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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Ultimate Sin: Disagreeing with the Organization
죄의 최종적 정의: 조직과의 불협화음
Percy Harding’s case is also illustrative of the organization’s insistence on total acceptance of all of its teachings. Consider, then, these quotations from Watch Tower representatives in which they state: 퍼시 하딩의 사례도, 워치타워의 모든 가르침을 전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조직의 주장을 잘 예시해 준다. 이와 같은 사례들에서, 워치타워 대표들이 진술한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
If someone doesn’t want to live by our principles, he’s free to leave. There’s no badgering here, no physical or emotional harassment . . . . We don’t dictate from headquarters.6 We’re not spiritual policemen . . . . We don’t try to stifle anyone in his opinion.7 If people do not want to stay they are free to leave. . . . I cannot understand why those disagreeing simply do not leave quietly.8 누구라도 우리의 원칙에 따라 살고 싶지 않다면, 자유롭게 떠나면 말리지 않는다. 여기는 압박도 없고, 육체적, 감정적 괴롭힘도 없으며 . . . 본부에서 지시를 하지도 않는다.6 우리는 영적인 경찰이 아니다… 우리는 누구의 생각도 억누르려고 하지 않는다.7 사람들이 머무르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자유롭게 떠날 수 있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왜 조용히 떠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8 |
I am sure that all these men know that the picture they paint is not in accord with the reality. For they know what happens today when one of Jehovah’s Witnesses endeavors to “leave quietly.” The actual situation is similar to that a soldier would face if he went to his commanding officer and said, “Sir, based on my conscience I have decided to leave and I just wanted to let you know that I will go quietly and not disturb the troops in any way.” Unless he quickly recanted, the consequences the soldier would face—dishon orable discharge or, in time of war, execution by a firing squad—are paralleled in a spiritual way by those Jehovah’s Witnesses face. Those who think of “quietly withdrawing” know that they have a gun at their heads, the weapon being the threat of official disfellowshipment (or that of being officially pronounced “disassociated,” which is the same weapon, producing the same results, but under a different name). 인용문에 언급된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그리는 그림이 사실과 일치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나는 단언한다. 어떤 여호와의 증인이 "조용히 떠나려고 하지만, 그때 "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상황은 병사가 그의 직속 상관에게 가서 이렇게 말할 때 부딪히는 상황과 비슷하다: "상관님, 제 양심에 비추어 본 결과, 나는 떠나기로 결심했고 어떤 식으로든 군대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을려고" 조용히 떠나고 싶어 상관님께 알려드립니다. 그러나 그가 만일 그가 그런 상황을 바로 철회하지 않는다면 그 군인이 처하게 될 결과는—치욕적인 해고나 전쟁 중인 상황이라면 사형집행ㅡ여호와의 증인이 당면하게 되는 영적인 면과 병행점을 갖게 된다. '조용히 철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의 이마에 공식적인 제명의 위협과 같은 무기인 총구가 겨냥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혹은 다른 명칭이지만 동일한 결과를 가져오는 "이탈"이라고 공식적으로 칭해지는 것과 같은 위협적 무기 ) Though not physically placed before a firing squad, any Witness attempting to leave the organization for conscientious reasons can do so only at the risk of being labeled heretical, unfit for true Christians (other Jehovah’s Witnesses) to associate with, someone that even family members should treat as an “outcast.” The organizational policies allow no possible way to leave with honor. Only a person insensitive to human feelings could think that there is “no emotional harassment” involved. This situation has become particularly evident since 1980. 비록 육체적으로 총살대 앞에 배치되지는 않았지만, 어떤 증인이라도 양심적인 이유로 조직을 떠나려는 시도는 가족에게도 '추방된 자'로 취급되어야 할 사람, 참된 그리스도인(다른 여호와의 증인)과 연합하기에 부적합한 배교자로 낙인찍힐 위험을 무릅쓰야 한다. 조직의 방침은 명예롭게 떠날 수 있는 방법을 허용하지 않는다. 인간의 감정에 무감각한 사람이 아니라면 반드시 '감정적 괴롭힘'이 개입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런 상황은 1980년 이후 특히 뚜렸해졌다. Following the disfellowshipment of a few members of the headquarters staff for not fully accepting all Watch Tower teachings, and also my resignation from the Governing Body, the direction now taken by the organization was exemplified by a letter to its traveling representatives, dated September 1, 1980.9 That letter spelled out a policy that even to persist in —not talking about—but simply believing anything different from what the “slave class” provided constituted apostatizing and could lead to disfellowshipment. While it called on elders to be “discreet and kindly” in their inquiries as to members’ personal beliefs, we have already seen, in the case of Percy Harding and other cases already cited, what this directive produced in the way of “kindly, discreet inquiry.” The letter opened the way for men inclined toward dogmatism and intolerance to vent those qualities in their dealings with the flock, and caused otherwise caring men to act unfeelingly. Simple questions resulting from lack of knowledge are allowed, even welcomed. 