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面)
정현우
면과 면이 뒤집어질 때, 우리에게 보이는 면들은 적다
금 간 천장에는 면들이 쉼표로 떨어지고
세숫대야는 면을 받아내고 위층에서 다시
아래층 사람이 면을 받아내는 층층의 면
면을 뒤집으면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되는
복도에서, 우리의 면들이 뒤집어진다
발바닥을 옮기지 않는 담쟁이들의 면.
가끔 층층마다 떨어지는
발바닥의 면들을 면하고,
임대 희망아파트 창과 창 사이에
새 한 마리가 끼어든다.
부리가 서서히 거뭇해지는 앞면,
발버둥치는 뒷면이 엉겨 붙는다
앞면과 뒷면이 없는 죽음이
가끔씩 날선 바람으로 층계를 도려내고
접근금지 테이프가 각질처럼 붙어있다
얼굴과 얼굴이 마주할 때 내 면을 볼 수 없고 네 면을 볼 수 있다 반복과 소음이 삐뚤하게 담쟁이 꽃으로 피어나고 균형을 유지하는 면, 과 면이 맞닿아 있다
어제는 누군가 엿듣고 있는 것 같다고
사다리차가 담쟁이들을 베어버렸다
삐져나온 철근 줄이 담쟁이와 이어져 있고
밤마다 우리는 벽으로 발바닥을 악착같이 붙인다
맞닿은 곳으로 담쟁이의 발과 발
한 면으로 모여들고 있다
― 201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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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당선자 개별 통보 기간이다. 신춘문예 열병을 앓고 있는 문청들은 당선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12월 24일까지 초조한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신춘문예는 통과제의에 불과하다. 당선 이후 얼마나 가열차게 감각적으로, 미학적으로 창작 활동을 하느냐에 따라 시인으로서의 생명이 좌우된다. 그런데도 신춘문예라는 코드는 여전히 매력적이어서 신춘문예 발표가 끝나고 나면 대다수 응모자들은 ‘신춘문예 후유증’을 앓는다.
필자가 생각하는 신춘문예 당선 조건은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는 나만이 발견한 매력적인 결이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다. 나만이 발견한 근원성, 본질성, 존재성, 관계성과 관련된 심리적(심미적) 문양(결)이 있으면 나름의 시적 사유나 시적 깊이로 인정받는다. 그런데 그 결은 내용이나 대단한 주제가 아니다. 예컨대 ‘연민’을 메시지로 담으려는 시가 있다면 나만이 발견한 연민의 결을 찾아야 한다. 아무렇지도 않은 사물이나 현상 속에서 나만이 발견한 연민(결)이 있으면 좋은 시로 평가받게 되어 있다. 두 번째는 신선한 발상과 상상이다. 기존에 본 적 없는 발상으로 접근하거나 예기치 못한 상상으로 시적 국면(정황)을 풀어나가면 개성적인 시로 인정받는다. 세 번째는 섬세함이다. 섬세함은 섬세한 관찰, 섬세한 사유, 섬세한 표현을 모두 포함한다. 섬세함이 특별히 많은 등단자는 등단 이후에도 좋은 시를 쓸 확률이 높기 때문에 심사위원에게 특히 더 신뢰감을 준다.
정현우 시인의 「면(面)」은 우선 섬세한 접근 방법이 눈에 뜨인다. 시를 쓸 때 크고 대단한 것을 끌어와서 메시지를 담아내려고 하는 시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것 같고, 시적 대상으로부터 한발 물러나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작고 단순한데 나만의 시적 의미를 담을 수 있는 부분을 가지고 시를 써야 섬세함과 나만의 결을 확보할 수 있다. 「면(面)」은 그러한 측면에서 뛰어난 작품이다. 세상의 모든 대상에는 면이 있다. 정현우는 그 면을 섬세하게 집요하게 탐구해서 면이 가진 본질성과 근원성을 탁월하게 그려냈다. ‘금 간 천장’ ‘세숫대야’ ‘층층’ ‘담쟁이’ ‘발바닥’ ‘임대 희망아파트 창과 창’ 과 같은 사물이나 현상 속의 담긴 면의 특징과 더불어 ‘아래층 사람’ ‘우리’ 같은 인간들에게 담긴 면의 속성까지 섬세한 사유를 바탕으로 다각도로 탐구했다. 상황에 따라 다른 면의 상대성 혹은 고유성, 겉과 속이 다른 면의 양면성, 면의 중첩성, 면의 인접성 등이 새로운 시선으로 읽히는 작품이다.(하린 시인)
하린
2008년 《시인 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서민생존헌장』, 『1초 동안의 긴 고백』이 있고, 연구서 『정진규 산문시 연구』와 시 창작 안내서 『시클』과 창작 제안서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와 『이것만 알면 당신도 현대 시조를 쓸 수 있다』가 있음. 청마문학상 신인상(2011), 송수권시문학상 우수상(2015), 한국해양문학상 대상(2016),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2020) 수상.
하린 시인의 〈감동과 감탄〉 4 _ 정현우의 「면(面)」 < 포엠포커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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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간 이현승 아픈 사람을 빨리 알아보는 건 아픈 사람, 호되게 아파 본 사람이다. 한 사나흘 누웠다가 일어나니 세상의 반은 아픈 사람, 안 아픈 사람이 없다. 정작 아픈 사람은 한 손으로 링거 들고 다른 손으로는 바지춤을 잡고 절뚝절뚝 화장실로 발을 끄는데 화장실 밖 복도엔 다녀온 건지 기다리는 건지 그 사람도 눈꺼풀이 무겁다. 방금 누고 온 오줌과 색이 똑같은 샛노란 링거액들은 대롱대롱 흔들리고 통증과 피로의 색이 저렇듯 누렇겠지 싶은데 몽롱한 눈으로 링거병을 보고 있자니 위로받아야 할 사람이 위로도 잘한다는 생각. 링거병이 따뜻하게도 보이는 것 같다. — 《현대시학》 2013년 3월호. --------------------------------------------------- 단적으로 말해 좋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