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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을 보이는 느헤미야
느 5:14-19
14 또한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부터 제삼십이년까지 십이 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들이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15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16 도리어 이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내 모든 종자들도 모여서 일을 하였으며
17 또 내 상에는 유다 사람들과 민장들 백오십 명이 있고 그 외에도 우리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 중에서 우리에게 나아온 자들이 있었는데
18 매일 나를 위하여 소 한 마리와 살진 양 여섯 마리를 준비하며 닭도 많이 준비하고 열흘에 한 번씩은 각종 포도주를 갖추었나니 비록 이같이 하였을지라도 내가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하였음은 이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었더라
19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느 5:14-19 / [모범적인 총독 느헤미야] 나는 ㄱ) 아닥사스다왕 20년부터 32년까지 12년 동안 유다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일을 하였으나, 나와 나의 형제들은 총독이 받는 월급을 받은 일이 없었다. (ㄱ. BC 444-432년) 15) 이전의 총독들은 가렴주구로 백성을 괴롭혔었다. 그들은 백성에게 떡과 포도주만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매일 은 40세겔까지 요구하였다. 총독들만이 백성을 가혹하게 착취한 것이 아니라 총독의 부하들도 백성을 억압하고 괴롭혔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이 두려워서 그러한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 16) 오히려 나는 예루살렘 성벽을 건설하는 데 온 힘을 다 바쳤고, 나의 부하들도 공사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나와 나의 부하들 중에서는 어느 누구도 권력을 쥐었다고 빈민의 토지를 산 일이 없었다. 17) 나는 혼자서 좋은 식탁에 앉아 본 일도 없었다. 나는 언제나 유다의 지방 관리 150명과 함께 식사를 하였고, 사방의 다른 나라에서 온 손님들도 내가 대접하였다. 18) 그래서 나는 매일 소 한 마리와 살찐 양 여섯 마리와 많은 닭을 잡아 요리하고, 열흘에 한 번씩 모든 종류의 포도주도 대량으로 제공하였다. 그런데도 나는 총독으로서 요구할 수 있는 부양비를 신청하지 않았다. 그런 것은 결국 백성에게서 나오게 마련인데, 유다 백성은 이미 성벽공사를 하느라고 너무나 지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19) 그리고 나는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이렇게 호소하였다. `나의 하나님, 나를 기억해 주소서! 내가 동족을 위하여 한 이 모든 일을 기억하시고, 내게 좋은 일을 베풀어 주소서!'
유지와 관료들이 이권을 포기하고 순순히 승복한 까닭은 느헤미야가 그들을 배려하는 설득의 과정이 있었고, 느헤미야 자신의 삶이 깨끗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14-18) 이 전의 총독들이 부정부패를 해결하지 못한 것은 자기도 부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지위를 이용해 누릴 수 있는 특권을 포기했습니다. 총독의 녹을 먹지 않았습니다(14). 총독에게 받는 월급이 아니라, 식민지 백성들에게 뜯어내는 상납금을 총독의 녹이라고 합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전 총독들은 권력을 이용해서 엄청난 재물을 착복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이같이 행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15). 또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다”라고 말합니다(16).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들은 많은 정보를 쥐고 있기 때문에 가장 쉽게 돈 벌 수 있는 게 땅 투기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땅을 하나도 사지 않았습니다. 당시 총독의 위치에서 받는 의전도 느헤미야가 당연히 받아야 할 권한인데 성벽 재건을 위해 고된 노동을 하는 백성들을 위해 포기합니다(18).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19) 느헤미야가 세상적인 이익을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은 영원한 천국의 상급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내부의 부패 문제를 해결하느라고 성벽 재건공사는 조금 늦춰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 공사 진행 속도는 훨씬 더 탄력을 받았을 것입니다. 마음에 가득 찬 응어리가 풀리고 나니, 백성들이 더 열정적으로 일했을 것이고, 기득권층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질 것이고, 서로가 하나가 되어서 일을 끝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내부의 갈등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예측하지 못한 문제가 터진 것은 재앙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성벽재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벽 안에 들어가서 살아갈 사람들이 변해야 진정한 재건이기 때문입니다. 새롭게 성벽을 세우고 재건되는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들과는 달라야합니다. 서로의 이익을 탐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돌봐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적용: 당신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기의 이익을 포기하고 정직하고 깨끗한 삶을 살았던 느헤미야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까?
리더의 덩치는 물리적 숫자의 크기를 초월합니다. 비록 한 사람 혹은 소수의 리더지만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력은 엄청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좋은 리더가 되어 주시고, 우리 또한 내가 있는 그곳에서 영적 리더가 되어 세상으로부터의 압박과 애워싸는 상황 가운데 주님을 닮은 귀한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 설 교 >
다 아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느 5:14-19 / 이수영목사
우리는 그동안 유다 사람으로 페르시아의 왕에 의해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된 느헤미야가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깊은 신앙과 민족에 대한 남다른 사랑과 뛰어난 지도력으로 다 무너지고 불타버린 채 오랜 세월 방치되었던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건축할 뿐 아니라 민족공동체 자체를 재건하는 과정을 살펴왔습니다. 오늘 본문은 자기 민족을 사랑하고 선정을 베푸는 진정한 지도자로서의 느헤미야의 일면을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잠간동안의 공백기를 사이에 두고(느13:6) 앞뒤로 두 차례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두 번째 임기가 얼마나 지속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첫 번째 임기는 십이 년이었음을 오늘 본문 14절이 분명히 밝혀줍니다: “또한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부터 제삼십이년까지 십이 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들이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녹을 먹는다는 것은 식생활에 필요한 비용을 백성이 내는 공적 세금으로 충당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페르시아의 정책은 총독이 왕과 중앙정부에 바칠 세금뿐 아니라 자기 개인과 자기 수하의 관료 및 가솔들의 생활을 유지하고 외교행위의 경비를 조달하기 위한 세금을 백성으로부터 거둘 권한을 갖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그런 특권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본래 페르시아에서 돌아올 때 얼마나 큰 부를 소유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그는 자기와 자기의 식솔들을 부양하고 자기의 고위관료들과 외부귀빈들을 접대하는 모든 비용을 개인적으로 부담했다는 것입니다. “나와 내 형제들이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한 데서 “내 형제들”이란 느헤미야를 밑에서 돕는 고위관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느헤미야만 백성에게 부담을 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의 관료들도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솔선수범과 지도력이 그들로 하여금 그의 뜻과 실천을 따르게 만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이런 통치원칙은 그 이전의 총독들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15절을 봅니다: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합니다. 느헤미야보다 앞선 총독들 가운데는 세스바살과 스룹바벨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느헤미야보다 거의 백 년 전의 총독들이었습니다. 여기서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이란 느헤미야 직전의 총독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없었고 그래서 백성에게 무거운 부담을 지우는 정책을 펼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총독들만 백성을 착취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했다고 합니다. “그들의 종자들”이란 총독부의 하위 관리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하위관리들은 백성들에게서 세금을 걷는 실무를 담당하면서 페르시아의 왕과 지역의 총독을 위한 세금을 거둘 뿐 아니라 자기들 자신을 위해서도 백성들을 착취하곤 했고 고위관료들은 그것을 눈감아 주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부담과 고초는 더욱 가중되었을 것입니다. 백성을 생각하고 아끼지 않는 총독들의 정책은 그래서 백성에게 크게 해악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바로 앞서는 5:1-8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많은 백성에게 먹을 것이 부족했습니다. 돈이 없기 때문에 구걸을 하든가(느5:2) 곡식을 구하기 위하여 밭과 포도원과 집을 저당 잡혀야 했습니다(느5:3). 먹고 살기도 힘든데 왕에게 세금을 바치기 위해 빚을 얻어야 했습니다(느5:4). 밭과 포도원도 이미 남의 것이 되었고 더 이상 아무런 힘이 없어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사람들에게 남은 길은 자기의 자녀들을 종으로 파는 것이었습니다(느5:5). 그것도 동족 사이에 자녀를 종으로 사고팔고 했던 것입니다(느5:8). 동족 사이에 고리대금업도 성행했습니다(느5:7). 이에 백성의 부르짖음이 컸고 동족 사이에 원망이 높아졌습니다(느5:1, 6).
