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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7장의 “나”는 누구인가?
I. 들어가는 말
로마서 7장은 로마서 전체 장 중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장인 동시에,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장이기도 하다. 로마서 7장의 해석은 기독교 교부 시절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신학자들 사이에는 물론 목회자들 사이에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논란의 초점이 되고 있는 7장의 “나”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같은 교단에 소속된 목회자 사이에서는 물론 같은 교단 신학교에 있는 교수들 사이에도 의견이 서로 다르다.
예를 들면
캐나다 Regent 대학 조직신학 교수 페커(J. I. Packer)는 “나”를 중생한 크리스천으로 보지만 같은 학교의 신약교수 피(G. D. Fee)는 “나”를 크리스천 이전의 사람으로 본다.
미국의 캘빈신학대학원 신약교수 헨드리선(W. Hendriksen)은 “나”를 중생한 크리스천으로 본 반면에 같은 학교의 조직신학 교수 후크마(A. J. Hoekema)는 “나”를 중생 이전의 사람으로 본다.
한국에서는 총신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김길성은 “나”를 중생한 크리스천으로, 반면에 신약교수 이한수는 중생 이전의 사람으로 본다.
주경 신학자 박윤선은 “나”를 중생한 신자로, 반면에 이상근은 중생 이전의 사람으로 보았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9, 11절),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14절),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한다”(15절),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18절),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한다”(19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22-24절),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고 말할 때,
그가 말하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편지를 쓰고 있는 당시 “사도 바울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가, 아니면 다메섹 사건 이전의 “교회 핍박자 바울”을 가리키고 있는가? 만일 “나”가 바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타인을 가리키는 일종의 수사학적인 장치라고 한다면 그는 누구인가?
바울이 2장에서 언급한 “유대인” 혹은 9-11장에서 언급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대변하고 있는가? 아니면 5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아담”을 대변하고 있는가?
아니면 1:18-3:20에 언급되고 있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인류)”을 가리키고 있는가?
아니면 3:21-6:21에 언급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모든 크리스천”을 가리키고 있는가?
이처럼 “나”의 정체성을 둘러싸고 다양한 질문과 답변이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모든 질문과 해답은
“나”가 예수 믿은 이후의 크리스천인가,
아니면 예수 믿기 이전의 비(非)크리스천인가로 축약될 수 있다.
II. 크리스천 이전의 “나”인가, 이후의 “나”인가?
로마서 7장의 “나”를 회심 이전의 바울을 포함하여 “크리스천 이전의 사람”으로 보는 사람과, 반대로 회심 이후의 바울을 포함하여 크리스천 이후의 사람으로 보는 사람이 각각 내세우는 근거들은 다음과 같다(* 여기 양 주장의 논점은 Schreiner의 2018년도 로마서 주석, 377-389에서 발췌한 것임)
A. “크리스천 이전의 사람”으로 보는 근거
(1) 7:7-25의 구조가 크리스천 이전 경험을 지지한다.
a. 7:5는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 죄의 정욕이 율법을 통해 살아나서 사망을 가져왔다고 말한다. 반면에 7:6은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으며, 그 결과 율법의 묵은 것이 아닌 성령의 새로움으로 섬기게 되었다고 말한다. 7:7-25는 죄가 율법을 통해 사망을 가져온 7:5의 사람을 묘사하고 있다. 반면에 8:1-17은 율법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어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된 된 사람을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길은 7:7-25를 7:5가 말하는 죄와 율법의 지배를 받는 크리스천 이전 사람의 경험을 묘사하는 것으로, 반면에 8:1-17를 7:6이 말하는 성령으로 섬기는 크리스천의 경험을 묘사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b. 7:13은 율법이 한 사람의 사망에 책임이 있는지를 묻는다. 그런 다음 이유 접속사 ‘왜냐하면’(‘갈’)로 시작하는 7:14이 어떻게 율법이 아닌 죄가 그 사망에 책임이 있는가를 설명한다. 만일 7:14-25가 7:13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면, 그리고 13절이 사망에 처한 크리스천 이전 사람을 가리킨다면, 7:14-25의 “나”는 크리스천 이전 사람의 경험을 가리키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게 한다. 바울은 신자가 율법과 더불어 가지는 그러한 갈등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율법이 어떻게 사람에게 사망을 가져오는가를 말한다.
c. 구조적으로 볼 때 7:14-25의 결론은, 승리를 말하는 25a절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가 아니고, 오히려 여전히 육신으로 죄의 포로가 되어 있는 “나”를 말하는 25b절인 “그런즉 내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이다. 그런데 여기 “육신의 법을 섬긴다”는 것이 “나”의 현실이다. 그리고 육신의 법을 섬긴 결과는 사망이다. 따라서 죄의 법을 섬기는 자를 신자로 보기 어렵다. 신자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자이다(8:2).
(2) 7:14-25를 크리스천 경험으로 보는 자들은 그 근거로 14-25절이 현재 시제 동사로 표현되고 있는 것을 제시한다. 하지만 헬라어에서 동사의 시제는 시간적 의미보다 행동의 의미가 우선적이다. 따라서 현재시제의 사용이 크리스천 경험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근거가 되기는 어렵다. 7-11절에서 바울이 과거시제를 사용하는 것은 그의 경험을 내러티브 형식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14-25절에서 현재시제를 사용하는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그의 상태를 보다 생생하고 효과적으로 제시하기 위함이다.
(3) 7:14-25에 있는 “나”의 이중성을 크리스천 경험을 가리키는 근거로 보는 시도는 설득력이 없다. 두 “나” 사이의 엄격한 분리는 불가능하다. 전체적인 “나”가 죄에 매여 있다. 14-25절에 묘사되고 있는 “나”가 “육신”보다 더 낫다는 그 어떤 암시도 찾아보기 어렵다. 성령에 대한 여하한 언급도 없기 때문이다. “육신”은 단순히 “나”의 본성을 나타낼 뿐이다.
(4) 7:14-25와 8:1-17 사이의 대조가 너무나 뚜렷하기 때문에 양 경우를 똑같은 크리스천 경험으로 보기가 어렵다. 8:1에 있는 강조형 “이제”는 구조적으로 볼 때 7:6의 “이제”에서 가져온 것이다. 여기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그 어떤 정죄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7:14-25에 언급되고 있는 죄와 율법의 지배 아래에 있는 자에게 주어진 그 정죄와 현저하게 대조를 보여준다. “나”는 앞서 정죄 아래에 있었지만,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죄와 율법의 정죄로부터 해방되었다(8:1).
(5) 7:14-25의 어느 곳에서도 신자의 삶에 필수적인 성령에 대한 언급이 없다. 반면에 8장은 성령에 대한 언급을 19번이나 한다. 7장의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 하지만 그러나 지키지 못하는 “나”로부터 받는 인상은 그가 크리스천이면 반드시 내주하는 성령(8:9-10)의 도우심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성령을 소유하고 있는 8장의 크리스천의 모습과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8장의 성령을 소유한 자는 내주하는 성령을 통하여 율법의 요구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반면에 8:5-8에 있는 성령이 아닌 육에 속한 사람은 죄에 매여 있는 7:14-25의 사람과 평행을 이루고 있다. 여기 성령을 통해 율법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가 중생한 신자를 가리키고 있다고 한다면, 이와 대조적으로 성령이 아닌 육에 속한 자는 중생하지 못한 자연인을 가리키고 있다.
(6) 7:14-25를 크리스천 경험으로 보는 자들은 7:22의 “나”가 “속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있는 점에 주목하고, 이 “나”가 불신자를 가리킬 수 없다고 주장한다. 불신자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자는 모든 불신자 일반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니고, 경건한 유대인 일반을 대변한다. 이 유대인은 설사 그가 하나님의 법을 지킬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해도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의를 위해 율법을 추구하거나(롬 9:31-32)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가진 유대인을 언급한다(롬 10:2). 바울은 율법을 추구하거나 율법에 대한 열심을 가지는 것 자체를 비판하지 않는다. 바울 자신도 한때 그와 같은 열심을 가진 자였다(갈 1:13-14; 빌 3:4-6). 어떤 사람은 또한 여기 “속사람”이란 문구가 다른 곳에서 신자와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고후 4:16; 엡 3:16) 마땅히 크리스천 경험을 보여주고 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결정적이지는 않다. 이러한 인간학적인 묘사는 불신자 일반에게도 사용될 수 있다.
(7) 바울이 신자가 “죄 아래”(7:14) 있다고 말하는 것은 바울이 다른 곳에서 신자에 대해 말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바울은 일반적으로 “아래”의 문구를 불신자나 구원역사에 있어서 옛 시대를 지칭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예를 들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죄 아래” 있다(3:9). 반면에 신자는 “율법 아래에” 있지 않고(6:14-15) “은혜 아래”에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율법의 행위에 의존하는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다”(갈 3:10)고 말한다. 반면에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들은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갈 5:18)고 말한다. 이처럼 “아래”라는 문구는 일반적으로 불신자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로마서 7:14의 “죄 아래”라는 문구도 죄의 종이 되어 아직 성령의 새 언약 사역을 체험하지 않은 불신자(바울을 포함하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8) 7:14-25의 본문을 신자에게 제한시키는 자들은 이들 구절에 묘사된 경험을 어쩔 수 없이 신자의 경험으로 설명하여야 하는 어려움을 피할 수 없다. 로마서 7장에 묘사된 깊은 좌절감은 신자가 죄에 대해 죽었고 더이상 죄의 종이 아니라는 6장의 주장과 모순된다. 로마서 6장에 따르면 신자에게 있어서 죄의 세력은 격파되었으며, 따라서 신자는 죄의 종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의에 종노릇한다. 그리고 8:2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을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해방시켰다”고 말한다. 이러한 진술들에 비추어 볼 때, 어떻게 바울이 신자를 가리켜 “육적이며...죄 아래 팔렸다”(7:14)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사실 14-25절을 관통하는 주제는 “나”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은 있지만 지킬 능력이 없으며, 계속 죄만 짓고 있다. “나”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진술은 로마서 6장과 8장에 묘사되고 있는 신자의 긍정적인 모습과 모순된다. 따라서 7:14-25에 묘사된 사람은 불신자를 지칭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B. “크리스천 이후의 사람”으로 보는 근거
(1) 7:14-25에 있는 현재시제의 전환은 과거시제로 되어있는 7:7-13이 바울의 크리스천 이전의 경험을 가리키는 것으로, 반면에 7:14-25를 바울의 현재 경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경우 가장 자연스럽게 설명될 수 있다. 7-13절에는 과거시제가 9번, 14-25절에는 현재 직설법 1인칭 동사가 26번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재시제의 사용은 매우 의도적이며, 바울이 지금 현재의 경험을 서술하고 있다고 볼 때 가장 잘 설명된다. 현재시제가 단순히 생생함을 전달하기 의해 사용되고 있다고 보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2) 만일 7:14-25이 크리스천 이전의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면, 당연히 본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25a)라는 말로 종결되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옛 삶의 파멸과 노예적인 특성이 새 삶에 의해 시작되는 승리와 기쁨으로 전환 된다. 하지만 본문은 이러한 승리에 대한 언급으로 종결되지 않는다. 바울은 감사에 대한 감탄 이후 다시 14-25절을 관통하고 있는 긴장과 모호함에 되돌아간다: “그러므로 내 자신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 감사 후에 인간 존재의 긴장과 모호성으로 전환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능한 해방이 크리스천 경험 안에서 만나는 죄와의 지속적인 갈등(14-25)을 제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3) 본문 안에 두 “나” 사이에 이중성이 있다. 예를 들면 한편으로 “내 안에 아무런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는 단언은 18절에 있는 “육신”에 대한 바울의 설명이다. 하지만 여기에 육신을 초월하는 선을 행하고 하나님의 법을 기뻐하는 “나”의 다른 차원이 있다. 본문 안에 제시되고 있는 이중성은 14-25절이 크리스천 경험을 진술한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지만 그 가능성의 문을 열어주고 있다.
(4) 7:14-25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고 하는 “나”의 원함(15, 16, 18, 19x2, 20, 21)이다. 이와 같은 원함은 불신자의 특성이 아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사고방식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이다(8:7). 사실 7:22는 “나”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것은 “내”가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암시한다. 육신에 속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법을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싫어하고 그의 법을 지키지 않는다(8:5-8). 이러한 갈등은 바울의 크리스천 이전의 삶(7:7-13)에서 볼 수 없는 것이다. 중생한 크리스천만이 악을 “미워하고” 선을 기뻐할 수 있다. 크리스천 이전 경험을 옹호하는 자들은 여기서 말하는 사람이 경건한 유대인이라고 반박하지만, 크리스천 이전 바울과 다른 유대인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의를 확립하기 위한 율법주의적 방식으로 즐거워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율법주의적으로 율법을 즐거워하는 것은 7:14-25에 반영되고 있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것과는 매우 거리가 있다.
