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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삼가해 무각스님 법문 (87)
【금강경】
須菩提야 如來가 說有我者는 卽非有我어늘 而凡夫之人이 以爲有我일새니 須菩提야
수보리 여래 설유아자 즉비유아 이범부지인 이위유아 수보리
凡夫者는 如來가 說卽非凡夫일새 是名凡夫니라
범부자 여래 설즉비범부 시명범부
<번역>
수보리야 여래가 설하되 아가 있다는 것은 곧 아가 있음이 아니거늘 범부들이 이를 아가 있다고 여기느니라. 수보리야, 범부라는 것도 여래가 설하되 곧 범부가 아니고 그 이름이 범부니라.
<해설> - 무각
내가 있다는 것은 곧 내가 있어서가 아니고 아직 깨닫지 못한 범부들이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我는 진리로서의 자신을 뜻합니다.
우리가 나라고 하는 것은 相(모습)으로 있는 나를 항상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說誼】
雖云有我나 我性이 本空이어늘 凡夫가 不知하야 以爲有我니라 雖曰凡夫나 凡夫相이
수운유아 아성 본공 범부 부지 이위유아 수왈범부 범부상
寂滅이니 凡夫相이 寂滅일새 故說非凡夫니라 又前念不覺을 名凡夫요 後念卽覺을
적멸 범부상 적멸 고설비범부 우전념불각 명범부 후념즉각
說非凡夫니라
설비범부
<번역>
비록 我가 있다고 말하나 我의 성품은 본래 空하거늘 범부들이 이를 알지 못하고 我가 있음을 삼느니라. 비록 범부라고 말하나 범부의 相도 적멸한 것이니 범부의 相이 적멸한 고로 범부가 아니라고 설하시니라. 또 앞생각이 깨닫지 못함을 법부라 하고 뒷생각이 곧 깨달음을 범부가 아니라고 설하시느니라.
<해설> - 무각
“비록 我가 있다고 말하나 我의 성품은 본래 空하거늘 범부들이 이를 알지 못하고 我가 있음을 삼느니라.”
나라는 성품은 본래 공하여 없는데, 범부들은 모습에 치우쳐서 이를 알지 못합니다. 고요히 앉아서 생각나기 이전 자리로 돌아가서 나라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옛날 큰 스님들은 참나의 본체는 텅비어 고요한 자리이기에 공적(空寂)하다 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그것이 나인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오온(五蘊)에 취착된 것을 나라고 믿기에 오온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비록 我가 있다고 말하나 我의 성품은 본래 空하거늘”이라 하여 나라는 성품이 공하다 했고, “범부들이 이를 알지 못하고 我가 있음을 삼느니라.”고 하여 깨닫지 못하는 범부들이 이것을 알지 못하고 내가 있다고 굳게 믿는다는 것입니다.
수 억겁을 살면서 육도를 윤회하는 동안 지금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서 자신을 인간이라고 하지만 축생이었을 때는 축생이 나라고 했을 겁니다. 다음에는 무엇으로 화해서 나툴지 모르기에 내가 이것이라고 고정되게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지금도 똑같습니다. 자식을 만나면 어머니가 되고, 남편을 만나면 아내가 되듯이, 상대에 따라 말과 행과 뜻이 바뀌므로 고정되지 않습니다.
나라는 것은 말(口)과 행(身)과 뜻(意)이라는 신구의(身口意)삼업으로 형성되는데, 이것이 상대에 따라 잠시도 고정될 수 없기에 無我이고 空합니다. 지금도 찰나찰나 바꿔서 악했다 착했다, 성(聖)스러웠다 속(俗)스러웠다, 똑똑했다 어리석었다 순간순간 바뀝니다.
원인이 있으므로 결과가 있듯이, 바뀌게 하는 원인인 근본 본체는 뭘까요? 어머니, 아내, 청신녀로 바꿔서 작용하게 하는 본체는 모습 지을 수도 없고 이름 지을 수도 없습니다. 이것을 본체나 본래부처라고 이름 지었지만, 이름일 뿐이므로 이름하여 본체(본래부처)라 합니다. 이렇게 無相하므로 無我라 하고 空이라 합니다.
