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밤 세 톨
식탁 위 접시에 삶은 밤 세 톨 동그마니 놓여 있다. 속이 헛헛하고 손과 입이 심심할 때를 위해 내 몫으로 챙겨놓은 것인가 보다. 밤 살색이 조금씩 검어지고 있다. 깨끗이 벗겨내지 못한 보늬가 남아있는가 하면 살이 벗겨져 나간 곳이 있다. 상처 입은 채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로 자신이 당할 최후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끝내려고 그토록 험한 말들을 들으며 치열한 삶을 살아왔던가? 그가 살았음직한 날들을 따라가 보고 싶다.
지난 가을 저들을 비롯한 한 상자의 윤기 나는 밤들이 차를 타고 흥덕구 장구봉로 한 집으로 배달되었다. 갓 훈련소에서 배출된 신병들처럼 앞일을 예상하지 못하여 불안을 가득 담고 이사를 왔다. 새로 맞은 주인들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로 보였다. 그 많은 밤들을 두고두고 자기들만 먹기도 뭐하고 나누어줄 이들도 마땅치 않다. 일없이 껍질을 까고 보늬를 벗기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한쪽 구석에서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애매한 하루 이틀을 보냈다. 몇 봉지에 나누어 들고 이웃을 돌더니 달랑 한 봉지 이웃에 주고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 왔다.
어느 순간이던가, 밤 껍질을 벗겨주는 곳이 있다는 희소식을 듣더니 이튿날 시장 통 어느 가게에 데려가 무지막지하게 우리의 옷을 벗겼다. 위잉 소리를 내며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겉옷과 속옷이 벗겨져 나가고 때로는 살갗이 쓸리기도 했다. 이 폭력을 견딜 수도 저항할 수도 없었다. 지난날 산 중턱에서 새소리 듣고 삽상한 공기 마시며 지내던 시절이 꿈만 같았다. 살던 곳을 떠나던 날들이 잊히지 않는다. 푸르던 우리 몸이 어느 때부턴가 누르스름히 변하고 숨 막히게 조이던 외피가 느슨해져 갑자기 땅으로 곤두박질하고 말았다. 주변 동료들은 누군가 휘두르는 긴 장대에 맞아 억지 이별을 해야만 했다.
그러고 보면 성장과 성숙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몸이 불고 맛이 들며 주변의 시샘과 질투 속에 남들보다 더 일찍 실하게 자라난 것이 더 빠른 이별의 원인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푸르던 시절에 산을 찾은 이들이 던지곤 했던 한두 마디 말들 뜻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풀과 나무의 꽃을 그리도 탐내고 갖고 싶어 하는 이들도 우리에게는 예쁘다, 아름답다는 말을 하지 않았을 뿐더러 외려 심지어 “뭔 꽃이 이러냐”, “송충이, 지렁이 같다”고 악담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다른 꽃들에게 다가가 코를 들이밀고 향기 좋다고 하던 이들이 우리에게는 다가오지도 않고 “이게 향기냐, 이 미묘한 냄새는 뭐냐”며 칭찬도 비난도 아닌 듯한 야릇한 말들을 남기고 멀어져 갔다.
그들의 말에 힘들어 할 때면 바람과 벌들이 위로해 주곤 했다. 자고로 귀한 것을 꼭꼭 감추는 법인데 사과 감 대추 같은 것들은 모습을 다 드러내고 비 바람 햇살에 살이 탄 채로 자라나지만 밤은 얼마나 귀한지 싸고 또 싸서 감추어 키운다고 했다. 참 좋은 것은 탐하는 이들이 많아 날카로운 가시로 지키고 그 속에 또 단단한 껍질이 있고 그 안에 텁텁하고 꼭 끼는 속껍질까지 있으니 얼마나 귀한 몸이냐며 추켜세워 주었다.
따가운 봄볕과 소나기 태풍 부는 여름을 지나 푸르고 높은 하늘의 가을까지 귀한 가문 품격 있는 양반이라 자부하며 숱한 날들을 살아왔다. 햇볕 따가운 날들과 빗줄기 쏟아 붓던 시절들, 세상을 뒤엎을 듯 불어대던 바람에 주변 나무들이 우짖고 쓰러질 때에도 꿋꿋한 기품을 잃지 않았다. 늦은 봄 반짝이는 햇살아래 우리 잎들은 얼마나 찬란했던가? 잉잉거리며 주변을 맴돌던 벌들도, 부지런히 오르고 내리던 사람들도 말했다. “잎도 꽃도 다 열매를 맺기 위한 것이라고.” 그 말을 들으며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세상에서 내가 최고요, 모두가 내게 잘 해줄 것이라 생각했다.
귀중품을 금고 속 깊은 곳에 안전하게 보관하듯 비록 외투는 벗겨졌지만 속옷은 물론 겉옷도 소중히 조심스레 다루며 이동되었다. 산을 떠나고 단층집 드문드문 하던 곳을 떠나서 집들 빼곡한 곳에 오고는 알 수 없는 일들이 이어지더니 마침내 잊지 못할 폭거가 쏟아지고 정신을 잃었다.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이라는 이들이다. 한 때는 정성스레 돌보아 주는 듯하더니, 얼마가지 않아 나 몰라라 팽개치고 또 다른 꽃과 나무로 그 극성이 옮겨가더니 제 정신이 아닌 듯 내게 몹쓸 짓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고도 학대가 끝나지 않았던지 어느 날은 친구들과 함께 물벼락을 맞게 하더니 금속용기 안에 물속에 담그더니 밑에서 햇볕보다 몇 배나 강한 열을 가하기도 했다. 물이 덥혀지고 뜨거워지더니 한계를 넘어 견딜 수 없을 지경까지 갔다. 다시 정신을 잃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가해진 열에 온몸이 누글누글해지는 것 같았다. 여러 동료들은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지나온 날들의 자부심을 전혀 모르는 양 친구들을 하나씩 집더니 아무 생각 없이 얼굴에서 평소에는 말하고 웃어대던 곳으로 밀어 넣고 물렁해진 살들을 누르고 다져 삼키는 것이었다. 그 순간 혼란스런 기억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잎도 꽃도 열매 맺기 위한 것이라더니, 이게 열매의 최후란 말인가?
금빛으로 빛나던 살결도 어디가고 몸에 꼭 맞던 속옷도 사라지고 못된 이들 접근을 막아주던 색 짙은 겉옷도 없어졌다. 바람도 벌도 사람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다. 어쩌면 이리 무서운 세상일까? 생애 가장 무섭고 흉한 순간들을 맞고 있는 것 같다. 지난 봄 여름 같은 평화로운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인가? 최후를 기다리며 검게 변해가는 내 모습이 더욱 당황스럽기만 하다.
첫댓글 금빛으로 빛나던 살결도 어디가고 몸에 꼭 맞던 속옷도 사라지고 못된 이들 접근을 막아주던 색 짙은 겉옷도 없어졌다. 바람도 벌도 사람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다. 어쩌면 이리 무서운 세상일까?
의인화 된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