(5) 7:14-25에 있는 이중성과 긴장은 바울신학 종말론의 특징인 ‘이미’와 ‘아직’의 긴장을 보여준다. 바울은 6:12-23에서 신자들에게 다시 죄에게 지배되지 않아야 한다고 경고한다. 그런데 6:12는 신자 안에 여전히 죄를 짓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는 것과 이를 저항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로마서 8:9-27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신자가 소유하고 있는 소망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신자는 “이미”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다. 하지만 신자는 죽는 그 날까지 “아직” 죄에게 매여 있다. “아직”을 말하는 로마서 7:14-25는 “이미”를 강조하는 로마서 6장, 8장과 고립되어 보아서는 아니 된다. 마찬가지로 “이미”를 강조하는 6장과 8장은 “아직”을 강조하는 7:14-25와 분리시켜 보아서는 아니 된다. 크리스천의 삶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세 장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6) 이러한 “이미”와 “아직”의 개념은 7장과 8장에 있는 몇몇 구절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 예를 들면 7:14에 있는 미래 동사 “해방될 것이다”는 우연적인 것이 아니며, 당연히 미래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25절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그 해방은 한 사람이 믿을 때 바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썩어질 몸으로부터 해방될 그 마지막 날에 경험하게 된다. 즉 24절에 언급되고 있는 “사망의 몸으로부터” 해방은 한 사람이 처음 믿을 때나 한 사람이 크리스천의 삶을 살아가면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 해방은 그의 몸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되는 그 마지막 날에 경험하게 된다. 로마서 8:10-13도 7:24이 몸이 미래에 구속될 것과 신자가 현재에도 죄의 몸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로마서 8:10은 크리스천 삶에 있는 긴장을 묘사한다: “몸은 죄로 인해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인해 살아 있다.” 여기서 관심을 끄는 것은 “몸은 죄로 인해 죽었다”는 진술이다. 신자는 분명히 성령을 소유하고 있다(8:8-9). 하지만 몸은 죄로 인해 아직 구속함을 받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다. 이것은 신자가 완전히 죄의 현실로부터 해방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부패한 몸을 소유하고 있는 한 죄와 죄의 욕심은 여전히 남아 있게 된다(6:12).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이 “너희 죽을 몸도 살리는” 그날을 소망하고 있다. 신자가 성령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8:8-9). 하지만 몸은 아직 구속함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죄로 인해 죽어가고 있다. 로마서 8:10-11과 7:24 사이의 평행은 분명하다. 양 본문에서 죄의 몸으로부터 해방은 미래에 있기 때문이다. 로마서 8:11은 그 미래가 부활의 날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8:23도 신자가 “이미” 성령의 첫 열매를 가진 자이지만 우리 몸의 구속은 그 몸이 모든 피조물이 새로워지는 날에 변화될 때까지 “아직” 불완전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미”와 “아직”의 긴장은 7:14-25에 한정될 수 없다. 그것은 8장에서도 현저히 나타나는 주제이다.
(7) 갈라디아서 5:16-18이 로마서 7:14-25의 경험이 크리스천의 경험임을 지지한다. 갈라디아서 5:16-18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신자라 할찌라도 죄의 욕망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육의 소욕은 성령을 대항하고 성령은 육을 대항한다고 하면서, 신자가 여전히 “육의 소욕”과 싸운다고 말한다. 이러한 육의 소욕은 신자 안에 죄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죄의 소욕이 로마서 7:14-25에서 바울을 괴롭히고 있다. 바울로 하여금 절규하게 한 것은 실제로 그가 도둑질하거나 살인하거나 간음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불행은 그가 “아직” 악의 소욕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예민한 인식에 기인한다.
(8) 7:14-25의 고백은 신자가 바르게 거룩하게 살려고 하면 할수록 고백할 수밖에 없는 실존적 고백임을 보여준다. 참된 신자는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하나님의 은총에 따라 살려고 하면 할수록, 그리고 복음에 복종하려고 하면 할수록 자신의 내면을 깊이 통찰하여 자신의 죄성과 부족을 더 깊이 절감하게 된다. 불신자는 이런 경험을 가질 수 없다. 로마서 7:14-25은 신자의 이런 내면적 경험을 대변하고 있다.
III. 해결을 위한 시도
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양쪽의 주장은 나름대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 쪽도 다른 한쪽을 충분히 설득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어느 쪽이 더 타당성을 지니고 있는가? 로마서 7장의 “나”의 정체성 문제에 접근하면서 우리는 먼저 세 가지 중요한 질문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첫째, 로마서 7장의 중심 주제가 무엇인가?
둘째, 그 중심주제는 로마서를 쓰게 된 바울 자신과 로마서 수신자인 로마교회의 역사적 정황과 잘 부합하고 있는가?
셋째, 7장의 중심주제는 인접한 문맥인 6장 및 8장의 내용은 물론, 로마서 몸체에 해당하는 1:18-15:13의 내용과도 잘 부합하고 있는가?
1. 로마서 7장의 중심 주제는 무엇인가?
로마서 7장이 보여주고 있는 우선적인 그리고 핵심적인 이슈는 절규하는 “나”의 정체성도, 나를 괴롭히는 죄와 죽음의 세력도 아니고 “모세의 율법”이다. 로마서 7장은 “율법”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해서(1절), “율법”에 대한 언급으로 끝난다. 7장의 이슈가 율법이라는 사실을 알고 접근할 때 비로소 로마서 7장의 난제인 “나”의 정체성 문제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바울은 로마서 어느 장에서보다도 7장에서 율법 어휘를 자주 사용하고 있다. 그는 7장에서 “죽음”(사망) 어휘를 5번(7:5, 10, 13x2, 24), “죄” 어휘를 14번(7:5, 7x2, 8x2, 9, 11, 13x3, 14, 17, 20, 23, 25), 대명사 “나”를 8번(7:9, 10, 14, 17, 20x2, 24, 25), “나”를 포함하고 있는 1인칭 동사를 15번(7:15x4, 16x2, 18, 19x3, 20x2, 21, 23, 25)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그리고 1절부터 마지막 25절까지 계속 반복되고 있는 어휘는 “율법”이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율법을 가리키는 헬라어 ‘노모스’를 23번(1x2, 2x2, 3, 4, 5, 6, 7x3, 8, 9,12, 14, 16, 21, 22, 23x3, 25x2), 율법의 동의어로 볼 수 있는 ‘계명’어휘를 6번(8, 9, 10, 11, 12, 13)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사실상 율법 어휘를 모두 29회나 사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 바울이 7장에서 율법을 핵심적인 이슈로 삼고 있는가?
바울이 로마서 7장에 와서 율법을 처음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미 2장에서 유대인이 이방인과 똑같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율법을 지칭하는 ‘노모스’를 19번이나 사용하였다(2:12x2, 13x2, 14x4, 15, 17, 18, 20, 23x2, 25x2, 26, 27x2). 그렇게 함으로써 유대인이 소유한 율법이 유대인을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지 못하였음을 암시하였다. 3장에서도 바울은 율법 어휘를 믿음 어휘와 대조시켜 11번 사용하고 있다(3:19x2, 20x2, 21x2, 21x2, 28, 31x2). 3장에서 그는 보다 직접적으로 율법 혹은 율법의 행위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의를 얻는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오히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여 온 세상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한다고 말한다(3:19-20). 그리고 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서 바울이 율법 폐기주의나 반율법주의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3장의 내용을 마감하는 31절에서 믿음이 율법을 파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믿음이 어떻게 율법을 세우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4장에도 율법 어휘가 5번 사용되고 있는데(13, 14, 15x2, 16) 3장의 용법과 유사하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실에 근거하여, 아브라함의 후손은 율법을 지킴으로서가 아닌 아브라함처럼 믿는 자임을 확인한다. 즉 율법은 믿음과 달리 언약과 의의 수단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4장에서도 그는 반율법주의를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런데 로마서 4장에는 3장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율법에 대한 새로운 가르침이 나타난다. 그것은 율법이 죄를 예방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준다는 유대교의 가르침과 달리 오히려 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즉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4:15)고 하면서, 율법이 진노와 범법을 촉진한다고 말한다(4:15). 3장에서 그가 율법이 모든 사람의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는 죄를 깨닫게 하는 기능이 있음을 말하긴 했지만(3:19-20), 죄와의 직접적인 제휴 관계는 말하지는 않았다. 이와 같은 율법과 죄와의 연관성은 아담의 사역과 그리스도의 사역이 대조가 되고 있는 5장에서 다시 나타난다.
5장에 율법 어휘가 3번(13x2, 20) 사용되고 있는데, 여기서 바울은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5:20)고 하면서, 율법이 범죄를 예방하게 하는 적절한 수단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죄를 조장하게 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4장에서와 마찬가지로 5장에서도 왜 율법이 죄를 예방하기보다도 오히려 촉진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넘어간다. 다만 율법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긍정적인 역할보다도 부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암시만 한다. 6장에는 율법 어휘가 2번(14, 15) 나타나는데, 율법과 은혜가 서로 날카롭게 대조되고 있다. 바울은 6장에서 먼저 신자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함으로써 죄에 대하여 죽고, 죄로부터 종노릇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다(6:6-7). 즉 죄와 사망이 지배하는 죄의 종에서 하나님이 지배하는 순종의 종, 의의 종으로 신분이 전환되었다는 것이다(6:16-19).
그런데 바울은 6장에서 죄와 율법을 다같이 사람을 지배하는 통치 세력으로 보면서,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있지 않는 것과 똑같이 율법의 지배 아래 있지 않다고 말한다. 신자가 죄의 지배로부터 자유한 것 같이 또한 율법으로부터 자유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바울은 6:14a에서 5장에서 사용한 ‘왕노릇하다’와 유사한 단어 ‘다스리다’를 사용하여,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바로 이어 6:14b에서 “왜냐하면 너희는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그다음 절인 6:15의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에서 반복된다. 신자가 죄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처럼 또한 율법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사실은 7:6a의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율법)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다”에서 재확인된다. 이처럼 바울은 6장에서 죄와 율법의 상호연관성을 밝힌다. 하지만 6장에서 바울은 신자가 죄의 지배를 받아서는 아니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강조를 하지만, 죄와 율법이 어떻게 상호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신자가 왜 율법의 지배를 받아서는 아니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을 유보한다.
그러다가 바울은 율법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7장에서 그동안 유보되었던 문제, 곧 독자들이 궁금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죄와 율법의 상호연관성, 그리고 율법이 어떻게 신자의 삶에 있어서 부정적인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한다. 7장 주석에서 자세하게 살펴보겠지만 바울은 7장에서 죄와 율법의 상호연관성, 곧 율법이 신자의 삶에 있어서 죄를 억제하거나 예방하기보다 오히려 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자세하게 설명한다. 말하자면 율법이 신자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도록 실제로 도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율법이 신자의 삶의 원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런 다음 8장에서 7장의 율법과 대조적으로 성령이 신자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도록 도울 수 있다는 것과, 따라서 성령이 신자의 삶의 원리가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렇게 볼 때 율법에 대한 바울의 진술은 매우 점진적이다. 2장에서 왜 율법이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없는가 하는 문제에서 시작하여 3-4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통해 그 답변을 제시한다. 그리고 5-6장에서 왜 율법이 신자의 삶의 원리가 될 수 없는가 하는 문제에서 시작하여 7장에서 죄의 도구가 되는 율법의 무능력을 밝힘으로써 그 답변을 제시한다. 그런 다음 8장에서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을 성령이 하게 한다는 사실을 밝힌다.
2. 7장의 중심주제(“율법의 무능력”)가 로마서를 쓰게 된 바울 자신과 수신자의 역사적 정황과 잘 부합하는가?