작용으로 봐도 잠시도 머무르지 않고 계속 바뀝니다. 이걸 보면 이것이 되고 저걸 보면 저것과 관계된 내가 드러납니다. 즉 꽃을 보면 아름다운 마음을 일으키는 그것이 드러나고, 똥을 보면 더럽다는 그것이 드러나므로 대상에 따라 항상 바꿔서 작용합니다.
거울은 오는 대로 비추듯이 참마음은 거울과 같아서 경계가 오면 오는 대로 비춰서 응하기에, 자식이 오면 어머니로서 작용하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我의 성품은 본래 空하거늘”이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오온개공(五蘊皆空)’인데 범부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말뜻은 알지만 경계가 닥치면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이 말이 가슴에 와 닿아 실감이 나면 삶이 자유롭고 그대로 본래부처이므로 더 이상 닦을 것도 없습니다. 범부는 이것이 되지 않으므로 경계가 닥치면 我가 있으므로 있는 그대로 비추지 못하고 알음알이가 붙습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싫고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힘든 것이 내가 있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나중에 본인이 며느리를 만나면 똑같은 관계가 형성될 것인데 이것을 모르고 이 순간만 생각하기에 어리석은 것입니다. 본인이 짓고 본인이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我의 성품은 본체로 봐도 空하고 작용으로 봐도 空하므로 잠시도 고정되게 머물러있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이란 본래 텅비어 고요하므로 잡을 것도 없고 이름 붙일 수도 없지만, 경계가 닥치면 본체에서 있는 그대로 비추어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여여하게 작용하므로 본래부처입니다. 수행해서 부처를 이루는 것이 아니고 본래부처인데, 범부들은 찰나찰나 집착하기에 이것을 알지 못합니다.
내가 있다고 굳게 믿으므로 좋고 싫은 것이 너무나 뚜렷하여 스스로 괴로움을 자초합니다.
“비록 범부라고 말하나 범부의 相도 적멸한 것이니 범부의 相이 적멸한 고로 범부가 아니라고 설하시니라.”
저분은 부처님이고 저 사람은 스님이고 나는 제가자 범부중생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적멸이란 진리의 세계(부처님 세계)로 범부의 相(모습)도 적멸한 것이니 부처님 세계의 나툼입니다. 그렇게 보면 부처님 아닌 것이 없기에 “범부가 아니고 그 이름이 범부니라.”고 설하셨습니다. 범부의 모습도 진리(자성)의 나툼이므로 누가 악을 쓰고 욕하더라도, 저것이 적멸한 진리의 작용이라 생각하면 범부의 상이 적멸한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처럼 악을 쓰고 욕하는 것이 적멸한 것임을 아는 사람은 범부가 아닙니다.
“또 앞생각이 깨닫지 못함을 법부라 하고 뒷생각이 곧 깨달음을 범부가 아니라고 설하시느니라.”
경계가 닥쳐서 앞생각이 깨닫지 못하고 경계가 생기는 것을 범부라 하고 뒷생각이 깨달으면 범부가 아닙니다. 뒷생각이 깨달으려면 분별하는 생각을 놓아야 합니다. 달리 말해서 깨달음이란 적멸(고요히 멸함)이라 했듯이 쉬어져야 합니다.
자기 마음 가운데 있는 근본자리(적멸보궁)에 내려놓으면 하나로 같이 적멸되므로 적멸하려고 발버둥 칠 일도 없습니다.
70, 80세 노보살님들이 설악산의 봉정암 적멸보궁까지 올라가는 것을 보면 그 정성이 대단한데 여기에 바른 안목까지 갖추면 깨닫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똑똑한 사람은 정성이 부족하고 정성스럽게 하는 사람은 지혜가 부족하여 항상 치우쳐 있습니다. 그 정성에 바른 지혜 안목만 갖추면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서 당장 깨달을 것입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피(명훈가피 冥勳加被)를 입는 것으로 부처님의 가피와 깨달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통 얘기할 때 기복(祈福)을 하는 것은 가피(加被)라 생각하여 타력신앙이고 깨달음은 자력신앙이라고 생각하는데, 손바닥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원래 자타가 없습니다. 즉 부처님이 없어도 안되고 내 마음이 없어도 안됩니다. 내 마음과 부처님이 마주칠 때 ‘짝’ 소리라는 가피력이 생기고 깨달음이 생깁니다. 참선하는 사람이 자신은 자력신앙이고 타력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면 깨달음과 멀어질 뿐입니다.
