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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수정(三樹亭)에서.... 10 : 13 : 54
삼수정(三樹亭)의 현판은 상주목사를 지낸 정현(鄭玹) 의 글씨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싱거러운 강변을 걷는다 ..... 08 : 32 : 25
요즘 장마로 濁流가 가득하게 흐른다...
언제나 반가운 나부산의 모습....
이정표를 보니 비룡교~삼수정 왕복은 7km....
테크길 전망대에서 바라 본 너른 강물과 아름다운 봉우리들...
바위를 덮은 칡덩굴이 아름다운 庭園이다....
촉촉하게 얼굴에 닿는 맑은 공기는 여유있고 안락했다...
나리꽃이 붉게 피는 계절은 가장 더울 때인데 오늘은 복받았다...
우망리 정자에 올라 정성이 가득한 따뜻한 옥수수를 나누며.... 09 : 27 : 41
대동산에 묻힌 관세암과 산천이 옛 풍경을 회상하케 한다...
길게 뻗은 청곡제를 걸으며 주변을 감상한다...
논에는 벼가 빼곡히 자라고 논둑에는 콩이 논을 보호한다...
白鷺는 강물이 불어서 강가에 못가니 밭에서 놀고 있다...
청곡제(淸谷堤) 81.6.30
←탐방로 800m 이정표 →삼수정 40m
三樹亭을 오르며....
완담칠현(浣潭七賢) 사적비(事跡碑) ...
(碑正面) 자고(自古)로 嶺南을 추로(鄒魯 : 맹자의 고향)에 比하거니와 東萊鄭氏가 세보거족(世輔巨族: 재상을 낸 씨족)으로 현조명현(顯祖名賢:이름 높고 어진 조상)이 배출됨은 원달근심(源達根深) 에서 유래한다. 安逸戶長公 諱 文道의 津己恭謹과 左僕財公諱穆의 화양직성(和諒直誠)과 贊善公諱澤의 文章才幹이 뿌리되고 六傳하여 藝文應敎公諱承源이 麗季의 亂政을 避하여 安東에 조적(肇籍)하고 九潭에 머무니 落南祖로 큰 줄기요. 그 孫子인 諱龜齡이 結城縣監에서 물러나 浦內로 移居하니 中興祖요 五子를 두어 후예(後裔:후손)가 繁昌하니 그 無窮한 여음(餘蔭:조상의 은덕)이 六百年을 영수(永垂:오래 이어오다)하도다. 이에 鄕社의 유서(由緖:전해 내려온 내력)를 살피니 宣祖戊辰에 結城公의 五代孫인 林塘公諱유길(惟吉)이 士林과 더불어 結城公구기(舊基:옛집터)에 三里社를 세워 結城公과 長子인 수찬공(修撰公)과 次子인 直提學公을 奉享하여 講學하다가 壬亂에 불타서 宣祖丙午에 묘하(墓下:조상 산소가 있는 당)로 齋室을 移建하고 肅宗戊午에 사우(祠宇:사당)를 갖추어 曾孫인 홍문응교공 (弘文應敎公)과 문익공(文翼公)을 필향(疋享)하면서 浣潭鄕社라하고 英祖甲申에 七代孫인 매오공(梅塢公)과 石門公을 追享하니 四世七賢이오 묘호(廟號)는 상덕(尙德: 덕을 받들어 귀하게 여김)이라 후언(後彦: 후대 선비)이 精誠으로 숭모(崇慕: 우러러 사모함)하더니 高宗戊辰에 國令으로 훼철(毁撤)하여 허역(墟域)이 민멸(泯滅: 흔적이 없어짐)되어가니 後孫인 浣潭鄕宗約耿 여러 斯文이 浣潭誌를 산재(上榟)하고 또 鄕社事蹟을 각민(刻珉)하려고 여(余:자신)에게 請銘하므로 국승(國乘: 國史)과 상갈(狀碣)에 依하여 敍述한다.