왜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로마서의 독자들에게 율법이 신자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도록 도울 수 없는 무능력과 아울러 신자의 삶의 원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가?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가장 논란이 되었던 이슈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사람이 어떻게, 특별히 이방인들이 어떤 조건으로 구원을 얻어 아브라함의 후손인 하나님의 백성이 되느냐는 문제였고, 또 하나는 사람이 어떻게, 무엇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에 합당한 삶을 사느냐는 것이었다. 전자는 신분(칭의)에 관한 문제라고 한다면, 후자는 삶(성화)에 관한 문제였다. 사도행전 13-14장에 수록된 바울의 제 1차 선교에 나타난 바울의 복음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세의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의 복음이었다(행 13:38-39). 즉 사람의 신분을 결정하는 것은 모세의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 복음의 반대자들인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이 목회한 안디옥교회까지 찾아와서 이방인 크리스천들이 유대교의 유산인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주장(참조 행 15:1)을 하였다. 그들은 신자의 신분을 결정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아닌 할례와 율법에 대한 순종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들이 예수 믿는 믿음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예수 믿는 믿음의 유일성과 충족성을 부정하였다. 그 대신 이방인들에게 할례와 율법을 믿음에 덧붙여 필수적인 조건으로 요구하였다(행 15:1; 갈 5:2-4). 하지만 이와 같은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은 제1차 예루살렘회의를 통해서 거부되었다(행 15:6-11; 갈 2:1-10). 오히려 인종과 신분과 성(性)의 차별 없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게 된다는 바울의 이신칭의의 복음(참조 롬 3:28-30, 갈 2:16; 3:28)이 예루살렘교회의 대표자인 베드로와 야고보의 지지를 받아 초기 기독교공동체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채택되었다(행 15:2-29; 갈 2:1-10장).
그러나 예루살렘회의는 신자의 신분을 결정하는 문제에 있어서 율법에 구원(칭의)의 기능을 주려는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은 거부하였지만, 그다음에 제기될 수 있는 신자의 삶의 문제에 있어서 율법의 역할, 곧 율법이, 유대교에서처럼, 신자의 삶(성화)의 원리가 될 수 있는가에 관해서는 충분하게 논의하지 못했다.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가 된 것은 갈라디아서 2:11-15에 기록된 안디옥 사건에서였다. 베드로가 바울과 바나바가 목회하던 안디옥에 찾아와서 처음에는 유대교의 음식법과 무관하게 이방인 크리스천과 자유롭게 식탁교제를 하였다. 그러던 중 예루살렘교회의 대표자인 야고보가 사람들을 베드로에게 보내어 이방인들과 교제하는 그의 행동이 유대인들의 삶의 원리인 모세의 율법을 훼손할 수 있다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에 베드로는 이방인 신자와 음식을 먹던 중 자리에서 일어났고, 베드로의 행동에 동참하여 유대인 신자도 뒤따라 일어났고, 급기야 목회자인 바나바까지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처럼 베드로가 안디옥교회의 식탁교제에서 이방인 신자를 왕따를 시킴으로써 이방인 신자에게 유대인처럼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지키며 유대인처럼 살지 않는 한 이방인 신자가 유대인 신자와 동등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베드로의 행동은, 설사 그의 의도는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이방인이 모든 영역에 있어서 유대인과 차별이 없는 동등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필수적인 조건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과, 믿음에 덧붙여 모세의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고 유대인의 음식법과 절기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간파하였기 때문에 베드로를 향해 “당신이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처럼 살다가 이제 이방인을 억지로 유대인처럼 살도록 강요할 수 있느냐?”(갈 2:14)고 하면서 예루살렘에서 합의하였던 복음의 진리(2:1-10)를 따라 살지 않은 베드로의 위선적인 행위를 공개적으로 책망하였다. 이어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와 합의하였던 이신칭의의 복음인,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갈 2:16)를 재천명한다. 그런 다음 바울은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갈 2:18-19)고 하면서 율법이 더이상 신자의 삶의 영역을 지배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고 하면서,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한 사람의 신분은 물론 그의 모든 삶의 영역을 주관하여야 함을 강조하였다.
율법이 과연 크리스천의 삶의 원리인가라는 문제는 안디옥교회에서뿐만 아니라 동일하게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로 구성된 로마교회 안에서도 심각하게 제기되었다. 로마교회가 본래 유대인 크리스천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절대다수를 유지하는 동안에는 이 문제가 크게 대두되지 않았다. 유대인 크리스천들에 있어서는, 그들이 유대교에 있을 때부터 그렇게 믿고 생활하여왔던 것처럼, 율법이 그들의 삶의 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후 49년 글라우디오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에 따라 유대인 크리스천이 로마를 떠난 후(참조 행 18:2) 율법을 유대교적 유산으로 생각하는 이방인 크리스천들이 로마교회의 다수를 형성하면서 모세의 율법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대두되었다. 그러다가 주후 54년 이후 네로 황제의 등장과 함께 유대인 추방령이 취소가 되고 율법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를 갖고 있던 유대인 신자들이 로마교회에 복귀하면서 모세의 율법 문제는 심각한 이슈로 재등장하였다.
우리가 로마서 14-15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유대인의 음식법, 절기 등을 둘러싸고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 사이의 갈등은 로마교회의 분열을 초래할 만큼 심각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끝부분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15:7)고 하면서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가 서로 하나가 될 것을 권면한다. 물론 논쟁의 핵심은 모세의 율법이 유대인의 삶의 방식을 떠나 모든 신자의 삶을 좌우하는 합당한 삶의 원리가 될 수 있느냐였다. 그러므로 바울이 로마서를 쓸 무렵 모세의 율법이 로마서의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의 해결 여부가 바울의 스페인 선교와 예루살렘교회 방문은 물론 바울 복음 자체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가 하나가 되지 못하면 처음부터 아브라함의 후손과 이 땅의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하나님의 의의 복음(1:16-17)이 훼손될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당면한 스페인 선교와 예루살렘교회 방문과 관련하여 로마교회로부터 물심양면의 지원을 받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15:22-32).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의 복음을 올바르게 설명하기 위해서 또한 로마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서 예루살렘회의에서 논의되지 않았던 율법 문제, 곧 율법이 신자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여야만 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율법이 하나님의 거룩한 법이긴 하지만 죄의 세력이 인간의 육을 강하게 지배하고 있고, 그리고 죄의 세력이 율법을 도구로 삼고 있기 때문에 율법은 인간을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롭게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며, 따라서 율법이 신자의 삶의 원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런 다음 8장에서 율법이 아닌 성령이 신자의 삶을 도울 수 있는 유효한 원리임을 강조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율법 문제로 심각한 갈등에 처해 있는 로마교회의 하나 됨을 시도한다.
3. 7장의 중심주제(“율법의 무능력”)가 7장의 전후 문맥의 지지를 받고 있는가?
바울은 로마서의 몸체가 시작되는 1:18-3:20까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과 인간은 그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 심지어 율법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다음 3:21-4:25까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메시야 예수를 통해 자기의 의를 나타내셨기 때문에 유대인든 이방인이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사실을 사실을 강조한다(3:28). 그렇게 함으로써 율법 혹은 율법의 행위에 구원적 기능을 주려는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을 단호히 배격하고 하나님의 의의 복음을 확립한다. 그런 다음 사실상 로마서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5-8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손, 하나님의 백성, 구원받게 된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삶의 문제를 다룬다. 5장의 전반부(1-11)를 시작하면서 바울은 과거시제를 사용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다”는 말로 먼저 3-4장의 내용을 요약한다. 그다음 이어 현재시제를 사용하여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고 하면서 6-8장에서 다룰 우리의 변화된 신분에 합당한 삶, 곧 하나님과의 화평의 삶을 미리 말한다. 바울이 5장에서 신자의 삶과 관련된 명령법 시제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지만, 신자의 구원과 관련된 미래시제 “우리가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9, 10)를 두 번이나 사용한다. 우리가 이미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았다 하더라도 구원의 완성에는 아직 도달하지 않고 여전히 미래의 소망으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구원의 완성이 소망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이 소망에 도달하기까지 우리가 올바르게 살아야 할 것을 암시한다. 이점은 바울이 빌립보서 2:12에서 “너희는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고 말한 전에서 확인된다.
5장의 후반부(12-21절)는 인류의 두 대표자 아담과 그리스도의 사역을 대조하면서 그들이 인류에게 무엇을 가져왔는가를 말한다. 아담은 인류에게 죄와 죽음과 정죄/심판을 가져왔지만 그리스도는 인류에게 의와 은혜와 생명/영생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5장 후반부에서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가 인류에게 미친 결과를 말하면서 자주 단순과거 시제를 사용하여 신자는 이미 아담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영역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급사건을 통해 이집트 땅을 떠나 가나안 땅을 향한 여정에 들어간 것처럼, 신자는 아담의 죄와 죽음과 심판의 영역으로부터 의와 은혜와 생명의 영역으로 이미 옮겨졌다는 것이다(5:17, 21). 말하자면 신자는 아담이 지배했던 영역에서 벗어나 그리스도가 지배하는 영역으로 옮겨졌다(골 1:13)는 것이다. 이러한 통치 영역의 전환은 6장에서 보다 더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6장에 와서 바울은 먼저 과거 시제를 사용하여 우리(바울과 로마의 신자들)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이미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산 자임을 강조한다. 예를 들면 7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는 ‘죄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 이미 의롭다하심을 얻었다’(과거시제)고 말한다. 그래서 11절에서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는 살아 있는자로 여길찌니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바울은 6장의 전반부(1-11절)에서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한 자로서 죄와 죽음의 영역에서 의와 생명의 영역으로 옮겨진 자임을 강조한다. 그런 다음 후반부(12-23절)에서 적어도 4번 이상 명령법 동사를 사용하여 신자가 소극적으로는 죄에 종노릇하지 않아야 할 것과 적극적으로 의에 종노릇할 것을 권면한다. 신자에게 주어진 새로운 신분과 새로운 영역에 합당한 삶을 살으라는 것이다. 바울은 먼저 12-13절에서 두 번이나 부정 명령형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메 바실루에토’)와 ‘내어주지 말라’(메데 파리스타네테’)를 사용하여 로마의 크리스천들에게 ‘너희가 자신의 몸을 죄의 도구가 되도록 하지 않아야 할 것을 명령한다. 바울이 6장에서 먼저 신자의 신분 전환과 삶의 영역 전환을 말한 다음 소극적인 명령인 ‘하지 말라’와 적극적인 명령 ‘하라’를 말한 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의미를 시사한다.
하나는 비록 신자에게 신분과 삶의 영역 전환이 이미 일어났다 하더라도 신자는 언제든지 명령에 반대되는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신자도 언제든지 죄를 짓고 다시 죄의 종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명령이 주어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또 하나는 신자가 죄를 짓지 않고 의에게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가능성 역시 주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만일 실제로 그러한 가능성이 없다면 그 명령은 헛된 명령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바울은 6장에서 단순히 명령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거듭 신자가 자신의 신분과 영역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한다는 약속과 보증을 주고 있다. 예를 들면 13절에서 명령형 동사를 말한 다음 14절에서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가 율법의 지배 아래 있지 않고 오히려 은혜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이다”는 약속을 주고 있다. 역시 19절에서도 명령형 동사 ‘내어주라’를 말한 다음 22절에서 바울은 그 명령을 수행하는 보증과 약속을 준다: “그러나 이제 너희는 죄로부터 이미 ‘해방되고’(과거시제), 하나님에게 이미 ‘종노릇하고 있기 때문에’(과거시제) 너희는 지금 너희가 의에 이르는 열매를 ‘맺고 있다’(현재시제). 그 마지막은 영생이다.” 하지만 바울은 6장에서 무엇이 신자로 하여금 새로운 신분과 영역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그 보증, 곧 명령을 적극적인 명령을 수행하게 하는 그 근거를 말하지 않는다. 아마도 로마의 크리스천들은 두 가지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하나는 모세의 율법이고, 하나는 성령이다. 유대인 신자는 먼저 율법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고, 이방인 신자는 성령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이미 4-6장에서 율법과 죄의 연관성을 말하였기 때문에, 로마의 크리스천은 만일 율법이 신자의 거룩한 삶을 보증하도록 도울 수 없다면 왜 율법이 그렇게 할 수 없는지에 대하여 바울로부터 그 구체적인 답변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동시에 율법이 할 수 없는 그것을 성령이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왜 성령이 신자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보증이 되는 가를 듣고 싶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에 대한 답변을 각각 7장과 8장에서 한다. 먼저 7장에서 왜 율법이 신자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도울 수 없는 무능력을 말한 다음 8장에서 율법이 할 수 없는 그것을 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설명한다. 7장이 죄와 율법으로 인한 “나”의 문제를 말하고 있다고 한다면, 8장은 성령을 통한 그 해결책을 말한다. 7장은 약속과 보증이 없이 문제만을 말하는 직설법으로 끝나지만 8장은 삼위 하나님의 보증과 약속이 담겨 있는 직설법으로 끝난다. 이처럼 로마서 7장의 중심주제를 죄를 제어할 수 없는 “율법의 무능력”으로 보는 것은 전후문맥과 잘 조화가 된다.
