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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425
6월13일 ?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연중 제10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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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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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xxgYcHTjy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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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선거 때만 되면 어김없이 나타나 기상천외하면서도 허무맹랑한 공약들을 남발해서 빅웃음을 선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한 재미있는 후보는 입만 열만 ‘억억!’입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생계 지원금 1억! 결혼 자금 1억! 주택 자금 2억! 참전 용사 5억! 거기에다 유엔 본부 판문점 이전!
하나 하나 따지고 보니 그 후보자가 당선되면 나라 곳간이 금새 바닥이 날것이 백퍼센트 확실시되더군요. 뒷감당 못할 헛공약들 앞에 사람들은 헛웃음만 터트렸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이스라엘에도 거짓 예언자들의 헛 공약들이 남발했습니다. 나만 믿고 조금만 기다리면 로마 식민 통치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겠다.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하고도 드넓은 토지를 무상으로 나눠주겠다. 예루살렘은 온 세상의 중심이 되게 할 것이며, 뽑힌 백성 유다인들의 곳간은 곡식으로 흘러넘치도록 해주겠다.
돌아보니 저 역시 무수한 헛 공약들을 남발했습니다. 하나 하나 따져보니 부끄러워 얼굴을 들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마음 속으로 자주 다짐을 합니다.
‘헛된 공약 남발하지 말고 그저 주어진 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정답이다!’
그런 사람들 있습니다. “저 엉뚱한 프로젝트 저거 자네가 기획한거지?”하고 물었을때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하늘을 두고 맹세컨데, 그거 제가 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제가 했다면 손에 장이라도 지지겠습니다.”
안했으면 그냥 아니라고 이야기하면 좋을텐데,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의 말을 믿게 하려고 하늘, 땅, 하느님까지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소한 일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존귀하신 하느님까지 증인으로 내세우는 자들 앞에 크게 노여워 하시며, 솔직하고 단순하게 처신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허세와 교만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허무맹랑한 거짓 맹세를 아예 하지 말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아예 맹세하지 마라. 너희는 말할 때에,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오 복음 5장 34~37절)
사실 유다인들은 하느님에 대한 지극한 경외심으로 인해 그분의 이름조차 입에 올리는 것을 꺼려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두고 맹세한다는 표현 대신 하늘, 땅, 예루살렘, 머리를 두고 맹세했습니다.
사실 하늘, 땅, 예루살렘 등은 하느님을 지칭하는 우회적이 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고 그분께서 땅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신다는 믿음 때문에 하느님 대신 하늘, 땅을 두고 맹세했던 것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그들의 전매특허인 ‘맹세’를 밥먹듯이 되풀이하는 와중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절대 진실’을 요구하셨습니다. 그 결과 절대로 맹세를 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맹세는 대체로 불신 사회에서 성행하는 어법입니다. 누군가가 말을 하면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의 말을 제발 믿어달라는 의도에서 맹세를 내세웠습니다.
유다인들은 맹세를 즐겼는데, 맹세를 할 때 성전이나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구속력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대신 성전의 금(금촛대, 금속죄판, 금화)이나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유효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관심이 많은 사이비 지도자라는 것을 만천하에 공개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한 신앙인,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맹세’라는 극단적인 도구의 통용보다는, 상호간에 자주 오고가는 신뢰와 우애, 나눔과 소통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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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자기를 믿는다는 말과 자기를 합리화한다는 말은 동의어다>
(유튜브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EIYpwCFhy6g
사람은 살아가면서 누구를 가장 믿고 신뢰해야 할까요? 어떤 이들은 결국, 믿을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제가 ‘자기 자신을 절대 믿으면 안 된다’고 말하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봅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자기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겠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이 결국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길임을 우리는 잘 알지는 못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은 절대로 자신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맹세는 자기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을 때 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도 말씀하십니다. 네가 머리카락 하나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는데 어떻게 그런 능력으로 자기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말씀이십니다.
물론 하늘이나 땅, 그리고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 자리는 하느님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확신은 하느님만 할 수 있는 부분이지 인간이 할 것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옳으신 분은 하느님밖에 없으니 하느님께 신뢰해야지 자기 자신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신뢰하면서 동시에 하느님을 믿을 수는 없을까요?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신뢰의 정도는 한정되어 있고 내가 그 신뢰를 나 자신에게 주는 만큼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제 생각을 지나치게 믿음으로써 결국 진리를 보지 못하여 되돌이킬 수 없는 삶을 살기도 합니다.
영화 ‘기억의 밤’은 자기 자신만을 굳게 믿는 두 형제의 이야기입니다. 재수생인 동생과 모든 것에 완벽한 형은 우애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새로 이사 온 집에서 형은 조금씩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형이 조금씩 형처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부모도 조금 이상합니다. 친부모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는 가족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집을 빠져나와 경찰서로 도망칩니다. 가족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경찰서에서 신원조사를 해 보고 거울을 보니 자신은 20대 초반의 재수생이 아니라 이미 40이 넘은 아저씨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형이 꾸민 일이었습니다. 형은 사실 20대 초반입니다.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범인을 찾다가 결국 찾아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범인은 기억상실증에 걸려 자신의 범행을 기억해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최면을 걸어 모든 것을 20년 전으로 돌려놓고 그 범인이 모든 것을 기억해 낼 수 있도록 꾸몄습니다. 이 과정에서 범인은 조금씩 기억을 찾게 되었던 것이고 결국 자신이 함께 살던 이들이 자신의 가족이 아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결과는 어떨까요? 자신은 착한 재수생이기에 범인이 아니라고 굳게 믿었던 동생은 모든 것을 깨닫고 자살합니다. 범임을 찾아 원수를 갚으면 속이 후련할 것이라 믿어 고생 끝에 범인의 기억을 되살려주기는 했지만 결국 남는 것이 없음을 깨닫고 형도 자살합니다. 이렇게 영화는 허무하게 끝납니다. 그들의 착각이 처음부터 이 결말로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런 예화를 일반화의 오류라고 말씀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한 영화를 너무 모든 것에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 때는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잘 살았다고 굳게 믿으며 살아온 이들은 악한 삶을 살아왔음을 알게 될 것이고, 끊임없이 죄인이기에 주님의 자비만 청하며 살았던 이들은 선한 삶을 살았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성인이라고 굳게 믿었고, 김수환 주기경은 돌아가시기 직전 하느님의 자비를 청해 달라고 신자들에게 부탁했습니다.