모든 워치타워의 가르침을 온전히 수용하지 못한 본부 직원 몇 명의 제명에 이어, 또한 내가 통치체에서 사임한 데 이어, 워치타워 조직이 지금 취하고 있는 방향은 1980년 9월 1일자 여행하는 대표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9 그 편지는 "종 반열"이 제공한 것과 다른 가르침을ㅡ 이야기하는 것만이 아니라ㅡ 단지 믿는 것만 고집하더라도 배교로 지적되어 제명이 될 수 있다는 방침을 발표하였다. 한편 장로들은 의문이 제기되면 신중하고 친절하게 답변하도록 권고되어졌다. 회원들의 개인적인 믿음에 대해서는, 우리는 이미 퍼시 하딩과 다른 사례의 경우에서, "친절하고 신중한 조사"가 만들어 낸 결과가 어떠한지 보았다. 그 편지는 독단주의에 기울어져 관용심이 없는 사람들이 양무리를 대함에 있어서 자신들의 성질을 부리는 길을 열어 주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양을 돌보아야 할 사람들이 무감각하게 행동하도록 만들었다. 지식 부족에서 비롯되는 단순한 질문은 허용되었으며, 심지어 환영을 받을 수도 있었다. But when questions are raised that are the result of serious investigation and knowledgeable thinking and that involve a questioning of any of the organization’s teachings, the practice overwhelmingly is to attack the questioner and his or her motives rather than address the question. What had already taken place at the Brooklyn headquarters, documented in Crisis of Conscience, illustrates to what extent the qualities of kindness and discretion were displayed and how empty those expressions were. That headquarters example was thereafter reflected all over the United States and in many other lands. 그러나 진지한 연구와 박식한 사고의 결과로서 조직의 가르침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때, 조직이 보여준 행태는 의문점을 해결기보다는 질문자와 그 동기를 공격하는 것이 압도적이었다. 브루클린 본부에서 일어났던 일은 <양심의 위기>에서 친절과 신중함의 자질이 어느 정도까지 발휘되었고 얼마나 공허한 표현인지 이미 설명되었다. 본부의 그러한 사례들은 그 후 미합중국 전역과 다른 여러 나라에 반영되었다. risk of having to confront serious questioning or of having to overcome Scriptural objections and adverse evidence. Is this overstated? Consider just a few examples, typical of scores of others: I related the disfellowshipment of Edward Dunlap who, after over fifty years of association, most of them spent in “Bethel service,” was in effect “put out on the street” at nearly seventy years of age, disfellowshiped for having expressed viewpoints in conversation among friends that did not conform to all of the organization’s teachings. I mentioned his returning to the home city of his childhood, Oklahoma City, to take up his earlier trade of wallpapering along with his brother, Marion. What resulted from this? 심각한 질문에 직면해야 하거나 성경적 이의와 불리한 증거를 극복해야 하는 위험성. 이 표현이 너무 과장된 것인가? 수많은 전형적인 사례 중 다른 몇 가지 예를 고려해 보자. <양심의 위기에서> 나는 에드워드의 제명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50년이 넘는 기간의 대부분을 "베델 봉사"로써 조직과 연합했던 그는 사실상 거의 70세에 "길거리에 내쳐졌다" 던랩은, 조직의 가르침이 모두가 옳은 것은 아니라고 했던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자신의 관점을 표현했다는 이유로 제명에 처해졌다. 나는 그의 동생 마리온과 함께 그의 젊은 시절에 하던 도배일을 맡기 위해 고향인 오클라호마 시로 돌아온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 Marion Dunlap was then the appointed “city overseer” for the several congregations in Oklahoma City. He too had been a Witness for nearly fifty years, always very active in field service and meeting participation. When he offered lodging and work to his seventy-year-old disfellowshiped brother, Marion himself came under investigation. He was subsequently disfellowshiped and within about a year five other members of the Dunlap family were disfellowshiped. They were not persons engaging in wrongdoing of any kind; they had not sought to stir up trouble or engage in campaigning or protesting; they simply felt bound by conscience to let their beliefs be governed by the Word of God rather than by the word of fallible men or organizations. 마리온 던랩은 당시 오클라호마 시에 있는 여러 회중들의 '도시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그도 거의 50년 동안 증인이었고, 항상 야외봉사와 집회참석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가 70세의 제명된 형에게 숙소와 일을 제의했을 때, 동생 마리온도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도 이어서 제명되었고 1년 이내에 던랩의 가족 5명이 제명되었다. 그들은 어떤 종류의 비행도 저지른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문제를 일으키거나 관여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시위나 항의를 하지 않았다. 그들의 믿음은, 실수할 수 있는 사람이나 조직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지배받아야 한다는 양심을 지켜야 한다고 그들은 느꼈다. Another Witness, a professor at Oklahoma State University, expressed himself as feeling it was a shame that anyone with Ed Dunlap’s teaching ability should not have an outlet for that ability. He helped arrange for Ed to conduct some classes at the university. This brought him under the elders’ scrutiny and he too was soon disfellowshiped. While it is true that in some of the cases those involved chose on their own to discontinue meeting attendance, this in no way reflected any desire on their part to cease friendship or conversation with their previous associates among Jehovah’s Witnesses. 오클라호마 주립대학의 교수였던 또 한명의 증인은, 에드 던랩과 같은 가르치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 그 능력을 발휘할 배출구가 없어야 한다는 사실이 정말 수치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에드가 대학에서 몇 개의 수업을 맡도록 도왔다. 