느헤미야는 백성의 그 좋지 못한 소행 때문에 크게 노하였으며(느5:6) 즉각 그것을 중단시켰습니다(느5:10-13). 그리고 그런 유다 백성의 소행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총독의 정책과 백성에 대한 배려에 관심 없는 그 관료들의 행태 탓이었음을 안 느헤미야는 그들과 전혀 다른 통치자세를 견지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느헤미야의 백성사랑의 근거는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의 신앙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사랑과 백성사랑은 서로 끊어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에서 느헤미야는 쓰기를 자기는 “도리어 이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내 모든 종자들도 모여서 일을 하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세금을 내지 못하거나 빚을 갚을 수가 없어서 땅을 팔아야 할 때는 돈 있는 사람들이 헐값에 사서 자기 소유의 땅을 늘리거나 비싸게 되팔아서 부를 더 증식하는 기회이곤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자기의 지위와 부를 이용하여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지만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기만 아니라 그의 수하에 있던 하위관리들도 오로지 성벽공사에만 전념하며 백성을 상대로 고리대금을 하거나 땅을 사고 넓히는 일에 관심 갖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느헤미야가 그렇게 하도록 스스로 본을 보이며 그들을 잘 다스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단지 축재하고 부를 증식하는 일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자기의 재물을 오히려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는 데 기꺼이 썼습니다. 본문 17-18절을 봅니다: “또 내 상에는 유다 사람들과 민장들 백오십 명이 있고 그 외에도 우리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 중에서 우리에게 나아온 자들이 있었는데 매일 나를 위하여 소 한 마리와 살진 양 여섯 마리를 준비하며 닭도 많이 준비하고 열흘에 한 번씩은 각종 포도주를 갖추었나니 비록 이같이 하였을지라도 내가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하였음은 이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었더라.” 페르시아 왕궁에서는 흔히 왕의 식탁에 귀족들이 함께하곤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제국의 유다 총독으로서 페르시아의 관행에 따라 식탁에서 자기의 고위관료들과 함께해야 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페르시아 제국에 속한 다른 지역의 총독이나 고관들이 페르시아 본토로 가는 길에 들리게 되면 역시 그의 식탁에서 그들을 접대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같이 식사 때마다 수백 명 분의 음식을 마련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그 모든 식사비용을 백성의 세금으로 충당하지 않고 개인 부담으로 했다는 말입니다. 요일3:17-18에서 사도 요한은 쓰기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했습니다. 하나님사랑은 형제사랑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재물이 있고 궁핍한 형제가 있을 때에는 아낌없이 그 형제를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느헤미야는 일찍이 그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실천한 지도자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의 그의 간구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느헤미야의 이 간구는 자칫하면 느헤미야가 공치사를 하거나 자기 영광을 구한 것으로, 또 하나님께 무슨 큰 보상을 요구한 것으로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여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언제나 옳은 판단을 하시는 하나님께서 민족을 위한 자기의 진심을 이해해주시리라는 신뢰를 나타낸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 그는 총독이며 지도자로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또 최선을 다해 헌신하고서도 그 모든 것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는 그의 믿음을 드러낸 것이라고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아마도 느헤미야가 그런 간구를 하게 된 배경에는 그의 진심을 곡해하거나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선하고 순수한 뜻으로 무슨 일을 해도 꼭 부정적으로만 보고 악의적으로만 해석하고 말을 퍼뜨리는 자들이 언제 어디서나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도 안팎에서 보이지 않는 그런 시각을 느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그런 자들을 찾아다니며 일일이 해명할 수도 없고 백성에게 매일같이 설명을 할 수도 없는 그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언제나 변함없이 선하시고 올바르신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과 판단이었을 것입니다. 모든 것 다 아시는 하나님만 믿고 그에게 다 맡기고 그의 역사에만 전념하고자 하는 느헤미야의 의지를 드러낸 것이 19절의 간구였을 것이란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아실 것이기에 온갖 오해와 비난과 비협조와 방해에도 불구하고 성벽건축의 사역을 중단 없이 계속할 수 있도록 함께해주시기를 빈 것이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예루살렘 성벽재건축은 불가능할 것이라 믿으며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간구한 것이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하는 기도였다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너그러우면서 사심이 없는 민족지도자로서 모범을 보인 느헤미야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지도자가 오늘날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 인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년에 있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기도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준다고 봅니다.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며 국민을 사랑하는 지도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과정에서의 오늘의 느헤미야 이야기는 또한 우리 교회에게도 주는 교훈이 작지 않다고 봅니다. 우리든 새 성전 건축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재건이 총독 느헤미야를 비롯하여 그를 따른 고위관료들과 하위관리들의 사심 없고 헌신적인 협력에 힘입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해서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백성 사이의 신뢰와 단결을 이루는 결정적인 힘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새 성전 건축은 온 교우들의 참여와 협동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의 지도층에 있는 중직자들의 사심 없고 솔선수범하는 헌신적인 자세가 온 교우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하나 되게 하며 신뢰와 전적인 참여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 일에 헌신하며 열심을 내는 사람에게 오히려 오해와 중상과 비방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로 시험 들게 되고 분란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오늘 본문 19절의 느헤미야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런 오해와 비방을 멈추게 해주실 것을 믿고 그저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나아가는 주의 일꾼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새 성전 건축의 대사역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느헤미야가 보여준 그런 지도력과 헌신의 의지와 실천의 능력을 주실 것을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보여준 그런 헌신의 자세는 비단 중직자들에게만 요구되는 것은 아닙니다. 온 교우들에게 다 요구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매일 같이 수백 명의 식사를 제공해야 하는 부담을 백성에게서 거두는 세금으로 충당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했습니다. 우리도 할 수 있는 한 교회예산을 쓰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는 습관을 길러야 하겠습니다. 제직으로서 또는 교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도 꼭 교회 돈을 쓰기를 바라는 생각은 고쳐야 하겠습니다. 뭐 조그마한 일 하고도 의례 교회 돈으로 식사를 하는 관행은 버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다 같이 최대한 교회예산을 아끼려는 마음과 실천 위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와 복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이런 것 조금 아낀다고 몇 백억 원이 들어가는 건축에 무슨 큰 도움이 된다고 그러느냐 할 사람도 있겠지만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도 있듯이 작은 마음 하나하나가 모이면 큰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새로운 마음가짐과 하나 된 다짐으로 우리 앞에 놓인 큰 역사를 이뤄가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힘이 주어졌을 때
느 5:14-19 / 김필곤목사
유행했던 ‘여인천하’가 있습니다. 여인천하가 아니라 음모 천하인 것 같이 보입니다만 여인천하 말고 "3일 천하"라는 이야기 들어 보았습니까? 고대 페르시아에는 전쟁에서 승리하면 잘 생기고 체격이 좋은 노예를 3일 동안 왕으로 삼았던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3일 천하" 그야말로 짧은 시한 부 왕입니다. 이 3일 동안 "시한부 왕"은 세상에서 좋다는 옷을 다 입어 보고, 먹고 싶은 음식을 다 먹어 보고, 하고 싶은 일도 마음껏 해 본다고 합니다. 만일 3일 동안 세상을 다스리는 힘이 나에게 주어진다면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하겠습니까? 물론 3일이 지난 후 페르시아 사람들은 이 "3일 천하"를 호령하던 노예왕을 잔인하게 죽이면서 축제를 벌였다고 합니다. 힘이란 참 좋은 것입니다. 사람을 살맛나게 하고 신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말 큰 사전에 힘이란 "동물이 스스로 움직이거나 다른 물건을 움직이게 하는 힘살의 작용" 이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힘을 설명한다면, 힘이란 "자신 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능력, 실력, 권력, 세력 따위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엘빈토플러는 "권력의 이동(power Shift)"에서 권력의 원천, 즉 힘의 원천은 폭력. 부. 지식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어느날 대통령이 되고, 장관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고, 차관이 된다는 것, 어느날 과장, 이사로 진급한다는 것, 어느날 사법고시 행정고시에 합격한다는 것, 어느날 사장이 되고 큰 부자가 된다는 것, 어느날 박사 학위를 받는다는 것, 어느날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따른다는 것 이것 얼마나 신나고 살 맛나겠습니까? 능력, 실력, 권력, 세력, 재력 등을 얻는 것은 보통 즐거움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어렵게 그 힘을 얻고 쓰러져 가는 사람들을 요즈음 매스컴을 통해 보게 됩니다. 왜 그렇게 쓰러지고 감옥에 갇히고 수치를 당합니까? 힘을 잘 못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힘이 주어지면 힘이 없을 때는 상상치 못할 유혹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유혹을 넘어가지 못하면 결국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유혹입니까?
대부분 세 가지로 옵니다. 첫째는 힘의 오용입니다. 힘을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힘의 남용입니다. 권리나 권한 따위를 본디의 목적에서 벗어나 함부로 행사하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힘을 이용한 사리 사욕 추구입니다. 권력이 주어졌을 때 그 권력을 오용하고 남용하고 그 권력으로 사리 사욕을 채우려다가 넘어진 사람들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수없이 보았습니다. 요즈음도 이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져 어렵게 쌓아 온 것을 단숨에 잃어버리고 얼굴 들지 못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것은 권력가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매일 매일 삶 속에서 격는 문제입니다. 누구에게나 다 힘이 주어져 있습니다. 가정에서 가장으로, 어머니로 힘이 주어져 있습니다. 직장에서 직책에 맡는 힘이 주어져 있습니다. 모두에게 건강의 힘, 지능의 힘이 주어져 있습니다. 음악, 미술, 조각, 말, 운동 등 갖가지 재능의 힘도 주어졌습니다. 누구에게나 예외없이 크고 작은 힘들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힘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지속적으로 그 힘을 간직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넘어지지 않고 그 힘으로 인생을 성공적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1.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힘을 사용해야 합니다(14-15)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두려워한다는 말입니다. 코람데오 정신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원하는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힘이 주어지면 그 힘이 나의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힘을 주신 분을 잊는 것입니다. 자기 잘나 받은 것으로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자기 잘나서 성공하고 자기 잘라 권력을 받았고 자기 잘라 아름답고 자기 잘라 출세한 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힘을 오용하고 남용하게 됩니다. 그 힘으로 부당하게 통제하려 들고 심지어는 힘을 주신 분까지 통제하려고 합니다. 가인처럼 되는 것입니다. 동생의 예배까지 통제하려 합니다. 결국 하나님 마음까지 통제하려 합니다. 당대의 입술을 통제하려고 합니다. 상대의 마음까지 통제하려고 합니다. 남편의 입술, 아내의 입술, 사장의 입술, 목사의 입술과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다 스스로 실족합니다. 그 힘은 주신 분이 거두어 가버리면 아무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힘을 거두어 가는 것 중의 최악의 것은 생명을 거두어 가버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에게 힘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제것인양 교만하게 사용합니다. 결과는 왕권도 잃고 그 힘 때문에 생명도 잃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힘이 주어지면 주신 분의 뜻에 맡게 사용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힘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12년 동안 이스라엘의 총독으로 지내었던 느헤미야를 보십시오.(14절) 권력이 주어졌습니다. 힘이 주어졌습니다. 짧은 기간이 아닙니다. 그는 이 힘을 어떻게 사용하였습니까? 이전 총독은 지나치게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이전 총독들은 백성을 토색하였습니다. 돈이나 물건을 억지로 빼앗아 갔다는 말입니다. 양식과 포도주와 은 사십 세겔을 세금으로 취하였습니다. 그의 직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습니다. 당시의 사회상을 보십시오. 부자들은 이자 놀이하고 호화 호식하였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 집과 자녀를 저당 잡혔습니다.(느5:1,2,10) 이런 때 총독과 관리들은 부패하여 힘을 남용하고 오용하고 그 힘으로 자기 사리 사욕만 채우는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14절 하반절에 보니까 총독의 녹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한 해가 아니었습니다. 12년 동안입니다.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형제 하나니도 마찬가지였습니다(1:2; 7:2). 자신은 선한 채하며 동생들을 통하여 몇억씩 챙기는 것 아니었습니다. 그가 힘이 있는데도 그렇게 살았던 원동력은 어디에 있었던 것 같습니까? 그가 도덕적으로 강직한 사람이었기 때문일까요? 그가 충분히 돈을 벌어 왔기 때문일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그 원동력에 대하여 분명하게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15절 하반절을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같이 행치 아니하고" 이것이 느헤미야가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경외한다는 말은 공경하고 두려워한다는 말입니다.느헤미야는 자신을 그 지위에 놓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예루살렘에 보내신 분도, 자신을 총독의 지위에 올려놓으신 분도, 자신에게 책임을 주신 분도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지위에 대하여 열쇠를 가지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할 줄 아는 지도자였습니다. 하나님이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는 하나님인 줄 알았습니다. 힘을 잘 사용하는 자들은 바로 자신이 종이라는 사실을 잃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기업들의 전쟁이라는 책을 보면 60년 동안 미국의 오토바이 시장을 70%를 석권했던 할리가 일본 회사 혼다에게 그 자리를 내주어야 했던 일을 써 놓고 있습니다. 그책에서 할리가 힘을 잃은 이유를 3 C로 진단하고 있습니다. 자기 만족(complacenct 켐프레이즌트), 과신(confidence 콘피던스), 오만(conceit 캔지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교만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말입니다. 힘 주어졌을 때 교만하면 망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입니다. 말하는 능력 주어졌다고 남용해서는 안됩니다. 보는 힘, 걷는 힘, 아는 힘, 상상하는 힘, 물질, 재능 주어졌다고 남용하거나 오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에게 있는 모든 힘이 주님께서 주신 것을 믿습니까?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생명 되시니 구주 예수 떠나가면 죄 중에 빠지리 눈물이 앞을 가리고 내 맘에 근심 쌓일 때 위로하고 힘 주실 이 주 예수 (93장 1절)" 이 사실을 믿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힘을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사용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조금만 뭐 주어지면 사람들이 얼마나 교만해집니까? 그러다가 그것으로 결국 망하는지 모르고 날뛰는 사람들 얼마나 주변에 많이 있습니까?
