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각각 병기를 잡았느니라
느 4:15-23
15 우리의 대적이 우리가 그들의 의도를 눈치챘다 함을 들으니라 하나님이 그들의 꾀를 폐하셨으므로 우리가 다 성에 돌아와서 각각 일하였는데
16 그 때로부터 내 수하 사람들의 절반은 일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졌고 민장은 유다 온 족속의 뒤에 있었으며
17 성을 건축하는 자와 짐을 나르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18 건축하는 자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건축하며 나팔 부는 자는 내 곁에 섰었느니라
19 내가 귀족들과 민장들과 남은 백성에게 이르기를 이 공사는 크고 넓으므로 우리가 성에서 떨어져 거리가 먼즉
20 너희는 어디서든지 나팔 소리를 듣거든 그리로 모여서 우리에게로 나아오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느니라
21 우리가 이같이 공사하는데 무리의 절반은 동틀 때부터 별이 나기까지 창을 잡았으며
22 그 때에 내가 또 백성에게 말하기를 사람마다 그 종자와 함께 예루살렘 안에서 잘지니 밤에는 우리를 위하여 파수하겠고 낮에는 일하리라 하고
23 나나 내 형제들이나 종자들이나 나를 따라 파수하는 사람들이나 우리가 다 우리의 옷을 벗지 아니하였으며 물을 길으러 갈 때에도 각각 병기를 잡았느니라
느 4:15-23 / 우리가 이렇게 무장하고 대비하자, 원수들은 자기들의 계획이 폭로된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계획이 좌절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우리들은 모두 성벽으로 돌아와 자기의 일을 다시 시작하였다. 16-17) 그러나 바로 그날부터는 모든 사람의 반만 성벽공사를 하고, 나머지 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활과 방패로 무장을 하고서 사방을 경계하였다. 그리고 백성의 지도자들은 성벽공사를 하는 모든 사람들 뒤에서 격려하며 도와주었다. 흙짐을 나르는 이들은 한손으로 짐을 들고 다른 한손으로 무기를 들고 있었다. 18) 성벽을 쌓는 이들은 모두 허리에 칼을 차고 공사를 하였으며, 나는 항상 내 곁에 나팔수를 두어 유사시에는 언제라도 비상 나팔을 불 수 있게 하였다. 19) 그러고 공사 책임자들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두었다. `우리의 공사장은 아주 넓습니다. 우리는 지금 온 성벽을 수축하는 큰 공사를 벌이고 있기 때문에 서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20) 그러므로 여러분이 어디서 일을 하든지 비상 나팔 소리를 듣게 되면, 즉시 나팔소리를 따라 내게로 오시오. 우리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싸우실 것입니다!' 21) 우리는 모두 이런 식으로 이른 새벽 여명이 밝을 때부터 늦은 저녁 별이 돋을 때까지 성벽공사와 경계 근무를 반절씩 나누어 수행하였다. 22) 그리고 나는 밤 시간에 대해서도 이렇게 지시하였다. `모든 지휘관과 공사 책임자는 밤에도 자기의 부하들과 함께 예루살렘의 성안에서 머물러라' 그리하여 그들은 밤에는 경계를 서고, 낮에는 성벽공사를 하였다. 23) 나도 내 형제도, 내 수하의 군인들도, 내 경호원도 옷을 벗거나 무기를 놓고 잠을 잔 일이 없었다.
