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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경이 꽃
- 문학저널 2024 신인문학상 수필부문 수상작
- 이명우 (1947년생,기업인•전 평남지사)
1968년 여름이었다.
그해는 여름방학이 좀 일찍 시작되었다. 아마도 잦은 데모 때문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에어컨도 없었던 시절이라 여름 한나절 집에서 보내기는 여간 힘들지 않은 시절이었다.
점심을 먹고 마당에 잠깐 나와서 나무 그늘에 밑에서 바람을 쐬며 좀 쉬고 있었다.
초인종 소리가 나서 대문을 열고 보니 같은 과 친구가 와 있었다.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그 친구하는 말이 여름 워크캠프에 같이 가지는 것이었다.
뜬금없이 무슨 워크캠프? 하고 내가 반문하니 연세유네스코학생회 (KUSA-Y)에서 이대 쿠사랑 죠인트 워크캠프를 간다는 거였다.
뚝섬 건너 봉은사 부근에 있는 봉은 보육원으로 낮에는 보육원의 시설보수와 환경정리 등 근로봉사를 하고
저녁에는 보육원생들과 노래도 부르고 이야기도 해주며 학습지도도 한다는 것이었다.
1학년 때 마음이 끌렸던 여학생이 쿠사 회원이라는 말에 그 여학생에 가까이하려고 혹시나 해서 가입을 했었지만
그해 가을학기부터 입주 과외를 하게 되어 2학년 올라가서는 발걸음이 좀 뜸했던 동아리였다.
이대 쿠사 회원들과 함께 Workcamp를 간다는 말에 나는 대뜸 '오케이, 그래 가자'하고 말했다.
다음날 친구와 뚝섬 나루터에서 만나 나룻배를 타고 봉은 보육원으로 갔다.
그 당시 한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가 한강대교와 천호동에 광진교 그리고 행주산성 근처에 있는 행주대교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뚝섬에서 강 건너 봉은사로 가려면 뚝섬 나루터에서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니곤 하던 때였다.
뚝섬 나루터는 아마도 지금은 영동대교와 성수대교 북단 중간 어디쯤 되었을 상 싶다.
봉은 보육원은 봉은사 남쪽으로 한 500미터쯤 떨어져 있었다.
지금은 인터컨티넨탈호텔 부근쯤 되지 않을까 싶다.
강을 건너 봉은 보육원을 가는 길은 인적이 하나도 없는 시골 산길이었다.
보육원에 도착하니 미리 도착한 회원들이 손뼉을 치며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처음 보는 이대생들의 환영을 받으니 어깨 가 갑자기 으쓱해졌다. 캠프입소는 어제부터여서 우리 둘은 하루 늦게 입소한 셈이었다.
봉은 보육원은 봉은사의 후원을 받고 있는 곳이어서 그런지 시설 규모도 제법 컸고 원생들도 80여 명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휴전이 된 지 15여 년이 지났지만 그 당시만 해도 버려진 고아들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연대생 20여 명 이대생 15여 명 정도로 구성된 봉사팀은 낮에는 보육원시설보수, 보육원 진입로 길 닦는 일
그리고 환경정화 등 근로봉사를 하고 저녁에는 한두 시간씩 아이들에게 공부도 가르치고 노래도 부르며 놀아주곤 하였다.
보통 3, 4명이 한 팀이 되어 아이들을 지도하였다.
아이들과 헤어진 후에는 전체 회원이 모여 회의를 하고 하루 일과를 마쳤다.
내가 속한 조에는 이대생이 2명 있었다.
그중에 한사람이 나와는 같은 학년이어서 대화가 서로 통했다.
이틀을 한 팀에서 활동하다 보니 서먹서먹함도 조금 가시고 말도 서로 편하게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녀는 교육심리전공인데 전공이 교육심리여서 그런지 아이들을 잘 지도하였고 아이들에게 유익한 이야기도 잘 해주었다.
나는 주로 학습지도를 하고 그녀는 노래도 가르치고 동화책도 읽어 주고는 하였다.
아담한 키에 예쁘기도 하지만 마음이 참 따뜻한 사람으로 느껴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마음이 그녀에게 다가감을 느꼈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여학생과 사귀어 본 경험은 커녕 가까이에서 이야기해본 경험이 전혀 없었던 요샛말로 하면
진정한 모태솔로였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즐겁고 생기가 돌았다.
