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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 ; 주역하경 ; 37. 가인
37. 가인(家人)
『&Jgua37.tif가인(家人)L』
『【傳】家人은 序卦에 夷者는 傷也니 傷於外者는 必反於家라 故受之以家人이라하니라 夫傷困於外則必反於內
하나니 家人所以次明夷也라 家人者는 家內之道니 父子之親과 夫婦之義와 尊卑長幼之序로 正倫理, 篤恩義 家人之
道也라 卦外巽內離하니 爲風自火出이니 火熾則風生이라 風生自火는 自內而出也니 自內而出은 由家而『[一无
而字]』及於外之象이라 二與五 正男女之位於內外하여 爲家人之道하니 明於內而巽於外는 處家之道也라 夫人有
諸身者則能施於家하고 行於家者則能施於國하여 至於天下治하나니 治天下之道는 蓋治家之道也를 推而行之於外
耳라 故取自內而出之象이 爲家人之義也라 『文中子주:문중자』書에 以明內齊外爲義어늘 古今善之나 非取象之
意也라 所謂『齊乎巽은 言萬物潔齊於巽方이요 非巽有齊義也니 如戰乎乾주:제호손』이 乾非有戰義也라』
『 가인괘(家人卦)는 〈서괘전(序卦傳)〉에 “이(夷)는 상(傷)함이니, 밖에서 상(傷)한 자는 반드시 집으로 돌아
오기 때문에 가인괘(家人卦)로 받았다.” 하였다. 밖에서 상(傷)하고 곤궁하면 반드시 안으로 돌아오니, 가인괘
(家人卦)가 이 때문에 명이괘(明夷卦)의 다음이 된 것이다.
가인(家人)은 집안의 도(道)이니, 부자(父子)의 친함과 부부(夫婦)의 의(義)와 존비(尊卑)•장유(長幼)의 차례로
윤리(倫理)를 바르게 하고 은의(恩義)를 돈독히 함이 가인(家人)의 도(道)이다. 괘(卦)가 밖은 손(巽)이고 안은
이(離)이니, 바람이 불로부터 나옴이 되니, 불이 치성하면 바람이 나온다. 바람이 불로부터 나옴은 안으로부터
나옴이니, 안으로부터 나옴은 집으로부터 밖에 미치는 상(象)이다.
이(二)와 오(五)가 남(男)•여(女)의 위치를 안과 밖에 바르게 하여 가인(家人)의 도(道)가 되니, 안에 밝고 밖에
손순(巽順)함은 집안에 처하는 도리이다. 사람이 자기몸에 소유한 자는 집안에 시행할 수 있고 집안에 행하는
자는 나라에 시행할 수 있어 천하(天下)가 다스려짐에 이르니, 천하(天下)를 다스리는 도(道)는 집안을 다스리는
도(道)를 미루어 밖에 행할 뿐이다. 그러므로 안으로부터 나오는 상(象)을 취함이 가인(家人)의 뜻이 된다.』
『 문중자(文中子)의 책『[중설(中說)]』에는 안을 밝게 하고 밖을 깨끗이 함을 뜻으로 삼았는데, 고금(古今)에
이를 좋게 여기나 상(象)을 취한 뜻이 아니다. 이른바 ‘제호손(齊乎巽)’은 만물(萬物)이 손방(巽方)에서 깨끗해
짐을 말한 것이요, 손(巽)에 깨끗하다는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니, ‘전호건(戰乎乾)’이 건(乾)에 싸운다는 뜻이 있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家人은 利女貞하니라』
『 가인(家人)은 여자(女子)의 바름이 이롭다.』
『【傳】家人之道는 利在女正이니 女正則家道正矣라 夫夫婦婦而家道正이어늘 獨云利女貞者는 夫正者는 身正也요
女正者는 家正也니 女正則男正을 可知矣라』
『 가인(家人)의 도(道)는 이로움이 여자(女子)의 바름에 있으니, 여자(女子)가 바르면 가도(家道)가 바르게
된다. 남편은 남편답고 부인(婦人)은 부인(婦人)다움에 가도(家道)가 바루어지는데, 홀로 여정(女貞)이 이롭
다고만 말한 것은 남편이 바름은 자기 몸이 바른 것이요, 여자(女子)가 바름은 집안이 바른 것이니,
여자(女子)가 바르면 남자(男子)가 바름을 알 수 있다.』
『【本義】家人者는 一家之人이니 卦之九五六二 內外各得其正이라 故爲家人이라 利女貞者는 欲先正乎內也니
內正則外无不正矣라』
『 가인(家人)은 한 집안의 사람이니, 괘(卦)의 구오(九五)와 육이(六二)가 내(內)•외(外)에서 각각 그 바름을
얻었기 때문에 가인(家人)이라 한 것이다. 여정(女貞)이 이롭다는 것은 먼저 안을 바루고자 한 것이니,
안이 바르면 밖은 바르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彖曰 家人은 女正位乎內하고 男正位乎外하니 男女正이 天地之大義也라』
『 〈단전(彖傳)〉에 말하였다. “가인(家人)은 여자(女子)는 안에서 위치를 바르게 하고 남자(男子)가 밖에서
위치를 바르게 하니, 남(男)•여(女)가 바름이 천지(天地)의 대의(大義)이다.』
『【傳】彖은 以卦才而言이라 陽居五在外也하고 陰居二處內也하니 男女各得其正位也라 尊卑內外之道는 正合天
地陰陽之大義也라』
『 〈단전(彖傳)〉은 괘재(卦才)로 말하였다. 양(陽)이 오(五)에 거하여 밖에 있고, 음(陰)이 이(二)에 거하여 안에
처한 것이니, 남(男)•여(女)가 각각 바른 위치를 얻은 것이다. 존비(尊卑)와 내외(內外)의 도(道)는 바로 천지(天地)•
음양(陰陽)의 대의(大義)에 합한다.』
『【本義】以卦體九五六二로 釋利女貞之義라』
『 괘체(卦體)의 구오(九五)와 육이(六二)로 ‘이녀정(利女貞)’의 뜻을 해석하였다.』
『家人에 有嚴君焉하니 父母之謂也라』
『 가인(家人)에 엄한 군주(君主)가 있으니, 부모를 말한다.』
『【傳】家人『[一无人字]』之道 必有所尊嚴而君長者하니 謂父母也라 雖一家之小라도 无尊嚴則孝敬衰요 无君
長則法度廢라 有嚴君而後家道正이니 家者는 國之則也라』
『 가인(家人)의 도(道)는 반드시 존엄(尊嚴)하여 군장(君長) 노릇하는 자가 있으니, 부모를 말한다.
비록 작은 한 집안이라도 존엄(尊嚴)함이 없으면 효도(孝道)와 공경(恭敬)이 쇠하고 군장(君長) 노릇하는 자가
없으면 법도(法度)가 폐지된다. 엄한 군주(君主)가 있은 뒤에 가도(家道)가 바루어지니, 집안은 나라의 법
『[모범]』이다.』
『【本義】亦謂二五라』
『 또한 이효(二爻)와 오효(五爻)를 이른 것이다.』
『父父子子兄兄弟弟夫夫婦婦而家道正하리니 正家而天下定矣리라』
『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답고 형은 형답고 아우는 아우답고 남편은 남편답고 부인(婦人)은 부인
(婦人)다움에 가도(家道)가 바르게 되리니, 집안을 바르게 하면 천하(天下)가 정해지리라.”』
『【傳】父子兄弟夫婦 各得其道則家道正矣니 推一家之道면 可以及天下라 故家正則天下定矣라』
『 부(父)•자(子)와 형(兄)•제(弟)와 부(夫)•부(婦)가 각각 그 도리를 얻으면 가도(家道)가 바루어지니,
한 집안의 도(道)를 미루면 천하(天下)에 미칠 수 있다. 그러므로 집안이 바루어지면 천하(天下)가 정해지는
것이다.』
『【本義】上은 父요 初는 子며 五, 三은 夫요 四, 二는 婦며 五는 兄이요 三은 弟니 以卦턛推之하면 又有此象
이라』
『 상(上)은 아버지이고 초(初)는 자식이며, 오(五)와 삼(三)은 남편이고 사(四)와 이(二)는 부인(婦人)이며,
오(五)는 형이고 삼(三)은 아우이니, 괘획(卦턛)으로 미루면 또 이러한 상(象)이 있다.』
『象曰 風自火出이 家人이니 君子以하여 言有物而行有恒하나니라』
『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바람이 불로부터 나옴이 가인(家人)이니, 군자(君子)가 보고서 말에 사실
『[진실함]』이 있고 행실(行實)에 항상함이 있게 한다.”』
『【傳】正家之本은 在正其身이니 正身之道는 一言一動을 不可易也라 君子觀風自火出之象하여 知事之由內而出
이라 故所言必有物하고 所行必有恒也라 物은 謂事實이요 恒은 謂常度法則也라 德業之著於外는 由言行之謹於內
也니 言愼行修면 則身正而家治矣라』
『 집안을 바로잡는 근본은 몸을 바르게 함에 있으니, 몸을 바르게 하는 도는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행동을 쉽게
하지 않아야 한다. 군자(君子)가 바람이 불로부터 나오는 상(象)을 보고서 일이 안으로부터 나옴을 안다.
