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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으면서 싸워 봅시다1
信天함석헌
박수 받을 자격 없다
어제 저녁도 그랬고 오늘 저녁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처에서 그럽니다만, 여러분이 박수를 해주시는데 내가 대답을 안하는 것을 이상하게 아실 것이에요. 그것도 설명을 안해야 옳겠지만 혹시 이상하게 생각하실까 해서 설명을 하면, 박수는 받을 분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박수를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만 아니라 누구도 씨의 박수를 받을 분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서 절과 찬송과 기림을 받는 것은 오직 한 분뿐이지 다른 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매양 잘못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일부러 그렇게 한 겁니다. 다른 때 남이 인사하면 나도 같이 안 받는 건 아니지만, 이 자리에서는 그걸 좀 알려 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그럽니다.
우리가 어려서 예수를 믿을 때 주일날에는 어른보고도 절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이상하게 아실 것이에요. 하나님께만 공경해야 된다는 의미에서, 어른 공경 안하는 건 아니지만 주일날은 어른보고도 절을 하지 말자 그랬습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습니다만.
처음 기독교 전도를 받았던 이들의 생각을 좀 생각해 주실 필요가 있을 겁니다. 오늘 저녁에 직접 관계 안 되는 말같이 들리지만 사실은 그것이 가장 중요한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된다면 이 시간에 제가 말씀하는 다른 문제는 저절로 옳게 되는 겁니다.
사람은 다 언제든지 자기 마음에 바라보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 아까 찬송 불렀지요. “내 님을 가까이”, 그랬는데 해방이 된 다음 우리에게 남의 이름에 붙여 존칭하는 적당한 명사가 없어서 좀 고심한 일이 있습니다. 서양 사람의 ‘미스터’는 참 좋아요. 대통령부터 어린애들에 이르기까지 “미스터 아무개”라 그러면 좋지 않아요? 다 그렇게 부를 수 있어요. 일본 사람은 무슨 ‘상’─긴 상, 이 상, 오도 상, 오카 상, 뭣에다 붙여도 상관이 없어요. 그러나 우리 나라는 그런 공통한 명사가 없단 말입니다. 없는 게 아니라 옛날 있었는데 잊어버려서 쓰질 않아 그래. 그래 ‘님’이라 부르면 좋지 않느냐, 그렇게 주장했던 사람의 하나입니다. 그러자고 했더니 근래는 그게 상당히 쓰여요. 대단히 좋은 일이에요. 해방이 됐는데도 오랜 만에 만난 사람을 보고 적당한 말이 없어서 뭐라 할지를 모르는 때가 있었어. 사람이기 때문에 존경하는 뜻을 표시해야 되는데, ‘님’이라는 건 옛날부터 불러 오던 것이고, 임금보고 임금님이라 그랬지만 아들보고도 아드님이라고 그랬어. 높고 낮고 상관이 없이 부를 수 있어요.
내 님을 가까이 내 님만 가까이
여기 찬송가 부르다가 내가 작사했다고 그랬지만 잘못 보신 겁니다. 어제 저녁도 날 소개했는데 좋은 뜻으로 했지만 잘못된 것이 있어. 사실 말이지 소개가 우스운 겁니다. 하나마나한 겁니다. 소개가 바로 되는 소개가 하나도 없어요. 내가 나 자신을 알지 누가 날 안다고 소개한다 그래.(웃음) 이것도 내가 작사한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 찬송가에 있는데, 옛날에 종이 자기 상전보고 주님이라고 하던 거니까 그 소리가 싫어서 주(主) 자를 고쳤어요. 우리말로 ‘님’이라면 ‘무슨 연애를 하나?’ 그런 것 같아서 좀 어폐도 있긴 하지만, 반드시 연애하는 사람만 님이 아니지요. 그래서 그렇게 썼고, 그래서 일절도 좋고 이절도 좋고 다 좋은 말이에요. 새겨 보면 좋지 않아요? 오늘 저녁 그거나 해석했으면 좋겠어.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의가 많을 거예요. 그런데 그거 아니야. 사절에 가서,
기쁨 맘 깨어나 님을 노래
돌 같은 내 마음 쌓여 제단
한숨을 쉬어도
내 님을 가까이 내 님만 가까이
더 가까이
야곱이 도망 가던 때, 가다가 잘 데도 없어서 빈 들에 그냥 누워 베개도 벨 것 없어서 돌을 베고 자면서 꿈을 꾸었는데 하늘에 닿는 사다리를 봤다, 그것을 노래한 거예요. 아침에 집을 나와서 외갓집으로 간다고 나오긴 나왔지만 가겠는지 안 가겠는지 정처를 알지 못하잖아요.
