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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구밀알감리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대구밀알감리교회,
마틴 로이드존스 (D. Martyn Lloyd-Jones 1899-1981)
남웨일즈 카디프 출신의 전도 유망한 젊은 내과의사였던 그는 1927년 스물일곱 살의 나이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목회를 시작했다.
인술로는 해결할 수 없는 영적인 공허감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복음"을 처방전으로 들고 나선 것이다. 물론 왕립 의사인 토마스 하더 경의 조교로 일하면서 세상에 대한 매력 때문에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역시 십 대 시절부터 삶의 불확실성과 인생의 무상함에 대해 깨달은 바가 컸다. 열살 때 화재로 집을 잃는 고통을 겪었고, 절친했던 형 헤롤드와 사랑하는 아버지의 죽음을 불과 몇 년 사이에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그는 하나님의 섭리와 능 력,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인 죄의 실재에 대해 서서히 눈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직 의사의 소질을 살려 훗날 사람의 영적인 정 황을 철저하게 분석하는 능력을 갖게 된 그는 죄의 교리를 설교하는 것을 설교자의 첫째 임무로 삼았다.
그런데 그의 첫 사역지인 샌드필드 아벨라불의 B.F.M 교회에는 기도와 인내로써 옮겨야 할 장애물이 놓여 있었다. 샌드필드는 당 시 경제 공황으로 인해 가난해진 사람들이 교회마저 멀리하는 분위기였고, 목회자들 사이에도 역사적인 칼빈주의가 퇴조하고 낙 천적인 자유주의가 득세할 때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 동안 많은 책들을 읽으며 칼빈주의 감리교도로서 정체성을 확립한 그는 능 력 있는 전도 설교를 통해 교회 부흥을 일으켰다.
그의 2차 목회 사역은 1938년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시작되어 은퇴하기까지 30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 난 뒤 약 500명의 성도로 다시 시작된 교회는 1951년 어느덧 주일 예배에 2,500여 명이 참석하는, 런던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되었 다. 이후 로이드 존스는 런던뿐 아니라 유럽 전역과 미국까지 다니며 순회 설교를 했는데, 캠벨 몰간과는 또 다른 그만의 독특한 강 해설교 방식을 발전시켰다.
로이드 존스는 설교를 준비하거나 강단에 설 때 세 가지 원리를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첫째, 설교는 반드시 신학적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 전체의 메시지를 잘 파악하고 조직신학에 대한 지식을 갖추라고 권한다.
둘째, 설교문은 반드시 강해적이어야 한다. "강해설교"란 한 구절 또는 몇 구절에 대한 강해가 아니며, 그에 대한 연속적인 주해도 아니고, 단지 본문 에 대한 탁월한 설명을 모은 것도 아니다. 그는 설교문은 마치 교향곡과 같이 특정한 형태를 가져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셋째, 설교는 성령의 통제 아래서 행해져야 한다. 그는 이것을 설교의 전달 행위를 지배하는 핵심원리로 파악했다.
탁월한 복음주의자인 로이드 존스는 학문적으로도 손색이 없는 대중적 강해설교의 극치를 보여 주었다. "베드로후서 강해설교"를 시작으로 성경의 한 책에 대한 연속 설교를 본격적으로 시작, 21년 동안 줄곧 연속 설교를 했던 것이다.
그 가운데 유명 한 것은 "산상수훈 강해설교"와 5년에 걸쳐 끝마친 "에베소서 강해설교", 그리고 장장 12년이나 걸린 "로마서 강해설교"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30여 권이 넘는 로이드 존스의 설교가 번역되어 읽히고 있다. 또한 한국 강단에서 강해설교의 물결을 일으킨 설교자들을 살펴보면 모두 그의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저술들을 통해 그를 만날 때에는 설교관과 해석학 적 원리나 방법 등을 연구하는 일 외에 그가 지닌 영적 능력의 비결을 먼저 발견하는 혜안이 필요하다
마틴로이드죤스 목사는 의학박사로써 목사의 소명을 받았지만, 제도적인 신학교에 다닌 적은 없다. 그러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도 아니었고, 신학의 필요성을 무시해서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당시의 신학교 커리큘럼과 내용을 보고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신학교가 성경을 적극적으로 가르치기보다는 비평적인 입장에서 사변적이고 지나친 주지주의(主知主義)로 흘러갔기 때문입니다. 영성은 차갑고 메마른 방향으로 너무 치우쳐 있었습니다. 당시 신학교의 교육이 하나님께서 목회와 설교자로 부르신 이들을 바르게 훈련하고 사역을 준비하기에는 멀리 벗어나 있었던 것을 직시했기 때문입니다.
