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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사람들을 향한 원망
느 5:1-13
1 그 때에 백성들이 그들의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그들의 형제인 유다 사람들을 원망하는데
2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와 우리 자녀가 많으니 양식을 얻어 먹고 살아야 하겠다 하고
3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가 밭과 포도원과 집이라도 저당 잡히고 이 흉년에 곡식을 얻자 하고
4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는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서 왕에게 세금을 바쳤도다
5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그들의 자녀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도다 우리 딸 중에 벌써 종된 자가 있고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이미 남의 것이 되었으나 우리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도다 하더라
6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였으나
7 깊이 생각하고 귀족들과 민장들을 꾸짖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높은 이자를 취하는도다 하고 대회를 열고 그들을 쳐서
8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도로 찾았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 하매 그들이 잠잠하여 말이 없기로
9 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행이 좋지 못하도다 우리의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행할 것이 아니냐
10 나와 내 형제와 종자들도 역시 돈과 양식을 백성에게 꾸어 주었거니와 우리가 그 이자 받기를 그치자
11 그런즉 너희는 그들에게 오늘이라도 그들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집이며 너희가 꾸어 준 돈이나 양식이나 새 포도주나 기름의 백분의 일을 돌려보내라 하였더니
12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당신의 말씀대로 행하여 돌려보내고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아니하리이다 하기로 내가 제사장들을 불러 그들에게 그 말대로 행하겠다고 맹세하게 하고
13 내가 옷자락을 털며 이르기를 이 말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모두 하나님이 또한 이와 같이 그 집과 산업에서 털어 버리실지니 그는 곧 이렇게 털려서 빈손이 될지로다 하매 회중이 다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송하고 백성들이 그 말한 대로 행하였느니라
느 5:1-13 / [경제적인 문제들] 밖으로 원수들과 싸우고, 안으로 밤낮없이 고된 노동에 시달리던 백성들 사이에는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점차 불평이 쌓여 갔다. 남자와 여자들이 계속 내게 찾아와 굶주림을 호소하고, 부유한 동족에 대하여 원망을 하기도 하였다. 2) 우선 농토가 없어 생활이 곤란한 이들은 이렇게 호소하였다. `우리 집에는 자녀가 많은데, 우리가 먹고 살 곡식을 어디서 얻어야 합니까?' 3) 토지는 있어도 때마침 흉년이 들어서 이렇게 호소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런 흉년에 먹고 살기 위하여서는 논밭이나 포도원이나 집이라도 저당을 잡혀야 되겠습니다.' 4) 또 세금때문에 탄식하는 이들도 있었다. `우리는 임금님께 포도원의 세금을 바치기 위하여 토지를 담보로 잡히고, 부유한 유다인들에게 높은 이자의 빚을 내었습니다' 5) 결국 모든 빈민들이 부유한 이들을 향하여 이렇게 원망하였다. `이렇게 빈부의 격차가 커지면, 어떻게 우리가 모두 동족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육체는 그들의 육체와 다릅니까? 우리의 자식들은 그들의 자식들과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우리가 그들에게 우리의 아들딸들을 노예로 팔아먹게 되었습니다. 벌써 우리의 딸들 중에서 여러 명이 노예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논밭과 포도원이 이미 부유한 사람들에게 넘어갔기 때문에 불쌍한 딸들을 건져낼 길이 없습니다!' 6) [느헤미야의 탁월한 행정 조치] 나는 이렇게 하늘에 사무친 부르짖음을 듣고 몹시 화가 났다. 7) 나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하여 혼자 궁리한 끝에 먼저 백성의 대표자와 부유한 지도자들을 모아 놓고 꾸짖었다. `여러분은 동족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것을 이용하여 어찌 그토록 파렴치하게 가난한 형제들을 착취하고 압제할 수가 있단 말이오?' 그러고나서 나는 당장 민족대회를 개최하고 부자들을 규탄하였다. 8) 나는 그들을 이렇게 성토하였다. `우리는 이방인들에게 팔렸던 우리의 동족 유다인들 중에서 우리의 능력이 닿는 데까지 많은 사람을 해방시켜 조국 강산으로 돌아오게 하였는데, 여러분이 또 동족들끼리 그들을 다시 팔고 삽니다. 이제 우리가 불쌍한 동족들을 다시 돈을 주고 해방시켜야 되겠습니까?' 그러자 어느 누구도 항의하거나 대답하지 못하였다. 9) 그래서 내가 계속 책망하였다. `지금 여러분은 옳지 않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대로 살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살아야 옳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우리의 원수인 이방인들이 우리를 조롱하지 못할 것이 아닙니까? 10) 나와 내 형제도, 내 친척과 내 부하도 돈과 곡식을 빌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자를 받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빌려 준 것도 다시 받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11) 그러므로 여러분도 오늘 당장 저당으로 잡아 놓은 올리브 밭과 포도원과 집들을 빚진 이들에게 돌려주고, 돈과 곡식과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을 빌려 줄 때에 이자로 받았던 100분의 1도 되돌려 주시오!' 12) 그러자 모든 채권자들이 나의 말에 찬성하였다. `우리는 빚진 이들에게 모든 것을 돌려주고, 더 이상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우리가 모두 하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제사장들을 불러 세우고, 모든 채권자들이 제사장들 앞에서 더 이상 빚 독촉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도록 시켰다. 13) 그런 다음에 나는 온 무리가 보는 앞에서 옷자락을 털어 버리며 이렇게 선포하였다. `누구든지 이 맹세를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를 이렇게 털어내버리셔서 그가 하나님의 집과 소유에서 털려 나가 빈털터리가 될 것이다!' 그러자 온 무리가 `아멘,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하고 응답하며 여호와를 찬양하였다. 그리고 온 백성은 실제로 이 맹세를 지켰다.
느헤미야가 외부의 대적들을 해결하니, 이번에는 생각지도 못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백성들이 그들의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1-5) 아내들이 등장해서 남편과 함께 고통을 호소합니다. 아내들이 분노와 고통을 표출하는 것은 독특하고 예외적인 상황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은 성벽 재건에 동원되어 밤낮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생계가 막막하다고 아내들이 부르짖고 있는 상황입니다(1). 자녀를 먹여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에 불평하는 이들이 여기저기서 생겨납니다(2). 특히 이 시기에 지독한 흉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포도원과 집을 저당 잡혀 곡식을 얻고(3), 페르시아 왕에게 세금을 바쳤으며(4), 심지어는 자기의 딸을 노예로 팔아 생활을 연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5).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성벽 공사에 총력을 쏟아붓고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실제적인 삶의 형편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리더가 큰일을 하다 보면 작은 일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문제가 드러난 이상 느헤미야는 이 일을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성벽 재건 공사를 잠시 중단하고 원인을 조사해 봅니다.
깊이 생각하고 귀족들과 민장들을 꾸짖어(6-13) 흉년이 든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세금을 바쳐야 하는 것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서민들이 자식을 노예로 팔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가게 된 데는 지독한 고리대금의 행위가 있었습니다(7). 구약의 율법에는 가난한 형제들에게 돈을 빌려줄 때에 이자를 받지 말고, 가난한 자의 물건은 오랫동안 저당 잡지 말라 되어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뻔히 아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자기 동족의 힘든 사정을 알면서도 고리대금업으로 이익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분노한 느헤미야는 감정을 가라앉히며 깊이 생각합니다(7). 지금 느헤미야는 지지기반이 튼튼하지 못합니다. 성벽 재건을 이만큼 할 수 있었던 것은 느헤미야를 도와주었던 기득권층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쳐내버리면 성벽 재건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귀족들과 민장들을 따로 불러 이야기 한 후에(8) 백성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귀족들과 민장들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지적합니다(13). 그리고 이자를 받지 말고 저당잡은 물건도 돌려주라고 합니다(10-11). 제사장들 앞에서 맹세하게 합니다(13).
