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약속 / 박미숙
남심샘이 카톡을 보내왔다. ‘은행나무 물들었어요.’ ‘그렇군요. 우리 만나야겠네요.’
8년 전, 처음 알게 되면서 자주 가던 카페 창가에는 아주 큰 은행나무가 있었다. 건물보다 더 키가 크다. 잎이 노랗게 물들면 카페 안에서도, 3층의 야외에서도 풍경이 참 아름다웠다. 그 이듬해, 그녀는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야 해서,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 때마다 여기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2주 전에 그의 시골집에 가서 배추를 솎고, 상추도 뜯어 왔건만,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었으니 또 만나야지.
좋은 사람과 만날 일이 생기면 며칠 전부터 마음이 설렌다. 남편과 술 한 잔씩 하는 남심샘 주려고 쓸개주(장어의 쓸개즙을 소주에 넣은 것)를 한 병 챙겼다. 보자기 공예 배운 실력을 발휘하여 천으로 머리 땋은 것처럼 예쁘게 포장하고 뽁뽁이로 둘러 쌌다. 비닐을 풀고 나서 웃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카페의 은행나무는 올해도 여전히 멋지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불빛을 받아 더욱 아름답다. 이리저리 자세를 취하며 사진을 찍어 서로의 딸들에게 보냈다. '폭설로 휴업한 날에 이렇게 멋진 풍경이라니, 같은 나라 안에서 너무 다르다, 행복한 시간 보내라'며 작은딸이 답해 왔다.
자리에 앉자마자 본인의 목에 둘렀던 분홍색 목도리를 건넨다. 딸이 쓰지 않는다고 버리려고 하길래, 잘라서 두 개로 만들었으니 하나씩 나누자고 한다. 한쪽 끝을 넣어 간편하게 맬 수 있도록 고리를 만들고 그 위에 진주 단추를 세 개 달아 앙증맞았다. 입지 않는 옷에서 뜯어 달았단다. “와, 커플 목도리네요!”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녀는 주위에 친한 이들이 많다. 낮에 통화할 때도 친구와 함께이던데 날 생각하며 만들었다니, 가슴이 뭉클하다.
좋은 사람과의 만남은 힘들었던 시간을 치유해 준다. 따뜻한 위로에 마음이 스르르 녹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함께 살아가는 얘기를 나누며 서로를 이해하고, 같은 기억을 공유하며, 차곡차곡 추억을 쌓아 간다. 남심샘과의 만남이 그렇다. 우리는 작은 변화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마음을 나누며 살아간다.
친하면서도 나와는 다른 그녀에겐 닮고 싶은 모습이 많다. 되지 않는 것을 오래 붙들고 애끓지 않는다. 남편이나 아이들이 자기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다고 고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 그 무엇보다 자신의 건강과 행복을 중요하게 여기며,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에도 주저함이 없다. 요즘은 하체 근력을 키우려고 발레를 배운단다. 내가 힘들어 보일 땐 자기에게 있는 것을 아낌없이 나누고, 온갖 도움을 주려 애쓴다.
내 차에서 듣던 음악이 남심샘 차에서도 들린다.
“오랫동안 같은 풍경을 본 사람들의 눈빛은 닮아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언젠가는 서로 닮아가는 것처럼 오랫동안 같은 시간에 주파수를 맞추고, 같은 음악에 귀 기울인 사람들도 서로 닮았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KBS FM <세상의 모든 음악> 제11집 음반에 있는 구절이다. 닮고 싶은 사람과 같은 음악을 듣고 싶어 녹음하여 줬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약이 된다. 그녀는 내게 어려운 상황도 잘 헤쳐 나가는 모습이 대단해 보인다고 한다. 만날 때마다 믿음이 더 쌓이며, 내일을 향한 힘을 얻는다. 삶의 작은 순간이 특별해지는 이유는, 그 순간을 함께 해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은행나무처럼, 내가 이 작은 행복을 놓치지 않도록 지켜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이 마음의 평안을 주는 진정한 약이리라. 나는 그런 사람과 함께라서 든든하다.
어젯밤, ‘다 완성했어요.’라며 나와 같은 목도리 사진을 보내왔다. 이런, 똑같지 않다. 구멍 네 개의 납작한 단추가 세 개 달렸다. 진주 단추가 부족했던 모양이다. 에고, 또 날 먼저 챙겼구나....
이번 주말 내내 분홍색 목도리를 두르고 다녔다. 카페도, 둘레길도, 도서관도. 이 목도리로 올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남심샘의 손길이 날 항상 감싸고 있으니.
첫댓글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약이 된다.'
그렇게 보약같은 친구가 있어 참 좋으시겠어요.
부럽습니다. 단풍이 드는 은행나무도 너무 멋짐니다.
멋지게 사시네요.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면 만나자는,
따뜻한 목도리를 짜서 건넬 수 있는 그런 친구가 옆에 있어서 좋으시겠네요.
진짜 보약이 따로 없네요. 하하
우와! 멋진 사진까지!
역시 동네작가님!
남심 선생님이 건넨 분홍색 목도리만큼이나 따뜻한 글이네요.
첫눈이 아니라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면 만나자는 약속, 두 분 마음이 예쁩니다.
황금빛 은행나무 노거수 될 때까지 두 분의 우정을 응원합니다.
은행잎이 곱게 물든 가을, 아주 멋진 날을 보내셨네요. "좋은 사람과 만날 일이 생기면 며칠 전부터 마음이 설렌다." 제목같이 따뜻한 글이네요. 고맙습니다.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선생님 마음이 글에도 잘 보이네요. 선생님 표정까지 그려지는 글입니다.
장소도 궁금합니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