贈吏曹判書鄭公의 諱는 龜齡(귀령)이오 仁德과 學行의 卓越함이 朝廷에 聞達되어 世宗甲辰九月에 結城縣監이 되고 乙巳六月에 해수(解綬)하여 龍宮別曲村에 짐거(卜居)하니 短期在任이나 善政을 廣施하여 縣民이 현수(峴首:고개머리)에 입비찬양(立碑讚揚)해서 後世에 國初의 良吏로 稱道되었다. 집 앞에 손수 괴목(槐木: 회화나무)三株를 심고 곁에 八柱詩樓를 지어 三樹亭이라 하고 소요음영(逍遙吟詠)하면서 자적(自適:속박 없이 즐김)한 용래(甭來:장래 쓰지 않음)로 德業文章과 忠節經綸이 대불핍절(代不乏絶)하니 公의 축덕적경(蓄德積慶)과 후망인성(厚望仁聲)을 士林이 흠모(欽慕:기쁜 마음으로 사모함) 하여 里社를 세워 主壁으로 모시고 百世토록 相頌한다. 손증(孫曾:일찍이 손자)의 귀;(貴:신분이 높아)로 成宗朝에 吏曹參判과 中宗朝에 吏曹判書가 贈職되고 麗末에 나서 八十餘歲를 향수(享壽:오래 사는 복을 누림)하니 墓는 浣潭의 卯坐이다.
修擇鄭公의 諱는 雍(옹)이오 初諱는 熙이니 贈吏曹判書公의 長子이다. 太宗甲午의 生員試와 四年後인 式年文科에 及第한 後로 누천(累遷: 여러 번 옮김)하여 홍문간수찬(弘文館修撰)에 이르렀다. 知禮縣監으로 在任中이던 世宗丙午에 鄕校를 重修하고 기문(記文:기록한 문서)을 자찬(自撰:직접 편찬)하며 학규(學規:학과의 규칙)를 세우고 경사(經史:經書와 史記)를 講論하여 儒學을 천명(闡明:사실이나 입장을 드러내서 밝힘)하니 문교(文敎:문화에 대한 교육)가 大典하여 읍속(邑俗:읍의 풍속)이 仁化했고 學德과 행의(行誼:옳게 가다)가 독실(篤實)하여 浣潭社에 배향(配享:신주를 모심)한다고 知禮와 龍宮의 邑誌 및 浣潭院誌에 밝혔으며 知禮校誌에는 公이 鄕校를 創建하다 했고 立朝事蹟은 世宗實錄에 두렷하니 차(此)로써 公의 미지(美趾)를 可察이오 生年은 不傳이나 조졸(早卒:요절)로 大顯할 수 없었음이 통석(痛惜:아프고 가엾다)하고 墓는 先塋국내(局內:묘지구역 안)인 浣潭의 良坐原에 있다.
(碑左側面) 成鄭公의 諱는 賜(사)요 贈吏判公의 第三子로 定宗庚辰生이다. 世宗庚子의 生員試와 式年文科乙科에 及第하여 集賢殿 吏曹 刑曹의 郞官과 弘文館수찬(修撰:서책을 편집하여 펴냄)과 司憲府監察과 司諫院正言과 議政府의 검상(檢詳)과 사인(舍人)과 司憲府執義를 歷任하고 賢殿直提學으로 폐차(陛次:이어서 섬돌 곁에 시립)하고 晋州牧使 在任中에 母親喪을 當하여 讀禮하고 端宗癸酉에 卒하니 春秋가 五十四요 成兵曹判書兼純忠輔祚功臣 萊山君과 中宗丙子에 議政府左贊成萊山府院君에 贈封되니 이는 금윤(今胤)인 東萊君과 賢公의 貴로 因한 追恩이오 入朝事蹟은 國朝寶鑑에 昭詳하다. 熊川의 東軒題詠이 남았고 東萊府誌에 公이 有抗志節 龍宮邑誌와 浣潭事蹟에는 德行이 탁이(卓異)하며 文學이 高明하여 本社에 配享한다고 했으며 墓는 知保山 子坐 原이다.
