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화가 서비홍 제백석 장대천 예술 속의 왕래는 서화 천년 徐悲鸿 齐白石 张大千艺术里的往来千载
소스: EK 이페어케이 플러스
(야창아트넷뉴스) 지난 7일 '천재간 왕래-서비홍·치바이시·장다첸'이 서비홍미술관(충칭)에서 전시됐다.이번 전시에는 쉬베이훙 24점, 치바이시 11점, 장다첸 7점, 치바이시/장다첸 합작품 2점, 쉬베이훙/치바이시 합작품 3점 등 3인 47점이 전시됐다.전시는 자연의 소리, 지기유은, 예도복집, 하합과공, 춘화추실, 묘조천기, 생생불식 등 7개 부문으로 나뉜다.이들 중 많은 3인 합작품이 처음으로 전시됐다.
개막식 현장
이번 전시 개막식은 전시 큐레이터 쉬지(骥主持)가 진행한다.개막식에서 쉬지는 "만남부터 사망까지 평생 서비홍, 치바이시, 장다첸의 우정은 영원했다.백석은 '나를 낳는 자 부모, 나를 아는 자 서군'이라며 평생 가장 귀한 사람이 서비홍이라고 고백했다.장다첸은 성당화풍을 제창하며 린시타오의 전문가로 1933년 쉬페이훙의 도움으로 프랑스에 가서 전시했다.세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예술이 인민이고 자연히 스승이 되는 것이다.그들은 중국인이자 세계를 내다보는 국제적인 화가"라고 말했다.
전람 현장
개막식에서 류밍차이(劉明说道) 런민대 예술학원 부원장은 "'왕래 천년'은 쉬페이훙 선생의 인장(印章)으로, 비홍 선생이 자신의 예술에 대해 높이 평가한 것이다.그는 전통 중국화의 개량, 중국 현대 사실주의 미술에 입각해 치바이시(白白石)·장다첸(張大千) 선생과 함께 근대 중국 회화사의 최정상급이자 영향력 있는 대가라고 주장했다.현장에서 유명재는 제백석 서재명 '차산관', 장대천 서재명 '대풍당'과 서비홍의 인문 '강남빈협, 강남포의, 왕래천재'의 관계에 따라 '임강선'을 썼고, 시운은 "2020년 11월 7일, 입동.오랜 인연으로 산등성이에서 귀를 기울이다.큰바람은 한순간에 응축된다.내 마음은 결국 나에게 있고, 동지는 동지이다.석문은 강물이 넓으니 강남의 독사진은 누가 놀라겠는가?몇 번 협력하고 몇 번 캠프에 갔습니까?빈협이 가볍게 먹물을 흘렸으니 묵해는 이미 파도가 치는 소리입니다.
전람 현장
서비홍의 아들인 서경평(庆慶平) 기념관장은 이번 전시 명칭에 대해 "'왕래천재'는 아버지가 진자분(陳子先生) 선생에게 부탁해 새긴 도장인데, 좋아하는 그림, 소장 그림에 이 방인을 찍는다.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빨리 지나가는 것이 많고 문화예술만이 영원할 수 있다는 뜻이다.마치 수천 년 된 소인이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예술은 천 년 동안 왕래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술은 천 년 동안 왕래한 것이고, 세 사람의 교제와 정신도 천 년 동안 왕래한 것이다.
전람 현장
서비홍은 두 지기(知己)를 추앙하고 서로 돕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그들을 위해 화집을 편집 출판하고 직접 서문을 썼을 뿐만 아니라, 1942년 충칭(重慶)의 반계석가화원(石溪石家花園)에서 중국미술학원연구원(中國美術學院(院, 오늘날의 동명대학이 아님)을 설립할 때 임용된 정 연구원은 치(、)와 장(張) 두 사람뿐이었다.안타깝게도 뜻을 같이한 세 사람은 생전에 한 차례 합동전시회를 열었을 뿐 관련 자료는 역사의 흐름 속에 묻혀버린 지 오래다.
그렇다면 서비홍은 왜 그렇게 두 사람을 추앙했을까.세 사람의 예술적 이상과 20세기 중국 화단의 현주소부터 짚어봐야 한다.
