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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恨)의 화병(火病)
둘 >>>
서구 근대의 인본주의는 인간의 지성이 세계의 총체성에 대한 해명이 가능하다는 지성 우월주의였습니다. 지성이야말로 합리적인 인간이 가진 진보의 에너지이자 세상을 과학적으로 규명해줄 모티브 motive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본 것은 엉뚱하게도 미국이었습니다. 실속이 없는 서구의 순수 지식보다는 미국의 실용지식이 우리의 요청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급한 기질이 보여주는 실속 없이 눈높이만 높여온 결과이기도 합니다. 중국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도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었으며 그런 도덕적 거만함으로 서구를 야만인으로 취급하는 심성을 누구나가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이야말로 우리의 도덕적 자부심과 서구의 과학에 기초하는 물질문명의 조화로운 화합을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전통적인 믿음의 신앙적인 근거는 인간의 도리로서의 예의범절이었으며 그것은 유교적인 도덕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것은 국력의 신장도 아니며 정신적인 지성의 계발도 아닌 오직 자연과 어울려 유유자적하는 안빈낙도의 세계만을 보여주었을 따름입니다. 변화에 처한 세계에서 그것은 국력의 신장을 위한 과학의 발전도 전통의 파괴를 통한 새로운 창조도 가져다주지 못하는 관념적인 인식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전통을 고수하면서 외국 문물을 들여올 수는 없었으나 우리의 심성은 전통의 유지가 인간의 도리였을 뿐입니다. 그것을 바꾼다는 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금수만도 못한 인종이 되어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서구와는 달리 실용적인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미국을 모방하다 보니 겉으로 드러난 결과물이 먼저였지 그 근본이라 할 기초지식에 대한 관심은 어리석은 짓으로 여겼습니다. 눈에 좋아 보이는 완성품만을 카피해 들여오다 보니 그것이 이루어진 터전의 기질과 근거로서의 오랜 세월의 시간에 대한 깨달음을 손쉽게 무시하며 들여온 것입니다. 결국 우리 사회는 결과 지상주의라 할 성과 위주의 행정처리가 세상의 중요한 모든 요소들을 앞질러 나아가는 사회를 형성해갔습니다. 이중으로 서류를 작성하는 이중장부가 유행하면서 실제로서의 과업에서는 대충대충이라는 시행착오의 오류를 반복할 수밖에 없게 되기도 했습니다. 마치 자동차가 필요하다고 급히 운전면허도 없이 도로를 질주하는 꼴이었습니다.
빠른 준공으로 자랑해대던 고속도로는 무수한 유지 보수로 그 손실을 달래야 했습니다. 도시의 개발은 투기가 앞장서 나갔습니다. 교육의 백년대계는 어느 누구도 그들의 아성을 허물 수 없는 허장성세로 교육자들의 배만 불려 왔습니다. 탐욕의 재빠름/ 독심의 능력/ 눈치의 재능으로 모두는 사회의 규율을 돈에 예속시켜갔습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일이 우선이 아니라 관행의 습득이 우선이었습니다. 그것은 끼리끼리의 문화를 낳았고 알음알음의 정보가 부자가 되는 시절을 만들어왔습니다. 그처럼 경제성장이라는 과속이 만들어가는 사회는 수많은 비리를 관행으로 여기며 사회를 돈으로 물들이면서 가난이 죄인 양 모두에게 비천한 삶을 강요하기에 바빴습니다.
경제성장의 물욕은 결국 정신 성장의 성숙을 방해해왔습니다. 직장인은 당연히 과업의 완수에 몸과 마음을 다해야 했으며 자신의 삶을 찾으려는 정신적인 탐구 행위는 거만한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으로 질타의 대상이었습니다. 개념으로 바라보려는 관념론적인 시각을 개똥철학자로 매도하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마음공부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직업인의 삶만을 강요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직업이 인생이고 삶이었으며 생활이었던 시절입니다. 결국 모든 학생들의 공부는 직업을 향한 과정이었지 학문의 세계는 없었습니다. 마음의 세계를 가꾼다는 것은 사치일 뿐이었으며 오직 외우는 겉포장 지식에만 몰입해야 했습니다. 마치 막혔던 저수지의 봇물이 터지듯이 고요한 동방의 나라는 너나 할 것 없이 경제성장의 이득을 서로 먼저 가지기 위한 투쟁의 장으로 변했습니다.
