 어울려 사냥을 갔는데~~~싸움이 벌어졌다. ~~~백작은 살해되고 말았다. ~~~남편의 죽음에 분노한 그녀는 라베르카티, 즉 친하게 지내는 그 부자 청년이 스위스로 쫓아가 피에트라네라 백작을 죽인 자를 총으로 쏘거나 아니면 한방 먹여 주기라도 하기를 바랐다. 리메르카티는 이 계획이 어리석은 짓이라고 했다. 그런 그를 경멸하게 된 부인은, 그에 대해 이제껏 품어왔던 호감이 다 사라져 버렸다. ~~~
비록 상복을 입고 있었어도 그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매력이 넘쳤던 백작부인은 세력 있는 청년들에게 은근히 교태를 흘렸는데, 그들 중 N백작은 부인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
그 사이 리메르카티는 줄기차게 편지를 보내왔고, N백작 역시 청혼 편지를 멈추지 않았으므로 부인은 편지로 둘러싸이고 말았다. ~~
후작은 누이동생에게 편지를 써서 그리앙타 성관에 그녀가 지내기에 마땅한 방을 마련해 놓았고, 또 편히 지낼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전했다. ~~~그녀의 두 조카딸은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백작부인을 열여섯 살일 적의 심정으로 되돌아가게 만들었다. ~~~그녀는 작은 배를 하나 사서 파브리스 후작부인과 함께 그 배를 직접 꾸몄다. ~~~
파브리스의 형 아스카니오 소후작은 고모 일행의 산보에 끼고 싶었다. ~~~~한번은 파브리스 일행이 폭풍우를 만나 위험에 빠진 적이 있었다.~~~폭풍과 천둥에 휘말리자 백작부인이 일단 배에서 내리자고 말했다. ~~~그녀는 배에서 뛰어내리다가 물에 빠지고 말았다. 파브리스가 그녀를 구하기 위해 뒤따라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
백작부인은 블라네스 신부의 꾸밈없는 성격을 무척 좋아했으며, 그의 점성술에도 큰 흥미를 느꼈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젊음을 이런 쓸쓸한 성관에서 보내야만 하다니!~~~1814년에서 1815년 사이의 겨울이 이렇게 지나갔다. ~~~
1815년 3월 7일이었다. 백작부인 일행은 그 이틀 전 밀라노로의 즐거운 여행길에서 돌아 온 터였다. 그날 이들은 최근에 호수 바로 앞까지 연장된 플라터너스 가로수 길을 산보하고 있었는데, 그때 작은 배 하나가 코모 호수 쪽에서 나타났다. ~~~후작의 밀정 한 명이 둑으로 뛰어 올라왔다. 나폴레옹이 주앙만으로 막 상륙했다는 것이었다. ~~~후작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군주에게 진정 어린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서 후작은 자신의 재능과 수백만 금의 재산을 군주에게 바치겠노라고 하면서, 군주의 대신들이 파리의 선동자들과 내통하고 있는 급진 공화주의자들이라고 몰아붙였다. ~~~
떠나겠어요 하고 파브리스는 말했다. 나폴레옹 황제의 군대에 들어가겠어요. ~~~네가 나폴레옹 군대에 들어가도록 허락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을 그를 위해 희생한다는 뜻이지. ~~~파브리스는 역마차를 타고 생고타르를 지났다. 여행은 거칠 것이 없었다~~~프랑스 땅으로 들어갔다. ~~~워털루 전투의 서곡이었다.
[3장]
얼마 안 가서 파브리스는 군대를 따라다니며 술을 파는 여자들을 만났다. ~~당신은 탄약통을 여는 법조차 모를 거야. 파브리스는 기분이 퍽 상했다. 그러나 이제 막 사귄 여자에게 그녀가 바로 알아 맞췄다는 사실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가엾은 젊은이! 곧장 큰 일을 당하고야 말겠군.
[4장]
총탄이 매점 마차 바로 옆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매점 여자가 힘껏 휘두르는 채찍을 맞은 말이 쏜살같이 내달렸지만 파브리스는 잠을 깨지 않았다. ~~
돈은 얼마나 갖고 있어요? 여자가 갑자기 물었다. 파브리스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는 이 여자가 마음이 고결한 사람이라는 점을 의심치 않았다. ~~~전부 해서, 나폴레옹 금화 서른 SVL이 있고, 나머지는 5프랑짜리 에퀴 열 닢이 채 안 돼요. 그렇다면 어디든 마음대로 갈 수 있잖수! 여자가 큰소리로 말했다.~~~오른편에 보이는 첫 번째 오솔길로 들어가요. 기회가 되면 우선 민간인 옷을 사 입어요.~~
파리로 돌아갈 생각이면 우선 베르사유로 가서, 그곳에서부터 산보하는 사람처럼 빈둥거리며 걸어서 파리 성문을 통과하는 거예요. ~~~그가 가장 아쉽게 느끼는 점은 오브리 하사에게 내가 정말 전투를 한 건가요? 하고 물어보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
이봐, 그중 한 마리는 내 거야. 망할 자식아! 그는 큰소리로 말했다. ~~~5프랑을 주지. 날 놀리자는 거야? 병사가 되받았다. 파브리스는 여섯 걸음 정도 거리를 두고 총을 들어 그를 겨누었다. 말을 내놔. 그러지 않으면 쏠 테다. 병사는 총을 등뒤에 메고 있었기 때문에 총을 잡으려고 어깨를 돌렸다. 조금만 움직이면 죽는 줄 알아! 파브리스가 그를 향해 달려들며 소리쳤다. 좋아 5프랑 내놓고 한 필 가져가. ~~~
병사가 쉰 걸음가량 되는 곳까지 간 것을 보고 그는 재빨리 말 위에 올라탔다. 막 자리를 잡고 발로 오른쪽 E으자를 찾는 참인데 바로 곁으로 총알이 휙 날아오는 소리가 났다. 총을 쏜 것은 그 병사였다. 파브리스는 화가 치밀어서 이미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치는 병사를 쫓아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곧 병사는 말 두 필 중 한 마리에 올라타고 달아나 버렸다. 됐어. 이젠 총을 쏴 밨자 닿지도 않아. 그는 중얼거렸다. 그가 방금 산 말은 훌륭한 놈이었지만 몹시 굶주린 것 같았다. 파브리스는 한길로 다시 들어섰다. 길에는 여전히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한길을 가로질러 말을 달려서 왼편 작은 언덕으로 내달았다.~~
파브리스는 길 멀리로 보이는 농가에 가서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돈을 내밀고 말에게 귀리를 얻어 먹였다. ~~~그는 대령의 견장을 달고 있었다. 이곳에서 파수를 서 주게 ~~~명령서를 읽어 보았다.