부처님과 함께 전대의 수많은 선지식이 지금 여기에 항상 있기에 예불할 때마다 다음과 같이 읊습니다.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불타야중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달마야중
일체 모든 곳에 부처님과 선지식이 항상 머물러 계십니다. 진리는 영원하고 시공을 초월한 것입니다. 본래 시간과 공간은 쓰는 물건이므로 나에게 영향을 줄 수가 없습니다.
성인은 여기에 항상 계십니다. 선풍기를 켜려면 코드를 꽂아야 돌아가듯이, 자신이 초점을 맞추지 않았기에 쓸 수 없는 것입니다. 정확히 꽂으면 항상 쓸 수 있습니다.
정확하게 꽂는 것이 중도정견(中道正見)이라는 바른 안목이 서는 것이고 이때 제불보살의 가피력을 여여하게 쓸 수 있습니다.
예부터 하는 말이 “산 부처 하나를 죽은 부처 수만이 못 이긴다.”고 했듯이 산 부처(자기)가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죽은 옛날 부처님께 빌어봤자 소용없고 자기부처가 중요합니다. 모든 부처의 원력에는 한마음으로 응해주는 것이기에 내 안의 부처와 항상 한마음으로 응합니다.
이런 본원력(本願力 본래 가지고 있는 원력)을 세웠기에 성불한 것이고, 내가 한 생각을 내면 모든 부처가 응해주는 것이 제불의 뜻입니다.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불타야중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달마야중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승가야중
이라 하여 이곳에 항상 있는데 바른안목이 서 있지 않기에 그것을 끌어다가 못 쓰는 것입니다. 성인들의 말씀은 정확히 맞고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이것을 자신이 참으로 믿느냐? 믿어지느냐? 여기에 달린 것입니다. 이에 따라 깨달아지고 가피를 입고 공덕을 받습니다. 부처님은 주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자신이 받을 생각을 안하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습니다.
【六祖】
如來가 說有我者는 是自性淸淨常樂我淨之我니 不同凡夫의 貪瞋無明虛妄不實之我라
여래 설유아자 시자성청정상락아정지아 부동범부 탐진무명허망부실지아
故로 言凡夫之人이 以爲有我라하시니라 有我人하면 卽是凡夫요 我人不生하면
고 언범부지인 이위유아 유아인 즉시범부 아인불생
卽非凡夫며 心有生滅하면 卽是凡夫요 心無生滅하면 卽非凡夫며
즉비범부 심유생멸 즉시범부 심무생멸 즉비범부
不悟般若波羅蜜多하면 卽是凡夫요 悟得般若波羅蜜多하면 卽非凡夫며 心有能所하면
불오반야바라밀다 즉시범부 오득반야바라밀다 즉비범부 심유능소
卽是凡夫요 能所不生하면 卽非凡夫也니라
즉시범부 능소불생 즉비범부야
<번역>
여래가 我가 있다고 설한 것은 自性이 청정한 상락아정의 我이니 범부의 탐진치 무명과 허망하고 실답지 못한 我와는 같지 않도다. 그래서 범부들이 我가 있음을 삼는다고 하시느니라. 我人이 있으면 곧 범부이고 아인이 생하지 않으면 곧 범부가 아니며 마음에 생멸이 있으면 곧 범부이고 마음에 생멸이 없으면 곧 범부가 아니며 반야바라밀다를 깨닫지 못하면 범부요 반야바라밀다를 깨달으면 곧 범부가 아니며 마음에 능소가 있으면 범부이고 능소심이 나지 않으면 곧 범부가 아니니라.
<해설> - 무각
“여래가 我가 있다고 설한 것은 自性이 청정한 상락아정의 我이니 범부의 탐진치 무명과 허망하고 실답지 못한 我와는 같지 않도다.”
부처님께서 我가 있다(내가 있다)고 설한 것은 自性이 청정한 상락아정의 我입니다. 我란 자기 성품자리로 모든 것을 구족하게 갖추고 있는 자기 안의 참부처입니다. 앞에서도 “我의 성품은 본래 空하거늘” 이라 했듯이 본래 공한 자리가 我입니다.