적용: 내부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섬세함이 필요합니다. 징계와 심판이 목적이 아니고, 변화시켜 일으키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외부의 어려움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내부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거룩한 일일수록 방해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라 하여 신속하게 진행되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넘어야 할 산이 있고, 건너야 할 강이 있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 여정 속에서도 정면 돌파하여 무너트려야 할 세력이 있습니다. 그 세력에 넘어지지 않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내 힘이 아닌 주님의 힘으로 말입니다.
< 설 교 >
죄와 대결하라
느헤미야 5:6-13 / 피영민목사
서 론
느헤미야의 주제는 예루살렘 성벽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성벽을 세우는 사람입니다. 가정과 직장, 그리고 사업도 성벽을 세워 나갑니다. 성벽을 세울 때에는 벽돌 하나 하나를 쌓아 세우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성을 세워 나가지만, 어리석은 자는 성을 세우기 보다는 무너지게 합니다. 우리 성도는 성을 견고히 세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벽을 세우는 일은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이며,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사단의 방해가 멈추질 않습니다. 지난주, 느헤미야 4장을 통해 귀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느헤미야 4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사단의 방해가 외부에서 일어났습니다. 느헤미야 4장 7절에서 8절을 보면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퇴락한 곳이 수보되어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하여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쳐서 요란하게 하자 하기로”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 아스돗 사람, 아라비아 사람들이 협박하고 무력으로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지혜롭게 방어 했습니다. 원수들은 외부의 공격이 실패하자 계획을 바꾸어 내부에서 분열을 일으키려 합니다. 내부에 존재하는 죄를 이용하여 내분을 일으키려고 합니다. 이러한 사단의 전략은 신약성경 사도행전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절에서 3절을 보면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道) 전함을 싫어하여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초대교회가 성령을 받고 큰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 사두개인이 사도들을 잡아 감옥에 집어 넣고 핍박하였습니다. 이런 핍박 가운데 하나님의 기적이 더욱 나타났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교회의 더 큰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사도행전 5장 1절에서 5절을 보면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위선 죄를 지어 심판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6장 1절에서 6절을 보면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식량을 분배하는 문제로 헬라파 과부와 히브리파 과부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초대교회는 일곱 집사를 택하여 이 문제를 해결 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자주 했던 말이 있습니다. “모이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말입니다. 느헤미야 5장에서도 성벽을 재건하는 백성들이 내부의 죄로 인해 흩어 질 수 밖에 없는 위기가 찾아 왔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죄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직면해야 했습니다. 느헤미야 5장은 우리 성도들이 가정, 직장, 교회, 사회 그 안에서 발견되는 존재하는 죄, 구조적인 죄와 대결해서 해결하는 실제적인 안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느헤미야가 죄와 대결 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Ⅰ. 죄와 대결할 필요성
유다 백성들은 성벽재건에 열심히 일하다 보니 일상 생활의 생계 유지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느헤미야 5장 3절을 보면 “혹은 말하기를 우리의 밭과 포도원과 집이라도 전당 잡히고 이 흉년을 위하여 곡식을 얻자 하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백성들의 가정에 경제적 어려움이 찾아 왔고, 예루살렘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부싸움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내들의 불평과 원망의 소리가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여보! 흉년에 돈을 벌어 오지 않으면 무엇을 먹고 살라는 말입니까?” 이러한 상황이 되자 집안의 가장들은 돈을 빌렸습니다. 그런데 빌린 돈의 이자율은 매우 높았습니다. 느헤미야 5장 1절을 보면 “때에 백성이 그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그 형제 유다 사람을 원망하는데”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왜 형제를 원망합니까? 형제들이 고리대금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자를 너무 많이 받았습니다. 느헤미야 5장에 보면 원망하는 세 부류가 나옵니다. 첫째는 자식은 많지만 집과 땅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먹고 살게 없는 사람들입니다. 느헤미야 5장 2절을 보면 “혹은 말하기를 우리와 우리 자녀가 많으니 곡식을 얻어 먹고 살아야 하겠다 하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집도 있고 포도원도 있고 집도 있지만, 돈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5장 3절을 보면 “혹은 말하기를 우리의 밭과 포도원과 집이라도 저당 잡히고 이 흉년을 위하여 곡식을 얻자 하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세금을 내야 하는데 낼 돈이 없어서 빚을 내서 세금을 바친 사람들입니다. 5장 4절을 보면 “혹은 말하기를 우리는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어 세금을 바쳤도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밭을 저당 잡혀서 부자에게 돈을 빌렸는데 이자가 너무 높아서 집과 밭을 잃어버릴 상황이 된 사람들입니다. 흉년이 들고 먹고 살 것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수입이 줄자 부자에게 돈을 빌려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이자가 높아 갚을 수 없었습니다.
귀인과 민장이 흉년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리대금을 하여 형제들의 밭, 포도원, 집, 자녀를 빼앗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속량해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 지는 것입니다. 빈익빈 부익부(貧益貧 富益富)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부자들은 돈을 빌려 주고 한 달에 이자를 백분의 일을 받았습니다. 느헤미야 5장 11절을 보면 “그런즉 너희는 오늘이라도 그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집이여 취한 바 돈이나 곡식이나 새 포도주나 기름의 백분지 일을 돌려 보내라 하였더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한 달에 1%의 이자입니다. 일년에 12%의 이자를 받았습니다. 돈을 이방인들에게 빌려 주면 이자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22장 25절을 보면 “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나의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 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말합니다. 이방인들에게 돈을 빌려 주었을 때 이자를 받지만, 형제들에게는 이자를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부자들은 성벽을 재건을 하는 중에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 주고 고리대금을 했습니다. 이로 인해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적대감이 생겨 나고 내분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중에 고리대금을 하는 이들은 없으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는 중요한 원리 하나가 있습니다. 이 원리는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행위는 공동체 안에 내분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도 하나님의 법이 있습니다. 혼인을 귀하게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타이거 우즈가 침소를 더렵혔습니다. 이로 인해 우즈의 가정에 내분이 일어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행위는 성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내분을 일으켜서 무너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는 공동체의 죄를 직면하고 해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Ⅱ. 죄와 대결하는 일의 어려움
느헤미야에게는 성벽을 재건하는 급선무가 있었습니다. 다른 일들을 생각할 여유도 없이 성벽을 재건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처한 상황을 살펴보면, 외부에서 적들이 침략해 한 손에는 칼을 들고 한 손에는 흙손을 잡고 성벽을 재건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고리대금 문제까지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느헤미야가 얼마나 마음 고생과 고민이 많았겠습니까? 신경을 거스르는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고리대금을 하는 사람들이 귀인과 민장이었습니다. 유다 백성들 가운데 힘이 있는 사람들이 고리대금을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느헤미야의 입장이 돼서 생각해 보십시오. 느헤미야가 이들의 문제를 지적하고 해결하기 위해 그들과 부딪혔다면 느헤미야를 외면하고 많은 갈등이 빚어졌을 것입니다. 심지어 느헤미야는 총독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생명에 위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싸우면 쫓겨날 위험이 있고 싸우지 않으면 백성들의 내분으로 나라가 어려움에 처할 위기입니다. 귀인, 민장과 싸우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이 문제는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성벽재건으로 이 문제를 외면 할 수 있었지만 문제들을 외면하지 않았고 죄와 직면하여 지혜롭게 문제를 해결 해 나갔습니다. 느헤미야 5장을 통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 했는가 살펴보겠습니다.
Ⅲ. 죄와 대결하는 과정
1. 느헤미야는 죄에 대해 분노하였다.
본문 6절을 보면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죄악을 보면 분노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대한민국 지성인들 가운데 기회주의적인 자들이 있습니다. 기회주의(機會主義, opportunism)란 확고한 원칙적 입장을 지니지 못하고 상황이나 세력관계에 따라 동요하는 무원칙적인 행동이나 그와 같은 사상적 조류를 뜻합니다. 지성인들이 바른 말을 하지 않고 기회주의자가 되면 사회에서 악의 소리가 커지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죄를 보면 분노 할 줄 아는 의협심이 있어야 합니다.
2. 문제 해결을 신중하게 생각했다.