“제4군단 기병 1사단 제2연대를 지휘하는 제6용기병대의 르 바롱 대령은 모든 용기병, 엽기병 그리고 경기병들에게 명령하건대, 이 다리를 건너가지 말고 다리 옆 사령부가 설치된 백마 여인숙으로 집합하기 바란다. 1815년 6월 19일 라 생트교 부근 사령부에서. 르 바롱 대령이 그의 오른팔에 부상을 당했으므로 명에 의해 대필한. 중사 라 로즈”
[5장]
부하들은 그의 팔에 대령의 셔츠를 찢어 붕대 삼아 감아 주었다. ~~~파브리스는 다음 날 동틀 무렵에야 겨우 눈을 떴다. 말들이 울음소리를 길게 끌며 요란스럽게 들썩이고 있었다. 마구간에 연기가 가득했다. ~~~집에 불이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 여 명의 패잔병들이 밤새 백마 여인숙에 모여들었는데 그들은 모두 아우성을 치며 욕설을 퍼부어 댔다. ~~~파브리스는 1킬로미터쯤 가서 뒤를 돌아보았다. 따라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집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나이든 대령은 어떻게 되었을까? ~~
한길 옆 밭에서 삽을 들고 일하고 있던 농부가 그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맥주 한 잔과 빵을 나누어주었다. ~~~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에트리유라는 여인숙이었다. ~~~그는 땅에 발을 딛자마자 완전히 정신을 잃고 말았다. ~~~칼에 찔린 허벅지다 아주 심하게 곪아 들어갈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파브리스는 여인숙 주인네들이 무척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군 장교 한 명이 그의 방으로 들어왔다. ~~
파브리스는 자신이 도망가면 그녀들이 위태로워지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그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도망가게 하리라는 것도 알 것 같았다. ~~~두 딸은 그가 변장한 왕자라고 믿었다. ~~~그는 새벽 2시경 마침내 옷을 입고 길을 떠날 차비를 했다. 그가 막 방에서 나오려 할 때 친절한 주인 여자는 수시간 전 이 집에 왔던 장교가 그의 말을 끌고 가 버렸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아니캥은 울면서 그를 위해 말 한 필을 세내 놓았다고 알려주었다. ~~여주인의 친척이라는 키 큰 청년 두 명이 파브리스가 말안장에 오르는 것을 도와주고, 길을 가는 내내 그가 말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받쳐 주었다. ~~~두 시간 동안 길을 간 끝에 에트리유 여인숙 여주인의 사촌 집에 도착했다. 파브리스가 청년들을 아무리 설득하려 해도 그들은 그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
세 시간 후 파브리스는 여기저기 성한 데 없이 부서지긴 했지만 그래도 건장한 역마 두 필이 끄는 작은 이륜마차에 올라탔다. 그는 원기를 좀 회복하고 있었다. 여인숙 여주인의 친척 청년들과 헤어지는 순간은 정말 비감스러웠다. 파브리스가 아무리 그럴 듯한 구실을 내세워도 그들은 돈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
이후의 여정은 순조로웠다. ~~~연합군은 프랑스를 침략하고 있었다. ~~~마침내 제네바에 도착한 파브리스는 그곳에서 백작부인이 보냈다는 사람을 만났다. ~~~파브리스가 밀라노 경찰에 고발되었는데, 그 고발 내용이란 그가 이탈리아 왕국 내에 조직된 대규모 비밀 결사의 건의문을 전하러 나폴레옹을 찾아갔다는 것이었다. ~~~파브리스를 밀라노 경찰에 고발한 사람이 바로 그의 형 아스카니오라는 점이었다. ~~~
네 형은 네가 돌아온 것을 모를 거야. 피에트라네라 백작 부인이 그에게 말했다. ~~~유감이지만 임무를 수행해야겠습니다. 당신을 체포합니다. 파비오 콘티 장군. 젊은 사냥꾼으로 행세하던 파브리스는 중사가 자신을 장군이라고 부르자 짓궂게 놀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여보세요, 중사님. 그래 이 열여섯 살 난 아이가 중사님이 보기엔 콘티 장군으로 보이시나요? ~~~
파브리스는 체포되고 말 거야. 하며 그녀는 울었다. 한 번 감옥에 들어가면 언제 나올지 누가 알겠어! 이 아이의 아비는 자기 자식도 아니라고 할 거야! ~~~파브리스는 농부로 변장하고 마차를 빠져나와 도시를 벗어났다. 다음날 그는 국경도 문제 없이 통과했다. ~~
나는 조카 파브리스를 도와 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 여기 왔어요. 옛 친구에게 하는 이야기이니까 진실을 조금도 숨김없이 말하지요. 이제 열여섯 살하고 반년밖에 지나지 않은 조카가 가당찮은 바보짓을 저질렀어요. 우리들이 코모 호숫가 그리앙타 성관에 머물 때였지요. 어느날 저녁 7시경, 코모 호수에서 배가 한 척 와서는 나폴레옹 황제가 주앙만에 상륙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어요. 다음날 파브리스는 신분이 낮은 친구인 기압계 상인 바지에게서 여권을 얻어 프랑스로 떠났지요. ~~~그만 체포당하고 말았어요. ~~