IV. 7장의 주석
로마서 7장의 “나”의 정체성을 밝히는 문제는 결국 로마서 7장의 주석에 좌우 된다. 답은 성경 본문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7장의 주석에 들어가면서 주목하여야 할 것이 몇 가지가 있다.
첫째, 6장에서 거듭 강조가 되었던 2인칭 복수 “너희”가 7:1에서 한 번 사용된 것을 제외하고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가 8장에 가서 다시 “너희”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너희”가 등장하는 7장의 서론(7:1-6)을 제외한 7장의 전체 내용(7:7-25)이 로마의 신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님을 암시하는 것이 된다. 이 점은 6장에서 여러 번 나타났던 2인칭 복수 명령법 시제가 7장에 가서 한 번도 나타나지 않고 있는 사실에서 확인이 된다.
둘째, 6장에서 수 없이 등장하던 “그리스도”(인칭 대명사를 포함하여 12번)가 7장에 가서 서론인 4절에서 1번,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를 언급하는 25절 상반 절의 1번을 제외하고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가 8장에 가서 다시 수없이 반복(적어도 11번 이상)되고 있다는 점이다.
7장에 있는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대한 이례적인 생략과 대조적으로 율법과 율법의 사역이 대신 7장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7장의 내용이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의존하고 있는 신자에게 직접 해당되지 않는다는 점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셋째,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6장에서 강조되고 있는 명령형 동사와 그리고 그 명령을 이루어가는 약속과 보증이 7장에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다가 8장에 가서 보증과 약속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성령이 7:6에 한 번 언급된 다음 7장에서 전혀 나타나지 않다가 8장에 가서 성령이 수없이 반복되고 있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7:7-25에서 성령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고 그 대신 율법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7장이 신자의 삶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좋은 근거가 될 수 있다.
넷째, 6장과 8장에 1인칭 복수 대명사 “우리”가 여러 번 등장하지만 7장에 수없이 등장하는 1인칭 대명사 “나”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7장에는 6장과 8장에 수 없이 등장하는 2인칭 복수 대명사 “너희”와 “그리스도”와 그리고 8장에 있는 “성령”(오직 7:6에 한번)이 모두 생략되고 있는 점이다. 7장을 주석 함에 있어서 이러한 사실들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7장은 1-6절, 7-13절, 14-25절 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부분인 1-6절은 7-8장의 서론으로서 여기에서 바울은 결혼제도의 실례를 통해, 곧 결혼한 여자가 그 남편이 죽었을 때는 그 남편의 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제도를 실례를 들어, 율법의 한계를 설명하고 있다. 즉 신자는 그리스도의 죽음과의 연합을 통해 율법에 대하여 죽었음으로, 소극적으로는 그동안 자신을 예속한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과, 적극적으로는 이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한다. 둘째 부분인 7-13절에서 바울은 율법이, 비록 죄의 도구가 되어 나를 죽음으로 끌고 간다고 할지라도, 율법은 죄가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한 법인 것을 강조한다. 문제는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지배하는 죄에게, 곧 죄의 지배를 받는 육, 나의 죄성(罪性)에 있다는 것이다. 셋째 부분인 14-25절에서 바울은, 율법이 한편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법으로서 나에게 죄가 무엇이며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알려주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죄의 지배 아래 있는 나를 구원하지 못하고 나를 죄와 싸워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지 못하는 무능력 때문에, 절망과 좌절할 수밖에 없는 나의 고뇌에 관하여 말한다.
1. 율법으로부터의 자유함(7:1-6)
《개관》
로마서 7:1-6은 신자가 율법의 지배 아래 있지 않고 성령의 지배 아래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로마서 7-8장 전체에 대한 서론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7:1-6의 결론인 6절에서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율법]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르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고 하면서 7장의 주제인 “율법”과 8장의 주제인 “성령”을 미리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7:1-6의 문단에서 바울은 신자와 율법 관계를 한때 결혼했다가 남편과 사별한 한 여인의 실례를 들어 설명을 한다. 즉 결혼한 여자가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 남편에게 매여 있지만, 남편이 죽은 다음에는 남편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실례를 들어,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율법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더이상 율법에 매일 필요가 없고, 율법을 삶의 원리로 삼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가 율법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여 우리를 사망에게로 이끌어가지만, 이제 신자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율법에 대하여 죽고 율법의 권세로부터 자유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에, 더이상 율법이 아닌, 하나님께서 신자의 새로운 삶의 원리로 주신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7:1에서 바울은 7:1-6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논지, 곧 율법의 한계성을 말한 다음, 2-3절에서 결혼제도를 실례를 들어, 그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그런 다음 4절에서 1-3절에서 말한 내용을 신자들에게 적용시키고, 그리고 그것을 5-6절에서 보다 더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결론을 내린다.
《주해》
① 결혼법의 실례(1-3절)
바울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율법이 그를 지배한다(b. Shabb. 30a)는 유대교의 가르침을 알고 있는 로마교회의 신자들(“형제자매들”)에게(‘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이 근본적으로 율법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어 은혜의 지배 아래 있다는 사실(참조 6:14)을 강조하기 위해 유대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결혼제도의 법을 실례로 든다. 바울이 로마교회 신자들을 가리켜 모세의 법을 알고 있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로마교회가 본래 유대인 신자들을 통해 형성되었고, 그리고 이어 유대교에 관심을 가졌던 개종자들과 이방인 신자들이 교회의 구성원이 되었기 때문에, 로마교회는 바울의 어느 교회보다도 유대교가 가르치는 모세의 율법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바울의 서신 가운데 로마서에 구약 인용이 가장 많은 사실도 이점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바울이 로마교회 신자들에게 결혼제도의 유대교 법을 실례로 드는 이유는 5-6장에서 말한 것처럼 신자는 더이상 율법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에 있다. 즉 여자가 남편이 살아 있을 때는 결혼 법에 매여 이혼이 불가능하였지만(신 24:1-4), 남편이 죽었을 때 남편으로부터 비로소 자유롭게 되는 것처럼(m. Qidd. 1.1),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율법에 대하여 죽었음으로 더이상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자유로운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갈 2:19).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갈 3:13), 우리 역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함께 죽었기 때문에(6:6-8),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자는 더이상 율법의 지배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이다(6:15).
유대교의 결혼제도에 따르면 결혼한 후 남편이 그 아내로부터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하면 이혼을 요구할 수 있었다(신 24:1-4). 그러나 아내는 어떤 경우에도 남편의 생전에는 이혼을 요구할 권리를 갖지 못했다. 아내는 남편의 생전에는 법으로 남편에게 매여 있었다. 그러나 남편이 죽은 경우에 그 아내는 매여 있던 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다른 남자와 재혼을 할 수 있다. 이처럼 죽음은 법적으로 결혼 관계나 의무를 해소시킨다. 바울이 여기서 유대교의 결혼제도를 실례로 든 것은 단순히 크리스천이 율법의 매임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본문으로부터 무슨 특별한 영적 의미를 찾기 위해 본문에 나오는 “여자”를 “신자로, 남편을 율법으로, 혹은 남편을 옛 자아로, 여자를 새로운 자아로 보는 식의 알레고리적 해석을 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② 그리스도를 통하여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함(4절)
바울은 4절에서 1-3절의 유대교 결혼제도의 실례에 근거하여 크리스천이 어떻게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는가를 설명한다. 둘 사이의 공통분모는 죽음이다. 아내가 그 남편의 죽음으로 자신을 예속했던 남편의 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처럼 크리스천은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 곧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모든 요구를 성취한(8:2-4) 그의 희생적 죽음에 연합함으로써, 율법에 대하여 죽고 그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새로운 관계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죽은 남편이 더이상 아내를 예속할 수 없는 것처럼, 율법이 더이상 크리스천을 예속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남편의 죽음이 아내와의 단절을 가져오는 것처럼, 율법에의 죽음은 율법으로부터 신자의 단절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은 남편의 죽음으로 아내가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크리스천이 율법에 죽었다는 것은 더 적극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소속되어 하나님을 위하여 거룩한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함에 있다고 강조한다. 즉 율법으로부터의 자유가 이제는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일종의 신적 수동태로 볼 수 있는 ‘너희는 죽게 되었다’(‘에다나토데테’)는 율법에의 죽음이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역임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6장에서 죄에 대하여 설명한 내용과 7장에서 말하는 율법과의 유사성을 발견한다. 6장에서 바울은 신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소극적으로는 죄에 대하여 죽음으로 죄의 종되었던 것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과, 적극적으로는 의의 종, 하나님에게 종이 되었음을 강조하였다. 즉 지배하는 주인과 그 영역이 바꾸어졌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7:4에서 바울은 신자가 그리스도의 몸, 그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율법에 죽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고 말한다. 즉 신자는 율법의 지배로부터 그리스도의 지배에로 이전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는, 6장에서 신자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고 있는 것”(6:22)처럼, 이제 더이상 율법이 아닌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아 하나님을 위하여 거룩한 삶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7:4b)는 것이다. 이 열매는 갈라디아서 5:22-23에 나타나는 아홉 개의 성령의 열매나, 에베소서 5:9의 빛의 열매처럼 성도들의 성화의 삶을 통해서 나타나는 거룩함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여야 하는 점은 바울이 죄와 율법의 상호 연관성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는 점이다.
③ 율법의 삶이 아닌 성령의 삶(5-6절)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5-6절은 1-4절의 결론인 동시에 7-8장을 여는 서론에 해당한다. 따라서 로마서 7장과 8장의 바울의 논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5-6절에 주목하여야 한다. 5절이 율법의 지배를 받는 삶(7:7-25)을 대변하고 있다고 한다면, 반면에 6절은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8:1-39)을 대변한다. 양자는 각각의 삶이 어떻게 다르며, 무슨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보여준다. 이러한 대조를 통해서 바울은 신자가 율법이 지배하는 삶이 아니라(7장의 주제), 성령이 지배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8장의 주제) 강조한다. 5절에서 바울은 예수 믿기 이전의 우리의 옛 삶을 육신에 있던 삶으로, 죄의 정욕이 율법을 통해서 우리의 지체 가운데서 지속적으로 역사하는 삶으로, 그리고 죽음을 가져오는 열매를 맺는 부정적인 삶으로 규정한다. 사실상 여기에 로마서 7장의 핵심 어휘와 그리고 이들 사이의 제휴 관계가 소개된다. 곧 “육”, “죄”, “죽음” 그리고 “율법”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밝힌다. 바울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그리스도 이전의 아담과 이스라엘이 속했던 옛 세계를 대변한다. 이점은 6절이 바울이 종종 시대의 전환을 말할 때 사용하는 “그러나 이제는”이란 말로 시작하고 있는 점을 통해 확인이 된다. 바울이 볼 때 율법은 유대교의 주장처럼 생명을 가져다주는 좋은 열매를 맺게 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 오히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죄가 우리의 육신을 지배하는데 있어서 도구가 되어, 결국 성전 파괴, 나라 멸망, 바벨론 포로와 같은 죽음의 나쁜 열매를 가져오게 하는 부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왜냐하면 율법이 죄의 세력을 좌우하기보다는 오히려 죄의 세력이 율법을 좌우할 만큼 더 크고 강력하기 때문이다.
5절이 예수 믿기 이전의 육에 속해 있었던 우리의 과거적 삶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면, “이제는”이란 말로 시작하는 6절은 예수 믿은 이후의 우리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즉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5절이 7:7-25에서 자세하게 설명되고 있는 율법 아래서의 부정적인 삶과 부정적인 결과를 예시하고 있다고 한다면, 6절은 8:1-39에서 자세하게 설명되고 있는 성령 아래서의 긍정적인 삶과 그 결과를 예시하고 있다. 바울은 먼저 6a절에서 4절의 내용을 다시 강조하여 우리가 “우리를 얽매었던 그 율법에 대하여 우리가 죽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율법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났다”고 말한다. 여기서 바울은 단순과거 동사 시제를 사용하여 율법에 대한 우리의 죽음과 율법으로부터의 자유가 이미 일어난 사건임을 강조한다. 그런 다음 6b절에서 그는 현재 시제를 사용하여 “이러므로 우리가 문자(율법)의 옛것이 아닌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고 있다”고 말한다.