이 때문에 그는 장로들의 철저한 감시를 받게 되었고 이어서 곧 제명되었다. 많은 경우, 제명된 자들이 집회 참석을 스스로 나가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그들이 여호와의 증인들인 이전의 동료들과의 우정이나 대화를 중단하려는 의도를 반영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It in no way implied any rejection by them of such persons or any adverse feelings toward them. The complete “cutting off” of relationships came solely from the aggressive actions of elders. The unusual zeal elders show in pursuing any suspected case of disaffection is illustrated in the actions taken at a little place in Mississippi called Dancy, small enough not to appear on most maps. The Walker family lived here and in the 1940s the mother and, later, three of her daughters became Witnesses. (In time, the Kingdom Hall was built just across the road from the Walker home, the land being donated by Ray Phillips, the husband of one of the daughters, who was also the builder of the Hall.) 그것은 그들이 그런 사람들을 거절하거나 그들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암시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증인들에 대한 관계의 완전한 "단절"은 전적 으로 장로들의 공격적인 조치에서 비롯되었다. 불만과 이탈의 조짐이 보이는 미심쩍인 경우를 추적할 때 나타내는 비상한 열심은 댄시라 하는 미시시피의 작은 곳에서 취해진 조치로 설명될 수 있다. 워커 가족은 여기서 살았으며 1940년대에 어머니와 그 후 세 딸이 증인이 되었다. (오래지 않아 왕국회관이 워커의 집 길 건너 바로 맞은편에 지어졌다. 그 땅은 딸들 중 한명의 남편이었던 레이 필립스가 기증하였으며 그는 또한 회관의 건축가이기도 했다.) Sue Walker, one of the three daughters, became a “pioneer” and later graduated from the Watch Tower’s missionary school, Gilead. She spent twelve years in missionary service in Bolivia under difficult conditions. In one assignment, a town on the edge of the jungle called Trinidad, she and her partner were totally separated from association with other Witnesses. The low-lying town flooded during certain seasons and the only way to get around was by small boats. (Sue recalls studying the Bible with a woman who always kept a stick by her side. She wondered why until one day a snake came up out of the water onto the porch and the woman calmly picked up the stick and knocked it back into the water.) Sue and her partner stayed in the assignment, putting up with sickness and poor diet for years. 세 딸 중 한 명인 수 워커는 '파이오니아'가 되었고 이후 워치타워의 선교학교인 길르앗을 졸업했다. 그녀는 12년 동안 볼리비아에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트리니다드라고 불리는 정글 가장자리에 있는 마을로 갔을 때, 그녀와 그녀의 파트너는 다른 증인들과의 연합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었다. 저지대 마을이라 특정 계절에 홍수로 범람했고, 다닐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작은 배뿐이었다. (수는 늘 지팡이를 곁에 두었던 여자와 성경을 공부했던 일을 회상한다. 그녀는 언젠가 물속에서 뱀이 왜 현관으로 올라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연구생 여인이 막대기를 침착하게 집어들고는 뱀을 때려서 다시 물에 빠뜨리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수와 그녀의 파트너는 몇 년 동안 질병과 형편없는 식단을 참아내며 임무를 계속 수행하였다. In 1962, Sue was transferred from Bolivia to the Dominican Republic where my wife and I were stationed. Times were turbulent there, including a full-scale revolution in 1965, and more than once Sue had to take cover from gunfire when on her way home from conducting Bible studies. Though having health problems, to her twelve years of service in Bolivia she added another thirteen years spent in the Dominican Republic. After these twentyfive years as a missionary, Sue felt it her duty to return to Dancy, Mississippi, to care for her aging parents (now in their eighties). Though she continued to “pioneer” on her return, she was distressed to find that many local Witnesses viewed her as having “quit her assignment.” Rumors even circulated that she had been sent home by the Society for wrong conduct, which was totally false. 1962년 수는 볼리비아에서 나와 내 아내가 주둔하던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오게되었다. 때는 1965년에 전면적인 혁명이 있던 격동의 시기였고, 수는 성경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총격전을 피해 숨어야 했던 적이 몇 번 있었다. 비록 건강상의 문제가 있었지만, 볼리비아에서 12년간 직무를 수행하면서 그녀는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13년을 더 보냈다. 이 25년의 선교인 생활 후, 수는 미시시피 주 댄시로 돌아와 나이 든 부모(당시 80대)를 돌보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비록 그녀가 돌아왔을 때 계속해서 "파이오니아"로 계속 봉사했지만, 그녀는 여러 현지 증인들이 그녀가 "임무를 포기한 것으로"고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 상심하였다. 심지어 그녀의 비행으로 말미암아 협회에서 그녀를 집으로 되돌려 보내졌다는 소문까지 돌았지만, 그것은 전혀 근거없는 헛 소문이었다. I find it hard to believe that anyone knowing Sue Walker could speak thus of her. As branch overseer in both Puerto Rico and the Dominican Republic, I had had dealings with easily more than a hundred missionaries. Of them all, none was less likely to give cause for complaint than Sue. Even-tempered, not easily upset, she went about her work in an uncomplaining, quiet way. Few missionaries did as much personal Bible reading as she did. This, combined with actual experience over many years and in several countries, experience that brought home to her the degree to which the organization failed to reflect a truly Christian spirit, eventually caused her to reassess her conviction of its being God’s sole channel and chosen instrument. Her sisters had reached a similar point of reassessment. What followed again illustrates quite graphically the way the organization’s “shepherding” program so often functions when elders view members as “straying” from the flock. 