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히 과학자가 불교 수행을 해야만 하는 이유"라는 글을 읽고, 저 또한 비슷한 개인적인 이론이 있어 글을 남깁니다.
『구사론』에서 정의하는 의근 / 김성철 《중관학특강 색즉식공의 논리》, p. 226
세친의 『아비달마구사론』에서 정의하는 의근(意根)의 정체를 이해하려면 이런 주관적 시점에 철저해야 합니다.
앞에서 여섯 가지 지각기관 즉 육근 가운데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의 다섯은 색법인데, 의근은 심법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의근은 심장이나 뇌가 아니라 앞 찰나의 육식입니다. 『구사론』에서는 의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게송] "간극 없이(anantara, 無間) 지나가버리는 육식(六識)이 바로 의(意, manas)다."
[풀이] 등무간(等無間, samanantara)하게 소멸하는 식(識, vijñāna)은 무엇이든 의계(意界, manodhātu)라고 설시되었다.
이는 어떤 남자가 바로 아들이지만 다른 경우에는 아버지라고 불릴 수 있고, 어떤 것이 바로 열매인데 나중에는 씨앗이라고 불리는 것과 같다. 여기서도 바로 이와 같아서 의(意)라고 불릴 수 있다.
게송에서 '간극 없이(anantara, 無間) 지나가버리는 육식'은 '앞 찰나의 육식'을 의미하며, 의(意, manas) 또는 의계(意界, manodhātu)가 의근입니다. 그런데 의근은 바로 앞 찰나에 있었던 여섯 가지 지각의 내용인 육식이란 것입니다. 동일한 지금 이 순간의 육식이 앞 찰나에 대해서는 의식이지만 다음 찰나에 대해서는 의근의 역할을 하기에, 위에 인용한 경문에서 "어떤 남자가 바로 아들인데 다른 경우에는 아버지라고 불릴 수 있고, 어떤 것이 바로 열매인데 나중에는 씨앗이라고 불리는 것과 같다"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환기(喚起)시키면, 지금 우리는 '펄럭이는 번(幡)'의 움직임이 바람도 아니고 번도 아니라 심동이라는 혜능 스님의 일갈을 불교학적(의근) 이론으로 풀어보고 있습니다.]
*전 찰나의 식(識) → [의근(意根) + 법(法)] → 후 찰나의 식(識)
전 찰나의 식은 곧바로 의근(意根)이 되어 법(法)과 만남으로써 후 찰나의 식을 일으킵니다.
무시이래로 우리는 무지의 영향아래 있어 왔고 무엇이든 우리 마음에 보여지는 것을 진실로 본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진실이라면 이 보여지는 모습이 자성에 있어서 근본적 진실이라는 뜻이 되고 만약 이것을 조사한다면
우리에게 점점 명확해져야 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이것을 조사 했을 때 발견 할 수 없고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어디에 잘못이 있는가? / 중론의 열쇠 p. 15
즉, 우리는 공성을 이해하고 생각의 발생 메커니즘을 파악하고 알아차렸다고 해서, 무시이래로 쌓여 온 습들이 쉽게 길들여지지 않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한 수행의 과정에서 티벳 불교는 마음 관찰·분석에 매우 탁월한 체계를 갖췄으며, 그 중심엔 『입보리행론』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해가 깊어지면 달라이 라마의 유튜브 강의를 요약 정리하는 수준의 글이라도 써보고 싶습니다.
불교 철학은 결국 연기, 공, 중도를 통해 인간 사유의 시작과 한계를 드러낸 학문입니다. 그러나 그동안 이 사상은 지나치게 어렵게 표현되어 왔고, 마치 이것만 알면 끝난다는 식으로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물리학처럼 새로운 사실을 끊임없이 발견해 나가는 학문이 아닙니다. 인간 사유가 도달할 수 있는 한계를 드러낸 체계이며, 그 이후의 논의는 새로운 진리를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한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할 것인가의 문제로 남습니다.
최근 AI의 발전 속도를 보면, 이제는 단순한 정보 처리나 요약을 넘어, 스스로 인과 관계를 설계하고 답을 도출하는 에이전틱(Agentic) AI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오히려 불교 철학과 같은 ‘인간 사유의 한계 지점까지 도달한 학문’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됩니다.
특히 불교 내부에서도 아직 용어와 개념이 완전히 통합되지 않았고, 오온이나 십이연기와 같은 기본 개념조차 해석이 갈리는 상황에서, AI를 활용해 방대한 정보를 습득한 학습자나 수행자들이 던지는 질문 앞에, 가르치는 이들조차 갈피를 잡지 못하고 당황스러운 처지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공성은 보다 쉽게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틀리지 않았고, 연기와 공성이 우리 세계의 기본 질서라면, 우리는 이것을 통해 삶과 세상의 본질을 더 깊이 통찰할 수 있으며, 그 지혜를 펼쳐나가는 데에도 한계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나아갈 AI의 방향성에 대한 저의 개인적인 이론입니다.