6a절에 있는 과거 시제가 이미 일어난 사건임을 강조한다면 6b절의 현재 부정사는 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것이 이미 시작되어 계속 반복되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여기 율법의 옛 것과 상령의 새로운 것의 대조는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 바울은 고린도후서 3:6에서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율법이 아닌 성령으로 새 언약의 일꾼이 되게 하셨다”고 말한 다음 “율법(문자)은 죽이고, 반면에 성령은 살린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 그는 자신이 받은 새 언약의 직분과 모세의 직분을 서로 대조한다. 즉 모세의 직분은 죽이는 율법의 직분인 반면에 자신의 새 언약 직분은 살리는 성령의 직분이며, 모세의 직분은 정죄를 가져오는 직분인 반면에 자신의 직분은 의를 가져오는 직분이며, 모세의 직분은 없어질 영광의 직분인 반면에 자신의 직분은 영구히 있을 더 큰 영광의 직분이라는 것이다. 많은 학자가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바울의 이 대조는 예레미아서 31: 31-34 있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대조와 에스겔서 17: 60-62, 36: 26-27, 그리고 37:26장에 있는 옛 언약과 새 영 및 영원한 언약과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로마서 7:6에 있는 율법과 성령, 옛것과 새것의 대조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있어서 두 시대를 대변하는 예레미아의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대조와, 에스겔의 옛 언약과 새 영 및 영원한 언약의 대조에서 가져왔을 수 있다. 곧 바울은 여기서 고린도후서 3장의 경우처럼 자신과 로마의 크리스천들은 예레미야와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새 언약과 새 영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표명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이제 로마의 크리스천들은 율법 문자의 낡은 것이 아닌 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율법이 아닌 성령을 따라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6절에서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을 취급하는 8장으로 바로 가지 않고 7:7-25에서 율법을 따라 사는 삶의 비극을 먼저 말하고 있는가? 그가 6장에서는 신자들에게 죄에 대하여 죽음으로 죄로부터 해방을 말한다음 즉시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6:19)고 명령하였는데, 왜 7장에서는 율법에 대하여 죽음으로 율법으로부터 해방을 말한 다음 바로 성령으로 거룩한 삶을 살으라고 말하지 않고 다시 율법 아래의 삶을 말하고 있는가?
2. 율법의 역할(7:7-13)
《개관》
7:7-25에 오면서 바울의 문체는 급격하게 바뀐다. 6:1-2의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를 연상하게 하는 7:7a,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에 나타나는 1인칭 복수를 제외하고 7:7-25는 “나”가 주도하는 1인칭 단수 형태로 전환된다. 로마의 크리스천을 말하는 2인칭 복수 대명사나 동사가 일체 생략된다. 그리고 7:6에서 언급된 성령도 8장에 도달할 때까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6장을 주도했던 은혜, 의, 생명, 그리스도와 함께, 거룩함, 영생이란 긍정적인 어휘가 사라지고 대신 죄, 육신, 율법/계명, 사망 등 부정적인 어휘가 7-25절을 주도한다. 왜 바울이 이러한 어휘와 문체의 전환을 가져오는가? 왜 2인칭 복수 대명사와 동사, 그리고 성령에 대한 언급이 사라지고 8장에 가서 다시 나타나는가? 7:7-25을 올바르게 이해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어휘와 문체의 변화에 주목하여야 한다. 특별히 로마서 7:7-25를 6장 및 8장과 마찬가지로 크리스천에게 해당된다고 보는 자들은 이러한 변화에 대하여 납득할 수 있는 답변을 하여야 한다.
잘 알려진 대로 “나”의 등장과 대화체 스타일로 되어있는 로마서 7:7-25은 크게 7-13절과 14-25절의 두 문단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문단인 7:7-13은 주로 과거시제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 바울은 앞의 문맥에서 언급된 율법과 죄와의 밀접한 관계로부터 제기될 수 있는 질문과 관련하여 율법에 대한 변증을 제시한다. 동시에 그는 율법의 참된 기능을 율법에 관하여 종종 언급했던 부정적인 시각에 비추어서(3:19, 3:20b, 4:15, 5:13, 5:20) 보다 자세히 토론한다. 즉 율법이 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율법 그 자체가 죄가 아님을 주장한다. 둘째 문단인 7:14-25에서 바울은 현재시제를 사용하여 “나”를 지배하는 죄의 강력한 권세와 죄의 권세로부터 “나”를 구원할 수 없는 율법의 무능력을 나란히 제시함으로서, 율법에 의한 성화를 주장하는 유대교적 교리의 한계를 폭로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죄와 율법의 권세로부터 해방된 신자는 그 어떠한 이유에서든 또다시 죄와 율법의 권세 아래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표명한다. 말하자면 옛 언약 백성의 효과적인 삶의 원리가 되는 것에 실패한 율법이 또다시 새 언약 백성의 삶의 원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로마서 7:7-25은 유대교의 인간론은 물론 율법 중심의 유대교 구원론에 대한 바울의 가장 강력한 비판 중의 하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고백적인 “나” 스타일을 동원하여 바울은 한편으로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이스라엘의 근본적인 문제를 폭로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은 왜 율법을 통하여 자신을 거룩하게 할 수 없는가를 해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7장의 첫 번째 문단인 7:1-6에서 살펴본 것처럼, 바울은 이 문단의 결론인 6절에서 사실상 7-8장의 주제인 신자의 삶은 율법의 지배를 받는 삶이 아니고, 오직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임을 천명하였다. 여기서 자연히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본래 언약 백성의 삶의 원리로 주어진 율법이 왜 새 언약 시대에 살고 있는 크리스천의 삶의 원리가 될 수 없는가? 이미 바울은 6장 이하에서 본격적으로 크리스천의 삶, 곧 성화 문제를 말하면서, 율법을 죄에 대한 일종의 보호막으로 생각하고, 율법을 유대인들의 삶의 원리로 제시하는 당대 유대교의 가르침에 반대를 표명하였다. 율법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죄를 짓지 않게 하기보다도, 오히려 율법과 죄가 서로 협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율법과 죄를 구조적으로 나란히 병행시킨 바 있다.
우리는 한때 죄 아래 있었으나,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죄에 대해 죽음으로서(6:2, 11)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로워졌다(6:7, 18, 22).
우리는 한때 율법 아래 있었으나,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율법에 대하여 죽음으로서(7:4)
율법의 권세로부터 자유로워졌다(6:14, 15; 7:5-6).
이와 같은 죄와 율법의 병행은 죄 아래 있는 자가 곧 율법 아래 있는 자임을 지적해 준다(6:14). 따라서 자연히 율법과 죄에 대한 관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율법이 죄냐?”(7:7a). 이 질문에 대하여 바울은 7:7b-25에서 “나”를 주인공으로 삼는 일종의 자서전적 문체를 동원하여 율법이 죄가 아닐찌라도, 죄와 율법은 인간 자아를 중심으로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밝힌다. 여기서 그는 좁게는 자신을 유대인/이스라엘과 일치시키고, 넓게는 그들의 뿌리인 아담과 일치시켜 율법이 어떻게 죄와 불가분의 연대성을 가지고 있음을 밝힌다. 물론 이러한 “나”의 고백은 바울을 제외하는 수사학적인 장치는 아니다. 바울 역시 그들과 연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의 “나”의 고백은 다메섹 사건 이후 그의 크리스천 전망에서 나온 것이다.
《주해》
① 율법은 죄가 아니다(7a절)
바울은 7절 상반 절에서 로마서에서 중요한 전환을 가져올 때마다 자주 사용하는 수사학적인 질문을 다시 사용하여 “율법이 죄냐?”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강한 부정을 말할 때 자주 사용하는 “결코 그렇지 않다”라는 문구로 답변한다(3:4, 6; 6:2, 15; 7:7, 13; 9:14; 11:1, 11). 바울이 앞에서 이미 율법은 의의 수단이 아니다(3:20,28), 율법은 진노를 불러일으킨다(4:15), 율법은 죄를 죄 되게 한다(5:13), 율법이 죄를 증가시킨다(5:20), 율법은 죄의 정욕과 사망의 열매를 맺게 한다(7:6)라는 율법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여러 번 말한 바 있다. 따라서 독자들 가운데, 그렇다면 과연 율법이 사악한 죄라는 말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도 있었다. 이러한 질문을 예상하면서 바울은 강하게 율법은 악한 것이 아니고, 악을 가져오는 죄도 아님을 선언한다. 그런 다음 바울은 7b절에서 13절까지 율법 자체가 어떻게 죄가 아님을 설명한다. 율법은 죄를 드러나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법으로서 거룩하고 선하기 때문에 결코 죄와 동일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은 율법이 죄와 전혀 무관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바울은 율법이 나의 삶 가운데서 죄와 협력하고 서로 제휴하기 때문에 죄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음을 강조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율법이 유대교의 주장처럼 언약백성의 삶의 원리가 될 수 있는 여하한 가능성을 배제한다. 율법에 대한 바울의 변증은 여기서 이중적으로 제시되고 있는데, 첫째 논증은 7b절에서 11절에 나타나 있고, 둘째 논증은 12-13절에 나타나 있다.
② 율법의 역할(7b-11절)
바울은 7b절 이하에서 율법이 죄가 아님을 밝히기 위해 먼저 죄가 무엇임을 규명하고, 율법까지 통제하려고 하는 죄의 권세가 오히려 율법을 통하여 밝혀진다고 주장함으로써, 율법이 죄와 동일시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런데 바울은 7b절부터 자주 1인칭 “나”를 사용한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7절 이하의 내용이 마치 바울 자신의 실제적인 경험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바울 당대 헬라-로마-유대 사회에서 일반적인 사실을 표명할 때 이미 자주 1인칭 “나”를 사용하였다(Quintilian, Institutio oratoria 9.2.30-33; Seneca, Medea 989; 1QS 11.0-10; 1QH 1.21-23, 3.24-36; Pss. 44:5; 129:1-3; 2 Bar. 4.1-7). 우리는 이러한 용법을 구약에서도 엿볼 수 있다(사 12:1-2; 40:27; 49:14, 21; 렘 10:19-20; 애 1:19-22; 3:1-21; 미 7:7-10). 바울 역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일반적인 사실을 1인칭을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관습은 오늘 우리 사회에서도 현존한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도 일반적인 사실을 말할 때 1인칭 단수인 “나” 혹은 복수인 “우리”라는 대명사를 사용하기도 한다. 물론 이 일반적인 사실을 말하는 1인칭의 경우에 말하는 당사자를 배제할 필요는 없다. 말하자면 바울이 “나”를 통해 아담이나 이스라엘 혹은 자기 당대 유대인을 대변하더라도, 바울이 아담 혹은 이스라엘 혹은 유대인에 속한 이상 바울 자신을 배제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로마서 7장의 “나”가 바울 자신의 실제 경험을 반영하는 자서전적인 내용이냐 아니면, 바울 자신의 고백적인 내용을 통해 율법의 권세 아래 살고 있는 아담, 이스라엘, 혹은 유대인을 말하느냐에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왜 독자들에게 이런 방식으로 말하느냐에 있다.
바울은 7절 이하에서 독자들에게 율법이 유효한 삶의 원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이 속해 있는 이스라엘의 경험, 특별히 모세의 율법을 하나님의 백성의 합당한 삶의 규범 내지 원리로 받아들이고 있는 자기 당대 유대인들을 “나”라는 1인칭을 사용하여 그들의 경험을 표현하고 있다. 바울이 7절 이하에서 로마의 크리스천을 포함하는 1인칭 복수나 2인칭 복수 대명사나 동사를 생략하고 있는 사실이 이 점을 뒷받침한다. 말하자면 7절 이하의 경험을 바울과 로마의 크리스천이 직면하는 실제적인 경험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물론 이 경험은 다메섹 사건 이후 바울이 복음의 빛을 통해 조명한 경험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경험은 동시에 아담의 경험이다. 하나님은 아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선택했다. 하지만 아담이 하나님이 그를 축복하기 위해 주신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법)을 불순종하여 죄를 범한 것처럼,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이 축복을 위해 주신 율법에 불순종하여 죄를 범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창세기에 나타나는 아담의 문제를 통해서 이스라엘과 자기 당대 유대인의 문제를 말한다.
