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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가족의 결속력도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2024년 나해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복음: 루카 8,19-21
오늘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핏줄보다도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공동체의 결속력이 더 크다는 말씀입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우리는 자칫 핏줄이나 지연, 학연 등이 우리 공동체의 결속력을 좌우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북한과 같은 사상과 체제 속에서 산다면 가족이 가족을 고발하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행복은 관계에서 옵니다. 관계는 공동체를 만듭니다. 우리가 어떤 결속력이 있는 공동체에 머무느냐에 따라 우리 행복이 결정됩니다. 우리는 사랑의 공동체에 머물러야 하고 그 사랑의 말씀이 결속력의 근원이 되는 공동체에 머물러야 행복할 수 있게 됩니다.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가장 돋보이는 두 주인공은 루크 스카이워커와 다스 베이더(이전 아나킨 스카이워커)입니다. 루크는 평화 수호자들 편에서 일하고 다스 베이더는 악의 원흉인 다스 시디어스의 부하입니다. 결국 루크와 다스 베이더가 맞붙게 되는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다시 베이더가 루크의 아버지라는 설정입니다.
다시 베이더는 원래 아나킨 스카이워커였습니다. 그는 강력한 제다이 기사였지만 어머니를 잃고 자신이 사랑하는 쌍둥이를 임신한 아미달라까지 잃게 될까 봐 평화만 유지하는 일에 점점 신물을 느낍니다. 자신의 힘을 점점 자기와 가족을 지키는 데 쓰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마음을 잘 아는 시스가 그에게 힘을 주었는데, 그 힘을 이용하려면 더 분노하고 더 악해져야만 했습니다. 결국 점점 변하게 되는 아나킨을 떠난 아미달라는 혼자 남녀 쌍둥이를 낳고 죽습니다. 세상에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는 다시 베이더는 더 극악무도해집니다.
다스 베이더의 두 자녀는 각자 다른 곳에서 몰래 키워집니다. 둘 안에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엄청난 포스가 작용하고 있었고 결국 루크도 제다이가 되어 아버지와 마주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와의 전투에서 손목이 잘리고 자신이 다스 베어더의 아들임을 알게 된 루크는 혼란에 빠집니다. 자신과 함께 싸우던 레아 공주도 자기 동생임을 알고는 아버지를 설득하겠다고 다시 나섭니다.
시스는 스스로 찾아온 루크의 힘이 더 강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다스 베이더와 대결을 시킵니다. 다스 베이더가 이번에는 루크에게 쓰러집니다. 그러나 루크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편에 서라는 시스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그러자 시스가 루크를 죽이려 합니다. 이때 부상을 당한 다스 베이더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악의 중심인 시스를 죽입니다. 이렇게 예언대로 아나킨 스카이워커는 악과 선의 균형을 다시 찾는 인물이 되어 죽습니다.
사람들은 왜 이런 이야기를 재밌어할까요? 이 이야기 안에는 선과 악을 선택해야 하는 하늘에서 오는 ‘말씀’과 ‘혈육의 관계’가 대결합니다. 결국 혈육이 하나로 뭉치려면 어쩔 수 없이 둘 다 악인이 되던가 둘 다 선인이 되는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부모는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을 창조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뿐입니다. 자녀가 눈이 빠지면 다시 넣어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자녀를 만들 줄 모릅니다. 만약 자동차가 자신을 만들지도, 고치지도 못하는 원숭이의 목소리를 더 좋아하고 사람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의 운명은 뻔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창조한 이의 목소리를 따라야 온전한 창조된 모습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하느님과 같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창조자는 사랑을 말합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우애 있게 지내기를 원합니다. 모든 창조는 사랑으로 이루어지기에 그 피조물들이 서로 사랑하라는 게 창조자의 뜻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원하는 그 뜻은 사제가 되건, 결혼하건 모두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는 핏줄만이 아니라 그 말씀을 듣고 따르는 새로운 공동체가 생깁니다. 그 뜻을 따르지 않는 가족은 핏줄이 같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보다는 결속력이 줄어듭니다. 악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같은 핏줄이라도 선을 따르는 사람과 원수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는 아버지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줍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고발합니다. 아들은 가진 옷을 다 아버지에게 주고 자신의 아버지는 이제 하늘의 아버지라고 하며 수도자의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저희 아버지는 처음에는 제가 사제가 되는 것을 반대하셨지만, 나중에는 그것을 허락하시고 충실한 신앙인이 되셨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 안에 모여야 합니다. 그래야 핏줄도 유지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핏줄보다도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공동체의 결속력이 더 크다는 말씀입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우리는 자칫 핏줄이나 지연, 학연 등이 우리 공동체의 결속력을 좌우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북한과 같은 사상과 체제 속에서 산다면 가족이 가족을 고발하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행복은 관계에서 옵니다. 관계는 공동체를 만듭니다. 우리가 어떤 결속력이 있는 공동체에 머무느냐에 따라 우리 행복이 결정됩니다. 우리는 사랑의 공동체에 머물러야 하고 그 사랑의 말씀이 결속력의 근원이 되는 공동체에 머물러야 행복할 수 있게 됩니다.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가장 돋보이는 두 주인공은 루크 스카이워커와 다스 베이더(이전 아나킨 스카이워커)입니다. 루크는 평화 수호자들 편에서 일하고 다스 베이더는 악의 원흉인 다스 시디어스의 부하입니다. 결국 루크와 다스 베이더가 맞붙게 되는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다시 베이더가 루크의 아버지라는 설정입니다.