믿음도 하나의 에너지입니다. 우리가 힘을 한쪽에 쓰면 다른 쪽에 쓸 힘은 그만큼 줄어듭니다. 자기 자신과 주님도 그렇게 대치됩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으면 당신을 따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에 신뢰를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참 나’는 ‘내가 믿는 나’가 아니라 내가 믿는 나를 믿을 것인지, ‘나는 나다’라는 주님을 믿을 것인지 결정하는 ‘나’입니다. 이렇듯 ‘참 나’와 ‘자아’, 그리고 ‘주님’이 구별될 때 비로소 자아에만 신뢰를 주던 것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내가 나와 주님 사이에서 나의 신뢰를 어느 쪽에 줄 수 있는지 정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에는 주님을 믿어도 결국 자아가 만들어낸 우상을 믿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100%의 신뢰를 자아에게 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켈리 맥고니걸’의 「움직임의 힘」이란 책에 헤펠이란 운동을 아주 싫어했던 한 여인의 사례가 나옵니다. 그녀는 여자는 달리기하면 안 된다는 철저한 믿음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50년 동안 뚱뚱하게 살아온 자신을 합리화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라고 왜 하면 안 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믿음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엔 마라톤을 완주하게 됩니다. 건강해진 것은 이루 말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믿으며 크고 작은 이러한 착각 속에서 자기 합리화를 하며 삽니다. 여기에 빠지지 않으려면 나 자신을 믿는 나의 믿음에 의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한 번쯤은 믿고 실천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나의 신뢰는 나 자신에게서 조금씩 주님께로 옮겨가게 되고 그만큼 하느님 자녀의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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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33-37 : 맹세하지 말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거짓 맹세를 하지 말 것이며, 맹세를 하면 꼭 지켜야 한다는 말씀을 심화하여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필요한 “참 말”만 하라고 하신다.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은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기만 하면 된다.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참 진실이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는 거짓증언을 막기 위해 맹세 의식을 세워, 거짓 맹세를 하면 벌이 따른다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신앙은 맹세가 아예 필요가 없게 한다. 신앙은 실제로 우리의 삶의 태도를 확립하기 때문이다. 믿음의 단순함 속에는 맹세의식 자체가 필요 없다. 그들에게는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말과 행동은 언제나 참되다.
예수께서는 모든 맹세를 거부하신다. 하늘과 땅 그리고 예루살렘은 하느님께 관계되는 것 뿐 아니라, 그 맹세 자체가 실제상의 허위를 가리려는 보장 수단으로 삼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쓸데없는 맹세를 하여 하느님을 욕되게 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맹세를 자주 하는 사람은 때때로 거짓 맹세를 하게 된다.
주님께서는 하늘이나 땅을 두고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피조물을 피조물 이상의 영광을 지닌 것으로 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즉 피조물을 하느님으로 높이지 말라는 것이다. 맹세하는 사람들은 “자기보다 높은 이를 두고 맹세합니다.”(히브 6,16) 주님은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는 것을 금하시며,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36절)고 하신다.
지상의 예루살렘은 저 위에 있는 하늘의 예루살렘의 예형이며(갈라 4,26) 위대한 임금님의 도성, 즉 영적 천상교회인, ‘그리스도의 몸’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또 머리를 두고 맹세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모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1코린 11,3)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을 두고 맹세하는 사람은 이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분을 끌어다 대는 것이다. 자기 머리를 두고 맹세하는 것은 자기를 섬기는 것이 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을 두고 하는 맹세가 허위의 수단이 아니라고 해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러기에 진실한 사람으로서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요.”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며 쓸데없이 맹세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절대 진실”을 말하게 되는 것일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적어도 진실한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며, 이것이 진정 하느님의 참다운 자녀가 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진짜, 정말”의 의미는 가끔 자기변명이나 남의 흉으로 흐를 수 있는 말이다. 우리의 삶은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의 영적인 성장에 도움이 되는 말을 많이 하도록 하여야 한다. 주님 안에 형제자매인 우리는 진리를 찾아 사는 사람들로서 하느님과 이웃 앞에 진실로, 진리로 자유로운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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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를 위축시키는 듯합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이성을 보며 성적인 매력을 느끼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오늘날은 이런 생각이 극단적으로 치우쳐서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성에게 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말씀은 애당초 이런 인간의 기본적인 성욕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서는 지킬 수 없는 것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핵심은 “음욕을 품고”라는 표현입니다. 또한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음욕이 아니라 ‘사랑’을 품고 이성을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음욕을 품고 바라보는 것은 그 사람의 외적인 매력에만 시선을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품고 바라보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에 담겨 있는 고민, 어려움, 슬픔, 아픔, 어둠에도 시선을 두는 것입니다. 음욕을 품고 바라보는 것은 그 사람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사랑을 품고 바라보는 것은 그 사람이 더욱 그 사람답게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음욕을 품고 바라보는 것은 그 사람의 일부만을 받아들이는 태도이지만, 사랑을 품고 바라보는 것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음욕을 품고 누군가를 바라본다면 그 사람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품고 바라보면 그를 향한 음욕이 그의 삶을 무너지게 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기도에 관한 가르침 가운데 ‘관상 기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떠한 생각에도 치우치지 않고 그저 하느님만을 직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웃들을 관상합시다. 사랑의 눈길로 그 사람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바라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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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린 시절의 기억입니다. 가끔 동네에 ‘뻥튀기 아저씨’가 왔습니다. 옥수수, 쌀, 보리를 가져다 주면 기계에 놓고 한참을 돌립니다. 그리고 아저씨가 큰 소리로 ‘뻥이요’라고 말하면 아이들은 귀를 막고 보았습니다. 아저씨가 막대로 돌아가던 통을 열면 큰 주머니로 강냉이가 들어가고, 쌀 과자가 들어가고, 보리과자가 들어갔습니다. 고소하고 달달했던 뻥 과자를 먹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중학생 때의 기억입니다. 공부를 그다지 잘 못했습니다. 그런 제게 동기부여를 해 주신 분이 있습니다. 10등 안에 들면 ‘자전거’를 사 준다고 하셨습니다. 뒤에서 맴돌던 제가 10등 안에 든다는 것은 땅에서 물고기를 잡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전거는 가지고 싶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했고, 마침내 9등을 했습니다. 그때의 기분은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얻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나도 할 수 있다. 나도 하면 된다.’라는 자신감입니다.
