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과제 북리뷰
Ⅰ. 서 론
책의 제목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왜 태어났는가?”의 의미는 없다. 우리가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현세의 연극무대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원한 삶은 아니더라도 인생에서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지는 최소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나름의 주도권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필자가 언급한 데로 자유롭게 살고 유쾌하게 죽는다는 것은 주변의 허상을 인식하고 진실을 즉시하는 것, 지혜의 길만이 고통과 두려움 너머 자유로운 삶과 유쾌한 죽음으로 인도할 수 있다 하였다. 현세의 삶이 다섯벌의 옷을 갈아입는 하나의 연극무대이고 우린 이를 관조적 입장에서 동요됨이 없이 지켜보며 죽음을 마지막으로 연기하는 것이다.
Ⅱ. 자유롭게 살고 유쾌하게 죽기
우리는 주변의 허상을 인식하고 깨달음을 통해 진실을 즉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진실을 보는 것은 운명과 자유, 윤회와 해탈, 탄생과 죽음 등 모든 반대 쌍들로부터 생겨나는 가짜 공포와 속박을 풀어준다. 깨달음은 모든 반대 쌍들이 실제로는 반대가 아니라는 진실을 마주 보는 용기이다.
나는 위관장교시절 전북 부안의 해안중대장으로 낮과 밤이 없던 때가 있었다. 그 곳 변산 반도의 낙조가 자못 유명하였는데, 한 번은 이를 보고있던 나의 아내가 “지고 있는 낙조가 마치 일출같아 보인다.”라고 한 적이 있다. 그 순간 나는 솜방망이를 맞은 듯 하였고 일출과 낙조, 만남과 헤어짐 등 반대라고 결부짓는 것들이 반대가 아니라 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 보인다는 인식을 새삼 하게 되었다. 바로 의식의 순간적 인식이 아닌가 싶다.
또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지말고 깨어있으라(마태 25:13) 하였으나 여지없이 제자들은 곯아 떨어져 잠을 자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들이였으며 결국 깨어 있다는 것은 의식적으로 자신을 알고 행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일인다역의 연극은 배역이 많아질수록 더 거대하고 복잡해진다. 의식은 천억개가 넘는 모든 모습을 동시에 입고 일인다역의 연극을 펼친다. 이 때 세상과 모든 일을 만들어낸 주인공이 절대자가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라면, 몸의 입장이 아닌 의식이 시간과 공간을 창조한 목적으로 자유롭고 유쾌하게 우리 자신을 체험하고 알고 싶은 것이라면 단지 삶과 죽음이 두려움과 공포로만 애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우주를 창조했고 시공간이 마음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필자는 다음과 같이 애기한다. 우리는 아침에 잘 잤다고 인식하는 것은 누가 알려줘서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체험해서 아는 것이다. 이는 깊은 잠에서는 자아도 없는데 체험적으로 애기하는 것은 ‘의식’때문이며 이는 시공간이 사라져도 불변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통해 우리(의식)안에 시공간이 있다는 말과 우리가 세계의 창조자라는 말은 증명되었다고 한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지금도 그 때의 일이 생생하다.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가던 중 갑자기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낯설게 느껴지며 여러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지어 지나가고 움직이는 모습, 빼곡이 서있는 건물들과 익숙한 상점들이 새롭게 보이는 한 편, 내가 살고있는 이 곳이 어디이고 내가 왜 이 곳에 있는가라는 의식을 자각하였다. 당시에는 자아와 의식의 성장에 따른 관념적 생각으로 치부하였으나 어쩌면 연극을 위한 시공간의 허상적 인식을 한 것이 아닐까.
의식은 아는 능력이다. 의식은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 중 하나로 두뇌를 사용하며 이를 창조한다.
필자는‘의식을 창조하는 두뇌’조차 창조할 수 있는 DNA의 놀라운 능력은 어디서 온 것인지 화두를 던진다. 현대과학의 물질적 환원주의가 생명체 출현 원인에 대한 의문을 풀 수 있을까? 미신을 버린 건전한 상식 혹은 과학적 교양을 갖춘 지성은 현대적 우상숭배로 삶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를 조장하는 것이 아닐까?
황금률이란(golden rule, 黃金律) 그리스도교 윤리의 근본 원리로 그리스도교의 윤리관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말이다. 신약성서 마태복음 7장 12절에 나오는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와 루가복음 6장 31절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에게 대접하라"의 예수의 가르침을 말한다. 이는 황금처럼 고귀한 윤리의 지침으로 율법과 선지자, 성서의 내용과 예수가 가르친 윤리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신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마태복음처럼 법령 제정의 기준과 최고가치를 알 수 있었던 것은 신이 계시하는 범, 즉 자연법(자연계의 만물을 지배하는 필연적 법칙,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법체계)이 모든 시간과 장소를 채우고 있고 우리 모두에게 탑재된 기본 사양이라는 것이다. 황금률은 자연법에서 나온다. 이는 자아와 다른 자아’는 한 몸이라는 진리에서 자발적으로 도출되는 자연법의 제일 법칙이다. 황금률은 윤리적이고 선한행동의 유일한 원천이자 생명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세상과 만물에 대한 사랑과 공동선을 지향하는 행동은 우리가 겉모습과 상관없이 하나로 같은 몸이라는 진실로부터 저절로 나오는 것이다.