느헤미야가 분노합니다. 웃고 다닌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감정에 따라 충동적으로 행동 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7절을 보면 “중심에 계획하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화가 났지만 감정대로 행하지 않고 죄를 어떻게 이길 것인가 마음의 중심에 세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면 치밀한 계획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충동적인 감정에 따라 일을 대처하면 그르치기 마련입니다.
3. 공개적인 죄이므로 공적으로 다루었다.
느헤미야는 한 사람씩 불러 죄를 지적하면 이 사람들이 반발감이 생길 것이라는 것을 예상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들의 죄가 공개적인 죄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죄를 언급하고 꾸짖었습니다.
4. 문제의 내용을 정확하게 진술했다.
본문 8절에서 10절을 보면 “이르기를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속량하였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 하매 저희가 잠잠하여 말이 없기로 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위가 좋지 못하도다 우리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함에 행할 것이 아니냐 나와 내 형제와 종자들도 역시 돈과 곡식을 백성에게 취하여 주나니 우리가 그 이식 받기를 그치자”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문제를 정확하게 진술했습니다. 경우에 올바른 말을 하니 그들은 잠잠했습니다.
5. 적극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다.
본문 11절을 보면 “그런즉 너희는 오늘이라도 그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집이며 취한 바 돈이나 곡식이나 새 포도주나 기름의 백분지 일을 돌려보내라 하였으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렇게 적극적인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바른 해결책이 없는 비판은 옳은 비판이 아닙니다. 느헤미야는 피할 수 없는 이 문제를 지혜롭게 대처 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으로 해결 해 나갔습니다.
Ⅳ. 문제의 해결
느헤미야가 공개적인 자리에서 귀인과 민장에게 문제를 지적하고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그러자 귀인과 민장은 “느헤미야의 말이 옳습니다.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받은 이자를 돌려 주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귀인과 민장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여기에서 안심하고 마무리 지은 것이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저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당신의 말씀대로 행하여 돌려보내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아니하리이다 하기로 내가 제사장들을 불러 저희에게 그 말대로 행하리라는 맹세를 시키게 하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귀인과 민장에게 맹세를 시킵니다. 문제를 정확하게 해결하지 않으면 다시 발생 할 수 있습니다. 양말에 구멍이 났다면 구멍난 곳을 꿰매야 합니다. 꿰매고 난 후 실이 남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남은 실로 꿰맨 곳이 풀리지 않도록 마무리를 정확하게 지어줘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귀인과 민장을 향해 맹세를 시키는 것은 어떤 문제를 해결 할 때에 마무리를 잘 지으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문제는 잘 해결되고 성벽재건이 완성이 되었습니다.
결 론
느헤미야 5장 14절에서 19절을 보면 “내가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왕 이십년부터 삼십 이년까지 십 이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가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전 총독들은 백성에게 토색하여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취하였고 그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치 아니하고 도리어 이 성 역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나의 모든 종자도 모여서 역사를 하였으며 또 내 상에는 유다 사람들과 민장들 일백 오십인이 있고 그 외에도 우리 사면 이방인 중에서 우리에게 나아온 자들이 있었는데 매일 나를 위하여 소 하나와 살진 양 여섯을 준비하며 닭도 많이 준비하고 열흘에 한 번씩은 각종 포도주를 갖추었나니 비록 이같이 하였을찌라도 내가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하였음은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니라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생각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12년 후에 첨가된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느헤미야가 자신의 자랑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느헤미야가 자신의 자랑을 하기 위해서 이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왜 이런 내용을 기록 했습니까? 즉, 총독생활 12년 동안 백성들은 자신에게 잘 대접했지만, 자신과 형제들이 백성들에게 권리를 요구하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말하는 것은 “나 또한 지도자로써 내 죄와 싸우고 있고 성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의 죄에 대하여 마음 아파하고 싸우는 이들입니다. 우리가 먼저 성결해야 세상의 죄와 싸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완전한 의인은 될 수 없지만 스스로 정직하고 진실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교훈도 동일합니다. 마태복음 7장 4절에서 5절을 보면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를 지적하고, 사회의 죄를 비판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성결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대들보가 들어 있는데, 사회를 향해 죄를 지적하면 “너희는 위선자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느헤미야 5장의 교훈은 자신을 먼저 성결하게 하고 사회와 가정, 교회의 죄와 싸우라는 것입니다. 레위기 11장 45절을 보면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이 성결하게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2009년도 한해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에 하나님과 일대일로 시간을 갖지 못하신 분들은 하나님 앞에 그 동안 지은 죄를 다 토설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되돌아 보고 내 눈에 들어 있는 들보를 제하기를 원합니다. 성결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성탄의 계절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역경의 때를 지나는 레슨
느 5:6-13 / 이동원목사
요즈음 우리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는 "IMF때 보다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정부에서는 결코 위기가 아니라고 강변하고 있지만 세간의 극심한 체감경기를 반영하는 지표라 할 수 있는 실질 국민소득(GNI)의 금년도 1.4분기 결과만을 놓고 보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8%나 줄어든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경제학자들의 평가를 빌리면 우리는 그동안 벌어놓은 돈을 곶감 빼먹듯 까먹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제지표이상으로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국민들 사이에 광범하게 유포된 불신증후군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그 누구도 아무것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부도 여당도 야당도 회사도 은행도 학교도 선배도 후배도 더 이상의 내일의 희망도 믿을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이제 우리는 우리자신도 더 이상 믿지 못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이번에 온 국민에게 충격을 던진 이 나라의 대표적인 재벌회장의 자살은 엄격하게 말하면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민족이 직면한 총체적인 위기의 상징이었는지 모릅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우리 모두가 그를 죽인 것입니다. 그의 자살은 우리의 자살이었던 것입니다. 이와같은 역경의 때에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주전400년경 느헤미야라는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민족재건의 역사적 소명을 깨닫고 조국에 돌아와 예루살렘 성벽을 쌓으며 일하던 시점에서 그 역시 바로 이런 절망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민족이 직면한 절망적 위기는 본문에 의하면 몇가지 요인으로 분석될수 있습니다. 첫째는, 기근 다른말로 하면 흉년 때문이었습니다.(3절) 둘째는 과도한 세금징수 때문이었습니다.(4절) 셋째는, 과도한 이자놀이 때문이었습니다.(5절--갚을수 없는 이자 때문에 자식들까지 종으로 잡혀야 했습니다) 백성들은 절망속에 부르짖으며 삶을 포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역경의 때에 우리는 믿음의 지도자 느헤미야가 시대적인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 보여준 모범에서 레슨을 배우고자 합니다. 도대체 이런 때에 우리가 배워야 할 역경의 때를 지나는 레슨- 무엇입니까?
1.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시대적인 불안과 절망에 대하여 느헤미야가 제일 먼저 보여준 반응은 분노였습니다. 어쩌다 우리 나라가 이렇게 되었는가, 혹은 어쩌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되었는가 라는 분노이었을 것입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6절을 보십시오.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했습니다. 저는 느헤미야의 분노를 공감하고 싶습니다. 저라도 그런 상황에서 분노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분노하지 않을수 있단 말입니까? 성경은 결코 분노 그 자체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분노를 통제 못하면 죄가 될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노 그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거룩한 분노, 의로운 분노는 종종 새 역사 창조의 에너지가 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노하되 죄를 짓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분노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분노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피상적인 생각이 아닌 진지한 생각이었습니다. 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중심에 계획하고--"라고 기록합니다.
