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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애국지사
이 발제 논문은 2004년 2월7일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통일연대 학술연구특별위원회와 범민련재미본부, 재미동포서부연합회가 공동주최하고 민족통신, 크리스천헤럴드, 민주노동당 미주후원회, 통일맞이나성포럼, 내일을 여는 사람들이 공동후원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심포지움'에서 발표된 내용이다.[민족통신 편집실]
대종교 홍암 나철의 생애와 민족애, 그리고 통일 - 김상일(한신대 철학과 교수, 한사상연구소 소장)
1. 대종교가 보는 우리 역사
대종교는 엄연한 민족 종교이다. 일단 종교가 그 종교의 이념과 신앙 내용이 있는 한 그 종교에서 보는 역사가 실증되어지는 역사가 완전히 일치될 수는 없는 것이다.
기독교의 역사관은 기독교의 교리 신조와 일관성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대종교가 대종교측에서 가지고 있는 경전에 의거하여 주장하는 역사관을 알단 실증 여부에 상관없이 대종교의 신앙 신조와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 기독교의 유사종파 가운데 몰몬교가 있다. 몰몬교는 콜르부스 이전에 아브라함시대 때에 백인이 북미주 땅에 왔다는 것을 믿는다. 창시자 요셉 스미스의 계시에 의해 받아들여질 뿐이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 계시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른다.
역사란 그래서 객관적 실증만으로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우주의 역사가 수백억년 전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는 데도 아직도 많은 보수 기독교인들은 지구가 기원전 4004년에 창조되었음을 믿고 있다
대종교의 경전인 『신사기』(神事記)에는 기독교의 창세기를 방불케 하는 인류 창생에 관한 기록이 있고, 문명의 기원에 관한 기록도 있다.
문명의 시초에 한 남자와 여자가 있었으니 나반(那般)과 아만(阿曼)이 있었는데 서로 동서로 나뉘어져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세월이 지난 다음에 만나 짝이 되었다고 한다.(『神事記』 造化記 중에서) 구약 창세기와 다른 점은 신사기에는 두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다는 기록이 없고, 다만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나반과 아만의 자손은 다섯인데 그 피부색이 달랐다고 한다.
그 자손이 나뉘어 다섯 빛깔의 겨레가 되니, 황, 백, 흑, 홍, 남이 그것이다.(其子孫 分爲 五色族 日黃, 白, 玄, 赤, 藍)(『神事記』중에서). 요즈음같은 국제화시대가 되면서 가장 타인종끼리 만났을 때에 신경 씌여지는 부분이 피부 색깔이라고 할 수 있다. 「창세기」는 인종들의 피부 색깔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다.
그러나 대종교의 경전인 『신사기』는 인류의 기원과 함께 피부색에 대한 배려를 가장 으뜸으로 놓고 기록하고 있다. 국제화된 지금 같은 시대에 생각할 때에 그 위대성이 돋보인다.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記)는 『신사기』보다 더 자세하게 피부색과 외모의 생김새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색에 다른 종족은, 黃部의 사람은 피부가 약간 노랗고, 코가 높지 않으며, 광대뼈가 높고 머리가 검으며 눈이 평평하고 청홍색이다. 白部의 사람은 피부가 밝고 얼굴이 길고, 코가 튀어나오고 머리가 회색이다. 赤部의 사람은 피부가 녹슨 구리빛이고, 코가 낮고, 코 끝이 넓으며, 이마가 뒤로 경사지고, 머리는 말아서 한편 風族이라고도 한다. 또 棕色種이 있다. 그 피부는 암갈색이고, 얼굴은 황부의 사람과 같다. (『三神五帝本記』).
오늘날 같이 국제화 되기 이전에는 각 종족은 모두 본 인류가 자기들의 색과 같은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종종 색깔이 다른 인종을 만났을 때 공포증과 거부감마져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종교는 모든 종교 가운데 으뜸으로 인간을 볼 때에 피부색을 고려했으며 그 다른 피부의 인간이 나반과 아만의 한 부모의 자손임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대종교의 인류 창생관을 앞으로 세계 인류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위대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대종교의 역사 이해는 나반과 아만의 두 남녀로 시작된다. 마치 구약성서의 아담과 이브와 같이 이러한 역사 이해 속에는 많은 신화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많은 역사적인 요소도 내포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구약성서도 아브라함 이전까지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신화란 역사의 축적과 같다. 그래서 수천년이 단 하루로 신화 속에는 표현된다. 신화를 풀면 다시 역사로 환원되어지는 것이다.
대종교의 역사서인 『삼성기』(三聖記)와 『단군세기』는 다음과 같이 역사를 말하고 있다.
