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소년(창 37:5)
창세기에는 아브라함부터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까지 4명의 대족장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구별하신 아브라함의 믿음으로부터 이삭과 야곱의 파란만장한 믿음의 여정을 지나고, 이들의 여정 이상으로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요셉의 여정을 묵상하겠습니다.
삼촌 라반의 집에서 아내들을 얻은 야곱은 라헬을 가장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낳은 첫째 아들 요셉을 더욱 사랑했습니다(3절).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만큼 어머니가 다른 형제들로부터 요셉은 오히려 미운털이 박힌 동생이었습니다. 게다가 형제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하는 미성숙한 소년이었습니다(2절). 그래서 형들은 요셉에게 말하기를 꺼려하는데, 요셉은 형들 그리고 부모님의 생각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꾼 꿈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6절). 요셉은 눈치(?)가 전혀 없는 사람이거나 형들의 생각이나 마음은 전혀 고려치 않고 자신의 이야기만 하는 불통의 아이콘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설상가상 요셉의 꿈 이야기는 형들, 심지어 자신을 사랑하는 아버지까지도 불편하게 하였습니다.
요셉의 꿈 이야기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밭에 묶어놓은 형들의 곡식 단들이 요셉의 서 있는 단을 둘러서서 절을 하는 꿈(7절)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요셉에게 절을 하는 꿈(9절)이였습니다. 형들과 아버지 야곱은 요셉에게 ‘네가 왕이 되고, 형들을 다스리게 되겠느냐?’.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들이 땅에 엎드려 요셉에게 절을 하겠느냐?’는 분노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야곱은 요셉의 꿈 이야기를 간직했습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 예루살렘에서의 행적을 다른 이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의 어머니는 마음에 간직했던 것이 연상됩니다(눅 2:51).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꿈 꾸는 자(창 37:19)’라고 불렀습니다. 요셉은 부모와 형들을 개의치 않고 자신의 이야기만 했습니다. 결국 요셉은 형들의 시기와 질투로 노예로 팔려서 부모와 형제들을 떠나 이집트로 보내졌습니다. 아버지 이삭을 속였던 야곱은 이제는 자녀들에게 속아서 사랑하는 요셉을 잃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목적을 갖고 계셨습니다. 요셉은 꿈 꾼 이야기로 부모와 형제들을 떠나야 했지만 이집트에서는 바로의 관원들 그리고 바로의 꿈을 해석하며 총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꿈은 계시를 보여주는 도구로 종종 등장합니다. 요셉의 꿈은 아브라함의 막연해 보였던 약속(큰 민족을 이루리라 창 12:2)의 성취를 위한 초석이 되는 구체적인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을 때, 그의 형들이 요셉 앞에 무릎 꿇고 엎드려 절하는 장면에서 그의 꿈들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예수님의 꿈(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삶이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권력은 구체적인 땅 위의 것이었지만, 꿈은 현실과 거리가 멀고 감추어져 희미해 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조차 그의 말씀이 현실화 되어갈 즈음에는 예수님을 떠났던 이유입니다.
예수님을 향해 먼저 자신을 구원하라고 조롱하던 이들처럼 요셉의 아버지와 형제들은 우리가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고 분노했습니다. 모든 이가 무릎 꿇고 엎드려 절해야 할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꿈 꾸는 소년 요셉의 꿈은 이스라엘이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경배해야 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믿음의 여정은 꿈처럼 희미하고 불확실해 보이기도 합니다. 미성숙한 삶의 여정으로 인해 좌절하고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요셉의 꿈처럼 희미했던 예수님을 알 때가 올 것입니다(고전 13:12). 꿈 꾸는 소년과 같이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 나라의 꿈을 주신 하나님을 바로 아는 바다교회 가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 앞에 엎드려 그를 경배하며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바다교회 가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