이 말은 본래 "자신의 생각속에서 자기 자신과 의논했다" 혹은 "자기 마음과 의논했다"는 말입니다. 분노가 감정이라면 이 단계는 생각인 것입니다. 한국학을 연구하는 이들은 한국인의 장점이 그 끈근한 정서감에서 나온 것이라면 한국인의 약점 역시 지나치게 감정적인데 있다고 지적합니다. 따라서 한국인의 이런 약점이 보완되기 위해서는 보다 진지하게 생각하고 사고하는 습관이 있어야 하겠다는 것이 공통적인 지적입니다. 고 함석헌 선생께서도 그가 평생을 통하여 민초들에게 호소한 일관된 메시지 하나가 있었다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생각은 그냥 주관적인 내 생각의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수 있는 조용한 생각이어야 합니다. 조용한 호수에서 우리는 두가지를 만납니다. 조용한 호수에는 자신의 투명한 얼굴이 보이고 또한 하늘이 보입니다. 깊고 조용한 사고안에서 비로서 우리는 진정한 자신을 보고 또 그런 자신을 향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이 오거든 역경이 오거든 먼저 침묵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앞에 엎드러져 생각을 시작하십시오.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2. 죄를 직면하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모든 고난이 죄로 말미암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고난은 분명히 죄로 말미암은 것일수가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민족의 고난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이 고난이 초래된 원인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원인이 백성들 가운데 만연한 죄들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그 죄들을 직면하기로 했습니다. 이 죄의 표면적인 현상은 백성들 사이에 만연된 이자놀이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이율의 이자놀이의 결과로 인간이 인간을 사고 파는 노예화의 현상을 직시하며 여기까지 가게된 원인은 더 깊은 곳에 있다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가 진단한 보다 본질적인 원인은 9절에 밝혀져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을 경외함에 행할것이 아니냐" 다시 말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을 행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돈을 빌려주는 행위 그 자체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은행은 비성경적인 기업행위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고이율의 이자를 부과하여 어려운 이웃들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그것이 죄라고 지적하며 꾸짖는 것입니다.
죄를 죄라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용기-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질수 있는 가장 고상한 용기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잘못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잘못을 잘못으로 인정하는 용기가 중요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적 문화권의 영향이 짙은 사회일수록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용서하십시오"(I'm sorry./Forgive me)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나누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한국사회에 복음적 영향이 아직도 극소하다는 것은 우리 문화가 아직도 '오리발 문화'라는 사실에서 찾을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어떤 민족보다 사과에 인색합니다. 우리는 용서를 먼저 청하는 것을 약자라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강자, 진정 성숙한 자는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할줄 아는 사람입니다.
죄가 보편적인 인생의 실존이라면 죄를 인정하는 용기야 말로 그리스도인의 실존양식이어야 할 것입니다. 옛날 독일 프러시아 제국의 프레데릭 대왕은 아주 지혜롭고 경건한 믿음을 가진 왕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한번은 감옥을 방문해서 죄수들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무슨 죄로 들어 왔는가?"고. 모두가 억울하게 들어온 사람들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한 청년이 자기 죄를 시인하며 자기는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말하더랍니다. 그러자 프레데릭 왕은 이런 유명한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저 죄인을 밖으로 내보내시오. 그래서 이 곳에 계신 저 순결하고 무죄한 분들에게 오염이 되지 않도록 하시오." 그렇습니다. 죄는 인생의 실존입니다. 그러나 죄를 인정하는 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인의 실존의 용기이어야 합니다. 성경이 다윗을 가르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말한 이유중의 하나가 그가 자기의 신하였던 나단 선지자에게 잘못을 지적 받았을 때 왕의 보좌에서 내려와 "내가 과연 그 사람이라. 내가 범죄 하였다"고 고백할수 있었던 용기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역경의 시간은 자기 성찰을 요구하는 깊은 생각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우리에게 죄를 지적해 주신다면 이제 우리는 이런 때에 우리의 죄를 직면하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저는 자살을 선택한 재벌회장께서 차라리 스스로와 기업의 연약함과 남북 경협과정에서 어쩔수 없었던 허물을 정직하게 밝히고 국민의 용서와 심판을 구하는 진정한 용기를 발휘했더라면 우리사회의 발전에 더 크게 기여했을 것이라는 안타까운 마음을 갖습니다.
3. 주께 서원하는 결심을 필요로 합니다.
성경적으로 진정한 회개는 단순히 죄를 인정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죄를 회개했으면 죄에서 떠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떠남, 이런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약시대 에서부터 서원을 실천해온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신약성경은 헛된 맹세를 삼가야 한다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맹세나 서원자체의 무의미를 말하지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오늘의 우리 시대에서는 이런 서원의 전통이 회복될 필요가 있다고 믿습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아직 한번도 하나님앞에 서원도 못해본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특별히 고난의 시간, 역경의 시간을 지나면서 이 역경이 죄의 결과라고 깨달아 졌다면 이제야 말로 하나님앞에 새로운 미래의 삶을 결심할 시간이 아닙니까? "하나님 저를 용서해 주신다면 이제부터 이렇게 살겠습니다" 라는 결심 말입니다. 지금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런 서원의 결심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제 10절에서 백성들에게 이제부터는 돈을 꾸어주되 이자받기를 그만두기로 결심하라고 촉구합니다. 11절에서는 이미 받은 분량중에서 상당한 부분을 돌려보내라고 촉구합니다. 그리고 12절에서는 그것을 제사장 앞에서 공개적으로 맹세하라고 촉구합니다. 13절은 백성들의 반응입니다. 백성들이 그렇게 하겠다고 아멘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대로 행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역사의 새날을 가져온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민족가운데 이런 주를 향한 서원의 결심이 필요한때가 아닙니까? 지금이야말로 당신의 삶의 여정에서 주를 향한 단호한 서원의 결심이 필요한 때가 아니십니까?
지금으로부터 약200년전 영국에서 폭력배 서클에 가입해 있던 17살 먹은 소년 하나가 유명한 조지 휘필드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후 아름다운 신앙시를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때 옛날 친구들의 유혹으로 다시 교회와 신앙을 떠나간 때가 있었습니다. 어느 화창한 주일 아침 그가 런던의 거리를 걷고 있었는데 마차 한 대가 옆에 서더니 "혹시 교회 가십니까?"묻더랍니다. 얼결에 "네"라고 대답하자, 부인은 "타시지요"하더랍니다. 부인이 "자기 이름을 소개하자 이 청년도 역시 "저의 이름은 로버트 로빈슨(Robert Robinson)입니다 하자 부인은 깜짝 놀라며 다시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혹시 시인이십니까? 사실 저는 선생님의 시집을 읽고 있었습니다.--이 시가 선생님 작품이 맞지요.--복의 근원 강림하사 찬송하게 합소서. 한량없이 자비하심 측량할길 없도다." 그래서 그는 할수 없이 "맞습니다. 그런데 저는 사실은 한동안 신앙을 떠나 죄 가운데 있었습니다."고 말하자 부인은 다시 말하기를 "선생님 시의 3절에서 이렇게 쓰시지 않으셨나요?--'주의 은혜 사슬되사 나를 주께 매소서. 우리 맘은 연약하여 범죄하기 쉬우니 하나님이 받으시고 천국인을 치소서'라고. --주의 은혜의 사슬에 선생님 자신을 매시는 방법은 공개적 서원을 하시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오늘 아침 교회에 가서 공개적인 회개를 하시고 새삶을 결심하시지요"(당시 영국교회에는 이런 공개적인 참회와 서원이 습관화되어 있었다) 그날 부인의 권유로 로버트 로빈슨은 주일 아침 교회에서 공개 참회와 서원을 하고 그후 평생을 주께 헌신하는 인생을 살았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 중에는 이런 결심이 필요한 분이 계시지 않는지요?
내부의 위기를 극복하는 느헤미야
느 5:1-19 / 김동국목사
교회가 부흥하고 커져도 그 안에 형제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 능력도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만큼 우리의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세력도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릴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그 무엇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빼앗아 갈 수 없다.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칼이나 죽음일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갈라놓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고난과 좌절을 겪기도 하고 ‘내가 의를 위해 바르게 살아가고 있는가? 내가 악의 도구가 되는 것은 아닌가?’ 마음속에 근심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크신 사랑으로 그 모든 상황과 죄악을 넘어서서 우리를 사로잡으시고 온전케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를 괴롭히는 어둠의 세력들, 대적자들도 결코 쉽게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느헤미야 4장에서 우리는 대적자들이 어떻게 외부로부터 이스라엘 사람을 공격하는가 보았습니다. 그들은 조롱과 비난의 말을 퍼붓고 열등감을 자극하고 그들의 현실을 비웃었습니다. 그래도 안되자 가족들의 생명을 노리겠다고 공공연하게 선포하고 무력 시위를 합니다.