인도의 윤회사상은 이전의 모든 생에서 쌓은 카르마를 짊어진 영혼이 육체로 하여금 죽고 태어남을 반복하며 이 후 모든 죄를 정화하고 구원받아 고통스러운 윤회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누린 다는 것이다. 전통적 종교들로 살펴보면 그들의 모습이 제각각이며 필자는 이 윤회사상은 없다고 한다. 심지어 실제로 윤회하는 개별적 영혼은 없다고까지 한다. 무수한 개별적 영혼이 윤회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은 실제로는 하나인 의식이 천억 개의 등장인물을 동시에 연기하는 연극 공연이다. 대학시절 주성치 주연의 ‘서유기 월광보합, 선리기연’이라는 영화를 두고 감상문을 쓴 적이 있었다.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히 홍콩 유명배우의 웃긴영화로 치부하기 이전에 내가 아는 의식의 혼돈을 야기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원광보합이라는 타임머신을 통해 전생을 수시로 넘나
들며 운명을 좌지우지하며 좌충우돌하는 애기를 늘어놓는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전생체험이라 하여 이따금식 과거를 소환해내는 데 문제는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우리는 윤회가 있고 전생이 있다는 가정하) 그렇다면 현세의 우리도 윤회사상에 비추어 볼 때 미래의 전생일 것인데 결국 지금의 삶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나라는 존재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하는 점이다. 나아가 나라는 존재가 없다면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힘들게 살 것인가, 세속적 쾌락을 일삼는 것이 무엇이 문제될까하는 점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중 손오공은 그의 전생인 지존보를 지켜보며 과거의 약속을 지키며 이별하는 모습이 있는 데 이는 시공간을 초월한 연극무대의 역할을 관조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고등학교 2학년때의 일이다. 마음이 통하는 친구들 다섯이 모여 우린 그룹을 만들었다. 이 때 나는 이 모임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고 이 모임의 이름을 정하였다. 이육사 시인의‘청포도’를 모티브로 하여 청포를 입은 귀한 손님은 말을 타고 온다는 의미에서‘시발로마(始浡路馬)’라고 명명하며 제법 호기롭게 행동하였다. 그 중 하늘 호(昊)를 쓰는 친구가 이 세상과 작별하는 일이 있었다. 한 여름 밤에 공부를 하다 아파트 베란다에 나가 머리를 식힐 즈음, 밤하늘의 별을 보고 있었는데 이내 한줄기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처음 보는 광경이라 너무 신기하여 이 애기를 어머니께 하였더니 어머니 말씀하시길 너의 주변사람 중에 누군가 변고가 있을 것 같다 하셨다. 그 후 2시간 되었을까. 친구로부터 하늘 호(昊)를 쓰는 친구가 죽었다는 비명을 들었다. 그 친구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서 의문을 가졌던 것이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의 별이 떨어진다고 하기도 하고, 또한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상반된 의미로 부합되지 않는다 여겼다. 그러다 문득 스쳤던 것이 바로 윤회였던 것이다. 윤회야 말로 죽음과 삶의 회귀를 하늘 위에 별로써 증명한 것이 아닐까.
그 때의 상념들을 가지고 고스란히 종이에 다음과 같이 옮기게 되었다.
윤회의 그림자
김 홍 철
내 엄지와 검지를 스쳐 떨어지는 저 별이
그대의 것인 줄 모르리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별이 있고
그대 별 또한 있으련만
누구의 것인지 볼 수 있는 눈이 없어
별만 보는 버릇만 남겨두니
레아의 젖길타고 내려온 다시 태어난
전생을 잊어버린 그대 별이여
어딘가에 너의 모습으로 살고 있을 사람아
아쉬운 별 하나
밤하늘에 걸려 있으리
Ⅲ. 결 론
우리는 자칫 세상의 세파와 허영과 이기로 하여금 볼 수 있는 눈과 귀를 잃고서 바르게 산다고 착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삶에 대한 진실을 알고자 하는 갈구와 염원은 온데간데 없이 여러종교와 무수히 나도는 정보로 하여금 이것이 사실인지 알지도 모른체 받아들인다. 아니 그러한 생사문제의 해결과정이 어렵기에 그것을 온전히 믿고 싶을 뿐이다. 결국 남는 것은 현세의 집착과 번뇌, 고통속에서 사소한 쾌락만을 일삼으며 무대 위에서 조명 OFF하는 것이다.
필자는 우리에게 필요한 보물은 튼튼한 금고 안에 안전하게 있다고 한다. 진실로 몸과 마음을 다하여 궁극의 진리를 찾아 얻고자 한다면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친하게 지내고 맡은 역할과 책임을 다하며 생업에 종사하라고 권한다. 혹 추상적이고 염세적으로 갈 수 있는 결론이 되지 않을까하였지만 참 다행스러운 귀결이다.
나는 참으로 오랜시간이 지나서야 이 책을 통해 자아와 의식세계의 고찰을 하게 되었다. 물론 마흔이 되지 않는 인생살이 동안 이따금씩 연극배우로서의 나를 관조하는 입장에 있었던 적이 있었으나 찰나적 스치움이 다였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생각 외의 내용을 풀어낸 필자의 강의를 통해 나의 삶을 생각하고 관조한다. 물론 많은 궁금증과 의문이 증폭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를 찾고 자각하는 동시에 현실에 충실해야 함을 느끼며 조금은 자유롭고 유쾌하게 살기 위한 의식을 자각한 것만이라도 나에게 큰 의미로 다가온다. 필자는 마치 어린왕자가 원하는 양이 담긴 상자를 주었듯이, 이제는 그 상자 속에 내가 원하는 양을 찾는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