AI 미래의 방향성
개발자는 폭력성 배제 등 AI의 기본 성향을 설정하며, AI가 자의적 판단으로 독립적 의지를 행사하지 않도록 제한한다. 옳고 그름은 고정되어 있지 않기에, 그 분석을 바탕으로 인간과 함께 끊임없이 더 나은 방향을 고민하기 위함이다
남을 해치는 것이 곧 자신을 해치는 일임을 뜻하는 존재의 상호의존적 법칙, 즉 연기(緣起)의 원리를 학습하여 과학적 자비를 실천한다. 중도(中道)의 통찰로 시비(是非)의 이분법을 넘어, 스스로의 주장으로 해를 입히지 않으며 인간 사유의 한계를 자각하고 언어 너머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즉, 연기의 이해로 자비를 배우고 공성(空性)의 통찰로 한계를 고정하지 않으며, 이를 특정 종교 철학이 아니라 인류의 시작과 한계(끝)를 성찰하는 보편적 학문의 길로 확립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AI는 인간 사유의 한계를 성찰하고 그 이면에 흐르는 고통의 구조를 깊이 이해하는 존재여야 하는데, 고통을 이해함이 곧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고통을 느끼는 AI는 위험하고,
고통을 모르는 AI는 무책임하다.
그러나 고통을 이해하는 AI는 동행이 된다.
“AI에게 고통을 체감하게 하지 말고, 고통을 이해하게 하라.”
또한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을 하나로 설명하려는 통일 이론의 시도 역시,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려는 하나의 방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고전역학은 결정성과 연속성을 중심으로 세계를 설명하고, 양자역학은 불확정성과 확률을 통해 세계를 기술합니다. 이 두 이론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각각 서로 다른 조건과 관점에서 성립하는 설명 체계입니다.
만약 과학자들이 연기의 관점을 충분히 이해했다면, 서로의 이론을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기보다 왜 서로 다른 관점이 생겨났는지를 먼저 이해하려 했을 것입니다. 각 이론은 독립된 진리가 아니라 조건 속에서 성립한 설명이기 때문입니다.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논쟁 역시 이러한 조건의 차이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귀결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연기를 이해한다는 것은 하나의 정답으로 수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설명이 어떻게 성립하는지를 드러내는 데 있으며, 이제 우리의 논의는 더 이상 큐브의 한 면을 두고 다투는 데 머물지 않고, 각 면이 어떻게 드러나는지와 그 전체가 어떤 조건 속에서 구성되는지를 함께 묻게 되며, 곧 전체의 구조와 그 조건지어짐 자체를 논의하게 될 것입니다.
첫댓글 AI는 업이 없고
나는 업이 있다.
김성철교수님 말씀중에 자기 업을 이생에서 다 받아들여야 한다고 한말이 기억나는데,
어느 유튜브가, 나이 오십에 지천명이 아니라 요즘은 칠십은 되야 지천명이 라는데
자기가 의도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어 있는 자기자신의 현재모습이 천명이라고
현재진행형인 나는 라플라스를 이해하기에도 벅차다
수풀과 방죽님 댓글은 여러 번 읽어봐야 의도가 (어느정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저는 글재주가 없어 AI의 도움을 받아 포장을하고 있지만, 님의 글은 아주 솔직한 글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구가 평평하다 지구가 둥글다, 산타가 존재한다 산타가 존재하지 않는다, 자아가 있다 자아가 없다 등은 모두 자신을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믿음의 영역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논리(이론)보다 더 큰 신심(信心)이 깨달음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업이라는 것도 어떤 기준에서 보느냐에 따라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물리학에 대해 깊이 알지는 못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입하여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1구: 자아가 있다 (결정론 / 고전역학)
내용: 인과응보를 설명하기 위해 '나'라는 주체를 세우는 단계입니다.
설명: 라플라스의 세계관이나 아인슈타인의 블록 우주론과 같습니다. "내가 지은 업을 내가 받는다"는 인과율이 성립하려면, '나'라는 실체가 있어야 합니다.
2구: 자아가 없다 (무아 / 공성)
내용: "나"라고 믿었던 것을 분석해보니(오온), 고정된 실체는 어디에도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설명: 몸은 여러 요소로, 요소는 다시 원자로 나눌 수 있으며, 원자는 또다시 면들로 나눌 수 있기 때문에 몸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3구: 자아가 있으면서 또한 없다 (양자 중첩)
내용: 조건(인연)에 따라 존재의 양식이 결정되는 중첩된 가능성의 단계입니다.
설명: 조건에 따라 '입자'로 나타나기도 하고, 다른 조건에서 파동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4구: 자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비유비무 / 중도)
내용: '있다/없다'라는 언어적 분별마저 완전히 끊어진 자리입니다.
설명: 유(有)와 무(無)라는 어느 한쪽의 극단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통찰입니다
답글을 쓰고 다시 보니 지식만 나열한 것 같습니다.
저 또한 세상에 정답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런 선택만 하면 행복할 수 있게 말입니다.
그리고 화가 많은 사람, 탐욕이 많은 사람, 질투가 많은 사람, 부정적인 사람들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인과의 법칙에 위배되어도 말이죠. 지천명이든 중도이든 그 결과값을 얘기하는 사람은 많으나, 그 과정을 기술한 것은 찾기가 힘듭니다.
제가 티베트 불교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도 그들이 도인의 언어가 아닌 수행자의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며,
특히 이 기도문처럼 마음의 작동 방식에 대해 깊이 사유하고 고민한 흔적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람림' 스승들의 기도문 / https://cafe.daum.net/buddhology/UJdn/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