거기에는 한국전쟁의 여파가 크게 작용했으며 실용성을 앞세운 경제적 부의 풍요를 구가하는 미국에 대한 동경이 자연스럽게 싹터온 결과이기도 하겠습니다. 여과 없이 들여온 거친 욕망들이 골목마다 들어선 영어학원이 여실히 보여주던 시절이었습니다. 동란 직후 이 땅에 주둔하기 시작한 미군들은 지프차를 타고 가며 뿌려주던 사용기간이 지나 오래된 벌레 먹은 초콜릿과 사탕을 먼저 가지려는 아이들처럼 젊은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마치 영어회화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능력이 있어 보이던 시절이었습니다. 탐욕과 욕망으로 가득한 지성은 이렇게 해서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사회적 가치를 확보하며 상아탑을 우골탑으로 만들어가며 우리의 한(限)만은 삶과 운명을 이끌어갔습니다.
한번 인식된 사상의 체계는 스스로의 고유성과 절대성으로 그 보편성을 확보해가며 현실에서 그 능력을 실현할 수 있는 권한도 함께 가지기 위해 권력화합니다. 대한민국의 가장 큰 권력은 교육부이겠으나 모두는 탐욕과 욕망으로 어두워진 눈으로 오직 정치권력만을 질타하면서 정치만 바뀌면 잘 될 것이라는 허망한 욕망으로 현실을 바라보며 세상을 바꾸어보겠다고 하는 시절입니다. 스스로의 내면의 욕망을 투쟁으로 가리면서 앞장서서 진보를 외치는 시절입니다. 속빈 강정이요 빈 깡통이 요란하듯이 감춰진 욕망은 자신의 능력이 역사에 기록되기만을 애타게 찾아 나서고 있는 시절입니다. 욕망에 대한 집착은 세계에서 최고의 수준을 보이나 순수 지식에 대한 노력은 최하위로 떨어지는 이중의 잣대가 우리 사회의 속성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허구적 윤리로서의 도덕이 무너진 세상을 인간의 허구적 물질 욕망으로 채워가는 사회에서 나타나는 증상이라 하겠습니다. 세상에 대한 원망은 그 사이에서 탄생합니다.
권력의 속성은 그 내부자들을 모두 치열한 경쟁으로 내몰아간다는 것입니다. 과거 경제성장기의 권력의 중심은 당연히 군사문화와 교육입국이었으며 경제성장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지금도 우리 사회는 그 분야에서의 문제점들이 사회에 수많은 시행착오의 오류를 이끌어가고 있으며 그들이 기득권을 획득해 그 반사이득으로 기쁨을 누리고 있는 시절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뿌려놓은 씨앗이 사회의 건전한 성장의 발목을 붙잡고 있음으로 해서 앞으로 나아갈 동력까지 손상을 입고 방황하는 시절입니다. 다행히 새로운 촛불문화가 새로운 동력을 찾아낼 수 있는 계기를 보여줌으로써 신선한 젊음의 문화가 전통의 구각을 깨부수고 또 다른 세상을 창조해 갈 수 있다는 믿음을 주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의 눈치와 영악성은 내부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내부에 불필요한 비선조직 inner circle들을 자연스럽게 형성해왔습니다. 추운 겨울철 두꺼운 얼음 밑으로 흐르는 개울물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 두꺼운 얼음 속에서 그들만의 이익을 조용히 공유해가기도 했습니다. 일이라는 직업집단에서 일을 위해 거기에 몰두하는 것을 바보로 여기는 관점은 여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일이 아니라 출세를 위한 정보에 매달리는 이상한 증상이 직업집단을 물들임으로써 가식의 진실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만물상처럼 지식의 수집에만 이상적인 욕망을 앞세워 다투었지 실천적 지식에 대한 실천적인 동기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 조상 대대로의 관습이기도 했습니다. 내가 배운 것을 그 영역에서 끝까지 추구함으로써 남다른 창조적 능력을 갖추어가려 하기보다는 출세를 전제로 하는 입문서에 몰두하며 공부를 해왔던 것입니다.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우리의 성급한 기질은 일의 성취에 만족하려 함으로써 완성을 향한 가열찬 노력을 외면했던 것입니다. 성취에는 자신의 이익이 배여 나오나 완성에는 사회의 이익이 넘쳐난다는 시각 자체가 없습니다. 성취에는 분열과 원망과 원한이 완성에는 일치와 화합과 순리가 있습니다. 배움을 영광의 과정으로 여길 때에 순수성은 사라지고 끝없는 탐구 의지는 소멸합니다. 눈치의 빠름만이 넘쳐남으로써 오직 욕망만이 가득 차 자신의 삶을 변형시키고 사회적 공동체의 순수성을 오염시키면서 결국 세상에 부정(不正)의 고통만을 더할 뿐입니다.