지난 주에 월마트 coo(chief operating officer)인 단 소더퀴스트의 인터뷰 기사를 읽어 보았습니다. 120만명의 사원 거느린 월마트 최고 운영자입니다. 세입 2천억 달러 세계 2위 기업의 총책임자입니다. 그는 교만할 만도 합니다. 힘있는 사람입니다. 힘을 남용할 만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는 사업가 이전에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신앙인이라는 것이 사업가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월마트에서 일하고 있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것처럼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일에는 이 옷을 입고 평일에는 다른 옷을 입는 삶을 살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아들을 인도의 선교사로 보내었습니다. 회사에서도 직원들이 찾아오면 기도해 준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내가 말하는 대로 하지말고 내가 행동하는 대로 하라고 직원들에게 말한다고 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활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힘이 주어지면 그 힘을 남용하거나 오용하거나 내 것으로 알고 잘못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사용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때 권력을 남용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을 때 자기 마음대로 상대를 통제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힘을 오용하는 것입니다.
2. 사랑하는 데 힘을 사용해야 합니다(16-18).
주어진 힘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인간은 착취형 인간, 거래형 인간, 사랑형 인간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습니다. 착취형 인간은 힘이 주어지면 그 힘으로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피해를 주는데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힘이 주어지면 자신의 이익만 챙기는데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심지어는 힘이 주어지면 다른 사람을 매장하고 죽이는데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거래형 인간(공생형 인간)은 힘이 주어지면 그 힘으로 한 개 주고 한 개 받고 사는 인간입니다. 양심있는 인간들을 대부분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랑형 인간, 희생형 인간은 이 차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을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힘이 주어지면 그것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자연질서를 지배하시는 힘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바다를 꾸짖어 잔잔케 하신 분이십니다.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힘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히시기까지 하였습니다. 비난하는 자 용서합니다. 채찍을 때리를 자 용서합니다. 배신하고 저주하는 자 이해하고 사랑합니다. 힘이 주어졌지만 그 힘으로 끝까지 사랑을 사랑하는데 사용하십니다. 생명을 내어놓기까지 사랑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하나님의 사랑받은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의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힘이 주어지면 그 힘으로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 확장시키는데 힘을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힘을 가진 느헤미야 전 총독들의 관심은 무엇이었습니까? 백성을 이용하여 돈을 버는 것이었습니다. 착취형 인간입니다. 기생충같은 인간들입니다. 백성은 단지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백성은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어 자신의 자녀들을 종으로 팔 지경이 되어도 그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들의 부 축적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성 역사에 힘을 다하여 수고하였습니다. 땅을 사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부동산 투기를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는 계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기 전에 미리 땅을 사놓고 다 건축한 후 값이 오르면 팔면 얼마든지 계발 이득을 챙길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권력을 가지고 그의 힘을 가지고 오용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위해 권력을 부당하게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궁중에서 편안하게 살수도 있었지만 오직 민족의 어려움을 보고 민족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고국에 돌아 와 성벽 건축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오직 이일 밖에 없었습니다. 1장 3절을 보십시오. 이 일 때문에 수색이 가득찼습니다.(2:2) 그래서 그 일을 하기 위해 전심을 다했습니다. 왕을 설득하였습니다.(2장) 반대하는 자들의 유혹을 뿌리쳤습니다.(2:10, 4:1,7,8) 방관자들에게 동조하지 않았습니다.(3:5) 흉년으로 백성들이 원망합니다.(5:1)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힘으로 백성을 끝없이 사랑합니다. 조정합니다. 더불어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1-13). 시늉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이 일에 매달립니다. 항상 실패자는 자기에게 주어진 힘으로 무엇을 얻을까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자신에게 있은 힘으로 무엇을 줄 것인가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는 그 일을 같이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합니까? 사랑하는 것입니다. 동정하는 것입니다. 배려하는 것입니다. 부당하게 착취하지 않는 것입니다. 관대함을 배푸는 것입니다. 17절 18절을 보십시오.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열흘에 한번씩 잔치를 베풀어 줍니다. 그러면서도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8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니라"입니다. 백성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백성을 사랑하는 지도자였습니다. 힘을 무자비하게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부당하게 착취하지 않습니다. 권력을 남용하는 사람은 결코 사람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힘이 주어지면 사랑하는데 사용하여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부당하게 착취당함을 알고 어떻게 합니까?(5:6) 분노합니다.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 기분에 내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분노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만 힘이 주어지면 자기 기분에 따라 분노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월마트를 만든 사람은 샘 월튼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10센트 점포점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신앙이었습니다. 그의 비전 가장 큰 회사에 있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원리 황금률의 적용에 비전을 두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을 모아 그들로 하여금 한 가족 의식과 팀웍의식을 느끼게 하고 고객들을 그들 스스로가 남에게 받았던 것보다 더 잘 대해줄 수 있도록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맨 처음 6천 달러로 10센트 가게 열 때 일부는 빌린 것 일부는 군복무시 저축한 것이었는데 지금은 세계에서 두 번째 큰 회사 현재 판매고 1천 9백 10억 달러 회사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의 하나였지만 여전히 픽업 트럭을 몰고 다녔습니다. 고물 픽업 트럭이 고장나 있을 때 마침 그가 시외로 나가 있는 동안 그의 가족이 이 고물 트럭을 처분해 버렸습니다. 이를 알고서도 그는 새 차를 원치 않았습니다. 가족을 다시 보내 그 고물 픽업 트럭을 사오개 했습니다. 그의 겸손은 진짜였습니다. 그는 기독교적 원리에 근거를 둔 문화, 가치 지향적인 문화, 개개인들의 성취를 기대하고 그들의 최대 역량 발휘를 기대하며 다른 어떤 이유없이 오로지 바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바른 것을 행하는 그런 문화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인격이 능력보다 더 가치있다고 생각했고 단 소더퀴스트가 21년 동안 회사에서 일하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가치관에 반하는 것을 행하도록 요구받은 적인 한 번도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가 가진 힘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경영을 했다는 것입니다. 힘이 있습니까? 사람을 사랑하는데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알량한 힘으로 사람 죽이고 스트레스 받게 만들고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데 사용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힘으로 얼마나 백성들을 사랑하였습니까? 자신이 저주를 받는다 할 지라도 골육 친척 형제를 구원해 달라고 합니다. 모세는 자신에게 주어진 힘으로 얼마나 백성을 사랑하였습니까? 자신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는다해도 백성을 살려달라고 간구합니다. 이 모습이 우리 의 모습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나는 사랑할 힘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성도님과 제가 우리 주님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주님만 사랑합니다. 주님만 사랑합니다. 예수님만 예수님만 언제나 사랑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랑고백이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이미 힘을 주었습니다. 힘이 없다고 생각하면 큰 믿음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면 됩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우리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하면 되는 것입니다.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말씀하고있습니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눅 11:10)"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한 평생 멋지게 힘을 사랑으로 사용하도록 하나님 건강의 힘, 지력의 힘, 물질의 힘, 신앙의 힘, 권력의 힘, 마음의 힘을 주십시오. 간구하시면 우리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겠습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낙심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실망하십니까? 힘은 사랑하는데 사용할 때 더욱 큰 역사가 일어납니다.
3.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상급을 바라보면서 힘을 사용해야 합니다(19)
사람이 조금만 힘이 생기면 그 권력을 남용하고 오용하여 자기 특권을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현재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는 것은 현재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한 평생 사는 것으로 끝이니 이 땅에서 한 번 잘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남이야 어떻든 주어진 힘을 최대한 활용하여 이 땅에서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느헤미야도 얼마든지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느헤미야도 부동산으로 큰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계발 이익 챙길 수 있었습니다.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동생이나 일가 친척을 시켜 땅 투기도 할수 있었습니다. 헐값에 샀다가 성벽이 다 건설하면 땅값이 치솟을 것은 자명한 일이니 큰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런 문제로 갈등한 흔적은 성경에 보이지 않습니다. 느헤미야라고 해서 이땅에 편안하고 잘 살고자하는 욕망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절제했을 것입니다. 그는 오늘만 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본 것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느헤미야의 기도가 나옵니다. 한 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생각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그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이 땅에서만 은혜를 받고자 하는 기도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이 땅에으모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이 있습니다. 그곳에 가서 잘했다 칭찬받아야 합니다. 영원한 나라에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히브리서에는 그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히 11:24-26)"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을 누리는 것보다 좋아했습니다. 죄는 즐거운 것이고 재미가 있고, 따분하지 않은 흥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댓가를 치러야 합니다. 세상에서 모세처럼 힘을 가졌던 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 모든 특권을 포기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원한 상급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의 보상보다는 영원한 상급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힘이 주어졌을 때 너무 이 땅만 바라보고 사용하지 마십시오. 물질의 힘이 주어졌을 때 이 땅에만 쌓아 놓으면 창고를 더 지을 것을 걱정하는 부자가 되지 말고 좀도 동록도 해하지 못하는 하늘 나라에 쌓아 놓기 바랍니다. 건강의 힘이 주어졌을 때 썩어져 가는 것만 추구하다가 땅만 바라보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발로 걸어다닐 수 있을 때 더욱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고 말할 수 있는 힘 주어졌을 때 더욱 기도하고 전도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재능 주어졌을 때 그 재능 아무 쓸모 없을 때가 되기 전에 더욱 주를 위해 봉사하고 이웃과 사회를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지식 주어졌을 때 그 지식 다 달아나고 손자 이름 기억하기도 어렵기 전에 주를 위해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힘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세종류의 인간형이 있습니다. 감정 따라 힘을 처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즉흥 적입니다.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기분대로 입있다고 아무렇게나 내뱉습니다. 머리 있다고 아무렇게나 제마음대로 생각합니다. 자신의 감정에 따라 증오하고 분노하고 정죄하고 다른 사람 난도질합니다. 조울증 환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심해지면 정신 이상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탄에 붙들려 미쳐버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전혀 헤아리지 않고 혼자 대낮에도 히죽거리고 울며 거리를 다닙니다. 감정대로 힘을 처리하면 안됩니다. 이런 사람들 큰일 저지릅니다. 살인까지 하게 되고 전쟁도 얼마든지 일으키게 됩니다. 조금 나은 사람은 이성따라 힘을 처리합니다. 감정대로 흐르는 힘을 절제하여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생각하고 처리하는 사람들입니다. 조금은 교양있는 사람들입니다. 감정따라 처리하는 사람보다 훨씬 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성따라 처리하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결국은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인식한 것, 자기가 경험한 것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을 구주로 섬기는 사람들, 이 땅이 이땅으로 끝나지 않고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믿고 사는 사람들, 모든 힘은 하나님에세 왔다고 믿는 사람들은 힘이 주어지면 신앙따라 그 힘을 사용하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을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재능이 주어지면 믿음으로 어떻게 사용할까를 생각합니다. 물질이 주어지면 믿음으로 물질을 어떻게 사용할까를 생각합니다. 건강이 주어지면, 명예가 주어지면, 지식이 주어지면, 권력이 주어지면, 미모가 주어지면 믿음으로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할까를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모두가 죄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면 모든 것은 하늘에 쌓이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에게 장차 상급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6)"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면 가난해도 실력이 없어도 물질이 없어도 아름다움이 없어도 그것을 결코 패배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하면 모든 것은 승리한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것은 결국 승리하게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4)"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힘을 사용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권력자들이 힘을 잘못 사용하다가 가을 낙엽처럼 떨어지는 사람들을 보고 있습니다. 그들만 비난할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교훈의 장입니다. 우리 자신들은 지금 크던 작던 주어진 힘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부모로서 직분자로서 직장인으로 이미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힘이 주어져 있습니다. 남용하고 오용하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힘을 (1)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사용해야 합니다.(14-15) (2) 사랑으로 사용해야 합니다(16-18) (3)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상급을 바라보면서 사용해야 합니다.(19)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느 5:14-19 / 조상호목사