헤매는 나그네 해는 지고
어둠이 덮칠 때 찬 돌베개
자는 꿈 속에도
내 님을 가까이 내 님만 가까이
더 가까이
야곱이 아버지 집에서 형제 둘이 문제가 생겨 쫓겨나서 살 길을 찾아 나서는 길 같은데, 나의 영혼의 역사도 그와 마찬가지다, 괴로운 일이 많고 평안한 곳이 없으니 돌베개 베고 자는 사람 같다는 거예요. 그래도 땅에서부터 하늘에 닿는 사다리를 봤다는 그 꿈이 좋아요.
그런데 야곱이란 사람이 나쁜 점도 있어요. 여러분은 어떠한지 몰라도 난 어렸을 때 야곱은 밉고 에서가 동정이 갔어요. 야곱은 깜찍하게 엄마하고 둘이 짜고 사람 좋은 에서를 속이잖아요. 에서란 사람은 호인이에요. 얼마나 호인이면 사냥하고 들어와 배가 고픈데 팥죽을 끓이고 있어서 좀 달라니까 야곱이 “그냥 안 준다. 형님이 맏아들이란 걸 내게다 넘겨 주면 주지?”라고 아주 앙큼하게(웃음) 굴고, 또 엄마가 내 자식이라고 그랬는지 야곱 편을 들어 장자 자리를 빼앗았겠어요. 에서는 ‘그래 좋다! 뭐 배가 고파 팥죽 먹었으면 그만이지, 장자는 엄연히 나니까 팔기로서니 그렇게 되겠냐?’ 했을 거야. 그랬는데 그렇게 됐다고 하잖아요? 그때 우리는 뜻을 풀 줄은 모르고 그 얘기만 어린 생각에 보니까 에서에게 동정이 가고 야곱은 앙큼하게 보였어요. 나만 아니라 내가 종종 그 얘기를 하면 “나도 그랬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그렇게 착한 에선데 그 에서에게서 왜 맏아들의 자리를 빼앗았을까? 이삭은 눈이 멀었으니까 눈먼 할아버지가 손목에 깍데기 씌운 건지도 모르고 “냄새는 에서의 냄샌데 목소리는 야곱 같구나” 하고 주었잖아요.
그런데 사람이니까 부족해 그랬더라도, 왜 하나님이 이삭의 말대로 해서 결국 야곱을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고 에서를 그렇게 못 되게 했나? 그 점 의심이 간단 말이야. 그럼 “어이구, 하나님이 그러고 싶어 그런 거지 뭐.” 또 바울이 그러잖아요. 하나님이 자기 마음대로 어떤 것은 귀한 것을 맡기고 어떤 것은 나쁜 것을 맡긴다, “나 왜 나쁜 것을 맡습니까?” 이렇게 말할 자격이 없어. 그건 물론 일리가 있는 말이에요. 그렇지만 그 말 잘못 해석했기 때문에 우리 나라 꼴이 이렇게 된 셈이지.
하나님은 손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집어서 준단 말이오? 하나님은 입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을 내가 들었습니다”라고 하지만, 하나님 입이 어디 있더냐, 어떻게 생겼더냐 물으면 대답할 목사님 하나도 없을 거예요.(웃음) 입이 있다면 나와 같은 거지 하나님이 될 리가 없지.
하나님은 있다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고, 크다 할 수도 없고 작다고 할 수도 없고, 선하다 할 수도 없고 악하다 할 수도 없고, 다른 말로 하면 절대에 초월한 이지요. 그런 분이 있어서 모든 것이 되는데, 하나님이 상도 주고 벌도 주는 게 사실이지만 하나님이 누구를 흥하게 하고 망하게 하는 이가 아닙니다. 햇빛이 내려올 때에 미국은 착한 백성이니까 많이 주고 소련에겐 조금씩 주고 그런 법 없습니다. 햇빛이 공평하게 차별 없이 오는 모양으로 절대의 그 자리란 그런 거야. 하나님 편에서 하면 차별이 있어서는 안 돼. 내가 하는 꼴을 따라서 상을 받아도 받고 벌을 받아도 받고, 상벌을 주시는 권한은 하나님에게 있지만 받게 되는 그 경위는 나한테 달린다 그 말이야. 하나님은 절대의 하나님인 동시에 우리도 도덕적인 인간이 되어서 인간의 도덕률을 만족시키는 것이 중요해요. 도덕률을 무시하면서 하고 싶은 대로 한다면 할말 없지.