바울은 7:7a에서 율법이 비록 죄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율법은 죄가 아님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그는 이제 율법이 왜 죄가 아님을 규명하여야 한다. 바울은 먼저 율법이 내게 죄를 알려준다고 말한다(7bc). 곧 율법이 나에게 ‘탐내지 말라’고 하였기 때문에 나는 탐내는 것이 죄임을 알게 되었다. 이처럼 율법이 죄에 의해 남용되어 내 속에 여러 종류의 탐심 곧 죄의 열매들을 산출하긴 하지만 죄는 율법의 잘못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법(창 2:17)을 주셨고, 아담이 그 계명을 어겨 죄를 지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담의 죄가 하나님의 계명 때문이 아닌 경우와 같다. 그러나 한때 아담이 하나님의 선악과의 법을 받기 전에 에덴동산에서 죄가 가져오는 죽음도 알지 못하고 살았다. 그러다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계명(율법)이 주어지자(창 2:17) 그 계명을 통해 죄가 살아나게 되었고, 그 결과 아담은 계명 때문에 죽었다(8). 바울은 지금 “나”를 통하여 이스라엘은 물론 그 뿌리인 아담의 경우를 말하고 있다.
이처럼 아담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죄와 율법과 죽음은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물론 율법(계명)은 본래 죄를 산출하기 위해 주어진 것도, 죽음을 가져다주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다. 바울은 여기서 죄와 율법의 불가분의 관계를 말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계속해서 에덴동산의 아담에 비추어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실상 율법과 죄에 대한 문제를 자신과 자기의 동족인 유대인을 뛰어넘어 전 인류에게 적용시킨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창 2:17)은 어디까지나 죽음이 아닌 생명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만일 아담이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하지 않았다면 그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생명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뱀, 곧 죄가 아담(이브)에게 찾아와, 하나님이 아담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주신 선악과의 금지 계명을 통해, 유혹하여 아담의 마음속에 선악과에 대한 탐심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아담은 자신의 탐심으로 인해 뱀(죄)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였다. 그 결과 그는 생명이 아닌 죽음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어디까지나 복과 생명을 주기 위함이었다(레 18:5; 신 30:15-20).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아담의 경우처럼 복과 생명을 위한 그 율법에 불순종하여 범죄함으로써 율법을 죄의 도구가 되게 하였다. 그래서 율법이 이스라엘에게 복과 생명 대신 저주와 죽음을 가져왔다. 하지만 죽음은 율법 그 자체의 잘못이 아니다. 왜냐하면 죄가 율법을 통하여 나를 속이고 나를 죽게 하였기 때문이다. 주범은 율법이 아니고 죄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다. 율법은 유대교의 가르침과 달리 이스라엘에게 죄를 예방하고, 죄를 범하지 않게 하고, 죄를 이기도록 하는 힘이 되어주지 못하였다. 오히려 죄와 죽음의 도구가 되었다. 이와 같은 율법에 대한 바울의 이해는 당대 유대교의 이해와는 다른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구약 창세기에 있는 내용을 통하여 자기 당대 유대교의 낙관적인 율법관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율법이 죄를 예방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유효한 삶의 원리가 될 수 없음을 밝힌다. 물론 율법에 대한 이와 같은 부정적인 표명은 적극적으로 그리스도, 복음, 성령이 그 해결책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7:24a; 8:1).
③ 율법의 한계(12-13절)
선행 논증(7bc-11절)에 의존하여 바울은 이제 율법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변증을 제시한다(12절). 그런 다음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규범으로써의 율법의 참된 기능을 설명한다(13절). 이런 점에서 바울의 논리는 다음과 같이 아주 변증법적인 것같이 보인다. 첫째, 12절에서 바울은 율법과 계명이 거룩하고, 의롭고, 그리고 선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의 선한 의지의 표현으로서,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이웃과 바른 관계를 가지게 하여, 인간에게 생명을 주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울은 율법이 본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 백성으로 살기 위한 원리로 주어졌다는 당대 유대교의 긍정적인 율법 이해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유대교의 율법 이해와는 다른 견해, 곧 율법의 부정적인 기능을 제시한다. 둘째, 율법을 통하여 죄가 살아나고, 그 죄를 통해 죽음이 주어졌다. 그렇다면 당연히 율법이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느냐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바울은 13절에서 단호하게 다시 “그럴 수 없느니라”고 하면서 율법이 내게 사망을 가져다준 주범은 아님을 주장한다. 내게 사망을 가져온 주범은 율법이 아니라 죄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동시에 율법이 죽음과 전혀 무관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율법은 죄가 죄로 드러나도록 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결국 나를 죽게 하였다. 이처럼 율법은 죄를 더욱 죄되게 하는 긍정적인 기능을 통하여 내게 죽음을 가져오는 부정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결국 율법이 언약백성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한다는 유대교의 무조건적인 낙관적 견해가 잘못임을 지적한다.
3. 율법, 죄 그리고 나(7:14-25)
《개관》
로마서 7:14-25을 주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나”의 정체성 문제이다. 어떤 사람들은 로마서 7:14-25의 “나”는 사망을 가져오는 율법의 지배 아래 있으며, 죄 아래 팔렸으며, 선을 행하지 않고 악만 행하는 자이며, 사망의 몸에 매여 있는 자인데, 어떻게 이런 “나”가 6장에서 강조된 죄와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나 은혜의 지배 아래 있는 “너희”와 8장에서 강조되고 있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성령의 지배 아래 살게 된 “너희”, “우리”인 신자와 동일시 될 수 있느냐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면서 참된 신자의 모습은 로마서 7:14-25의 “나”가 아니고, 오히려 로마서 6장, 7장 1-6절과 그리고 로마서 8장이 말하는 율법의 지배에서 해방되어 이제 성령의 지배 아래에 있는 “너” 혹은 “우리”의 모습이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또 어떤 사람들은 로마서 7:14-25의 “나”는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는 자,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자,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섬기는 자이기 때문에, 허물과 죄로 죽어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할 수 없는 자연인으로 볼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로마서 7:14-25의 “나”는 당연히 불신 자연인이 아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앞에서 이미 밝힌 것처럼 로마서 7장의 “나”를 불신자로 보든 신자로 보든 “나”의 정체성의 규명이 7:14-25의 바울의 논지가 아니다. 그것은 본문의 흐름은 물론 로마서 전체의 문맥과도 맞지 않다. 더 나아가서 바울의 로마서 저술목적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사실 엄밀히 말해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일반 자연인은 로마서 7장에 나타난 심각한 갈등을 갖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율법과 계명에 대한 이해는 물론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로마서 7장을 일반 신자로 보는 경우는 7장 7절 이하에 나타나 있는 죄와 율법의 포로가 되어 있는 나의 모습이 6장과 7장 5-6절과 그리고 8장에 제시되어 있는 은혜와 성령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 예를 들면 6:2에서 바울은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살리요”라고 하면서 신자는 계속해서 죄 가운데 살 수 없음을 강조한다. 역시 6:6-7에서 신자는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죄의 몸이 멸하여 죄에게 종노릇 할 수 없다는 것과 우리 자신은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음을 강조한다. 오히려 6:18, 22에서 우리는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와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바울은 7:6에서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음으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 찌니라”라고 결론 내렸다. 이와 같은 결론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는 시작되는 8장에서 계속된다. 이처럼 로마서 7:14-25의 “나”를, 단순히 불신자 일반이나 그 반대로 신자 일반으로 보는 단순한 견해는 로마서 본문 자체의 전후 문맥과도 맞지 않는다.
* 로마서 1:18-7:16까지 바울이 제시한 그리스도 밖에 있는 불신자(이방인과 유대인을 포함하여)에 관한 묘사와, 이와 대조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이방인과 유대인을 포함하여)의 묘사와 그리고 7:14-25에서 제시하고 있는 “나”의 묘사를 각각 서로 대조함으로써 우리는 7:14-25의 “나”가 그리스도 밖에 있는 불신자를 가리키고 있는지,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를 가리키고 있는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A.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에 관한 진술(1:18-7:6)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자(1:18; 2:5),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자(3:19), 죄 아래 있는 자 (3:9), 율법 아래 있는 자(3:19; 6:14,15), 범죄 한 자(3:23), 사망에 이를 죄의 종 (6:16,17,20), 육신 안에 있는 자(7:5),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섬기는 자(7:6).
B.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에 관한 진술(3:21-7:6)
(죄, 진노, 심판으로부터)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3:24; 5:1,9,16; 6:7), 하나님과 화목케 된 자 (5:10),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5:17),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는 자(5:19), 죄에 대하여 죽은 자(6:2,11), 죄로부터 해방된 자(6:14,18,22),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 는 자(6:14), 죄의 종에서 순종과 의의 종이 된 자(6:16,18,19),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 (7:4,6),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자(7:6), 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자(7:6).
C. “나”에 대한 진술(7:14-25)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린 자(7:14), 내가 원하는 것은 하지 않고, 미워하는 것을 행하 는 자(7:15), 내 속에 죄가 거하는 자(7:17,20),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한 자(7:18), 악 을 행하는 자(7:19),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자(7:21), 내 속사람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 는 자(7:22), 죄의 법에 서로 잡힌 자(7:23), 나는 곤고한 사람(7:24),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 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자(7:25).
이와 같은 대조는 C가 B가 아닌 A와 같다는 것을 쉽게 확인하게 한다.
물론 로마서 7:14-25의 “나”의 경험은 다메섹 이전의 바울이 경험했던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메섹 이후 현재 바울 자신이나 크리스천 일반의 실제 경험을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7:14-25의 “나”의 경험을 단순히 다메섹 사건 이전의 바울이나 유대인 일반의 경험으로 보는 경우의 문제점은 다메섹 사건 이전의 바울이나 바울 당대의 유대인이 이런 경험을 고백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반대로 7:14-25의 “나”의 경험을 다메섹 사건 이후의 바울이나 크리스천 일반 경험으로 보는 경우의 문제점은 왜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이런 부정적인 경험을 말하고 있느냐에 대한 만족스러운 답변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로마서 전체의 저술 목적과 어떻게 부합하느냐에 대해서도 적절한 답변을 주지 못하고 있다. 거듭 말하지만 로마서 7장의 중심주제는 “나”의 정체성이 아니고 율법이다. 율법이 과연 유대교의 주장처럼 죄를 제거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합당한 언약백성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유효한 삶의 원리가 될 수 있느냐는 문제와 관련하여 율법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바울의 의도이다.
우리는 로마서에서 바울이 종종 유대인과 이방인, 어둠과 밝음의 수사학적 대조의 기법을 자주 사용하고 있는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예를 들면, 바울은 1:18-3:20까지 이방인과 유대인의 범죄와 비참의 어두운 면을 말하고, 3:21-4장까지 ‘이신칭의’의 복음을 통한 구원의 밝은 면을 말한다. 5장에서는 아담의 불순종과 범죄의 어두운 면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의와 은혜의 밝은 면이 서로 교차적으로 나타난다. 6장-7:6까지는 죄와 율법의 권세로부터 해방된 신자의 밝은 면과 죄와 육에 매인 자의 어두운 면이 서로 교차적으로 소개된다. 그러다가 7:7-25까지는 죄와 율법의 권세 아래 있는 “나”의 어두운 면이 소개된다. 먼저 7:7-13에는 과거 시제를 사용하여 율법 아래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적 상황을 서술한다. 그런 다음 7:14-25에는 현재 시제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와 성령 없이 율법을 따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합당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이스라엘의 현재 상황을 표현한다. 그리고 8장에서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지배 아래 있는 “우리/너”의 밝은 현재 상황이 소개된다. 이스라엘 문제를 다루는 9-11장에서도 먼저 이스라엘의 범죄와 심판의 어두운 면이 소개된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가서 다시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밝은 면이 소개된다. 이처럼 어두움과 밝음의 수사학적 대조는 로마서의 특정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용면이나 구조면에서 로마서 전반에 걸쳐 핵심적인 요소로 나타나고 있다.
《주해》
① 죄의 권세 아래 있는 “나”(14a절)
7:7-13에서 제시된 율법에 대한 바울의 변증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가져온다. “선하고 거룩하고 신령한 율법이 왜, 어떻게 해서, ‘나’에게 죽음이 되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바울의 결정적인 답변이 14절에 있는 “율법은 신령하다. 그러나 나는 육적이고 죄의 권세 아래 팔렸다”이다. 첫째, 14a절을 통하여 바울은 “율법이 신령하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거듭 확인한다. 즉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한 법이라는 것이다(22절, 25절 참조). 둘째, 바울은 14b절을 통하여 율법과 대조적으로 ‘나’가 육적이며 죄의 권세 아래로 팔려졌다라고 강조함으로써, 이미 그가 1:18-3:20에서 취급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과 인류의 뿌리인 아담적 자연인이 실질적으로 어떤 자인가를 재확인한다. 바울은 여기서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의 권세 아래 매여 있는 자인 동시에 죄의 권세 아래 매여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7:15-23절에 나타나고 있는 원하는 ”나”와 행위 하는 “나” 사이의 비극적인 모순은, 곧 율법을 소유하고 있는 유대인/이스라엘이 직면하고 있는 모순은, 죄와 하나님의 법의 이중적인 충동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7:25b).