지난주 웹서치를 하다가 “절름발이 토끼 이야기”라는 제목의 어린이 동화를 읽고 뭔가 느끼는 것이 있었습니다. 소개하겠습니다. 평화로운 토끼 나라에 커다란 뱀이 나타났습니다. 토끼 나라의 평화가 깨졌습니다. 뱀은 매일 매일 토끼를 잡아먹었습니다. 토끼들은 그 뱀과 싸워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토끼들은 너무나 무서웠기 때문에 집 밖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문을 닫아걸고 공포 속에 살았습니다. 그 때 이미 뱀에게 그 사랑하는 짝을 잃고, 그 자신의 왼쪽 발 하나도 뜯긴 절름발이 토끼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이 토끼는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 “이건 도무지 사는 것이라 할 수 없다. 어떻게 하면 예전의 평화로운 토끼나라를 회복 할 수 있을까?” 절름발이 토끼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토끼나라의 평화를 되찾으려면 저 흉악한 뱀을 없애는 길 밖에 없다.” 절름발이 토끼는 오래 고민하다가 오직 한 길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문을 열고 집밖으로 나가 울긋불긋한 버섯이 많이 피어 있는 숲으로 갔습니다. 토끼는 그 아름다운 버섯을 마구 마구 뜯어먹었습니다. 머리가 어찔어찔하였습니다. 토끼는 절름거리며 뱀 굴로 갔습니다. 그리고 뱀 굴 앞에 서서 “이 못된 뱀아, 나와 봐라, 이 나쁜 놈아!” 하고 소리쳤습니다. 뱀이 슬- 슬- 슬 기어 나와 절름거리는 토끼를 보고 ‘아니 이놈이 미쳤나!’ 하였습니다. 뱀은 마침 배도 출출한 판인데 ‘어쨌든 잘 됐다’ 하고 덥석 한 입에 절름발이 토끼를 삼키고, 제 굴로 도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뱀은 그 굴에서 영원히 나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토끼 나라에는 다시 활기찬 자유와 넘치는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절름발이 토끼는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토끼 나라에 평화를 가져다 준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이라고 합니다. 남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남이 피해를 입는지, 남이 어려움을 당하는 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나온 말일 것입니다. 또 요즘을 립서비스 시대라고 합니다. 행동은 하지 않은 채 말만 앞세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수없이 많은 말을 하지만 정작 삶에서는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이 시대를 립서비 시대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또 요즘을 희생이 사라진 시대라고 합니다. 달콤한 열매는 원하면서 달콤한 열매를 얻기 위한 수고는 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에서 절름발이 토끼 같은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자기가 사는 토끼 나라의 잃어버린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독버섯을 잔뜩 먹고 독사를 향해 나아갔던 절름발이 토끼와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말만 하는 립서비스 지도자가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는 절름발이 토끼와 같은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오늘은 느헤미야 강해설교 9번째로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눌까 합니다. 따라서 하시겠습니다.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을 말씀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복습하겠습니다. 외부의 방해 공작이 점점 심해지는 가운데 지도자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전략을 세웠습니다.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절반은 창을 들고 경비하게 하고, 나머지 절반은 무기를 들고 일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를 만났습니다. 백성들이 그들의 아내들과 함께 크게 부르짖어 원망하는 일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백성들은 가난 때문에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데, 귀인과 민장들은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에만 급급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느헤미야는 그들을 꾸짖은 다음,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더 이상 이자를 받지 말고, 그 동안 빚을 빙자해서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빼앗은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집을 아무런 조건 없이 되돌려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반성하는 의미로 그 동안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받은 돈이나 곡식이나 새 포도주나 기름의 100분의 1을 되돌려주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느헤미야의 요구대로 행하겠다고 제사장 앞에서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행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요구한 것은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사회에서 기득권층의 반발을 사기 쉬운 무리한 요구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반발하지 않고, 느헤미야의 요구대로 행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귀족들과 민장들이 얼마든지 반발하고 느헤미야의 요구를 따르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그들이 느헤미야의 요구에 순종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본문에 보면 두 가지 이유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깨끗하고 정직한 사람
첫째로, 느헤미야가 깨끗하고 정직함으로 모범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 당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힘들게 했습니다. 과도한 세금을 거두는 바람에 백성들은 굉장히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15절을 보면,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느헤미야에 앞서 유다 땅에서 일했던 총독들은 은 40세겔씩을 백성들에게 부과했습니다. 당시 1세겔은 일반 노동자의 4일치 품삯에 해당되는 액수인데, 40세겔이면 무려 4개월의 품삯에 해당되는 큰 액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양식과 포도주까지 백성들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생선은 대가리부터 썩는다”는 러시아 속담처럼, 총독이 썩으니까 밑에 있는 사람들까지 썩었습니다. 총독뿐만 아니라 총독의 종자들, 즉 밑에 있는 관리들까지도 백성들을 괴롭게 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앞서서 유다 땅에 부임했던 총독들과 달랐습니다. 느헤미야도 바사 제국으로부터 유다 땅의 총독으로 임명을 받았기 때문에 앞서서 부임했던 총독들처럼 얼마든지 백성들을 착취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같이 14절을 보겠습니다. “또한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부터 제삼십이년까지 십이 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들이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이전의 총독들과는 달리 느헤미야는 백성들에게 무거운 부담을 주며 돈을 긁어내는 짓을 하지 아니하였다는 말입니다. 아닥사스다 왕 제 20년 그러니까 그가 총독에 임명을 받은 주전 444년부터 12년 동안 총독으로서 자신의 몫을 위해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느헤미야가 다른 총독들과 달리 백성들을 착취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15절을 보겠습니다.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무엇 때문에 느헤미야가 백성들을 착취하지 않았습니까? 그가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입니다. 여기 ‘경외한다’는 말은 ‘두려워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보고 계신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총독들처럼 백성들을 착취하지 않은 것입니다. 귀족들과 민장들은 깨끗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느헤미야의 이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에게 반발하지 않은 것입니다. 지도자인 느헤미야가 모범을 보였기 때문에 그들은 느헤미야의 요구에 순종한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지도자가 솔선하여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직원들이나 아랫사람들은 지도자의 행동에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이것은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모범을 보야 합니다. 가정에서 자녀들은 부모님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 있었던 부끄러운 저의 행동을 고백하려고 합니다. 저의 집에서 타고 다니던 혼다 오딧세이가 수년 전부터 엔진 본체와 헤드 사이에서 엔진오일이 굉장히 많이 새어나왔지만, 수리하려면 돈이 많이 든다고 해서 고치지 않고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그로 인해 WOF를 받는데 어려움이 있었고, 또 여기 저기 고장 나면서 돈이 들어가기 시작했고, 무엇보다도 고유가 시대에 기름도 많이 들고 해서 한 동안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차를 얼마 받지는 못했지만 트레이드인하고, 큰 아이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조그마한 자동차 한 대를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보험이었습니다. 자동차를 구입할 때, 큰 아이가 전화상으로 물어보니 1년 보험료가 무려 1,300불이나 되었습니다. 차 가격은 8,000여 불인데, 보험료는 1,300불이라는 말에 저는 아들과 함께 직접 보험회사에 가서 제 이름으로 보험을 가입하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큰 아이가 아직까지 25세가 되지 않았고, 큰 아이 이름으로 보험을 든 적이 없었고, 무엇보다도 제가 10년 이상 무사고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교회 자량이 제 이름으로 보험이 가입이 되어 있고, 우리 전도사님들이 몇 차례 사고를 내서 Claim을 하는 바람에 보험료가 올라갈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60% No Claim Bonus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 이름으로 보험을 가입하려고 하자, 보험회사 직원이 묻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Main Driver입니까?" 그러자 큰 아이는 자기가 Main Driver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들이 아닌 아내가 Main Driver라고 하면 보험료가 많이 내려갈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학교 갈 때 운전하기도 하지만, 아내가 아들을 학교 앞에서 Drop해주고 가지고 와서 운전하기 때문에 Main Driver는 아내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보험회사 직원이 햇갈리기 시작했습니다. 저와 아들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난감해하다가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가입하려고 하는 자동차가 누구 소유입니까?” 순간 저는 대답을 못했습니다. 아들이 80% 이상 대부분의 돈을 냈지만, 그래도 오딧세이를 트레이드인 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선뜻 누구 소유라고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거리자, 옆에 있던 아들이 당당하게 “That's my car"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대부분의 돈을 냈고, 서류상 자기 이름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아들의 말이 사실은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보험회사 직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아들에게 화를 내며 한국말로 말했습니다. “그러면 그 비싼 보험료를 네가 내려고 그러니? 너 돈 있어?” 이 말은 ‘엄마가 Main Driver라고 하면 보험료가 싼데 왜 그렇게 말하니? 설사 네 소유라 할지라도, 설사 네가 Main Driver라 할지라도, 엄마가 Main Driver라고 하면 많은 돈을 절약할 수 있는데, 왜 그렇게 고지식하니?‘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순간, ’어~ 내가 왜 이렇게 말했지? 그것은 정직하지 못한 방법인데... 조상호, 네가 목사냐? 너 지금 아들에게 거짓말을 시키는 거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 네 맘대로 해라.“ 결국 큰 아이는 사실 그대로 말하고 보험을 가입하되, 돈이 없어서 Full보험 대신에 3자 보험을 드는 것을 저는 곁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저는 집으로 돌아온 후 먼저는 하나님께 죄송했고, 돈 몇 푼 아끼려고 아들에게 거짓말을 시키려고 했던 사실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아들에게도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 새벽기도회에 나와서 1시간 내내 회개만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너무 부끄럽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몇 푼의 돈 때문에 거짓말도 하고, 눈앞에 있는 조그마한 이익 때문에 정직하지 못한 행동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부전자전’, ‘모전여전‘이라는 말이 있듯이, 자녀는 부모의 행동을 그대로 카피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아들이 못 보던 노트북 컴퓨터를 만지고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너 그 노트북 어디서 났니?" "친구 거예요." "빌려왔니?" "아뇨, 그냥 가져왔어요." 아버지는 너무 놀랐습니다. "임마, 그것은 도둑질이야 도둑질! 정말 필요하면 아빠한테 말했어야지." 아들이 뾰로통하게 물었습니다. "말하면 사줄 거예요?" 그랬더니 아버지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야, 정말 필요하면 아빠 회사 것이라도 갖다 주지." 부모 여러분, 우리의 말, 우리의 행동을 자녀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행동 그대로 따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비단 가정에서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옛날 속담처럼, 지도자가 솔선수범하면 직원들이나 아랫사람들도 배웁니다. 그러나 지도자가 솔선하여 모범을 보여주지 아니하면, 직원들이나 아랫사람들이 그의 지도를 받으려고 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의 지도력에 도전하기까지 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도자가 지도자답지 못하면 지도력을 잃게 되고, 지도력을 잃으면 통솔하기가 어렵게 됩니다. 이것은 모든 분야에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정치 지도자이든지, 교사 선생님이든지, 군대의 지휘관이든지, 교회 사역자이든지, 지도자가 모범을 보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도자인 느헤미야가 모범을 보였기 때문에 귀인과 민장들은 느헤미야의 요구에 순종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느헤미야의 이 모습을 배워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부모라면 느헤미야처럼 자녀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교사라면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우리가 집사라면 집사로서 새가족들이나 청년들에게, 우리가 직장인이라면 다른 직장동료들에게, 우리가 사업을 경영하고 있다면 다른 직원들에게 느헤미야처럼 모범을 보여야 할 줄로 믿습니다. 느헤미야가 모범을 보였기 때문에 귀족들과 민장들은 반발하지 않고 느헤미야의 요구에 순종했습니다.