환란이 다가올 때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성밖에 흩어져 있던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흩어지면 스스로 지킬 수 없다’며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모였습니다. 그리고 서로를 바라봅니다. 한 손에는 칼을 들고, 한 손에는 삽을 들고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기도하는 서로를 바라보며 도전을 받습니다. 이제껏 모든 일이 늘 안된다고 패배감에 젖어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우리는 결심하면 다시 일어날 수 있구나.’ 그런 흥분감에 사로잡힙니다.
내부로부터의 공격
이스라엘 백성이 이런 흥분과 감격가운데 있을 때 대적들은 이들을 무너뜨리려 계속해서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방법을 바꾸어 공격했습니다. 열등감대신 승리의 감격을 공격해 옵니다. 외부를 공격했다면 이제는 내부의 혼란과 분열을 일으킵니다. 일꾼들이 전사가 되어 영적으로 충만하자 그들은 육체적인 문제를 가지고 공격해 들어옵니다. 어떻게 외부의 대적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했는지 5장 1절에서 5절까지 말씀을 보겠습니다.
때에 백성이 그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그 형제 유다 사람을 원망하는데 혹은 말하기를 우리와 우리 자녀가 많으니 곡식을 얻어 먹고 살아야 하겠다 하고 혹은 말하기를 우리의 밭과 포도원과 집이라도 전당 잡히고 이 흉년을 위하여 곡식을 얻자 하고 혹은 말하기를 우리는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어 세금을 바쳤도다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저희 자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도다 우리 딸 중에 벌써 종된 자가 있으나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이미 남의 것이 되었으니 속량할 힘이 없도다
영적으로 충만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한 손에는 삽을 들고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일하면서 싸우는 그들을 공격해오는 것은 성벽재건의 현장이 아니였습니다. 그들을 분열시키고 분란시키고 공격해 오는 것은 바로 그들의 가정 안이었습니다. 무력의 위협 때문에 으로 성 밖의 백성들이 간단한 가재도구와 식량을 가지고 성 안에 들어와 살면서 두 가지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가난한 백성들이 굶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 가난한 백성들을 이용하는 유다 사람들이 함께 섞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며칠 간은 좋았습니다. 그러나 집 안의 양식이 떨어져 갑니다. 적들이 노리고 있어서 밖에 나가 구할 수도 없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흉년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양식이 부족합니다. 유다 백성의 가장들은 굶주리고 있는 아내와 자식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찢어지도록 아팠을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적으로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민족을 살리는 길이라 할지라도 자신들의 아내와 자식이 굶는 마당에 힘을 내고 용기 있게 일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어렵게 하는 것은 단지 굶는다는 배고픔이 아니었습니다. 성안 부유한 사람들의 태도였습니다.
성을 중심으로 사는 문화는 성 안에 있는 사람이 성 밖에 있는 사람보다, 성 중앙의 사람들이 성벽 가까이에 있는 사람보다 부유합니다. 백성들은 양식을 구하러 성 안에 있던 부유한 사람들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부유한 사람들은 양식을 그냥 빌려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자를 받습니다. 밭과 토지를 전당 잡습니다. 또한 백성들은 세금을 내기 위해 밭과 포도원을 전당잡혀야 했습니다. 그런 일들이 계속됩니다. 아내들이 참지 못하고 남편에게 말합니다. 성 밖에서 온 가난한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처음엔 참자고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성벽을 재건하던 그들은 ‘이것이 거룩한 사업이라면 우리는 이렇게 굶주리면서까지 희생하는데 왜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좋은 것을 먹으면서 일하는가?’ 원망이 생겼습니다.
굶주림과 가난의 문제는 성벽 재건 때문에 일어난 문제는 아닙니다. 그 전에도 있었던 일입니다. 그러나 흉년이 되고 일이 시작되자 더 심각하게 대두된 것입니다. ‘왜 우리는 이방인에게 착취당할 뿐 아니라 우리의 동포들에게도 착취당하고 있는가? 진정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이들은 상대적 빈곤함을 참지 못하고 느헤미야를 찾아가 울부짖습니다.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느헤미야는 이것이 큰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외부로부터의 공격이 아무리 큰 것이라도 내부로부터의 공격보다는 심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외부의 적은 물리치거나 함께 하지 않으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부의 문제, 형제, 가족, 민족, 함께 사는 사람들의 문제는 심각한 것입니다. 잘못된 사람들을 쫓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내부의 문제로 일어난 위기를 세가지 방법을 통해 극복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그는 감정적, 의지적 대응을 합니다. 6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느헤미야가 민족의 지도자들, 부유한 자들에게 노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에게 울부짖고 있는 백성들의 앞에서 분노를 발하고 있습니다. ‘밭과 토지를 잡고 고리대금을 하는 것이 정말인가? 어떻게 율법에서 금하고 있는 것을 하는가? 내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겠소.’ 라며 화를 냈던 것입니다.
사실 화를 내고 분노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상반되는 것입니다. 잠언에는 ‘노하기를 쉽게 하는 자는 어리석음을 행한다.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킨다.’ 라고 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노하는 것은 나쁜 마음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마음은 온유한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노할 때가 있습니다. 느헤미야와 같은 때 우리는 분노해야 합니다.
우리가 분노해야 할 때
형제가 형제를 착취하고 유린하며 자기 부와 소득의 수단으로 삼을 때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안됩니다. 출애굽기 17장에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향해 저주하면서 분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저주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연악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아말렉은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보다가 그들이 피곤하고 지쳐 약해졌을 때 쳐들어 왔습니다. 르비딤 골짜기에서 두 민족은 전쟁을 했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산에 올라가 기도했습니다. 손을 들고 기도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 백성이 이기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민족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백성이 전세에 밀려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 손을 계속 들고 있지 못할 정도로 피곤하고 지쳤습니다. 그래서 아론과 훌이 모세의 팔을 붙잡았습니다.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 하나님이 아말렉을 향해 ‘내가 반드시 아말렉을 쳐서 도륙하여 무찌르겠다’고 거룩한 여호와의 전쟁을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점령한 사울 왕 때 그 일을 이루게 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는 약한 자를 공격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약한 자를 공격하는 것, 이것은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유한 분이십니다. 그런 예수님께서도 화를 내신 일이 있습니다.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먼 곳에서부터 자기들이 기르는 양을 소중하게 가져옵니다. 비둘기도 가져옵니다. 그런데 예물 판단관이 그 예물을 보고 ‘흠이 있어서 안된다’며 자기들이 준비한 예물을 사라는 것입니다. 신앙을 이유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이용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참지 못하신 것입니다. 형제가 형제의 연약함을 이용해 착취할 때 우리는 느헤미야 처럼 분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 느헤미야는 분노를 가졌지만 분노가 정당하고 이유가 바르다고 해서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도하고 생각하고 중심에 계획했습니다. 7절부터 9절을 보겠습니다.
중심에 계획하고 귀인과 민장을 꾸짖어 이르기를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취리를 하는도다 하고 대회를 열고 저희를 쳐서 이르기를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속량하였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 하매 저희가 잠잠하여 말이 없기로 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위가 좋지 못하도다 우리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함에 행할 것이 아니냐
그는 철저히 자신의 감정을 절제합니다. 분노를 가지고 주님 앞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계획합니다.
느헤미야는 귀인과 민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도착한 지 6개월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총독이 자신의 임지에서 첫번째 해야 하는 일은 그 지역을 다스리는 유지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그들과 정면대결을 선언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나 성벽 재건 같은 외형적인 것 보다도 ‘진정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가 더 중요했던 사람입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에게 공인으로서, 지도자로서 잘못을 지적합니다.
서로 사랑함으로 모두가 승리하기
만약 여기서 느헤미야의 행동이 끝났다면 느헤미야가 옳은 말을 했고 지도자들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느헤미야와 이스라엘의 패배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형제가 싸울 때 한 쪽만 승리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나 어떤 단체가 내적인 문제로 싸웠을 때 한 편이 이겼다는 것은 다른 편의 패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패배를 의미합니다.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을 멈춥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을 모으고 집회를 갖습니다. 느헤미야의 원래 목표는 대적들이 공격하기 전에 신속히 성벽 쌓기를 마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는 모두의 승리를 위해 공중집회를 엽니다.
