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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미스를 보안하는 뜻에서 두편을 함께 보냅니다.
[列國誌]
3부 일통 천하 (35)
제11권 또 다른 난세
제 4장 병법가 오기(吳起) (10)
이 무렵, 남방 대국 초(楚)나라는 춘추시대의 강성함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남으로는 오(吳)나라를 멸망 시킨 월(越)나라의 견제를 받았고, 북으로는 진(秦), 한(韓)나라의 눈치를 봐야 하는 실정이었다.
초(楚)나라가 이렇듯 약소국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하게 된 까닭은 왕족과 공신의 후손들이 지나치게 많은 땅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입이 부족한 왕실로서는 자연 큰 힘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당시 초나라의 왕은 초도왕(楚悼王)이었다.
초도왕은 그 전부터 오기의 능력과 명성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는 오기(吳起)가 자기 나라로 망명해오자 크게 기뻐했다.
그의 능력을 이용하여 왕실의 권한을 높이고 초(楚)나라의 옛 영화를 되찾으리라는 야심을 품었다.
처음 초도왕(楚悼王)은 오기를 객경으로 대우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영윤(令尹)으로 삼아 나라의 모든 살림살이를 맡겼다.
영윤이라면 재상을 말함이다.
오기(吳起)는 감개무량했다.
'마침내 재상에 올랐다.‘
고향을 도망쳐 나올 때 소매를 붙드는 어머니에게 그는 이렇게 맹세한 바 있었다.
- 재상의 수레를 타지 않고서는 결코 집으로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그 꿈을 이룬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재상 수레를 타고 찾아갈 집이 없어진 것이다.
'내가 묻힐 곳은 초(楚)나라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감격을 정리했다.
영윤에 오른 오기(吳起)는 초도왕의 뜻에 부합하여 초(楚)나라를 중원 최고의 강대국으로 끌어 올리리라 결심했다.
그렇게 할 자신감도 있었다.
'개혁만이 초나라를 강하게 하는 길이다.'
그날부터 오기(吳起)는 개혁안을 입안하기 시작했다.
초도왕에게 수시로 개혁 정책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 강한 군대를 기르기 위해서는 먼저 재물부터 쌓아두어야 합니다.
재물을 쌓기 위해서는 왕실의 땅이 많아야 합니다.
- 그런데 지금 초(楚)나라 땅은 어떠합니까?
왕족과 공신의 후예랍시고 그들이 좋은 땅을 모두 차지하고 있으며, 나라를 위해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반면 군대의 가장 중추인 군사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있습니다.
이런 군사들이 나라를 위해 어찌 목숨을 바치겠습니까?
- 우선 조정의 관리를 대폭 정리하고 모든 귀족의 땅을 몰수하여 왕실의 재정을 튼튼히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초(楚)나라는 이 난세에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초도왕(楚悼王)은 오기가 입안한 개혁 정책을 조정에 내놓았다.
그때부터 초(楚)나라 조정은 시끄러웠다.
수구(守舊)세력들이 일제히 반대 기치를 들고 일어선 것이다.
"만고(萬古)에 이런 법은 없습니다."
"공신의 땅을 빼앗으면 누가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우려 들겠습니까?“
"오기(吳起)의 정책은 현실을 무시한 이론일 뿐입니다.“
그러나 초도왕(楚悼王)은 그들의 거센 반대를 물리치고 개혁 정치를 단행했다.
오기(吳起)가 입안한 정책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반드시 필요한 관직 외에는 모두 폐쇄한다.
기존의 불필요한 관리 역시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다 면직(免職)시킨다.
- 비록 대신의 자제라 할지라도 권세를 등에 업고 국록(國祿)을 먹는 자는 발각 즉시 엄벌에 처한다.
- 왕족이건 공신의 자제건 오대(五代) 자손 이하는 각기 자기 힘으로 벌어 먹어야 하며 일반 백성들과 똑같이 취급한다.
- 다만 오대 자손까지는 촌수(寸數)에 따라 적당히 대우한다.
새 법령이 실시되자 수백만 석의 국록(國祿)이 왕실과 조정의 세입으로 들어왔다.
국고는 언제나 곡식과 비단과 황금으로 가득 찼다.
이어 오기(吳起)는 전국에 방을 붙여 씩씩하고 용맹한 자들을 군사로 뽑아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장수와 군사들의 급료를 몇 배씩 올려주었다.
무기와 병차와 전선도 무수히 제작했다,
모든 군사는 신명이 나서 다투듯 열심히 복무했다.
