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세븐 밸리 앞으로 지나가다가
양복 코너의 앞에 걸려있는 사진을 보고 깜짝 놀라서 가던 길 멈추고 사진에 몰입하였습니다.
멀리서 사진을 보면서 걸었는데
사진의 고정된 시선이 움직이는 나의 시선을 따라 계속 움직이는 묘한 마력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실험 삼아 다양한 각도에서 사진을 보았는데
어느 위치에서 보던지 사진의 시선과 나의 시선이 일치하였습니다.
가게 앞에 걸려 있는 다양한 사진은
어느 각도에서 바라보던지 보는 사람의 시선과 놀랍게도 일치 되었습니다.
사진 앞에서 열 명이 횡대로 서서 사진을 바라보아도
위치과 보는 각도와 상관없이 각자의 위치에서 고정된 사진의 시선과 일치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십 년이 넘도록 인물 사진을 찍었지만
동선의 시선을 가진 가게 앞의 사진 한 장에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가게 앞의 사진 한 장......
그냥 유명 연예인의 사진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방향, 어느 위치, 어느 각도에서 사진을 보던지......
사진의 시선과 항상 일치하여 지나가는 사람을 동선의 시선으로 끌어 들이는 홍보 효과로 탁월하였습니다.
어떤 장치가 있는가 유심히 살폈으나
몸의 방향과 얼굴의 방향과 시선의 각도가 절묘한 조합으로 만들어진 사진 예술의 극치였습니다.
사진의 절대 포즈가 일으키는 착시 현상은
상업적 홍보의 대세를 이루었습니다.
스틸 사진 한 장.....
보는 사람을 보는 절대 포즈의 사진 예술은
착시 현상으로 영상의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순간....불현듯 선택적 인지라는 복음의 착시 현상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온 몸의 소름이 돋고 전율이 일어 났습니다.
그 동안 한국의 교회는 복음의 착시 현상을 교회의 전통으로 붙들고
교권적 교조주의로 군림하였습니다.
복음의 본질을 착시 현상의 형식으로 담아 낸 것이
오늘날 소위 말하는 보수 신앙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착시 현상은 선택적 인지일 뿐......
복음의 본질이 아닙니다.
선택적 인지......
듣는 것만 듣고 보는 것만 보는 심리적 착시 현상입니다.
오늘날 보수 신앙의 전통으로 고착화된........
한국 교회 안에 팽배한 복음의 착시 현상은 무엇입니까?
예물로 드리는 헌금은 구약적 제물의 착시 현상입니다.
율법적 주일 성수는 안식일의 착시 현상입니다.
교회당의 성전 개념은 구약적 성전의 착시 현상입니다.
주일 예배는 성전 제사의 착시 현상입니다.
유아 세례는 할례의 착시 현상입니다.
예배당은 유대인 회당의 착시 현상입니다.
이렇게 보수적 신앙의 전통으로 고착화된 인지적 착시 현상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로서의 교회라는 본질을 잃어 버리고 교회의 사유화로 종교 집단이 되었습니다.
신약 성경에 나타난 초대 교회는
복음의 착시 현상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로 충만하였습니다.
공동체로 모일 때마다 연보로 드렸던 헌금은
구제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복음의 본질로 담았습니다.
안식 후 첫날에 모인 교회는 예수 부활의 증거를 나누며 사랑으로 믿음의 교제를 하며
영생의 부활에 대한 넘치는 소망으로 역동적인 교회 공동체를 형성하였습니다.
안식 후 첫날은 안식일의 계승이나 착시 현상이 아니라
부활 신앙으로 넘치는 탄성과 감격과 기쁨의 잔치요, 축제였습니다.
에클레시아로서의 교회는 예수님의 보혈과 부활을 성령으로 인침 받은 성도들이
서로의 믿음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유기체적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신약의 교회는 구약의 전통을 계승하거나 발전시킨 착시 현상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구원받는 새롭고 산 길의 하니님 보좌를 향하는 행렬,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구원의 감격과 은혜로 넘치는 성령의 역사로 믿음의 역사가 충만하였던 데살로니가 교회는
복음의 본질로 충만한 사도적 터 위에 세운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하기를
우리가 너희 모두를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살전1:2-7)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로 충만하였습니다.