탐진치(무명)와 허망하고 실답지 못하여 오온에 취착된 我와는 다른 我인데 범부들은 찰나찰나 오온에 취착된 我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我人이 있으면 곧 범부이고 아인이 생하지 않으면 곧 범부가 아니며 마음에 생멸이 있으면 곧 범부이고 마음에 생멸이 없으면 곧 범부가 아니며 반야바라밀다를 깨닫지 못하면 범부요 반야바라밀다를 깨달으면 곧 범부가 아니며”
아상과 인상이 있으면 범부이고 아상과 인상이 일어나지 않으면 범부가 아니며 마음에 일어나고 없어지는 것이 있으면 범부이고 마음에 일어나고 없어지는 것이 없으면(불생불멸이면) 범부가 아닙니다.
반야는 지혜광명으로 만상을 두루 비추므로 바라밀다입니다. 반야는 지혜로서 밝게 비추므로 경계가 오면 지혜롭게 말하고 지혜롭게 보고 지혜롭게 행하여 팔정도의 법륜이 여여하게 돌아가니 “반야바라밀다를 깨닫지 못하면 범부요 반야바라밀다를 깨달으면 곧 범부가 아니며”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능소가 있으면 범부이고 능소심이 나지 않으면 곧 범부가 아니니라.”
능소심(너와 나라는 마음)이 일어나면 범부이고 능소심이 일어나지 않으면 범부가 아닙니다.
미운 사람이 있는 것은 능소심이 있는 것으로 그 마음을 놓아야 범부가 아니라 보살이 되는데, 그가 계속 미운 짓만 하면 미워집니다. 이럴 때 들은 법문을 토대로 생각을 잘 돌려야 합니다. 지금은 조금이나마 공부를 해서 저렇게 행동하지 않지만, 예전에 몰랐을 때 자신은 저 사람 보다 더 했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저 사람을 위해 지혜의 문리가 터져서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기를 기도하는 겁니다. 이것이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자기의 능소심을 없애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축적된 업은 한생각에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경계가 닥치는 그대로 작용하면 윤회는 끝없이 반복됩니다.
【冶父】
前念衆生後念佛이라 佛與衆生이 是何物고
전념중생후념불 불여중생 시하물
<번역>
앞생각은 중생이고 뒷생각은 부처로다.
부처와 더불어 중생은 무슨 물건인가.
<해설> - 무각
앞생각이 중생심이 올라오면 뒷생각이 빨리 깨달아서 적멸한 곳(나온 자리)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것(중생심)도 적멸한 곳에서 나왔습니다. 거울의 깨끗한 곳에 있는 대로 비추어져 너와 나로 나누어집니다. 그 너와 나가 공하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실체하다고 생각하니 너와 나, 옳고 그름이 있습니다. 이렇게 분별하는 마음을 나온자리에 다시 놓는 순간 범부심이 없어지고 보살심으로 한생각에 바뀝니다.
어렵지도 않고, 힘들지도 않고, 애쓸 것도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놓고 가면 공부는 여여롭게 합니다. 장좌불와나 뼈가 부서지도록 절하는 것이 용맹정진이 아니고 일상 속에서 물러서지 않고 순간순간 마음을 잘 밀고 나가는 것이 용명정진입니다. 그래서 육조스님도 “앞생각이 중생심이 일어나면 뒷생각이 빨리 깨달아라”고 했습니다.
【說誼】
前念起妄에 後念卽覺하고 前念有着에 後念卽離니 妄還覺着却離여 爲聖가 爲凡가
전념기망 후념즉각 전념유착 후념즉리 망환각착각이 위성 위법
是善가 是惡가 定當不得이로다
시선 시악 정당부득
<번역>
앞생각이 망념을 일으키면 뒷생각이 곧 깨닫고 전념이 집착하면 곧 (집착을) 떠남이니 妄을 돌이켜 깨닫고 집착을 문득 떠남이니 성인이 되는가 범인이 되는가, 선인가 악인가. 결정코 알지 못하도다.
<해설> - 무각
“앞생각이 망념을 일으키면 뒷생각이 곧 깨닫고 전념이 집착하면 곧 (집착을) 떠남이니”
앞생각이 망념을 일으키면 뒷생각이 곧 깨닫고 앞생각이 집착하면 집착하는 순간 놓으면 되는데 잘 안됩니다. 전생의 인연으로 애틋한 마음에 일이 벌어집니다. 원인이 있으므로 결과가 있고,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어 결과를 만드니 시작과 끝이 없습니다.