公의 諱는 渙(환)이며 字는 자어(子淤)이니 司直公諱復周의 次子요 修撰公의 孫子로 世祖乙亥生이다. 成宗庚子의 司馬試와 年文科에 及第하여 成均학유(學諭)로 初輔되고 학정(學正:성균관 정팔품벼슬)과 博士를 거쳐 燕山乙卯의 司憲府감찰(監察:정육품벼슬)일 때 千秋使의 書狀官으로 왔고 丙辰에 開寧縣監과 무오에 校書館별좌(別坐:정오품벼슬)와 庚申에 獻納과 辛酉에 弘文館校理와 司憲府지평(持平)과 壬戌에 刑曹正郞(碑後面)과 癸亥에 慶尙道都事 이다가 甲子에 司憲장령(掌令:정사품 벼슬)과 弘文館應敎로 內職에드니 無慘한 士禍로 忠良한 朝班이 우해(遇害)할 새 부월(斧鉞:도끼로 베다)을 무릎 쓰고 殿前에서 直諫하다가 尙州로 귀양가서 화장불측(禍將不測:장차 화를 예측할 수 없다)이러니 丙寅 八月二十四日에 이환별세(罹患別世:근심으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남)하니 享年이 五十二요 七日 後에 中宗이 反正하여 문부(聞訃:부고를 들음) 못하고 弘文館校理(정오품벼슬)로 명소(命召:궁으로 불러들임)하시니 통재(慟哉: 서럽게 울다)라 그 해 겨울 마산의 良坐原에 安葬하다.
領議政 鄭公의 諱는 光弼(광필)이오 字는 사훈(士勛)이며 守夫는 自號이고 謚號는 문익(文翼)이니 東萊君諱蘭宗의 次子로 別谷村舍에서 世祖壬午에 나서 三十一歲에 進士와 文科에 及第하여 立朝하니 신후군자(愼厚君子)로 국량(局量)이 넓으며 無聲을 듣고 無形을 본다고 추중(推重: 높이 받들어 귀하게 여김)하더니 國論에는 의연(毅然)하여 一言으로 決斷함이 春風에 解氷이요 생활은 한사(寒士: 가난한 선비)인 듯 儉素하니 朝野가 시귀(蓍龜)로 士林이 산두(山斗:태산북두의 준말)로 경앙(敬仰:공경하여 우러러 봄)해서 國家安危를 一身으로 지탱(支撑)하기 四十年이니 社稷之臣은 公을 이름이라 燕山의 혼학(昏虐)을 忠諫하다가 甲子士禍(윤씨 폐위및사약, 복위문제)에 流配되어 重刑이 내릴 무렵 中宗改玉으로 復權되어 中宗庚午에 三浦倭亂을 위무(慰撫)하고 癸酉에 大拜하니 五十二歲요 丙子에 領相이고 己卯士禍(조광조 등 신진세력 몰아냄)에 만사를 무릅쓰고 求解하다가 파직(罷職)되니 己卯名賢이 으뜸이요 丁亥에 다시 領相이되어 辛卯에 궤장(几杖:임금이 70세이상 대신에게 내린 安席과 지팡이)이 내렸고 甲午 以後로 奸臣의 무함(誣陷:거짓으로 꾸며 모함에 빠짐)에 苦楚를 겪다가 그들이 敗하자 丁酉에 풀려나 領中樞로 戊戌 十二月六日 에 七十七歲로 역책(易簀: 대자리를 바꾸다)하여 墓는 京畿道 華城郡 半月面 連達里의 巳向原에 있으며 종묘(宗廟)의 中宗廟庭과 崇賢祠와 本社에 配享된 忠君憂國의 表象이다.