마틴로이드 존스 목사에게서 발견되는 특징들
첫째, 그는 책을 쓴 적이 없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책을 낼 목적으로 책상에 앉아서 원고를 쓰고 다듬고 만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많은 책들이 나왔는가? 모든 책은 그의 ‘입’을 통해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가 강단에서 외친 것들을 녹취하여 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그는 설교 할 때 원고를 완전하게 준비하지 않고 중요한 요지만 조목조목 적어서 그 요지를 기준 삼아 설교를 하였다. 물론 자신이 「목사와 설교」에서 밝힌 것 같이, 그런 방식만이 설교의 유일한 방식이라고 억지를 부리지는 않았다. 사람마다 천성이나 은사나 소양이나 개성이 다를 수 있으니 자기에게 가장 자유롭고 편한 방식을 택하라고 권고한다. 강단에서 자유로움을 상실하면 어느 방식이든지 그 사람에게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교자는 강단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할 수 있도록 자유로움을 견지할 것을 간곡하게 당부한다.
성경 강해서가 아닌 「목사와 설교」(Preaching & Preachers)나 「인간 조건과 의사 자신」(Human Condition and Doctor Himsel; Miraculous Healing)의 경우에도 원고를 준비하여 낸 책들이 아니다. 그것도 녹취록이다. 「목사와 설교」는 1971년 미국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2주 동안 특강 형식으로 전한 것들이고, 「인간의 조건과 의사 자신」도 영국 내 기독의사협회 연례 컨퍼런스에서 여러 해에 걸쳐 고정 특별 강사 자격으로 연설한 내용들을 녹취하여 묶어낸 것이다.
하나의 예외적인 경우가 있기는 하다. 그의 초기 목회지 웨일즈 샌드필즈의 선진운동교회(Foward Movement Hall)에서 복음 전도적인 메시지를 책으로 묶어 낸 것이 「복음전도 설교」(Evangelistic Sermons)인데, 그 책만이 설교를 하기 전에 완전 원고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이 경우도 설교 자체를 목적으로 한 것이지 나중에 책으로 낼 것을 생각하며 원고를 작성한 것은 아니었다.
둘째, 그는 설교자와 설교(說敎)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그는 정말 하나님께서 소명을 주셔서 세우신 설교자와 그 설교를 믿는 사람이었다. 이것은 그의 사역과 영성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설교자로 부르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성령 안에서 전력투구(全力投球)하여 그 소명에 충실하기 위해 혼신을 기울였다. 그는 또한 자신이 설교자로 부르심을 받아 섬길 수 있다는 것을 여간 특권으로 여긴 것이 아니다. ‘설교자가 된다는 것은 사람이 지상에서 받을 수 있는 소명들 중에서 최상의 소명이다’라고 말했다.
그러한 지각은 설교자로 서있는 것이 얼마나 큰 책임을 내포하고 있는 것인지, 설교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위해 일하시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위로가 되는지를 함께 견지한 것이다. 설교자와 설교의 필요성에 대한 의식이 상대화 되어가면서 심지어 설교자의 위치에 대해서까지 회의적이었던 20세기 전반의 추세를 거스리고 그는 설교자의 위치와 설교의 우위성에 대한 확신으로 맞섰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에 합당하게 설교하는 것과 교회의 진정한 부흥은 항상 맞물려 있다는 것을 믿었던 것이다. 마치 능한 궁사(弓師)가 눈을 부릅뜨고 과녁의 정 중앙을 겨냥하면서 화살이 과녁의 정통을 맞힐 것이라는 흥분어린 기대감과 확신을 가지고 살을 쏘듯이 강단에서 확신과 기대감을 가지고 설교를 하였다. 그리고 그 확신은 설교 사역과 열매를 통해서 옳았음이 확인되었다.