느헤미야의 지도력 아래 이스라엘이 든든한 방어 태세를 갖추게 되자 기습 공격으로 성벽 재건 공사를 멈추게 하려던 대적들의 의도는 좌절됩니다. 이스라엘은 계속 방어 태세를 단단하게 하면서 성벽 재건 공사를 이어갑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꾀를 폐하셨으므로(15-18) 느헤미야는 대적들의 전략을 간파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분열과 동요를 막아내어 그들의 군사적 도발을 무력화시켰습니다. 느헤미야는 이것을 하나님이 하신 일로 해석합니다. 탁월한 지도력은 신실한 신앙과 겸손이 맺는 열매입니다. 원수들의 방해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기에 느헤미야는 방어 전략을 세운 뒤 계속 성벽 재건 작업을 하도록 지시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한 손에는 건축 자재를, 한 손에는 병기를 들고 하나님의 공동체를 건축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리시리라(19-20) 치밀한 방어 전략을 세워 실행하면서도 느헤미야는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게 합니다. 느헤미야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하면서도 궁극적으로 우리를 지켜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실 것임을 확신합니다. 느헤미야의 이 균형 잡힌 신앙은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이 재건해야 할 성벽이 무엇인지를 암시합니다. 이스라엘이 지어야 할 것은 벽돌 성벽만이 아닙니다. 균형 잡힌 신앙과 한 분 하나님을 향해 같은 방향으로 서 있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이같이 공사하는데(21-23) 밤낮의 구분 없이 대적들을 방어하며 성벽 재건 공사를 담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매우 고단한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쉴 틈도 없이 날마다 경계와 긴장, 고된 노동으로 채워진 생활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기록에는 힘이 넘칩니다. 그들은 지금 조국 이스라엘의 주권을 회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의미 있는 일에 자신을 던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생명력은 환경이 내가 원하는 대로 갖춰질 때 밖에서부터 내 안으로 들어오는 능력이 아닙니다. 내가 거룩한 목표에 집중하고 영원한 의미를 찾기 위해 일할 때 내 안에서부터 솟아나 밖으로 뻗어나가는 능력입니다. 박동하는 그 생명력이 온 누리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적용: 당신은 날마다 치러야 할 영적 전쟁에서 손에 들어야 할 것들은 무엇입니까?
14세 때 점원으로 출발, 31세 때인 1869년 미국에서 가장 큰 백화점을 세운 백화점의 선구자 존 워너메이커는 말년에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제 재산은 건물과 땅만 해도 대략 2백억 달러가 됩니다. 이 가운데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은 11세의 시골 소년일 때 2달러 75센트를 주고 산 빨간 가죽의 성경입니다. 당시 돈이 없어 할부로 구입했는데 이 성경은 가장 귀한 재산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성경이 오늘의 저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 설 교 >
너희 집을 위하여 싸우라
느 4:14-20 / 남수연목사
5월 가정의 달을 보내고 있는 데 성도님들 가정이 다 평안하십니까?
행복한 가정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었지만 말씀대로 사는 것은 오래 훈련하고 인내하고 마음을 다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어제 기사를 보니 돈이 많을수록 가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하던데요.
돈이 많지 않은 우리는 가족이 아주 많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가족을 만드시고 가족을 사랑할 권리와 책임을 주셨기에 가족이 단합될 때 기쁨이 있고 힘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좋은 데 가정은 원만하지 못하다는 것은 모순된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연조가 깊어질수록 가정은 더욱 행복해져야 맞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행복계명이 우리 가정에서부터 꼭 이루어지도록 함께 노력하길 원합니다.
오늘은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의 말씀을 통해 영적인 가족인 교회 공동체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느헤미야서가 성경 역사의 어느 부분쯤에 해당하는지를 먼저 아는 게 본문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대 이스라엘의 성벽공사를 현재의 나와 관련짓기 힘듭니다.
성경을 배경까지 꼼꼼히 살펴보는 게 우리 관심사인 현실문제가 아니라 귀에 잘 안 들어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사람은 무엇을 듣고, 뇌를 무엇으로 채우냐에 따라 바뀝니다.
꾸준히 말씀을 듣고 깨달으면 그 말씀이 내면에 조금씩 채워지고 말씀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고 말씀이 사람을 점점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이 말씀을 통해 역사하셔야만 사람의 내면이 변합니다.
우리가 꾸준히 성장하고 신앙인격이 성숙해지지 않으면 내 자신도 내가 권태롭습니다.
가족과 이웃들도 계속 자라지 않으면 서로 지겨워집니다.