제가 살면서 나름대로 세운 원칙이 있습니다. 100원 짜리를 95원에 사면 그런대로 잘 한 것입니다. 105원에 사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100원 짜리를 50원에 산다고 하면 그것은 분명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물건에 문제가 있거나, 사기를 당할 확률이 높습니다. 100원 짜리를 150원에 산다고 하면 그것도 분명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시세를 알아보지 않고, 성급하게 결정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수조원대의 사기로 물의를 일으킨 투자증권회사가 있었습니다. 높은 수익률을 보장한다고 하였고, 사람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몰려들었습니다. 높은 수익률은 당연히 원금의 손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원금의 보장이 안 될 수 있음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당장 눈앞의 높은 수익에 눈이 멀어 덥석 큰돈을 투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을 속이는 사람은 당연히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속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도 있습니다.
오늘 엘리사는 12마리의 겨릿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소가 12마리 있다는 것은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12마리의 겨릿소를 가지고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엄청난 땅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만났고, 이제 겨릿소를 모두 포기합니다. 재산과 땅을 모두 포기하고 엘리야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엘리사는 분명 엘리야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바알의 예언자들을 물리친 이야기, 아합 왕의 잘못을 올바르게 지적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엘리사에게 이제 재산과 땅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 더 가치 있고, 더 보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도 작은 형제회 수도회를 선택했습니다. 작은 형제회 수도회는 아프리카로 선교를 갔었고, 안토니오 성인은 아프리카로 선교를 가는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의 선택은 기준이 있습니다. 재물, 성공, 권력, 명예가 기준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에서는 그것들이 많은 것들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직장에서 좋은 성과를 내는 것도,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는 것도 좋은 보상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선택들이 모여서 지금의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원하는 곳으로 휴가를 갈 수 있고, 좋은 집을 살 수 있고, 먹고 싶은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좋은 공연을 마음껏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기준은 믿음, 희망, 사랑입니다. 오늘 엘리사가 선택했던 것처럼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꺼이 좋은 직장을 포기 할 수 있고, 아프리카로의 선교를 떠나기도 합니다. 그분들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 행복, 기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렇게 이야기 하셨습니다. ‘강론자는 자신이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그리고 언제나 그분의 사랑이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아름다움을 마주하면서 강론자는 자신의 삶이 그 아름다움에 대한 충분한 찬미가 되지 못한다고 자주 느껴서 그토록 위대한 사랑에 더욱 충실하게 응답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마음을 열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내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말씀이 자신의 삶에 와 닿지 못하게 한다면, 그 말씀이 자신을 반성하도록 이끌지 못한다면, 그 말씀이 자신에게 권고가 되지 않는다면, 그 말씀이 자신을 흔들어 놓지 않는다면, 그 말씀과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내지 않는다면, 그는 분명히 거짓 예언자, 사기꾼, 협잡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151항)
교황님의 말씀을 떠올리면서 오늘 복음 묵상을 하니 명확하게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따르는 것이 제자의 길입니다. 자신의 욕심과 자신의 뜻을 먼저 찾으려는 것은 사기꾼의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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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말없이>
마태오 5,33-37 (정직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말없이>
꽃은
다만 핌으로써
꽃임을 드러냅니다
물은
다만 흐름으로써
물임을 드러냅니다
산은
다만 솟음으로써
산임을 드러냅니다
비는
다만 내림으로써
비임을 드러냅니다
구름은
다만 낢으로써
구름임을 드러냅니다
바람은
다만 붊으로써
바람임을 드러냅니다
해는
다만 비춤으로써
해임을 드러냅니다
땅은
다만 받침으로써
땅임을 드러냅니다
하늘은
다만 감쌈으로써
하늘임을 드러냅니다
사람은
오직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닮은
사람임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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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준한 빈첸시오 신부님]
우리가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 참 많은 기도를 드립니다. 기도 중에는 교회가 공식적인 기도문을 만들어 드리는 기도, 특별히 가톨릭 기도서에 나오는 기도들, 또 우리가 제일 사랑하는 묵주기도 등 많은 기도방식의 도움을 받아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한번씩 신자들의 모임을 가지고 시작과 마침에 자유기도를 드리라고 하면 잘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하도 정해진 기도문에 따라 기도를 하던 버릇이 들어놔서 스스로 묵상하며 기도하는 방법을 익히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체조배를 드려도 무언가 끊임없이 기도를 드려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시는 분들도 가끔 있는 듯도 합니다.