그러므로 말하는 바에 반드시 사실이 있고 행하는 바에 반드시 항상함이 있는 것이다. 물(物)은 사실을 이르고
항(恒)은 떳떳한 법도(法度)와 법칙(法則)을 이른다. 덕업(德業)이 밖에 드러남은 언행(言行)을 안에서 삼가기
때문이니, 말을 삼가고 행실을 닦으면 몸이 바루어져 집안이 다스려질 것이다.』
『【本義】身修則家治矣라』
『 몸이 닦여지면 집안이 다스려질 것이다.』
『初九는 閑有家면 悔亡하리라』
『【本義】閑有家니 悔亡하니라』
『 초구(初九)는 유가(有家)『[집]』에 방한(防閑)『[예법으로 막음]』하면 뉘우침이 없어지리라.』
『 【본의】집에 방한(防閑)함이니, 뉘우침이 없다.』
『【傳】初는 家道之始也요 閑은 謂防閑法度也라 治其有家之始에 能以法度爲之防閑이면 則不至於悔矣라 治家
者는 治乎衆人也니 苟不閑之以法度면 則人情流放하여 必至於有悔하여 失長幼之序하고 亂男女之別하여 傷恩義,
害倫理하여 无所不至요 能以法度閑之於始면 則无是矣라 故悔亡也라 九는 剛明之才니 能閑其家者也로되 不云无
悔者는 群居必有悔어늘 以能閑故로 亡耳라』
『 초(初)는 가도(家道)의 시작이요 한(閑)은 법도(法度)로 방한(防閑)함을 이른다. 집안을 다스리는 초기에
법도(法度)로 방한(防閑)하면 뉘우침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 집안을 다스리는 것은 여러 사람을 다스리는 것이니,
만일 법도(法度)로써 방한(防閑)하지 않으면 인정(人情)이 방탕한 데로 흘러 반드시 뉘우침이 있음에 이르러,
장유(長幼)의 질서(秩序)를 잃고 남녀(男女)의 분별(分別)을 어지럽혀 은의(恩義)를 상(傷)하고 윤리(倫理)를
해쳐 이르지 않는 바가 없을 것이요, 법도(法度)로써 초기에 방한(防閑)하면 이런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뉘우침이 없어진다고 한 것이다. 구(九)는 강명(剛明)한 재질(才質)이니, 집안을 방한(防閑)할 수 있는
자인데, 무회(无悔)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여럿이 거처함엔 반드시 뉘우침이 있을 것이나 방한(防閑)하기 때문에
뉘우침이 없어지는 것이다.』
『【本義】初九는 以剛陽으로 處有家之始하여 能防閑之하니 其悔亡矣라 戒占者當如是也라』
『 초구(初九)는 강양(剛陽)으로 유가(有家)의 초기에 처하여 방한(防閑)하니 그 뉘우침이 없다. 점치는 자에게
마땅히 이와 같이 하라고 경계한 것이다.』
『象曰 閑有家는 志未變也라』
『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유가(有家)를 방한(防閑)함은 뜻이 아직 변치 않았을 때에 하는 것이다.”』
『【傳】閑之於始는 家人志意未變動之前也니 正志未流散變動而閑之면 則不傷恩하고 不失義하리니 處家之善也라
是以悔亡이라 志變而後治면 則所傷多矣니 乃有悔也라』
『 초기에 방한(防閑)함은 집안 사람들의 의지가 아직 변동(變動)하기 전이니, 바른 뜻이 유산(流散)하고 변동
(變動)하지 않았을 때에 방한(防閑)하면 은혜(恩惠)를 상(傷)하지 않고 의(義)를 잃지 않을 것이니, 집안에 처하
기를 잘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뉘우침이 없어지는 것이다. 뜻이 변한 뒤에 다스리면 상(傷)하는 바가 많으니,
이는 뉘우침이 있는 것이다.』
『【本義】志未變而豫防之라』
『 뜻이 변하기 전에 미리 방비(防備)하는 것이다.』
『六二는 无攸遂요 在中饋면 貞吉하리라』
『【本義】在中饋니』
『 육이(六二)는 이루는 바가 없고 규중(閨中)에 있으면서 음식을 장만하면 정(貞)하여 길(吉)하리라.』
『 【본의】규중에 있으면서 음식을 장만함이니,』
『【傳】人之處家에 在骨肉父子之間하여는 大率以情勝禮하고 以恩奪義하나니 唯剛立之人은 則能不以私愛失其
正理라 故家人卦는 大要以剛爲善이니 初, 三, 上이 是也라 六二以陰柔之才而居柔하여 不能治於家者也라 故无攸
遂니 无所爲而可也라 夫以英雄之才로도 尙有溺情愛而不能自守者어든 況柔弱之人이 其能勝妻子之情乎아 如二
之才는 若爲婦人之道면 則其正也라 以柔順處中『[他本无此五字]』正은 婦人之道也라 故在中饋면 則得其正而
吉也니 婦人은 居中而主饋者也라 故云中饋라』
『 사람이 집안에 거처함에 골육(骨肉)과 부자간(父子間)에는 대체로 정(情)이 예(禮)를 이기고 은혜(恩惠)가
의(義)를 빼앗는데, 오직 강(剛)하게 서는 사람은 사사로운 사랑으로 정리(正理)를 잃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인괘(家人卦)는 대요(大要)가 강(剛)함을 선(善)으로 여기니, 초(初)와 삼(三)과 상(上)이 이것이다.
육이(六二)는 음유(陰柔)의 재질(才質)로 유위(柔位)에 거하여 집안을 다스리지 못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이루는
바가 없으니, 하는 바에 가(可)함이 없는 것이다. 영웅(英雄)의 재질(才質)로도 오히려 정(情)과 사랑에 빠져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 자가 있는데 하물며 유약(柔弱)한 사람이 처자(妻子)의 정(情)을 이길 수 있겠는가.
이(二)와 같은 재질(才質)은 만약 부인(婦人)의 도(道)를 행하면 바른 것이다. 유순(柔順)으로 중정(中正)에 처
함은 부인(婦人)의 도(道)이다. 그러므로 규중(閨中)에 있으면서 음식을 장만하면 그 바름을 얻어 길(吉)한 것이니,
부인(婦人)은 규중(閨中)에 있으면서 음식을 주관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중궤(中饋)라 이른 것이다.』
『【本義】六二柔順中正하니 女之正位乎內者也라 故其象占如此하니라』
『 육이(六二)가 유순(柔順)하고 중정(中正)하니, 여자(女子)로서 안에서 위치를 바르게 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그 상(象)과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象曰 六二之吉은 順以巽也일새라』
『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육이(六二)의 길(吉)함은 순(順)하여 겸손하기 때문이다.”』
『【傳】二以陰柔居中正하여 能順從而卑巽者也라 故爲婦人之貞吉也라』
『 이(二)가 음유(陰柔)로서 중정(中正)에 거하여 능히 순종(順從)하여 비손(卑巽)한 자이다.
그러므로 부인(婦人)의 정길(貞吉)이 되는 것이다.』
『九三은 家人이 ??하니 悔쪵나 吉하니 婦子•;•;면 終吝하리라』
『 구삼(九三)은 가인(家人)이 원망하니 엄함에 뉘우치나 길(吉)하니, 부인(婦人)과 자식이 희희낙락(•;•;樂樂)
하면 끝내 부끄러우리라.』
『【傳】??은 未詳字義나 然以文義及音意觀之하면 與춄춄相類하고 又若『[一作人若]』急束『[一作速]』之意라
九三이 在內卦之上하여 主治乎內者也라 以陽居剛而不中하니 雖得正而過乎剛者也라 治內過剛則傷於嚴急이라 故
家人??然이니 治家過嚴이면 不能无傷이라 故必悔於嚴쪵하니 骨肉은 恩勝이어늘 嚴過라 故悔也라 雖悔於嚴쪵
하여 未得寬猛之中이나 然而家道齊肅하고 人心祗畏하니 猶爲家之吉也요 若婦子•;•;면 則終至羞吝矣라 在卦에
非有•;•;之象이요 蓋對??而言이니 謂與其失於放肆론 寧過於嚴也라 •;•;는 笑樂无節也니 自恣无節이면 則終至
敗家하리니 可羞吝也라 蓋嚴謹之過면 雖於人情에 不能无傷이나 然苟法度立하고 倫理正이면 乃恩義之所存也라
若•;•;无度면 乃法度之所由廢요 倫理之所由亂이니 安能保其家乎아 •;•;之甚이면 則致敗家之凶이어늘 但云吝
者는 可吝之甚則至於凶이라 故未遽言凶也라』
『 학학(??)은 자의(字義)가 자세하지 않으나 글 뜻과 음의 뜻을 관찰하면 오오(춄춄)『[원망함]』와 서로 유사
하고 또 급속(急速)히 하는 뜻인 듯하다. 구삼(九三)은 내괘(內卦)의 위에 있어 안을 다스림을 주장하는 자이다.
양효(陽爻)가 강위(剛位)에 거하여 중(中)하지 못하니, 비록 정(正)을 얻으나 지나치게 강(剛)한 자이다.
안을 다스림에 지나치게 강(剛)하면 엄하고 급함에 상(傷)하기 때문에 가인(家人)들이 원망하니, 집안을 다스림에
지나치게 엄하면 상(傷)함이 없을 수 없다. 그러므로 반드시 엄함에 뉘우치니, 골육간(骨肉間)에는 은혜가 이겨야
하는데 엄함이 지나치기 때문에 뉘우치는 것이다. 비록 엄함에 뉘우쳐 너그러움과 엄함의 중도(中道)를 얻지
못하였으나, 가도(家道)가 가지런해지고 엄숙하고, 인심(人心)이 공경하고 두려워하니, 오히려 집안의 길(吉)함이
되는 것이요, 만일 부인(婦人)과 자식이 희희(•;•;)하면 끝내 부끄러움에 이르게 된다. 괘(卦)에 있어 희희(•;•;)의
상(象)이 있는 것이 아니요 학학(??)을 상대(相對)하여 말한 것이니, 방사(放肆)함에 잘못되기보다는 차라리 지나
치게 엄해야 하는 것이다. 희희(•;•;)는 웃고 즐거워하기를 절도(節度)없이 하는 것이니, 스스로 방자(放恣)하고
절도(節度)가 없으면 마침내 집안을 망침에 이를 것이니, 부끄러운 일이다.