나는 수 워커를 안다는 사람이 그녀에 대해 이렇게 밖에 평가할 수 없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푸에르토리코와 도미니카 공화국의 지부 감독자로서 나는 100명이 넘는 선교인들을 쉽게 사귈 수 있었다. 그들 중 어떤 선교인도 수(Sue)보다 더 많은 불평의 명분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침착한 성격에 쉽게 화를 내지 않는 그녀는 불평하지 않고 조용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처리했다. 그녀만큼 개인적인 성경 읽기를 많이 한 선교인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이점은 여러 해 동안 그리고 여러 나라에서의 실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조직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정신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정도를 가늠하는 것이어서 결국 그녀는 조직이 하나님의 유일한 통로이며 선택된 도구라는 확신을 재평가하게 되었다. 그녀의 언니들도 비슷한 재평가 시점에 도달했다. 이에 취해진 것은 조직의 "양떼를 치는" 프로그램은, 장로들이 성원들을 양떼로부터 "방황"한다고 간주할 때 흔히 작동되는 방식을 상당히 실감 있게 보여준다. The first to draw their attention was Sue’s niece, also named Sue (Phillips). Convinced that the Society’s teachings did not accurately represent the first-century good news, she had quietly withdrawn from meeting attendance. A district overseer, a circuit overseer and a local elder visited her, questioning her for about an hour as to the reasons for her nonattendance. She explained her feelings, that she had been doing much personal study of the Scriptures and could no longer conscientiously support some of the beliefs taught by the organization. She mentioned, among other things, the limiting of Christ’s mediatorship to a special class and the impression created that salvation is something earned through specific works. As happens in thousands of similar situations, the manner of dealing with such questions is to focus, not on the Scriptures, but on “the organization.” Thus, the local elder asked her, “Where did you learn what you know about God’s purposes?”— the customary and expected answer being, “From God’s organization.” But Sue replied, “From the Bible.” They assured her that ‘they studied more than she did and had their assigned positions in the organization.’ This was the essence of their counsel, principal stress being laid on the organization’s importance, and they soon left. 가장 먼저 이들의 주의를 끈 것은 수의 질녀인 수(필립스)였다. 협회의 가르침이 1세기의 좋은 소식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않는다고 확신한 그녀는 조용히 집회 참석에서 멀어졌다. 지역 감독자와 순회 감독자, 그리고 현지 장로가 그녀를 방문하여 그녀가 집회를 불참하는 이유에 대해 약 1시간 동안 물어 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심정을 설명했는데, 성경에 대한 개인적인 연구를 많이 해왔기 때문에 더 이상 조직이 가르치는 일부 신앙을 양심적으로 지지할 수 없다고 했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의 중간 통로의 자격이 특별한 반열로 한정된다는 점과 구원이 특정한 행위를 통해 얻게 되는 것이라는 인상을 언급했다. 비슷한 수많은 상황에서 일어나지만, 그러한 질문을 다루는 방식은 성경이 아니라 '조직'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었다. 그래서 현지 장로가 그녀에게 물었다. `자매는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어디에서 배웠느냐 ?— 습관적으로 기대되는 대답은 "하나님의 조직으로부터" 이다. 그러나 수는 "성경에서"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그녀에게 '그들이 그녀보다 더 많이 공부했고 조직에서 부여된 임명된 직위를 가지고 있다'고 장담했다. 이것이 그들의 조언의 본질이었고, 조직의 중요성을 주로 강조하고는, 그들은 곧장 떠났다. A few weeks after this “shepherding visit,” Sue returned from a trip and found a notice to appear for a judicial hearing that very day, January 3, 1982. She had arrived home seriously ill and entered the hospital that same day. It was twelve days before she recovered sufficiently to leave. During that time none of the local Witnesses visited her, although two women Witnesses phoned her mother to inquire about her. During the twelve days of her hospitalization, the congregational “shepherds” took the course of those in the parable to whom it is said, “I was sick and . . . you never cared to visit me.”10 이와 같은 '양떼를 돌보는 방문'이 있은 지 몇 주 후, 수는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바로 그날인 1982년 1월 3일에 사법 청문회에 출석하라는 통지를 발견했다. 그녀는 중병에 걸려 집에 도착했고 같은 날 병원에 입원했다. 그녀가 떠날 수 있을 만큼 회복되기 12일 전이었다. 그 기간 동안 두 명의 여성 증인이 어머니께 전화를 걸어 그녀의 안부에 대해 물어 보았지만, 현지 증인 중 아무도 그녀의 병실을 방문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입원한 12일 동안, 회중의 "목자"들은 "내가 아팠지만. . . 너희는 나를 방문하려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비유 속의 행동을 취했다.10 Sue returned home on a Friday. Exactly two days after leaving the hospital, on Sunday, a local elder phoned her to set up a new date for a judicial hearing. She informed him that she had no intention of going to such a hearing, having just left the hospital and still not well. The elder mentioned his having heard of her being in the hospital and said he was sorry to hear she had been ill. He went on to say that, if she would not attend the hearing, then, “We may have to take some action.” Sue replied, “Well, I guess you’ll do whatever you want to do.” His response, rather heated and quite emphatic, was, “We’ll do whatever the organization tells us to do.” Three days later, Sue wrote a letter to the congregation and to those well known to her. In it she included these statements: 수는 금요일에 집으로 돌아왔다. 