지금 한생각에서 놓고 갈 수 있어야 하는데 이런 수행을 하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끝없이 가르칩니다. 알아도 속기 쉬운데 모르면 다 속게 되므로 잘 하면서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보면 성스럽게 잘 하려고 하지만 욕망 때문에 실제 삶은 그렇지 못한 고통을 어떻게 해결할지 모릅니다. 불교에서는 자기 수행을 통해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법이 철두철미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妄을 돌이켜 깨닫고 집착을 문득 떠남이니 성인이 되는가 범인이 되는가, 선인가 악인가. 결정코 알지 못하도다.”
성인과 범부를 다 놓아야 자유로운 사람이 됩니다. 성인에 집착해도 안되지만 범부에 집착하면 더 안됩니다.
【冶父】
不現三頭六臂하야도 却能拈匙放筯로다 有時에 醉酒罵人이라가 忽爾燒香作禮로다
불현삼두육비 각능염시방저 유시 취주매인 홀이소향작례
手把破砂盆하고 身披羅錦綺로다 做模打樣이 百千般이나 驀鼻牽來秪是你로다 咦
수파파사분 신피라금기 주모타양 백천반 맥비견래지시니 이
<번역>
三頭와 六臂(머리 셋과 팔 여섯)를 나투지 않아도
能히 수저를 잡고 놓을 줄 알도다.
어느 땐 술에 취하여 사람을 꾸짖다가
홀연히 향을 사르고 예를 올리도다.
손에는 깨진 사기그릇을 잡고
몸에는 비단옷을 걸쳤도다.
모양을 만들고 지음이 백천 가지이나
문득 코를 이끌어오니, 다만 이는 너로다.
咦!
<해설> - 무각
“三頭와 六臂(머리 셋과 팔 여섯)를 나투지 않아도
能히 수저를 잡고 놓을 줄 알도다.”
천상의 어느 태자는 머리가 셋에 팔이 여섯 개라 능력이 뛰어나다고 하지만 수저를 잡고, 볼 줄 알고, 들을 줄 알고, 말할 줄 알고, 행할 줄 아는 것도 대단한 능력입니다.
“어느 땐 술에 취하여 사람을 꾸짖다가
홀연히 향을 사르고 예를 올리도다.”
어느 땐 술에 취해서 치고받고 싸우다가도 또 어느 때는 부처님께 앞에서 향을 사르고 고요히 예를 사르니 선과 악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악업과 선업이 반반씩 균등하므로 중간 세상인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악업이 많으면 삼악도에 태어나고 선업이 많으면 천상에 태어납니다.
왜 부처님은 도솔천에서 십바라밀을 닦아서 공부를 완성했는데 다시 인간 세상에 나와서 성불했을까요? 참구해 보십니다.
“손에는 깨진 사기그릇을 잡고
몸에는 비단옷을 걸쳤도다.”
계속 상대성으로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가난의 뜻으로 손에는 깨진 사기그릇을 잡았다 했고 부귀의 의미로 몸에는 비단옷을 걸쳤다고 했습니다.
“모양을 만들고 지음이 백천 가지이나
문득 코를 이끌어오니, 다만 이는 너로다.
咦!”
우리가 사는 것이 부잣집에 태어났다가 가난한 집에 태어나는 등 이렇게 됐다 저렇게 되는 것이 손바닥 뒤집기와 같습니다. 이생에서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게 뒤집으면 걸리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먹고 살기 힘들고, 반대로 뒤집으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받을 수 있으니 먹고 살 만하고, 여유가 있어서 나눠주기도 하면 손이 더 커지는데, 여기서 더 부자가 되어 아주 건방진 생각에 빠지면 자기밖에 모르니 다음 생에는 다시 손바닥이 뒤집어지듯이 가난에 찌들고 고생하며 살다가, 다시 한생각 돌려서 베풀다 보면 부잣집에 태어납니다.
부잣집에 나와서 복은 지었지만 지혜가 부족하므로 그 생에 재산을 다 잃고, 다음 생에는 아주 가난한 집에 태어났는데 악업까지 겹치면 결국 삼악도에까지 떨어집니다. 욕심을 부리면 아귀도에 떨어져서 기갈과 배고픔에 시달립니다.