그저 자신의 생활을 되돌아보며 반성하고 또 주님의 말씀을 듣는 기도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면에서 먼저 저 자신의 지난날을 반성해봅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말씀에 비추어 맹세하지 마라는 말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한 말씀을 얼마나 잘 지켰는지 되돌아봅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맹세나 약속을 했다가 낭패를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물론 그 맹세나 약속은 그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 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의욕이 앞서서 정말 무언가를 하고 싶은 욕심이 앞서서 맹세를 하였습니다. 또 때로는 내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맹세를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솔직히 나 자신조차도 장담할 수 없으면서 분위기상 그렇게 하겠다고 형식적으로 맹세 아닌 맹세를 한 적도 있습니다.
물론 맹세와 약속은 좀 서로 틀린 점이 있지만 약속의 경우에도 제가 지금까지 했던 맹세의 경우와 별로 다르지 않은 형식적인 태도를 보이곤 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예와 아니요를 그렇게 확연하게 구분하신 이유는 더 이상 핑계대지 마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맹세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는 것은 거의 대부분 나의 말이 오해받는 상황일 것입니다.
내 말이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 말의 진실성을 드러내기 위해 간구하는 마지막 수단이 바로 맹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 누군가를 설득하고자 할 때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맹세의 순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왠지 비장하고 진지하고 자신의 온 존재를 던지는 듯한 이 맹세는 참으로 힘이 있고 또 매력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저 예 할 것은 예라고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참 맥이 빠지는 말씀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의 이 말씀이 결국 진실되라는 말씀으로 느껴집니다. 누구의 오해를 받든 안받든, 혹은 나 자신의 잘못을 숨기기 위해 무언가 자꾸 말을 만들어내고 변명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자기 자신을 방어하지 말고 무장해제하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라는 초대의 말씀만 같습니다.
마치 예수님 당신께서 두 팔을 벌려 온 몸을 드러내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처럼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 맡기는 것이 바로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 하는 말씀의 숨은 뜻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맹세한다는 것은 오해받기 싫은 욕심, 자신의 잘못된 점을 드러내기 싫은 자존심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제일 먼저 무화과 나뭇잎으로 부끄러운 부분을 가린 것처럼 맹세한다는 것은 나의 죄를 가리고 싶은 원초적인 욕망인지도 모릅니다.
그 어떤 잘못이 나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나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고 나는 절대 잘못한 것이 없다는 자기변명이 때로는 맹세의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생각합니다. 죄를 짓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이미 지은 죄를 숨기는 것이 더 나쁘다고요. 만약 저녁 무렵 산들바람이 불 때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찾으셨을 때 그들이 하느님 앞에 달려와 그들의 죄를 먼저 아뢰고 용서를 청했다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와 아니요라는 말은 별 차이가 없습니다. 예라고 할 때도 있을 것이고 아니요라고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솔직하라는 것입니다.
잘 한 것이면 예라고 대답할 것이고, 내 자신이 잘못한 것에는 아니요라고 대답하는 것이 맞습니다. 다만 자기 자신을 숨기지 않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한 주간을 반성하면서 이처럼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돌아보고 주님 앞에 온전히 드러낼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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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김선오 보나벤뚜라 신부님]
<하느님과의 약속>
오늘 독서에 나오는 엘리사가 스승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나서 했던 행동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작별인사를 한 뒤에 선생님을 따라가게 해주십시오”(1열왕 19,20)라고 말하고 나서 그는 자신의 겨릿소들을 잡아서 먼저 하느님께 ‘서원’을 합니다.
그러고는 ‘쟁기’를 부수어 장작으로 쓰고 겨릿소들을 모두 고기로 구워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서 본인의 의지를 새롭게 합니다.
엘리사는 ‘하느님께 서원’을 하고 나서 실제로 그 서원을 행동으로 드러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쟁기도, 겨릿소도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는 대단한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맹세하지 마라’라는 말씀을 네 번이나 반복하십니다. 그것은 혹시 ‘말로만’ 떠들고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요?
말잔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조용하지만 단호한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 하느님께서 더 바라시는 것이 아닐까요?
엘리사의 삶의 결단은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줍니다. 저는 하느님께 온 존재를 봉헌하겠노라고 수도자로서 서원을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약속이 ‘말잔치’로 끝나지 않도록 오늘 하루를 돌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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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상일 요셉 신부님]
사람은 저마다의 삶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각오를 맹세하기도 합니다.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이웃에 맹세하는 행위들은 어떻게든 목표를 이루려는 인간의 원의라고 보아집니다.
그러나 실상 이 원의들이 제대로 되지 않기가 쉽습니다. 자신의 의지가 자신의 원의를 채울 만큼 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맹세를 한다고 할 때에 맹세는 우리의 힘으로 지킬 수 있을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다고 생각됩니다.
맹세는 자신이 진실로 여기는 것을 말하고 확실성을 가지고 맹세해야 하며 맹세로 약속한 것은 반드시 이행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맹세와 관련해서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에 있어서 우리 자신이 자신의 힘을 믿지 말라는 말씀으로 여겨집니다. 그것은 자칫 하느님의 이끄심을 간과하고 자신의 힘을 믿는 쪽으로 빠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간의 의지가 자신이 맹세한 바를 실천할 수 있을 만큼 늘 충만하지도 못합니다. 더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이 참으로 하느님께서 지니고 계시는 진실과 같다는 보장도 할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인식도 의지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빛을 향하지 못하면 자신만의 인식으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인식은 사람과 세상을 존재하게 하신 하느님을 향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즉,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자신에 대해 말한다고 할 때에도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실제 자신의 모습을 잘 알고 말한다기보다는, 왜곡된 자기에 대한 인식을 자신의 본모습으로 착각하고 말하기 쉽습니다.