야곱과 에서는 어떻게 됐나? 에서가 사람은 착하지만 마음이 착한 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그 말이야. 그럼 어떡해야 되나? 내 의무에 대해서 분명한 생각이 있어야 됩니다. 에서가 잘못한 것은 장자의 직책이 어떤 것인지 의무를 무시한 거예요. 그저 배가 고프다고 해서 “그래 가져 오너라. 당장 배고파 죽겠는데 장자가 무슨 상관이 있나?” 도무지 그 사람 자기 책임을 소중히 여기는 생각이 없다 그 말이야.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맏아들이라는 게 우리 나라보다 더합니다. 집안의 계통을 지켜 온다는 그런 책임이 있는데, 가문에 아들이 없이 죽으면 다 사람이 들어가 대신 아들을 낳아서라도 계승하도록 하라고 그러지 않았어요? 그런 법이 있을 만큼 장자의 책임을 소중히 알았어. 가문이 망하고 흥하는 게 달렸는데, 나기는 자연적으로 났지만 마음에 그걸 받을 자격이 없어. 그러게 사람은 자연적으로 가지고 난 걸 가지고는 자격이 안 됩니다. 내가 일단 내 마음으로 다시금 ‘새로’가 돼야 해. 영어로 하면 ‘리’(re)가 붙어야 돼. 바울이 체험한 거지만 내가 다시 재체험해야 돼요.
야곱의 앙큼한 꾀, 그건 나빠. 그것까지 잘한다는 말 아니오. 성경 잘못 읽어 가지고 “필요하면 속여도 괜찮아” 그러면 안 돼. 자신이 풀어 보지도 않고 덮어놓고 “하나님이 축복해 줬다. 좋다! 야곱이 잘했다!” 그러는 것 아닙니다. 야곱에 대해서 잘못된 건 잘못된 줄 알고, 잘못한 게 있는데도 불구하고 잘되는 것이 무엇 때문이냐 그 점을 찾아야지. 야곱이 앙큼한 데가 있고 속이는 건 나쁘지만, 맏아들의 직책이 중요하다는 것은 팥죽 한 그릇, 밥 문제가 아니야. 그것들 다 내버리고라도 이게 중요하다, 그게 얼마나 잘한 거요. 그것이 다른 점이오.
아까 말씀대로 정말 중요하다고 보는 점은 이 찬송가 4절에 있어요. “돌은 내 마음 쌓여 제단”이라는 그 소리가 영어 찬송에는 아주 좋아요. “0ut of my stony griefs Bethel I'll raise……” 아버지 집에서 내가 쫓겨났지. 아버지 어머니 집 떠나 내가 이거 어떡하냐? 살겠냐 못 살겠냐? 덮을 것도 하나 없지, 먹을 것도 없지. 이 빈 들에서 내가 돌베개 위에서 자다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서러운지. 그걸 말해서 ‘stony griefs’, 슬픈 돌이라 그랬어. 그러더니 그걸로 하나님의 제단을 쌓자 그 말이야. 제단이란 이렇게 좁은 나무만이 아니라 바우가리 나무로 쌓는다든지, 뭐 잘 한다면 상아로 할는지 모르지만 그걸로만 하나님의 제단이 되는 건 아니고 돌로 쌓아도 좋다는 겁니다. 돌 중에서도 슬픔이라는 돌, 그 말이 참 좋아요. 잘하는 시로만 찬송하는 게 아니라, 슬퍼하는 사람은 슬픔이 곧 찬송이 되고, 땅을 치는 것이 하나님의 찬송이 될 수 있어요. “0ut of my stony griefs Bethel I'll raise.” 무슨 좋은 제단에 예배당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있는 건 그 슬픔밖에 없지만, 슬픈 기도─‘내가 이 잘못 해 가지고 여기 왔습니다. 참 잘못했습니다’ 하는 거야. 아마 들에서 회개했을 거야. ‘잘못했습니다.’ 죽을지 살지 모르니까. 그러며 눈물 흘리는 걸로 ‘이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단입니다.’ 그게 진짜 아니에요?