이해하고 사랑한 사람
둘째로,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이해하고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3주 전에도 살펴보았지만, 흉년이 들자 귀족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양식을 주고, 밭과 포도원과 집을 마구 사들였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달랐습니다. 제가 16절을 읽겠습니다. “도리어 이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내 모든 종자들도 모여서 일을 하였으며” 이전 총독들은 백성들을 압제하고 착취하는데 종들을 동원하였지만, 느헤미야는 오히려 공적인 일인 예루살렘 성벽을 수축하기 위해 종들을 동원하였습니다. 또한 공직에 있는 이점을 이용하여 땅을 매매하면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괴롭히거나, 착취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도 느헤미야와 같은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고위공직자가 부동산투기 등 이런 저런 편법적인 재산축적과 탈법비리를 저질렀다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리기도 합니다. 장관과 차관 후보자가 아들을 군에서 빼고, 가족 명의로 땅을 사들이는 투기를 일삼았다가, 들통 나서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를 반복하며 변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창피를 당한 후 후보직을 사퇴하기도 합니다. 우리 한국이 많은 부분에서 발전을 이루었지만, 유독 정치분야 만큼은 다른 분야에 비해 발전이 더딘 것이 사실입니다.
태국에는 '깨끗한 남자'라는 뜻의 '나이사안' 이라는 별명을 가진 잠롱 스리무앙이란 유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1985년부터 1992년까지 7년 동안 지방선거를 통해 방콕시장을 역임한 인물입니다. 그는 시장으로 재직하면서 허름한 평복을 입고 다녔고, 집 한 칸 없이 폐품창고를 고쳐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봉급은 자선단체에 기부했으며, 부인이 국수가게를 운영하여 먹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청백리 시장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런데 태국 사람이라면 먹지 않고는 못 배긴다는 ‘두리안’ 이란 과일을 잠롱 시장도 무척 좋아했다고 합니다. 두리안이 막 출하되어 시장에 나왔을 때, 시민들이 두리안을 사기 위해 줄을 길게 선 어느 더운 날이었습니다. 겸손한 잠롱 시장도 시민들이 선 긴 줄에 끼어 서서 차례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잠롱 시장 앞에 섰던 한 여인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가족에게 두리안을 사 먹이기 위해 몇 달 전부터 생활비를 아껴 돈을 모아 시장에 왔는데, 두리안 값이 치솟았기 때문에 자신이 모은 돈으로는 살 엄두를 내기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여인은 턱도 없이 값을 깎으려고 했지만, 그렇게는 깎아 줄 수 없다는 상인의 말에 울음을 터뜨린 것입니다. 잠롱 시장은 얼굴을 감싸며 울고 있는 여인을 보며 고개를 떨군 채 서 있던 줄을 빠져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좋아하는 두리안을 다시는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느헤미야는 진정한 리더였습니다. 존경받을 만한 지도자였습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힘들게 하지 않고, 오히려 백성들을 이해하고 사랑했습니다. 다같이 17절과 18절을 보겠습니다. “또 내 상에는 유다 사람들과 민장들 백오십 명이 있고 그 외에도 우리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 중에서 우리에게 나아온 자들이 있었는데, 매일 나를 위하여 소 한 마리와 살진 양 여섯 마리를 준비하며 닭도 많이 준비하고 열흘에 한 번씩은 각종 포도주를 갖추었나니 비록 이같이 하였을지라도 내가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하였음은 이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었더라.” 총독이 되면 누리는 특권이 많았는데, 느헤미야는 총독으로서의 특권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오히려 대접 했습니다. 또한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잘 접대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접대할 때 많은 비용이 필요했지만, 그리고 백성으로부터 합법적으로 돈을 거둘 수가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가난한 백성들이나 다른 나라에서 온 손님들을 접대할 때 느헤미야는 바사제국의 공금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재를 털어 충당했다는 것입니다. 총독의 월급을 받지 않는 상태에서 느헤미야는 자기 돈으로 매일 소 한 마리와 양 여섯과 많은 닭을 준비하여 대접했습니다. 그 이유는 18절 하반절의 ‘이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었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느헤미야는 백성들이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느라 고생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을 만큼 느헤미야는 이해심이 많은 지도자였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길 줄 아는 사랑이 많은 지도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람의 칭찬과 인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보통 지도자들은 여론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달랐습니다. 그는 사람의 칭찬보다는 하나님의 칭찬과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가 행한 일을 자랑하기보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19절)라고 기도했습니다.
이와 같이 느헤미야는 이해심이 많은 지도자였습니다. 사리사욕을 취하는 전임 지도자들과 달리,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길 줄 아는 사랑이 많은 지도자였습니다. 요즘 말로 말하면 느헤미야는 ‘맘짱’입니다. 맘짱은 다른 사람을 잘 배려하고 겸손하며 이해심 많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요즘 배우자의 조건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해심입니다. 남자들은 이해심이 뛰어난 여자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기업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입사원을 뽑을 때, 반짝 뜰만한 사람보다는 포용력과 이해심이 많은 사람을 선호한다고 합니다. 실력있는 사람은 자기 잘난 맛에 설치다가 부서 분위기를 깨뜨리거나 조금 맘에 들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옮겨버리기 때문에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해심이 넓은 사람은 섬김과 화합을 통해 유익을 주기 때문에 회사에서 좋아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나면서부터 맘짱인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은 극소수라는 사실입니다. 맘짱은 훈련을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훈련과 노력을 통해 몸짱이 되는 것처럼, 맘짱도 노력과 반복을 통해서 됩니다. 힘든 일에 먼저 솔선수범하고 자신의 이익보다는 베푸는 삶을 반복하다보면, 맘짱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실수를 드러내기보다 이해하려고 노력하다보면 맘짱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들이 맘짱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느헤미야와 같이 이해심이 많고 사랑으로 섬기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노먼 슈와츠코프(Norman Schwarzkopf)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그는 월남전의 영웅입니다. 1970년 5월28일 슈와츠코프 대령은 한 병사가 지뢰 폭발로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헬기를 타고 직접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부하들이 헬기로 부상병을 후송하는 동안 또 다른 병사가 지뢰를 밟고 쓰러져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지뢰밭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중대병사들은 무서운 위험에 처한 것을 알고 겁을 먹고 있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다른 지뢰를 건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슈와츠코프 대령은 위험에 빠진 중대와 부상병을 구하기 위해 조심조심 지뢰밭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20미터 거리에서 다시 지뢰가 터져 세 번째 병사가 중상을 입었고, 슈와츠코프 대령도 다쳤습니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어렵게 접근한 끝에 슈와츠코프 대령은 가까스로 두 병사를 모두 안전하게 건져내어, 무사히 지뢰밭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날 밤 늦게 슈와츠코프 장군이 병원에 머물고 있을 때, 흑인 병사 3명이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대령님, 저희는 대령님께서 그 친구를 위해 하신 일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대에 있는 모든 병사들에게 대령님이 하신 일을 알릴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 슈와츠코프 대령은 미국 육군에서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고, 그의 휘하에 있는 모든 장병들은 그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에게 충성을 다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리더쉽의 힘입니다. 총과 칼을 동원하지 않아도, 큰 소리 치지 않아도 따르게 하는 것이 진정한 리더의 모습입니다. 영화 <웰컴투 동막골>에 보면 인민군 장교가 동막골 촌장에게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고함 한번 안 지르고 부락을 통솔할 수 있는 위대한 영도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겁니까?” 촌장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그저 뭘 많이 먹여주는 것이지요.” 이 대사에 의하면 리더십은 밥을 사주는데서 나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과거에 먹을 것이 없을 때에는 많이 먹여주는 사람을 따랐습니다. 먹을 것을 사주는 사람이 리더였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약간 달라졌습니다.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밥은 먹고 살기 때문에 밥사준다고 목숨걸고 그 사람을 따르지는 않습니다. 요즘에는 먹을 것을 사주는 사람이 리더가 아니라, 감동을 주어야 리더가 됩니다. 말을 잘 한다고 리더가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느헤미야는 진정한 리더였습니다. 그는 깨끗하고 정직함으로 모범을 보였고, 백성들을 이해하고 사랑함으로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귀족들과 민장들은 느헤미야의 이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에게 반발하지 않고, 느헤미야의 요구에 순종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느헤미야와 같은 모습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부모로서, 교사로서, 집사로서, 목사로서 모범을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사업의 현장이나 직장이나 학교나 가정 등의 삶의 현장에서 느헤미야처럼 깨끗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영향을 끼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시대의 스승은
느 5:14-19 / 김상수목사
오늘은 교회가 스승의 주일로 지키며 특히 교회에 수고하시는 교사님들에게 격려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지난 5월 16일은 스승의 날이었습니다. 그 날짜의 신문기사를 보면 오늘 우리 학교의 선생님들에 대한 위상에 위기감을 느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생활지도부 교사 426명의 대답 중에서 학생들로부터 신체적인 폭행을 당한적이 있다고 3.8%가 말했습니다. 욕설과 폭언은 114명 26%, 폭행을 하겠다는 위협은 76명, 학교에 세워둔 자동차등이 파손된 교사는 189명 40%이며, 학교 홈페이지에 인신공격적인 글을 올려서 피해를 본 교사는 모두 187명 43%로 거의 절반에 가까운 숫자입니다. 이밖에 학교 건물벽에 선생님에 대한 욕설과 험담이 적혀있는 교사는 228명 54%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우리 교권의 추락이 심각한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학생에게 존경을 받지 못하는 세태, 학생이 선생님을 구타하고 욕하며 폭력을 행사한다면 그것은 이미 교육이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인간으로서 갈대까지 갔으며, 타락할 대로 타락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어른을 모르면 사람이 아니며, 자녀가 부모를 모르면 자녀가 아닙니다. 학생이 스승을 모르면 학생이 아닙니다. 옛적에 성인들이 우리에게 가르치시기를 석자 물러서서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 것이 제자의 도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자리에 학교에서 근무하시는 우리 선생님들이 더러 계십니다.