결국 자신에 대한 진실을 말하려고 할 때조차도 참자신이 아닌 곧, 부족한 인식이 이해한 자신을 드러내고야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는 이런 인식의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인식으로 변화되어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자신을 두고도 아예 맹세하지마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부족함을 잘 알고 계시고 채워주시기를 바라십니다. 우리 자신이 부족한데도 스스로의 의지를 믿고 잘못된 길을 가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맹세를 통하여 자신의 의지가 드러나기보다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우리의 구원여정에 있어 나를 믿기보다 더 하느님을 신뢰하라는 말씀이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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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평생 죽자 살자 일만 했던 어느 형제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 자신은 늘 일에만 매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퇴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모아둔 돈도 있고 시간도 많으니, 여생은 행복하게 가족과 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퇴직 후에 자기 생각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남편, 아버지의 권위는 하나도 없는 것 같고,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기만 했습니다.
늘 꿈꿔왔던 가족이 함께 모여 거실에서 과일을 먹으며 화목한 모습으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전혀 생기지 않았습니다. 왜 이렇게 다들 바쁜지 가족이 함께 여행을 가는 시간도 없었습니다. 자연스럽게 혼자 있는 시간만 많아졌고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결국, 이 형제님은 다시 일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평생 일만 해야 할 팔자라면서 말이지요.
이 형제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퇴직 전까지 가족이 화목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시간이 많아지면 저절로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을까요? 가난해도 화목하며 서로에 대해 사랑을 주고받는 가정과 부유하지만 서로 불목하며 사는 가정 중에 누가 더 행복할 지는 굳이 질문하지 않아도 아실 것입니다.
사랑이 늘 먼저였고, 사랑이 진리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은 늘 나중이고, ‘사랑이 밥 먹여주느냐?!’면서 거짓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행복으로 이끌어주는 것은 늘 사랑의 마음에서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거짓 맹세는 참으로 자주 이루어집니다. 물론 거짓이라고 하기도 뭐합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랑도 나중에, 봉사도 나중에, 믿음도 나중에, 희생도 나중에……. 늘 언제나 나중입니다. 그러나 그 나중에 오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결국, 나의 맹세는 거짓이 되고 맙니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라는 말씀은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할 사랑임을 분명하게 합니다. ‘나중에’에 포함되는 맹세가 아니라 ‘지금’ 시작되는 맹세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중에’ 이루어질 맹세는 우리를 후회의 길로 이끌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루어지는 맹세는 우리를 행복의 길로 이끌어줍니다. 자신이 하는 사랑의 맹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늘 뒤로 미루는 사랑이 아닌, 지금 실천하는 사랑,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따라 이웃들에게 기쁘게 전할 수 있는 우리가 되었을 때, 하느님 나라가 멀리에 있지 않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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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너 커서 뭐가 되고 싶어?”
어렸을 때 참 많이 들었던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다 보면, 되고 싶었던 모습이 많았습니다.
야구선수, 탁구선수, 과학자, 수학자, 선생님, 그리고 신부님도 있었습니다. 모두 되고 싶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현재 사제로 살고 있습니다.
꿈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즉, 어떤 꿈이냐가 중요합니다. 저의 경우, 단순히 신부가 되는 일회적 꿈이 아니라, 어떤 신부가 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꿈이 없다고 합니다. 10대에는 공부하느라, 20대에는 스펙을 쌓느라, 30대에는 취업하고 경력을 쌓느라, 40대에는 가족을 부양하느라 꿈을 꾸고 그 꿈을 구체화하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 그저 지금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벅차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늘 ‘나중에’를 외칩니다.
꿈을 꾸기 힘들 정도로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나를 위해 꿈을 꾸어야 하지 않을까요? 새롭게 태어날 어떤 나를 만들어야 합니다.
나의 꿈을 만들고 그 꿈을 구체화하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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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되고 지혜로운 삶>
-진실과 겸손-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언제들어도 감미로운 오늘 새벽 독서기도 시편(136,1-26) 계속된 후렴입니다. 이어지는 아침 시편기도의 고백도 감미로웠습니다.
“좋으니이다 지존하신 님이여, 주님을 기려높임이,
그이름 노래함이 좋으니이다.
아침에는 당신의 사랑, 밤이면 당신의 진실을 알림이 좋으니이다
주님, 하신 일로 날 기쁘게 하시니, 손수 하신 일들이 내 즐거움이니이다
주님, 하신 일들이 얼마나 크옵시며, 생각하심 얼마나 깊으시니이까.”(시편92,2-3.5-6)
이런 좋으시고 자비하신 주님을 사랑함이 참삶의 열쇠입니다. 주님을 사랑할수록 주님을 닮아 참되고 지혜로운 삶에, 진실과 온유의 삶입니다.어제 어느 자매로부터 받은 카톡 메시지입니다.
“오늘 새벽에 잠이 깨었는데 느닷없이 ‘하느님이 다 알고 계시는데 왜 기도해야 하지?’ 생각이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신부님이 작년에 보내 주신 7.28일자 ‘기도와 삶’ 이란 제목의 강론이 생각나서 바로 열어 보았습니다. ‘하느님은 다 알고 계시는데 무슨 기도가 필요합니까? 우리가 아쉬워서 기도하는 겁니다’ 읽는 순간 저절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마치 저의 생각을 알고 답해 준 것 같았어요.”
읽으며 다시 공감했습니다. 바로 우리가 아쉬워서 필요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전혀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참으로 기도할수록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아감으로 무지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지혜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기도할수록 필요한 것이 뭣인지 알게 되고 참 나를 알게 됩니다. 그러니 내가 아쉬워서 필요해서 하는 기도요 바로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입니다.