파브리스는 정치적 음모를 꾸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다만 그는 나폴레옹을 사랑했다. 그리고 자신은 귀족이므로 다른 사람보다 더 행복해야 한다고 믿었고, 부르주아들을 하찮게 여겼다. 책이라고는 학교에 다닐 때 예수회 신부들이 편찬한 책을 읽었을 뿐이고, 이후로 단 한 권의 책도 펼쳐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로마니노에서 좀 떨어진 거리에 있는 화려한 저택에 거처를 정했다. ~~
[6장]
파브리스가 프랑스에서 돌아왔을 때 피아트라네라 백작부인의 눈에는 그가 마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잘생긴 외국인처럼 비쳤다. 만일 그가 사랑이라는 단어를 꺼냈더라면 그녀는 그를 사랑했을 것이다. ~~
이제 백작은 완전히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이미 백작부인의 생각도 사랑에 있어서 나이란 상대방이 사랑스러워 보이는 한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모스카는 급보를 받고 파르마로 돌아갔다. ~~~
백작부인은 그 많은 편지를 재미있게 써 보내는 사람을 자주 마음속에 떠올리기 시작했다. 편지를 받는 날은 즐거웠다. ~~~그의 편지는 파브리스가 없어 적적한 그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주는 것 같았다. 어쨌든 그녀는 백작의 열렬한 연정을 거절할 방법이 없었다. ~~~모스카 백작은 대신의 지위를 사임하고 밀라노나 혹은 다른 곳으로 가서 그녀와 함께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제안해 왔는데, 그것은 백작으로서도 자신의 본마음을 거의 드러내 보인 것이었다. 그리고 덧붙여 이렇게 써 보냈다. 제게는 40만 프랑의 재산이 있습니다. 그러니 1만 5000프랑의 연수입이 보장되는 셈이지요. ~~
밀라노로 다시 와서 부인은 어느 날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당신을 열렬히 사랑한다고 맹세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 될 거예요. 서른 살이 넘은 지금까지 예전 스물두 살 시절에 사랑했듯이 사랑할 수 있다면 너무나 행복하겠지요! 하지만 저는 영원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너무나 많이 보았지요. ~~~
만약에 파브리스가 그녀의 마음을 원했더라면 아마도 그녀는 자신의 온 마음을 그에게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파브리스는 모스카 백작이 보기에는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
말씀 드리지요.파르마에는 부인 가문에서 배출한 대주교가 세 명 있습니다. 그유명한 책을 저술한 아스카니오 델 동고, 1699년에는 파브리스 델 동고, 그리고 또 한 사람의 아스카니오가 1740년에 대주교를 지냈지요. 혹시 우리의 파브리스도 고위 성직자가 되어 덕행으로 이름을 떨치게 하고 싶으시다면 내게 생각이 있는데, 그를 우선 다른 곳의 주교로 앚혔다가 곧 이곳의 대주교로 데려오는 겁니다. ~~
공작부인은 한 달을 끌며 차분히 생각해 보았다. ~~~~내 말을 받아들이신다면 파브리스를 나폴리로 보내 한 3년 정도 신학 공부를 시키세요. ~~~파브리스는 공작부인이 자신을 위해 마련한 계획을 듣고 몹시 감격했으나 곧 이어 고민에 빠졌다. 언제나 그의 희망은 워털루 사건이 해결되기만 하면 즉시 군인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
어느 목요일, 비가 뿌리는 쌀쌀한 날이었다. 저녁 무렵부터 마차들이 산세베리나 부인의 저택을 향해 궁정 앞 광장의 포도를 울리며 지나가는 소리가 대공의 귀에까지 쉴 새 없이 들려왔다. ~~
[7장]
그로부터 계속된 4년간의 이야기~~~ 델 동고 후작부인은 매년 봄이면 딸들을 데리고 산세베리나 저택이나 포 강 기슭의 사카 영지로 와서 두 달 가량 머물곤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들은 매우 다정하게 지냈으며 함께 파브리스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백작은 파브리스가 파르마를 찾아오는 것은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공작부인과 수상이 파브리스가 저지른 몇 가지 경솔한 행동의 뒷감당을 해야 했으나, 그래도 대체로 파브리스는 지시받은 대로 신중히 처신했다. 그리고 출세를 위해 오직 자신의 재능에만 의지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신학이나 공부하는 대귀족으로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폴리에서 그는 고대 연구에 꽤 심취해서 발굴 현장을 쫓아다녔다. ~~~1821년 파브리스는 모든 시험을 그럭저럭 치렀고, 그의 학습 감독관 혹은 가정교사라고 해야 할 자 역시 십자훈장과 포상을 받았다. 그런 다음 마침내 파브리스는 마음속으로 종종 그려보던 파르마를 향해 출발했다. ~~~
성 요한 성당 앞에서 마차를 멈추었다. ~~~그는 조상의 무덤 앞에서 기도한 후 공작부인의 저택까지 걸어서 갔다. 부인은 그가 며칠 후에나 도착하리라고 생각했다. 마침 거실에는 많은 방문객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곧 자리에서 일어섰고, 이윽고 그녀 혼자만 남았다. 자! 내가오니까 기쁘세요? 그는 부인의 품안으로 뛰어들며 말했다. 고모 덕분에 4년 동안 나폴리에서 정말 즐겁게 보냈어요. ~~~