그녀를 쳐다보면 행복했다. 보육원 길 닦는 일을 함께 했는데 내가 리어커를 끌고 그녀는 뒤에서 밀었다.
그 당시 나는 체중이 52킬로밖에 되지 않는 약골이었다.
그런데 그녀와 함께 하니 힘이 펄펄 나는 거였다.
한나절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 데도 지칠줄을 몰랐다.
그녀가 물었다.
"시골에서 농사도 지어보셨나요?
일을 잘 하시네요."
나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아니오, 우리 집은 농사를 지은 적이 없어요.
자경씨와 함께하니 신이 나서 그런가 봐요"하고 나는 은연중에 나의 속내를 드러내 보이고 말았다.
워크캠프 3일째 되는 날 저녁 모임에는 7분 스피치 시간이 예정되어 있었다.
두 사람 정도 자유로운 주제로 정확히 7분 시간을 맞취 스피치 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친구인 캠프장에게 오늘 7분 스피치 연사로 내가 나가겠노라고 말했다.
나는 7분 스피치를 통해 나의 진면목을 그녀에게 보여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막상 나가겠다고 말은 했으나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했다.
낮에 근로봉사를 하면서도 7분 스피치 생각만 하였다.
스피치 주제를 골똘히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생각 끝에 주제를 "더치페이-Dutch Pay"로 정했다.
내 전공이 경영경제 분야이고 또 그 당시 더치페이란 말은 조금은 생소한 용어였지만
소위 개념이 있는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꽤 관심을 가졌던 이슈이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내 마음속에 있는 그녀에게 나의 뛰어난 지적 수준(?)과 깨어있는 의식 (?)을 알려줄 수 있는 좋은 기회이며
주제라고 나름 판단하였다.
주제를 정하고 나서 스피치의 줄거리를 차분히 정리해 가며 속으로 몇 번이나 스피치 내용을 되풀이 해가며 연습하였다.
저녁을 먹고 난 후 나는 함께 입소한 친구와 함께 보육원 주위 산길을 걸으며 스피치 연습을 하였다.
내용도 물론 중요하지만 스피치의 속도와 강약 그리고 표정과 제스처도 중요한지라 친구의 코치도 받아가며 맹연습을 하였다.
세 번 정도 리허설을 하고 나니 제법 작품의 완성도가 높아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도 친구한테는 내 속마음을 내비치지는 않았다.
드디어 7분 스피치 시간이 되었다.
첫 번째 연사는 이대 3학년 선배가 했다. 대학 생활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 데 별 호응을 받지는 못했다.
다음 연사로 내가 소개되자 친구가 박수를 크게 치며 분위기를 잡았다.
나는 앞에 나가서 인사를 한 후 그녀를한 번 쳐다보았다.
그녀는 호기심 반, 기대 반의 표정으로 가벼운 미소를 띄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나는 열심히 연습한 대로 목소리의 톤과 억양 그리고 말의 속도도 조절하고 때론 제스처도 써가며
준비된 대로 정확하게 7분이라는 시간에 맞춰 스피치를 끝마쳤다.
열렬한 박수 소리에 나는 그만 붕 뜬 기분이 되었다.
유난히도 그녀의 박수 소리가 내 귀에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사실은 주제가 무섭기도 하고 재미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용이 워낙 좋았던(?) 탓에 환호성이 나오고 박수 소리가 우뢰와 같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별 흥미를 못 느낀 회원도 있었으리라.
당시 더치페이란 호기있는 사나이들에게는 째째한 개 념이라는 것이 그 당시 일반적인 생각이었던 시절이었다.
더치페이라는 주제의 내 스피치 요지는 요즘 대학생들은 경제개념이 확실히 정립되어야 하며 돈의 쓰임새에 대해
절제와 용처를 계획적으로 해야지 괜한 허세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미국과 유럽 등 서구 대학생들의 경제 관념과 용돈 쓰는 방법 그리고 데이트 비용도 남녀가 각자 분담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였으니 특히 여학생들에게는 별로 호응을 받지 못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오로지 그녀의 반응만이 중요하였다.
그녀는 방긋 웃으며 힘차게 박수를 치고 있었다. 내심 대만족이었다.