일년이 안돼 초(楚)나라는 막강한 정예군을 보유하게 되었다.
마침내 오기(吳起)는 군사를 일으켜 남쪽으로는 월(越)나라를 평정하고, 북쪽으로는 진(陳)과 채(蔡)나라의 잔류 세력을 완전히 흡수ㆍ합병하였다.
또한 한(韓)나라와 위(魏)나라의 침공 또한 격퇴 시켰다.
이로써 초나라는 완전히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옛 영화를 되찾았다.
초(楚)나라가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와 칠웅(七雄) 중의 하나로 자리를 굳힐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오기의 공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광은 짧은 것인가.
초도왕(楚悼王)이 재위 21년 만에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초도왕의 죽음에 초(楚)나라 왕실과 조정의 분위기는 급변했다.
초도왕 시절 국록과 땅을 몰수당했던 귀족과 대신과 그 자손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난 것이었다.
이를테면 훈구파(勳舊派)의 반란이었다.
초도왕의 시체를 염(殮)하기도 전의 일이었다.
물론 훈구파가 노리는 제거 대상은 영윤 오기였다.
초도왕의 죽음 소식을 듣고 궁으로 들어갔던 오기(吳起)는 국상(國喪)에 관한 일을 의논하던 중 훈구파의 반란 소식을 접했다.
근위군을 소집하여 대항하려고 했으나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반란군을 소탕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차례 궁중 전투를 벌인 끝에 패한 오기(吳起)는 몸을 돌려 궁중 침실로 도망쳤다.
왕궁은 반란군에 의해 점령 당했다.
대세 판단에 능한 오기(吳起)는 자기가 살아나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그는 순간적으로 한가지 결심을 했다.
'나는 오늘 죽는다. 그러나 그냥 죽을 수는 없다. 반드시 나를 죽인 자들에 대해 복수하겠다.'
오기(吳起)는 침실 안으로 들어가자 침상에 누워 있는 초도왕(楚悼王)의 시체를 끌어안았다.
반란군은 천하를 호령한 바 있는 오기의 위용에 눌려 침실 밖에서 활을 쏘았다.
수십 개의 화살이 침상 위로 쏟아졌다.
화살들은 초도왕의 시체와 그 위에 엎드려 있는 오기의 몸에 가서 꽂혔다.
오기(吳起)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마지막 힘을 다해 소리쳤다.
"세자시여, 나 오기(吳起)가 죽는 것은 아까울 것 없습니다.
그러나 신하의 신분으로 대왕의 시체에 화살을 쏘았으니 이는 대역죄에 해당합니다.
세자께서는 왕위에 오르시거든 이 대역 죄인들을 국법에 의해 처단하십시오.“
말을 마치자 오기는 초도왕(楚悼王)의 시체 곁에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초도왕의 뒤를 이어 세자 웅장(熊臧)이 왕위에 올랐다.
그가 초숙왕(楚肅王)이다.
초숙왕(楚肅王)은 훈구파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궁중에 숨어 있었다.
오기(吳起)가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왕위에 오른 지 한달 쯤 지나서 동생이자 영윤인 양부(良夫)에게 명했다.
"오기의 말이 옳다. 선왕의 시체에 활을 쏜 자들은 대역 죄인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을 모두 잡아 처단하라!"
영윤 양부(良夫)는 군사를 거느리고 한달 전 난을 일으켰던 훈구 세력의 주모자들을 색출하여 참수형에 처했다.
이리하여 오기(吳起)를 죽인 초(楚)나라 70여 공신 자손 집안은 모두 멸족을 당하고 말았다.
BC 381년(위무후 6년)의 일이었다.
어떤 이는 말한다.
오기(吳起)가 초도왕의 시체를 껴안아 역도(逆徒)의 화살을 그에게로 집중시킨 것은 참으로 현명한 계책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죽어서 자신의 원수를 갚을 수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이는 말한다.
오기(吳起)는 아내를 죽이고 어머니를 버린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소원인 재상에 오르기는 했으나,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결국 그는 초(楚)나라 사람의 손에 죽임을 당하지 않았는가.
그런 그를 과연 현명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오기에 대해 사마천(司馬遷)은 <사기>를 통해 다음과 같이 자신의 소감을 피력하고 있다.
옛말에 '실행이 능하다고 해서 꼭 말이 능한 것은 아니며, 말이 능하다고 해서 실행에 능한 것은 아니다' 라는 말이 있다.