參奉鄭公의 諱는 榮後(영후)요 字는 仁輔요 호가 매오(梅塢)이니 應敎公의 玄孫(孫子의 孫子)으로 宣祖 己巳生이다. 자품(資稟)이 순독(純篤)하여 行義가 出天했고 鶴峰門人으로서 養眞하고 隱約하며 信古하고 好學하여 宣祖朝에 司宰監參奉에 일천(逸薦)되었으나 불취(不就) 했고 至性으로 사친(事親:어버이는 섬김) 奉先해서 壬亂 中에도 왜추(倭酋:왜구 우두머리)를 感動시켰으며 外堂(사랑)의 서쪽 竹林과 매수(梅藪:매화 덤불)間에 一室을 짓고 兄弟 함께 즐기니 뒷날 石門公이 堂號를 孝友로 扁額했다, 性理書에 심잠(沈潛)하되 禮學을 傳心하여 가묘(家廟:한 집안의 사당)의 制度와 冠婚喪祭에 모두 朱子家禮를 따랐으며 臨終에 自銘한바 辭意가 精切하고 聲韻이 불착(不錯)하니 그 浩然함이 歷歷하다. 配位(부부가 다 죽었을 때인 그 아내에 대한 경칭)인 韓氏와 미계(未笄)女第가 龍蛇에 殉節하여 정려(旌閭:충신,효자,열녀 등을 그 동네에 旌門을 세워 표창)됨도 공의 의미(懿美)한 德行을 따름이로다. 仁祖辛己九月十六日에 七十三歲로 卒하니 묘는 魚化山의 巳向原이다.
進士鄭公의 諱는 榮邦(영방)이오 字는 慶輔이며 石門은 自號요 梅塢公의 아우로 宣祖丁丑生이다. 愚伏門人으로서 人嚴爲本하고 孝友를 두터이 하면서 그 內外의 輕重을 헤아려 實踐했다. 宣祖乙巳에 進士가 되었으나 혼조(昏朝)에 거업(擧業:과거에 응시 하던 일)의 뜻을 끊고 은복(隱伏: 몸을 엎드려 숨음)하다(碑右側面)가 丙亂 後로 蓮塘의 泉石(수석)을 벗하여 自然 속에 沒入하면서 後進을 기르니 世人이 地上仙이라 일렀으며 그 庭苑은 지금 國家指定民俗資料 第 一百八號다. 기우강개(氣宇慷慨:기개와 도량이 의롭지 못한 것에 의기가 복받침)하며 文章이 優雅하고 사조(詞藻)가 대건(碓健)하며 더욱 詩에 能해서 당체(唐體)의 으뜸이 되니 平素의 著述이 많았는데 산일(散逸:흩어져서 일부가 빠짐)로 岩樓漫錄과 石門集만 남았으며 後人이 學德과 節行을 崇仰하여 鄕社에 모셨다. 孝宗庚寅 七月七日에 七十四歲로 考終하니 墓는 安東 松川의 先塋下乾坐이다. 이와 같이 七賢의 事蹟을 略述하고 銘을 바치노니
東國鄭氏 비롯됨은 六村사성(賜姓:임금이 공신에게 성을 내려 줌) 말미암고 벋어 내린 來歷이야 二千年이 한결 같다. 華池潭水의 깊은 흐름 結城公의 육경(毓慶)일세 三槐樹를 심은 뜻이 옛사람과 달랐어도 가려잡은 이 터전에 방음(芳蔭)이야 滿庭하다. 아름다운 四世七賢 동려(同閭: 같은 문)에서 挺出하사 이 겨레의 거울 되어 가슴마다 느끼노니 익영(翼然)하던 鄕社 자취가 뭇 없이 사라져도 유분여운(遺芬餘韻) 거룩하여 百世流傳 가이 없다.
光復後 壬申小春節 成 均 館 長 金敬洙 謹撰(근찬) 安東後人 김계漢 謹書
東萊 鄭氏 浣潭 鄕宗約 聘中(빙중) 謹堅(근견)
완담 서원에 배향 하신 칠현의 사적비 해설
완담칠현(浣潭七賢) 사적비(事跡碑)로, 삼수공의 옛 집터와 집터 뒤에 완담서원이 설립된 곳으로 완담서원에 제향된 칠현(七賢)의 사적비이며, 칠현(七賢)은 판서공 정귀령(鄭龜齡)과 아들 修撰公 옹(雍)과 直提學 사(賜), 손자 應敎公 환(渙)과 문익공 광필(光弼), 칠대손 매오공 영후(榮後)와 석문공 영방(榮邦)으로 일곱 분의 사적을 기록한 碑입니다. 즉 四世七絃이다. 일곱 분의 후손들이 대부분의 소파로 나뉘어져 후대에 내려오고 있다.