공작부인은 놀라서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거리에서 마주쳤더라면 그녀는 파브리스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파브리스가 도착한 지 한 시간도 채 안돼서 모스카 백작이 찾아왔다. 백작은 너무 일찍 찾아온 셈이었다. 이 젊은이는 수상에게 감사의 말을 유려하게 늘어놓았다. ~~~조카님은 당신이 장차 그에게 마련해 주려 하는 모든 위엄 있는 자리를 능숙하게 감당해 낼 겁니다. ~~~그러나 파브리스가 마음에 들어 그의 거동이며 몸짓만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백작이 공작부인을 향해 얼굴을 돌렸을 때, 그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기묘한 열기를 띤 부인의 눈빛이었다. 이 청년이 심상치 않은 인상을 주었나보군.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러한 생각이 들자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백작은 이미 쉰 살에 접어든 나이였다. 이 말은 참으로 잔인한 것으로, 아마 미친 듯한 사랑에 빠져본 사람만이 이 말이 얼마나 가슴을 아프게 하는지 알 것이다. ~~~
파브리스가 오자 공작부인은 너무나 행복에 취한 나머지 자신의 눈빛이 백작에게 어떤 생각을 불러일으킬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 대공은 생각했다. 악더귀처럼 만만찮은 녀석이로군 정말 잘 훈련된 매 같아. 산세베리나 부인의 기질 그대로야. ~~
파브리스는 궁정에서의 알현으로 아주 신경이 곤두서서 돌아왔다. 그는 고모에게 대공이 자신에게 던진 곱지 않은 질문들을 이야기했다. 부인이 말했다. 지금 곧 이곳 파르마의 고결한 대주교 란드리아니 신부를 찾아가야 한다. ~~~
아마도 그녀는 그 청년을 멀리하게 될 거고(백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되면 거의 내가 이긴 것이나 다름없지. 비록 당장 그녀가 토라질지라도 다시 마음을 돌려놓을 수는 있을 거야... ~~~그녀는 그를 15년 전부터 아들처럼 사랑했어. 바로 그 점에 내 모든 희망이 걸려 있었는데, 그녀가 조카를 아들처럼 여긴다는 것 말이야... 하지만 그녀는 조카가 워털루를 향해 떠난 이후로 볼 틈이 없었지. 이제 나폴리에서 돌아온 그는, 특히 그녀의 눈에는, 딴 남자가 되어 있단 말이지. 그러면서 백작은 전혀 딴 남자라는 말을 분노에 차서 되풀이 했다. 그것도 매력적인 남자란 말이야. ~~~
잔인한 생각 하나가 마치 경련처럼 백작을 덮쳐왔다. 여기 그녀 앞에서 이 청년을 찌르고 나도 자살해 버릴까?
[8장]
그는 공작부인에게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녀를 향해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맹세한 것이다.~~~
얼마 전부터 파브리스는 다시 걷고 있었다. 뒤리니 반도라고 불리는, 호수를 향해 뻗어 내린 작은 언덕을 넘었다. 그러자 마침내 그리앙타의 종루가 눈에 들어왔다. 블라네스 신부와 함께 올라가 그토록 열심히 별을 관측하던 그 종루였다. ~~~그의 상념은 점차 다른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점성술이 어떤 실질적인 효용성이 있을까? 이 학문이 다른 학문들과 다를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점성술을 믿어서는 안 된다면, 그는 기분을 돌리기 위해 애써 생각을 모았다. ~~~
파브리스는 성당의 조그마한 뜰로 들어갔다. 낡은 종루 3층의 좁고 긴 창문에 블라네스 신부의 작은 초롱불이 밝혀져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두 손을 입에 대고 나직한 소리로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 휘파람 소리는 예전 그가 종루 관측소에 들어갈 때마다 허락을 청하던 소리였다. 곧이어 줄을 잡아당기는 소리가 연거푸 들렸다. 그 줄은 관측소 위에서 마래로 내려오는 수고 없이 종루 문의 빗장을 열수 있도록 장치해 둔 것이었다. 그는 감격해서 마음을 가누지 못한 채 정신없이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신부는 늘 있던 대로 나무의자에 앉아 벽에 걸린 사분의의 작은 망원경을 열중해서 들여다보고 있었다. 노인은 왼팔을 들어 관측을 방해하지 말라는 손짓을 했다. 잠시 후 그는 한 장의 놀이 카드 위에 숫자를 적어 넣고는 의자 위에 낮은 채로 몸을 돌려 우리 주인공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파브리스는 눈물을 쏟으며 그의 품안으로 뛰어들었다. 블레네스 신부야말로 그의 진정한 아버지였던 것이다.~~~
이제 내가 눈을 감을 때가 되었구나. 왜 그런 말씀을! 파브리스는 마음이 저려옴을 느끼면서 소리쳤다. 그래. 하고 신부는 근엄하게 그러나 조금도 슬픈 빛이 없이 말을 계속했다. 너를 만난 뒤, 다섯 달 반이나 여섯 달 반이 지나면 내 삶은 행복하게 끝을 맺고 스러지리라. 기름이 다한 작은 남폿불처럼 마지막 남은 한 두달 동안은 아마 말없이 지낼 것이다. 그런 후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되겠지. 그분이 보시기에 내가 그분이 맡기신 파수꾼의 임무를 잘 해냈다면 말이다.