남을 쓰러뜨려야 내가 잘 살 수 있다는 투철한 영악함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었으니 그것은 결코 서구문물의 도입으로 생성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좁은 땅덩어리에서의 이전투구는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운명이었지 잘못된 관행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그처럼 우리의 삶은 동물적 본능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갈 수 없도록 구조화되었다 하겠습니다. 거기에 더해 한국전쟁은 자연친화적 삶을 살아온 토착민들을 너 나 할 것 없이 이산가족으로 만들면서 생존을 위한 치열한 투쟁의 장으로 바꾸어놓았습니다. 마치 신체의 자율 신경 체계가 내 생각과는 무관하게 작동하듯이 모두는 목숨을 부지하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한 돈벌이의 자율 신경 체계가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외국의 문물을 빨리빨리 모방해 나라가 잘 살아야 한다는 소명의식이 넘쳐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것은 먼저 외국 유학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공부를 위한 유학을 했겠으나 결과적으로는 가문의 영광을 위한 투쟁의 길로 나선 투사가 되었습니다.
첫 시작의 방향이 빗나가면 그 결과는 감당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급히 먹은 밥이 체하듯이 사회적으로 일어나는 수많은 시행착오들에는 그처럼 첫 단추를 잘못 끼워버린 우리의 급박한 삶이 있었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의식이 냉엄한 삶의 세계를 수놓으면서 사회는 영악한 무능력과 어수룩한 전문가 행세에서 각자는 이익을 취하기에만 혈안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고스란히 땜질 처방을 반복하는 어리석음만을 보여주며 무수한 사건사고로 서민들의 삶에 고통을 가중시켜왔습니다. 그러한 현상은 어느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인식의 오류로 일어나는 즉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한 통찰력의 부재에서 나오는 어리석음의 결과라 하겠습니다. 즉 자기답게 살아가기 위한 통찰의 힘을 키우기보다는 남들이 원하고 사회가 원하는 삶에 의지해온 우리의 무능력과 성급하고 급한 욕망에 기인한다고 하겠습니다.
학문의 세계는 오랜 경험과 전통에 근거한 체계적인 분야입니다. 서구는 자신들의 조상이 일구어낸 학문체계를 아무런 장애 없이 시작하는 수월함이 있겠으나 우리의 유학은 언어의 장애부터 세계관의 차이에 본성 자체의 다름에 의한 여러 난관들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어린 유학생들에게 현지에서의 공부는 결국 지도교수들의 세계를 그대로 모방하는 단계에 그칠 수밖에 없었겠지요. 마치 앵무새처럼 외우기에 바빴으며 지금까지 자신이 보고 겪은 가치관으로 세상을 받아들이려는 경직성을 지우지 못하며 반복해 나갈 수밖에 없었겠지요. 새로운 가치관을 탐구하며 발견해 스스로가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내기에는 학문적 성취의 시간이 짧았습니다. 더욱이나 우리 고유의 전통적 학문체계를 재정립해 새로운 학문적 완성을 이룩해내기에는 너무나도 문화라는 곡식창고의 곳간이 텅 비어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지식의 모방에 만족하며 귀국했겠으나 그것도 우리에게는 낯설고도 대단한 지식적인 형성의 기반을 제공해주었습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그런 산업화의 과정에서 그들은 우리 사회의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그들이 사회에 자리 잡아가면서 우리는 서구 세계의 모방으로 경제발전도 이룩했습니다. 그들은 서구 세계의 모방자였으며 서구에 경도되어 항시 그쪽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등잔 밑이 어두운 초롱불이었습니다. 천정의 백열등은 그들에게는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우며 본능적으로 이미 인식된 우리의 인습으로 인해 이룩할 수 없는 세상의 빛이었습니다. 그들의 노력은 치열했겠으나 거기가 한계점이자 최대-점이었습니다. 등잔 밑의 어둠은 결국 세상을 빛과 그림자로 양분하며 가난한 자에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이상한 논리를 도입해 사회적으로 모두가 천시하려는 시각을 만들어가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고뇌는 서구인들의 끊임없는 지식 추구의 방향성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상을 삶으로서만 바라봐온 그들 젊은이들에게 세상을 학문으로 살아가려는 서구인들의 세계는 도저히 본받을 수 없는 갈등을 안겨주었겠지요. 