인격에 변화가 없는 서로를 바라보며 지겨워하는 것이죠.
우리는 다 자란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서 그리스도가 느껴질 때까지 자라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오늘도 말씀을 잘 듣고 생각하는 가운데 믿음이 충전되고 성장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선 구원의 시초에서 출발해야 오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역사에서 나의 뿌리를 발견하고 존재를 이해해야 합니다.
단군에서부터 나의 뿌리를 찾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범죄하고 떠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먼저 한 민족을 택하고 기르십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혈통을 따라 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요셉 시절에 기근으로 인해 애굽에 내려갔다 눌러 사는 바람에 결국 노예로 억류됩니다.
그리고 모세의 영도 아래 애굽을 탈출 해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토 가나안 땅을 향합니다.
그런데 출애굽1세대의 저항과 불순종으로 가나안에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40년을 광야에서 보내죠.
그 다음세대가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 가나안 땅에 입국을 합니다.
그리고 정복전쟁을 통해 원주민을 몰아내고 약속의 땅에 정착합니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법대로 살지 못하고 가나안 문명에 동화되고 원주민을 능가하게 타락합니다.
결국 그들 역시 심판을 받아 가나안에서 쫒겨나고 국가는 붕괴됩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해 처절하게 살육 당하고 사방으로 흩어지고 포로로 잡혀가죠.
이 일이 일어날 것을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들이 계속해서 경고하며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두려운 것은 패망 당시의 이스라엘의 신앙과 사회모습이 오늘 우리 한국교회와 사회상과 너무나 닮았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그들이 끝까지 회개하지 않아 망할 것을 예고했고 결국 이스라엘은 그 길을 고집하다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그들을 무조건적으로 용서하시고 70년 뒤에는 다시 고국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 말씀대로 70년 뒤에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은 놀라운 칙령을 내립니다.
유대인 포로들은 고국으로 귀환해서 여호와의 성전을 세우고 거기서 살라는 것입니다.
이 칙령에 따라 3차에 걸쳐 포로귀환이 일어나죠.
1차 포로귀환은 총독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돌아와 불타 없어진 성전을 건축합니다.
2차 포로귀환에서는 에스라을 중심으로 학자들이 돌아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칩니다.
이 내용이 에스라서에 나옵니다.
그리고 3차 포로귀환에서 본문의 느헤미야 총독이 돌아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해서 예루살렘 성을 복구시킵니다.
얼핏 보면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실패했던 구원 계획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지만 그게 아닙니다.
고국으로 다시 돌아온 귀환자들은 과거와 똑같은 죄를 되풀이 합니다.
과거와 똑같이 이방인과 통혼을 하고, 악덕을 행하는 모습이 느헤미야와 에스라, 말라기 등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이스라엘을 데리고 무한반복적으로 구원계획을 실패하시려는 게 아닙니다.
이미 이스라엘은 사람이 절대로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을 해낸 것입니다.
광야에 살던, 축복의 땅에 살던, 만나를 먹던, 버터와 꿀을 먹던 인간은 본성인 악을 따르지, 선하고 정의로운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눈으로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고, 여리고 성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보고도 하나님께 맞춰 살지 못한 게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을 다시 가나안으로 불러 들인 것은 그런 역사를 되풀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선지자와 에스겔선지자를 통해 포로귀환을 약속하실 때 분명히 무언가 달라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깨뜨린 구언약 대신 새언약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언약은 돌판에 새긴 명령이 아니라 새마음을 주시고 마음판에 새겨주시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를 통해 성령께서 사람들에게 이전에 없던 새마음을 주셔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새마음을 받지 않으면 아무리 의지적으로 노력해도 겉은 흉내 낼지 모르지만 심정적으로 올바르게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스룹바벨을 통한 성전 건축도 동물제사를 계속해서 드리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진정성 없는 제사 받으시기에 신물이 난다고 하셨습니다.