병원에서 퇴원한 지 정확히 이틀이 지난 일요일, 한 현지 장로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사법 청문의 날짜를 새로 정하게 했다. 그녀는 막 퇴원했기 때문에 여전히 몸이 좋지 않아 그런 청문에 갈 생각이 없다고 그에게 알렸다. 장로는 그녀가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말하고 그녀가 아팠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유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만약 그녀가 청문에 출석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어떤 조치를 취하게 될 수도 있다고"고 말했다. 수가 대답했다. "좋아요, 여러분은 무엇이든 여러분이 원하는대로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소 열기를 띤 상당히 단호한 그 장로의 반응은 "우리는 모든 것을 조직이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3일 후, 수는 회중에 그리고 그녀와 친했던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 편지에 다음과 같은 진술을 포함했다: |
For over a year now I have been reading and studying God’s Word, the Bible, very diligently. Never in my life have I devoted so much of my time, thought and prayer to Bible study. What I began to learn and to see has caused me to turn my whole life course around. The decisions I have made came after much study, thought and prayer. They were not overnight decisions. I love Jehovah God and Jesus Christ very dearly and I don’t want to do anything that would displease them. I give my wholehearted support to the Way of Christianity as the best, most rewarding way of life. I want no other life-style for myself. I accept the Bible as the inspired Word of God and as my guide book to living. To me the good news about Jesus Christ, what he did for all mankind and what it will mean for all exercising faith in him is the most wonderful, exciting news there is. For any Christian, loyalty to Jehovah God, Jesus Christ, the Bible, the good news and the way of Christianity must be given priority over everything else. My loyalty and support absolutely go to all these. After months and months of Bible study and much prayer I came to the conclusion that the things I formerly believed were simply not scriptural. As a Christian I saw there were changes to be made, there were simply some things I could no longer give my support to. 1년 넘게 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매우 부지런히 읽고 연구해 왔다. 평생 이렇게 많은 시간과 생각, 기도를 성경 공부에 바친 적이 없었다. 내가 배우기 시작한 것과 보기 시작한 것이 내 삶의 방향을 바꾸게 했다. 내가 내린 결정은 많은 공부와 생각 그리고 기도 끝에 내린 것이다. 그 결정들은 하룻밤 사이에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 나는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매우 사랑하며 그들을 실망시키는 어떤 일도 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리스도인의 길을 가장 훌륭하고 보람 있는 삶의 방법으로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다른 생활 방식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성경을 영감을 받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내 삶의 지침서로 받아들인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좋은 소식,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인류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행사하는 모든 이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내게는 가장 놀랍고 흥미진진한 소식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이라도 여호와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경, 좋은 소식, 그리스도 정신의 방식 등에 대한 충성이 다른 모든 것들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나의 충성심과 지지는 이 모든 것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여러 달 동안의 성경공부와 많은 기도 끝에 나는 내가 이전에 믿었던 것들이 전혀 성경적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루어져야 할 변화가 있다는 것을 보았으며, 내가 더 이상 지지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
A few days after receipt of the letter, the elders announced to the Mantee Congregation of Jehovah’s Witnesses (which meets in Dancy), that Sue Phillips had been disfellowshiped “for conduct unbecoming a Christian.”11 A note to this effect, signed only “Mantee Congregation” was sent to her home. 편지를 받은 지 며칠 후, 장로들은 (댄시에서 모이는)여호와의 증인 맨티 회중에 수 필립스가 "비그리스도인의 행위로 인해" 제명되었다고 발표했다.11 "맨티 회중"이라는 서명만으로 된 이런 취지의 메모가 그녀의 집으로 보내졌다. In all, the local elders and traveling overseers in their “shepherding efforts” had spent approximately one and a half hours with this young woman who from childhood had been raised as a Witness. They doubtless felt they had accomplished the “extended, kindly efforts” referred to in the Watch Tower headquarters directive. Apparently the clear evidence her letter gave that she had deep respect for the Scriptures and a sincere concern for pleasing God and Christ did not warrant any forbearance on the elders’ part, any feeling that there was good reason for showing tolerant patience, or any thought that perhaps by a calm, gentle, non-confrontational approach they might resolve her questions. No time was lost in making official announcement that she was now no longer a fit associate for the congregation members. 