엄하고 삼감이 지나치면 비록 인정(人情)에는 상(傷)함이 없을 수 없으나 진실로 법도(法度)가 서고 윤리(倫理)가
바르게 되면 이는 바로 은혜(恩惠)와 의리(義理)가 보존되는 것이다. 만약 희희(•;•;)하여 절도(節度)가 없으면
법도(法度)가 이로 말미암아 폐지되고 윤리(倫理)가 이로 말미암아 어지러워지니, 어떻게 집안을 보존하겠는가.
희희(•;•;)함이 심하면 집안을 망치는 흉(凶)함을 이루는데, 다만 부끄럽다고만 말한 것은 부끄러움이 심해지면
흉(凶)함에 이르므로 대번에 흉(凶)하다고 말하지 않은 것이다.』
『【本義】以剛居剛而不中하여 過乎剛者也라 故有??嚴쪵之象하니 如是則雖有悔쪵而吉也라 •;•;者는 ??之反
이니 吝之道也라 占者各以其德爲應이라 故兩言之하니라』
『 강(剛)으로서 강위(剛位)에 거하고 중(中)하지 못하여 강(剛)에 지나친 자이다.
그러므로 학학엄려(??嚴쪵)의 상(象)이 있으니, 이와 같으면 비록 엄함에 뉘우침이 있으나 길(吉)하다. 희희(•;•;)
는 학학(??)의 반대이니 부끄러운 길이다. 점치는 자가 각각 그 덕(德)에 따라 응(應)하기 때문에 두 가지로 말한
것이다.』
『象曰 家人??은 未失也요 婦子•;•;는 失家節也라』
『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가인(家人)이 원망함은 심한 잘못이 아니요 부인(婦人)과 자식이 희희(•;•;)함은
집안의 절도(節度)를 잃은 것이다.”』
『【傳】雖??이나 於治家之道에 未爲甚失이요 若婦子•;•;면 是无禮法하여 失家之節하니 家必亂矣라』
『 비록 원망하나 집안을 다스리는 도(道)에는 심한 잘못이 되지 않고, 만약 부인(婦人)과 자식이 희희(•;•;)하면
이는 예법(禮法)이 없어 집안의 절도(節度)를 잃은 것이니, 집안이 반드시 어지러워질 것이다.』
『六四는 富家니 大吉하니라』
『【本義】大吉하리라』
『 육사(六四)는 집안이 부(富)함이니, 크게 길(吉)하다.』
『 【본의】집안을 부(富)하게 함이니, 크게 길(吉)하리라.』
『【傳】六以巽順之體而居四하여 得其正位하니 居得其正은 爲安處之義라 巽順於事而由正道면 能保有『[一无
有字]』其富者也니 居家之道 能保有『[一无有字]』其富면 則爲大吉也라 四高位而獨云富者는 於家而言이니
高位는 家之尊也라 能有其富면 是能保其家也니 吉孰大焉이리오』
『 육(六)이 손순(巽順)한 체(體)로 사(四)에 거하여 바른 지위를 얻었으니, 거함이 바름을 얻음은 편안히 처하는
뜻이 된다. 일에 손순(巽順)하고 정도(正道)를 따르면 그 부유함을 보유하는 자이니, 집안에 거하는 도(道)가 그
부유(富裕)함을 보유한다면 대길(大吉)이 되는 것이다. 사(四)는 높은 지위인데 다만 부(富)하다고만 말한 것은
집안에 있어서 말한 것이니, 높은 지위는 집안의 높은 지위이다. 부유함을 보유하면 이는 그 집안을 보유하는
것이니, 길(吉)함이 무엇이 이보다 크겠는가.』
『【本義】陽은 主義하고 陰은 主利하니 以陰居陰而在上位하여 能富其家者也라』
『 양(陽)은 의(義)를 주장하고 음(陰)은 이(利)를 주장하니, 음(陰)으로서 음위(陰位)에 거하고 상위(上位)에
있어 그 집안을 부유하게 하는 자이다.』
『象曰 富家大吉은 順在位也일새라』
『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부가대길(富家大吉)’은 순(順)함으로 지위에 있기 때문이다.”』
『【傳】以巽順而居正位하니 正而巽順이면 能保有其富者也니 富家之大吉也라』
『 손순(巽順)함으로 정위(正位)에 거하였으니, 바르고 손순(巽順)하면 그 부유함을 보유하는 자이니,
부가(富家)의 대길(大吉)이다.』
『九五는 王假『(격)』有家니 勿恤하여 吉하리라』
『 구오(九五)는 왕(王)이 집안을 둔 도(道)를 지극히 함이니, 근심하지 않아도 길(吉)하리라.』
『 【본의】왕(王)이 유가(有家)에 이름이니『[집안사람들을 감격(感格)시킴이니]』』
『【傳】九五는 男而在外하고 剛而處陽하고 居尊而中正하며 又其應順正於內하니 治家之至正至善者也라 王假有
家는 五君位라 故以王言이요 假은 至也니 極乎有家之道也라 夫王者之道는 修身以齊家하나니 家正而天下治矣라
自古聖王이 未有不以恭己正家爲本이라 故有家之道旣至면 則不憂勞而天下治矣니 勿恤而吉也라 五恭己於外하고
二正家於內하여 內外同德하니 可謂至矣로다』
『 구오(九五)는 남자(男子)로서 밖에 있고 강(剛)으로서 양(陽)에 처했으며, 존위(尊位)에 거하고 중정(中正)
하며 또 그 응(應)이 안에서 순하고 바르니, 집안을 다스림에 지극히 바르고 지극히 선(善)한 자이다.
‘왕격유가(王假有家)’는 오(五)가 군위(君位)이기 때문에 왕(王)으로 말한 것이요 격(假)은 지극함이니 집을 둔
도(道)를 지극히 하는 것이다. 왕자(王者)의 도(道)는 자기 몸을 닦아 집안을 가지런하게 하니, 집안이 바루어
지면 천하(天下)가 다스려진다. 예로부터 성왕(聖王)은 자기 몸을 공손(恭遜)히 하고 집안을 바로잡음을 근본
으로 삼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집안을 둔 도(道)가 이미 지극해지면 근심하거나 수고롭지 않아도 천하
(天下)가 다스려지니, 이는 근심하지 않아도 길(吉)한 것이다. 오(五)가 밖에서 몸을 공손히 하고 이(二)가 안
에서 집안을 바로잡아 내(內)•외(外)가 덕을 함께 하니, 지극하다고 이를 만하다.』
『【本義】假은 至也니 如假于大『(太)』廟之假이라 有家는 猶言有國也라 九五剛健中正하여 下應六二之柔順
中正하니 王者以是로 至于其家면 則勿用憂恤而吉可必矣라 蓋聘納后妃之吉占이요 而凡有是德者遇之면 皆吉也라』
『 격(假)은 이름이니, ‘태묘(太廟)에 이른다『〔假于太廟〕』’는 격자(假字)와 같다. 유가(有家)는 유국(有國)
이란 말과 같다. 구오(九五)가 강건(剛健)하고 중정(中正)하여 아래로 육이(六二)의 유순중정(柔順中正)에 응하니,
왕자(王者)가 이로써 그 집안에 이르면『[집안사람들을 감격시키면]』 근심을 쓰지 않아도 길(吉)함을 기필할 수
있다. 이는 후비(后妃)를 빙납(聘納)하는 길점(吉占)이요 무릇 이 덕(德)을 가지고 있는 자가 만나면 모두 길(吉)
하다.』
『象曰 王假有家는 交相愛也라』
『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왕격유가(王假有家)’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傳】王假有家之道者는 非止能使之順從而已라 必致其心化誠合하여 夫愛其內助하고 婦愛其刑家하여 交相
愛也니 能如是者는 文王之妃乎인저 若身修法立而家未化면 未得爲假有家之道也라』
『 왕(王)이 집안을 둔 도(道)를 지극히 함은 다만 집안사람들로 하여금 순종하게 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그
마음이 교화(敎化)되고 정성(精誠)이 합하여 남편은 부인의 내조(內助)를 사랑하고 부인(婦人)은 남편의 형가
(刑家)『[집안의 모범이 됨]』를 사랑하여 서로 사랑하여야 하니, 이와 같은 자는 문왕(文王)의 비(妃)일 것이다.
만일 몸이 닦여지고 법(法)이 서더라도 집안이 교화(敎化)되지 않는다면 집안을 둔 도(道)를 지극히 함이 되지
못한다.』
『【本義】程子曰 夫愛其內助하고 婦愛其刑家라하시니라』
『 정자(程子)가 말씀하기를 “남편은 그 내조(內助)를 사랑하고 부인(婦人)은 그 형가(刑家)를 사랑한다.” 하였다.』
『上九는 有孚하고 威如면 終吉하리라』
『 상구(上九)는 정성이 있고 위엄이 있으면 마침내 길(吉)하리라.』
『【傳】上은 卦之終이니 家道之成也라 故極言治家之本하니 治家之道는 非至誠이면 不能也라 故必中有孚信이면
則能常久而衆人自化爲善이요 不由至誠이면 己且不能常守也니 況欲使『[一作使衆]』人乎아 故治家는 以有孚爲
本이라 治家者는 在妻쩀情愛之間하니 慈過則无嚴하고 恩勝則掩義라 故家之患은 常在禮法不足而瀆慢生也니 長
失尊嚴하고 少忘恭順而家不亂者는 未之有也라 故必有威嚴則能終吉이라 保家之終은 在有孚威如二者而已라 故
於卦終言之라』
『 상(上)은 괘(卦)의 종(終)이니, 가도(家道)가 완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집안을 다스리는 근본(根本)을
극언(極言)하였으니, 집안을 다스리는 도(道)는 지성(至誠)이 아니면 안 된다. 그러므로 반드시 마음속에 부신
(孚信)이 있으면 항상하고 오래하여 중인(衆人)들이 스스로 교화(敎化)되어 선(善)을 하게 된다. 지성(至誠)을 말미
암지 않는다면 자기 몸도 떳떳이 지키지 못할 것이니, 하물며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집안을 다스림은 믿음이 있음을 근본으로 삼는다. 집안을 다스리는 자가 처노(妻쩀)『[처자식]』를
정애(情愛)하는 사이에서 사랑이 지나치면 엄(嚴)함이 없고 은혜가 앞서면 의(義)를 가리게 된다.