포로귀환 뒤에 재건된 성전은 다윗의 혈통인 스룹바벨의 족보를 타고 장차 태어나실 참성전이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임을 스가랴서에서 암시해줍니다.
오늘 예루살렘 성곽을 재건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느헤미야가 귀환자들과 함께 세운 예루살렘 성곽은 성전 되신 예수님을 모신 신약시대의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의 성벽재건 속에는 교회를 세우고 성도들의 믿음을 세우는 중요한 원리들이 담겨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살펴보며 교회를 어떻게 세울 것인지, 우리의 믿음을 어떻게 건축할 것인지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성벽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잠깐 살펴보았지만 1차귀환자들에 의해 성전은 세워졌지만 예루살렘 도시 전체를 보호할 성벽은 멸망 당시 무너진 폐허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도시를 보호해줄 성벽이 없다 보니 집도 없었고 사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성벽이 없는 도시는 언제고 외세의 침략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성읍이 발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성전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영광스런 수도가 되어야 하는 데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성전만 덩그러니 세워졌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의 인적이 끊어진 곳이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우가 들끓었던 것 같습니다.
성벽공사를 죽기 살기로 방해했던 대적들이 이 공사를 비웃으며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질 것이라고 말한 게 이런 예루살렘의 형편을 말하는 것이죠.
폐허가 된 하나님의 도성에 성벽을 쌓아 사람이 살게 하고 하나님의 성전과 성읍에 영광이 가득 차는 것이 느헤미야의 열망이었습니다.
지난 주 정옥금집사님 기도하실 때 아직 빈 좌석이 많은 것을 안타까워하시는 마음이 바로 그 마음입니다.
우리가 느끼던 못느끼던 이미 성벽재건의 임무와 마찬가지인 교회를 세우는 일에 우리가 다 헌신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에 성벽이 재건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필수였던 것처럼 성도들의 믿음을 위해서는 반드시 교회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았던 성도라 해도 교회를 띄엄띄엄 나오면 신앙은 곧 퇴보합니다.
기독교박해국 신자들이 모이면 위험한 걸 몰라서 그렇게 몰래몰래 모이겠습니까?
위험을 알면서도 신앙의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촛불을 켜고 지하교회라도 모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거듭나게 하신 성령께서는 반드시 머리되신 그리스도에 우리를 붙이실 뿐 아니라 다른 세포들과, 지체들과도 교회로 연결시켜 놓으십니다.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를 통해 이것을 확실히 말씀하시죠?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엡5:16)
몸이 자라기 위해서는 머리되신 예수님께 붙어있어야 함은 물론이고 성도들이 서로 연결되고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것보다 우리가 더 잘 자라날 방법은 없습니다.
복된 믿음으로 자라기 위해서 반드시 교회에 잘 소속되고 교회의 한 세포가 되어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헌신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느헤미야와 함께 성벽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긴 명단이 앞 3장에 올라있습니다.
세상의 어느 위대한 건물을 세웠다 한들 성경에 기록이 되겠습니까?
요즘은 큰 건축물을 세울 때 공헌한 인물을 벽에 새겨 넣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성벽을 세운 사람들을 아예 성경에 기록해서 지구역사 끝까지 기억되도록 못을 박아 놓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교회를 위해 수고하고 헌신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약속인 줄 믿습니다.
느헤미야와 함께 성벽 공사에 가담한 사람들을 보면 가지각색입니다.
각 지방의 유력한 부호와 관료들부터 제사장들이 있는가 하면, 기능공과 상인들, 외국 사람들 까지 참가했습니다.
가까이 자기 집 앞의 성벽을 건축한 사람도 있고, 아주 멀리서 와서 참여한 사람도 있습니다.
아들과 손자와 함께 성벽공사를 분담한 사람도 있습니다.
3장12절에 보면 ‘살룸과 그의 딸들’이 중수했다고 나옵니다.
당시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던 여자들까지도 건축자 명단에 넣었죠?