그녀에게 나의 논리 정연함과 내가 개념이 있는 진정한 지식인임을 전달함이 목적이었고,
어느 정도 그 목적은 달성된 것으로 생각되었다.
다음 날부터는 원생들 지도조의 조편성이 바뀐다고 하여 그녀와 헤어지는 것이 속으로 무척 아쉬웠다.
워크캠프 시작한 지 4일째 되는 날 저녁에는 원생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갖지 않고 주위에 있는 선릉으로
보름 달맞이를 하러 가기로 하였다.
보육원 위치가 지금 삼성동 인터콘티넨탈 호텔 근처였던 것 같다.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이대생과 함께 30여 명의 젊은이들이 산길을 걸어가는 모습은
어느 서정적인 영화의 한 장면 못지않은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우리는 걸어가며 노래를 함께 불렀다.
그 당시 캠프 송이 유행하던 시절이라 즐겁고 경쾌하고 때로는 감미로운 멜로디의 캠프 송이 많았다.
흥겨운 노래 몇 곡을 부르다가 우리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잠시 뒤에 누군가가 "사모하는 마음"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한 사람 두 사람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림 자 지고 별 반짝이면"으로 시작되는 첫 소절은 그때 그날 밤 우리 일행의 정경하고 너무나도 매치가 되었다.
"사랑하는 나의 맘을 그대에게 전해볼까" 라고 노래 부를 때 나는 그녀를 쳐다보며 지금 내 마음을 그녀에게 전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불렀다.
한 20여 분쯤 지나 선릉에 도착하였다.
능 주위에 둘러서서 우리는 밤하늘 바라보았다.
능이 있는 곳은 주위보다 높은 지대이어서 시야가 넓어 여름밤 온 하늘이 다 보이는 것 같았다.
반짝이는 별빛과 밝은 달을 쳐다보며 며칠간의 워크캠프 생활의 고담함을 씻어버리고 즐거움, 그리고 뿌듯한 보람을 이야기하였다.
서로 재미있게 이야기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조용해졌다.
주위에 풀벌레 소리가 동요소리처럼 아름답게 들렸다.
나는 평남 양덕에서 테어나 부모님과 함께 6.25전에 남쪽으로 내려와 서울 광희동에서 잠시 2년 정도를 살았었다.
6.25 전쟁이 나자 피난 생활을 논산군 노성면이라는 시골에서 보냈다. 여름밤이면 동네 형들을 따라 뒷산에 올라가 놀고는 하였다.
동네 뒷산에는 산소가 드문드 문 있었다.
형들은 우리들의 담력을 길러준다며 조금 떨어져 있는 산소에 다녀오라고 시키고는 하였다.
처음에는 무서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으나 몇 번 해보니 재미도 있었다.
그렇게 헤서 우리들의 담력이 길러졌다. 선릉 주위가 어린 시절 담력을 키웠던 뒷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잠시 어린 시절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고요한 정적을 깨고 누군가가 큰 목소리로 윤동주 님의 '서시'를 낭송하는 것이었다.
윤동주 시인은 연희전문 문과 출신으로 우리 연대생은 물론 그 당시 대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며
그의 시집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에 맨 처음에 있는 '서시'란 한국의 젊은이들이 가장 좋아하고 애송하는 시이기도 하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그리고 밝은 달빛 아래 반짝이는 여름 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보며 '서시'를 듣고 있는 우리들은
완전히 하나됨을 느꼈다.
시인이 직접 우리 앞에 나타나 시를 낭송하는 것 같았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람에 이는 잎새에도 나는 괴로워하였다." 라는
'서시'의 한 구절에서 우리는 모두 숨을 멈추고 숙연하였다.
그 순간 우리 모두는 맑고 티 없는 순수한 정신의 영혼으로 다시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한 여학생이 "안녕 친구야"를 불렀다.
동아리 모임이 끝날 때마다 부르곤 하는 노래다.
"안녕 친구야, 안녕 친구야, 안녕! 안녕!
다시 만나리, 다시 만나리, 안녕! 안녕!"
우리는 서로 서로 손을 꼭 잡고 함께 노래를 불렀다.
그녀의 손이 따스함을 느꼈다.
워크캠프 생활 중에 우리들의 식사는 자체 해결하기로 되어 있었다.