그러므로 집안의 병통은 항상 예법(禮法)이 부족하여 설만(褻慢)함이 생김에 있으니, 어른이 존엄(尊嚴)함을 잃고
젊은이가 공손(恭遜)함을 잃고서 집안이 어지럽지 않은 경우는 있지 않다. 그러므로 반드시 위엄(威嚴)이 있으면
마침내 길(吉)한 것이다. 집안을 잘 보존하여 마침은 유부(有孚)와 위여(威如) 두 가지에 있을 뿐이므로 괘(卦)의
끝에 말한 것이다.』
『【本義】上九以剛居上하여 在卦之終이라 故言正家久遠之道하니 占者必有誠信嚴威則終吉也라』
『 상구(上九)는 강효(剛爻)가 상(上)에 거하여 괘(卦)의 종(終)에 있기 때문에 집안을 바르게 함에 오래하는
방법을 말하였으니, 점치는 자가 반드시 성신(誠信)과 위엄(威嚴)이 있으면 마침내 길(吉)할 것이다.』
『象曰 威如之吉은 反身之謂也라』
『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위여(威如)의 길(吉)함은 자기 몸에 돌이켜 살핌을 말한 것이다.”』
『【傳】治家之道는 以正身爲本이라 故云反身之謂라 爻辭에 謂治家當有威嚴이라하여늘 而夫子又復戒云當先嚴
其身也라 威嚴이 不先行於己면 則人怨而不服이라 故云威如而吉者는 能自反於身也라하니 孟子所謂身不行道면
不行於妻子也라』
『 집안을 다스리는 도(道)는 자기 몸을 바로잡음을 근본으로 삼기 때문에 자기 몸에 돌이킨다고 말한 것이다.
효사(爻辭)에 ‘집안을 다스림에는 마땅히 위엄(威嚴)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부자(夫子)께서 또 다시
“마땅히 먼저 자기 몸을 엄격(嚴格)히 하라.”고 경계(警戒)하신 것이다. 위엄(威嚴)이 먼저 자기 몸에 행해지지
않으면 사람들이 원망하고 복종(服從)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위엄(威嚴)이 있어 길(吉)함은 스스로 자기 몸에
돌이키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니, 맹자(孟子)의 이른바 “자신이 도(道)를 행하지 않으면 처자(妻子)에게 행해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本義】謂非作威也요 反身自治면 則人畏服之矣라』
『 위엄(威嚴)을 일으킴이 아니요 자기 몸에 돌이켜 스스로 다스리면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복종함을 말한 것이다.』
*주역 ; 주역하경 ; 38. 규
38. 규(¤6)
『&Jgua38.tif규(¤6)L』
『【傳】¤6는 序卦에 家道窮必乖라 故受之以¤6하니 ¤6者는 乖也라하니라 家道窮則¤6乖離散은 理必然也라 故家
人之後에 受之以¤6也라 爲卦 上離下兌하니 離火炎上하고 兌澤潤下하여 二體相違는 ¤6之義也라 又中少二女 雖同
居而所歸各異하니 是其志不同行也니 亦爲¤6義라』
『 규괘(¤6卦)는 〈서괘전(序卦傳)〉에 “가도(家道)는 궁(窮)하면 반드시 어그러지므로 규괘(¤6卦)로 받았으니,
규(¤6)는 어그러짐이다.” 하였다. 가도(家道)가 궁하면 어그러지고 이산(離散)됨은 필연적(必然的)인 이치이다.
그러므로 가인괘(家人卦)의 뒤에 규괘(¤6卦)로써 받은 것이다. 괘(卦)됨이 위는 이(離)이고 아래는 태(兌)이니,
이(離)의 불은 불타고 올라가고 태(兌)의 못은 적시고 내려가서 두 체(體)가 서로 어김이 규(¤6)의 뜻이다.
또 중녀(中女)와 소녀(少女) 두 여자(女子)가 비록 함께 사나 돌아가는『[시집가는]』 바가 각기 다르니,
이는 그 뜻이 한 가지로 가지 않음이니, 또한 규(¤6)의 뜻이 된다.』
『규는 小事는 吉하리라』
『 규(¤6)는 작은 일은 길(吉)하리라.』
『【傳】¤6者는 ¤6乖離散之時니 非吉道也로되 以卦才之善이라 雖處¤6時나 而小事吉也라』
『 규(¤6)는 어긋나고 이산(離散)하는 때이니, 길(吉)한 방도가 아니나 괘재(卦才)가 선(善)하기 때문에 규(¤6)의
때에 처하여도 작은 일은 길(吉)한 것이다.』
『【本義】¤6는 乖異也라 爲卦上火下澤하여 性相違異하며 中女少女 志不同歸라 故爲¤6라 然以卦德言之하면 內
說而外明이요 以卦變言之하면 則自離來者는 柔進居三하고 自中孚來者는 柔進居五하고 自家人來者는 兼之하며
以卦體言之하면 則六五得中而下應九二之剛이라 是以로 其占이 不可大事나 而小事尙有吉之道也라』
『 규(¤6)는 어긋나고 다름이다. 괘(卦)됨이 위는 불이고 아래는 못이어서 성질이 서로 어긋나고 다르며 중녀
(中女)와 소녀(少女)가 뜻이 한 가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규(¤6)가 된 것이다. 그러나 괘덕(卦德)으로
말하면 안은 기뻐하고 밖은 밝으며, 괘변(卦變)으로 말하면 이괘(離卦)『[『&gua30.tif』]』로부터 온 것은
유(柔)가 나아가 삼(三)에 거하고, 중부괘(中孚卦)『[『&gua61.tif』]』로부터 온 것은 유(柔)가 나아가 오(五)에
거하고, 가인괘(家人卦)『[『&gua37.tif』]』로부터 온 것은 이를 겸하였으며, 괘체(卦體)로 말하면 육오(六五)
가 중(中)을 얻고 아래로 구이(九二)의 강(剛)에 응(應)한다. 이 때문에 그 점(占)이 큰 일은 할 수 없으나 작은
일은 오히려 길(吉)할 방도가 있는 것이다.』
『彖曰 ¤6는 火動而上하고 澤動而下하며 二女同居하나 其志不同行하니라』
『 〈단전(彖傳)〉에 말하였다. “규(¤6)는 불은 움직여 올라가고 못은 움직여 내려가며, 두 여자(女子)가 함께
사나 그 뜻이 한 가지로 가지 않는다.』
『【傳】彖은 先釋¤6『[一无¤6字]』義『[一作意]』하고 次言卦才하고 終言合¤6之道而贊其時用之大라 火之性은
動而上하고 澤之性은 動而下하여 二物之性違異라 故爲¤6義요 中少二女 雖同居하나 其志不同行하니 亦爲¤6義라
女之少也엔 同處라가 長則各適其歸하니 其志異也라 言¤6者는 本同也니 本不同則非¤6也라』
『 〈단전(彖傳)〉에서 먼저는 규(¤6)의 뜻을 해석하고 다음에는 괘재(卦才)를 말하고 끝에는 규(¤6)를 합하는
도(道)를 말하고 때와 용(用)의 큼을 칭찬하였다. 불의 성질은 움직여 올라가고 못의 성질은 움직여 내려가서,
두 물건의 성질이 어긋나고 다르기 때문에 규(¤6)의 뜻이 되었으며, 중녀(中女)와 소녀(少女) 두 여자(女子)가
비록 함께 사나 그 뜻이 한 가지로 가지 않으니, 또한 규(¤6)의 뜻이 된다. 여자(女子)가 어렸을 때에는 함께
살다가 장성(長成)하면 각기 돌아갈『[시집갈]』 곳으로 가니, 이는 그 뜻이 다른 것이다. 규(¤6)라고 말한 것은
본래 같았던 것이니, 본래 같지 않았다면 규(¤6)가 아니다.』
『【本義】以卦象으로 釋卦名義라』
『 괘상(卦象)으로 괘명(卦名)의 뜻을 해석하였다.』
『說而麗乎明하고 柔進而上行하여 得中而應乎剛이라 是以小事吉이니라』
『 기뻐하고 밝음에 붙으며 유(柔)가 나아가 위로 가서 중(中)을 얻어 강(剛)에 응(應)한다. 이 때문에 작은 일은
길(吉)한 것이다.』
『【傳】卦才如此하니 所以小事吉也라 兌는 說也요 離는 麗也며 又爲明이라 故爲說順而附麗於明이라 凡離在上
에 而彖欲見柔居尊者면 則曰柔進而上行이라하니 晉鼎이 是也라 方¤6乖之時하여 六五以柔居尊位하여 有說順麗
明之善하고 又得中道而應剛하니 雖不能合天下之¤6하여 成天下之大事나 亦可以小濟니 是於小事吉也라 五以明
而應剛이어늘 不能致大吉은 何也오 曰 五는 陰柔니 雖應二나 而¤6之時에 相與之道未能深固라 故二必遇主于巷
하고 五챡膚則无咎也라 天下¤6散之時에 必君臣剛陽中正하고 至誠協力而後能合也라』
『 괘재(卦才)가 이와 같으니, 이 때문에 작은 일은 길(吉)한 것이다. 태(兌)는 기뻐함이요 이(離)는 붙음이며
또 밝음이 된다. 그러므로 기뻐하고 순종하며 밝음에 붙음이 되는 것이다. 무릇 이(離)가 위에 있을 적에
〈단전(彖傳)〉에서 유(柔)가 존위(尊位)에 거함을 나타내고자 하면 유(柔)가 나아가 위로 갔다고 말하니,