그런데 반면 5절에 보면 귀족들 중에도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에 남녀노소와 빈부가 없이 다 참여할 수 있지만 누구나 그 일을 자원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벽공사는 만만하게 자원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주택 담벼락 세우는 일이 아닙니다.
옛 성벽의 무너진 잔해를 치우는 것만 해도 힘이 다 빠졌다고 합니다.
돌무더기를 실어 나르고 육중한 새 돌을 얹어 높이 10미터의 새 성벽을 4킬로미터 남짓 세우는 일은 육체적, 시간적, 재정적으로도 큰 희생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을 보면 계속해서 성벽재건을 방해하는 이웃 민족들이 생명까지 위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나 분위기에 휩쓸려서 자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돈이 많고 인력이 확보 된 귀족들도 섣불리 참여하지 않은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일도 마찬가지고 성도들을 믿음으로 세우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냥 멋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그 육체가 땅에 떨어지고 짓밟혀지시고 묻혀서 죽은 한 알의 밀알이 되신 것입니다.
그렇게 죽으심으로 구원의 열매를 맺으신 것처럼 성도들의 희생과 헌신이 없이는 교회가 세워질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의 성도가 세워지기 위해서만도 누군가가 그 밑에서 떨어져 죽어줘야 합니다.
우리가 가족이나 친구를 전도해서 교회에 심었다면 그 과정 속에는 내 자신을 죽이고 속이 썩는 과정을 분명히 겪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만 보더라도 성벽재건에 참여한 사람들의 고충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재건을 경계한 대적들의 위협 속에 한 손으로 일하고 한 손으로 병기를 잡았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나를 위해, 내 가업을 이루는 것만도 전력을 다해 노력해도 될까말까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교회를 섬기기 위해 시간과 물질을 떼어 헌신하는 것은 한손으로 일하고 한 손으로 무기를 잡은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많은 한국교회 성도들이 누군가가 세워 놓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편하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 교회를 세우기 위해 누군가 눈물과 땀과 기도로 희생한 것은 생각하지 않죠.
교회를 세우는게 얼마나 힘듭니까?
요즘 한국교회 성도들 중에 누가 주일 아침에 반찬통 챙겨들고 정신없이 달려오고 가스렌지 앞에서 땀 흘립니까?
교회 형편을 생각해서 만원 한 장을 더 헌금봉투에 넣는 그런 성도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한 대형교회 헌금함 앞에서 지켜보았더니 많은 사람들이 주일헌금도 하지 않고 그냥 들어가더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큰 교회에서 편리하게 신앙생활하고 싶은 마음이면 교회 세우는 일에 가담하지 못합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교회가 세워질 수 없었습니다.
오늘 교회를 세우는 사람들이 없다면 미래의 한국교회도 없는 것입니다.
유럽의 그 큰 교회들이 부흥할 때 작은 교회가 무슨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더 이상 새로운 교회를 세우지 않은 결과 신앙을 이어갈 젊은 교회가 사라졌습니다.
교회의 부흥과 풍요를 누리기만 하던 세대가 늙고 세상을 떠나자 교회도 신앙도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우리가 기왕 하나님을 섬기는 데 구원도 받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 기쁘게 헌신한 것은 말할 수 없는 영광이고 장차 주님 앞에서 큰 위로와 기쁨이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내가 일궈 낸 무엇을 갖고 하나님 앞에서 삶을 정산하시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 교회를 가장 많이 세운 사람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아마 대의그룹 창업주인 채의0 장로님이 아닐까 합니다.
이분은 평생 백개 교회를 세우겠다는 믿음을 갖고 쉬지 않고 헌신했고 이미 백개가 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돈 있어야 교회를 세우죠, 저 사업 합니다. 밀어주세요.’
이 분이 그렇게 말하고 삼성을 그만두고 대의그룹을 창업했습니다.
그렇게 세워진 대의그룹은 한국GM 등 자동차 회사에 주요부품을 만들어 연매출 5천억에 달하는 기업이 된 것입니다.