완담지(浣潭誌) 삼수편(三樹篇)과 용궁현지 유현록(儒賢錄) 등에서 삼수 정귀령에 대해서 살펴 볼 수가 있는데, 승훈랑 관직에 있던 삼수 정귀령이 세종 6년(1424) 9월에 결성현감(結城縣監:충남 홍성군)에 부임되었다가 이듬해 6월에 사임하였는데, 그는 비록 짧은 근무 기간이었지만 고을을 잘 다스린 공덕으로 송덕비(頌德碑)가 건립되기도 하였습니다. 동래정씨의 가록(家錄)인 택지록(宅址錄)에는, "삼수"가 벼슬을 그만두고 용궁고을 남쪽 포구안 별곡마을에 터를 잡게 되니 지금의 예천군 풍양면 청곡리 라는 기록이 있어, 이는 아마도 관직을 떠나 조부를 따라서 안동 구담(九潭)으로 낙향하였다가 별곡에 터를 정하여 삶으로써, “동래정씨 별곡마을 입향조가 된 것이다“ 라고 기록합니다. 삼수는 옛 집터의 동남쪽에 세 그루의 회화나무(槐)를 심고 거기에 정자를 세워 삼수정(三樹亭)이라 이름하고 자호(自號)로 삼았는데, 회화나무를 집주변에 심은 역사는 멀리 상고시대 주(周)나라 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주나라가 조정에 세 그루 회화나무를 심어 삼공(三公)의 자리를 정하였다고 하며, 후대로 내려오면서 세 그루 회화나무는 삼공벼슬을 상징하는 의미로 전하여 내려와, 자손들이 삼공에 들기를 바라는 염원으로 심어진 경우가 많았습니다. 삼수가 그러한 염원으로 세 그루 회화나무를 심었던 것인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으나, 삼수의 12세손 정재원(鄭在源)씨가 증언하는 가전(家傳)에 의하면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삼수정이 무너지고 세 그루의 회화나무도 시들어 죽었는데 삼수정이 중건되고 난 후에, 세 그루 중 한그루에서 움이 돋아나와 성장한 것이 현재에 남아있는 고목(古木)의 회화나무라고 합니다. 뜻을 두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삼수의 자손으로 정씨문중에서 말하는 소위 '사세 칠현(四世七賢)'이 배출 되었습니다. 1424년 결성현감을 지낸 삼수(三樹) 정귀령(鄭龜齡)이 1425년에 관직을 사임하고 이곳 별실촌에 입향하여 완담칠현 사적비가 있는 곳에 사저를 신축하고 후원에 정자를 지어 삼수정이라 명명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다 1635년 병자호란 뒤인 1636년에 폐하였다가 1829년 경상감사(慶尙監司)로 부임한 정기선(鄭基善)에 의해 중건되었고, 그 후 세 차례 이건하였으나 1909년에 구기(舊基)에 다시 돌아와 중건되었습니다. 정자의 뜰에는 3그루의 회화나무를 심어 자손의 번영을 도모했던 곳으로 그 뒤 정자가 허물어지니 3그루의 회나무도 고사하였다고 하며, 정자를 복원하니 한그루 회나무 뿌리에서 움이 돋아 지금까지 살아났으니 충남 홍성군 결성면 옛 결성현 관아에 있는 신목과 연륜이 같다고 하며, 지금은 회화나무 3그루 중 1그루만 회생하여 살아남아 있습니다.