대체로, 현지 장로들과 여행하는 감독자들은 어린 시절부터 증인으로 자라온 이 젊은 여성을 위해 "양떼를 돌보는 노력"으로 약 1시간 30분을 보냈을 뿐이다. 그들은 틀림없이 자신들이 워치 타워 본부의 지침서에서 언급된 "친절하고도 정성된 노력"을 하였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녀의 편지에서 보여준 명백한 증거는 분명히 그녀가 성경을 깊이 존경하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 것에 대한 진지한 염려가 장로들의 입장에서 어떠한 관용도, 관용적인 인내심을 보일 만한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하였다. 침착하고 부드러우며 다투지 않는 접근으로 그녀의 의문을 풀어주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제 더 이상 회중 성원들에게 적절한 동료가 아니라는 공식 발표를 하는 데에는 시간이 조금도 지체되지 않았다. It is a frequent practice to imply in Watch Tower publications that those who do not agree with the organization are motivated by such negative emotions as pride, rebelliousness, a desire to escape from door-to-door activity due to a lack of humility, and similar charges. 조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자존심, 반항심, 겸손 부족으로 인하여 호별방문 활동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 그리고 이와 유사한 혐의 등의 부정적인 감정에서 동기부여를 받는다는 점을 워치타워 출판물에서 자주 암시하고 있다. I do not doubt that there may be some individuals of that kind. But I also know that this has proven completely without foundation in case after case. It certainly was obviously false regarding Sue Phillips’ aunt, former missionary Sue Walker. In her more than forty years of service, she had beyond question spent far, far more hours in going from door to door than anyone in the area, including the elders and traveling overseers. On returning from missionary service, she had continued in active association with the Mantee congregation until this point, regularly attending meetings, actively engaging in “witnessing” and in conducting home Bible studies with interested persons. In view of the organizational dealings with her niece, however, she felt matters had reached a stage calling for a decision. As she told her niece, “I’m the next one they’ll come after.” So, she wrote a letter of resignation and on Sunday walked out of her house and crossed the road to the Kingdom Hall and personally handed a copy to each of the elders.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의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여러 사례에서 근거도 없이 완벽하게 그런 것처럼 다루어졌다는 것도 알고 있다. 수 필립스의 이모인 전 선교인 수 워커에 대해서 이루어진 조직의 조치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었다.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녀는 그 지역의 장로들과 여행하는 감독자들을 포함하여 그 누구보다도 호별방문 전도봉사에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바친 헌신적인 증인이었다는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선교에서 돌아온 그녀는 그때까지 맨티 회중과 연합하여 활동적이었으며, 정기적으로 집회에 참석했으며, 적극적으로 '증거 활동'을 했으며, 관심 있는 사람들과 가정 성서 연구를 했다. 그러나 조카 딸의 조직적인 관계가 제명에 이른 것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녀는 이제 문제의 결정을 요구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느꼈다. 그녀는 조카 딸에게 "그들이 쫓아올 다음 사람은 나야."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탈퇴서를 쓰고, 일요일에 집에서 나와 길을 건너 왕국 회관으로 가서 장로들에게 개인적으로 사본 한 부씩을 건네 주었다. Sue Walker was then 63 years of age. She had spent forty-two of those years as a Witness, thirty-five of them in full-time service, and twenty-five of these in missionary work in foreign countries. She had foregone marriage and children, had endured many privations, had labored in primitive areas, had steadily sought to live a life in close harmony with Bible principles. Would it not be normal to wish to retain such a person in a congregation, to feel that it would be a definite loss no longer to have her association and example? If one felt that the Witness beliefs were indeed sound and solidly based on Scripture, would one not feel moved to make whatever effort might be possible at least to continue contact with such a person with a hope of eventually reconciling differences? I would think so. But the organization-trained elders evidently did not; after receiving her letter they made no effort to discuss its contents with her, punctually announced her official “disassociation,” and, due to the organizational policy, from that time forward Sue Walker in effect became a nonperson for the congregation members, not to be spoken to or associated with. 수 워커는 당시 63세였다. 그녀는 그 중 42년을 증인으로 보냈고, 35년은 전시간 봉사자로 봉사했으며, 이 중 25년은 외국에서의 선교 활동으로 보냈다. 그녀는 결혼도 하지 않아 자녀없이 지냈어야 했고, 여러번 배고픔을 견뎌야 했고, 미개인 지역에서 수고하였으며, 성경의 원칙과 밀접한 조화를 이루며 삶을 꾸준히 추구하여 왔다. 그런 사람을 회중 내에 보유하여, 그녀와 연합하며 그녀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 결코 손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적이 아닌가? 만약 증인의 믿음이 정말로 성경에 근거하여 건전하고 견고하다고 사람들이 느낀다면, 시간이 흘러 그녀가 가진 견해의 차이점을 극복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그러한 사람과 계속 접촉할 수 있는 어떤 노력이라도 할 수 있도록 감동받지 않을 것인가?