세계 60여개국을 다니며 전도를 하고 교회를 세운 채장로님은 일부 나라에서는 지명수배를 당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교회를 봉헌할 때 마을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며 눈물을 흘리고 장로님도 따라서 운다고 합니다.
그동안 세 번이나 사업의 위기를 겪기도 하고 건강의 어려움도 만났습니다.
갑상선 암으로 투병도 하고 심장병 수술을 받기도 하고 혈압이 높고 당뇨병도 있었고 과로로 중풍에 걸린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백 개 교회를 다 세울 무렵 그 지병들이 전부 다 나았다고 합니다.
채장로님은 3대째 장로가족이 되었고 가족, 친지 550명 전원이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 명의 자녀들에겐 더 큰 축복을 해서 천개의 교회를 세우라고 했다고 합니다.
교회를 세우려면 그만한 복도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큰 일은 하지 못했다 해도 우리 모두가 작은 교회 하나를 건강하게 세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와 자손들이 복을 받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나와 구원받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그러나 성벽재건이 얼마나 힘든지 건축이 아니라 전투라는 것입니다.
성벽을 재건하는 것, 안정되게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를 세우는 것, 우리의 믿음을 그리스도 안에 견고히 세우는 것은 건축이 아니라 전투입니다.
우리가 오늘 교회에 나온 것도 영적인 전투이고 거기서 승리한 것입니다.
교회가 세워지고 성도들의 믿음이 그 안에서 행복하고 바르게 성장하는 것을 마귀의 세력은 결사적으로 가로막습니다.
본문의 앞뒤로 보면 얼마나 집요하게 성벽재건을 훼방하는 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조롱과 협박, 그리고 공동체 내부엔 피로와 낙담이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14절에서 이 모든 일로 낙담한 사람들을 모아 놓고 강력하게 권면합니다.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성벽을 재건하는 싸움이 결국은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성벽을 세우지 못해 신앙의 바르게 세워지지 못했던 상황에서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가 5장에 나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자기 자식들을 종으로 잡히고 연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자들은 부당하게 높은 이자를 받아 갚지 못하는 양민들을 종으로 부리고 있었습니다.
없는 자는 자식도 내다 팔아야 하는 고통을 겪고 있고, 있는 자는 하나님께또 심판당할 부도덕한 죄를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죠.
이런 일들이 다 예루살렘성곽이 없어 성전 중심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했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세우며 믿음을 견고히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내가 살고 가족들도 구원으로 이끌게 될 것입니다.
이 영적인 전투에서 우리만 싸우는 게 아닙니다.
신앙을 위해 우리가 옳은 일을 해나가는 중에 다가오는 어려운 문제들은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십니다.
15절에 보면 하나님이 대적들의 꾀를 폐하셨다고 합니다.
대적들이 꾀를 내어 성벽 건설을 방해하려 했지만 그들의 연합작전이 틀어지도록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합니다.
우리 힘으로 되지 않을 일들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20절에도 말씀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우리가 현실의 문제들이 코 앞에 닥쳐 낙망케 할때도 끝까지 주님의 교회에서 섬기며 나의 신앙을 바로 세우기 위해 힘쓸 때, 예수님께서도 우리 교회와 우리의 자녀들과 가업을 위해 함께 싸우고 일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지난 주에 우리 현민이가 필경대 위에 성경을 가지런히 정리를 했습니다.
누가 시켜서 한 게 아니라 교회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스스로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식당 바닥에 휴지가 떨어져 있으면 손님이 줍습니까, 주인이 줍습니까?
현민이가 교회의 주인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떠받치고 있는 중요한 기둥이고 교회의 주인입니다.
5월 가정의 달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새가족이 된 우리교회를 더욱 사랑하고 서로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인생의 재건축
느 4:15-18 / 김상수목사
운동장에서 달리던 자녀가 넘어져서 울 때, 안타까운 심정으로 다시 일어서 달려가기를 가장 원하는 사람이 아마 부모님일 것이다. 만약 달리다 넘어진 내 자식을 보면서 옆에 있는 사람들이 욕한다면, 어떤 부모라도 피가 거꾸로 솟지 않을 부모가 없을 것이다.