너는 몹시 지친 데다가 마음의 동요를 겪은 뒤니까 좀 자두고 싶을 테지. 네가 오기를 기다리면서부터 빵 한 조각과 브랜디 한 병을 기구 상자 속에 숨겨 두었다. 그것을 먹고 기운을 내어라. 기운을 내서 조금만 더 내 이야기를 들어다오. 날이 완전히 밝기 전까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네게 할 수 잇을 거다. 그 이야기는 내일보다는 지금 훨씬 분명히 생각해 낼 수 있거든. 왜냐하면 아가야, 우리는 언제나 약한 존재이고, 또 약하다는 점을 늘 염두에 두어야만 하니까 말이다. 내일이면 아마도 내 몸속에 있는 노인, 지상의 인간이 죽음을 맞을 준비로 바빠질 거야. 그리고 내일 밤 9시가 되면 너는 떠나야만 한다. 파브리스는 늘 그랬듯이 말없이 복종했다.
[9장]
한참 상념에 잠겨 있을 때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는 깜짝 놀라 현실로 돌아왔다. 둘러보니 헌병 네 명이 자신의 주위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몸에 성능 좋은 권총 두 자루를 지니고 있었는데. 식사를 하면서 이미 뇌관을 갈아 끼워두었었다. 그는 권총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그 미세한 소리를 눈치 챈 헌병 한 명이 경계심을 품었다. 그들은 곧 그를 붙잡을 자세를 취했다. ~~~이 헌병들은 그때 술집에서 손님들을 쫓아내기 위해 순찰을 돌고 있던 중이었다. ~~~좀 거나해진 상태였고~~~~파브리스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쏜살같이 달아났다.
[10장]
파브리스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큰길로 뛰어 나왔다. 룸바르디아에서 스위스로 통하는 그 길은 숲에서 1미터가량 더 낮았다. ~~~다음 날 파브리스는 파르마에 도착했다. 그는 여행 중에 있었던 모든 일을 언제나처럼 자세히 이야기해서 공작부인과 백작을 아주 즐겁게 했다. 그런데 그가 도착했을 때 산세베리나 저택의 문지기와 하인들이 전부 상복을 반듯하게 갖추어 입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돌아가셨나요? 그는 공작부인에게 물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내 남편으로 통하는 그 선량한 양반이 바텐에서 세상을 떠났단다. 그가 내게 이 저택을 물려주었어.
[11장]
대주교관을 나서자마자 파브리스는 마리에타의 집으로 달려갔다. 멀리서 질레티의 괄괄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 사내는 술을 받아다놓고 자기 친구들과 어울려 한바탕 먹고 마시는 중이었다. 무대 뒤에서 대사를 불러주는 사람과 조명용 양초의 심지를 자르는 이들이 그의 친구였다. 파브리스의 신호에 양어미 행세를 하는 할망구가 혼자 문을 열었다. 나리가 없는 사이에 새로운 일이 있었지요. 할멈이 큰소리로 말했다. 우리 배우 두세 명이 위대한 나폴레옹 축제날에 술을 마시고 떠들며 축하를 했다고 고발을 당했지 뭐요. 그리고 우리 불쌍한 극단은 급진파라는 누명을 쓰고 파르마 공국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우. 정말이지 나폴레옹 만세다!
☞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은 이탈리아에서 봉권 귀족 질서를 약화시키고 법과 행정개혁을 일으켰다. 그러나 1815년 워털루 전투 이후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유럽은 왕정 체제로 다시 돌아가게 되자 나폴레옹 지지자들에 대한 감시와 탄압이 나타났다. 급ㅈ니파는 왕정을 비판하는 자유주의자, 공화주의자들을 말하며 나폴레옹 지지자들이다. 스탕달은 이 장면을 통해서 당시 시대의 분위기를 소설 속에서 나타내고 있다. ”-편집자
난 고모를 더할 수 없이 헌신적인 우정으로 사랑합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사랑을 느낀다는 것이 불가능해요. 내가 고모에게 이렇게 말하면 그것은 결국, 당신이 날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만 주의하세요. 나는 당신의 사랑에 같은 방식으로 보답할 수 없느니까요. 라고 이야기를 하는 셈 아닌가? 만약 고모 마음에 연정이 숨어 있다면, 내가 그걸 눈치 챘다는 사실에 화를 낼 수도 있어. 그리고 나에 대한 마음이 아주 단순한 혈육의 정일뿐이라면 나의 뻔뻔스런 말에 몹시 분개할 거야... 그런 모욕이야말로 그 누구라도 용서하기 힘든 것이니까.