마음의 주인
그건 그렇고 아까 말씀하던 걸 다시 설명을 해야겠어요. 내가 왜 박수를 안 받았나? 여러분이 어려서부터 나이 많아 이렇게 될 때까지 마음의 주인이 있지요? 뭔지 마음이 자꾸 가는 데가 있지 않아요? 어린애일 적에는 일단 마음이 엄마한테 가 있잖아요. 애는 엄마한테만 가 있으면 만사가 다 해결이에요. 그 다음에 조금 크면 뭘 먹을 걸 주면 좋아하고 또 나가서 놀게 되면 동무면 그만이에요. 집을 나가서 저녁에 늦게 되도록까지 안 들어와서 엄마가 두루 찾고 그러는데, 동무에 취하지 않아요?
또 조금 있으면 계집애 따라다니지요, 총각 따라다니지요.(웃음) 집에 가만 안 있고 돌아다니면 “저년 시집 가고 싶은 생각났다”, “저놈 장가 가고 싶어 딴생각 났다, 장가 보내 줘야겠다.” 그래 시집 장가 보내는 게 인생의 제일 큰 일이다, 그러고 둘을 맞붙여 놓으면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이 돼요. 떠돌아다니던 인생 땅으로 갔으니 좋아. 하지만 사실은 사람의 목적이 땅에만 주저앉자는 건 아닌데, 한없이 하늘로 올라가자는 그건데, 영원 무한을 향해 자꾸 올라가자는 건데, 그저 여자한테만 맡겨두고 남자한테만 맡겨 두고 있으니. 그것이 근심 걱정을 잊게 하는데, 나가 일하다가 집에만 돌아오면 스르르 풀리고, 남한테 욕을 먹고 들어와서 불평을 하다가도 “괜찮다, 그것만 생각하지 마시오. 당신 뭐 그것 때문에 사시오?” 하니 얼마나 좋아? 좋긴 좋지만, 그러기 때문에 하늘에 올라가려던 걸 잊어버리고 만다 그 말이야. 그런 면이 있어요, 없어요? 그걸 또 잘못 생각을 해서 ‘이젠 결혼에 싫증이 나서 그런다, 다른 여자를 두면 되나?’ 뭐 이따위 생각, 물론 나쁘지요. 그러면 안 돼.
마음에 주인이 있어 그래요. 그 주인이, 어려서 젖먹는 때에는 어머니가 심볼(symbol)이 돼서 어머니로 보이고, 조금 크면 동무로 보이고 이성으로 보이고, 또 조금 크면 사업으로 보이고, 경우를 따라서 자꾸 달라져. 종교란 다른 게 아니라 마지막에 그걸 가르쳐 주자는 거예요. 마음의 주인이란 그런 것 아니다, 그러니까 엄마가 엄마가 아니라 하나님이 엄마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말 아버지다, 동무가 동무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말 내 동무시다, 내 벗이다, 저기 학교에 있는 선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말 내 선생이시다, 이 식으로 해서 마지막 가도록까지. 심볼은 이걸로 저걸로 변할 수가 있지만, 내 이 사람이라는 것 가만있지 않고 자꾸 자라요. 육신이 자라는 걸 따라서 마음도 자라요. 마음도 자라기 때문에 심볼도 자랄 수밖에 없어요.
목사는 자신들이 그런 체험이 없으니까 그렇게 지도는 안하고 행세를 하는데 죄 중에 그게 아마 제일 큰 죄일 거예요. 안 목사 큰일 났네요.(폭소) 목사님 세 분이 앉아 있는데 큰일 났어요.(웃음) 다른 사람들이 다 “목사님만 따라가면 되지” 하면, “나는 아니다. 나는 아니니까 나는 보지 마” 그래야 옳은 거야. 그런데 그러질 않는단 말이야. 정치의 수반, 정치에 권력을 쥔 사람이 제일 그 죄를 많이 져.