눈에 보이는 성벽을 쌓고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의 성벽을 쌓고 승리하기 위해서 입니다. 만약 성벽 안에서 서로를 착취하는 백성들이 있다면 성벽을 쌓는다고 해도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커져도 그 안에 형제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 능력도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만큼 우리의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3장 34절, 35절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성벽의 재건 뿐 아니라 영적인 부흥이었고 영적인 재건입니다.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은 성벽이 쌓아지는 것 이상으로 형제가 형제를 사랑하고 도와주는 것을 원했던 것입니다.
속 사람이 살아있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잘못한 지도자들을 깨우쳐서 이르고 백성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사과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지도자들은 그 요구를 받아들였습니다. 느헤미야의 능력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느헤미야를 도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만을 바라라
세 번째, 느헤미야는 지도자들보다, 백성들보다 먼저 자신을 화해의 제물로 내어놓습니다. 15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전 총독들은 백성에게 토색하여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취하였고 그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치 아니하고
첫 번째 그는 전통적인 과오에서 벗어났습니다. 이전 총독들이 행했던 악한 습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세금을 걷고, 땅을 사고, 부를 축적하는 것을 스스로 끊겠다고 백성들 앞에서 결심하고 실천한 것입니다. 두 번째,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을 포기합니다. 총독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세금을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왕이 왕궁으로부터 주는 돈으로만 살기로 결심합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축복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19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생각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느헤미야가 돈의 축복을 원했다면 이러지 못했을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축복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돈은 우리를 도와줍니다. 권력도 우리를 축복해 줍니다. 그러나 돈이 우리를 도와주면 대가를 치뤄야 합니다. 권력이 나를 도와줬다면 나는 나를 도와준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줬다면 나는 하나님 안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신앙은 어떤 면에서는 다윗이나 요셉의 신앙보다도 위대합니다. 다윗과 요셉은 가장 심한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최고의 자리에서 자신의 존재를 하나님께 의탁합니다. 다니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고난을 자기의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만이 우리의 길
느헤미야는 자기자신을 먼저 화평의 제물로 아낌 없이 드리며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우리 모두 회개하자. 낮은 자는 높은 자를 용서하고, 높은 자는 낮은 자를 사랑으로 대하자.’ 라고 했을 때 민족의 지도자, 민장과 귀족들이 그에게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합니다. 1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옷자락을 떨치며 이르기를 이 말대로 행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이 또한 이와 같이 그 집과 산업에서 떨치실찌니 저는 곧 이렇게 떨쳐져 빌찌로다 하매 회중이 다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송하고 백성들이 그 말한대로 행하였느니라
회중이 다 ‘아멘’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포된 말씀에 오직 ‘아멘’ 만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 그 분의 삶에는 두 단어만 있습니다. ‘네’와 ‘아멘’ 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어떤 어려움과 환란, 이해하지 못할 일이 있을지라도 ‘네’와 ‘아멘’만 하게 되길 축복합니다.
어떤 부흥사 목사님이 “‘조금 있다 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결국 결심을 실행하지 못하고 죽을 때 아차차 후회하며 지옥에 갑니다.”라고 설명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잘못을 차차 고치겠다, 차차 실행하겠다’ 는 것은 믿음의 언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양심의 가책을 주실 때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아무리 소중한 것일지라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강하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아멘’하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신 그 분께 우리의 삶을 드릴 수 있는 믿음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을 위로하고 회복시켜주시고 여러분의 삶을 깊은 사랑으로 다듬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의 존재 안에서, 생명을 내어주시는 그 분의 사랑 안에서 여러분이 새롭게 사랑의 힘으로 일어나기를 주님께서 기도하시고 부탁하고 계십니다. 옳고 그름으로 행동하지 맙시다. 비난과 불평가운데 행동하지 맙시다. 나의 의로움을 가지고 행동하지 맙시다. 사랑의 행동을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벽을 무너뜨리는 적은 안에 있다
느 5:1-9 / 류영모목사
I. 내부의 적이 더 무섭다
“성벽을 무너뜨리는 적은 안에 있다”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안에 있 다. 아내에게 와이프에게 있다는 말이 아니고 내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보면 외부의 적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내부의 적이다라는 말이 있습니 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살펴보면 나라가 망하는 것은 외부의 적에 의 한 것이라기는 보다는 언제나 내부의 적에 의해 망했다는 것입니다.
현대에 들어와 미국이 개입하고도 진 전쟁이 하나있습니다. 베트남전쟁입니다. 지 금 트럼프와 김정은의 미북정상회담 장소로 베트남이 결정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수도 하노이에서 회담을 할 것인가 다낭에서 할 것인가를 두고 미묘한 줄 당기기가 있었습니다. 하노이는 북 베트남 공산 정권에 속한 도시입니다. 다낭은 미국이 지원 한 남 베트남에 속한 도시입니다. 이런 저런 이유를 감안해서 하노이에서 두 사람이 만나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남 베트남이 이 전쟁에서 미국, 한국 자유세계의 지원을 받고도 진 것은 군사 력이 모자라서 진 것이 아닙니다. 남 베트남의 부패와 무능 특별히 남 베트남에 구축된 내부의 적 베트남민족 해방전선 이름하여 베트콩에 의해 진 전쟁입니다.
지금 중국이 G2국가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 가장 신경쓰는 것이 내부의 적, 내부의 위기를 관리하는 것입니다. 중국은 한족 외에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 가입니다. 55개 소수민족은 인구로는 10%가 채 안되지만 이들이 살고 있는 면적 으로는 중국 영토 6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난 한해 이 내부의 위기를 관리하 기 위해 중국 공안유지, 방대한 개인정보를 수집관리하기 위해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AI기술장비를 도입하고 유지하는데 210조원을 지출했습니다. 이는 중국 국방예산보 다 무려 20%가 더 많은 예산입니다. 지금 전세계 어디에서나 내부갈등 관리비용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내부의 적이 무섭다는 반증입니다.
II. 위기는 쓰나미처럼 온다
짤막한 인생을 살아도 밖에서 오는 시련이 있는가 하면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이 있습니다.
내우외환(內憂外患)이란 말이 있습니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 갈등과 온갖것들 을 내우라고 한다면 밖에서 오는 시련과 어려움이 외환입니다.
기업이 성장되는 과정에도 외환이 있습니다. 국제 경제 환경의 위기, 환율, 유가 등 외부적 어려움입니다. 내부의 문제도 있습니다. 오너 가족 간의 갈등, 세상을 달라지 는데 변화의 실패, 개혁의 실패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잘 성장하는 기업이 몰락하는 것을 보면 외환 때문이 아니고 내우 때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부의 적을 관리 하는데 실패해서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4장이 외부로부터 밀려온 위기였다면 5장은 내부에서 일어난 위기상황입니 다. 4장 외부의 적은 산발랏과 도비야, 게셈 등 적의 이름, 정체가 분명합니다. 그 러나 5장 내부의 적은 문제는 있지만 위기의 정체가 두루뭉술 분명하지 않습니다.
내부의 적을 다룬 5장을 살펴보면 전반부 1-13 성벽재건과정에서 유대공동체가 직면한 내적위기가 무엇이었던가? 이 위기를 어떻게 해결했는가? 내용을 다룹니다. 14-19 12 년 후에 이 글을 쓰며 당시 상황을 되돌아보면서 회상하는 삽입귀절입니다.
느헤미야 5:1-5 내용은 성벽재건을 서두르는 과정에서 공동체 내부에 일어난 위기, 문제 상황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성벽재건에 동참하기 위해 흩어져 살던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습니 다. 소위 인구집중현상이 일어난 겁니다. 전시상황에서 막상 돌아왔는데 농사를 짓 는 일손이 모자랐고 적이 코앞에서 노려보고 있는 상황에서 농장에 나가 일하는 것 도 쉽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설상가상 흉년이 찾아왔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페르시 야 정부는 제국에 속한 모든 나라, 모든 사람들로부터 과도한 세금을 거두어 들였습 니다. 먹고 사는 문제, 양식문제가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게 되는 것입니다.