지금 이 세상도 태어나서 굶어 죽는 아이들이 많듯이 아귀도가 눈에 보입니다. 무슨 인연으로 거기에 태어났을까요? 원인 없는 결과가 없으니, 마음 씀에 따라서 그런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이 공부가 너무나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것임을 느끼는 사람은 지혜롭고 선근이 많다 하고, 이것을 남의 일처럼 느끼는 사람은 선근이 없다고 합니다.
“문득 코를 이끌어오니, 다만 이는 너로다.”라고 했는데, 콧구멍을 막으면 죽게 됩니다. 코는 근본이라는 것이고 이것이 자기입니다.
【說誼】
咦는 一作嗄라 非能非不能이며 非善非不善이며 非貴非不貴니 貴賤善惡能否異여
이 일작사 비능비불능 비선비불선 비귀비불귀 귀천선악능부이
正眼看來唯一人이로다
정안간래유일인
<번역>
咦는 嗄라고도 함.
能도 아니고 不能도 아니며 善도 아니고 不善도 아니로다. 貴함도 아니고 不貴함도 아니니 貴賤과 善惡과 能否가 다름이여. 바른 눈으로 보면 오직 한 사람이로다.
<해설> - 무각
능(能)한 것도 아니고 능하지 않음(不能)도 아니고, 선(善)도 아니고 선하지 않음(不善)도 아니다. 귀(貴)함도 아니고 귀하지 않음(不貴)도 아니고, 귀하고 천함(貴賤)과 선과 악(善惡)과 능함과 능하지 않음(能否)이 다 다릅니다. 사람마다 다 다르고 모든 중생이 다 다르지만 바른 눈으로 보면 오직 한 사람입니다.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품자리로 그 하나부터 나왔습니다.
【종경】
無我無人이여 衆生이 自成正覺이요 不生不滅이여 如來가 說非凡夫로다
무아무인 중생 자성정각 불생불멸 여래 설비범부
雖然箇事分明이나 爭奈當機蹉過리오 昔에 有僧이 問翠岩云호대 還丹一粒이
수연개사분명 쟁내당기차과 석 유승 문취암운 환단일립
點鐵成金하고 至理一言이 轉凡成聖이라하니 學人이 上來호니 請師一點하노이다 師가
점철성금 지리일언 전범성성 학인 상래 청사일점 사
云不點이니라 僧이 云爲什麽不點이니잇고 師가 云恐汝落凡聖이라하시니 且道하라
운부점 승 운위십마부점 사 운공여락범성 차도
不落凡聖底人은 具什麽眼고 直饒聖解凡情盡이라도 開眼依然在夢中이니라
불락범성저인 구십마안 직요성해범정진 개안의연재몽중
<번역>
我도 없고 人도 없음이여, 중생이 스스로 正覺을 이룸이요.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음이여, 여래께서 범부가 아니라고 설하도다. 비록 그렇게 그 일은 분명하나 機에 當하면 어긋남을 어찌하리오.
옛날 어떤 스님이 翠岩스님께 묻되 還丹(약) 한 개를 鐵에다 칠(點)하면 금이 되고 지극한 이치 한 마디가 범부를 고쳐 성인을 만든다 하시니, 학인이 와서 스님께 一點하여 주십사 청하였도다. 스승께서 이르되 “점하지 않겠다” 하셨느니라. 스님이 이르되 “어찌하여 점하지 않습니까.”하니 스승이 “네가 범부나 성인에 떨어질까 두려워한다.” 하셨느니라. 또 말하라. 범부나 성인에 떨어지지 않는 사람은 어떤 눈을 갖추었는가. 설사 성인의 알음알이나 범부의 생각이 다 없어질지라도 눈을 뜨면 아직도 꿈 가운데 있음이로다.
<해설> - 무각
아상과 인상도 없으면 스스로 정각을 이루니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아서 ‘불생불멸(不生不滅)’이므로 여래께서 범부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불생불멸’이면 여래께서 “범부가 아니고 그 이름이 범부니라.”고 했습니다. 我도 없고 人도 없고 ‘불생불멸’인 것을 알았으면 견성체험한 것은 분명한데, 기(機 경계)를 만나면 또 어긋납니다. 뜻은 높은데 몸이 못 쫓아가기에 그런 것이니 습(習)을 녹이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돈오(頓悟)했다 하더라도 점수(漸修)를 해야 합니다.