셋째, 그는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와 오늘도 성경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설교자와 설교에 대한 그의 믿음은 바로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에 대한 믿음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가 소명을 받고 설교자로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가 1927년으로 28세였다. 당시 영국의 상황이나 국제적인 상황은 대단히 혼미하고 앞을 내다보기 어려웠다. 사회적으로는 이데올로기 논쟁이 가열되어 있었고, 경제적으로는 1930년대의 경제 대공황(大恐慌)을 직전에 두고 있었다. 국제적으로는 전운(戰雲)이 짙게 드리워 있었다.
교회는 자유주의 신학으로 타격을 받아 강단에 선 설교자들이 성경을 뒤로 던져 버리던 시대였다. 기존에 성경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경외감도 사라지고 시대에 맞는 새로운 처방을 찾느라고 분주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에는 성경은 더 이상 적실성(的實性)을 갖고 있지 못하고, 그것을 대체할 다른 권위를 창출해야 한다는 의식이 교회 안에 팽배해 있었다. 교회가 휴머니즘적인 일반 인문 과학이나 정신 의학 등의 영역에서 새로운 권위의 척도를 찾으려고 기웃거린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설교자들은 성경 말씀이 아니라 대학 교수나 각 분야의 전문적이고 지도적인 인물의 말을 가지고 강단에 올라가 회중에게 각색하여 전하는 것이 시대를 아는 설교자의 임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정반대의 입장에 확고하게 서있었다. “아직도 성경은 예나 지금이나, 성경이 처음 쓰여질 때나 교회사의 어느 시대 속에서나, 지금 이 20세기의 복잡한 사회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동일한 권위를 가진 정확하고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시대에 뒤떨어진(out of date) 것이 아니고, 항상 최신식(up to date)이다.” 이 확신은 그의 초기 사역(1927년)부터 사역의 마침(1968년)에 이르는 41년간의 사역 기간 동안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그리고 1968년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채플 교회의 담임 목사직에서 물러 난 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한 1981년까지의 기간 동안 힘이 닿는 데까지 그 확신을 후배 사역자들에게 부각시키려고 애를 쓰며 사역에 전념하였다. 담임 목사직에서 물러난 후 설교로 증거된 말씀을 책으로 내기 시작한 것도 그러한 일의 일환이었다. 그는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설교할 때 이렇게 이야기했다. “성경은 오늘 이 밤 런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The bible tells us what is happening tonight in
넷째, 그의 설교는 전부 성경 강해였다. 그의 설교는 단순한 에세이(essay)가 아니라 성경 강해였다. 단순하게 어느 성경 본문을 기초로 설교를 끌어낸 후 설교의 본론으로 들어갈 때는 본문은 더 이상 거론되지 않고 다른 내용으로 채우는 설교 형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는 본문에서 제목과 설교의 대지(大旨)를 몇 개 뽑고는 그것을 가지고 나름대로 내용을 구성하는 그런 설교도 아니다. 그의 모든 설교는 본문이 결정하였다. 설교자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센스 있게 임해야 하며, 일단 본문이 결정되면 무엇을 설교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설교자가 아니라 성경 본문 자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선입견이나 개인적인 관점 없이 본문과 그 본문이 들어 있는 문맥과 장(章), 더 나아가서는 그 본문 전체를 면밀하게 연구하고 순리적인 해석을 가하여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교훈을 증거하고 현실의 상황에 비추어 적용해야 한다. 글자 그대로 본문의 강해이다.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의중을 정확하게 증거하고 적용하여 회중들에게 권고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가 생각하는 설교의 정형이다.
