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토) 이른 새벽.
05시에 차를 몰아 '홍천군'으로 갔다.
인적 없는 깊은 산에서 가을의 진객 '송이'를 딸 요량이었다.
며칠째 비가 오락가락 했던 터라 미끄럽고 함난한 산행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산행'이라고 표현하기엔 어감 상, 액티비티 행태 상 영 마뜩찮았지만 길도 없는 밀림 같은 숲 속을 헤집고 다녀야 했기에 어쨌든 '산행'은 '산행'일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갔다.
떠꺼머리 총각 같은, 약간은 무식하고 순수하나 거친 야생에 최적화 되어 있는 중년 사내 세 명이서 홍천에 있는 친구의 '농막'에 모여들었다.
커피를 마신 다음 단디 채비를 차렸다.
중 등산화나 군화를 신었고, 물과 막걸리 그리고 단팥빵과 행동식, 육포 등을 챙겼다.
정글도, 황새목 낫(조선낫), 큼지막한 작대기, 장갑, 모자, 나침반까지 배낭안에 넣었다.
줄기차게 가랑비가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했지만 우린 개의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길도 없는 심산의 비탈은 그야말로 '스키 슬로프' 같았다.
사정없이 미끄러졌고 넘어지기 일쑤였다.
충분히 예상했던 터라 낭패감은 없었으나 신체가 긁히고 까지고 아팠다.
가끔씩 나도 모르게 육두문자가 흘렀다.
"아이고, 쓰불"
어느 땐 관절과 뼈가 아렸다.
얼굴과 손발에 수도 없이 '거미줄'이 엉겨붙었다.
그래도 연신 히죽거리며 산을 넘고 또 넘었다.
내가 생각해도 미친 놈들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피식피식 실소가 흘렀다.
수많은 나뭇가지와 입사귀들이 이미 빗물을 잔뜩 머금고 있던 터라 내 육신과 살짝 닿기만 해도 샤워기를 튼 것처럼 굵은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졌고 전신을 적셨다.
"그래, 좋다"
차라리 시원하고 청량했다.
온 몸은 진작에 진흙투성이로 변했고 게다가 습해서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거미줄과 온갖 깔따구까지 내 이목구비를 집중적으로 괴롭혔다.
이런 시츄에이션엔 이미 이골이 난 몸이라 미끄러져 바위나 나무에 부딪혀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한 그냥 실실 웃어넘기며 '송이' 찾기에 진력했다.
친구들과는 50미터에서 100미터 간격으로 떨어져 산을 수색했기에 간식을 먹을 때가 아니면 대화를 나눌 수도 없었다.
그런 상황이라 나는 내 자신과 자문자답하며 심산을 헤집고 다녔다.
"엎친데 덮친격이라...비슷한 말이 뭐가 있더라?"
"일단 '설상가상'이 있겠고, '거익태산', '전호후랑', '첩첩산중', '병상첨병' 정도가 떠오르네. 그렇지?"
이런 식이었다.
'송이'를 찾기 위해 산행하는 긴 시간 동안 이런 식으로 나에게 질문도 하고 머릿속으로 시도 쓰고 수필도 썼다.
다양한 주제에 대해 스스로에게 묻고 답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 동안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내 단골 '레파토리'는 '조용필', '김현식', '김정호', '김광석', '장사익', '정태춘' 의 노래인데 요즘엔 코로스 오버 재능꾼, '포레스텔라'가 추가되었다.
그들은 젊고 파워풀하며 기막힌 천상의 하모니로 내 넋을 빼앗기 일쑤였다.
8월에도 한번 언급했지만, 가을철에 독이 잔뜩 오른 '독사'를 몇 군데에서 만났다.
산에서 독사를 접해 본 사람들은 잘 알 것이라 믿는다.
나와 마주친 뱀들을 마치 다리가 달린 것 처럼 뛰어서 도망쳤다.
"에이~ 거짓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당근 이해한다.
그러나 정말이다.
뱀에 어찌 다리가 달렸겠는가.
그런데 놀란 뱀들이 도망칠 때 보면 자메이카의 영웅 '우산인 볼트'도 저리가라다.
진짜다.
순식간에 사라진다.
뛰어난 '스프린터'다.
살기 위한 생명체들의 본능이다.
결론적으로 얘기하지면 '송이'를 따기엔 이른 싯점이었다.
작년엔 시월에 채취했었다.
와서 훑어보니 구월 중순은 너무 이른 시기였다.
"길 없는 길을 뚫고 거친 야생에서 좋은 경험했다고 치자"며 이름 모를 산 속 능선에서 세 사내들은 서로 막걸리를 나눠 마셨다.