망나니로 소문난 아들을 둔 어느 할머니가 있었다. 그 아들은 집을 나가서 들어오지도 않았다. 집나간 아들을 그 할머니는 하염없이 기다리고만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변 사람들이 말했다.
“할머니 그까짓 녀석... 자식하나 없는 샘치고 잊어 버리세요”
그때 할머니가 말했다.
“나도 그 애가 당신의 자식이었다면 벌써 잊었을거요”
다른 사람들은 포기하라고 종용해도, 포기할 수 없는 마음 바로 이것이 어머니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처럼 끝까지 잘되길 원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되신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은 비록 우리들이 넘어졌다 할지라도 심지어는 탕자처럼 집을 나갔다 할지라도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들이 일어서 돌아와서 남은 인생의 경주를 완주하기를 바란다.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것, 하나님을 떠났다할지라도 다시 돌아오는 것... 바로 그것이 회복(回復)이요 회개(悔改)다. 만약 우리의 인생을 건축물에 비유한다면 재건(再建)이라는 단어가 회복과 개념상 가장 유사하지 않을까 싶다.
오래된 아파트나 집이라도 재건축이나 리모델링을 하게 되면, 처음보다 더 가치 있게 되어서 건물이 훨씬 더 가치 있게 된다는 것은 극히 상식적인 말이다. 우리교회도 예배당을 새로 리모델링을 하니까 훨씬 처음보다 아름답고 가치 있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오래된 건물같은 우리의 육신과 삶이라할 지라도 주님께서 새롭게 리모델링해 주시면 그 이전보다 훨씬 아름답고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또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버지 되신 우리 주님의 마음이다.
오늘 본문의 상황은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헤미야의 지도 아래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여 완성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 것은 단순히 느헤미야나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바램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나님은 느헤미야의 마음에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자 하는 열정과 비전을 주셨고,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왕의 허락을 받아서 성벽재건을 추진하였다.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다.
이처럼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도 동일하지 않겠는가? 우리 인생의 신축이든 재건이든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분명한 것은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멋진 인생의 성벽을 완성하여 봉헌하고, 이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기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의 생명을 이 땅에 내셨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주셨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떤 면에서 본다면 하나님은 우리들 자신보다도 더 간절하게 우리의 회복을 원하시고, 원하실 뿐만 아니라, 일으켜 주신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느헤미야와 유다백성들이 성벽을 재건하는데 있어서 방해자들이 있었다. 오늘 본문 15절 말씀에 보면, “우리의 대적이 자기의 뜻을 우리가 알았다함을 들으니라”라고 했다. 여기서 대적(對敵)은 직접으로는 그 당시에 성벽재건을 방해했던 호른사람 산발랏, 암몬사람 도비야, 아라비아 사람 게셈 같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당시에 예루살렘 주변의 사마리아 등을 다스리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그 이전부터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 사이를 넘다들면서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노략질하면서 고통을 주던 자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성벽이 건축되면 노략질하고 도둑질을 못하게 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성벽건축을 방해하고자 했다.
이러한 원수 대적들이 느헤미야와 유다백성들을 공격해 올 때, 온갖 비방하는 나쁜 말과 나쁜 계략으로 공격하고자 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꼬드겨서 예루살렘을 쳐서 요란케 하고자 했다.
여러분 우리들의 인생재건에도 이런 대적들과 같은 대적이 있을 수 있다. 끊임없이 우리를 무너뜨리고 공격하고, 나는 싸우고 싶지 않아도 일부러 두고두고 싸움을 걸어오는 못된먹은 인간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못된 자들의 그 배후에는 그들을 혼미케하고 이용하는 마귀 사단이 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 말씀을 보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이 말씀에 보면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할 때, 그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방해하고 무너뜨리려는 대적이 있는데, 그 대적의 정체가 뭔지를 말해주고 있다. 바로 마귀 사단이다. 그러니까 느헤미야와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할 때에도 그들을 대적하고 방해한 사람들의 배후에는 사실은 마귀 사단이 있는 것이다.
