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교회의 문화적인 행사는 가상한 모습이긴 하지만
하나님은 오늘도 여전히 너희들이 살 길은 오직 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듣고 성령 안에 거하고,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집이 되어가야 하는데 교회가 놀이터가 되어 버린다면 이건 큰일입니다.
인생의 문제를 푸는 방법은 오직 한 길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 오직 이 한 길 밖에 없습니다.
내 인생의 매듭을 푸는 방법도 오직 이 한 길 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7장은 성경적인 인간학 또는 심리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을 이해한다면 기독교를 확실하게 이해하는 겁니다.
그 당시 바울은 율법에 의해 돌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로마서를 쓴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으로는 왜 구원이 안 되느냐 하는 점을
로마서 7장에서 확실하게 밝혀 줍니다.
Q. 어떤 원리로 율법에서 자유를 얻게 되었나요?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 하느니라(롬7:1-3)
A. 법이라면 하나의 원리라고 생각하세요.
이 원리를 알고 있는 자들에게 말한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그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만 주인 노릇하지 않는가?
이 원리를 아는 자들에게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7장은 변증론의 최첨단입니다.
미국에서 바빙크의 변증학 논문으로 유명한 교수가 강의하는
내용을 듣고 제가 로마서 7장을 설명하면 되는데 뭐 그리
어렵게 말하느냐고 하니 그 분이 성경은 목사님이 연구하시고
자신은 신학자이기 때문에 신학을 연구한다고 해서 웃었습니다.
그 당시 여자들은 남편의 소유 개념으로 있었습니다.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은 아내는 법적으로 남편에게 묶여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 하신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보세요. 우리를 율법에서 해방시켜 하나님의 자녀로 삼는 일을 성취하신 겁니다.
‘남편에게 순복하라’하는 것은 이미 창세기 3장에서 정해 놓은 법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육체의 원리입니다. 이 원리를 통해 바울은 율법이란
법에서 어떻게 해방이 되는가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다 이건 당연한 원리입니다.
비울이 음녀와 자유하는 여자를 대조하는 것은
이런 원리를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 하는 말입니다.
4절은 1-3절의 내용의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롬7:4)
‘그러므로’ 이런 원리에 의해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해 율법에 대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른 이 곧 다른 남자에게 가서는 이 분이 바로 죽은 자들에게서
살아난 자이신데 같은 분이면서 다른 분이십니다. 곧 예수가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원리는 다른 어떤 종교에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걸 모르면 기독교가 뭔지 모르는 겁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게 속했지 않느냐고 로마서 6장에서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아 장사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그의 살으심과 연합되어 새 생명 가운데 행하려 하여 하심이라’(롬6:4)
율법에 대해 죽임을 당했지 않느냐?
그래서 다른 이에게 가서 곧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자,
다시 일으키심을 받은 자 누구시지요?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죽었는데 또 이 분이 다시 살아나셨으니까
그리고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니까 같은 분인데 다른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이라고 합니다. 예수였던 분이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실제로 성경은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하는데
지금 그 예수님이 우리 안에 누구로 말미암아 계십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아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보혜사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서 다른 이란 내용이 다르다는 뜻이 아니라 같은데 다른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서 그에게 가서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열매가 안 맺히는 이유는 이 원리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육신의 껍데기로 열매를 맺으려고 하기 때문에 교회라는 유니폼을 입혀
거짓 연기를 시키고 있는 거죠. 그래서 냇가의 조약돌 같이 반질거리기만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이 원리가 바로 율법의 완성으로 가는 길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를 말합니다.
율법아래에 있는 신자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맺긴 맺습니다만 어떤 열매를 맺는가요? 곧 행위의 열매입니다.
겉모양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걸 유대인의 상징인 무화과라고 합니다.
꽃도 아니고 씨도 아닌 휴지 뭉쳐 놓은 것 같은 모습이 바로 무화과입니다.
그러나 새 생명 가운데 있는 사람 곧 다른 보혜사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내적인 열매가 맺힙니다. 때가 되면 그 열매가 밖으로 다 드러납니다.
이게 바로 세상의 소금과 빛입니다.
무화과도 열매는 열매입니다. 그러나 씨가 없어요.
그래서 무화과는 씨로 번식하는 것이 아니고 꺾꽂이를 합니다.
모든 신자들이 그 속에 생명이 없으면 다른 사람을 구원시키지 못합니다.
자기 같은 사람을 만들어 자기도 천국에 안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만들어요.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한번 왔다가 두 번 삽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약 바라는 것이 이생뿐이면
우리는 가장 불쌍한 자라고 말합니다(고전15:19)
지금 이 세상의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풀 곳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딱 하나의 방법밖에 없습니다.
다윗을 한번 보세요. 여호와는 나의 산성이시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라.
사망에 눌린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 오직 하나 밖에 없는데
그 길이 막혀 버리면 참 힘들어요. 세상 사람들은 방법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the way 하나 밖에 없어요.
우리는 다윗에게 배워야 합니다. 그의 원수들이, 대적들이
그의 살을 먹으려고 삥 둘러쌌지만 오직 푸는 방법은 내가 여호와
전에 거하여 그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를 사모할 것이니라(시27:4)
다윗에게는 오직 이길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죄나 인생의 문제에 있어서 묶는 분도 주님이시고
푸는 분도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문제는 지금 현재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방법으로 풀어내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가치가 하락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두 번째의 삶을 삽니다.
이 남편에서 죽고 저 남편을 다라 육의 자리를 영의 자리로 옮겨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는 해산의 수고로 구원을 받는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측에서 볼 때 성도는 여성명사로 다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신부들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의 십자가를 따라 해산의 수고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 그리스도의 족보에 올라갑니다.
신자들이 너무 어리니까 너무 답답하니까 주의 종들이
어떻게 하면 성도들에게 기쁨을 줄까 해서 교회가 여러 가지
방법이나 이벤트를 동원하는 것은 가상한 일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문제를 푸는 방법을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 한 길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첫댓글 좋은 신앙 글 감사합니다.
💖움켜쥔 행복은 씨앗이지만 나누는 행복은 꽃이고 열매라고 합니다.
오늘도 꽃피고 열매 맺는 행복한 하루 힘차게 만들어 가시길 기원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