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조직으로부터 교육을 받은 장로들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의 편지를 받은 후, 그들은 그녀와 그 내용에 대해 논의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으며, 그녀의 공식적인 "이탈"을 똑똑히 발표했고, 조직의 방침에 따라, 그때부터 수 워커는 사실상 회중 성원들과 말을 걸거나 교제할 수 없는 비인격체로 바뀌었다. This is all the more remarkable in that Sue Walker continued to help her aged mother cross the road to the Kingdom Hall whenever she expressed the wish, quietly sitting through meetings with her mother, though her presence was not acknowledged by any in attendance, doing this entirely out of consideration for her mother’s remaining as a Witness. When her mother’s health eventually caused her to give up meeting attendance, she rarely received any visits from congregation members, due to their reticence to being brought into contact with the “disassociated” daughter. Her mother’s opinion of the organization changed and when her husband (never a Witness) died, she joined with her daughters in asking me to travel there to conduct the funeral. Before she herself died, she expressed the wish that I conduct her funeral as well. In a small rural community where everyone knows everyone else, the hundred or so persons who came to the funeral could not help but notice that, although their neighbor, Mrs. Walker, was not disfellowshiped nor had ever “disassociated” herself, none of the Witnesses with whom she had worshiped for more than forty years were in attendance. Organizational policy, not personal sentiments, kept them away. 이것은 수 워커가, 그녀의 나이든 어머니가 그녀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할 때마다 왕국회관으로 가는 길을 건너도록 계속 도와줬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하다. 비록 그녀의 존재는 참석자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지만,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집회 내내 조용히 앉아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어머니가 증인으로 남아 있겠다는 배려에서 나온 것이었다. 어머니의 건강이 악화되어 결국 집회 참석을 포기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이탈된" 딸과 접촉하는 것에 대한 그들의 조심스러움 때문에 회중 성원들의 방문을 거의 받지 못했다. 조직에 대한 어머니의 생각이 바뀌었고 남편(증인이 된 적이 없음)이 죽자 딸들과 함께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나에게 그곳으로 여행을 오라고 제안했다. 그녀가 죽음이 다가온 것을 느꼈을 때 내가 그녀의 장례식을 치르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했다. 모두가 서로 알고 있는 작은 시골 공동체에서, 장례식에 온 백여명의 사람들은 비록 이웃인 워커 부인이 제명되거나 스스로 절교선언을 하지 않았지만 , 40년 이상 함께 연합해 왔던 증인들 중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적 정서때문이 아니라 조직의 방침이 그들을 멀리하게 했다. What followed Sue Walker’s “disassociation” announcement is, if anything, even more revealing of the organizational spirit fostered. Some months earlier, her older sister Lulu and her husband (parents of Sue Phillips) had moved from the Dancy area to Mississippi’s Gulf Coast area. Because of having arrived at conscientious conclusions about the organization, and being fully aware of the probable consequences of this, they purposely did not advise the Mantee elders of their future address and, on arrival at their new location in Long Beach, purposely sought to remain “incognito” as regards the congregation there. They hoped thus to withdraw quietly, avoid confrontational interrogation and the unpleasantness of judicial proceedings. 수 워커의 '탈퇴' 발표에 이은 후속 조치들은 무엇보다 육성된 조직의 영을 더욱 드러내는 것이다. 몇 달 전 언니 룰루와 남편(수 필립스의 부모)은 댄시 지역에서 미시시피 걸프 코스트 지역으로 이사했다. 조직에 대한 인식이 어떤 결론으로 마음 깊이 도달했고, 이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결과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의도적으로 맨티 장로들에게 미래의 주소를 알려주지 않았고, 롱 비치에 있는 새로운 장소에 도착하자, 그곳의 회중에서 일부러 "가명"으로 머물려고 했다. 이것은 그들이 조용히 떠나서, 대립적인 심문이나 사법 절차의 불쾌함을 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They were thus surprised when, not long after the Mantee congregation disfellowshiped their daughter, two elders from the Long Beach, Mississippi, congregation, complete strangers to them personally, unexpectedly showed up at their door, unannounced. How these men knew of them can only be surmised, but the elders’ statements made clear that it was a follow-up on the judicial action taken hundreds of miles away with regard to their daughter. The elders “shepherding” efforts consisted of questioning Ray and Lulu Phillips as to their beliefs, asking if they felt the same as their daughter did. They replied in the affirmative. Within days came a notice to attend a judicial hearing. They had no wish to undergo that experience and said so. They, too, were disfellowshiped. 맨티 회중에서 그들의 딸을 제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시시피 주의 롱비치 회중에서 온 두 명의 장로들, 전혀 예기치 않은 사람들, 완전히 뜻 밖의 사람들이, 예고도 없이 그들의 문 앞에 나타났을 때, 그들은 깜짝 놀랐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알았는지는 추측할 수밖에 없었지만, 장로들의 진술은 그것이 그들의 딸과 관련하여 수백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취해진 사법 조치에 대한 후속 조치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장로들의 '양을 돌보는' 노력은 레이와 룰루 필립스의 믿음에 대해 질문하면서 딸처럼 동일하게 생각하는지 묻는 것이 주를 이뤘다. 