스승의 날에 우리가 진정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실추된 선생님들의 명예를 회복시켜드리고 긍지를 갖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4년간 선생님들은 촌지 추방이라는 명목 때문에 이 나라의 개혁의 주체가 되어야할 분들이 개혁의 대상이 되어 정부가 앞장서서 교사의 권위와 사기를 땅에 떨어뜨리고 범죄자 취급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스승을 존경하겠습니까? 스승의 날에 학교는 텅텅비었습니다. 선생님 한 분의 인터뷰 내용 중 그는 “스승의 날에도 한번 대접을 받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촌지 소리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오늘 학교 선생님들의 좌절과 울분과 무기력에서 벗어나도록 해야하며, 명예회복을 해야 하는 정책이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스승이 없는 사회는 교육에 미래가 없는 사회입니다.
진정한 교육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학생들에게 예의 바른 인간을 양육하는 것과 어른 공경하는 도리를 바르게 가르치는 일과 선과 악의 구별과 판단의 표준을 가르쳐 주는 일입니다. 이것이 안되는 교육은 실패한 교육입니다. 그러나 이 교육이 무너졌습니다.
희랍의 역사 철학자였던 크세노폰이 소크라테스에 대한 일화를 기록한 것이 있습니다.
어느 날 아테네의 군관학교를 갓 졸업한 풋내기 청년 장교가 소크라테스를 찾아왔습니다. 자기의 공부한 것을 자랑삼아 “우리 선생님이 언제든지 좋은 사람의 행렬은 앞과 뒤에 두고 나쁜 사람은 행렬의 가운데 두고 가라고 가르쳐 주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소크라테스는 “매우 좋은 가르침을 받았네! 그런데 자네 선생님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어떻게 구별하는지 가르쳐 주던가?”라고 물었습니다. “그것은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소크라테스는 “그러면 돌아가서 자네 수업료를 다시 찾아가지고 오게”라고 말했다는 일화입니다.
이처럼 선과 악이 구별되지 않고 판단의 표준을 가르쳐 주지 않는 교육은 어떤 종류의 교육을 무론하고 기본적인 인간교육에 실패한 교육이라고 할 것입니다.
며칠 전 유명한 모 배우가 17살된 어린 소녀를 성적으로 매매를 했다고 해서 크게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 17살된 소녀가 만나는 사람마다 아무게 배우와 함께 잠을 잤다며 그 배우는 내 밥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17살된 소녀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세태입니다. 선악을 분별하는 분별력을 상실했습니다.
제가 5월 첫 주일 어린이 주일에 말씀드렸습니다만 오늘 우리 시대에 진정한 교육의 마지막 보류가 교회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선과 악을 누가 가르쳐 주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면 예의 바른 인간이 되며, 선과 악을 분별하는 인간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교회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든 교사님들 이 사명 가지고 수고하며 힘쓰고 계신줄 알고 감사드립니다.
훌륭한 인물의 배우에는 훌륭한 스승이 있습니다. 여러분! 헬렌 켈러를 잘 아시지요? 삼중고의 아픔을 가지고 세상에 왔습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이 어린 아이를 설리번 선생님께서는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글을 써주고 표시해 주면서 가르쳐 그가 인문학 박사와 법학 박사가 되도록 까지 가르쳤습니다. 위대한 스승이 있었기 때문에 위대한 헬렌 켈러가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훌륭한 지도자는 훌륭한 제자를 양성하며, 훌륭한 감독은 훌륭한 선수를 만들어 냅니다. 며칠 전 스코틀랜드와 축구를 했는데 4:1로 이겼다고 우리 한국 선수들과 모두가 신이 났습니다. 누구 덕입니까? 배후에 히딩크 감독의 역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교회 주일학교에서 수고하시는 모든 교사님들,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성 하시는 모습 감사합니다. 그러나 내가 10년을 가르치고 5년을 가르친 그 아이들 가운데서 진정으로 믿음을 가지고 내 제자라고 말하면서 길러낸 제자들이 몇 사람이나 되는지 이 시간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스승의 상은 어떤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 나타난 느헤미야는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지도자상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런 인물로 평가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는 주전 445년 페르시아의 수산궁 아닥사스다 왕의 장관으로 임금을 받드는 고위직에 있었던 분입니다.
하루는 자기 동생이 돌아와서 고국의 참상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성문이 다 무너지고 성벽이 다 불에 타고 백성들은 말할 수 없는 환란 중에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그의 수심어린 얼굴을 본 임금님께서 “무슨 일로 그렇게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느헤미야는 임금에게 조국의 어려움 당함을 다 이야기했습니다. 임금님은 그의 소원을 들어주어 고국으로 보내 일을 하도록 명을 내리며 일을 마치고 꼭 돌아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국에 돌아가서 백성들의 지도자로서 모든 수고를 하며 마침내 성벽을 쌓았습니다. 또한 유대민족의 신앙의 재건과 신앙의 부흥을 위해 지도자로서 능력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시대나 훌륭한 지도자는 훌륭한 스승의 상을 보이게 됩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기업이나 정부나 할 것 없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존경받는 지도자가 있어야 합니다. 존경받는 지도자가 그 개인과 집단의 스승이 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보여준 민족적인 스승의 상은 무엇입니까?
첫째, 사명자가 되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고국에 있는 자기 백성의 아픔을 들었을 때에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임금을 받드는 고위직을 버리고 고국으로 돌아가서 고난에 함께 동참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도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사명의식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확신이 없는 지도자는 환란과 어려움을 이기지 못합니다.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우리 선생님들 월급만 받고 일하려고 하면 얼마나 그 일이 힘든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이 학교에 선교사로 보내주셔서 이 시대에 청소년들을 바르게 지도하고 이 나라에 재목들로 바르게 길러서 앞으로 이 아이들을 통하여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야겠다는 사명을 가지고 일하신다면 여러분의 일터는 바로 선교지가 될 것이며, 여러분이 하는 일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소명의식을 가지고 일하게 되면 내면의 세계와 내가 일하는 곳이 새로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매가 있습니다. 주일학교에서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사명 가지고 학생을 가르칠 때는 보람되고 즐겁고 힘들지 않게 일할 수 있으며 아름다운 열매가 많이 맺혀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제가 맨 처음에 하나님 앞에 사명을 받았을 때에 저에게 두 가지가 주어졌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하나님의 일인 영혼을 위한 일, 영원한 일 보다도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였습니다.
그 전에 제가 늘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잘 살고 좋은 집 짓고 아내와 함께 어떻게 멋있게 살아볼까? 하는 것이 제 소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명을 받고 나니 그것은 썪어져 없어질 것들, 내가 그것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가! 이제부터는 내가 영원한 것을 위해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제게 주어진 사명이었습니다.
둘째는 내가 이 일을 하게 되면 아무리 어려운 역경과 시련이 다가와도 나는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다는 그 기쁨이 가슴에서 솟아났습니다. 그리고 신학교를 갔습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이 두 가지가 저에게 항상 힘이 되어 주어서 목회의 길이 힘들지 않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목사가 이것 저것 바쁜 일이 많이 있습니다. 책도 봐야하고, 기도도 해야 하고, 여러분들을 돌봐주어야 하며, 대외적인 활동도 해야 됩니다. 그래서 12시 전에 잠을 잘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새벽 4시에 일어나 새벽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이렇게 한지가 하루 이틀이 아니라 20 여 년 동안 해왔습니다.
월급 준다고 이 일이 될 수 있을까요? 만약 월급을 받고 이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직장을 수 없이 옮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명을 주셔서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수많은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하고, 때로는 오해도 받아야 하며, 여러분들의 요구를 다 맞추어 주려고 힘써야 합니다.
월급 가지고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사명을 받았을 때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 때문에 기쁘고 즐겁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사들이여! 청소년은 우리의 내일이며, 이 나라의 장래이고, 천국 권세의 재목들입니다. 학교에서 주일학교에서 청소년을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보람된 일인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중학생들을 가르쳐 10년 후면 그들이 25세, 20년 후면 35세이며, 대학생들을 가르쳐 10년 후면 사회의 중견들이 되며, 20년 후에는 사회의 명사들이 되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가르치는 자의 보람이며 축복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다시 40살로 돌아가서 목회를 새로 하게 하신다면 어른목회 보다 젊은 대학생들 목회에 힘을 많이 써서 일하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교사님들 힘내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스승은 모범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존경받는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누가 존경을 받을 수 있습니까? 모범을 보일때 입니다. 말과 행동이 본이 되어질 때에 존경을 받고, 존경을 받는 스승이어야만 제자가 따라며 배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먼저 몸으로 지도자의 모습을 보입니다.
오늘 본문에 “그가 유다 총독의 지위에 있었지만 백성들과 아픔을 같이 하기 위해서 총독의 녹을 받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백성들을 위해서 그 돈을 다 썼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세월이 12년 동안이나 되었으나 백성의 아픔과 고난에 함께 동참했습니다. 스스로 모든 권리와 힘을 유보했습니다.
지도자는 자기 하고 싶은 것, 놀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하면 따라오지 않습니다. 지도자는 자기의 모든 주어진 권리를 유보할 때에 백성들이 그 지도자를 따라줍니다. 자기의 모든 재산을 털어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며 백성들과 고락을 같이했습니다. 느헤미야는 백성과 자기를 동등하게 여겼습니다. 성벽을 쌓을 때에도 같이 수고했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그를 존경하게 되었으며, 놀랍게도 성벽을 52일 만에 다 쌓았다고 했습니다.
우리 시대에 존경 받는 선생님들이 많지 않다고 합니다. 우리 교사님들, 주일학교 선생님들, 교회의 직분자들 모두 존경 받는 위치에 서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사랑을 실천하셔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자기의 재물을 가지고 자기 백성들에게 맛있는 것을 대접했습니다. 하루에 소 한 마리와 살찐 양 여섯과 닭도 준비했으며, 10일에 한번씩 각종 포도주를 갖추었으며 이같이 할지라도 내가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않은 것은 백성의 부역이 중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백성들의 부역이 중하여 그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면서 고락을 같이하고 아픔을 같이하며 사랑을 베풀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 자라야 정신이 건강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사랑을 많이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유치원에 평소에 자주 가지 못했으나 죄송하지만 제 외손녀 아이가 입학한 후에는 저도 모르게 자주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죄송하지만 나도 모르게 발이 자주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유치원에 올라가 제 손녀만 안아주면 되겠습니까? 모든 아이들이 다 달려오면 안아주어야 합니다. 힘이 있을 때에 다 안아줄 수 있으나 힘들 때에는 머리만 만져 줍니다. 이 아이들을 똑 같이 만져주고 안아주고 해야 사랑을 받고 자랄 때에 그들의 마음이 열리게 되어있습니다. 인간은 사랑을 받을 때 감동을 받고 감동 받아야 변화되어지는 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에 저의 고향이 경남 지수인데 며칠 전 신문에 난 것처럼 그곳은 이병철씨, 럭키 구인회씨, 효성 재벌 등이 그 학교 출신입니다.