치바이시/장다첸 합작, 《연하도》, 화선지, 100cmx34cm, 1948년
1928년 유럽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쉬비홍은 중국 미술을 부흥시키고 중국화를 개량하는 대임을 자임한 쉬비홍에게 '새로운 사생(生生) 기반 훈련을 과감히 흡수'하는 것이 그의 교수 방향이었다.그러나 20세기 북평 화단에는 전통파가 많아 서비홍의 예술 이념은 북평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서비홍은 오랫동안 예술논쟁의 소용돌이에 있었다.
서비홍/제백석합작 《촉규개구리》, 선지, 101cmx35cm, 1948년
그는 북평에서 옛 전통을 고수하는 화가들을 상대했고, 그의 추종자들과는 혁신파로서 전통파와 국화 신구(新舊) 다툼을 둘러싼 지속적이고 촘촘한 여론전을 벌였다.서비홍은 1947년 10월 세 사람이 합동전을 열던 날 북평시 미술협회를 통해 중산공원 내금우헌(來雨轩) 다사(茶社)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중앙일보의 신국화 기반 구축에 대해 변론을 펼치기도 했다.
치바이시/장다첸 합작, 《연하도》, 화선지, 100cmx34cm, 1948년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의 대치는 점점 더 뜨거워지고, 쉬페이훙, 치바이시, 장다첸은 같은 '새로운' 진영에 속해 서로 진심으로 애석해한다.장다첸은 당풍을 직접 취하여 옛것을 먹고 능화하였으며, 치바이시는 민간에서 재료를 취하여 소박하고 졸렬한 기질을 구하여 전통과 거리를 벌렸고, 쉬페이훙은 서쪽을 중용으로 삼아 낭만적인 색채의 현실주의 정신으로 명청 문인화의 주류를 개조하는데 힘썼다.세 사람은 서로 감상하지만 취향이 다르고 취향이 다르다.
쉬베이훙/치바이시 합작 《촉규새우》, 화선지, 101cmx35cm, 1948년
서비홍의 눈에는 장대천과 치바이시가 그 시대 중국화의 최고의 성취를 대표하며, 또한 서비홍의 국화 개조에 대한 이상을 대표한다. 고금의 일체 양면, 한편으로는 송 이전, 특히 당나라의 중국화를 계승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국화가 가장 웅건하고 생명력이 풍부한 시대이기 때문이다.장다첸은 고대 모사를 좋아했고, 석도에 가까웠고, 당나라와 조송을 멀리 쫓아갔기 때문에, 그는 쉬비홍의 이념 중 "고대"의 극을 대표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명청 이래 오로지 필묵의 재미와 가냘프고 쇠락한 문기만을 추구했던 문인화 스타일을 돌파해야 했다.
제백석, 《월하심구도》, 선지, 151cm×42cm, 1930년대 초반
치바이시의 '야로자'는 쉬비홍의 이념 중 '금'의 극치를 대표하며 치바이시는 옛사람들의 작품을 거의 보지 않고 자신의 스승과 승려 외에 오늘날 사람들의 작품도 거의 보지 않는다.진반정은 1920년대 고궁이 개방되자 치바이스에게 관람을 요청했지만 치바이스는 이를 보면 그의 사상을 어지럽힐 수 있다며 거절했다.그의 의도는 바로 스스로 뛰어드는 것이다.그래서 치바이시의 그림은 '불고불금'으로 스스로 일파를 이루었다.그는 예술은 '변'해야 하며, '변'은 예술의 최고 경지이며, 소위 '변할 때까지'이지만, 반드시 '정변' 즉 '정자만이 변화를 알 수 있고, 변자계정지변'을 해야 하며, 변하기 위해서도, 처음부터 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쉬페이훙은 치바이시의 산수가 바로 이런 '중용의 덕'의 바로 그 변화라고 생각하며, '만물을 갖추고 있다', '진체 내에 충만하다'는 광범함과 동시에 '자연의 묘조', '단장취의'의 정밀함을 모두 갖추고 있다.
'새로운' 진지에서 세 사람은 서로 진심으로 애석해 하며, 웅강함을 추구하고, 새로운 것을 구변하여 국화의 퇴세를 힘써 개국한다는 목표에서 '혁명의 길동무'가 되고 있다.
전람 포스터
2021년 1월 4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전시는 '천년 왕래'의 만남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전시관 이용제한 조치, 관람은 사전예약 필수~
사진 출처: 타임비홍(베이징) 문화 예술 센터, 저작권은 그 소유입니다.일부 전시 현장 사진은 쉬비홍 미술관(충칭)에서 제공했으며 사진 촬영자는 선탁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