오기는 위무후에게 지형의 험고함이 임금의 덕행만 못하다고 설득했으나, 그가 초(楚)나라에 와서 행한 일은 각박하고 몰인정하기 짝이 없었다.
그 때문에 목숨까지 잃었으니, 아아 슬픈 일이로다!
남에게 하는 말은 옳으나 자신이 행하는 바는 정반대였던 오기(吳起)에 대한 조소랄까 안타까움이 잘 드러나는 감상이다.
출세욕의 노예가 되어 어머니를 버리고 아내까지 죽인 끝에 일국의 재상에까지 오른 오기(吳起).
그러나 끝내 비참한 종말을 맞이한 그는 난세의 극치라 할 수 있는 전국시대(戰國時代)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인물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列國誌]
3부 일통 천하 (36)
제11권 또 다른 난세
제 5장 개혁 (1)
- 힘 있는 자의 시대!
도의와 인륜이 땅에 떨어진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사상 유례없는 혼란의 도가니로 치닫고 있었다.
그 선두 주자가 삼진 중의 하나인 위(魏)나라였고, 이어 초(楚)나라가 오기의 개혁정책에 힘입어 '전국칠웅'의 하나로 자리매김하였으며,
이에 질세라 한(韓)나라와 조(趙)나라도 신흥국답게 부국강병책을 실행하여 강국 반열에 올라섰다.
반면 춘추시대 때부터의 오랜 전통국들인 제(齊), 진(秦), 정(鄭), 노(魯), 위(衛), 연(燕), 송(宋)나라 등은 맥을 못 추었다.
모두가 과거의 인습에 얽매여 변화의 흐름을 읽지 못한 탓이었다.
이 중 동방의 대국으로 한 때 중원을 호령한 바 있던 제(齊)나라는 전화(田和)의 군위 찬탈 사건으로 인해 한층 더 혼란을 겪고 있었다.
한마디로, 역성(易姓) 쿠데타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강공(齊康公)을 내쫓고 스스로 제나라의 군위에 오른 전화, 즉 제태공(齊太公)은 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에 그 아들 오(午)가 군위에 오르니 그가 제환공이다.
춘추시대 강씨 성의 제환공과는 다른 인물인 그는 역시 오래 군위에 머물지 못했다.
6년 만에 제환공이 죽고 그 아들 전인(田因)이 제나라 군주에 올랐다.
그가 바로 제위왕(齊威王)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의 시호다.
'공(公)'에서 '왕(王)'으로 변해 있는 것이다.
그랬다.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이르러 여러 강대국들은 모두 왕호를 사용하게 되는데,
이 중 춘추시대부터 왕호를 사용한 초(楚)나라를 제외하고는 제(齊)나라와 위(魏)나라가 가장 먼저 왕호를 사용했다.
제나라와 위나라가 공호를 버리고 왕호를 쓰기 시작한 것은 BC 334년인 제선왕(齊宣王)과 위양왕(魏襄王) 때이다.
이들은 스스로 왕이라 칭하면서 그 아버지인 제위왕과 위혜왕에게도 왕호를 추존하였다.
그래서 제위왕(齊威王)과 위혜왕(魏惠王)은 살아생전에 왕호를 쓰지 않았으면서도 후세 사람들에게 '왕'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여기서는 편의상 처음부터 제위왕으로 표기하겠다.
앞서도 얘기했듯이, 제위왕(齊威王)이 군위에 올랐을 때 제나라는 한마디로 중원국들의 '밥'이었다.
여러 나라들이 앞다투어 제(齊)나라 땅을 침범했다.
심지어는 약소국인 노(魯)나라와 위(衛)나라의 공격을 받았다.
당시의 정황을 <사기(史記)>에서 인용해보자.
제위왕 원년, 삼진(三晉) 연합군이 제나라 상사(喪事)를 틈타 제나라 영구를 침공했다.
제위왕 6년, 노(魯)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하여 양관까지 쳐들어왔다.
제위왕 7년, 위(衛)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하여 설릉을 차지하였다.
제위왕 9년, 조(趙)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하여 견을 차지하였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유독 제위왕(齊威王) 대에 이르러 열국이 앞다투어 제(齊)나라를 노리고 공격했을까?
물론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전씨(田氏)가 군위를 찬탈한 이래 국내가 어지럽기도 하였지만,
제위왕(齊威王)은 즉위 이후 9년 동안 정사(政事)를 전혀 돌보지 않고 주색잡기와 음악에만 빠져 있었던 것이다.