사람이 절을 하지, 짐승은 절 없어요. 이것이 어디서 나왔냐 하면 생각하는 데서 나온 거야. 절을 할 때는 코가 땅에 가 닿아야 해. 서양 사람들은 그냥 끄떡 하는데, 좋은 점도 있어요. 하지만 그것은 안 돼요. 워십(worship)이라고, 듀티(duty)라고도 그러는 건 아주 엎디어서, 사지와 몸뚱이 납작 엎드려 정말 하나님한테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고 예배하는 거예요. 사람은 그걸 받아먹을 놈이 없어요. 세상에선 정치꾼들이, 임금 때 대통령 때 이것들이 “내가 기다!” 하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이름을 쓴 밤나무에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간 다음 제사하려면, 지금은 사진 있으니까 사진 놓으면 되지만, 사진 없는 옛적엔 나무 중에 비교적 썩지 않고 오래 가는 밤나무를 골라다가 아무개 신위라 써서 그걸 보고 절을 했어요. 상점에 가서 그거 고를 때 요놈으로 할까 요놈으로 할까? 그러니까 심볼과 실체를 구별할 줄 알아야지. 제가 실체인 것처럼 칼을 뽑아 들고 “내가 제일이다. 내가 나간다” 그러면 벼락 맞을 소리. 그래서 벼락 맞았지.
하나님께 갈 절을 도둑질해 갈라 먹고는 망하지 않는 재주가 없어요. 하나님 이외에 딴 데 가서 하는 절 그보다 적을 줄 알아? 그건 더하지. 절을 안 받아먹을 걸 받아먹고서도 망하는 거고, 안할 절을 했어도 망하는 거고.(웃음, 박수)
여러분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는데, 밖에 나와 계신 분들인데 나라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나라 안에서 못 하는 생각 여러분은 좀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 말도 하고 싶고, 다 같은 고생을 하는 분들이라 그럴 생각이 가는데, 나더러 많이 하는 말이 뭔고 하니 “옛날에는 안 그러더니 어찌 그리 말이 약해졌습니까?” 뭘 얼마나 자세히 들었다고 그래.
뭣이 강한지 뭣이 약한지도 몰라. “이 자식아, 개새끼야” 그걸 무서운 소리로 알지만 욕하는 것만 제일이 아니지요. 나는 내 믿는 것이 그렇기 때문에 폭력 써 가지고는 도리어 이길 걸 못 이긴다, 그러니까 폭력 안 쓰고야 이길 수 있다는 걸 역설하는데, 내 말을 나무라워서, 나무라워서…… 어저께까지 “좋습니다” 그래 놓고 누가 글쎄 펜실베이니아까지 따라와서 “선생님, 그런 말 하려면 오지 마시오. 한국 보내겠어요” 그래.(웃음) 그런 분도 있어요.
그래도 나대로 생각이 있어. 이제 그런 건 문제도 안 돼. 욕을 하거나 뭘 하거나 칭찬을 하거나 때리거나 간에 나는 나대로 이만큼 했으면…… 상관있어요? 나는 내 생각하는 것이 있어서 드리는 말씀으로 아세요. 말만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때 “십자가를 져야지”라는 말을 하려다가 마는데, 이제는 그런 말 헤프지 않아요? 어느 핸가 박 대통령이 대통령 뭣인가를 하면서 “나도 이제 십자가를 졌다” 그랬어. 십자가를 너무 싸게 그런다 그랬어.(폭소)
우리 선생님은 그런 선생님이 있어요. 아침에 냉수 마찰하는 분이 있는데, “너 냉수욕하려면 십자가를 질 각오로 해야 한다.” 십자가를 얼마나 비싸게 한 거요? 냉수욕 하나 하는데도 십자가에 달리는 각오로 하지 않고는 안 된다, 으스스하고 벗을까 말까, 벗을까 말까?(폭소)
그래 웃는 말로 하면서도 얼마든지 싸울 수 있다, 정보부 사람보고 그래요, “웃으면서 싸워 봅시다.”(웃음) 욕질하면서 그럴 것 없지 않아요? 나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마찬가집니다만, 연금당해서 우리 집에도 열 명도 더 돼요. 그 사람도 불쌍해요. 김대중 씨 집에는 어떤 때는 백 명이나 간다고 그럽디다만. 그 사람들이 추운 겨울에도 거길 떠나면 안 된단 말이야.