육포도 씹었고 단팥빵도 게눈 감추듯 먹었다.
환상이었다.
'싸리', '목이', '석이'만 눈에 보이는 대로 따왔다.
'송이'와 '노루궁뎅이', '능이'를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것이 산을 찾는 자의 예의이자 자세 아니겠는가.
하산하는 길에 또 몇 번 미끄러졌다.
빗물에 흠뻑 젖은 산 비탈은 워터파크의 슬라이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농막에 도착해 채취한 버석들을 응달에 널어 말리고 찬물로 샤워했다.
비로소 사람의 형상을 되찾은 느낌이었다.
감사했다.
차양막이 길게 드리워진 그늘 아래에 야외 목재 탁자를 옮겨 놓고 거기에 앉아 간단한 식사와 함께 술을 한 잔 하기로 했다.
홍천에 도착하기 전, 양평의 24시간 해장국집에서 사온 '소머리국'을 개스버너 위에 놓고 다시 푹푹 끓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키들키들 환호하며 웃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영락없이 물에 빠진 새앙쥐가 될 뻔했으니까.
'천우신조'를 외치며 건배했다.
깊은 산속에서 맞는 멋진 주말 오후였다.
그리고 시종일관 다감하고 고즈넉했다.
친구가 직접 만든 차양막은 강찰 파이프를 여러개 세운 다음 촘촘하게 서까래를 지르고 그 위에 비닐을 덮은 형태였다.
그 다음엔 비닐 위에 검정 부직포를 덧씌워 고정했다.
바람은 잘 통하면서 비와 햇빛을 동시에 차단해 주는 아기자기한 공간이었다.
바닥에 깔린 인조잔디 풍의 매트가 청결도와 멋스러움을 한껏 뽑내고 있었다.
얼마 만인가.
장대비가 차양막에 투닥투닥 떨어지는 소리를 들어가며 친구들과 한 잔 술을 기울였던 그 소중한 시간들이.
사방팔방으로 깊은 산 중, 굵은 장대비, 넓은 차양막, 야외 목재 탁자, 맛있는 소머리국밥, 잘 익은 깍뚜기와 파김치, 소맥, 깊은 우정, 인적 없는 산하, 맑은 공기와 물 그리고 여러번의 건배.
어느새 '이순'이 된 동갑내기 세 사람의 또 하나의 '판타지'는 그렇게 각자의 마음판에 색다른 '스토리텔링'으로 새겨지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곳에 있던 자 잊지 못하고 그곳에 없던 자 알지 못하리"
행복한 주말이었다.
삶은 거저 받은 선물이 아니다.
생명을 허락하신 신으로부터 잠시 빌린 것이다.
그러므로 잘 쓰고 때가 되면 깔끔하게 돌려줘야 한다고 믿는다.
각자의 무대를 마무리 지을 때 조금이라도 ''머뭇거리거나 애걸하지 말자"며 호기있게 ''파이팅''을 외쳤다.
그랬다.
인생은 '생야전기현, 사야전기현'이니까.
25년 상반기에 티벳의 '따꾸냥 봉'(5,038 M)으로 떠나기로 뜻을 모았다.
그곳에서 세 사내들의 옹골진 '오체투지'를 다짐하면서 식사를 잘 마쳤다.
식사자리를 파하고 설거지를 한 다음 함께 평상에 누워 잠을 청했다.
꿀맛이었다.
맑은 공기와 음이온 때문인지 서너 시간만에 머리는 맑아 졌고 신체는 완벽하게 재충전 된 상태였다.
귀가하는 길, 운전을 하면서도 나는 계속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포레스텔라'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였다.
느낌 상 겨우 몇 번 반복한 것 같은데 어느새 우리 동네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말 밤이 그렇게 깊어 가고 있었다.
행복하고 감사한 시간은 늘 그렇듯 광속으로 흘렀다.
'마라톤'과 '철인3종'을 하면서 만났던 동갑내기 친구들.
벌써 20년도 넘었지만 한 사람을 만난다는 건, 그 한 사람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긴 '인생의 풍상'과 '숱한 필모그래피'를 통째로 만나는 것이기에 언제나 의미 있고 운명적일 수밖에 없다.
아무튼 내 생각은 그렇다.
소중한 인연에 사랑과 감사를 전한다.
그리고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몇 해가 흐르기까지 서로를 배려하며 헌신해 주는, 친구들의 현숙한 인격에 거듭 심심한 사의를 표하고 싶다.
브라보.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