파브리스는 이런 심란한 생각에 깊이 빠져 마치 불행이 눈앞에 닥친 사람처럼 무겁고 진지한 태도가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거실을 이리저리 거닐고 있었다. 공작부인은 감탄하는 심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자신의 눈으로 태어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그 아이가 아니었다. 언제든지 자신의 말을 따를 태세를 갖추던 조카도 아니었다. 그는 한 사람의 듬직한 남자, 그로부터 사랑받는다면 행복할 것 같은 남자였다. 그녀는 앉아 있던 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품안에 열정적으로 몸을 던졌다. 너는 내게서 도망치려 하는 거지? 공작부인은 물었다. 아닙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그는 로마의 황제처럼 의젓했다. 다만 분별 있게 행동하려는 것입니다. ~~
바로 그때 백작(※모스카 백작으로 공작부인에게 애정을 갖고 있는 인물)의 마차가 저택 안뜰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백작이 거실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매우 흥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대주교가 오늘 대공 전하를 알현했지. 그에게는 목요일마다 알현이 허락되어 있거든. 대공이 내게 들려준 말에 따르면 대주교는 아주 서두르면서 이야기를 꺼냈는데, 그 이야기라는 것이 미리 외어 온 현학적인 내용이라서 처음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는 군. 마침내 란드리아니아 밝힌 본론이란, 파브리스 델 동고를 자신의 수석 보좌주교로 임명하고 그러다가 나중에 스물 네 살이 되면 대주교 계승권을 주는 일이 파르마 교회를 위해 긴요하다는 것이었어. ~~~
공작부인은 정신없이 기뻐하며 안가장을 읽었다. 한편 파브리스는 백작이 이 긴 이야기를 하는 동안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로부터 이틀 뒤 파브리스는 아침 일찍 콜로르노 맞은편에 위치한 상기냐에서 발굴작업을 감독하고 있었다. ~~~
화창한 날씨였다. 아침 6시쯤이었을 것이다. 파브리스는 빌려온 고물 단발총으로 종달새 몇 마리를 겨누어 쏘았다. 그중 한 마리가 맞아서 한길 위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쫓아가던 파브리스의 눈에 저 멀리, 파르마로부터 카살 마조레 국경 쪽으로 달려오는 마차가 보였다. 그가 소총에 탄환을 다시 장전하는 사이, 그 낡은 마차는 털털거리며 가까이 왔다. 마차 안에 앉아 있는 마리에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 양옆에는 그 키가 껑충하고 어설프게 생긴 질레-티와 그녀 양어미인 할멈이 앉아 있었다. ~~~
이 사내는 질레타의 친구였다. 다른 사람이 자기 친구의 여행 증명서를 지니고 다니는 것을 본 순간 그가 얼마나 놀랐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짐작될 것이다. 우선 떠오른 생각은 이 녀석을 체포해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을 해보니 파르마에서 무슨 좋지 못한 일을 저지른게 분명한 이 잘생긴 청년에게 질레티가 자기 여행증명서를 팔았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 자를 체포할 경우 질레티가 위험해진다. 국경 경찰을 생각했다.
[12장]
하숙집 주인인 유태인은 조심성 많은 외과의사 한 명을 불러왔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 집에서 나와 다시 도피를 시작했다. ~~
파브리스가 성당을 나온 것은 다음 날 하기로 마음먹은 고해의 준비까지 마친 후였다. ~~~폭풍우가 한바탕 몰아친 후 하늘이 더 맑아지듯이 파브리스의 마음도 평온하고 행복하여 마치 새로 태어난 것 같았다.
[13장]
그 무렵 파르마에는 북부출신의 학자 한 명이 중세의 역사에 대한 책을 쓰기 위해 머물고 있었다. ~~~모스카 백작은 그에게 가능한 한 최대의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
붉은 머리를 덥수룩하게 늘어뜨린 이 학자는 파브리스가 납치되어 행렬 소동을 벌이던 날 밤, 자신의 숙소 근처에서 볼품없는 복숭아 한 개에 2수우를 내놓으라는 여인숙 하녀에게 울화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는 하녀를 혼내 주려고 호주머니에서 작은 권총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 몸에 권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중대한 죄였기 때문에 그만 체포되고 말았다.
이 성마른 학자는 키가 크고 마른 체구였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 모스카 백작은 이자가 바로 M 백작에게서 파우스타를 빼앗으려다 놀림감이 된 그 무모한 인물이라고 둘러댈 계책을 세웠다. 권총을 몸에 지니는 일은 파르마에서는 3년간의 징역형에 처해진다. 그러나 이 형벌은 좀처럼 시행되는 경우가 없었다. 이 학자가 감옥에 갇혀 지낸 15일 동안 한 명의 변호인이 그를 찾아왔다. 변호인은 권력을 잡고 있는 높은 사람들이 그들의 소심함 때문에 무기를 몰래 소지한 자들에게 얼마나 가혹한 벌을 내리는지를 이야기하며, 몹시도 겁을 주고 돌아갔다. ~~~
백작은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에 파르마 경찰이라고 자칭한 복면을 한 사내 여덟 명에 의해 납치되었다. ~~~다음 날 아침 6시경 M백작에게 식사가 나왔다. 잠시 후 감금되어 있던 방문이 열리고 여인숙의 안뜰로 인도되었다. ~~~M백작은그 위에 포도주와 브랜디 몇 병, 구너총 두 자루, 검과 사벨이 각각 두 자루, 그리고 종이와 잉크가 놓인 것을 보았다. 스무 명쯤 되는 농부가 마당을 향한 여인숙 창문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백작은 동정을 구하듯 그들을 향해 외쳤다. 나를 죽이려 한다! 사람 살려! ~~
마당 반대편 그곳에 있던 파브리스가 소리쳤다. 그의 옆에도 무기가 놓인 탁자가 있었다. 그는 웃옷을 벗을 채 검술 도장에서 사용하는 철망으로 된 마스크로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 너도 옆에 있는 마스크를 써라. 그리고 칼이든 권총이든 마음대로 집어 들고 이리로 나와. 어젯밤에 말했듯이 무기는 네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 파브리스가 말했다.