설상가상 이게 인생입니다. 위기는 쓰나미처럼 한꺼번에 밀려옵니다. 인생의 문제는 하 나 해결되고 하면 두 개가 밀려오고, 두 개 해결하고 나면 세 개가 밀려오는 겁니 다. 내가 내적으로 강해지지 않으면 내공으로 내 믿음이 단단히 서 있지 않으면 문 제를 해결하다 보면 더 큰 문제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백성들은 우선 소낙비를 피해야 하니 굶어죽지 않기 위해 집과 농토를 저당 잡히고 양식을 빌려다 먹었습니다. 심지어 아들과 딸을 종으로 팔아 양식을 구하는 사람들까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 엄청난 위기상황에서 곡간을 풀어 나누어 주는 부자도 없었고 밥 한 그릇 나눠 먹자는 귀족도 없었습니다. 성벽재건을 불구경하듯 구경만 하고 손에 티끌하나 묻히지 않던 드고아 귀족같은 자들은 높은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고리대금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백성들, 그들의 아내들까지 울부짖기 시작합니다. 70년만에 이방의 포로에서 돌아와 무너진 성벽을 쌓아 내 나라에서 사는가 싶었는데 동족들의 포로가 되고 노 예가 되었구나!
이 부르짖음의 성격이 보여주는 2절 3절 5절의 동사들은 모두 분사 형태로 되어 있 습니다. 성경에서 분사형으로 되어 있다는 이 말은 어려움이 있을 때, 배가 고플 때 한번 울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주야로 불평을 늘어놓았다.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울부짖었다는 것입니다. 이 내부의 문제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보여주는 단어 가 분사형으로 기록되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III. 양극화 갈등
전 하버드대학, 지금은 토론토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조던 피터슨(Jordan Peterson) 교수가 있습니다. 지금 전세계가 양극화의 갈등으로 잘 성장하던 사회가 무너질 수 있다고 위기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100년전 파레토(Vilfredo Pareto)가 말했던 20:80의 법칙이 점점 더 분명해 지고 있다는 겁니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공산주의든 20%의 사람들이 80%의 자원 을 가지고 있고 80%의 사람들이 20%의 자원으로 살고 있다.
자본주의는 차라리 자유와 경쟁이 있어서 여기 20% 가진자 그룹이 바뀔 수 있고 자 주 바뀝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사회에서는 20%의 지배그룹, 가진자 그룹이 바 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사회이든 80%의 약자그룹이 일어날 수 있는 재기의 기회가 가능한 사회구조를 만들어야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회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80% 약자들의 최선을 다해 역량을 키워주지 않으면 그 사회가 건 강하게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역량을 키워주지 않고 배고픈 사람들에 게 밥만 주면 더 심각한 약자근성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 큰 구조적 악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갑을 관계가 영원히 계속될 수 있다는 얘기입 니다.
지금 우리나라, 우리사회가 부딪힌 문제 또한 양극화의 갈등입니다. 아시아, 태평양 지 역을 연구한 한 경제학자는 지금 한국사회는 사회적 갈등 특별히 정치적 갈등, 고용 주와 근로자의 갈등, 시니어세대와 젊은 세대의 갈등으로 기업의 투자 분위기가 파괴 되고 소비가 극도로 위축되어 잘 성장하던 경제가 저성장 장기의 늪에 빠질 수 있다 고 경고합니다. OECD국가 가운데서도 우리나라는 갈등지수는 가장 높은데 갈등관리 지수, 신뢰지수는 가장 낮아 그 위기는 더해갈 것이라고 합니다.
사회 신뢰지수를 살펴보면 1위 덴마크 75%, 2위 노르웨이 73%, 3위 네덜란드 67%, 14위 일본 39%, 17위 미국 35%, 한국은 23위 27%입니다.
부의 양극화 외에도 교육의 양극화, 보수와 진보의 양극화는 이 사회를 갈등사회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 사회속에 많은 논쟁과 논리들이 있지만 자기가 어디에 서 있 느냐 여하에 따라서 그 얘기만 들립니다. 상대 얘기는 무조건 틀렸다고 치부해버립 니다.
아무개 도지사가 구속되었대. 그때에 반대편에 있는 사람은 당연하지. 그 편에 서 있 는 사람은 이런. 잘못 되었어. 자기편 얘기만 들리는게 이념 파편화입니다.
아버지세대와 자녀세대가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간 20살 아들이 대학에 입학할 준비를 하면 서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왔습니다. “얘 멀쩡한 머리를 왜 노랗게 물 들였 어?” 꾸중했습니다. 아들이 “아빠는 왜 멀쩡한 흰머리를 까맣게 물 들여?” 하더랍니다.
종교 간의 갈등은 없습니까? 우리가 사는 사회 어디에 가면 갈등이 없을까요?
IV. 칡나무 · 등나무
갈등(葛藤)이라고 할 때 갈자는 칡나무 갈(葛)자입니다. 등은 등나무 등(藤)자입니 다. 칡나무와 등나무가 함께 얽혀 나무를 타고 올라가면 결국은 덩굴들이 서로 엉 겨붙어서 풀 수가 없다고 합니다. 결국 풀려고 하면 줄기를 잘라야 한다고 합니다. 함께 망하기 까지는 풀어지지 않는 것 이게 갈등입니다.
문제는 갈등없는 사람, 내적위기가 없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공동체든 개인이든 이 내적인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는가 하는 것이 인생의 미래를 결정하게 됩니다. 갈등을 해결하는 자세와 방법이 그 사람의 품성이요 신앙이요 실력이 되는 것입니 다.
우리 곁에 신앙생활을 하다가 내적갈등, 교회에 대한 실망감, 신앙심 부족 등으로 상 처받아 교회를 떠난 낙심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름하여 가나안교인 200만 시대가 되었습니다. 아직은 가나안교인이 교회, 신앙을 멀리 떠나지 않았대요. 주일 날 교회 안 나오지만 기독교 방송을 보고 신앙서적을 읽고 성경을 읽는다고 합니다. 점점 사라져 가는 겁니다. 언제까지 내게 신앙을 가르쳐준 내 부모가 살아계실 때까 지는 이것이라도 지킨대요. 그 부모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 이것도 끝나는 겁니다. 미 국 사회가 그랬습니다. 그들이 너무 멀리 가기 전에 그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할 준 비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갈등. 인생의 위기와 실패가 어디서 시작이 되었을까요? 마귀들이 사는 지옥에서 생 긴게 아닙니다. 천국의 모형 에덴동산에서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금도 둘이든 열이든 백이든 인간이 모인 자리에는 왜 갈등이 일어날까요? 우리 인간 은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완전한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조 차 신앙의 위기, 갈등이 있습니다. 이 내적인 문제해결에 실패하여 교회를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완전한 곳이 아닙니다. 성자들이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죄 인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교회는 천국이 아닙니다. 병들고 상처입은 영혼들이 천국가는 도상에 있는 공동체, 너도 환자, 나도 환자, 너도 수리중 나도 수리중입니다. 너도 나도 공사중. 그게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도 갈등이 있을까요? 교회는 참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하나님 을 아버지라 부르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공통점 외에는 모든 것이 다릅니다. 성격이 다릅니다. 자라온 배경이 다릅니다. 가치관이 다릅니다. 목표가 다릅니다. 비 전이 다릅니다. 취향이 다릅니다. 이 다른 사람들이 모였으니까 다름을 확인하면서 갈등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른 것일뿐 틀린 것이 아니데 나 외에 다 른 사람이 틀렸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교회 안에 갈등이 많을까요? 이 땅의 교회는 끊임없이 사탄의 공격을 받 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든 교회는 이 상처로 피를 흘릴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싸움을 하다가도 막걸리 한 잔 나눠먹으면 악수하고 화해를 합니다. 막걸리 한 잔으 로 화해될 것 같으면 한잔 하세요. 그게 훨씬 성경적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사이엔 한번 갈등이 생기면 좀처럼 화해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갈등 배후에 사탄이 있기 때문입니다. 안보이니까 형제자매를 공격하는 겁 니다. 사탄이 쾌재를 부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공동체 안에 있는 형제자매에게 양보하고 타협하는 것을 두려워하 지 마세요. 교회 공동체, 가정 안에서 지는 것은 이기는 것입니다. 절대로 생각의 차이 때문에 감정화하지 마십시오. 이 갈등으로 하나님의 선교를 무너뜨리고 공동체 를 무너뜨리지 마십시오. 차라리 지세요. 그러면 이기는 겁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 갈등이 계속되는 것은 분노하는 것은 사탄에게 송두리째 승리를 안겨드리는 것입니 다.