삼수정(三樹亭)의 현판으로 상주목사를 지낸 정현(鄭玹) 의 글씨이며, 정자의 마루 위에는 정귀령(鄭龜齡)의 후손으로,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정원용(鄭元容: 1783∼1873)의 삼수정기(三樹亭記) 편액(扁額)을 비롯하여, 1420년대 삼수(三樹) 정귀령(鄭龜齡)의 삼수정운(三樹亭韻) 편액(扁額)과, 삼수정상량문(三樹亭上樑文) 편액(扁額)이 있으며 결성선조삼수정이십운(結城先祖三樹亭二十韻) 편액(扁額)도 보이며, 곁에는 근차(謹次) 결성선조삼수정이십운(結城先祖三樹亭二十韻) 편액(扁額)도 함께 자리하고 있습니다. 삼수정(三樹亭)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6칸규모의 홑처마에 팔작지붕의 구조로,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소실되었다가 후에 몇 차례 중건을 거듭하였는데, 1829년에는 경상감사 정기선(鄭基善)이 중건하였고 그 후 몇 차례 이건(移建) 하였습니다. 현재의 건물은 1909년경 옛터에 다시 세운 것으로 삼수정이 오늘날까지 전함은 오직 자손들이 조상의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 결과입니다. 마루 가운데에 방이 있었고 사방에 문을 달아놓은 구조로, 영남지방에서는 보기 힘든 형태로 호남지역에서는 더러 보이는 평면구조입니다. 삼수정의 특이한 점은 마루에서 보이는 모습으로, 왼쪽의 바깥쪽의 기둥 3개는 유일하게 마루 위까지 돌기둥이 올라와 있으며 높이도 서로 조금씩 다릅니다. 6칸의 삼수정은 모두가 마루이고 방은 마루의 중앙에 위치해 한 칸으로 단출하며, 정자의 주인 삼수(三樹) 정귀령(鄭龜齡)은 고려 말에 태어나서 정6품 승훈랑(承訓郞)으로서, 모란은 부귀(富貴)를, 석류는 다산(多産)을, 소나무는 절개(節槪)를, 회화나무는 학자나 정승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삼수(三樹)의 세그루 회화나무는 일순간의 이익보다 먼 미래를 내다보는 성실과 정직과 진실의 가치관 정신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삼수(三樹) 정귀령(鄭龜齡)이 80세 생신 때 이 정자에서 잔치를 베풀며 자손들이 한자리에 모여, 관복을 벗어 이곳의 세 그루의 회화나무에 걸어 놓으니 울긋불긋 오색 꽃이 핀듯하여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냈다고 한다.
그 후 200년을 무성하게 자라더니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이후 차츰 잎이 시들고 고사 하였는데, 그중 한그루가 곁가지를 소생(蘇生)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기이한 것은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소나무 세 그루가 자생(自生)하여 수백 년의 연륜과 푸르름을 자랑하며 고고(孤孤)하게 서있습니다. 삼수(三樹)는 사후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고, 지보면 마산리 완담향사(浣潭鄕社)에 모셨습니다.