진괘(晉卦)와 정괘(鼎卦)가 이것이다. 규괴(¤6乖)의 때를 당하여 육오(六五)가 유(柔)로서 존위(尊位)에 거하여
기뻐하고 순종하고 밝음에 붙는 선(善)이 있고, 또 중도(中道)를 얻어 강(剛)에 응(應)하니, 비록 천하(天下)의 어긋
남을 합하여 천하(天下)의 대사(大事)를 이루지는 못하나 또한 작은 것은 이룰 수 있으니, 이는 작은 일에는 길(吉)
한 것이다. 오(五)가 밝음으로 강(剛)에 응(應)하는데 대길(大吉)을 이루지 못함은 어째서인가? 오(五)는 음유(陰柔)
이니, 비록 이(二)에 응(應)하나 규(¤6)의 때에 서로 함께 하는 도(道)가 깊고 견고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이효(二爻)는 반드시 군주(君主)를 골목에서 만나고 오효(五爻)는 살을 깨물듯이 하면 허물이 없는 것
이다. 천하(天下)가 규산(¤6散)하는 때에는 반드시 군신(君臣)이 강양(剛陽) 중정(中正)하고 지성(至誠)으로 협력
한 뒤에야 합할 수 있는 것이다.』
『【本義】以卦德卦變卦體로 釋卦辭라』
『 괘덕(卦德)과 괘변(卦變)과 괘체(卦體)로 괘사(卦辭)를 해석하였다.』
『天地¤6而其事同也며 男女¤6而其志通也며 萬物¤6而其事類也니 ¤6之時用이 大矣哉라』
『 천지(天地)가 다르나 그 일이 같으며, 남녀(男女)가 다르나 그 뜻이 통하며, 만물이 다르나 그 일이 같으니,
규(¤6)의 때와 용(用)이 크다.”』
『【傳】推物理之同하여 以明¤6之時用하니 乃聖人合¤6之道也라 見同之爲同者는 世俗之知也요 聖人則明物理之
本同하니 所以能同天下而和合萬類也라 以天地男女萬物로 明之하니 天高地下는 其體¤6也라 然陽降陰升하여 相
合而成化育之事則同也요 男女異質은 ¤6也나 而相求之志則通也요 生物萬殊는 ¤6也나 然而得天地之和하고 µ;陰
陽之氣則相類也라 物雖異而理本同故로 天下之大와 群生之衆이 ¤6散萬殊나 而聖人爲能同之라 處¤6之時하여
合¤6之用하니 其事至大라 故云大矣哉라하니라』
『 사물의 이치가 같음을 미루어서 규(¤6)의 때와 용(用)을 밝혔으니, 이는 바로 성인(聖人)이 규(¤6)를 합하는
도(道)이다. 같음이 같은 것을 보는 것은 세속의 지혜이고, 성인(聖人)은 물리(物理)가 본래 같음을 밝게 아니,
이 때문에 천하(天下)를 함께 하여 만 가지 종류를 화합하게 하는 것이다. 천지(天地)와 남녀(男女)와 만물(萬物)
로써 밝혔으니, 하늘은 높고 땅은 낮음은 그 체(體)가 규(¤6)이나 양(陽)이 내려오고 음(陰)이 올라가서 서로 합
하여 화육(化育)의 일을 이룸은 같고, 남녀(男女)가 성질(性質)이 다름은 규(¤6)이나 서로 구하는 뜻은 통하며,
생물(生物)이 만 가지로 다름은 규(¤6)이나 천지(天地)의 화(和)를 얻고 음양(陰陽)의 기(氣)를 받은 것은 서로
같다. 물건이 비록 다르나 이치는 본래 같기 때문에 천하(天下)의 큼과 군생(群生)의 많음이 규산(¤6散)하여 만
가지로 다르나 성인(聖人)이 같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규(¤6)의 때에 처하여 규(¤6)의 용(用)에 합하니,
그 일이 지극히 크다. 그러므로 ‘대의재(大矣哉)’라고 말한 것이다.』
『【本義】極言其理而贊之라』
『 그 이치(理致)를 극언(極言)하고 칭찬한 것이다.』
『象曰 上火下澤이 ¤6니 君子以하여 同而異하나니라』
『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위는 불이고 아래는 못인 것이 규(¤6)이니, 군자가 보고서 같으면서도 다르게
한다.”』
『【傳】上火下澤하여 二物之性違異하니 所以爲¤6離之象이라 君子觀¤6異之象하여 於大同之中而知所當異也라
夫聖賢之處世에 在人理之常하여는 莫不大同이요 於世俗所同者엔 則有時而獨異하니 蓋於秉彛則同矣요 於世俗
之失則異也라 不能大同者는 亂常拂理之人也요 不能獨異者는 隨俗習非之人也니 要在同而能異耳라 中庸曰和而
不流是也라』
『 위는 불이고 아래는 못이어서 두 물건의 성질이 어긋나고 다르니, 이 때문에 규리(¤6離)의 상(象)이 된 것이다.
군자는 규이(¤6異)의 상(象)을 관찰하여 크게 같은 가운데에서 마땅히 달리 할 바를 안다. 성현(聖賢)이 세상에
삶에 사람의 도리(道理)의 떳떳함에 있어서는 크게 같지 않음이 없고, 세속(世俗)의 똑같이 하는 바에 있어서는
때로 홀로 다르게 할 때가 있으니, 병이(秉彛)에 있어서는 같고 세속(世俗)의 잘못에 있어서는 다른 것이다.
크게 같이 하지 못하는 자는 상도(常道)를 어지럽히고 이치(理致)를 어기는 사람이요, 홀로 다르게 하지 못하는
자는 세속을 따라 나쁜 것을 익히는 사람이니, 요컨대 같으면서 달리함에 있을 뿐이다.
《중용(中庸)》에 “화(和)하면서도 흐르지 않는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本義】二卦合體而性不同이라』
『 두 괘(卦)가 체(體)는 합하였으나 성질(性質)은 같지 않다.』
『初九는 悔亡하니 喪馬하고 勿逐하여도 自復이니 見惡人하면 无咎리라』
『【本義】見惡人이라야』
『 초구(初九)는 뉘우침이 없어지니, 말을 잃고 쫓지 않아도 스스로 돌아올 것이니, 악인(惡人)『[사이가 나쁜
사람]』을 만나보면 허물이 없으리라.』
『 【본의】나쁜 사람을 만나야』
『【傳】九居卦初하니 ¤6之始也라 在¤6乖之時하여 以剛動於下하니 有悔可知로되 所以得亡者는 九四在上하여
亦以剛陽으로 ¤6離无與하여 自然同類相合이요 同是陽爻로 同居下하고 又當相應之位하니 二陽은 本非相應者
로되 以在¤6故로 合也요 上下相與故로 能亡其悔也라 在¤6엔 諸爻皆有應이라 夫合則有¤6하니 本異則何¤6리오
唯初與四는 雖非應이나 而同德相與라 故相遇라 馬者는 所以行也라 陽은 上行者也로되 ¤6獨无與하여 則不能行
하니 是喪其馬也나 四旣與之合이면 則能行矣니 是勿逐而馬復得也라 惡人은 與己乖異者也요 見者는 與相通也
라 當¤6之時하여 雖同德者相與나 然小人乖異者至衆하니 若棄絶之면 不幾盡天下以仇君子乎아 如此則失含弘之
義하여 致凶咎之道也니 又安能化不善而使之合乎아 故必見惡人則无咎也라 古之聖王이 所以能化姦凶爲善良
하고 革仇敵爲臣民者는 由弗絶也라』
『 구(九)는 괘(卦)의 초(初)에 거하였으니, 규(¤6)의 초기이다. 규괴(¤6乖)의 때에 있어 강(剛)으로서 아래에
동(動)하니, 뉘우침이 있음을 알 수 있으나 뉘우침이 없어지는 까닭은, 구사(九四)가 위에 있어 또한 강양(剛陽)
으로 규리(¤6離)하여 친한 이가 없어 자연 동류(同類)끼리 합하게 되고, 똑같이 양효(陽爻)로 함께 아래에 거하
였으며, 또 서로 응(應)하는 자리에 당하였으니, 두 양(陽)은 본래 서로 응(應)하는 자가 아니나 규(¤6)에 있기
때문에 합하는 것이요, 상하(上下)가 서로 친하기 때문에 그 뉘우침이 없어지는 것이다. 규(¤6)에 있어서는 여러
효(爻)가 모두 응(應)이 있다. 합하면 떠남이 있으니, 본래 달리 있었다면 무슨 떠남이 있겠는가.
초(初)와 사(四)는 비록 정응(正應)이 아니나 덕(德)이 같아 서로 친하므로 서로 만난 것이다. 말은 가는 것이다.
양(陽)은 위로 가는 자인데 어긋나고 고독하여 친한 이가 없어 갈 수가 없으니 이는 그 말을 잃은 것이나,
사(四)가 이미 초(初)와 합하면 갈 수가 있으니 이는 쫓지 않아도 다시 말을 얻은 것이다.』
『 악인(惡人)은 자기와 어긋나고 다른 자이고, 견(見)은 더불어 서로 통하는 것이다. 규(¤6)의 때를 당하여 비록
덕(德)이 같은 자와 서로 친하나 소인(小人) 중에 어그러지고 다른 자가 지극히 많으니, 만일 이들을 버리고 끊
으면 천하(天下)를 다하여 군자(君子)를 원수(怨讐)로 삼음에 가깝지 않겠는가. 이와 같으면 함홍(含弘)의 뜻을
잃어 흉구(凶咎)를 이루는 길이니, 또 어떻게 불선(不善)한 자들을 교화(敎化)시켜 합하게 하겠는가.
