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산" 산에 관한 책이 아니다. 사람에겐 처음에는 성공허고픈 욕구가 우선이지만 인생을 살면서 그보다도 더 큰 산이 있다는 걸 느낀다. 바로 두 번째 산이다. 삶은 혼자가 아닌 함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고통의 시기가 있다. 위기가 닥쳤을 때 인생은 부조리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부와 명성이 아무리 높다고 하더라도 위안과 회복이 되어 주진 않는다. 어떤 사람은 이런 고통에 맞닥뜨리면 과도하게 움츠러든다. 이들은 겁에 질려 영원히 치유되지 않는 슬픔을 끌어안고 평생을 살아간다. 그리하여 인생이 갈수록 더 비참해지고 더 외로워진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은 이런 고통을 온전히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이들은 용기를 내 익숙한 것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마침내 이 고통을 자기 발견과 성장의 계기로 삼는다. 사람들의 인생은 가장 큰 역경의 순간에 자기가 대응하는 방식에 따라 제각기 다르게 규정된다.
데이비드 브룩스는 "두 번째 산"에서 우리는 고통의 시기를 겪으며 인생의 태도를 다시 정립한다고 말한다. 삶의 고통을 딛고 다시 시작하는 법을 익히려면 개인과 사회 차원에서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제 우리가 개인의 행복, 독립성, 자율성이라는 허울 좋은 가치를 넘어 도덕적 기쁨, 상호 의존성, 관계성을 회복할 때라고 주장한다. 지난 60년간 앞의 가치들을 지나치게 강조해 온 결과, 공동체는 해체되고 개인들 사이의 결속은 끊어지며 외로움은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사회적 고립'으로 부를 수 있는 이런 상황은 삶의 고통을 더욱 심화시킬 뿐 아니라 자기 발견과 성장을 한층 더 어렵게 만든다. 저자는 좋은 인생을 살아가려면 훨씬 더 큰 차원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문화적 패러다임의 무게 중심이 개인주의라는 첫 번째 산에서 관계주의라는 두 번째 산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인생이란 두 개의 산을 오르는 일과 같다고 말한다. 첫 번째 산에서 우리 모두는 특정한 인생 과업을 수행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부모에게서 독립하고, 재능을 연마하고, 자신의 족적을 세상에 남기려고 노력하는 일 등이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들여 평판 관리에 신경 쓰며 세상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자신을 자기의 참모습이라고 여긴다. 또한 좋은 집, 화목한 가정, 멋진 휴가, 맛있는 음식, 좋은 친구들처럼 자신이 속한 문화권에서 규정하는 통상적인 목표를 추종한다. 그러다가 문득 무슨 일이 벌어진다. 어떤 사람은 첫 번째 산의 정상에 올라 성공을 맛보지만, 만족하지 못한다. '이게 내가 바라던 전부인가?' 또 어떤 사람은 산을 오르는 과정에서 호된 실패의 시련을 겪으며 나가떨어진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을 만나 예기치 않게 옆길로 빠지는 사람도 있다.
두 번째 산에 오른다는 것은 이 계곡을 '자기 발견과 성장의 계기'로 삼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계곡은 고통의 장소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낡은 자기를 버리고 새로운 자기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고통이 자기에게 가르치는 내용을 똑똑히 바라볼 때, 그렇게 자기 인생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비로소 성공이 아닌 성장을, 물질적 행복이 아닌 정신적 기쁨을 얻을 수 있다. 고뇌의 계곡에서 사막의 정화를 거쳐 통찰의 산봉우리에 이르는 것이다.
첫 번째 산에서는 자아의 욕구를 채우고 주류 문화를 따랐다면 두 번째 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이러한 욕구와 문화에 반기를 든다. 이들은 자기 욕구의 수준을 한층 높여 진정으로 바랄 가치가 있는 것들을 바라기 시작한다. 세상은 이들에게 독립(independence), 개인적 자유, 세속적 성공을 바랄 것을 요구하지만, 이들은 상호 의존(interdependence), 이타적 헌신, 정신적 기쁨으로 시선을 돌린다. 고통 속에서 성장한 이들은 자신의 동기 부여를 자기중심적인 것에서 타인중심적인 것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산이 자아(ego)를 세우고 자기(self)를 규정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산은 자아를 버리고 자기를 내려놓는 것이다. 첫 번째 산이 무언가를 획득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산은 무언가를 남에게 주는 것이다. 첫 번째 산이 계층 상승의 엘리트적인 것이라면 두 번째 산은 부족한 사람들 사이에 자기 자신을 단단히 뿌리내리고 그들과 손잡고 나란히 걷는 평등주의적인 것이다.