조선 왕조 500여 년 동안 최고위직인 정승(政丞)을 배출한 가문은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단 한 사람의 정승이라도 배출되었다면 가문의 영광이라고 할 수 있다. 자료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정승을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은 전주 이씨 22명, 안동 김씨 19명, 동래 정씨가 17명이라고 한다.그러나 1위는 왕족이었고, 2위는 왕의 외척이라는 후광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평가가 절하되고 있다. 반면에 동래 정씨는 다르다. 즉 실력을 바탕으로 정상에 오른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또한 동래 정씨는 시조가 왕이거나 개국공신이던 지체 높은 분이 아니라 안일호장(安逸戶長)으로 오늘날 군수 정도에 불과한 한미한 가문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고려조에 이미 기반을 쌓아 족세(族勢)를 넓히기는 했으나, 조선조에 와서 정승 17명과 대제학, 판서, 많은 대과 급제자를 배출함으로써 명문으로 자리를 굳혔다. 이러한 동래 정문의 번영은 외람된 말이 될지 모르지만 나무를 사랑하는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과 그 기반이 득성지인 부산 동래가 아니라 예천 풍양면의 한적한 마을 청곡리라는 점이 또한 특이하다. 가문이 일어나는 데 초석을 놓은 정귀령은 조선 초기 결성(충남 홍성군 광천읍 일대에 있었던 고을) 현감을 지낸 분으로 짧은 관료 생활을 했지만 주민들이 송덕비를 세울 정도로 선정을 펼쳤다고 한다. 낙향한 그는 안동 구담에서 이곳 풍양면 청곡리로 거처를 옮기면서 장차 자손이 번창할 것을 염원하며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었다. 그곳에 삼수정(三樹亭`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486호)을 짓고, 아호(雅號)도 삼수정으로 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모란은 부귀(富貴), 석류는 다산(多産), 소나무와 대나나무는 절개(節槪)를 상징하는 나무인 데 비해 회화나무는 학자나 벼슬을 상징하는 나무다. 이러한 삼수정의 다음 세대를 위한 염원이 헛되지 않아 큰아들 정옹(鄭雍)이 1417년(태종 17) 대과에 합격하여 지례현감으로 향교를 재건하여 학문진흥에 힘썼고 이후 수찬(修撰)을 지냈으며, 셋째 아들 정사(鄭賜) 역시 1420년(세종 2) 문과에 합격하여 사헌부 집의, 직제학, 진주목사 등을 역임하면서 선정을 펼쳤다. 삼수정이 80회 생신을 맞아 잔치를 여니 참석한 후손들이 벗어 회화나무에 걸어 놓은 관복(官服)이 울긋불긋 오색 꽃이 핀 듯하여 보는 이들이 감탄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후손 중 처음으로 판서(判書)에 오른 분은 정사의 아들 허백당 정난종(鄭蘭宗`1433~1489)이다. 1456년(세조 2)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를 시작으로 여러 벼슬을 거쳐 1467년(세조 13) 황해도 관찰사로 이시애의 난 평정에 공을 세우고 그 후 이조, 공조, 호조판서를 역임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아직 상신(相臣)을 배출하지 못했다. 최초로 정승에 오른 분은 허백당의 아들 수부(守夫) 정광필(鄭光弼`1462~1538)이다. 그는 삼수정의 증손자로 1492년(성종 23) 문과에 급제하고 1504년(연산군 10) 이조참의로 있으면서 임금 연산의 사냥이 너무 잦다고 간하다가 충남 아산으로 유배되기도 했다. 중종반정 후 부제학, 그 뒤 예조판서, 대제학을 거쳐 1513년(중종 8) 우의정, 좌의정에 오르고, 1516년(중종 11) 마침내 일인지하 만인지상(萬人之上)이라는 영의정에 올랐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와 그를 지지하는 신진개혁세력들이 많이 희생될 때에 그들을 두둔하다가 중종의 노여움을 사서 좌천되기도 했으나 후에 다시 영의정에 복귀했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분이다. 그 후 12명의 정승이 배출되어 동래 정씨가 배출한 17명의 정승 중 절대다수를 차지했다. 청곡리는 생각보다 깊은 오지였다. 알고 있던 대로 세 그루 중 두 그루는 죽고 한 그루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서 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삼수정이 불타면서 나무도 죽었는데 1829년(순조 29) 경상도 관찰사 정기선이 중건하고 난 후 한 그루에서만 움이 돋아 자란 것이다. 삼수정 주변에 잘생긴 소나무 세 그루가 있어 특이했다. 자세한 내용을 사전에 몰랐다면 삼수(三樹)라는 말이 회화나무를 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소나무를 두고 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삼수정이 가문의 번영을 염원하며 세 그루 심었는데 한 그루만 남은 점이다. 여러모로 볼 때 회화나무는 동래 정문의 상징목이라고 할 수 있다. 두 그루를 더 심어 이후에도 千年萬年 繁盛하여 東萊 鄭門은 물론 나라에 기둥이 될 人才를 많이 배출했으면 한다.