지난해에도 그때도 추울 땐데 문간에 와서 지키고 있는데 대구에서 통일당 지구당 개편하는 데 와서 연설을 좀 해 달라 그래. “갑시다!” 또 연설할 기회가 이제는 없어요. 민중을 만나 볼 기회가 도무지 없단 말이야. 그래서 어디나 기회만 있으면 가서 해줄 수밖에 없다, 그래 일찍 가야 하겠는데, 고속 터미널에 가서 여섯시에는 떠나야겠는데, 거기를 가려면 집에서 네시에 떠나야겠는데, 집 앞에서 지키는데 어떡하지? 아무래도 가 봐야 할 거니까 나갔다가 지키면 못 가는 거고, 하나 둘쯤이면 자신 있으니까 그것까진 어떻게 못 하겠어요?(폭소) 내가 싸워서 때려눕힌단 말 아닙니다. 우리 집 아는 사람은 알지만, 내가 우리 집 문간에서 싸워서 왔다갔다하다가 차길까지 오백미터는 잘 되는데 게까지 가 본 일이 있어요.
힘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가야 된다’, 욕을 안하면서도 내 속에서 아주 결단 있는 것을 보여주면 어찌할 수 없어. 그래서 가 본 일이 있지만, 그래도 못 가게 하면 어떡하지? 새벽에 일어나니까 없단 말이야. 그래 갔어요. 나는 잘 다녀왔지만 그 사람이 그것 때문에 좌천을 당했는데, 좋다고 그랬어.(폭소) 그러니 어떤 때는 그 사람들 불쌍해요. 차도 갖다 주고 그래요. 그러면 “선생님! 이거 못 해먹을 노릇입니다” 그래요.(웃음)
이 말을 왜 하는고 하니 평화주의가 이긴다는 거예요. 미운 소리 해서 될 것이 아니고. 그런데 폭력으로 하면 이기는 것 시원하다 하면서도 나는 못하겠다 하는 사람이 많아. 사람은 본래 천성이 착하기 때문에. 여러분 잘 들어 두시오. 나더러 “정보부에 끌려갈까봐 겁이 났나?” 혹은 “뭘 얻어먹고 사쿠라가 됐나?”(웃음) “약해졌다” 그러지 말고, “이젠 나이 먹으니까 저 영감도 힘이 다 빠져서 그러나?”(웃음) 그러지 말고. 그런 것 아니오. 나는 생각하는 게 있어서 그래.
그건 그랬고 내가 박수를 받으면 안 돼. 내가 미워서 저 사람들을 어떻게든지 없애야지, 단절해야지 하는 사람들이 다 하나님께로 가는 박수를 자기가 받으려고 해. 그걸 고치려고 하던 난데, 나도 또 상당히 나를 존경하나 보다, 그러고 바보가 돼. 바보뿐만 아니라 아주 도둑놈이 돼. 그렇게 생각하면 세상에 정치의 높은 자리에 있는 것만이 도둑이 아니라 층층이 다 도둑이에요, 다 도둑이야.(웃음)
어머니도 어느 의미로는 좀도둑질했어.(웃음) “내가 무슨 참 어머니냐, 정말 어머니는 이 땅이 어머니지. 하나님이 어머니지” 그렇게 가르친 어머니라면 자기가 어머니된 줄 아시는 분이지만, “이 자식아, 내가 너 낳았단 말이야. 나 없이 네가 있은 줄 알아?” 하는 건 옳긴 옳으면서도 어머니 노릇을 채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욕을 단단히 먹을 각오를 하고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고 하지 마라.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한 분뿐이니라” 하셨지. 사람들이 욕을 해도 상관이 없어요. 저것들을 좀 깨우쳐 주려면 “그 아버지 소리 하지 마라!” 아버지 아닌 건 아니지. 세상에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맨 처음 보여주는 건 어머니고, 그 다음날 보여준 건 아버지니까. 아버지는 조금 나이 들어야 압니다. 어머니는 직접 젖줄에 달려 있기 때문에, 우선 거기 그저 달라붙는 거지. 애가 도대체 양심이요 뭐요 하는 건 어머니 젖을 먹는 데서 배우는 거예요.
그런데 애를 기르는데 어미가 안 기르고 우유통에 맡겨서 기르니까 약해질 건 당연하지.(웃음) 이 미국 사람들이 형편이 없어지는 것은 까닭이 있어요. 그걸 좋다고 여기 와서 모방을 하려고 그러는데, 그 문명이 그런 점에서 아주 안 된 겁니다.