또한 복음의 실상이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이루어졌으며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사도와 주를 본받은 자로 교회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고 탄성하였습니다.
환란 가운데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는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주의 강림에 대한 종말론적인 계시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주의 말씀이 샘솟는 믿음의 소문이 각 처에 퍼지는 은혜의 역사는
에스겔서의 성전 문지방에서 샘솟는 물이 동쪽으로 흐르다가 남쪽으로 흐르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꺾여
동쪽을 향한 바깥문으로 스며 나와 발목과 허리에 차오르고 물이 가득하여 강이 되어
바다에 이르는 실상과 흡사합니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에스겔서의 성전 문지방에서 샘솟는 물에 대한 계시는
요한 계시록으로 완성되었습니다.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계22:1-5)
데살로니가 교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성령의 기쁨으로 받는 교회로
복음이 진원지가 되어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참된 예수의 하나님 나라로 세워졌습니다.
복음의 착시 현상으로 교권과 교조주의로 군림하는 보수 신앙을 전통으로 사수하는 집단화된 한국 교회는
복음의 본질에 충실한 데살로니가 교회를 본받아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고 천하만민에게 그 복음을 전하는
참된 예수의 하나님 나라로 새롭게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사유화로 집단화된 한국 교회는 교권의 적폐로 이단과 사이비의 온상이 되었으며
삯꾼이 득실하는 이미테이션 교회의 정체성을 가졌습니다.
사유화로 집단화된 교회는 삯꾼의 패악질로 신도들은 종교 노예가 되어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는 믿음의 역사를 잃어 버렸습니다.
예배 드리면서도 야단 맞고, 봉사하면서도 야단 맞고, 기도 하면서도 야단 맞고
헌금 드리면서도 야단 맞고, 전도하면사도 야단 맞는 종교적 강요의 폭언과 폭력에 길들여졌습니다.
이렇게 종교 노예적 광신에 길들여져서
어느 때부턴가 이단이 되고 사이비가 되고 삯꾼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종교적 패악질의 강요에 의한 집단적 종교 생활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하고 진리의 자유로 넘치는 계시의 정신으로 온전한 깨어 근신하는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복음의 본질에 충실한 데살로니가 교회를 본받아 예수의 하나님 나라로 거듭나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고 믿음의 소문이 성전 문지방의 샘물이 되어
주의 날이 이를 떄까지 천하만민을 살리는 믿음의 역사로 충만하기를 충심으로 기도합니다.
복음의 착시 현상은 보수적 형식의 틀 뿐만 아니라
보편적 진리의 추구로 이어지는 보편적 구원과 신인합일 구원관 및 자아 주체적 인본주의 실존 등
기복과 무속의 현세적 신앙의 대세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 곧 성경의 복음적인 시선과 상관없이 보는 사람의 선택적 인지로 말미암는 착시 현상은
포스트 모던 사상과 다원주의 사상과 다양한 철학적 사조과 인문학 등의 발달과 그 영향으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의 사도와 선지자적 이해를 할 수 없는 혼돈의 미궁으로 빠졌습니다.
결국 성경의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복음의 착시 현상은 선택적 인지로 말미암는 기독교의 하나님은 교인 수 만큼 많은 다신교가 되었습니다.
다신교의 굴레가 된 기독교는 종교인 세금의 법제화로 국가와 정치인과 각종 언론으로부터
성직자로서 목사가 아니라 각종 이단과 사이비와 타종교와 똑같이 종교인으로 취급 받아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이제 한국 교회는 환란 가운데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믿음의 역사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이루어 성전 문지방의 솟는 샘으로
온 세상을 구원하는 종말론적인 사역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도 세상의 희망은
성경적인 참된 기독교 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