나라 꼴은 당연히 말이 아니었고, 장수들은 의욕을 잃었으며, 군대는 약할 수밖에 없었다. 싸우기만 하면 졌다.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태공망(太公望) 이래 오랫동안 강국으로 지내온 전통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대로 가면 제(齊)나라는 멸망한다.‘
이런 위기의식이 제기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제나라 전통 귀족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당시 아무런 실권도 문벌도 없는 신흥 문사(文士)들에 의해서였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순우곤(淳于髠)과 추기(騶忌)였다.
<사기>에 보면 <골계열전(滑稽列傳)>이란 편이 나온다.
골계(滑稽)란 말을 잘하고 유창하여 막힘이 없다라는 뜻이다.
오늘날의 유머, 혹은 해학(諧謔)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그 <골계열전>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순우곤(淳于髡)은 제나라 사람의 데릴사위였다.
그는 키가 7척도 못 되었으나 익살스럽고 변설(辯舌)에 능했다.
어느 나라 태생인지는 모르겠으나 제(齊)나라로 오기 전에 어디에선가 학문을 공부했던 모양이다.
순우곤(淳于髡)은 지식이 꽤 높았고, 언변 또한 매우 날카롭고 풍자적이었다.
관직에 있는 문사(文士)들과 어울리는 중에 그 또한 자주 궁중을 출입하며 제위왕의 연회 자리에 참석하곤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순우곤(淳于髡)의 신분에 대해 얘기해 보아야겠다.
앞서 그를 제나라 사람의 '데릴사위'라고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적자(嫡子)가 없어 사위를 아들 대신 삼는 그런 데릴사위와는 유가 달랐다.
원문에는 '췌서(贅壻)' 라고 되어 있는데 그 뜻을 보면, '췌(贅)' 란 '쓸모없다'는 말이요, '서(壻)'는 사위다.
즉 '군더더기 사위' 라는 뜻이다.
주로 여비(女婢)의 남편을 그렇게 불렀다.
이로 볼 때 순우곤(淳于髡)은 한 여비의 남편으로 팔려왔을 가능성이 높다.
순우곤(淳于髡)이라는 이름만 보아도 그러하다.
순우는 성(姓)이고 이름은 곤(髡)인데, '곤'은 바로 '머리를 빡빡 깎은 사람'을 말함이다.
당시는 노예들의 머리를 깎게 했는데, 이로 미루어 짐작컨대 순우곤(淳于髡)은 노예 신분이 아니었을까?
어느 날이었다.
문사(文士)들이 모여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데 순우곤(淳于髡)이 끼여 들었다.
"그대들은 어찌하여 왕께 간(諫)하지 않는 것이오?“
문사들이 대답했다.
"왕께서는 자신에게 간(諫)하는 자가 있다면 참수형에 처하겠다고 엄명을 내리셨소. 그래서 뜻은 있으나 감히 아뢰지 못하는 것이오."
"그렇다면 내가 가서 한번 아뢰어 보겠소.“
"행여 그런 생각은 하지 마시오. 그대가 아무리 재치가 뛰어나다고 해도 자칫 잘못하면 목숨이 달아나는 일이오.
공연히 객기(客氣) 부리지 말고 가만히 있는 것이 좋을 것이오."
그러나 순우곤(淳于髡)은 문사들과 어울려 궁을 출입하다가 마침내 제위왕(齊威王)을 알현할 기회를 잡았다.
그는 술을 마시고 있는 제위왕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왕께서는 '은(隱)'을 좋아하십니까?“
'은'이란 은어(隱語)로, 빗대는 말이나 수수께끼를 말함이었다.
"좋아하오.“
"그렇다면 신이 수수께끼를 하나 내보겠습니다. 왕께서는 맞추어 보십시오.“
"말해 보오.“
"우리나라에 큰 새가 한 마리있는데, 뜰 안에 앉아 3년 동안 날지도 울지도 않습니다. 왕께서는 이것이 무슨 새인 줄 아십니까?"
이에 제위왕(齊威王)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그 새를 안다. 그 새는 3년 동안 날지 않았으나, 한 번 날면 하늘 높이 솟아 오를 것이며 한 번 울면 천하 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다.“
"맞았습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순우곤(淳于髡)은 절을 한 번 올리고 나서 제위왕 앞을 물러났다.
궁에서 나온 그는 문사들에게로 가 장담을 했다.
"이제 우리 왕께서는 정사(政事)를 펼칠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순우곤의 말을 믿지 않았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