예수님 어머니, 보통 어머니가 아니오. 보통 어머니가 어디 예수를 낳으실 수가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어머니가 찾아왔는데도 “누가 내 어머니요 내 동생입니까? 하나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어머니요 동생입니다” 그러면서 나가 보려고 하지도 않아. 아주 참 잔혹하면 잔혹한 일인데, 자기는 자기대로의 확신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것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자기가 그렇게 말해도 자기 어머니가 이해하실 줄 알고, 뜻이 있어 그러는 거예요. 그 뜻은 알지도 못하고 흉내를 내서, 문 밖에 친척이 찾아와 목사님 대라고 하니까 “누가 내 친척이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친척이다” 그러고 나가 보지도 않는다, 그건 잘못이에요.(웃음) 예수님 그 지경에 가셨으면, 그 체험을 하셨으면 그 말 걱정 없이 할 수 있어요. 허나 그 자리에 가지 못하고 그 말만 한다면 그것 때문에 말씀하신 목사님도 잘못되고 들은 사람도 잘못되고, 세상이 이렇게 잘못되는 거야. 정치인도 이렇게 해서 잘못됩니다.
내가 될수록 깊은 속에 있는 것을 여러분한테 말씀 드리는데, 나는 늙으니까 이젠 다 기억이 죽어서 말도 시시하게 하더라, 그거 각오하고 해요. 그까짓 건 내 안 들었으면 그만이지. 또 듣는대도 며칠 안 될 거야. 땅속에 들어간 다음에는 제 암만 그래도 내 귀에 못 올 거니까.(웃음) 하나 그걸 각오를 하고라도 말해야 될 것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제 무슨 새 작전에 가솔린을 넣어 화염병이라도 만들어다가 투척을 한다든지 하고 “좋다, 신난다”(웃음), 그래 놓고 경찰서에 갈지 모르지만 지금 그런 것 해서 악한 사람들 내쫓을 수가 있어?
서풍이 불기 시작한다
오늘 저녁에 제목이 없어요. 그래 이 사람들, 말하자면서 제목이 왜 없나? 그건 바로 된 거야. 사실은 제목이 우스운 거야. 제목이 무슨 제목이야? 제목이 있다면 하나가 있을 뿐이오. 그렇지 않아요? 어제 저녁도 마찬가지 얘기가 돼서 내가 했어요. 영국에 월터 롤이라는 사람이 죽게 됐는데, 마지막에 숨이 넘어가는데 죽기 전에 자식들보고 저기 앞에 보이는 책 달라고 하는데, “무슨 책 말입니까?” 그러니까 “책이란 그 책이지 무슨 책이 있단 말이냐!” 했답니다. 성경책. 책 중의 책은 성경책인데, “다른 책도 책이지만 책 중의 책은 그 책뿐이 아니냐? 평상시에 한가할 때 이 책 저 책이지 내가 지금 죽게 됐는데 그 책이지 뭐냐?” 그 사람이 안 사람 아니에요? 그런 모양으로 여러분이, 목사님들이 도통했나봐. 잘한 거예요. 그러니까 나도 제목 없는 말을 이렇게 저렇게 하잖아요. 예수님 말씀에도 제목 걸고 하지 않았어. 하늘 나라는 이렇다, 다 제목 없는 말이에요. 제목 없는 말씀을 하긴 하지만 알지 못하는 새 쑥쑥 들어간단 말이에요.
어떤 때 가면 붙여도 또 좋습니다. 오늘 저녁 제목을 붙인다면 나라 문제니까, ‘우리 민족의 통일과 세계 평화’─그런 문제로 말을 해 달라고 해서 해본 일이 있습니다만, 어제 그제 이삼 일 신문을 구독해 보신 분들은 좀 마음이 다르지요. 서로 다른 말을 많이 주고받았지요. 그건 뭔고 하니 “국회의원 내놓자!”(1979년 10월 4일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국회에서 제명당하자 신민당 국회의원 전원이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한 일을 가리킴―편집자) 시원하지요? 왜 놀라십니까? 그것들이 그럴 줄은 몰랐는데, 그런 것 같지 않은데, 우리 속에는 다 알고 있지 않아요? 이런 때야말로 일치해서 “우리 같이 행동한다” 그런다면 명령이 소용없잖아요. 반드시 칼을 들고 가서 그래야만 꺾는 것이 아니라 “우리 다 나간다”, 아주 쉬운 일 아니에요, 그러면 그게 칼보다도 무서워요. 그것들이 해낼까 그랬는데, 아, 뜻밖에 했으니까 놀랍지 않아요? 그 점은 아마 다 일치한 줄 알아요. 다 지지한다면 좋은 거예요.