어제 읽은 기사 내용도 소개합니다. ‘독일의 행동경제학 연구 집단 브리크 연구소의 최근 조사 연구가 꽤 흥미롭다. 78개국 샘플중 한국은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상대방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긍정적 호혜성’은 55위를, 반면 상대방이 자신에게 피해를 입힌 상황에서 이의 처벌 욕구가 강한 ‘부정적 호혜성’은 2위를 기록했다. 한 해 연구기관의 결과가 참조 이상의 의미는 없겠으나 적어도 우리 사회가 대단히 초개인주의적으로 바뀌었고 시민들 사이 공생의 관계 밀도가 크게 악화된 상태란 해석은 해볼수 있겠다.‘
몰라서 무지로 인한 불평이요 원망이지 참으로 깨달아 안다면 하느님과 이웃에 감사요, 긍정적 호혜성 높은 삶일 것입니다. 말그대로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하여 참되고 지혜로운 삶이 우리 삶의 우선적 목표가 됩니다.
옛 사막 수도자들이 사막의 고독과 침묵을 찾았던 까닭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였고 ‘참으로 잘 살기 위해서’ 였습니다. 참 나를 살 때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매일 수도자가 누구인지 묻는 자가, 왜 내가 수도원에 왔는가 묻는 자가 수도자라 했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것과 참 나를 찾는 것은 동전의 양면같습니다. 하느님을 찾아 알아갈수록 참 나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삼 성소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함으로 참으로 나를 알아 살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부질없는 가정의 질문이지만 주님의 부르심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낼런지요. 새삼 주님은 우리의 운명이요 사랑임을, 우리 삶의 모두임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열왕기 상권의 엘리사의 성소를 통해서 우리 성소를 되돌아 보게 됩니다.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던 엘리사 곁을 지나가면서 엘리아가 겉옷을 그에게 걸쳐 주자 즉각 따라나서는 엘리사입니다. 참으로 극적인 엘리사의 성소요, 운명적 만남입니다. 마지막 대목이 인상적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떠나 돌아가서 겨릿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쟁기를 부수어 그것으로 고기를 구운 다음 사람들에게 주어서 먹게 하였다. 그런 다음 일어나 엘리야를 따라 나서서 그의 시중을 들었다.’
과거와의 철저한 결별입니다. 엘리아를 만남으로 무지와 무의미의 삶에서 벗어나 참 삶의 길을 찾은 엘리사입니다. 엘리사가 엘리아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평생 겨릿소를 부리며 단조롭고 무의미한 일상의 삶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엘리사의 즉각적인 응답을 보면 그의 내면은 하느님을 찾는 열정으로 가득했음을 봅니다.
이제 엘리사에게는 엘리야를 따라 하느님만을 찾는 늘 새로운 시작의 삶이 있을 뿐입니다. 엘리사뿐 아니라 우리 역시 한 번의 부르심과 따름이 아니라 매일 평생, 새롭게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따르는 삶만이 있을 뿐입니다. 바로 참되고 지혜로운 삶입니다. 바로 이의 전형적 모범이 오늘 기념하는 그 유명한 전설적인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입니다.
성인의 생몰연대를 보니 만 36세의 불꽃같은 참 치열한 삶이었습니다. 비교해 보니 저는 성인의 거의 배를 살고 있습니다. 더욱 우리를 분발케 하는 성인입니다. 아우구수티노 참사회원이었지만 아프리카 모로코의 선교 열망에 작은 형제회로 옮겼다가 여정중 파선되어 시칠리아 섬에 머물렀다 이태리의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안내됩니다. 1224년 프란치스코 성인은 회원들의 교육을 안토니오에게 위임합니다.
성인은 탁월한 설교와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유명하였으며, 당대에 그를 능가할 만한 설교가는 나오기 힘들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성인은 이례적으로 선종후 다음해 성인을 ‘신약의 방주’라 칭찬한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1946년 교황 비오 12세로부터 교회학자로 선언되었습니다. 안토니오는 흔히 젊은 프란치스코회 수도자의 모습으로 그려지며, 특히 잃어 버린 사람이나 물건을 찾는 사람들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파도바의 안토니오뿐 아니라 우리 가톨릭 교회는 무수한 성인들로 가득한 살아있는 보물창고라 할 수 있습니다. 밤하늘에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처럼 교회 하늘에 찬연히 빛나고 있는 성인들은 가톨릭 교회의 자랑입니다. 참되고 지혜로운 삶을 살았던 성인들은 우리 삶의 지표가 됩니다. 얼마나 많이 살았느냐의 삶의 양이 아닌 어떻게 살았느냐의 삶의 질이 성덕을 가늠하는 잣대가 됩니다. 성인 축일은 성인을 기억하고 기념할 뿐 아니라 각자 성인이 되라고 부단히 우리를 분발케 합니다.