가문의 영광을 등에 업고 유학 온 그들에게는 너무나도 깊은 심연의 골짜기였으며 평생을 추구해야 할 도저히 불가능한 세상의 감옥처럼 보였으리라 생각됩니다. 성취도 어려운 판에 완성은 더욱더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선택의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이었으니 결국 지도교수의 사상만을 외우고 지도 받아 돌아오는 길이 최선이었겠지요. 거기에 언어의 전달 과정의 한계와 이해의 한계에서 오는 낯섦과 서구문화의 고유성에 진입할 수 없는 자신의 인식에 대한 절망감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서구에서의 탈출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가져온 것은 서구의 사상을 가공하고 여과시킬 능력의 부족으로 오직 표절에만 열성을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구는 다양성에서 고유성으로 자신의 탐구 분야를 좁혀가는 세상이지만 우리의 생각들은 좁은 틀을 벗어나 세상의 모든 다양성을 섭렵해야 된다는 강박적인 사회적 압력에 시달려왔습니다. 서구인들의 삶은 치열함과 학문의 완성에 몰두하며 투쟁적인 이념을 창조해나가는 고투였으며 그것은 그들의 동물적 본성이겠으나 우리는 그런 본성을 내재시킬 수 없는 자연환경에서 어쩔 수 없이 현실과 타협하며 삶의 수단으로 학문을 도입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결국 서구적 전문성에서 벗어나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의 과시와 주변의 동경을 기반으로 자신이 선택한 세상에 적당한 기준을 세워 일상을 잘 살아가는 여유로운 방향으로 인식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주변과의 차별과 우월의 도구로/ 출세의 수단으로/ 서구 사상의 모방을 통해 노력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욕심으로/ 그들의 내면을 무의식적으로 가득 채우면서 서구 학문의 열혈적인 전도사의 역할을 하기에 그들은 평생을 바삐 보내왔습니다. 서구적 가치체계를 아무런 걸러짐의 여과 없이 숙성 없는 날것으로 들여와 따듯한 우리의 심성으로 수용시키기에는 당연한 거부반응이 나타나야겠으나 그 모든 것을 욕망의 무지함으로 덮어버렸습니다. 이러한 학문의 접근은 서구 세계와는 전혀 다른 우리 고유의 방식으로 잉태되었습니다. 학문을 권력의 지위로 신분의 상승으로 여기면서 안주하려는 게으름이 넘쳐나면서 사회적 소외를 스스로 불러오기도 했습니다. 그 어떤 창조적인 시각을 내비치기에는 그들의 이중적인 가치관은 사회에 혼란만을 주었으며 학문을 가짜 학문으로 만들어가는 길에 기여할 뿐이었습니다. 실용성을 벗어난 가식적인 학문은 우리 사회에서 점점 현실을 벗어나 그들만의 세계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인문학이 천대받는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학문이 우리에게는 의도적인 접근의 대상이었다고 한다면 서구는 그들의 태생적인 기질에 의한 오랜 전통의 과정이자 본능적인 탐구과제였으며 사회개혁의 원천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들의 학문에의 접근은 세상의 다양성을 외면하고 어느 한 분야로의 좁은 협곡으로 스스로 즐거이 찾아드는 과정이었을 뿐입니다. 그런 순수한 탐구의 세계에서 그들은 스스로의 치열함으로 무장하고 독창성이라는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삶을 몰입하며 자신만의 색깔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희생을 잊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성취에서 머무르는 정체된 삶이 아니라 그 완성을 향해 끝도 없이 밀고 나가는 것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성취를 성공으로 여기며 즐거이 노후를 보낼 생각은 애당초 있지도 않았습니다. 출발부터가 다른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탐구의 즐거움을 향한 치열한 노력만을 보여줄 뿐입니다. 자신만의 영역에서의 창조성에 몰입하고 그 창조역량으로 학문의 세계에 기여함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갈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전통은 학문을 그 고유의 영역으로 남겨두지 못하는 조바심의 세월이었습니다. 조선조의 시작과 함께 모두 다 양반들의 최종 목표는 출세였으며 그 영역은 정치에 입문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서는 자신이 외워온 지식체계를 덕으로 다스리는 이상한 윤리체계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순수학문의 세계와 정치의 세계는 전혀 다른 세계일 텐데도 그들은 욕망을 예의로 감추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500년을 지속해 왔습니다. 