우리는 교회라는 성벽을 무너뜨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세운 공동 체를 무너트린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무너진 곳에도 내가 가면 재건된다. 수축 된다. 다시 건설된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사람, 오늘 이 시대에 느헤미야가 되는 것입니다.
V. 꽃이 된 강아지똥
오늘 본문 백성들의 불평은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배고픔의 문제는 어 제 오늘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무너진 고국 땅 성벽 재건이라는 대업 앞에 느헤미 야는 이 정도 문제쯤은 무시하고 공사에 집중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 못지않게 아니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았습니 다. 하나님의 가족 마음이 무너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공동체가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도자들의 정신이 무너지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느헤미야는 분노합니다. 거룩한 분노를 드러냅니다. 돈을 꿔주고 높은 이 자로 농토, 집 심지어 자녀들을 저당 잡은 귀족들과 민장들 즉 공무원들을 호되게 꾸짖습니다. 그들이 순종합니다. 이자 받지 마라. 저당 잡은 밭과 자녀들을 돌려보내 라. 맹세를 받고 제사장들 앞에서 공인을 받습니다. 공증을 합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13절 소름끼치는 퍼포먼스를 합니다.
“내가 옷자락을 털며 이르기를 이 말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모두 하나님이 또한 이와 같이 그 집과 산업에서 털어 버리실지니 그는 곧 이렇게 털려서 빈손이 될지로다” (느5:13)
자신의 옷을 벗어 옷을 탈탈 털며 말합니다. 이 당시 옷은 통옷입니다. 옷을 벗으면 거의 알몸이 나옵니다. 총독이 옷을 벗고 탈탈 털면서 얘기합니다.
만약 자신의 지위와 부를 이용하여 약한 자, 가난한 자를 약탈하고 공동체를 무너뜨 리는 자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그 집안을 탈탈 털어서 알몸, 빈손이 되게 할 것이라 고 선언합니다.
이에 온 백성이 순종하고 위기가 극복됩니다. 갈등이 치유됩니다. 불평이 사라집니 다. 가진 자들이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이 운동은 자그만치 12년이상 계속되었습니 다. 느헤미야 자신도 12년이상 이 운동에 모범을 보였노라고 14절에 보면 술회하고 있습니다. “또한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부터 제 삼십이년까지 십이 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들이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느 5:14)
사자충이란게 있습니다. 동물의 왕자 사자에게 함부로 덤비는 숲속의 동물은 없습니 다. 그러나 이 사자도 몸속에 장기를 갉아먹는 벌레 한 마리 사자충이 기생하면 사 자가 죽는다는 겁니다. 아무리 건강한 공동체도 사자충같은 사람 하나가 있으면 공 동체가 무너질 수 있습니다.
반면 느헤미야 같은 사람 한 사람이 있으면 무너진 성벽도 재건됩니다. 산발랏과 도 비야 게셈이 덤벼도 외환을 물리칩니다. 내부에 일어난 심각한 갈등을 치유하기 시 작합니다.
가정에도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오늘 이 예배를 드리면서 교우들 가운데 단 한 사 람 느헤미야로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오늘 우리는 들러리가 되어서 예배 드려도 모자람이 없을 것입니다. 어려움을 겪던 가정에 느헤미야 한 사람이 이 아이 들 가운데 일어나면 가문이 일어납니다. 목장안에 느헤미야 한 사람이 찾아오면 이 사람 때문에 목장이 서고 목장 식구들의 믿음이 서고 삶이 재건되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 살아가시면서 내게도 느헤미야를 보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느 헤미야를 보는 눈이 있어야 됩니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 제가 어디에 가든지 간에 느헤미야가 되겠습니다. 세상에 나가면 일터에 나가면 그곳에 느헤미야 가 되겠습니다. 우리 가문에 느헤미야가 되겠습니다. 우리 교회 많은 사역에 제가 느헤미야가 되겠습니다. 어디에 가든지 간에 나로 말미암아 한 사람이라도 힘을 얻 고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공동체가 무너진 것들이 회복되게 해 주시옵소서.
동화작가 권정생 씨의 「강아지똥」이란 동화가 있습니다.
강아지 흰둥이가 담장 밑에 똥을 쌌습니다. 날아가던 참새가 먹을 건가? 콕 쪼아 보고는 아이 냄새 더러워~ 똥이잖아? 뒷발로 치고 날아갔습니다. 소달 구지에서 떨어진 진흙덩이도 똥이라고 놀립니다. 이리저리 치이던 강이지똥 은 상처받은 서러움이 눈물을 흘립니다. 강아지똥은 비오는 어느날 예쁜 꽃밭의 민들레를 만납니다. 잘게 부서지고 나누어져 강아지똥은 민들레 거름 이 됩니다. 따스한 봄날 강아지똥은 아름다운 꽃으로 거듭나고 향기가 되고 온세상을 날아다니는 민들레가 되었답니다.
여러분, 나도 누군가의 꽃이 되고 향기가 될 수 있습니다. 나도 누군가를 만나 오늘 의 내가 되고 주님의 향기가 되고 신앙인이 된 것입니다. 어디에 가든지 내 말 한 마디가, 내 삶이, 내 불평이, 내 속에 있는 상처가 개똥이 되어서 굴러다닐 수 있는 가 하면 내가 죽어지고 부셔지고 새싹이 되고 꽃이 되고 민들레가 되고 열매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게 인생살이입니다.
옛날 어르신들은 교회를 개척해 보거나 교회를 건축해 봐야 목회를 안다고 했습니 다. 개척도 해 보고 건축도 해 봤으니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해 봤으니 목회를 압니다. 제가 교회를 섬기면서 느헤미야를 읽어보면 주석이 필요없어요. 누구 설명 이 필요없어요. 한절 한절 제 경험을 기록한 것 같아요. 우리교회 이야기를 기록한 것 같아요. 어느 한 순간 외환이 없었습니까? 한국교회 상황 온갖 어려움을 보면서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교회 안에 내적인 어려움은 왜 없었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단 하루도 단 한 달도 기도하지 않고는 건강하게 서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 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이 공동체가 설 수 없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이 사회속에서 이 건강한 교회가 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 살다가 혼자 할 수 없는게 있어요. 결혼 혼자 못하지요. 목사님 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누구랑 하니? 저 혼자 합니다. 있을 수 없잖아요. 교회를 섬기는 것 이것은 혼자가 안되잖아요.
간밤에 말씀을 준비하고 조용히 기도하는데 눈물이 주르륵~ 내가 약한 줄 알고 개 척부터 지금까지 어려울 때마다 내 곁에 느헤미야들이 찾아와 준 거예요. 하나님이 보내준 거예요. 이 비전채플을 건축하는 가운데 나를 격려하고 무너진 성벽을 수축 하는 느헤미야 내 곁에 있었구나. 하나님 앞에 감사하게 된 거예요.
여러분 어디에 가든지 간에 여러분 곁에 느헤미야가 나타나는 것 그게 하나님의 은 혜입니다. 여러분이 느헤미야가 된 것 하나님의 나를 쓰시는 구나.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 될 것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는 성벽을 무너뜨리는 것 내 안에 있다. 내 안에 있는 적들을 이겨내 고 불평과 원망을 이겨내고 게으름과 나태함을 이겨내고 불충을 이겨내고 내 안에 있는 잘못된 가치를 이겨내고 이 적을 물리치고 하나님 나라의 성벽을 멋있게 세워 가는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