그러므로 반드시 자기와 사이가 나쁜 사람을 만나보면 허물이 없는 것이다. 옛 성왕(聖王)이 간흉(姦凶)을 교화
(敎化)시켜 선량한 사람을 만들고 원수(怨讐)와 적(敵)을 바꾸어 신민(臣民)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끊지
않았기 때문이다.』
『【本義】上无正應하니 有悔也로되 而居¤6之時하여 同德相應하여 其悔亡矣라 故有喪馬勿逐而自復之象이라
然亦必見惡人然後可以µ?『(避)』咎니 如『孔子之於陽貨주:공자지어양화』也라』
『 위에 정응(正應)이 없으니 뉘우침이 있을 것이나 규(¤6)의 때에 거하여 동덕(同德)으로 서로 응(應)하여 뉘우
침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을 잃음에 쫓지 않아도 저절로 돌아오는 상(象)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반드시 자기와 사이가 나쁜 사람을 만나본 뒤에야 허물을 피할 수 있으니, 공자(孔子)가 양화(陽貨)
에 있어서와 같은 것이다.』
『象曰 見惡人은 以µ?『(避)』咎也라』
『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악인(惡人)을 만나봄은 허물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傳】¤6離之時에 人情乖違하니 求和合之라도 且病其不『[一作未]』能得也어든 若以惡人而拒絶之면 則將衆
仇於君子而禍咎至矣라 故必見之는 所以免µ?怨咎也니 无怨咎則有可合之道라』
『 규리(¤6離)의 때에는 인정이 어그러지고 어긋나니, 화합(和合)하기를 구(求)하여도 될 수 없을까 근심하는데
만일 악인(惡人)이라 하여 거절한다면 장차 사람들이 군자(君子)를 원수(怨讐)로 삼아 화(禍)와 허물이 이를 것
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악인(惡人)을 만나봄은 원망과 허물을 면하고 피하는 것이니, 원망과 허물이 없으면 합할
수 있는 방도가 있다.』
『九二는 遇主于巷하면 无咎리라』
『【本義】遇主于巷이라야』
『 구이(九二)는 군주(君主)를 골목에서 〈은밀히〉 만나면 허물이 없으리라.』
『 【본의】군주(君主)를 골목에서 만나야』
『【傳】二與五正應이니 爲相與者也라 然在¤6乖之時하여 陰陽相應之道衰하고 而剛柔相戾之意勝하니 學易者識
此則知變通矣라 故二五雖正應이나 當委曲以相求也라 二以剛中之德으로 居下하여 上應六五之君하니 道合則志
行하여 成濟¤6之功矣로되 而居¤6離之時하여 其交非固하니 二當委曲求於相遇하여 쨤其得合也라 故曰遇主于巷
이라하니 必能合而後无咎라 君臣¤6離면 其咎大矣라 巷者는 委曲之途也요 遇者는 會逢之謂也니 當委曲相求하여
期於會遇하여 與之合也라 所謂委曲者는 以善道宛轉將就하여 使合而已요 非枉己屈道也라』
『 이(二)는 오(五)와 정응(正應)이니 서로 친한 자가 되나 규괴(¤6乖)의 때에 있어 음(陰)•양(陽)이 서로 응(應)
하는 도(道)가 쇠(衰)하고 강(剛)•유(柔)가 서로 어그러지는 뜻이 우세하니, 역(易)을 배우는 자가 이것을 알면
변통(變通)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이(二)와 오(五)가 비록 정응(正應)이나 마땅히 위곡(委曲)히『[곡진하게]』
서로 구해야 한다. 이(二)가 강중(剛中)의 덕(德)으로 아래에 거하여 위로 육오(六五)의 군주(君主)와 응(應)
하니, 도(道)가 합하면 뜻이 행해져서 규(¤6)를 구제(救濟)하는 공(功)을 이룰 수 있으나 규리(¤6離)의 때에
거하여 그 사귐이 견고하지 못하니, 이(二)가 마땅히 위곡(委曲)히 서로 만나기를 구하여 합하기를 바라야 한다.
그러므로 군주(君主)를 골목에서 만난다 하였으니, 반드시 합한 뒤에야 허물이 없는 것이다. 군(君)•신(臣)이
규리(¤6離)하면 그 허물이 크다. 항(巷)은 굽은 길이요 우(遇)는 모이고 만남을 이르니, 마땅히 위곡(委曲)히
서로 구하여 모이고 만나기를 기약해서 더불어 합해야 한다. 이른바 위곡(委曲)은 선(善)한 도(道)로 완전(宛轉)
『[완곡히 돌림]』하고 장취(將就)『[억지로 성취시킴]』하여 합하게 할 뿐이요, 몸을 굽히고 도(道)를 굽히는
것은 아니다.』
『【本義】二五陰陽正應이로되 居¤6之時하여 乖戾不合하니 必委曲相求而得會遇라야 乃爲无咎라 故其象占如此
하니라』
『 이(二)와 오(五)는 음(陰)•양(陽)의 정응(正應)이나 규(¤6)의 때에 거하여 어긋나서 합하지 못하니,
반드시 위곡(委曲)히 서로 구(求)하여 모이고 만나야 허물이 없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상(象)과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象曰 遇主于巷이 未失道也라』
『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군주(君主)를 골목에서 만남은 도(道)를 잃는 것은 아니다.”』
『【傳】當¤6之時하여 君心未合하니 賢臣在下에 竭力盡誠하여 期使之信合而已라 至誠以感動之하고 盡力以扶
持之하며 明義理以致其知하고 杜蔽惑以誠其意하여 如是宛轉하여 以求其合也라 遇는 非枉道迎逢也요 巷은
非邪僻由徑也라 故夫子特云遇主于巷이 未失道也라하시니 未는 非必也니 非必謂失道也라』
『 규(¤6)의 때를 당하여 군주(君主)의 마음이 합하지 않으니, 현신(賢臣)이 아래에 있음에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믿고 합하게 하기를 기약할 뿐이다. 지성(至誠)으로 감동시키고 힘을 다하여 부지하며, 의리(義理)를 밝혀
그 앎을 지극히 하고 가리움과 미혹됨을 막아 그 뜻을 성실히 하여 이와 같이 완전(宛轉)해서 합하기를 구해야
한다. 우(遇)는 도(道)를 굽혀 영봉(迎逢)『[군주(君主)의 뜻에 영합]』하는 것이 아니고, 항(巷)은 사벽(邪僻)
하여 지름길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부자(夫子)께서 특별히 말씀하기를 “군주(君主)를 골목에서 만남
은 도(道)를 잃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셨으니, 미(未)는 반드시는 아니니, 반드시 도를 잃는 것은 아님을 말씀한
것이다.』
『【本義】本其正應이요 非有邪也라』
『 본래 정응(正應)이요 사(邪)가 있는 것이 아니다.』
『六三은 見輿曳하고 其牛?하며 其人이 『天且¯주:천차의』니 无初하고 有終이리라』
『 육삼(六三)은 수레가 뒤로 끌리고 소가 앞이 가로막히며, 그 사람이 머리가 깎이고 코가 베임을 보니,
초(初)는 없고 종(終)은 있으리라.』
『【傳】陰柔는 於平時에도 且不足以自立이어든 況當¤6離之際乎아 三居二剛之間하여 處不得其所安하니 其見侵
陵을 可知矣라 三以正應在上하여 欲進與上合志로되 而四阻於前하고 二牽於後하니 車牛는 所以行之具也라 輿曳
는 牽於後也요 牛?은 阻於前也니 在後者는 牽曳之而已요 當前者는 進者之所力犯也라 故重傷於上하니 爲四所傷
也라 其人天且¯는 天은 쥁首也요 ¯는 截鼻也라 三從正應而四隔止之하니 三雖陰柔나 處剛而志行이라 故力進以犯
之하니 是以傷也라 天而又¯는 言重傷也라 三不合於二與四하니 ¤6之時에 自无合義요 適合居剛守正之道也라 其於
正應則¤6極하여 有終合之理하니 始爲二陽所厄은 是无初也요 後必得合은 是有終也라 ?는 從制從手하니 執止之義也라』
『 음유(陰柔)는 평시에도 스스로 설 수가 없는데 하물며 규리(¤6離)의 때를 당함에 있어서랴. 삼(三)은 두 강효
(剛爻)의 사이에 거하여 처함이 편안함을 얻지 못하였으니, 침해(侵害)와 능멸(陵蔑)을 당함을 알 수 있다.