보육원에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생각 때문이었다.
조를 짜서 직접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어 먹었다.
부식거리는 이틀에 한 번씩 남녀회원 두 사람이 조를 짜서 뚝섬에 있는 시장에 나가서 사 왔다.
선릉으로 달맞이를 갔다가 보육원에 도착한 후 다음날 시장 조 명단을 체크 해보았다.
그녀와 1학년 후배 남학생으로 이미 짜여 있었다.
후배 대신 내가 그녀와 갈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1학년 후배를만나 부탁을 했다.
내가 대신 가겠다고. 그녀와 오랜 시간 함께 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놓칠 수가 없었다.
캠프장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캠프장인 친구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내일 시장 보는 것은
내가 그녀와 함께 가는 것으로 시장 조를 다시 짰다.
그날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뚝섬시장으로 오가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이 궁리 저 궁리를 다 해보았다.
우선 내가 지적 수준이 매우 높은 대학생임을 알려 주는 것이 제일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유행하던 철학사조인 실존주의 철학의 대가인 하이데커, 지성의 상징이며 실존주의 철학자인 사르트르
그리고 그녀의 동지이며 애인인 보봐르, 수학자이며 철학자인 영국 지성의 상징인 버트란트 러셀,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써머세트 모 엄 그리고 그의 소설 "인간의 굴레" 아무튼 내가 조금이라도 주워들은 이야기 중 유식한 티를 낼 수 있는 것들은
머릿속으로 대충 정리해 보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날씨가 맑고 밝았다. 아침을 먹고 그녀와 함께 산길을 따라 뚝섬 남쪽 나루터로 향했다.
보육원에서 뚝섬 나루터로 가는 길은 아마도 지금의 그랜드인터콘티넨탈호텔에서 봉은사 왼쪽으로 난 비교적 완만한 고갯길이었다.
그 당시는 주변에 인가가 전혀 없었고 야트막한 낮은 곳은 밭두렁이 드문드문 있는 정도였다.
인적이 없는 산길을 마음속으로 좋아하기 시작한 사람과 함께 걷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뚝섬시장을 가면서 무슨 말을 했는지 지금 기억은 없다.
그러나 마냥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은 난다.
뚝섬 나루터는 아마도 지금 영동대교 북단 아래쪽쯤 됨직하다.
나룻배를 타고 가는데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와 기분이 상큼했다.
뚝섬시장에 도착하여 메모지에 적은 찬거리와 간식거리를 샀다.
상인이 부르는 대로 주지 않고 적당히 흥정하고 가격을 깎아 여유있게 장을 보았다.
그녀는 값 깎는 것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서울 문안에서 곱게 자란 여학생이라 그런지 처음엔 값을 깎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것 같더니
나중에는 아주 신기하게 생각하고 재미있어했다.
마치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오드리 햅번 같았다. 그녀는 나에게 오드리 햅번이었다.
그녀도 한 번 흥정을 해보겠다고 하여 햇감자를 흥정해보라고 하였다.
마음씨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한테 가서 흥정을 하기 시작하였다.
내가 먼저 얼마에요, 하고 물어보았다.
아주머니가 얼마라고 말하자 나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며 값을 깎아보라고 눈짓을 했다.
그녀는 깎아달라는 말을 못하고 한참을 주저주저하는 것이었다.
계속 눈치를 주어도 말을 못하기에 내가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살까요?"
그녀가 대답했다.
"사지 못해요."
그 말은 그 상황에서 적절한 표현은 아니었다.
내 생각으로는 "깎지 못해요."란 말이 잘 못 나온 것 같았다.
그런데 이게 대박이었다.
아주머니가 "아이고, 예쁜 학생 내가 많이 깎아 줄께"하며 반값에 주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아주머니는 그녀가 사지 말자고 하는 말로 들 은 것 같았다.
흥정에 대가(?)인 나를 능가하는 대단한 결과였다.
그때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배웠다.
초보가 때로는 고수를 뺨친다는 것을.
그녀는 너무 기뻐했고 신기해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녀는 그날 이후 흥정의 달인이 되었을 것이다.
시장을 다 보고 무거운 것은 내가 양손에 다 들고 그녀에게는 가벼운 것만 들게 하고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
보육원으로 향해 가고 있었다.