옛날 어떤 스님이 취암(翠岩)스님께 묻되 환단(還丹 신선이 먹는 약) 한 개를 쇠(鐵)에다 점(點)하면 쇠가 금이 된다 하고, 지극한 이치 말 한마디가 범부를 고쳐서 성인을 만든다 하시니 학인이 와서 스님께 한번 점을 찍어주십사 하고 청하였습니다.
스승께서 이르되 “점하지 않겠다” 하시니 스님이 이르되 “어찌하여 점하지 않습니까.” 하니 스승이 “네가 범부나 성인에 떨어질까 두려워한다.” 하셨습니다.
범부나 성인이라는 것에 떨어지면 건질 도리가 없기에 점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범부나 성인에 떨어지지 않은 사람이 성인의 알음알이나 범부의 생각이 다 없어졌을지라도 눈을 뜨면 아직도 꿈 가운데 있음을 알기에 눈을 뜨는 것이 중요합니다.
【說誼】
佛不度衆生이여 衆生이 自成正覺이요 衆生相寂滅이여 如來가 說非凡夫로다
불부도중생 중생 자성정각 중생상적멸 여래 설비법부
雖曰人人具足이나 爭奈日用而不知리오 翠岩이 曾不點은 恐落凡聖路니 且道하라
수왈인인구족 쟁내일용이불지 취암 증부점 공락범성로 차도
不落凡聖底人은 具什麽眼고 直饒不落凡聖路라도 敢道猶未具眼在니라
불락범성저인 구십마안 직요불락범성로 감도유미구안재
<번역>
부처가 중생을 제도하지 못함이여, 중생이 스스로 정각을 이루었음이라. 중생상이 적멸함이여, 여래께서 범부가 아니라고 설하셨도다. 비록 사람마다 다 갖추었다 말하나 날마다 쓰되 알지 못함을 어찌하리오. 취암이 일찍 點하지 않음은 범, 성에 떨어질까 염려함이니, 또 말하라. 범성에 떨어지지 않았더라도 감히 말하건대 아직 눈을 갖추지 못했다 하리라.
<해설> - 무각
부처가 중생을 제도하지 못함이여, 중생이 스스로 정각을 이루었음이라. 중생상이 적멸함이여, 여래께서 범부가 아니라고 설하셨도다. 비록 사람마다 다 갖추었다 말하나 날마다 쓰면서도 이게 어디서 온 것이고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취암이 일찍 點하지 않음은 범, 성에 떨어질까 염려함이니, 또 말하라. 범성(凡聖)에 떨어지지 않았더라도 감히 말하건대 아직 눈을 갖추지 못했다 하리라.
【종경】
到岸에 從來不用船이니 坦然大道가 透長安이라 了然元不因他悟니 面目이
도안 종래불용선 탄연대도 투장안 요연원불인타오 면목
分明總一般이로다
분명총일반
<번역>
언덕에 다다르면 본래 배는 쓰지 않으니
평탄한 큰길이 장안으로 뚫렸음이로다.
了然히 원래 다른 사람으로 인해 깨닫는 것이 아니니
面目이 분명함은 모두가 한가지로다.
<해설> - 무각
“언덕에 다다르면 본래 배는 쓰지 않으니
평탄한 큰길이 장안으로 뚫렸음이로다.”
강을 건너서 언덕에 다다르면 그 배는 돌아보지 않습니다.
모든 길은 다 장안으로 통해 있습니다.
“了然히 원래 다른 사람으로 인해 깨닫는 것이 아니니”
了然히(분명하게) 원래 다른 사람이 깨닫게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상(四相)이 없어지면 저절로 깨닫게 됩니다.
“面目이 분명함은 모두가 한가지로다.”
진리는 둘이 아니고 한가지입니다.
【說誼】
悟了不應守方便이니 何更從他問長安이리오 一條活路가 如絃直하니 千聖이
오요불응수방편 하갱종타문장안 일조활로 여현직 천성
皆從此路歸로다
개종차로귀
<번역>
깨닫고 나서는 응당 방편을 지킬 것이 아니니 어찌 다시 장안의 길을 남에게 물을 것인가. 한가닥 살 길(活路)이 거문고 줄같이 곧으니 인천 성인이 다 이 길로부터 돌아오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