삼(三)은 정응(正應)이 위에 있어 나아가 상(上)과 뜻을 합하고자 하나 사(四)가 앞에서 가로막고 이(二)가 뒤에서
끄니, 수레와 소는 가는 도구이다. 여예(輿曳)는 뒤에서 끄는 것이요 우철(牛?)은 앞에서 가로막는 것이니, 뒤에
있는 것은 끌 뿐이요 앞을 가로막는 것은 나아가는 자가 힘써 범하므로 위에 거듭 상(傷)하니, 사(四)에게 상(傷)
함을 당하는 것이다. ‘기인천차의(其人天且¯)’는 천(天)은 머리를 깎임이요 의(¯)는 코를 베임이다. 삼(三)이 정응
(正應)을 따르려 하나 사(四)가 가로막아 그치게 하니, 삼(三)이 비록 음유(陰柔)이나 강(剛)에 처하여 가는 데에
뜻을 두기 때문에 힘써 나아가 범(犯)하니, 이 때문에 상(傷)함을 당하는 것이다. 머리가 깎이고 또 코가 베임은
거듭 상(傷)함을 말한 것이다. 삼(三)은 이(二)와 사(四)에 합하지 못하니, 규(¤6)의 때에 스스로 합하는 뜻이 없고,
다만 강(剛)에 거하여 정(正)을 지키는 도(道)와 합한다. 정응(正應)에 있어서는 규(¤6)가 지극하여 끝내 합할
이치가 있으니, 처음에 두 양(陽)에게 곤액(困厄)을 당함은 초(初)가 없는 것이요, 뒤에 반드시 합함은 종(終)이
있는 것이다. 철(?)은 제(制)를 따르고 수(手)를 따랐으니, 잡아 멈추는 뜻이다.』
『【本義】六三이 上九正應而三居二陽之間하여 後爲二所曳하고 前爲四所?하고 而當¤6之時하여 上九猜Ì_方深
이라 故又有쥁¯之傷이라 然邪不勝正하여 終必得合이라 故其象占如此하니라』
『 육삼(六三)은 상구(上九)와 정응(正應)인데 삼(三)이 두 양(陽)의 사이에 거하여 뒤로는 이(二)에게 끌림을
당하고 앞으로는 사(四)에게 저지를 당하며, 규(¤6)의 때를 당하여 상구(上九)가 시기(猜忌)하고 원망함이 깊기
때문에 머리가 깎이고 코가 베이는 상(傷)함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邪)는 정(正)을 이기지 못하여 끝내는
반드시 합한다. 이 때문에 그 상(象)과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象曰 見輿曳는 位不當也요 无初有終은 遇剛也일새라』
『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여예(輿曳)를 당함은 자리가 마땅하지 않기 때문이요 초(初)는 없으나 종(終)이
있음은 강(剛)을 만나기 때문이다.”』
『【傳】以六居三은 非正也니 非正則不安이요 又在二陽之間하니 所以有如是艱厄이니 由位不當也라 无初『[一
有而字]』有終者는 終必與上九相遇而合이니 乃遇剛也라 不正而合이면 未有久而不離者也어니와 合以正道면 自
无終¤6之理라 故賢者順理而安行하고 智者知幾而固守니라』
『 육(六)이 삼(三)에 거함은 정(正)이 아니니, 정(正)이 아니면 편안하지 못하고, 또 두 양(陽)의 사이에 있으니,
이 때문에 이와 같이 어려움과 곤액이 있는 것이니, 자리가 마땅하지 않기 때문이다. 초(初)는 없으나 종(終)이
있다는 것은 종말(終末)에는 반드시 상구(上九)와 서로 만나 합할 것이니, 이는 바로 강(剛)을 만나는 것이다.
바르지 못하면서 합하면 오래됨에 떠나지 않는 자가 없거니와 정도(正道)로써 합한다면 스스로 끝내 헤어질
이치가 없다. 그러므로 현자(賢者)는 이치를 순히 하여 편안히 행하고 지혜로운 자는 기미(幾微)를 알아 굳게
지키는 것이다.』
『九四는 ¤6孤하여 遇『元夫주:원부』하여 交孚니 쪵하나 无咎리라』
『【本義】쪵하여야』
『 구사(九四)는 규(¤6)에 외로워 훌륭한 남편을 만나 서로 믿으니,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으리라.』
『 【본의】위태롭게 여겨야』
『【傳】九四當¤6時하여 居非所安이요 无應而在二陰之間하니 是¤6離孤處者也라 以剛陽之德으로 當¤6離之時
하여 孤立无與하니 必以氣類相求而合이라 是以遇元夫也라 夫는 陽稱이요 元은 善也라 初九當¤6之初하여 遂能與
同德而亡¤6之悔하니 處¤6之至善者也라 故目之爲元夫하니 猶云善士也라 四則過中하여 爲¤6已甚하니 不若初之善
也라 四與初 皆以陽處一卦之下하여 居相應之位하니 當¤6乖之時하여 各无應援하여 自然同德相親이라 故會遇也
라 同德相遇면 必須至誠相與니 交孚는 各有孚誠也라 上下二陽이 以至誠相合이면 則何時之不能行이며 何危之不
能濟리오 故雖處『[一无處字]』危쪵而无咎也라 當¤6離之時하여 孤居二陰之間하고 處不當位하니 危且有咎也로
되 以遇元夫而交孚라 故得无咎也라』
『 구사(九四)는 규(¤6)의 때를 당하여 거함이 편안한 곳이 아니요 응(應)이 없으며 두 음(陰)의 사이에 있으니,
이는 규리(¤6離)에 외롭게 처하는 자이다. 강양(剛陽)의 덕(德)으로 규리(¤6離)의 때를 당하여 고립하여 더부는
자가 없으니, 반드시 기류(氣類)『[뜻이 통하는 사람]』로 서로 찾아 합해야 한다. 이 때문에 원부(元夫)를 만난
것이다. 부(夫)는 양(陽)을 칭하고 원(元)은 선(善)이다. 초구(初九)가 규(¤6)의 초(初)를 당하여 마침내 구사
(九四)와 더불어 덕(德)을 함께 하여 규(¤6)의 뉘우침을 없앴으니, 규(¤6)에 지극히 잘 대처한 자이다.
그러므로 지목하여 원부(元夫)라 하였으니, 선사(善士)라는 말과 같다. 사(四)는 중(中)을 지나 규(¤6)가 됨이
너무 심하니, 초(初)의 선(善)함만 못하다. 사(四)와 초(初)가 모두 양(陽)으로 한 괘(卦)의 아래에 처하여 서로 응
하는 자리에 거하였으니, 규괴(¤6乖)의 때를 당하여 각기 응원(應援)이 없어서 자연 덕(德)이 같은 자와 서로 친
하기 때문에 회우(會遇)한 것이다. 덕(德)이 같은 자와 서로 만나면 반드시 지성(至誠)으로 서로 함께 하여야 하니,
교부(交孚)는 각기 부성(孚誠)이 있는 것이다. 위아래의 두 양(陽)이 지성(至誠)으로 서로 합하면 어느 때인들 행
(行)하지 못하며 어떤 위험인들 구제하지 못하겠는가. 그러므로 비록 위려(危쪵)에 처하나 허물이 없는 것이다.
규리(¤6離)의 때를 당하여 외롭게 두 음(陰)의 사이에 거하고, 처함이 마땅한 자리가 아니니, 위험하고 또 허물이
있을 것이나 원부(元夫)를 만나 서로 믿기 때문에 허물이 없게 된 것이다.』
『【本義】¤6孤는 謂无應이요 遇元夫는 謂得初九라 交孚는 謂同德相信이라 然當¤6時라 故必危쪵라야 乃得无咎
니 占者亦如是也라』
『 규고(¤6孤)는 응(應)이 없음을 이르고 원부(元夫)를 만남은 초구(初九)를 얻음을 이른다. 교부(交孚)는
덕(德)이 같아 서로 믿음을 이른다. 그러나 규(¤6)의 때를 당하였기 때문에 반드시 위태롭게 여기고 두려워해야
허물이 없을 수 있으니, 점치는 자도 이와 같다.』
『象曰 交孚无咎는 志行也리라』
『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서로 믿어 허물이 없음은 뜻이 행해지리라.”』
『【傳】初, 四는 皆陽剛君子니 當¤6乖之時하여 上下以至誠相交하여 協志同力이면 則其志可以行이요 不止无咎
而已라 『卦辭엔 但言无咎주:괘사단언무구』어늘 夫子又從而明之云 可以行其志하여 救時之¤6也라하시니라 蓋
以君子陽剛之才而至誠相輔면 何所不能濟也리오 唯有君則能行其志矣리라』
『 초(初)와 사(四)는 모두 양강(陽剛) 군자(君子)이니, 규괴(¤6乖)의 때를 당하여 상(上)•하(下)가 지성(至誠)
으로 서로 사귀어 뜻을 합하고 힘을 함께 하면 그 뜻이 행해질 것이요 다만 허물이 없을 뿐만이 아니다.
괘사(卦辭)에는 다만 ‘무구(无咎)’라고 말했는데 부자(夫子)가 또 따라서 밝히시기를 “그 뜻을 행하여 때의 규리
(¤6離)를 구제할 수 있다.”고 하신 것이다. 군자(君子) 양강(陽剛)의 재질(才質)로 지성(至誠)으로 서로 도우면
어느 것인들 구제하지 못하겠는가. 오직 군주(君主)가 있으면 그 뜻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六五는 悔亡하니 厥宗이 챡膚면 往에 何咎리오』
『【本義】챡膚니』
『 육오(六五)는 뉘우침이 없어지니, 그 친족(親族)이 살을 깨물듯이 하면 감에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 【본의】살을 깨물듯이 하니』
『【傳】六以陰柔로 當¤6離之時而居尊位하니 有悔可知라 然而下有九二剛陽之賢하여 與之爲應以輔翼之라 故得
悔亡이라 厥宗은 其黨也니 謂九二正應也요 챡膚는 챡齧其肌膚而深入之也라 當¤6之時하여 非入之者深이면 豈能
合也리오 五雖陰柔之才나 二輔以陽剛之道而深入之면 則可往而有慶『[一有也字]』이니 復何過咎之有리오 以周
成之幼稚而興盛王之治하고 以『劉禪주:유선』之昏弱而有中興之勢는 蓋由任聖賢之輔하여 而姬公孔明所以入之
者深也일새니라』
『 육(六)은 음유(陰柔)로서 규리(¤6離)의 때를 당하여 존위(尊位)에 거하였으니, 뉘우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래에 구이(九二) 강양(剛陽)의 현자(賢者)가 있어 육오(六五)와 더불어 응(應)이 되어 보익(輔翼)하기
때문에 뉘우침이 없어지는 것이다. ‘궐종(厥宗)’은 그 당(黨)이니, 구이(九二)의 정응(正應)을 이르며, ‘서부(챡膚)’
는 기부(肌膚)를 깨물어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규(¤6)의 때를 당하여 들어감이 깊지 않으면 어찌 합할 수 있겠는
가. 오(五)가 비록 음유(陰柔)의 재질(才質)이나 이(二)가 양강(陽剛)의 도(道)로 보필(輔弼)하여 깊이 들어가면
감에 경사(慶事)가 있을 것이니, 다시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주(周)나라 성왕(成王)이 어렸는데도 훌륭한 왕(王)
의 정치를 이룩하였고, 유선(劉禪)의 혼약(昏弱)함으로도 중흥(中興)의 형세가 있었던 것은 성현(聖賢)의 보필
(輔弼)에 맡겨 희공(姬公)『[주공(周公)]』과 공명(孔明)이 들어가기를 깊이 하였기 때문이다.』
『【本義】以陰居陽은 悔也로되 居中得應이라 故能亡之라 厥宗은 指九二요 챡膚는 言易合이라 六五有柔中之德
이라 故其象占如是하니라』
『 음(陰)으로서 양위(陽位)에 거함은 뉘우침이나, 중(中)에 거하고 응(應)을 얻었기 때문에 뉘우침이 없을 수
있다. ‘궐종(厥宗)’은 구이(九二)를 가리키고 ‘서부(챡膚)’는 합하기 쉬움을 말한 것이다. 육오(六五)가 유중(柔中)
의 덕(德)이 있기 때문에 그 상(象)과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象曰 厥宗챡膚는 往有慶也리라』
『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그 친족(親族)이 살을 깨물듯이 하니, 이는 감에 경사가 있으리라.”』
『【傳】爻辭엔 但言厥宗챡膚則可以往而无咎어늘 象復推明其義하여 言人君雖己才不足이나 若能信任賢輔하여
使以其道深入於己면 則可以有爲니 是往而有福慶也라』
『 효사(爻辭)에는 다만 ‘그 친족(親族)이 살을 깨물듯이 하면 감에 허물이 없다’고 말하였는데,
〈상전(象傳)〉에는 다시 그 뜻을 미루어 밝혀서 ‘인군(人君)이 비록 자신의 재주가 부족하나 만약 어진 보필(輔弼)
을 신임(信任)하여 그 도(道)로써 깊이 자신에게 들어오게 하면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으니, 이는 감에 복경(福慶)이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上九는 ¤6孤하여 見豕負塗와 載鬼一車라 先張之弧라가 後說『(脫)』之弧하여 匪寇라 婚즚니 往遇雨하면 則吉
하리라』
『 상구(上九)는 규고(¤6孤)하여 돼지가 진흙을 진 것과 귀신(鬼神)이 한 수레에 가득히 실려 있는 것을 봄이다.