바울은 이 문단에서 시종일관 현재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 그가 현재 시제를 사용하는 주된 이유는 ‘나’의 비극적인 투쟁이 회심 이후 바울의 현재 경험이기보다도 오히려 크리스천 신앙의 현재적인 전망을 통하여 본 회심 전의 바울을 포함하여, 전 유대인들에 관한(혹은 유대인을 모델로 하는 크리스천 이전 사람에 관한) 현재적 통찰이기 때문이다. 실제적으로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 율법과 죄와 그리고 자아의 밀접한 부정관계를 깨닫지 못하였다. 이것이 바울이 고백적인 형식을 사용하는 주된 이유이기도 하다. 즉 바울은 여기서 고백적인 형식을 사용하여 전에 그가 어떤 존재였으며, 현재 그가 어떤 존재인가를 생생하게 노출시킨다. 바울은 이와 같은 개인적-실존적 방법을 사용하여 크리스천 독자들과 비크리스천 유대인들에게 그들 자신의 노력을 통하여, 곧 율법의 행위를 통하여 성화에 도달하려고 하는 자들의 절망적인 상황을 일깨워준다. 다시 말하자면 바울은 그 자신을 거울로 하여 율법에 따른 유대적 성화를 추구하는 자들의 현재는 물론 미래의 상황을 볼 수 있게 함으로써, 율법을 통한 성화의 기대나 유혹을 더 이상 받지 않도록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문단을 현재의 사실적 묘사로 볼 것이 아니라 오히려 로마의 크리스천 독자들에게 강한 예방책의 일환으로 일종의 경고적 훈계로 보아야 할 것이다.
② 율법의 무능력(15-17절)
구조적으로 볼 때 14절 이하는 15-17절과 18-20절, 그리고 21-25절로 나누어진다. 서로 병행을 이루고 있는 첫째와 둘째 부분에서 바울은 행위의 주체가 되는 죄의 권세가 의지의 주체가 되고 있는 하나님의 법의 권세보다 현실적으로 얼마나 더 강한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나”를 도울 수 없는 율법의 무능력과 함께, 또한 죄의 노예로 팔린 “나”의 비극적인 상황을 확립한다. 바울은 14a절에서 1인칭 복수 대명사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여 율법이 신령하다는 점에 대하여 그와 로마 교인들이 서로 동의할 수 있다는 점을 밝혔다. 하지만 바로 이어 14b에서 “나”의 비극적인 상황을 말할 때는 독자들을 배제하는 1인칭 단수 대명사 “나”를 사용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로마의 크리스천은 “나”의 상황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와 같은 인칭의 변화는 갈라디아서 2장에서도 발견된다. 갈라디아서 2:15-17에서 바울은 이신칭의 복음의 진리 자체를 말할 때는 1인칭 복수 “우리”를 계속 사용하여 베드로와 자신 사이에 차이가 없음을 재천명한다. 그러나 그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사는 문제를 말할 때는 계속 1인칭 단수 “나”를 사용하여 베드로를 배제시킨다.
바울은 15-17절에서 내가 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다른 이유는 율법이 문제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죄가 문제임을 주장한다. “나”는 유대인으로서 당연히 율법을 알고 율법이 가르치는 선을 행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실제로 나의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미워하는 것을 내가 행한다. 율법은 나에게 선한 것을 알게 하고, 내가 율법이 가르치는 선한 것을 행하기를 원하고 있지만, 실제 행동에서는 나는 율법이 가르치지 않는 오히려 미워하는 것을 행한다. 따라서 문제는 율법이 아니고, 오히려 나로 하여금 내가 미워하는 것을 행하도록 하는 내 속에 있는 죄이다. 이처럼 율법은 그 자체 선하긴 하지만 내 속에 있는 죄의 세력을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의 실제 행동에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율법은 원하는 “나”와 행위 하는 “나” 사이의 갈등과 분리를 가져온다. 아마도 바울은 한편으로 구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그가 다메섹 사건 전에 하나님과 율법에 대한 선한 동기와 열심을 가지고 초창기 크리스천들을 핍박하는데 앞장을 섰지만 결과적으로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서운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통찰하면서, 이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③ 내 속에 거하는 죄(18-20절)
18-20절은 15-17절과 평행을 형성하면서 그것에 근거하여 내 속에 있는 죄가 나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보여준다. 18절 서두에 있는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는 말은 내 속 깊은 곳에 죄가 자리를 잡고 나의 모든 삶을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율법을 따라 선을 행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실제로 나의 삶을 지배하는 세력인 죄가 나로 하여금 율법이 가르치는 것과는 반대되는 것을 행하게 한다. 말하자면 나를 사로잡고 있는 이 죄의 세력이 내가 원하는 선을 하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죄가 내 자아, 인격 그리고 삶을 분리시키는 주범이다. 율법은 나를 사로잡고 있는 죄의 세력을 통제하지 못한다. 즉 나를 도울 수 없다. 그것이 나에게 비극을 초래한다.
④ “나”(자아)의 분리(21-25절)
셋째 부분인 21-25절에서 바울은 의욕하는 “나”와 행하는 “나” 사이의 수수께끼 같은 모순에 대한, 즉 하나님의 율법 편에 서 있는 “나”(마음, 속사람)와 죄의 측면에 서 있는 “나”(육)사이의 모순을 보여준다. 죄와 “나” 사이에 있는, 그리고 율법과 “나” 사이에 있는 이와 같은 “나”의 분리가 결과적으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구원하랴”(24절)라는 절규를 가져오게 한다. 그다음 바울은 25a절에서 크리스천인 자신의 현재의 상황을 되돌아보면서, 이러한 분리를 극복하게 하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하면서, 일종의 크리스천적 답변을 준다. 그런 다음 25b절에서 바울이 종종 앞에서 말한 사실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낼 때 사용하는 “그런즉”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와 성령의 도움을 받지 않고 내 자신을 의지하는 한 초래될 수밖에 없는 7:14-25에 대한 종합적인 결론을 내린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 여기서 그는 한편으로 7:14 이하에서 말한 율법이 거룩하고 신령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그러나 바로 이어 율법은 죄를 극복하기 보다는 오히려 죄의 도구가 된다는 율법의 무능력을 상기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율법이 크리스천의 삶의 원리가 될 수 없고 8장에서 말할 성령 만이 온당한 삶의 원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미리 보여준다.
이처럼 로마서 7:7-25에서 바울은 율법에 대한 그 자신의 기존 변증을 상기시키면서, 한편으로 율법에 대한 영성(靈性)과 의(義)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한편으로 율법에 대한 유대교적인 성화 교리와 관련하여 죄의 권세 아래 놓인 “나”를 도울 수 없는 율법의 총체적 무능력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선택된 율법의 백성인 유대인/이스라엘의 모습을 대변하는 “나”를 거울로 삼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 밖에 있는 아담/인류에 대한 여하한 낙관적인 견해를 거부하고, 이것을 크리스천의 전망으로부터 유대인을 포함한 전 자연인에 대한 심원한 인간학적 분석을 통하여 뒷받침한다. 바울에 따르면 인간은 그 누구도, 심지어 유대인마저도 율법을 통하여 그 자신을 의롭게 하거나 거룩하게 할 수 없다. 오히려 인간은 율법을 통하여 죄인으로서의 자신의 구체적인 정체를 발견할 뿐이다(3:20). 하나님의 거룩한 법인 율법마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제외한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율법에 의해 인간이 의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가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 죽었겠는가?(참고 3:23-25; 갈 2:21; 3:21). 만일 율법이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효과적인 삶의 수단이 될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성령이 주어졌고, 그리고 율법이 아닌 성령을 따라 살으라고 교훈하고 있는가? 바울은 그리스도 사건의 조명을 통하여 한때 유대인으로서 죄와 율법과 사망 아래 있었던 그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서술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은혜와 성령의 능력 아래서만 참된 인간의 신분과 삶이 회복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크리스천의 자기 이해와 죄인으로서의 자기 이해는 너무나 밀접하게 연결되었으므로 바울은 로마서의 중심장인 8장 바로 앞에 이 로마서 7장을 두고 있다.
V. 주석에서 제기 된 질문과 답변
우리는 이 주석에서 로마서 7:7-25의 중심 주제가 “나”의 정체성의 규명에 있지 않고, 신자의 삶의 원리가 될 수 없는 율법의 무능력을 규명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나”는 죄의 세력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도구가 되는 율법의 무능력을 효과적으로 규명하기 위한 일종의 문학적이고 수사학적인 장치임을 밝혔다. 즉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 크리스천이 된 바울이, 로마의 크리스천들에게 올바른 크리스천의 삶을 살 수 있게끔 도와줄 수 없다는 율법의 무능력을 효과적으로 밝히기 위하여 1인칭 대명사 “나”를 도입,
1) 좁게는 한때 율법을 통하여 의와 성화를 추구했던 회심 전 바리새파 유대인으로서의 자기 자신과 유대인/이스라엘 자기 동족이 직면하게 되는 좌절을,
2) 광의적(廣義的)으로는 창조주 하나님을 외면하고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려는 모든 자연인(아담)의 비참을,
3) 간접적으로는 유대인 신자이든 이방인 신자이든 성령을 삶의 원리로 삼지 않고, 오히려 율법을 삶의 원리로 삼아 살아가려는 자의 좌절을 보여주고 있는 본문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7:7-25의 “나”가 크리스천 바울을 포함하여 참된 크리스천의 전형적인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택했다. 그리고 이것이 로마서 7장의 본문, 6-8장의 전후 문맥, 로마서 전체의 목적, 그리고 로마교회의 상황과 부합하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로마서 7:7-25를 여전히 신자의 삶, 성화 과정의 삶으로 보려는 주된 논점들에 대한 해명을 하려고 한다.
질문 1: 로마서 7:7-25를 사도 바울과 로마의 크리스천을 포함하여 전형적인 크리스천의 모습을 반영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로마서 전반부의 흐름과 맞지 않는 것이 아닌가? 예를 들면, 바울은 로마서 1:18-3:20까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죄와 비참을 말하였다. 그리고 3:21-4:25에서 그리스도 사건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의 복음, 곧 하나님께서 메시야 예수를 보내 그들 통해 인류를 죄와 죽음과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구원 사건을 수행하셨기 때문에 이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죄와 사망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이 메시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밝혔다. 그런 다음 5-8장에서 바울은 예수 믿는 자들이 어떤 자들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한다. 조직신학적인 용어로 다시 표현한다면 바울은 3:21-4:25은 칭의를, 5:1-8:39은 성화를 말하였다. 이처럼 바울이 5-8장에서 크리스천의 거룩한 삶(성화)에 대해 말한다고 한다면 7장도 6장과 8장처럼 당연히 신자의 성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경험으로 보아야 하지 않는가?