M백작은 수없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결투를 해야 하는 것이 도무지 마음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한편 파브리스로서는 비록 볼로냐에서 20킬로미터는 족히 떨어진 산속이라고는 해도 경찰이 들이닥치지나 않을까 걱정되었다. 다급해진 파브리스는 상대방에게 심한 모욕을 퍼부었고 마침내 M백작의 화를 돋워 내었다. 백작은 손에 칼을 쥐고 파브리스 쪽으로 다가섰다. 결투는 처음에는 아주 미적지근했다. ~~~
파브리스는 멋진 일격을 가해 그를 쓰러뜨렸다. 이 때문에 백작은 몇 달 동안이나 누워 있어야만 했다. 루도빅은 부상을 당한 그에게 응급 처치를 해주며 귀에다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이 결투를 경찰에 고발한다면 당신은 침대에서 또 한 번 칼을 맞을 거요. 파브리스는 피렌체로 달아났다. 블로냐에게는 주소를 알리지 않고 숨어 있었던 터라 공작부인의 질책이 가득 담긴 편지들을 피렌체에 와서야 비로소 받을 수 있었다.
부인은 그가 집에서 열린 음악회에 왔었으면서도 자신에게 말을 건네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용서할 수 없다고 썼다. 반면 모스카 백작의 편지는 파브리스를 기쁘게 했다. 그것은 솔직한 친밀감과 아주 고상한 감정들을 담고 있었다. ~~~
경찰의 수사는 공정했다. 경찰이 조사해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두 외국인이 서른 명 이상의 농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칼을 들고 결투를 벌였는데, 두 명 중 부상을 입은 편의 이름(M백작)만 밝혀졌다는 것이다. 싸움이 한참 진행된 뒤, 구경꾼들 틈에 끼어든 마을의 사제가 결투자들을 말리려 했으나 소용없었다고 했다. 조제프 보씨라는 이름은 어디에서도 드러나지 않았으므로 파브리스는 대답하게도 두 달도 지나지 않아 볼로냐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이 사랑이라 불리는 고귀한 감정을 영원히 알 수 없는 운명이라는 예감을 전보다 더욱 확고하게 믿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심정을 설명하는 긴 편지를 기꺼운 마음으로 공작부인에게 보냈다. 그는 고독한 생활에 싫증이 나서 백작과 고모와 어울려 즐기던 즐거운 야유회들을 간절히 그리워했다. 그들과 헤어진 후로는 사교 생활의 감미로움을 더 이상 누릴 수 없었던 것이다. 공작부인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토록 누려 보고자 했던 사랑에 대해서도, 파우스타라는 여인에 대해서도 나는 이제 아주 싫증이 났습니다. 비록 아직까지는 그 여자의 변덕에 호감을 잃진 않았습니다. 그 마음을 확실히 얻으러 78킬로미터 길을 달려갈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걱정은 하지 마세요. 고모가 염려하는 것처럼 그 여자가 대단한 갈채 속에 데뷔하는 모습을 보러 파리까지 뒤쫓아 가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 대신 고모와, 또 친구들에게 그토록 다정히 대해 주는 백작님과 더불어 하룻저녁을 보내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먼 길이라도 달려가련만....
[14장]
산세베리나 공작부인을 들어오시라 하게. 대공은 연극 대사를 외듯이 높은 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자, 이제 눈물이 시작되겠구나. 그는 마치 닥쳐올 광경에 미리 대비하려는 것처럼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공작부인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세련되고 매혹적이었다. ~~~전하께 여러 가지 일로 사과드리려 합니다. 부인은 우아하고 명랑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
공작부인, 좀 앉으시지요. 그는 손수, 아주 정중하게 의자를 앞으로 내밀었다. ~~~지난 5년 간 전하께서 제게 베풀어 주신 무한한 호의에 감사의 말씀을 올리지도 않고 이 나라를 떠날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갑작스럽게 떠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대공이 아주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공작부인이 대답했다. 오래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던 일입니다. 그러던 중에 몽시뇨르 델 동고를 모욕하는 일이 생겨, 내일이면 그에게 사형 아니면 징역형을 선고한다고 하므로 출발을 앞당기게 된 것입니다.
그럼 어디로 가실 작정이오? 글쎄요, 나폴리로 갈까 합니다. 부인은 몸을 일으키며 덧붙였다. 이제 그만 전하 앞에서 물러갈까 합니다. 지난 시간의 홍의에 진정 감사드립니다. ~~~ 하지만 공작부인, 그는 부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당신도 잘 아시겠지만, 과인은 언제나 당신을 사모해 왔소. 이 우정은 당신의 의사 여하에 따라 다른 이름의 것으로 바뀔 수도 있었소. 어쨌거나 살인이라는 죄는 저질러진 상황이오. 이건 부인할 수 없을 거요.~~~
이 말을 듣자 공작부인은 몸을 젖혔다. 짐짓 감추고 있던 공손한 태도와 예의 바른 세련된 외양까지도 순식간에 벗어 버렸다. 모욕을 당한 여인의 표정이 역력했다. ~~~불쾌한 표정으로 경멸감까지 내비치며 대공에게 쏘아붙였다.
