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사 ••••••••••••••••••••••••••••••••••••••
우리는 오늘도 신호등을 건넌다. 날마다 세 겹, 네 겹, 수십 겹씩 중첩되는 체제를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그 속에 스며든 권력과 폭력의 야만성을 향하여 양기창의 시는 한없이 차분하지만 통렬하게 저항한다. 수갑과 포승을 차면서도, 이명에 시달리면서도, 독방에서 편지를 읽으면서도 진솔하고 순박하고 부드럽다. 그래서 더욱 가슴 아프다. 저 순결한 「눈 내리는 풍경」을 보라. 언제나 자신의 말투로 디지털 문명이 강제하는 무한경쟁의 틈새를 허물고 불굴의 인간과 윤리를 그려내는 이 소박한 시 형식을 21세기의 리얼리즘이라 부르자.(김형수, 시인, 소설가)
책 소개 •••••••••••••••••••••••••••••••••••••••
국가보안법에 묶여 웃는 시
“1948년 국가보안법이 생겨 1년 만에 11만 명”을 가두었던 올가미가 어느 날 한 노동자 시인을 덮쳤다. 자동차 공장 노동자인 양기창 시인이 바로 그다. 시인은 얼마 전 보석으로 출소하여 재판이 진행 중이지만, 여전히 분단 정권을 유지하는 데 그 밑거름이 된 국가보안법의 올가미 안에 있는 셈이다. 그런데 시인의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옥중에서 쓴 시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여전히 기개가 꺾이지 않은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양기창 시인이 가진 시야와 가슴이 지금 당장의 노동 현실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점인데, 이는 여느 노동자 시인과 구별되는 점이기도 하다. 양기창 시인의 영혼은 우리 역사의 깊은 상처에도 닿아 있는바, 분단체제를 숙주로 삼고 있는 국가보안법의 눈에 이것이 거슬렸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에게는 쾌활한 유머가 있고 앞선 혁명 열사들에 대한 경외의 마음이 살아 있다.
일단 발라보자 참기름!
차도가 있나 몰라
한 시간도 안 되어 한 번 더 찍어 발라
그렇게 몇 번 더, 고소하다 했더니
헉, 아침 거울에 비친
더욱 보도 사도 못 해버린 내 얼굴
퉁퉁 부어올라
_「참기름」 부분
“법무부 자비 물품 신청서 식품란/ 3,970원짜리에 눈이 번쩍 뜨여” 바른 참기름에 얼굴에 피부병을 얻었는데, 처방 받은 항생제를 복용하면서 “참기름 발랐다는 사실은/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구치소 안에서 벌어진 작은 에피소드의 진술에 지나지 않은 것 같지만 이 시는 양기창 시인의 쾌활함을 잘 보여주며 이 쾌활함은 시집에 실린 전체 작품을 건강하게 받쳐 주는 역할을 한다. 비록 “딸아이로부터 세 번째 인터넷 서신을” 받고 “가고 싶다/ 보고 싶다/ 가족들과 꽃 피우는 우리 집으로 달려가고 싶다”(「꽃동산―독방 회상 2」)고 하지만 그것은 얕은 감상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감정의 표현이다. 그래서 “녹차 나무가 그리워”지기도 하고(「녹차 나무―독방 회상 3」), 음식의 고장 광주 사람을 주눅들게 한 엄 부위원장 부인이 만들어준 ‘미더덕 젓갈’이 먹고 싶다고도 한다.(「미더덕 젓갈―독방 회상 7」)
그렇다고 인신을 구속한 감옥에서 바깥 세계만 그리워하는 것은 아니다. 장기수 선생에게 시를 써서 보내기도 하고(「백풍암(白風庵)), “법무부 마크가 찍힌 모포 뒤집어쓰고서” 자신이 겪었던 1980년 5월 광주를 떠올리기도 하며(「솜이불 덮으며」), “오빠들 뒷바라지하느라 문맹아였지만 맹문이는” 아닌(「금강경」) 어머니의 삶도 다시 생각해본다. 결국 국가보안법 덕분에 시인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포함한 자신의 존재 근거가 되는 역사를 다시 산 셈이다. 그렇다고 독방에 갇히면서 벼락처럼 다가온 깨달음인 것은 아니고 시인이 투신했던 운동의 연장이지만 고요 속에서 내면에 깊이 아로새긴 시간이었던 것이다. 다음의 시가 그것의 증거다.