성인들의 공통점은 진실과 겸손입니다. 이 또한 하느님을 사랑한 사랑의 열매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따를수록 주님을 닮아 진실과 겸손의 열매입니다. 진실과 겸손의 사람이 바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은 맹세하지 마라는 가르침입니다. 참으로 정직하라는, 진실하고 겸손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모르고 자기를 모르는 무지로 인해 맹세이지 정말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진실과 겸손의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절대로 맹세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 다음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실행할 것입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잘 말하기는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요. 참 말을 위해, 또 말로서 죄짓지 않기 위해 강조하는 침묵입니다. 남의 말만 하지 않아도,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따라 닮아갈수록 진실과 겸손의 참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진실과 겸손의 사람이 되어 참되고 지혜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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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라>
언젠가 피정 지도 신부께서 기도에 관해 도움을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자연법칙을 위반하지 않으시는 가운데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할 때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섭리에 우리의 참여를 원하시지만 자연법칙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나의 중요한 일을 나누는 것이고 나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기도는 행복한 삶을 위한 소망의 표현입니다. 때로는 결혼, 독신, 권력, 건강, 명예, 행복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청원기도의 모델을 예수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겟세마니에서 예수님께서는“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14,36)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늘 기도하기 보다는 아쉬운 일이 생기면 간절히 매달립니다. 늘 주님을 대면하고 찬미하며 청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생기면 놀라서 갑자기 기도합니다. 이때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약속을 마구 해댑니다. 청을 들어 주시기만 하면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을 무엇이든 꼭 하겠다고 맹세하며 흥정합니다. 때로는 들어주시지 않으면 안 된다고 협박도 합니다. 그러다가 해결되거나 시간이 지나면 그 맹세를 잊고 전혀 거리낌 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맹세는 지나치고 넘치게 하는 것보다 부족하고 모자라게 하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맹세하지 마라”고 하시며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온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이유로든 군소리를 덧붙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어떤 상황에 접해서 이러 저러한 핑계를 얼마나 많이 댑니까? 나의 입장과 처지에 따라 헛된 약속도 많이 하고 그러다 보니 쉽게 잊어버린 것이 많습니다. 권위 아닌 권위를 내세우며 자기 위신과 체면을 살리느라 하느님의 이름을 판 경우도 있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잇속 때문에 하느님을 얼마나 이용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시며 그분의 약속과 맹세는 변하지 않습니다.(히브6,17-18) 그러나 우리 인간은 너무도 자주 자기도 모르는 약속,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발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봐야 합니다.
‘악’은 ‘악’이고, ‘선’은 ‘선’입니다. 그러므로 악에는 언제나 ‘아니요’, 선에는 언제나 ‘예’할 수 있는 마음을 키웠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꼭 필요한 말만 해야 합니다.’ 겸손하게 우리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인정할 때 헛된 맹세를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행동이 뒤따를 때 입으로 하는 말은 효과가 있습니다……. 입은 다물고 행동으로 말합시다. 우리는 불행히도 말로는 부풀어 있고 행동에는 텅 비어 있습니다.”(파도바의 안또니오) 행동으로 따르지 못할 과장된 약속이나 맹세를 거두고 그저 삶으로 주님의 뜻을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헛된 약속을 하지 않는 오늘을 축복해 주시길 청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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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사람은 모름지기 하느님 앞에서 제 분수를 알아야 한다고 오늘 미사의 말씀은 조곤히 이야기하십니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마태 5,33)
맹세는 사람이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자기보다 위대하고 강한 존재의 명성과 힘을 걸고 스스로를 보증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니 맹세는 자신의 신용 문제를 넘어서, 걸고 맹세한 대상의 위상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말이 쉽다고 손쉽게 아무 맹세나 해서는 안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무엇도 함부로 맹세에 이용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늘, 땅, 예루살렘, 머리"
함부로 맹세해서는 안 되는 또다른 이유는, 사실 인간이 그 어느 것 하나도 제 것인 양, 제가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양 들먹일 권리가 없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의 옥좌인 하늘, 하느님의 발판인 땅, 하느님의 도성인 예루살렘, 하느님의 피조물인 우리 지체 중 한 부분까지 그 어느 것 하나 우리의 권한에 속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당장 위기를 모면하려고 거짓으로 맹세를 하면 안 된다거나, 맹세한 바는 꼭 지키라는 옛 가르침은 사실 맹세를 지킬 힘이 인간 편에 있음을 전제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지요. 맹세한 바는 최선을 다해 지키려 노력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한치 앞도 모르는 인간에게 그마저도 불가능한 순간이 닥칠 때가 없지 않습니다. 인생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해도 굳게 한 약속이 물거품이 되어 버리는 처절한 순간이 고의가 아니어도 찾아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목숨보다 소중했던 신의와 명예가 땅에 떨어지는 비참함 속에서, 맹세조차도 하느님께서 지키게 해 주셔야 가능한 것임을 비로소 깨닫게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맹세에 대해서는 노력 외에 인간에게 부여된 권한은 사실상 없으니까요.
제1독서는 엘리사의 부르심 대목입니다.
"엘리야가 엘리사 곁을 지나가면서 자기 겉옷을 그에게 걸쳐 주었다."(1열왕 .19,19)
고대에는 옷이나 물건에 그 사람의 능력이 깃든다고 보았지요. 옷을 걸쳐 주는 행위는 자신의 소명을 상대에게 부여하는 의미가 됩니다. 더군다나 당대 독보적인 예언자 엘리야의 옷이니 이 태도는 단순한 증여라기보다 의미심장한 부르심의 의식입니다.
"다녀오너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였다고 그러느냐?"(1열왕 19,20)
흥분하는 엘리사에 비해 엘리야는 차분합니다. 이 대답은 무심하게 들리기까지 할 정도입니다.