해방직후 제가 3학년에 편입했는데 그때에는 나이 많은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나이 많은 학생들을 한 반으로 모아 특별반을 만들었습니다. 다른 반은 아이들 수가 많아 저는 특별반으로 전학이 되고 그 반에서 제가 나이가 가장 어리게 되어 선생님께서 저를 특별히 사랑해 주게 되었습니다.
사랑을 받게 된 저는 그때부터 책을 보는 재미가 생기고, 공부를 잘 해서 선생님께 칭찬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때부터 책을 가까이 하게 되어 그 후 제가 줄곧 학교에서 우등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다른 선생님들은 한 분도 이름이 기억나지 않지만 저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신 3학년 이병희 담임선생님은 이름도 잊지 않고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베풀어주신 그 사랑 때문에 이렇게 제가 책을 좋아하는 학생이 되었으며, 그 이름이 아직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관심과 사랑이 제자를 만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사랑으로 연결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학생과 교사는 돈으로 연결되어져 있지만 그 학년이 넘어가면 그만입니다. 그 학교를 졸업하면 그만입니다. 선생과 학생은 이렇지만 스승과 제자는 이렇지 않습니다. 스승과 제자는 일생동안 끊어지지 않는 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화여자대학교 물리대 교수이셨던 이훈구 교수님은 우리가 젊었을 때에 존경 받던 이름 있는 교수님이셨습니다. 이분의 제자 한명이 구치소에 갔습니다. 구치소에 가셔서 그 제자에게 하시는 말씀이 “괜찮다! 세상을 살려면 별 일을 다 겪어야 하는데 마음 건강하고 몸 건강해라”하고 말했습니다. 그 제자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또 어떤 학생이 약혼자를 데리고 인사하러 왔는데 그 학생이 학생회 회장으로 입후보했을 때 신문에 난 프로필을 오려서 약혼자에게 주면서 “자네 약혼자가 이런 사람이라네”라고 관심과 사랑을 주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스승을 그 제자들이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넷째는 참된 시대의 스승은 꿈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도탄 중에 있는 자기의 백성들에게 성벽을 쌓게 하면서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 주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민족의 부흥운동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성수주일을 하게 만들고, 십일조 생활을 하게하고, 이방 여자들과 결혼한 사람들은 다 정리하게 만드는 유대민족의 충흥을 위한 꿈을 그들에게 심어주고 실현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제자들에게 꿈을 심어 주는 일이 중요합니다.
저는 박정희 대통령이 독재를 했다고 하지만 우리 민족을 위해서 위대한 일을 한 대통령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민족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좌절 가운데서도 박 대통령은 아무것도 없는 밑바닥 나라에서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그 민족이 할 수 있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용기를 불어 넣어 주고 신념을 갖게 하였습니다. 이 민족에게 꿈을 심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스승은 제자들에게 꿈을 심어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하나님 앞에 서 있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총독이지만 12년 동안이나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녹을 받지 않고, 다른 총독들 처럼 텃새하지도 아니하고, 뇌물을 먹지 아니했으며, 백성을 압제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대접을 하면서 “하나님 내가 하는 이 일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하며 성벽이 52일 만에 완공이 되었을 때에 그는 자기를 나타내지 아니하고 “이 역사를 우리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의 지도자가 이 시대에 필요한 지도자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밖에 나가서 이 시대에 꼭 느헤미야와 같은 선생님과 교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시대의 지도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며 본받는 우리 성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시대를 진정한 스승을 상실한 시대라고 말하지만 느헤미야와 같은 이 시대의 진정한 스승과 지도자가 우리 가운데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시대가 어려울수록 진정한 스승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사명 갖고, 본을 보이시고, 사랑을 실천하시고, 꿈을 심어주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이 시대의 진정한 스승의 모습으로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일에 중심을 둔 사람은
느 5:14-19 / 김형준목사
1912년 4월 12일 1,517명의 고귀한 생명과 함께 대서양에 침몰한 타이타닉은 그 크기와 호화로움으로 유명세를 떨치던 배였습니다. 거대한 빙산에 부딪힌 것이 침몰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빙산이라는 외부 원인보다 내부적으로 스미스 선장의 자만심에 더 큰 원인이 있었다는 새로운 해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큰 배를 이끌어가는 리더, 스미스 선장은 성공 정체감 속에서 자신의 노련함만을 믿고 수 차례의 빙산 경고에도 아랑곳 않고 계속 항해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고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타이타닉은 배의 규모에 비해 방향키가 너무 작았다는 구조적인 문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빙산을 발견하고 나서 일등항해사 머독은 배의 방향을 돌리기 위해 애를 썼지만 방향키가 너무 작아 원하는 만큼 돌릴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리더십을 이야기 할 때, 타이타닉호는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는 지도자와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없는 구조와 조직을 갖고 있는 공동체는 침몰하고 만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로 자주 등장하곤 합니다.
현재 우리나라를 보는 국민들의 심정이 이와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빙산을 향해 나아가는, 아니 이미 빙산과 부딪혀서 침몰 중인 타이타닉호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어려움은 대외적인 것이라기보다 외부 문제 앞에서 내부적으로 대처방안 없이 분열과 부패, 부정이 가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혼란 가운데서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생각하기보다 각자 자기 이익을 위해 바쁘다는 사실입니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21세기 문맹자란 글자를 읽지 못하거나 쓰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배울 수 없는 사람들이며 배우지 않는 사람들이며 다시 공부하지 않는 사람들이 될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무능력한 문맹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위기 앞에서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배운 것으로 삶에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살다 보면 내면에서 갈등과 어려움이 일어날 때가 많습니다. 마음이 바로 잡혀 있으면 어떤 문제든 극복할 수 있는데, 내면에 갈등이 클 때는 어려움이 더욱 커질 수 밖에 없습니다. 가정도 마찬가지로 문제를 만날 수 있지만 가정 안에서 잘 수습하고 함께 대처해 나간다면 가정이 오히려 견실해지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내부의 갈등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속에서 느헤미야는 민족 부흥, 민족 재건이라는 사명을 띠고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고 있었습니다. 외부의 어려움이 많았지만 다 극복하고, 이제는 성 건축이 중반쯤 이루어졌을 때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성을 건축하는 이스라엘 사람들 내부에 불신과 반목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서로가 나누어지고, 믿지 못하고 궁핍한 삶을 이유로 서로 원망했습니다. 어떤 어려움에도 성 쌓기를 중단하지 않던 느헤미야가 사람들을 모두 모아놓고 회의를 열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이 내부의 위기를 새로운 기회로 삼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위기와 또 가정과 교회의 위기 그리고 개인적으로 맡고 있는 위기 속에 더 나은 삶을 위한 기회와 받은 사명을 이루는 발판으로 삼는 삶의 원리는 무엇일까요? 오늘날 여전히 갈등하고 있는 여러분, 방황하고 있는 가정들, 그리고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 지 몰라 혼란스러워하는 이 민족에게 느헤미야는 좋은 길잡이가 되어주리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느헤미야는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했습니다.
5장 6, 7절 앞 부분을 보면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중심에 계획하고”라고 나옵니다. ‘계획하다’는 아람어 ‘말라크’에서 온 단어로 ‘심사 숙고하다’ 라는 의미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I consulted with myself(NIV)’ 또 다른 성경에는 ‘I took counsel with myself(RSV)’ 즉, 내가 내 자신과 상담하고, 의논하며, 깊이 생각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6절 ‘크게 노하여’ 와 7절 ‘중심에 계획하고’는 서로 상반되는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차분히 생각하는 사람은 쉽게 분노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감정 표현은 자신을 잘 조절할 줄 모르는 사람이 즉각적으로 내보이는 잘못된 반응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분노는 심리적으로 불안정할 때 좌절감과 자기 중심적인 속성에서 표출됩니다. 이런 자기 중심적이고 불안정한 좌절감은 주로 혼란스럽고 죄악된 영혼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분노를 죄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도리어 분노를 표현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가장하고 묻어두면서 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더 위험하다고 말합니다. 숨어 있는 분노는 본인의 정신건강을 해칠 뿐 아니라, 인간 관계를 왜곡시키고 사리를 잘못 판단하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성경은 분노 자체를 정죄의 대상으로 삼지 않되 오히려 무절제하거나 파괴적이지 않으면서도 현실을 직면 하는 데서 오는 감정의 표현을 장려합니다. 그리고 분노 자체를 책망하기보다 분노의 감정을 느낄 때 분노가 죄로 이어지지 않도록 우리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창조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의 원인을 살피는데 분노라는 감정을 이용하지 않으면 죄로 이어지기가 너무나 쉬운 것도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갈등을 보면서 느헤미야가 굉장히 분노했음에 우리도 공감할 수 있습니다. 성을 쌓는 것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회복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한 형제자매 의식으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답게 살아가는 공동체를 이루고자 그 일환으로 성을 쌓고 있는데, 백성들 간에 분란과 나누어지는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먹지도 못하고 굶고 있으며, 빚을 지고, 세금을 내기 위해 집과 포도원을 팔았다고 호소합니다. ‘부자와 귀족의 자식들은 원하는 것을 모두 갖는데, 왜 우리 자식들은 종이 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같은 민족이 아닌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이 처한 상황은 물론 흉년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일일 수도 있고, 경제를 잘못 관리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좀더 본질적인 원인을 생각했습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공동체 의식’에 이상이 있었던 것입니다. 백성들의 호소 뒤에는 같은 민족으로서 누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부역을 하고 헌신하는 동안 부자들과 귀인들은 오히려 고리대금 업자가 되어 이자를 착취하고, 갚지 못하면 자식까지도 종으로 챙겨가는 악한 일을 같은 동족끼리 행하고 있다는 현실에 대한 박탈감이 있었습니다. 8절에서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속량하였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 하매 저희가 잠잠하여 말이 없기로” 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을 쌓아도 이스라엘 백성이 본질적으로 하나되는 공동체 의식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여러 가지 분노할 일들에 쌓여있습니다. 행복하고자 버는 돈이 정작 사람을 죽이고 가정을 깨어버리는 일을 보고 분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까? 우리 가정과 교회, 이 민족이 이토록 참담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단 말입니까? 이런 세상을 보고도 거룩한 분노마저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 영혼은 죽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노로 끝나게 내버려 둘 것이 아니라 분노를 통해 본질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살필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서 예배 드리고 차량봉사안내와 예배 안내, 교사나 성가대 그리고 여러 직분을 맡아서 맡은 대로 봉사합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봉사하고 있는 것입니까? 교회 본질인 구원의 소식을 증거하고 전파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 안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며 하늘로부터 임하는 은혜와 축복으로 이 땅을 하나님 나라로 바꿔가기 위해 이렇게 모여 예배 드리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직분자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직분자가 담당하고 있는 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본질을 잃고 있다면 직분도 교회건물도 아무 소용 없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혼란과 어려움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동안 자칫 잃어버렸을 수도 있는 본질을 찾을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라와 민족이 지금 헤매고 있다면, 놓치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가정과 개인의 위기 앞에서 여러분 자신들은 무엇 때문에 이 땅에 태어났으며, 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을 허락하셨는지, 이 민족이 더불어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등 본질적인 문제를 놓고 고민하는 기회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느헤미야는 공동체성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을 때 문제를 구체적으로 풀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본문의 마지막에 나오고 있는 것처럼 백성들 마음은 하나가 되어 역사를 계속 이어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에서 내 존재를 과시하는 것이 동기가 되고 본질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교회답게 되는 것을 위해 우리는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 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기분 좋은 역사가 계속 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직분을 맡고 있는 분들은 심각하게 들어야 합니다. 변화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세상은 엄청나게 변하고 있습니다. 변화 앞에서 복음을 가진 우리가 본질을 다시 찾지 못하고 헤맨다면 세상의 세파와 함께 가정과 교회, 민족 그리고 나 자신조차 묻혀 버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 속에 갈등이 있습니까?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가정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교회는 무엇을 위한 곳인가? 이 민족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본질을 진지하게 생각해 볼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또 다른 기회는 주어집니다. 본질을 찾지 못하면 갈등은 곧 불행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둘째 느헤미야는 갈등으로 인해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갈 기회로 삼았습니다. 13절 말씀 느헤미야는 갈등을 통해서 백성들 마음속에 하나님 말씀이 바로 설 수 있도록 했습니다. “내가 옷자락을 떨치며 이르기를 이 말대로 행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이 또한 이와 같이 그 집과 산업에서 떨치실찌니 저는 곧 이렇게 떨쳐져 빌찌로다 하매 회중이 다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송하고 백성들이 그 말한 대로 행하였느니라” 그랬을 때 온 회중이 ‘아멘’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 뜻을 행하는 변화가 생깁니다.