한 30분쯤 걸어가다가 나지막한 산길에서 좀 쉬어가기로 했다.
나무 그늘 밑이라 시원한 바람도 불고 그리 덥지도 않았다.
나란히 앉아 땀을 훔치고 쉬면서 길가에 핀 들꽃들을 보았다.
샛노란 꽃, 보랏빛 꽃, 흰꽃, 이름 모를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있었다.
난 들꽃이 그렇게 예쁜 줄을 그때 처음 알았다. 꽃잎이 작아서인지 앙증맞고 귀여웠다.
호젓하게 단둘이 앉아 있는 이 좋은 기회에 그녀의 환심을 사는 좋은 묘안이 없을까 생각한 끝에
나는 그중 샛노란 꽃을 가르키며 물었다.
"당신이 만약 하나님이시라면 저 꽃의 이름을 무엇이라 부르시겠습니까?"
갑작스런 나의 돌직구 발언에 그녀는 잠시 멍하니 나를 쳐다보았다.
잠시후 그녀가 하는 말에 나는 그만 녹다운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하고 저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내 질문도 엉뚱했지만 그녀의 대답 또한 예측불허 기상천외였다.
나는 순식간에 머리가 허해짐을 느꼈다.
사태 수습이 안 되었다.
우리는 한동안 서로 아무 말도 못하고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었다.
누가 먼저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일어나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보육원까지는 20여 분 걸으면 족히 갈 수 있는 거리였으나 그 길은 나에게는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나는 그녀가 이렇게 말하리라 생각했었다.
"저 꽃 이름 잘 모르겠는데요.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명우씨는 뭐라고 부르고 싶나요?" 이렇게 그녀가 물어볼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러면 곧바로 나는 마음속으로 이미 준비해 놓은 정말 멋있는 대답을 했을 것이다.
"예, 저는 '자경이 꽃'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자경씨처럼 예쁘고 청초해요, 그리고 샛노란 꽃잎이 자경씨가 지금 입고 있는 샛노란 블라우스와 같아요."
그녀의 이름은 자경이었고 그녀가 그날 입은 반소매 블라우스는 샛노란 색이었다.
이러한 나의 대답에 그녀는 감격해 나에게 마음을 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뒤 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기 시작했고 서로 마주치면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가 미안했던지 가까이 다가와 웃음을 띠어도 나는 이내 얼굴이 굳어지곤 하였다.
어떻게 봉사활동이 끝났는지 모르겠다.
그 후 나는 동아리 활동도 활발하게 하지 못했다.
한동안 나는 여성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다.
여성 앞에 서면 얼굴이 붉어지고 말을 하지 못했다.
군대를 다녀오고 사회생환율 하면서 본래 나의 낙천적이며 사교적인 성격이 되살아났다.
금융기관에 다니면서 사회생활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때였다.
아마도 1975,6년쯤 되지 않을까 싶다.
고객들이 보라고 객장에 놓아둔 월간 잡지를 보다가 낯익은 표지 모델을 보았다. 그녀였다.
외국 유학을 다녀와 정부 기관 전산센터장으로 있는 장래가 촉망되는 커리어 우먼이라고 소개되었다.
여전히 예뻤고 세런되어 보였다.
표지 모델 속에 그녀가 입고 있는 블라우스도 역시 샛노란 색깔이었다.
7, 8년 전 그녀와 함께 했던 봉은 보육원에서의 워크캠프 생각에 잠시 객장에 앉아서 아름다웠던 그 시절을 회상해보았다.
그런 일이 있고 한참 세월이 흐른 후 친구들에게 그녀와의 에피소드에 대해 이야기를 했었다.
친구들이 하하하 웃으며 모두 그 시절 그때의 워크캠프를 회상하며 한동안 추억에 젔었었다.
그 후 친구들은 나를 보면 가끔 "당신이 만약 하나님이라면..."하고 놀리곤 하여
나는 "당신이 만약 하나님이라면.."이란 다소 긴 별명을 갖게 되었다.
나이가 든 요즘은 그 말을 줄여 '당하'라고도 하고 '당하 선생'이라고 하여 내 호처럼 부르고 있다.
가슴 아린 추억도 풋풋한 젊은 날의 추억은 역시 아름다운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