사실 오늘의 이 대목이 "아벨 므홀라 출신 사팟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네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워라"(1열왕 19,16) 하고 분부하셨던 주님의 말씀을 실현한 것에 지나지 않지요. 바로 어제 들었던 독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주님께서 당신 계획에 따라 이미 준비하고 세우신 이를, 그 주님께서 만나게 해 주셨으니, 엘리사의 소명 기사에서 엘리야의 권한은 매우 미약합니다. 아니,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지요. 엘리야는 자신에게 주어진 분수를 잘 알았기에 권위를 부리거나 으스대지 않고 오히려 한 걸음 떨어져 관조하듯 제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 둘을 포함해 온 세상이, 온 역사가 주님이 내신 길로 흘러왔고 또 흐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하여라."(마태 5,37)
그저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예" 또는 "아니오"만 하면 됩니다. 절대자를 들먹이는 맹세나 핏대 올리는 호소, 심지어 눈물까지도 진정성에 가닿기엔 함량 미달인 경우가 허다하다는 걸 우리는 알아버렸지요. 그러니 그저 귀를 쫑끗 세우고 영혼을 활짝 열어 하느님의 뜻만을 좇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그 어느 것도 내 것은 없습니다. 나를 치장하기 위해 함부로 차용해서 써도 되는 이름도 없습니다. 하느님 뜻이면 "예!" 하느님의 뜻이 아니면 "아니오!" 하는 것이 우리의 최선일 것입니다. 그마저도 결과는 오롯이 주님 몫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축일입니다. 안토니오는 가장 대중적인 인기가 많은 성인이지요. 성 안토니오처럼 "주님만이 우리 몫의 유산"(화답송)이심을 기억하며, 겸손하고 치열하게 하느님의 뜻을 찾는 하루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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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우리를 기쁨으로 가득 채우는 애덕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를 기쁨으로 가득 채우는 애덕을 실천해야 합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마음은 기쁨을 빼앗아 없애 버리려 합니다. 행복에 이르는 기쁨을 되찾는 법은 간단합니다. 싫어하는 사람에게 한두 가지 친절을 베풀고 화해하는 것입니다. 기쁨을 위협하는 걸림돌을 항상 조심하며 친절을 베푸는 일에 마음을 써야 합니다. 기쁨을 찾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주변에 철조망을 치고 끊임없이 덮쳐오는 장애물을 막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무너뜨리지 못할 장애물은 없습니다.
- 「지금 행복하세요?」에서
♣왜 그리스도와 특히 사도 바오로는 기쁨에 대해 말할까요?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 17) 하느님 나라를 누릴 것이기에 지금, 여기에서 기쁨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나라에 임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기쁨은 의로움과 애덕을 실천할 때 주어지는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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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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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네 번째 새로운 의로움으로, ‘맹세’에 대한 말씀입니다. 흔히 우리는 자신이 주장하는 바의 진실성을 뒷받침하거나, 그 이행을 보증하기 위해서 맹세라는 것을 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야훼 하느님께서 맹세하시는 분으로 드러납니다. 예를 들면, 계약체결 때(신명 4,31;7,8), 약속 이행의 보장을 말씀하실 때(창세 22,16;26,3), 심판 예고 때(민수 14,21;아모 4,2;6,8), 말씀의 권위를 강조하실 때(에제 20,3;33,11)에 그러하십니다. 그리고 이 경우에 대개, “나는 살아있는 자로다”라는 표현이 뒤따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말씀에 대한 유일한 보장은 하느님 자신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명기>에서는 하느님의 이름으로만 맹세하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신명 6,13;10,20) 그리고 <레위기>에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레위 19,12)
한편, 사람들끼리 맹세하여 계약을 체결하고 약속이나 결심이 취소될 수 없다는 것을 보증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맹세는 법정의 심문에서나 예언자들의 예언에서 그 말의 진실성을 보증하기도 했는데, 특히 하느님을 보증자로 내세우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법정에서 증언할 때 <성경> 위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합니다. 이는 거짓 맹세인 경우에는 어떠한 처벌도 감수하겠다는 심정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차차 시간이 가면서, 하찮은 일까지도 하느님을 끌어들여 자신의 목적을 위한 이기적인 거짓 맹세가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vlwanfemf을 두고 맹세함으로써 우상숭배의 결과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십계명”에서는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고 이를 단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거짓 맹세뿐만 아니라, “아예 맹세하지 마라”(마태 5,34)고 말씀하십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맹세는 본질적으로 하느님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만이 자신을 보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은 그 주인이 아니기에, 하느님이나 하느님 것을 두고 맹세할 수 없습니다. 곧 인간은 부르심에 대한 응답자이지, 스스로가 부르심의 주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는 사람들이지, 하느님의 뜻을 만드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리인 것이 아니라, 우리는 진리에 응답하여 따르는 사람들이입니다. 그러기에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 해야 할 일입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진실이 요청될 뿐입니다. 그리고 그 응답의 성실한 실행에 그 진실성의 여부가 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 주님께 응답하고, 응답한 바를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나아가서, 믿는 자에게는 맹세의식 자체가 필요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믿음 안에서 의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서는 말합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12,5)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전에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믿음으로써 올바른 사람이라고 인정받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로마 4,11-12).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졌음으로 ~하느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로마 5,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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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마태 5,37)
주님!
오늘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주인행세 하기를 멈추고, 당신 뜻에 응답하는 자 되게 하소서!
응답이 행동으로 진실하게 하소서!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 하게 하소서.
말과 행동이 참되게 하소서.
“예” 할 것을 “아니요”라고 하지 않고, “아니요” 할 것을 “예”라고 하지 않게 하소서.
자신이 진리인 양 내세우지 않고, 진리를 따르는 사람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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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HbZCyjfj2lw&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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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예 맹세하지 마라."(마태 5, 34)
맹세와
배신의 갈림길
사이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헛된
맹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한없는
도우심입니다.
맹세에 기대어
사는 것이 아닌
주님 은총에
기대어 사는
우리들 시간입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마음을 다시
다잡게 됩니다.
삶의 모든 순간이
우리 뜻대로
되지 않음을
절실히 깨닫는
요즘입니다.
주님 도우심
없이는 한 발짝도
뗄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헛된 맹세의
영혼 없는
반복이 아닌
기도의 살아있는
겸손이길
기도드립니다.
헛된 맹세에서
우리를 꺼내시는
주님의 십자가를
다시 만납시다.
주님의 뜻은
예와 아니오처럼
맡김과
내려놓음의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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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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