먼저는 활줄을 당기다가 뒤에는 활줄을 풀어놓아, 적이 아니라 혼구(婚즚)이니, 가서 비를 만나면 길(吉)하리라.』
『【傳】上居卦之終하니 ¤6之極也요 陽剛居上하니 剛之極也요 在離之上하니 用明之極也라 ¤6極則퓆戾而難合
하고 剛極則躁暴而不詳하고 明極則過察而多疑하니 上九有六三之正應하여 實不孤나 而其才性如此하여 自¤6孤
也라 如人雖有親黨이나 而多自疑猜하여 妄生乖離면 雖處骨肉親黨之間이나 而常孤獨也라 上之與三은 雖爲正
應이나 然居¤6極하여 无所不疑하여 其見三을 如豕之汚穢而又背負泥塗하니 見其可惡之甚也라 旣惡之甚則猜
하여 成其罪惡하여 如見載鬼滿一車也라 鬼本无形而見載之一車는 言其以无爲有하니 妄之極也라 物理는 極而
必反하니 以近明之하면 如人適東에 東極矣면 動則西也요 如升高에 高極矣면 動則下也니 旣極則動而必反也라
上之¤6乖旣極이요 三之所處者正理니 大凡失道旣極이면 則必反正理라 故上於三에 始疑而終必合也라 先張之弧
는 始疑惡『(오)』而欲射之也라 疑之者는 妄也니 妄安能常이리오 故終必復於正이라 三實无惡『(악)』이라 故
後說弧而弗射하니 ¤6極而反이라 故與三非復爲寇讐요 乃婚즚也라 此匪寇婚즚之語는 與他卦同而義則殊也라 陰
陽交而和暢則爲雨하니 上於三에 始疑而¤6로되 ¤6極則不疑而合하나니 陰陽合而益和則爲雨라 故云往遇雨則吉
이라 往者는 自此以往也니 謂旣合而益和則吉也라』
『 상(上)은 괘(卦)의 종(終)에 거하였으니 규(¤6)가 지극한 것이요, 양강(陽剛)이 상(上)에 거하였으니 강(剛)이
지극한 것이요, 이(離)의 위에 있으니 밝음을 씀이 지극한 것이다. 규(¤6)가 지극하면 어그러져 합하기 어렵고,
강(剛)이 지극하면 조급하여 상세하지 못하고, 밝음이 지극하면 지나치게 살펴 의심함이 많으니, 상구(上九)는
육삼(六三)의 정응(正應)이 있어서 실로 외롭지 않으나 그 재주와 성질이 이와 같아 스스로 규고(¤6孤)한 것이다.
사람이 비록 친당(親黨)이 있으나 스스로 많이 의심하고 시기하여 망령되이 괴리(乖離)하는 마음을 내면 비록
골육(骨肉)과 친당(親黨)의 사이에 처하더라도 항상 고독(孤獨)한 것과 같다. 상(上)은 삼(三)과 비록 정응(正應)
이 되나 규(¤6)의 극(極)에 거하여 의심하지 않는 바가 없어서 삼(三)을 보기를 돼지가 더러운데다가 또 등에
진흙을 지고 있는 것처럼 여기니, 깊이 미워함을 나타낸 것이다. 이미 깊이 미워하면 시기(猜忌)하여 그 죄악
(罪惡)을 이루어 마치 귀신(鬼神)이 한 수레에 가득히 실려 있음을 봄과 같은 것이다. 귀신(鬼神)은 본래 형체가
없는데 한 수레 가득히 실려 있음을 봄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여김을 말한 것이니, 망령됨이 지극하다.
사물의 이치는 지극하면 반드시 돌아오니, 가까운 일로써 밝히면 사람이 동쪽으로 갈 적에 동쪽이 지극할 경우
동(動)하면 서쪽이 되는 것과 같고, 높은 곳에 오를 적에 높음이 지극할 경우 동(動)하면 아래로 내려옴과 같으니,
이미 지극하면 동(動)함에 반드시 돌아온다. 상(上)의 규괴(¤6乖)가 이미 지극하고 삼(三)의 처한 것이 정리(正理)
이니, 대개 도(道)를 잃음이 이미 지극하면 반드시 정리(正理)로 돌아온다. 그러므로 상(上)이 삼(三)에 대하여
처음에는 의심하나 마침내는 반드시 합하는 것이다. 먼저는 활줄을 당긴다는 것은 처음에 의심하고 미워하여
쏘고자 하는 것이다. 의심함은 망령됨이니, 망령됨이 어찌 항상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침내는 반드시 정(正)
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삼(三)은 실로 죄악(罪惡)이 없기 때문에 뒤에 활줄을 풀어놓고 쏘지 않은 것이니, 규(¤6)
가 극(極)에 이르러 돌아왔으므로 삼(三)과 더불어 다시는 구수(寇讐)가 아니요 바로 혼구(婚즚)인 것이다.
여기의 ‘비구혼구(匪寇婚즚)’란 말은 다른 괘(卦)와 내용은 같으나 뜻은 다르다. 음(陰)•양(陽)이 사귀어 화창
(和暢)하면 비가 되니, 상(上)이 삼(三)에 대하여 처음에는 의심하여 규리(¤6離)하였으나 규(¤6)가 지극하면 의심
하지 않아 합하니, 음(陰)•양(陽)이 합하여 더욱 화(和)하면 비가 된다. 그러므로 가서 비를 만나면 길(吉)하다고
말한 것이다. 왕(往)은 이로부터 감이니, 이미 합하고 더욱 화(和)하면 길(吉)함을 말한 것이다.』
『【本義】¤6孤는 謂六三爲二陽所制하고 『而己以剛處明極주:이기이강처명극』¤6極之地하여 又自猜Ì_而乖離
也라 見豕負塗는 見其汚也요 載鬼一車는 以无爲有也라 張弧는 欲射之也요 說弧는 疑稍釋也요 匪寇婚즚는 知其
非寇而實親也요 往遇雨則吉은 疑盡釋而¤6合也라 上九之與六三은 先¤6後合이라 故其象占如此하니라』
『 규고(¤6孤)는 육삼(六三)이 두 양(陽)에게 제재를 당하고 자신이 강(剛)으로서 밝음의 극(極)과 규극(¤6極)의
자리에 처하여 또 스스로 시기하고 원망하여 괴리(乖離)함을 말한 것이다. 돼지가 진흙을 지고 있음을 보았다는
것은 더러움을 본 것이요, 귀신이 한 수레 가득히 실려있다는 것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활줄을 당김은 쏘고자 함이요 활줄을 풀어놓음은 의심이 약간 풀린 것이요, 적이 아니라 혼구(婚즚)라는 것은
적이 아님을 알고 실로 친함이요, 가서 비를 만나면 길(吉)하다는 것은 의심이 모두 풀려 규(¤6)가 합한 것이다.
상구(上九)와 육삼(六三)은 먼저는 규리(¤6離)하였다가 뒤에는 합하기 때문에 그 상(象)과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象曰 遇雨之吉은 群疑亡也라』
『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비를 만남이 길(吉)함은 모든 의심이 없어진 것이다.”』
『【傳】雨者는 陰陽和也니 始¤6而能終和라 故吉也라 所以能和者는 以群疑盡亡也니 其始¤6也에 无所不疑라
故云群疑요 ¤6極而合則皆亡也라』
『 비는 음(陰)•양(陽)이 화(和)함이니 처음에는 규리(¤6離)하였다가 마침내는 화(和)하였기 때문에 길(吉)한
것이다. 화(和)할 수 있는 까닭은 모든 의심이 다 없어졌기 때문이니, 처음 규리(¤6離)할 때에는 의심하지 않는
바가 없었으므로 모든 의심이라 말하였고, 규(¤6)가 극(極)에 이르러 합하면 의심이 모두 없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