갈등이 생기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지키기에 급급합니다. 자기 것, 자기 가족 등 이해 관계에 민감해 집니다. 제가 미국에서 설교 목사로 처음 섬겼던 교회가 있었습니다. 다른 교회로 부임해가면서 후임 목사님이 왔지만, 교회의 갈등 때문에 그 목사님도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 문제로 제게 상담하러 온 분의 말씀을 들어보니, 교인들이 각각 자신이 낸 헌금을 돌려달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뭔지, 헌금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 중심 속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 말씀이 없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돌아 올 때는 많은 것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다들 부유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흉년도 들고, 성 쌓는 일에 나가면서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니 생활이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먹고 살길이 막막한 가운데, 돈 가진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빌려 줍니다. 담보를 잡고 없을 때는 자식까지 노예로 삼아가며 챙기니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속에 분노가 생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급기야 같은 민족이면서 귀족들과 관리들은 사역에 동참하지도 않고, 고리대금업이나 하면서 어려움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반란까지 일으킬 정도가 된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귀족과 부자들에게 이자도 받지 말고 7년이 되면 돌려 보내라고 이야기합니다. 율법을 백성들에게 다시금 들려주고 말씀이 회복되도록 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삶 속에 새롭게 세워지면서 백성들은 회개하고 잘못 취하였던 것을 돌려주는 등 고쳐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살아가는 것이 어렵고 힘들 때면 사람들이 얼마나 더욱 이기적이 되는지 모릅니다. 고아원이나 양로원, 장애인 보호시설에 돕는 손길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삶의 부담을 나누려 하지 않고 희생하려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느헤미야는 하나님 말씀이 그 속에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합니다. 세상 흐름을 따라 갈 것이 아니라, 갈등의 원인은 우리 속에 하나님 말씀이 없기 때문임을 기억하고 그 말씀을 되새기는 기회로 삼을 때에 말씀이 약속하시는 축복을 다시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갈등과 어려움이 오면 본능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게 피차 물고 뜯고 먹으면 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돌이켜 갈등의 원인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하나님 말씀이 하나님 말씀으로 서 있는지를 돌아보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민족의 아픔 앞에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다윗은 실수도 어려움도 많았던 사람이지만 하나님께서 끝까지 쓰신 이유가 있습니다. 위기와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서 늘 자기를 살폈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잘못을 지적할 때 왕좌에서 내려와 옷을 찢으며, 재를 뿌리며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기도하며,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키시고 주님 앞에서 쫓아 내지 말라며 회개했습니다. 말씀을 다시 되새기며, 말씀 따라 살아가는 기회로 삼았기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끝까지 쓰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 뜻을 따르지 않아 큰 물고기 뱃 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물고기 뱃속에서라도 하나님 말씀을 붙잡았을 때 다시 사명을 이룰 기회를 얻었습니다. 위기와 갈등이 올 때 여러분의 행동 원칙은 무엇입니까? 본능입니까 아니면 말씀을 다시 세울 기회로 삼고 신앙적으로 돌아보는 것입니까?
미국 실업가로 장관까지 지냈던 존 워너 메이커는 백화점 왕으로 불립니다. 존 워너 메이커는 미래를 예측하는 탁월한 판단력과 뛰어난 경영 능력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메이커가 투자해서 구입한 물건은 매번 많은 이익을 남겼습니다. 한번은 신문기자가 메이커에게 지금까지 투자한 것 중에 가장 성공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습니다. 메이커는 열두 살 때에 2불 50센트를 투자해서 산 성경책이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그 성경책이 오늘날 자신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리지만 갈등과 나눔 그리고 방황의 시간 동안 감정대로 따라가지 마십시오. 오히려 역으로 하나님 말씀이 내 삶과 가정 그리고 민족 공동체 속에 바로 세워지지 못한 부분이 무엇인가를 돌아보고 느헤미야처럼 새롭게 결단하는 결단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원을 드린 적이 있습니까? 위기와 어려움의 때에 ‘이제는 하나님만을 위해 살겠습니다.’ 한번이라도 이런 서원을 드린 적이 없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이 말씀의 원칙을 다시 세울 때입니다. 가정에서 말씀을 다시 세우고, 교회에서 말씀을 다시 세우고, 내 삶의 여정 속에 무너진 말씀의 단이 무엇인지 돌아볼 때 다시 소생할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께로부터 얻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대단한 존재 같이 느껴도 하나님께서 손 놓아버리시면 쓸모 없습니다. 하나님께 인생의 마지막까지 붙들린 바 되기를 원한다면 말씀을 심령 속에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공동체가 살아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셋째 갈등과 고난이 올 때 느헤미야는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19절 말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생각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에서 알 수 있듯이 느헤미야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았는가 돌아봅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총독으로서 당연히 받을 권리가 있는 월급을 받지 않았습니다. 총독으로서 활동하는 활동비를 위해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었고 세금을 통해 활동비를 충당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한끼에 백오십 명이나 되는 사람과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 중에는 이방인들도 있었고 관리들도 있었습니다. 총독으로서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많은 비용이 들었지만, 느헤미야는 백성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십 년 동안 세금을 부과하지 않았습니다. 학자들 말에 따르면, 느헤미야는 바사 왕의 신하로서 받을 월급과 사유재산까지 털어 백성들을 섬겼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느헤미야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을 하나님 앞에 다시 세우리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백성 되게 하리라. 저들 가운데 하나님이 진정 하나님으로 높임 받게 되리라.’ 하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제쳐두고 서라도 하나님 앞에 자신을 희생하며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큰 은혜 받은 여러분, 여러분의 꿈은 무엇입니까? 예수 믿고 내 자녀 잘 되는 것입니까? 내 사업 잘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꿈은 무엇입니까? 정말 하나님 자녀답게 살고자 하는 꿈은 없습니까?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녀를 하나님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마음껏 쓰실 수 있는 사람으로 길러내겠다는 결심은 없습니까? 허락하신 사업체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업체로 만들겠다는 그 열정과 꿈이 없다면 우리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에 불과합니다.
꿈이 있는 사람만이 미래를 열어갈 수 있습니다. 미래를 열어가는데 내가 거름이 되고 뿌리가 되는 헌신의 모습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꿈에서 나온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바로 오늘 느헤미야가 지적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다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인생에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로버트 로빈슨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청년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20살 때 놀라운 회심의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회심한 이후 많은 시를 지었는데 이 시가 당시 영국인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청년은 좋은 시로 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끼침에도 불구하고 세상 유혹 앞에 빠져 깊이 방황하고 갈등을 겪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마차를 합승해서 타고 가는데, 옆에 앉은 부인이 두툼한 시집을 꺼내더니 이 시에 대해 아느냐고 묻습니다. 자기가 옛날에 지었던 시였습니다. ‘복의 근원 강림하사’ 라는 시였습니다. 청년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여인은 ‘이 사람은 신앙과 거리가 먼 사람이구나.’ 생각하면서, 자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이 시를 읽는 순간 삶에 찾아온 변화와 받은 감동이 인생의 방황을 끝내주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뒤이어 시를 읽어드리겠다며,
복의 근원 강림하사 찬송하게 하소서
한량없이 자비하심 측량 할길 없도다
천사들의 찬송가로 나를 가르치소서
구속하신 그 사랑을 항상 찬송 합니다.
주의 크신 도움 받아 이때까지 왔으니
이와 같이 천국에도 이르기를 바라네
하나님의 품을 떠나 죄에 빠진 우리를
예수 구원하시려고 보혈 흘려 주셨네.
3절에 이르렀을 때 로버트 로빈슨은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주의 귀한 은혜 받고 일생 빚진 자 되네
주의 은혜 사슬 되사 나를 주께 매소서
우리 맘은 연약하여 범죄하기 쉬우니
하나님이 받으시고 천국인을 치소서.
찬송시를 읽어 준 여인에게 자신이 바로 수년 전에 이 찬송시를 작시한 사람임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로버트 로빈슨은 눈물로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캠브릿지 대학에서 학생들을 이끄는 영적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시련과 어려운 일은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문제는, 우리 내면이 시련과 어려움, 갈등 앞에 준비되어 있느냐 입니다. 외부적인 문제보다 내부적인 문제가 우리 자신과 가정 그리고 교회와 민족을 무너뜨립니다. 지금 내부적인 갈등을 경험하고 있다면 그것이 기회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놀라운 투자를 해야 할 시기입니다.
먼저 본질을 찾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왜 나를 지금까지 살려 두셨는가? 왜 이 가정과 교회를 허락하셨는가? 왜 이 한반도로 나를 부르셨는가?’ 본질적인 질문을 하나님께 던지는 기회로 삼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원인을 다른 데서 찾지 말고 느헤미야처럼 마음속에 잃어버린 하나님 경외하는 마음과 주님 말씀을 다시 세우고, 로버트 로빈슨처럼 ‘주의 은혜 사슬 되사 나를 주께 메소서’ 찬송하며, 주의 은혜로 갈등과 위기를 극복하는 성도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