그들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수일 내에 사법부 청문에 참석하라는 통지가 왔다. 그들은 그런 청문의 경험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으며, 그들 역시 제명되었다. One wonders what possible way there is for anyone to “leave quietly” as Society representatives, including Robert Balzer of the Brooklyn headquarters, argue they should. The claim that such pursuit by elders is necessary to “keep the organization clean” seems especially hollow, in view of the fact that this couple in their late sixties were endeavoring to live quietly and unnoticed, with no connection with any congregation when the action was taken. 브루클린 본부의 로버트 발저를 포함한 협회의 대표들은 "조용히 떠나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이 가능한지 궁금하다. 이 60대 후반의 부부가 어떤 회중과도 아무런 연고도 없이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살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장로들의 이러한 조치가 '조직 청결 유지'를 위해 필요하다는 주장은 정말 공허해 보인다. One of Mrs. Walker’s three Witness daughters now remained, Lavenia, a very mild-mannered person then living in the New Orleans, Louisiana, area. When first moving there, Lavenia had attended a few meetings at the local Kingdom Hall but, like her sister Lulu, had decided to withdraw quietly. During the same time her sister in Mississippi was being “investigated,” she received a visit from a local elder accompanied by a visiting circuit overseer, coming to inquire about her lack of meeting attendance. She explained why she was not attending. No one can question the propriety of these men showing interest in her or—believing as they did that her spiritual welfare was at risk—their endeavoring to encourage her to attend their meetings. That interest is certainly understandable, even commendable. What they actually did, however, is puzzling indeed. On hearing her explanation as to why she was not attending, the circuit overseer wrote out a short statement and said that if she did not plan to attend any more (as the wording of the statement read) she could simply sign it. She did. The result? She was now considered officially “disassociated,” to be viewed the same as if she had committed some act calling for excommunication, no longer to be talked to or associated with. The shepherding efforts, portrayed in Watch Tower publications as extended loving efforts at “readjusting” and recovering strayed sheep, had taken at most one hour. Yet Lavenia had been associated for some thirty years. In all, the time of Witness association of these five family members totaled some 200 years. The time spent by Witness elders in supposed efforts to ‘restore them to the flock’ amounted at most to a total of 5 or 6 hours. 워커 부인의 세 명의 증인인 딸 중 한 명인 라베니아는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에 살고 있었다. 라베니아는 처음 그곳으로 이사 갔을 때, 지역 왕국회관에서 몇 번의 집회에 참석했지만, 그녀의 여동생 루루처럼 조용히 물러가기로 결정했다. 미시시피에 사는 여동생이 "조사"를 받는 동일한 기간에, 그녀는 그 회중을 방문한 순회 감독자를 동반하여 온 현지 장로로부터 방문을 받아, 그녀의 집회 참석이 왜 부족한지 대해 질문을 받았다. 그녀는 자신이 참석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다. 아무도 이 사람들이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 적절했는지 혹은 (그녀의 영적 복지가 위험에 처해서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믿고) 그녀가 그들의 모임에 참석하도록 격려하려는 노력의 적절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 없었다. 그러한 관심은 당연히 이해할 수 있고, 나아가 감사하게 생각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한 행동은 실로 당황스럽다. 왜 참석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그녀의 설명을 들은 순회 감독자는 짧은 성명을 썼고 만약 그녀가 더 이상 (성명의 문구가 낭독된 대로) 참석할 생각이 없다면 그냥 서명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렇게 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녀는 이제 추방이 필요한 어떤 비그리스도인 행위를 한 것과 같은 것으로 여겨지는 "이탈"이 된 것으로 공식 발표되어 교제나 대화를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워치타워 출판물에서 "재적응"을 하여 회복될 수 있도록 길 잃은 양을 찾기 위한 지속적인 애정 노력이라고 묘사된 양떼를 돌보는 노력은 기껏해야 1시간 걸렸다. 그러나 라베니아는 약 30년 동안 조직과 연합해 왔다. 이 다섯 가족의 증인들의 연합 기간은 모두 200여 년이었다. 증인 장로들이 '양떼로 회복'시키기 위해 애쓴 것으로 생각되는 시간은 기껏해야 총 5~6시간이었을 뿐이다. |
6 Walter Graham, Canadian branch, quoted in a Toronto newspaper.
6 캐나다 지사 월터 그레이엄은 토론토 신문에서 인용했다.
7 Traveling overseer, now a Governing Body member, Samuel Herd, quoted in
Chicago Tribune.
7 여행하는 감독자였으며 당시 통치체 성원이 되었던 사무엘 허드는 시카고 트리뷴지에서 인용했다.
8 Robert Balzar, Watch Tower headquarters public relations man.
8 로버트 발자르, 워치타워 본사 홍보 담당
9 A photocopy of this letter may be seen in Crisis of Conscience, pages 341, 342.
9 이 편지의 사본은 <양심의 위기>에서 볼 수 있다.
10 Matthew 25:43, PME.
10 마태 25:43, PME.
11 This is a standard expression, deliberately left vague to avoid legal problems.
11 이것이 법적인 문제를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모호한 표현으로 발표하는 워치타워의 표준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