답변: 로마서의 주된 독자가 불신자가 아닌 신자이며, 로마서 7장도 불신자가 아닌 신자를 향하여 말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7장이 신자의 현재 상태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은 1:18-3:20이 신자의 현재 상태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고 보는 것처럼 불합리하다. 바울이 로마서 1:18-3:20을 불신자들을 향해서가 아니라 독자인 신자들을 향하여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의 현 상태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와 구원을 필요로 하는 불신 이방인과 유대인들의 상태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왜 바울이 그렇게 하는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두 가지 점을 기억하여야 한다. 하나는 로마서에서 바울은 독자들에게 복음의 메시지를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어둠과 밝음의 수사학적 대조법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로마서에는 목회적-권면적 편지이며, 동시에 바울 복음의 해명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즉 로마서는 바울의 어느 서신보다도 바울 복음의 역사적 상황성(contingency)안에 통일성(coherence)이, 통일성 안에 역사적 상황성이 함께 통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로마서를 쓸 당시 바울 자신이나 로마교회 및 예루살렘교회의 가장 현안 의 문제는 유대교 문제,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한다면 율법의 문제였다. 즉 율법이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도 유대교에서 주장되어 온 것처럼 여전히 ‘칭의’와 ‘성화’의 기능을 가질 수 있느냐는 문제였다. 이 문제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유대인과 이방인이 어떤 조건에서 메시야의 종말론적인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수 있으며, 메시야의 종말론적인 구원을 약속 받은 자들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약속된 구원을 유지할 수 있느냐는 질문으로 환원된다. 우리가 사도행전 15:1-11과 갈라디아서 2:1-10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바울의 복음에 강하게 도전하였던 유대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유대인 크리스천들마저도 율법에 “칭의”의 기능을 주는 것에는 반대하였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2:11-21의 안디옥 사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구약성경 자체가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원리로 주어졌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율법이 “성화”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강력한 설득력과 함께 로마교회와 예루살렘 교회, 안디옥 교회 등 초기기독교 공동체 안에 널리 퍼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이 볼 때 모세의 율법이 성화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율법이 칭의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성령의 역할을 무효화시킬 수 있는 대단히 위험한 주장이었다(참조 갈 2:18-21).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교회는 물론 예루살렘 교회를 위시하여 초기 기독교 공동체 전체를 염두에 두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후, 율법이 칭의의 기능은 말할 필요도 없고 성화의 기능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강하게 밝혀야 할 필요성에 직면해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명 없이는 로마교회의 현안의 문제도, 자신이 방문하고자 하는 예루살렘교회의 현안의 문제도, 유대주의자들에 대한 바울 복음의 해명도 해결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을 통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율법이 본래 하나님의 거룩한 법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원리로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죄의 세력이 너무 크고, 인간은 죄의 세력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에, 율법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원리도 성화의 기능도 감당할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인간을 더 절망 가운데로 몰고 간다는 점을 부각시켜, 더 이상 율법을 성화의 도구로 삼으려는 유혹을 받지 않도록 강조하여야 할 필요성을 갖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오직 성령만이 신자의 참된 삶의 원리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더욱이 7:7-25에서 성령은 완전히 결여되어 있고 오히려 죄와 율법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 사실상 여기서는 자유도 승리도 없다. 반면에 5장과 6장 8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을 통하여 자유와 승리가 가능하며 죄와 율법의 통제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바울이 로마서 7장을 통해 신자인 독자들의 현재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기보다, 신자들로 하여금 율법에 성화의 기능을 주고 있는 유대교나, 혹은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에 더 이상 미혹을 받지 않도록 하는 예방적 경고 차원에서 말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독자들의 상황을 묘사하는 6:15-7:6까지 2인칭 복수나 1인칭 복수를 사용하다가 7:7-25까지는 1인칭 단수를 사용하고, 그러다가 8:1 이하에서 다시 2인칭 복수나 1인칭 복수를 사용하는 주된 이유일 것이다. 갈라디아서 2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인칭의 변화는 단절의 의미를 갖고 있다.
질문 2: 현재시제로 나타나고 있는 7:14-25이, 과거시제로 되어있는 7:7-13이 ‘나’의 과거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과 날카롭게 대조가 되고 있다는 점과 대조하여, ‘나’의 현재 상태를 묘사해 주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는가? 즉 과거 시제로 되어 있는 7:7-13은 예수 믿기 이전의 과거 상태를 말하고 있지만, 현재 시제로 되어 있는 7:14-25은 신자의 현재 상태를 말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는가?
답변: 우리가 보기에 바울이 7:7-13에서 과거 시제를 사용한 것은 바울이 로마서 5장의 경우에서처럼 아담의 관점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며, 7:14 이하에서 현재시제를 사용하는 이유는 나에 대한 묘사가 현재적인 크리스천 믿음의 전망으로부터 본 회심 전 바울에 관한 현재적인 고백이기 때문이다. 사실 수사학적인 문단에서 시제의 변화는 문체상의 장치일 뿐 시간적인 의미는 무의미하다. 바울은 특별히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면서 현재 시제를 동원하여 죄의 심각성과 그와 대조하여 율법에 관한 유대인들의 낙관적인 견해를 무산시키고자 한다. 바울도 크리스천이 되기 전에는 그들과 동일하게 율법에 의한 자기 의를 추구해왔으나, 다메섹 사건을 통하여 죄의 심각성, 유대교의 율법을 통한 칭의와 성화의 불가능성과 함께 인간에 관한 새로운 자기이해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바울이 과거를 현재적 전망에서 서술하는 것은 이곳에서만 나타나는 특이한 것이 아니다. 이미 빌립보서 3:3-6에서 바울은 그 자신의 유대적인 과거와 관련하여 현재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시제가 반드시 현재적 경험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볼 필요는 없다.
질문 3: 갈라디아 1:13과 빌립보서 3:4-6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회심 전의 바울은 로마서 7:14-25에 나타나 있는 것과 같은 “나”의 갈등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7:14-25의 갈등은 마땅히 회심 된 바울의 갈등으로, 다시 말해서 중생 된 크리스천의 성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내면적인 갈등으로 간주하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답변: 이 문제에 관하여 우리는 로마서 7:14-25의 문맥을 갈라디아 1:13과 빌립보서 3:4-6의 문맥과 일치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왜냐하면 각각의 본문이 놓여있는 역사적 상황도 다르고 문맥도 다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갈라디아서와 빌립보서에 있는 구절은 단순히 회심 전 바울에 관한 객관적인 묘사만을 하고 있는 반면에, 로마서는 크리스천의 믿음의 눈을 통하여 본 크리스천 되기 전의 ‘나’에 관한 실존적인 통찰을 보여준다. 바울은 회심 전 바리새파 유대인으로 있을 때는 율법의 한계와 나의 절망적인 상황을 느끼지 못했지만, 다메섹 사건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체험하고 그 전망에서 율법과 율법을 의지하며 살았던 자기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조명해 보았던 것이다.
질문 4: 로마서 8:23과 갈라디아서 5:16-18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크리스천은 일찍이 루터가 말한 바와 같이, 의인인 동시에 또한 죄인이기 때문에(simul iustus et peccator), 구원 역사적이며 종말론적인 전망에서 볼 때, 크리스천은 “이미”(새 시대)와 “아직”(옛 시대)의 긴장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에, 7:14-25에 있는 “나”의 갈등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말하자면, 원리적으로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새로운 실존, 새로운 신분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육의 몸을 가지고 있는 이상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가 아닌가?
답변: 물론 이것은 사실이다. 신자는 한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새사람이 되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 아직 현 세상에서 옛사람의 실존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계속적으로 윤리적 명령을 통하여 크리스천으로 하여금 성령 안에서 실존적인 전환을 가져올 것을 촉구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크리스천의 긴장과 로마서 7장에 나타나 있는 “나”의 투쟁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전자는 성령과 육 사이의 싸움(갈라디아 5:17, 로마서 8장)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승리가 가능한 갈등인 반면에, 후자는 성령 없이 율법에 매인 “나”가 죄 아래 팔린 “나”에게 패배하는 싸움이다. 전자는 육에 대한 성령의 승리의 가능성과 심지어 확실성까지 분명히 제시되어있는 있는 반면에(그렇지 않다면 윤리적인 명령의 의미는 없을 것이다), 후자는 아무런 윤리적인 명령이나 승리의 보증 없이 율법에 매인 “나”에 대한 죄 아래 팔린 “나”의 승리로 끝난다. 전자의 경우 성령과 육이 날카로운 반위 관계에 서 있지만, 후자의 경우 성령과 관계없이 “나”와 “육”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14,18,25). 크리스천 삶에 대한 바울의 견해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옛 시대의 삶에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새 시대의 삶으로 전환하여, 마침내 죄를 짓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영원한 부활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7:14-25의 “나”는,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해방되어(롬 8:2) 성령의 지배 아래에 있는 성숙한 신자나 혹은 미성숙한 신자의 “나”로 보기는 어렵다.
질문 5: 7:22, 25에 언급되고 있는 하나님의 법을 기뻐하는 속사람(22, 25절)은 마땅히 크리스천이어야 하지 않는가(고린도후서 4:18 참조)? 말하자면 크리스천 이전의 사람은 로마서 7장의 “나”처럼 하나님의 법을 기뻐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답변: 우리는 로마서 7:23, 25의 마음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는 속사람을 고린도후서 4:18의 새사람과 일치시키지 않아야 한다. 바울은 인간을 속사람과 육으로 나눈다. 그렇지만 이 두 부분은 두 다른 전망으로부터 본 똑같은 사람 곧 죄의 노예로 팔린 “나”를 보여준다. 인간은 “육”인 동시에 “마음”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로마서 7장의 중심 주제가 율법 아래서 살려고 계속 노력하는 유대인들의 실존에 관한 일종의 크리스천적 해석이라는 잊지 않아야 한다. 이미 바울이 2:17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유대인들이 율법을 하나님의 법으로 알고 기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질문 6: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든지 자신의 실존을 들려다 보면 볼수록 로마서 7장의 “나”의 고백이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고백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답변: 물론 어떤 점에서 이러한 주장은 옳다고 말할 수 있다. 크리스천이라 할지라도 좌절할 수도 있고 넘어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가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면 로마서 7장의 “나”처럼 계속 좌절하고 절망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의 삶은 이상만의 삶이 아닌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성경 본문을 해석할 때는 성경 본문 자체가 우리의 실존적 고백보다 선행한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로마서 7장의 해석은 본문과 문맥이 우선권을 가지는 것이지 우리의 실존이 우선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질문 7: 7:25a의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한다”가 크리스천의 고백이라고 한다면, 그 뒤에 나오는 7:25b, 곧 7:14-24까지의 내용의 사실상 결론으로 볼 수 있는 “그런즉 나는 내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도 자연히 크리스천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는가?
답변: 우리가 7:25a의 감사가 크리스천의 감사 고백임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 감사가 7:14-24의 내용에 대한 감사로 볼 수 없다. 오히려 이 감사는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 8장의 자유를 바라보면서 하는 감사이다. 따라서 일종의 수사학적 삽입구로 볼 수 있는 7:25a를 근거로 하여 7:14-25의 전 내용을 크리스천의 고백으로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7:7-25의 결론은 7:25a가 아니라 여전히 “나”의 이중성을 말하는 7:25b로 보아야 한다.
VI. 나가는 말
우리는 로마서 7장의 주석을 통하여 논란이 되는 “나”의 정체성 문제를 살펴보았다. 우리의 주석은 7장의 중심주제가 율법의 무능력이 있으며, 바울은 로마의 크리스천들에게 크리스천의 합당한 삶을 도울 수 없는 율법의 무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문학적이고 수사학적인 장치로서 1인칭 단수 대명사 “나”를 사용하였다는 결론을 가져왔다.
그리고 바울이 “나”를 통해 좁게는 율법을 따라 살려고 하는 동족인 유대인/이스라엘을, 넓게는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한 아담/인류를 조명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조명은 다메섹 사건 이전이 아닌 이후인 크리스천 바울의 조명이라는 것과, 바울 역시 유대인/이스라엘 그리고 아담의 후예이기 때문에 이 조명에 연대되어 있다는 점도 확인하였다. 이것은 결국 7장의 “나”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육과 죄와 율법과 사망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어 그리스도와 성령의 세력으로 이전된 크리스천이 아니고. 오히려 여전히 육과 죄와 율법과 사망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을 기다리는 크리스천 이전의 사람임을 뜻한다.
만일 이와 같은 주석의 결론이 정당하다고 한다면 우리 크리스천의 참된 전형은, 죄와 율법과 사망의 세력 아래 좌절하고 있는 로마서 7장의 “나”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성령의 지배 아래 자유와 승리가 보장된 로마서 8장의 “너희”임을 알아야한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나약함과 불성실한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로마서 7장의 “나”에 호소하여 그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여서는 아니 된다. 로마서 7장이 아닌 로마서 8장이 신자가 지향하여야 할 참된 모델이라면, 로마서 7장에서 우리의 부족과 연약성에 대한 신학적인 변명을 찾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삶의 여정에 있어서 전폭적으로 그리스도와 성령께 의존하지 못한 삶을 회개하고 그리스도와 성령께 의존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우리에게 종말론적인 선물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변명을 찾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을 따라 참되고 거룩한 종말론적인 새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임을 명심하자. 로마서 7장의 율법의 세력이 이상이 아니고 현실인 것처럼, 이와 대조되는 8장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새 시대의 영인 성령은 이상이 아니고 현실임을 인정하자. 설사 현금의 여러 복음주의 학자들 가운데 로마서 7장의 “나”의 고백을 여전히 크리스천의 고백으로, 로마서 7장을 크리스천 성화의 장으로 보려는 자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로마서 7장의 본문과 전후 문맥의 흐름과 로마서의 목적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새롭게 바꿀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할 것이다. 개혁교회는 폐쇄된 신학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성경을 따라서 개혁해 가는 열린 신학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최갑종(전 백석대 총장, 현 미국 조지아 센트럴 대학교 신약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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