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송치 고갯마루
방학 중인데 잠시 거제로 건너와 머문 일월 둘째 화요일이다. 이왕 온 김에 하루 더 머물다 내일은 근무지로 나가 연말정산을 마치고 돌아갈 셈이다. 새벽에 잠을 깨어 생활 속 글을 몇 줄 남기고 아침밥을 해결했다. 반나절 보낼 일정이 앞뒤 두 가지로 나뉘질 형편이다. 아침 이른 시각 연사 와실을 나서 거제대로 옥포 방면 정류소로 나가 능포 종점으로 가는 10번 시내버스를 탔다.
옥포와 아주를 둘러 먼저 들리려는 곳은 장승포 수협 공판장이다. 이미 여러 차례 찾은 장승포인데 이른 아침 열리는 경매 모습을 본 바 없었다. 바다에서 갓 잡아 온 선도 높은 생선이 궁금해서 찾아갔다. 미명의 포구 수협 공장에 닿으니 청어 말고는 보이질 않았다. 다른 어종은 없어 새벽 경매가 진행될 기미가 없어 지심도 유람선 선착장을 서성였더니 볼에 스친 바람이 차가웠다.
장승포 포구는 아침이 밝아오는 서기가 비치는 즈음이었다. 새벽부터 조업을 나가려는 어부인지 규모가 제법 되는 어선 두 척은 집어등을 훤히 켠 뱃머리를 돌리고 있었다. 장승포에서 지세포로 가는 버스를 타고 옥림을 돌아가 소동마을 앞에서 내렸다. 여명은 더 밝아와 지세포 봉수대 산등선으로 해가 솟을 기미가 보였다. 갯가가 아닌 산을 넘어가는 고개로 오르려고 지세포로 갔다.
주공 아파트단지 앞으로 갔더니 더 이상 길이 없고 텃밭이 이어졌다. 경작자들이 다녔던 길을 따라 가니 검불이 가득한 언덕에 이어 대숲이 나왔다. 대숲을 통과해야 내가 오르려는 길과 합류할 듯 해 개척 산행을 하듯 헤쳐 나갔다. 그때 아직 잠을 덜 깬 고라니 한 마리가 부스럭거리며 몸을 뒤척여 일어나 사라졌다. 대숲에 추위 속 평화로이 잠 든 고라니를 깨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텃밭과 근처 단독 주택에서 키우던 여러 마리 개들이 일제히 짖어대 난감했다. 평소 인적이라곤 아무도 없었을 곳으로 웬 사내가 올랐으니 근처 개들이 짖을 만도 했다. 대숲을 통과해 텃밭 울타리를 지나니 출구가 나왔다. 일운면에서 상문동으로 가는 고갯길이었다. 산중턱까지 빌라와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지세포에서 떠오른 아침 햇살을 등에 지고 포장된 길을 따라 올라갔다.
산중에는 상수원이 될 저수지가 나왔다. 아스팔트로 포장이 된 길이라도 오가는 차량은 아주 드물어 창원의 안민고갯길보다 더 한산했다. 기온이 영하권으로 내려간 아침이라 귓등이 시려와 목도리를 올려 감고 걸었더니 추위를 막을 수 있었다. 고갯마루에 이르니 양쪽 산등선으로 가는 반송재 이정표가 나왔다. 고개 왼쪽으로 가면 북병산이고 오른쪽은 옥녀봉으로 간다는 이정표였다.
반송재는 ‘반송치(峙)’ 또는 소동고개로도 불리는 듯했다. 지세포에서 고현 상문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였다. 고개를 넘으니 깊은 산중 굽이굽이 길이 이어졌다. 저 멀리 맞은편은 선자산 등선이고 북병산 꼭뒤에 해당하는 골짜기였다. 거제 섬의 내륙이 강원도 미시령이나 한계령 길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비탈길을 한참 내려가도 험준한 산악지대라 인가나 경작지가 있을 리 없었다.
골짜기가 끝난 곳에 심원사로 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조금 더 나가니 상문동 삼거리였다. 오른쪽 고현으로 가면 시청이 나오고 왼쪽은 구천댐이었다. 구불구불 댐을 돌아가는 길을 따라 걸었다. 연초댐과 마찬가지로 상수원 확보를 위해 조성된 구천댐은 규모가 컸다. 댐 건설 당시 수몰된 절골마을 망향 빗돌이 세워져 있기도 했다. 구천에서 구조라 망치고개로 가는 길과 나뉘었다.
오래 전 폐교가 된 구천초등학교는 도농교류체험장으로 운영했다. 연담삼거리에 이르니 학동과 해금강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연담에는 농업용수로 쓸 저수지가 있었다. ‘연(硯)’은 벼루로, 마을 앞 지형이 벼루 형상이라는 지명 유래가 소개되어 있었다. 동부면 면소재지까지 걸었더니 열량이 소진되어 시골 반점에 들어 생굴이 든 우동을 시켜 먹고 고현을 가는 시내버스를 탔다. 21.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