그 숱한 세월을 우리는 오직 외우는 능력만을 가지고 정치에서 전통의 실현을 학문의 최대 결실로 여겼습니다. 학문의 존립 이유가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킬 동기를 찾는 것이며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을 이념화시켜 보급시키는데 있으며 자신의 삶의 주체성을 강화시키는데 있을 것이나 우리는 오로지 덕으로 다스린다는 유교적인 배움이었으며 그것을 통한 우월적 삶만이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마치 삶에 책의 논리를 적용시키려는 모습이었습니다. 개념을 현실로 인식하려는 어리석음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오백 년간 시종일관 변함없이 이어져온 우리의 역사를 세계사적으로 자랑하기에도 주저하지 않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런 독선적 정당성은 지금까지도 우리 몸속에 유유하게 이어져오며 정치와 학문의 세계를 상호 오염시켜가며 스스로의 세력을 키우는 무지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학문의 전당은 자리보전의 권력의 전당으로 탈바꿈했으며 정치의 세계는 무지와 몽매의 영악함을 능력으로 분열 속에 자리보전을 위한 눈치로 세월을 지세우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이 그들만의 욕심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모두의 참여 속에서 이루어지는 시민의 선택에 의한 결과물이라는 것이 더욱더 큰 문제이기도 합니다. 시민 모두의 내면이 헛된 자부심으로 꽉 차있는 시절에 모두는 물질적 풍요에만 몰두하며 살아온 시절이었기에 아무도 낯설게 느끼는 사람이 없음으로도 증명이 가능합니다. 재미에 몰두하고 좋은 것만 찾아다니며 취향의 고급만을 무-개념으로 욕망하는 삶을 누구나가 최고로 여기며 살아가기에 바쁩니다. 남의 삶만이 궁금하고 자신의 노력은 허공을 맴돌고 있으나 모두는 소문의 수다로 즐겁게 살아갑니다.
이러한 습성은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터전의 결과라 하겠습니다. 습성과 습관이 오랜 전통으로 내려올수록 신선한 물갈이가 되지 않음에 의해 물속은 탁해지고 오염이 증가합니다. 조선시대의 우리는 유교적인 이념과 도교가 혼재된 불교적인 사상과 샤머니즘적인 믿음까지 백성들은 혼합된 체계를 유지하며 각자는 자연인으로 잘 살아갔습니다. 양반들은 단일한 과거 급제를 위한 유교 경전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그 이외의 백성들에게는 풍년과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면서 도교와 불교와 유교가 혼재된 사상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며 샤먼적인 행동을 서슴없이 실천하며 건강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정치체제는 그런 백성들의 세계를 유교라는 학문의 체계로 무장한 도덕과 윤리관으로 적용시키려 강압해온 역사이기도 합니다.
사회는 양반과 평민들로 구분되어 있었으며 양반들은 과거 급제라는 절대적인 차별정책으로 평민들과는 다른 세상을 살아갔습니다. 오직 인륜(人倫)을 앞세운 그들은 도덕을 삶의 규율로 완성시키려 함으로써 평민들의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옥죄어왔습니다. 항시 그들의 삶을 감시하고 계도하기를 통치행위로 여김으로써 고귀한 양반만의 삶을 즐기며 성취에 만족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땅에 발을 디디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서민들의 삶을 아랫것들로 경시해왔습니다. 그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삶을 살아온 양반 계층은 스스로의 삶을 도덕이라는 가치를 앞세워 스스로를 옥죄었을 뿐이었습니다. 계도 대상인 서민들의 삶을 자신들의 잣대로 판단하며 삶의 구석구석을 간여해왔던 것입니다. 그들만의 인식의 틀로 구속하고 가두려 했습니다.
결국 우리의 삶은 성취에 만족하며 완성을 향해 나아가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세속적인 욕망의 대리 만족으로 마감했습니다. 짓다만 건물처럼 우리 사회는 어리석은 판단들이 규율화 함으로써 그 대상자 계층 즉 서민들에게 혼란을 안겨주었습니다. 사회적 판단들이 무수한 모순으로 가득 찼습니다. 즉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한 성취의 단계에서 사회적 이익을 위한 완성을 향해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하는 한계를 스스로 보여주며 살아왔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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