그것은 지적(知的)인 호기심에 입각해서가 아니라 온전한 믿음으로 성령의 감동 아래에서 해야 한다. 성령께서는 바로 그러한 설교자를 통해서 당신의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먹이시고 기르시고 가르치시고 지도하신다. 그것이 바로 그의 설교관이며 목회관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는 설교 외의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섬세한 관심을 기울였다. 성도들과의 교제를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성경 연구와 묵상과 기도를 위한 시간에도 성도들이 교제를 원하면 언제라도 반가이 응대해준 자상한 목회자였다. 또한 연약한 자들을 위한 상담도 병행했다. 그럼에도 그의 목회 중심은 설교자로서의 소명을 충실하게 감당하되 성경을 철저히 강론하는데 있었다.
다섯째, 그는 신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그의 애칭이 ‘박사’(Dr)였는데, 그것은 신학 박사가 아니라 의학 박사를 뜻한다. 26세에 성 바돌로매 병원에서 봉직하며 영국 왕립의학회가 주는 흉부외과 전문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제도적인 신학교에 다닌 적은 없다. 그러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도 아니었고, 신학의 필요성을 무시해서도 아니었다.
그는 당시의 신학교 커리큘럼과 내용을 보고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신학교가 성경을 적극적으로 가르치기보다는 비평적인 입장에서 사변적이고 지나친 주지주의(主知主義)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영성은 차갑고 메마른 방향으로 너무 치우쳐 있었다. 당시 신학교의 교육이 하나님께서 목회와 설교자로 부르신 이들을 바르게 훈련하고 사역을 준비하기에는 멀리 벗어나 있었던 것을 직시한 것이다.
그러나 신학을 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31세에 목사 장립을 받게 되었을 때 노회에서 신학교를 나오지 않은 이 사람을 목사로 장립하는 것이 타당한가라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노회의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이 사람은 정규 신학교를 졸업한 이들보다 신학적인 체계와 학식에 있어서 탁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웨일즈 장로교회 교단의 목사로 장립 받게 되었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복음적이고 개혁주의적인 견실하고 온전한 신학 체계를 수립할 수 있었는가?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 속에서 걸어온 필연의 결과였다. 그가 성경에 대한 절대적인 권위를 의존하며 확실하게 내린 결론은 ‘분명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와 능력과 영광이 어떠하다는 것을 드러내실 것이 분명하고, 그런 사례들이 교회사 속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을 것이다’였다. 그래서 그는 교회사를 추적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찬연하게 빛났던 시대를 뒤지기 시작하였고, 거기에서 성경을 통해 나타내신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보게 되었다. 특히 16세기 종교개혁 시대,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엽에 이르는 청교도 시대, 18세기의 영적 각성 시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엽의 영적 부흥 시대 등에 주목하게 된다.
고서(古書)를 취급하는 헌 책방에서 18세기 초엽에서 중엽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영적 각성 시대에 하나님께 주도적으로 쓰임을 받았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의 전집을 만난 것도 그의 영적인 눈을 활짝 열어주는 전환점이 되었다. 그리고 같은 시대의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존 웨슬리(John Wesley)의 등의 사역에 대해서 함께 연구하였다. 루터와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과 오웬(John Owen), 리차드 십스(Richard Sibbes),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ster) 등과 같은 유명한 청교도들에 대해서도 연구하였다. 그리고 찰스 핫지(Charlse Hodge), 워필드(B.B. Warfield)나 그레삼 메이천(Gresham Machen)등 칼빈주의적이고 개혁주의적인 계보에 속한 이들의 저서들을 섭렵하였다. 유명한 성경 주석서들을 연구하였다. 그는 결혼할 당시 결혼 선물로 다른 것은 사양하고 「칼빈 전집」과 「존 오웬 전집」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아울러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역대 목회자들의 생애와 설교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복음의 영광과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깊은 인상을 받고 성경적인 복음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더욱 확실한 지식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성경과 교회사 속에서 하나님께 쓰임 받은 이들의 체험과 열매가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성경의 권위에 대해 철저히 인식하게 되었고, 그것이 설교 속에 용해되어 선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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