어떤 사회가 오로지 이기적인 관심사로만 지탱될 때 사회 구성원들은 서로 분리되고 고립된다. 바로 이런 일이 우리에게 지금까지 줄곧 벌어지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인생의 여러 문제, 즉 고독과 소외, 가치와 의미의 상실, 공동체의 부재 등은 극단적인 개인주의 문화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결과 사람들은 벌거벗은 채로 외롭게 떨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으로 이른바 부족주의(tribalism)가 창궐하여 각각의 정치적 부족들 사이에서 타협 없는 생존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삶이 '혼자'가 아닌 '함께'의 이야기임을 깨달아야 할 시점이라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 사회는 수많은 청년들에게 자유, 가능성, 진정성, 자율성이라는 아주 커다란 빈 상자를 건네준다. 그러나 그들은 불확실성이라는 형체 없는 사막에서 버둥대며 몸부림친다. '나는 자유다'라는 문화 속에서 개인들은 외로우며 서로에게서 느끼는 애착은 느슨하다. 공동체는 해체되고 개인들 사이의 결속은 끊어지며 외로움은 확산된다. 이 상황은 좋은 삶을 살아가는 것, 즉 사랑과 연결을 바라는 깊은 인간적 갈망을 채우는 것을 한층 더 어렵게 만든다. 모든 연령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지만 특히 청년들은 더 그렇다. 이들은 구조화되어 있지 않고 불확실하기만 한 세상에 던져진다. 믿고 의지할 권위나 방호책도 거의 없다. 그런 것들은 오로지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자기 인생 여정에 올려놓는 일 자체가 놀라울 정도로 어렵다.
이것은 일종의 텔로스(telos) 즉 목적의 위기이다. 텔로스 위기에 빠진 사람은 자기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철학자 니체가 말했듯이 인생을 살아갈 '이유(why)'가 있는 사람은 어떤 '과정(how)'이든 견딜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주 작은 고난에도 쓰러져 버린다. 저자가 보기에 텔로스 위기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깊은 권태감에 시달리는 삶이며, 하나는 패배감과 질투심에 사로잡힌 삶이다. 그 결과 이들은 사회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그리고 심지어 육체적으로도 점점 더 소원한 관계로 살아가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된다.
인생의 목적과 공동체적 유대감이 사라진 사회에서 만연하는 것은 외로움과 불신, 무의미와 혐오 감정 등이다. 예컨대, 45세 이상 미국인 가운데 35퍼센트는 만성적으로 외로움을 느낀다. 또한 1940년대 미국인의 약 60퍼센트는 자기 이웃을 신뢰한다고 응답했지만, 지금은 32퍼센트이며 밀레니얼 세대만 떼어 놓고 보면 겨우 18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스탠퍼드대 교육학 교수 윌리엄 데이먼은 저서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에서 젊은이들 가운데 오로지 20퍼센트만이 인생의 목적을 온전하게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우리를 둘러싼 사회 전체도 고통의 계곡에 떨어질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두 번째 산을 오르는 개인들과 마찬가지로 사회 전체도 고통에 대응하는 방식에 따라 좋은 사회로 올라가거나 나쁜 사회로 내려갈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좋은 인생과 좋은 사회는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우리는 홀로 좋은 인생을 살아갈 수 없으며 좋은 사회 역시 나 홀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둘을 연결하는 키워드는 바로 '인간관계'이다. 개인과 사회 전체가 인간관계를 두텁게 형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인생을 살면서 네 가지 커다란 헌신의 결단을 한다. 직업에 대해, 배우자와 가족에 대해, 철학과 신앙에 대해. 그리고 공동체에 대해. 우리는 이 헌신의 결단들이 제각기 다르다고 여기지만, 저자에 따르면 실제로 헌신을 실천하는 과정은 모두 비슷하다. 헌신의 결단은 '계약'과 다르다. 계약을 체결하는 사람들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그저 자기의 현재 관심사나 이해관계에 맞춰서 계약 내용을 조정할 뿐이다. 이에 비해 헌신은 우리를 예전과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놓거나 완전히 새로운 인간관계 속으로 집어넣는다. 그냥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 남편과 아내이다. 그냥 어른이 아니라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이고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이다. 헌신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자기의 미래 자아를 특정한 의무에 묶어 둔다.
헌신은 비록 무언가를 남에게 주는 정신 속에서 만들어졌지만, 헌신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적지 않은 이득을 가져다준다. 저자에 따르면 정체성과 목적의식은 혼자서는 형성되지 않으며, '진정한 자유는 구속의 부재가 아니라 오히려 올바른 구속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은 자기의 관심을 더 나은 욕구로 돌려놓을 수 있을 때만 나쁜 욕구들을 억누를 수 있다. 깊은 헌신의 삶을 살아갈 때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구분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공동체 회복은 이런 헌신에서 시작된다. 관심과 보살핌이 부족할 때 이웃이라는 집단은 쉽게 깨지고 구성원들 역시 파편화된다. 또한 사람들 사이에 흐르던 신뢰의 물길은 바짝 말라 버린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우선시하며 살기로 결단할 때, 두 번째 산에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할 때, 이 공동체는 회복하기 시작한다. 물론 그 과정은 매우 느리고 복잡하지만, 나의 이야기에서 우리의 이야기로의 전환만이 건강한 공동체, 즉 인간관계가 두텁게 형성되어 있는 하나의 체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개인주의는 개인을 모든 연대와 결속에서 분리하고, 집단주의는 개인을 집단 속에 묻어서 지워 버린다. 그러나 관계주의는 '각 개인을 따뜻한 헌신의 두텁고 매혹적인 관계망 속에 존재하는 연결점으로 본다.' 또한 관계주의는 순전히 의지력만으로 인생을 지배하려고 들지 않는다. 개인주의가 핸들을 꽉 움켜쥐고서 자기 인생을 빈틈없이 계획하려고 한다면, 관계주의는 자기 자신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든다. 마지막으로 관계주의는 좋은 인생과 좋은 사회를 잇는 유일한 연결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