여기 흰 바람벽이 있어 여기 수원에도 내린다
내 눈 내 코 내 입 내 귀로, 나의 모든 감각기관으로
심지어는 심장에 남은 기억으로도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린다, 용이 승천하는 적벽에
청태(靑苔)와 부처손을 품은 흰 바람벽에 투영되는
비가 내리는 풍경이다
_「비 내리는 풍경」 부분
소박하지만, 크나큰 마음
발문을 쓴 조성국 시인에 의하면 “국가정보원이 구속영장을 들어대는 증거의 하나”였던 시 「쏠 테면 쏘아 봐라」는 이 시집의 표제작이다. 이 시는 “빨치산 혁명 전사”들에게 바친 작품인데, 다시 조성국 시인의 발문에 기대 보면 “추모식에 참석한 눈빛 형형한 백발의 빨치산들이 뒤로 자지러졌다”고 한다. 이 시는 양기창 시인의 기개를 여지없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제목에서부터 “감히 거스를 수 없는 당당함과 자신감”이 차고 넘친다.(이상, 「쏠 테면 쏘아 봐라」)
양기창 시인의 ‘세계관’에서 호쾌함을 느끼게 하는 또 다른 작품을 굳이 들자면 「오키나와」와 「사북, 봄날의 교향곡」이 있다. 「오키나와」는 전체 1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용은 시의 화자가 일본과 오키나와를 여행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단순한 관광은 아니다. “도쿄 서점을 나오면서”로 시작되는 「오키나와」는 “가토 상”이 들려준 일본에 대한 이야기와 비행기를 타고 오키나와로 넘어가는 여정, 그리고 오키나와에서 만난 평화 운동가들, 그리고 오키나와 민중의 구김살 없는 묘사로 이어진다. 다음을 보라.
도쿄와 오키나와는 달랐다
인심이 후했고
아와모리 술이 있었다
오키나와 술집에서 만난
오키나와 여자는
인심이 후했지만, 독했다
일본주(日本酒)를 먹고 있었던 나는
그 여자와 대화하는 동안
아와모리를 다 마셔버렸다
미국과 일본 본토를 함께 성토하면서
_「오키나와」 13장 전문
산문적 진술에 가까우며 동시에 화자의 주관적 감정이 짙게 배어 있지만, “아와모리”를 통해 한국과 오키나와의 민중의 연대 장면으로도 충분히 읽힌다. 이 13장은 더 이상의 사족이 없이 마지막 14장으로 넘어간다. 즉 오키나와에서 단 “하룻밤이었지만” 시의 화자가 얄팍한 감상에 빠져 있다는 의심은 갖지 않아도 된다. 양기창 시인의 이번 시집은 창백한 미학에 사로잡히지 않고 시인 자신의 가슴과 정신을 가감 없이 펼쳤다는 점에서 요즘 만나기 힘든 매력을 품고 있다.
“이 소박한 형식을 21세기의 리얼리즘이라 부르자.”(김형수, ‘추천사’ 중)
저자 소개 ••••••••••••••••••••••••••••••••••••••
양기창
2014년 『작가』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불사조 사랑』이 있고, 금속노조 10기, 11기 부위원장을 지냈다. 전국현장조직추진위원회 의장, 기아자동차 한길노동자회 회원이다. 현재 한국작가회의 회원이자 광주전남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장이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원구치소에 구속되었다가 최근 보석으로 출소해서 재판 진행 중이다.
시인의 말 ••••••••••••••••••••••••••••••••••••••
2023년 3월 27일부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원구치소에 구속 수감된 지 8월 3일로 130일째 되었다, 독방 생활을 하고 있는데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9시까지 TV 시청을 할 수 있다. TV 시청은 주로 뉴스를 보고 나머지 시간은 책을 읽는다. 지난주였던가, 뉴스에 캐나다 산불에
이어 지중해의 아름다운 섬, 그리스 요새 도시 로도스의 산불이 보도되었다. 한반도에는 장마에 폭우에 홍수와 산사태로 피해를 입고 있을 때 지구 반대편에는 폭염과 산불에 아우성이었다.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
『이솝 우화』에 로도스와 관련된 말이 나온다. 고대 그리스에서 한 허풍쟁이가 로도스섬에서 올림픽 선수처럼 잘 뛰었다고 허풍을 떨자, 이를 듣고 있던 사람이 “그렇다면 여기를 로도스 섬으로 생각하고 뛰어보라”고 했다고 한다. 꼭 로도스섬이어야만 잘 뛸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점을 꼬집은 것이다. 이 말은 헤겔이 『법철학』 서문에서 인용하고, 마르크스도 애용한 문구로 알려지면서 유명해졌다.
나는 독방에서 로도스의 산불을 접하면서 지구의 기후위기와 ‘여기가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해 뛰어야 할 로도스다’를 생각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