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산을 만나러 갔다. 상수리나무가 갈색 잎과 열매를 흔들고 담쟁이 넝쿨은 푸른 잎이 남은 떡갈나무 둥치를 휘감고 있다. 산길을 끼고 있는 바위 사이에 작은 개울이 흐르고, 낙엽을 가장자리로 밀어낸 흙길이 등산객을 반겨 준다.
울주군 온양의 대운산 삼봉 코스다. 꽤 오랜만의 등산인 데다 얼마 전 허리 수술까지 한 터라 잘 오를 수 있을까 겁이 났다. 장비도 제대로 없으니 일행에게 폐가 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산길이 완만해 용기가 난다. 굴참나무 잎이 살랑 내 앞으로 떨어지며 반기기에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가볍게 올라갔다.
도통골 좌측 능선을 어느 정도 걷자 구부러진 급경사가 나타났다. 쳐다보기만 해도 겁이 난다. 굵은 동아줄을 잡았지만 오르기가 쉽지 않다. 여덟 명의 일행이 선두, 중간, 후미 그룹으로 나누어졌다. 복판 그룹에서 밀려나지 않겠다고 입술을 앙다물고 힘을 냈다. 그러나 자꾸만 한 명 또 한 명 뒤로 처졌다. 몇 바퀴 돌고 나면 평지가 나오겠지, 기대했지만 가도 가도 끝이 없다.
앞선 사람이 꼭대기까지 갔다 오도록 기다릴까 하다가 수양과 실천을 힘껏 하라던 옛말이 생각나 용기백배 다시 힘을 냈다. 산비탈 끝에 ‘딸깍 고개’라는 팻말이 보인다. ‘올라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고개를 넘기가 숨이 딸깍 넘어갈 만큼 힘들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하는 글이 작은 나뭇가지에 걸려 있다. 휴, 해냈구나. 수고했다는 글귀를 내미는 나무가 반갑고, 딸깍 고개를 넘게 해 준 부실한 허리가 대견하다. 건강한 사람들도 오르기 힘든 고개라는데 성치 않은 몸으로 해낸 것이니 흡족하다. 평지에서 잠깐 무릎 운동을 한 후 손바닥으로 허리를 살살 어루만져 준다.
한숨 돌리고 보니 아까보다 훨씬 더 가파른 길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좌우에 동아줄이 처져 있다. 지팡이를 접어 배낭에 꽂은 다음 양손으로 밧줄을 잡고 끙끙대다가 나도 모르게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더 높은 고개는 내게 무리였다.
큰아이의 초등학교 운동회 날 욕심부려 낭패당한 기억이 떠오른다. 그날따라 일이 있어 늦게 학교로 갔더니 나를 본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좀 전 달리기 시합이 있었는데 응원해 주는 엄마가 오지 않아 일등을 못 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1학년의 여린 꿈이 입은 생채기가 미안하고 아렸다. 학창시절 단거리 선수를 한 적이 있던 터라 어머니 달리기 시합에서 일등을 해 주마고 약속했다. 하지만 막상 그 시간이 되어 달려 보니 오랜만의 뜀박질은 예상과 달랐다. 엄마 이겨라. 하고 크게 응원하는 아들의 소리를 들으며 마음은 저 앞까지 가 있는데 몸이 따라와 주지 않았다. 정신없이 뛰다가 그만 다리가 엉켜 넘어져 버렸다. 일어나 다시 뛰었지만, 느지막이 겨우 결승선에 들어갔다.
사업 수완이 좋던 어느 남자도 생각난다. 그는 공무원으로 몇십 년 일하며 알뜰히 모아 좋은 아파트를 마련했다. 여유가 있으니 미래를 보는 안목도 생겨 직장을 그만두고 바닷가에 호텔을 지었다. 여러 곳의 설계를 탐방해 장단점을 체득한 후 오랜 날이 걸려 호텔을 완성했다. 소형이었지만 입지가 좋은 데다 경영을 잘해 사업은 대성공이었다. 돈과 시간이 넉넉해져서 강원랜드의 카지노장으로 갔다. 자신감과 욕심이 넘쳤던 그는 한 해 두 해 세월이 흐르면서 수중의 돈을 탕진해 버렸다. 호텔을 담보로 잃은 것을 회수하려다 순식간에 그것이 없어지고 집까지 빚에 넘어가 결국 빈털터리가 돼 버렸다.
길옆의 편한 자리를 찾아 앉으니 유독 붉은 단풍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가을을 맞은 잎들이 모양과 색을 하나도 흐트러뜨리지 않고 예쁜 손을 쫙 펴고 있다. 사시절 한곳에서 있으니 세찬 바람에 뿌리째 흔들리고 태풍을 맞아 가지가 꺾이기도 했으리라. 그 세월을 받아들여 바람 따라 움직이고 비 오면 옹이까지 씻어내며 영양소를 만들었다. 그러다 찬바람 일면 잎을 저항 없이 땅바닥에 내려보내니 모양과 색깔이 순연하고 곱다. 아집을 버리고 생각과 맞지 않는 일을 긍정적으로 여기면 나도 그리될까. 있는 그대로 보아 세상살이가 쉽고 편해지면 몸과 마음이 단풍잎처럼 자유로워지리라.
계곡 아래를 내려다본다. 각각의 바위들이 가득하다. 그들은 이리 둥글 저리 둥글 제 마음대로인듯 하면서도 흔들림이 없다. 너럭바위에 앉았다. 힘에 부치는 산길을 오르느라 땀 흘려 얼굴 붉어지고 팔다리가 아파 찡그리는 것보다 얼마나 좋은가.
산꼭대기까지 갔다 오는 일행과 만 보 등산로를 통해 산을 내려왔다. 내리막길은 오르는 길보다 더 위험하다지만 계곡에서 쉰 덕분에 훨씬 수월하다. 천천히 오다 뒤돌아서서 산 중턱마다 군락을 이룬 단풍나무에게 눈을 맞춘다. 그들도 자신들의 자리만큼 올라가서 묵묵히 키를 세우고 서 있다.
흙냄새와 뒤섞인 단내가 솔솔 난다. 비탈에 박힌 바위를 타고 오르는 망개 줄기에 조롱한 붉은 열매가 꽃향기처럼 감미롭다. 몸에 맞춰 오르고 쉬니, 보고 싶은 것이 눈에 들어온다. 산 냄새가 제대로 느껴진다.
첫댓글 강작가님 정신력이 대단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