어제 저녁도 다른 데서 얘기하면서 “야, 서풍이 불기 시작한다” 그랬어요. 서풍이 불기 시작한다는 건 젊어서부터 좋아하는 셸리의 「서풍에 붙이는 노래」(Ode to the West Wind)에서 따 온 거예요. 이 시 마지막 절은 이래요. “겨울이 온다면 봄이 어찌 멀었으리오?”(If Winter comes, can Spring be far behind?) 그걸 듣고 나는 놀랐어. 셸리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시인은 유명한 시인이지. 스물 아홉 살에 뱃놀이하다 물에 빠져 죽었어요. 그렇지만 다른 건 다 그만두고 서풍 노래 하나만은 용타 그래. 그러기에 참말은 내 것이 아닙니다. 해 놓은 다음에는, 일단 글을 써 놓은 다음에는 내 것 아닙니다. 거기다 돈까지 받아먹으려는 건, 옛날에는 그런 법 없소. 진리를 위해서, 그저 그 좋은 경치를 그냥 둘 수가 없어서 했지. 돈 생각을 미리 하고 시인이 어떻게 된단 말이야? 아까 노래 불렀지만 적어도 노래 부르는 순간에 돈 생각 했다가는 소리가 옳게 나오지 못했을 거예요.(웃음) 아까 노래 부를 때 앉아서 생각했던 것 하나 있었는데, 잊어버렸댔어. 이제라도 할까요?
공자님은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아주 꼬장꼬장한 할아버진 줄 알지만 안 그래요. 공자님이 어떠한고 하니 누가 쓱 노래를 하면 “한 번 더 하시오” 재청하는 법도 있어. 지난번에 뉴욕을 갔더니 거기 필하모니 표를 사 줘서 들어갔던 일이 있어요. 하도 고마워서 들어갔습니다만, 이제는 그만 재청하는 게 식(式)이 됐어. 단번에 그만두면 인사가 안 된 줄 알면서 (박수 치며) 불러내 보고 그런 줄을 알고 하니까 싱거워요. 하지만 공자님 누가 노래를 잘하면 “한 번 더 하시오” 하고는 자기가 한번 부르는 이야. 노래는, 너도 불러라 그래서 부르는 거지, 남 하는 걸 잘했다 그러고 말면 못쓰는 거예요. 여기서도 노래가 나와야 돼. 소리로 안하더라도 노래가 나오게 돼. 노래가 나오면 어떻게 되지요? 마음 일어나는 거예요. 본래 본마음은 누구나 좋아요. 좋은데, 이 마음이 자고 있어. 혹은 축 늘어져 있어. 바이올린이 참 좋은 바이올린이지만 그대로 둬두면 줄이 늘어져서 못 쓰잖아요. 음악하려면 반드시 줄을 틀어야 돼. 줄을 켕겨야 돼. 줄을 켕기다 너무 켕기면 터져 버려. 적당하게 좋은 음이 나오도록 켕겨. 노래를 부르는 것은 이제 우리 마음을 트는 거야. 마음을 틀어서, 자기가 하면서. 우리도 하나 불러 볼까요?(박수) 그러면 일어서시오.(청중과 함께 합창)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 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그 속에서 놀던 때의 심정으로 돌아가면 문제가 없어요. 그것은 내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돌이켜서 어린애처럼 되지 않고서는 하늘 나라 갈 수 없다” 하늘 나라란 저 허공에 구름 위에 있는 걸 말씀한 것 아닙니다. “하늘 나라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말아라. 네 속에 있다.” 그러니까 나라 떠나 있다는 생각 하지 마세요. 내가 여기 있거나 저기 있거나 간에 내 속에 나라가 있어. 나라가 밖에 있는 줄 생각하기 때문에 나라를 업신여기는 겁니다. 나라 업신여기기 때문에 나 할 의무를 안하는 거야. 나 할 의무를 안하기 때문에 나를 사람으로 대접 않고 덮어 누르고, 도둑놈이 생기는 겁니다.
지금, 여기서부터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가 할 것은 민주주의예요. 저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