다시 베이더는 원래 아나킨 스카이워커였습니다. 그는 강력한 제다이 기사였지만 어머니를 잃고 자신이 사랑하는 쌍둥이를 임신한 아미달라까지 잃게 될까 봐 평화만 유지하는 일에 점점 신물을 느낍니다. 자신의 힘을 점점 자기와 가족을 지키는 데 쓰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마음을 잘 아는 시스가 그에게 힘을 주었는데, 그 힘을 이용하려면 더 분노하고 더 악해져야만 했습니다. 결국 점점 변하게 되는 아나킨을 떠난 아미달라는 혼자 남녀 쌍둥이를 낳고 죽습니다. 세상에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는 다시 베이더는 더 극악무도해집니다.
다스 베이더의 두 자녀는 각자 다른 곳에서 몰래 키워집니다. 둘 안에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엄청난 포스가 작용하고 있었고 결국 루크도 제다이가 되어 아버지와 마주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와의 전투에서 손목이 잘리고 자신이 다스 베어더의 아들임을 알게 된 루크는 혼란에 빠집니다. 자신과 함께 싸우던 레아 공주도 자기 동생임을 알고는 아버지를 설득하겠다고 다시 나섭니다.
시스는 스스로 찾아온 루크의 힘이 더 강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다스 베이더와 대결을 시킵니다. 다스 베이더가 이번에는 루크에게 쓰러집니다. 그러나 루크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편에 서라는 시스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그러자 시스가 루크를 죽이려 합니다. 이때 부상을 당한 다스 베이더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악의 중심인 시스를 죽입니다. 이렇게 예언대로 아나킨 스카이워커는 악과 선의 균형을 다시 찾는 인물이 되어 죽습니다.
사람들은 왜 이런 이야기를 재밌어할까요? 이 이야기 안에는 선과 악을 선택해야 하는 하늘에서 오는 ‘말씀’과 ‘혈육의 관계’가 대결합니다. 결국 혈육이 하나로 뭉치려면 어쩔 수 없이 둘 다 악인이 되던가 둘 다 선인이 되는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부모는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을 창조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뿐입니다. 자녀가 눈이 빠지면 다시 넣어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자녀를 만들 줄 모릅니다. 만약 자동차가 자신을 만들지도, 고치지도 못하는 원숭이의 목소리를 더 좋아하고 사람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의 운명은 뻔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창조한 이의 목소리를 따라야 온전한 창조된 모습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하느님과 같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창조자는 사랑을 말합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우애 있게 지내기를 원합니다. 모든 창조는 사랑으로 이루어지기에 그 피조물들이 서로 사랑하라는 게 창조자의 뜻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원하는 그 뜻은 사제가 되건, 결혼하건 모두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는 핏줄만이 아니라 그 말씀을 듣고 따르는 새로운 공동체가 생깁니다. 그 뜻을 따르지 않는 가족은 핏줄이 같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보다는 결속력이 줄어듭니다. 악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같은 핏줄이라도 선을 따르는 사람과 원수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는 아버지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줍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고발합니다. 아들은 가진 옷을 다 아버지에게 주고 자신의 아버지는 이제 하늘의 아버지라고 하며 수도자의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저희 아버지는 처음에는 제가 사제가 되는 것을 반대하셨지만, 나중에는 그것을 허락하시고 충실한 신앙인이 되셨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 안에 모여야 합니다. 그래야 핏줄도 유지될 수 있습니다.
- 전삼용 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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