[인터넷에서 편집한 글]
※ 별실을 지나면 우망리인데 별실과 우망리는 작은 고개를 사이에 두고 200여 호가 사는데 거의 대부분이 동래정씨이다. 憂忘里는 근심憂자에 잊을忘자라 하여 근심 없이 살 수 있는 편안한 마을을 뜻한다
보호수 품 격 : 군 나무 고유번호 : 11-27-19
지정일자 : 1972. 8. 9 수종 및 수령 : 회화나무. 300년
소재지 : 예천군 풍양면 청곡리 821번지
와룡산(알운봉)의 정기를 타고 별실과 건너편 우망리 사이를 白鷺가 수를 놓고 있다...
낙동강과 대동산을 곁에 두고 일찍이 후손의 장래를 위하여 회화나무를 심었다...
삼수정의 유래를 이해하고, 삶을 개척해 간 동래정씨 문중의 노력에 감동한다...
보호수
지정번호 : 1-27-12-22 지정일자 : 1972. 8. 9
수종 및 수령 : 소나무. 250년 소재지 : 예천군 풍양면 청곡리 820번지
돌아오는 청곡재에서 바라 본 대동산의 우뚝함이 돋보인다...
백일홍 사이로 들어난 우망리 마을...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영남의 젖줄로서 평화로워 보인다...
쌍절암 전망대가 길손을 반긴다...
통로 모둥이에 보라꽃이 피어 마음이 가벼워진다...
노란 그물버섯은 숨어서 피고 지고.....
갈 때 본 강물은 벌써 흘러 내리고, 올 때 본 강물이 그 자리를 메운다...
초록 들판, 연두빛 잡초, 흐르는 황토물.... 그 위에 나부산이 우뚝하다...
탐방객이 도열한 양쪽을 지난다..
여름꽃이 만발한 강변을 가볍게 걷는다...
의자봉은 뾰족하고, 적석봉은 암벽이 강물에 잠겨있다...
강물 檢問所처럼 飛龍橋의 亭子가 嚴整해 보인다......
江文化展示館에 닥아 오니 기쁨이 두 배이다...
江文化展示館 앞의 강변은 잘 가꾸어 탐방객을 부른다...
주차장에 돌아오니 곧 비가 내릴것 같다... 함께해서 감사합니다.
점심은 칼국수(호계 향촌식당) 11 : 53 : 50
첫댓글 완담칠현사적비의 비문을 옮기면서 무지의 소치(전서체 곤란)로 한자를 도움을 받고 찾으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여러날이 소비되었습니다. 비문의 내용은 이해가 분명치 않으나 자세한 해설을 참고하니 고맙게 내용을 얻을 수 있어 다행입니다. 지나쳐 보면서 無心히 대하다가, 임자를 만나서 深度 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랜 장마로 인하여 모든 山川이 질척거리고 풀잎에 맺힌 이슬 때문에 步行이 어렵지만 이 雙節巖 길은 年中無休 걷기 좋은 길이다.回龍浦 언저리를 몇차례 돌고돌아 三江里에 왔지만 넓게 展開된 堤防길~雙節巖 데크길~청곡제 三樹亭 길 3.5km은 洛東江을 끼고 돌아 風景이 그만이다.東萊鄭氏 集姓村인 憂忘里는 入鄕祖의 훌륭한 入鄕 理念도 있었지만 洛東江 나루가 있어 開化가 빨랐으며 이 시기에 류근영 선생 같은 先覺者가 계셨기에 新敎育의 영향으로 傑出한 인물이 많이 배출 되었다.지금도 그 분의 功勞를 기리는 碑石을 造成하여 잊지 않고 있으니 恩惠를 소중히 여기는 븐들이고,알운봉 기슭마다 조성된 저 분들의 산소에 쏟은 정성만 보아도 쉽게 짐작이 가는 정경들이다.三樹亭 由來碑의 難解한 古文을 한 획도 틀림없이 해석하여 옮겨 놓은 金記者의 勞苦에 敬意를 표하며 두고두고 吟味하겠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