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도 뜨거웠던 여름을 보내며/이명철
더위에 지친 진초록의 산야가 아직도 푸른데, 벚나무 잎만은 노랗게 물들어 떨어지고 있다.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새벽산책길에 땀을 흘렸는데, 오늘 아침은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분다. 눈을 들어 모양성 장대봉을 바라본다. 흰 구름 높이 떠 한가롭다. 숲속에선 여름을 보내는 매미 소리 아스라이 숲속의 어둠을 털어내는 듯하다. 쑥국새는 무엇이 그리도 서러운지 구슬피 울어대고 있다.
‘가을은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 오고 하늘에서는 흰구름 타고 온다’는 옛사람들의 말 내 마음에 들어와 고정관념의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아 있는지 오래다. 그런데 올 여름은 그리도 허망하게 나의 고정관념을 무너뜨려버렸다. 그러고는 가을이 한창이어야 할 오늘(9.8) 아침에야 가을을 평년의 자리에 가져다 놓은 듯하였다.
지남 여름은 그랬다. 가을이 접어 든 입추도, 모기 입이 삐뚤어진다는 처서도, 흰 이슬 내린다는 백로도 모조리 무시되고 오직 지겨운 폭염만이 계속되었다.
그늘 밑은 이제 제법 시원하겠지 하며 산책길을 걷는다. 어제 밤 모양성의 배롱 꽃 떨어져 꽃길 펼쳐놓았다. 꽃잎을 밟고 지나가기가 내심 미안하다. 보내야하는 여름은 배롱 꽃 지는 그늘 밑에 쉬면서 더디 흘러가고, 그 흘러간 자리에 나의 주름살 하나 더 늘어간다.
바람 불지 않아도 꽃잎은 떨어지고 있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이 바람 때문이 아니라 세월에 편승한 계절이 품은 날짜 가는 것이란 걸 깨달아 간다. 내 인생 저물어 감도 풍상이 아니라 세월이라는 생각에 머물러서는 까닭 없이 서글퍼진다.
지난여름의 번뇌와 희망, 손자가 와서 농사를 짓는다고 머물러 있다. 손자가 하는 농사일은 나는 조금도 도움이 안 된다. 내가 농사일을 모르기도 하거니와 안다 하더라도 손자는 내 말을 받아드리지 않는다. 내가 한 말은 다 옛날 방식이라는 잔소리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하루에 두 끼만 먹는 식사도 나는 몹시 걱정스러운데, 손자는 그게 그들 세대에서는 극히 당연하다는 듯 말한다.
마음을 고쳐먹어본다.
손자가 할머니 할아버지 곁에 머물며 농사를 짓는다는 자체가 매우 고맙다. 아직 손자를 그렇게라도 돌볼 수 있음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고 편하게 생각해본다. 남들은 일 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하고, 그것도 손님처럼 왔다가 가버리는데, 우리는 사랑스러운 손자를 날마다 마주하며 사랑하고 있지 않은가.
아직 물들지 아니한 진초록 잎은 떠나지 못하는 여름에 미련이 남는 것일까. 하루에도 몇 번씩 ‘폭염주의보’라는 문자가 뜬다. 이대로 가다간 여름이 6개월 이상이 될 것이란 말도 심심치 않게 떠돈다. 그럴 때마다 만감이 교차한다. 그러한 생각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끊이지 않고 얽혀간다. 어떻게 풀어야 할까.
얽힌 생각에 현재의 생각이 머물지 않으면 곧 얽매임이 없는 것이라는데, 어떻게 거기에 머물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존재에 대한 진실한 관찰, 영원과 무상 사이, 모든 대상이 마음에 물들지 않는 것을 무념(無念)이라 했다. 어떻게 하면 대상에 마음이 물들지 않을 수 있을까. 마음의 밭에서 자라나는 잡초를 뽑아버리면 대상에 물들지 않을 것인가? 물들지 않기 위해서는 밖으로 상(相)을 떠나고 안으로는 어지럽지 않게 마음을 다스려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안으로 심성을 고르게 하고 밖으로 남을 공경하는 삶에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지난여름 나의 삶을 잠시 살펴본다. 나의 보잘 것 없는 삶이 교만의 허물을 범하지는 않았는가도 되돌아본다. 이러한 생활의 반복이 자랑일수 없듯 부끄러울 것도 없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공부가 생활의 일부라면, 읽고 생각하는 것도 반복되는 생활의 일부다. 생각만 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면, 또 실천하지도 못하였다면 그것은 오히려 스스로 생각에 얽히고 만 것이 될 뿐이다.
후회하지 말라했다. 후회를 너무 많이 하는 것도 망상이며 집착이다. 가는 여름에 망상과 집착을 실어 보내자. 또한 앎을 지혜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침묵만 지키는 어리석은 생활태도도 폭염과 함께 실어 보내자. 게으름을 부리며 문자만을 찾아 지혜로 대처하려고 하는 어리석은 짓도 버려야 한다.
꽃은 져도 아름답다. 꽃이 피고 지나, 세월이 오고 가나 마음 쓸 일 있는 나이는 이미 지났다. 다만 나의 근심은 생각이 얽힐까봐, 얽힌 생각을 풀지 못할까봐 그게 나는 가장 두렵다.
이제 가을의 문턱에 들어섰다. 다시 슬며시 도져오는 쓸쓸함. 내려놓고 잊어버리자.
모양성의 맥문동 꽃이 지면서 열매를 맺어간다. 매년 맥문동이 푸르게 가을과 겨울을 나는 자연의 지혜를 보아왔다.
나 역시 슬프고 괴로운 일들 조금은 잊어가며 폭염에 시달린 긴 여름을 보내고 신선한 새로운 가을을 맞이하는 지혜를 배워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