이 마귀 사단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무너뜨리려고 공격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무기 중의 하나가 말(言)이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가장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간편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무기다. 마귀 사단은 ‘나쁜 말과 비웃음’으로 우리의 마음에 분노의 파도를 일으켜서 올바른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고, 좌절감과 열등감을 줘서 넘어지게 하려고 한다. 마귀는 대체로 나에게 중요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가까운 사람들 심지어는 교인들이나 가족들, 배우자를 꼬드겨서 공격하기도 한다.
오늘 본문에 보면 도비야 같은 대적은 심지어 “저들이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질” 것이라고 하면서 사람의 감정을 슬슬 긁는 것을 볼 수 있다. 느헤미야 4장 1-3절을 보자.
“1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을 비웃으며 2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말하여 가로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의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케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필역하려는가, 소화된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3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섰다가 가로되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느 4:1-3)
그런가하면 어떤 때는 직접적인 공격을 할 것처럼 위협(협박)해서 두려움을 주고 그로인해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려고 시도한다. 비난을 통한 감정적인 자극과 분열작전 그리고 협박을 통한 두려움을 주기는 사단이 성도들을 공격할 때, 매우 즐겨 사용하는 단골 메뉴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지 않는다. 그 대신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을 주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1:7)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마귀 사단의 공격과 대적자들의 방해를 극복하고 인생의 재건축, 인생의 회복을 성공적으로 이룰 것인가?(승리의 방법) 오늘 본문은 그 중요한 승리의 원리 중의 한 가지를 말해준다. 오늘 본문에 보면 느헤미야는 대적자들의 책략에 대해서 이미 눈치를 챘다. 그래서 한 손에는 일하는 도구를 또 한 손에는 병기(창, 방패, 활)를 잡고 일을 하게 했다. 심지어 느헤미야 4장 23절에 보면 “내나 내 형제들이나 종자들이나 나를 좇아 파수하는 사람들이나 다 그 옷을 벗지 아니하였으며 물을 길으러 갈 때에도 기계를 잡았었느니라”라고 했다.
쉽게 말하면 그들은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했다. 이것이 인생의 성벽을 재건함에 있어서 깨어 있어야할 영적싸움의 중요한 원리다. 사실 우리들도 평상시에도 마귀의 공격이 언제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가 대적자들의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대비했던 것처럼 우리도 대비해야 한다. 방어운전이라는 것이 있는데, 언제든지 돌발상황이 발행해도 대처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느헤미야가 백성들에게 들게했던 기계(병기)는 무엇일까? 직접적으로 창칼이었겠지만, 지금 우리들의 영적싸움에서 본다면 그것은 말씀과 기도의 병기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느헤미야는 모든 대적들의 공격 앞에서, 그 이전에 아닥사스다 왕 앞에서도 순간순간 끊임없이 기도함으로 깨어있던 사람이다. 이러한 기도들이 그로 하여금 영적으로 민감하게 했고, 원수의 술책들에서 벗어나는 지혜를 얻게 했다. 이처럼 느헤미야가 이 모든 과정에서 기도했던 모습들을 느헤미야서의 도처에서 발견된다(느4:4, 4:9, 5:19, 6:9, 6:14)
이러한 과정들을 거쳐서 마침내 성벽재건이 완성되었다. 15-16절을 보자.
“15성 역사가 오십이 일 만에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 16우리 모든 대적과 사면 이방 사람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스스로 낙담하였으니 이는 이 역사를 우리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느6:15-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의 성벽이 재건되는 것, 회복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시 일어나야 한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은 승리를 말씀과 기도 가운데 믿음으로 누려야 한다. 그래서 모든 대적자의 궤계를 성령의 전신갑주로 대적하고, 예전의 모습보다 더 가치있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