저는 전하의 나라에서 영원히 떠나겠습니다. 제 조카와 다른 많은 이들을 사형대로 몰아간 그 검찰 라씨를 비롯해서 그밖의 뻔뻔스런 살인자들의 이름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
대공은 생각했다. 정말이지 아름다운 여자다! 이런 경탄할 만한 여인에게는 다소 눈감아주지 않을 수 없지. 온 이탈리아 안을 다 찾아본다 해도 이런 여인은 아마 다시 없을 테니까.... 그렇지! 좀 더 꼼꼼하게 일을 꾸며 본다면 장차 이 여인을 내 애인으로 삼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이 여자와 비교할 때 인형에 불과한 그 발비 후작부인은 한참 멀었어. ~~~
그렇다면 그대가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되겠소? 전하께서는 하실 수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부인의 어조에는 지극히 신랄한 조롱과 노골적인 경멸이 담겨 있었다. ~~~이 여자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내 의무다. ~~~~그는 문으로부터 부인을 가로막아 섰다. 조금 후 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떤 놈이야! 대공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가엾은 퐁타나 장군이 너무 당황한 나머지 창백해진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숨을 거둘 듯한 사람처럼 우물우물 잘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모스카 백작 각하께서 뵈기를 청한다는 내용이었다. 들어오라고 해! 대공이 고함치듯 말했다. ~~~
저 여자는 나폴리에 가서 자기 조카인 파브리스와 함께 얼마나 나를 조롱할 것인가. 파르마의 대단치 않은 군주가 대단한 화를 내더라고 말이야. 대공은 공작부인을 바라보았다. 격렬한 멸시와 분노가 그녀의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눈은 모스카 백작에게 뚫어질 듯 고정되어 있었고 그 아름다운 입술의 섬세한 윤곽에는 더할 수 없이 매서운 경멸이 드러나 있었다. ~~~
백작은 사랑에 빠져 있었다. 그는 속으로 이렇게 되뇌고 있었다. 공작부인이 떠난다면 나도 따라가리라. ~~~
공작부인, 그대의 이 느닷없는 결심을 돌이키게 하자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사실 저도 모르겠습니다. 공작부인은 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대공은 위엄과 침착성을 보이며 w마시 침묵을 지키다가 백작에게 말을 건넸다. 이 아름다운 친구 분께서 지나치게 흥분하신 것 같소. 이유야 간단하지. 자기 조카를 끔찍이도 사랑하니까.~~~
공작부인은 이미 냉정을 되찾아 앞뒤를 재어 생각을 해 둔 터였다. 그녀는 확고한 어조로 느릿느릿, 마치 최후통첩이라도 하듯이 말했다. 전하께서 자비로운 편지 한 장만 써 주시면 됩니다. 어떻게 써야 할지는 잘 아시겠지요. 파르마 대주교 예하의 수석 보좌주교인 파브리스 델 동고가 죄를 지었다는 것은 결코 믿을 수 없으므로 판결문이 제출된다 하더라도 결코 서명하지 않으리라고 써 주십시오. ~~~
결국 공작부인이 요청한 그 자비로운 편지를 쓰라는 명이 모스카 백작에게 내려졌다. 그런데 모스카 백작은 명령서를 쓰면서 마지막 문장 하나를 빼 버렸다. 그것은 금번의 부당한 소송은 앞으로도 아무런 효력을 갖지 못한다라는 구절이었다. ~~~백작은 자신이 섬기는 군주가 명령서의 날짜를 지우고 다음 날로 고쳐 다시 써 넣는 것을 보았다. 괘종시계를 쳐다보니 시곗바늘이 거의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
집으로 돌아오자 공작부인은 방문을 닫고, 아무도 만나지 않겠으니 백작이 왔다해도 거절하라고 일렀다.~~~조금 후 부인은 대기실로 갔다. 군주(이탈리아에서는 이렇게 부른다)께서는 내 조카의 판결문에 서명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어요. 그래서 나는 출발을 미루려고 합니다. 나의 적들이 이미 이렇게 결정된 일을 다시 뒤집어 놓을 만한 역량이 있는지는 두고 봅시다. ~~~
부인은 마부 한 명을 손짓해 불렀다. 그녀의 뒤를 따라간 이 마부는 예전에는 밀수를 하다가 지금은 충실하게 주인을 섬기고 있었다. 부유한 농부인 양 차려입고 아무도 모르게 파르마를 빠져나갈 수 있겠지? 세디올라 한 대를 세내 되도록 빨리 볼로냐로 가거라. 볼로냐에 도착하면 그냥 산책 나온 사람으로 가장하고 피렌체 쪽 성문으로 들어가라. 그리고 펠리그리노 여관으로 가서 거기에 머물고 있는 파브리스에게 꾸러미 하나를 전하거라. ~~~
공작부인이 파브리스에게 보내려는 것은 대공이 라베르시 후작 부인에게 쓴 명령장의 사본이었다. 그녀는 파브리스에게 이 즐거운 소식을 전해 주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
대공이 말했다. 지금 부르는 말을 받아써라. 전하께서는 죄인의 모친인 델 동고 후작부인과 고모 산세베리나 공작부인의 애절한 탄원을 어진 마음으로 받아주셨다. 범행 당시 죄인이 아주 어린 나이였고, 또한 피해자 질레티의 아내에 대한 미친 듯한 연정으로 제 정신이 아니었다고 하니, 이런 종류의 살인죄는 극히 가증스러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탄원을 참작하여 피브리스 델 동고에게 언도된 형을 20년의 금고형으로 감형하는 바이다. (제 1권 end)
☞리뷰는 2권에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