나반과 아만이 나타난 시기를 3만년 전쯤으로 본다. 환인이 천산(天山)에 환국(桓國)을 세운 년대가 7198 B.C.라고 한다. 이 환국은 7대 3301년이다. 환웅(桓雄)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 나라 세우고 18대 1565년간 통치한다. 이 때가 신시 개천의 배달민족 국가가 성립된 때이다. 단군이 나라 세운 때는 2333 B.C. 무진년 10월 3일 이다. 단군왕조는 47대 2096년간 계속된다. 단군 93년(2240 B.C.)경인 3월 15일에 당장경에 들어가 숨어버린다. 『삼일신고』(三一神誥) 봉장기(奉藏記)에는
"고조선기에 말하되 366甲子에 환웅께서 天符三印을 가지시고 태백산 단목아래 내려오시어 산과 물을 개척하고사람과 물을 낳아 기르며 두돌갑자 지난 무진년 상달상날(10월 3일)에 신령한 대궐에 거동하시어 산과 물을 개척하고 사람을 한얼 말씀을 가르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대종교는 단군 51년에 강화도 마니산에 제천단을 마련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 데서 그 종교의 기원으로 삼는다. 이러한 단군이 세운 종교는 부여시대에는 대천고(代天敎)라 하고 음력 10월에 맞이궂〔迎鼓〕이라는 제명(祭名)으로, 고구려에서는 경천교(敬天敎)라하고 동맹(東盟)이라는 제명으로, 예맥에서는 무천(舞天)이라는 제명으로, 백제에서는 효천(效天)이라는 제명으로 매년 10월에 제천의식을 거행하였다.
고려에서는 왕검교(王儉敎)라는 교명으로, 신라에서는 팔관회의 의식을 행했으며, 조선왕조에 와서는 종교(倧敎)라는 교명으로 10월이 되면 제사를 지냈다. 이와 같이 우리 민족의 고유한 신앙 체계를 거슬러 올라가면 당연히 그 기원을 단군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하게 우리 민족사 속에 흐르는 정신적 실체였던 것이다. 정치사가 단군까지 거슬러 올라가던 안가던 우리 민족의 정신사는 분명히 단군까지 올라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신적인 맥이 우리 고유의 것임이 분명한 것은 인접해 있는 중국에서 이와 같은 정신적인 맥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단군 관계 문헌 속에 나타난 신화적 요소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더 자세히 서술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서술한 단군 관계의 역사는 그 문헌적 비판과 이해를 깊게 함이 없이는 그 진가를 인정받기 어렵다. 이와 같은 학문적 준비가 되어져 있지 않은 한국 사학계의 대종교의 역사 이해에 대한 태도는 심히 유감스럽다 아니할 수 없다.
2. 대종교 창건사
대종교는 위에서도 말한 대로 단군왕검이 환웅천왕의 신도(神道)를 받아 설교한 종교이다. 그러므로 단군이야말로 대종교의 제1대 교조(敎祖)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담을 기독교의 창시자라고 할 수 없듯이 현재 존재하며 제도와 교단을 형성하고 있는 종교로서의 '대종교'는 구한말 나철 홍암(羅喆 弘巖)이 창시한 것이다.
그래서 대종교의 역사는 중광 전사와 중광 후사로 나뉘어진다. 중광(重光)이란 빛을 다시 들어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르네상스(Renaissance)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마치 루터가 기독교를 다시 들어냈듯이 말이다. 나철을 전후하여 대종교측에서는 중광 전·후사로 나누게 되는 것이다.
(1) 나철 홍암의 생애와 대종교
ⅰ)대종교의 창건
구한말에 나타난 민족 종교들 즉 천도교, 증산교, 원불교, 그리고 대종교의 교조들이 천조교의 최수운(崔水雲)을 제외하고 모두가 전라도에서 태어난 것이 공통된다. 증산교의 강증산, 원불교의 소태산과 함께 나철 홍암도 전라남도 벌교에서 단기 4196년(서기 1863년) 12월 2일에 태어났다.
항상 위대한 종교는 한맺힌 민중의 한(限)을 품고 태어난다. 백제가 신라에 의해 짓밟힌 이후 천여 년이상 한맺혀 온 땅에서 위대한 정신력이 발생하는 것은 차라리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정치가 패망하는 곳에 정신의 화려한 꽃이 피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홍암은 29세에 과거에 장원하여 기거주(起居注)에 오르고, 31세에는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가 되었다. 그날이 10월 7일이었다. 그러나 10월 24일에 그 자리를 내놓고 낙향하였다. 33세 때에는 고종황제로부터 징세서장을 제수받았으나 끝내 취임하지 않고 말았다.
홍암이 31세 되던 해(1893년) 계사년부터 갑오·을미년간은 동학혁명·청일전쟁·민비시해 등 국재외가 심히 혼란하던 때었다. 청국·일본·러시아가 한반도를 가운데 놓고 서로 집어삼키려고 각축을 벌리던 때었다.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의 개신교측 선교사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외우내란이란 표현 그대로가 적합하다 할 수 있다.
그리고 구한말 조선왕조는 이렇게 밀어 닥치는 외세에 대처할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었던 것이다. 나라가 풍전등화 같은 마당에 벼슬 자리를 한다는 것이 나철 홍암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모든 벼슬 자리를 모두 팽개치고 홍암은 정처없이 떠나고 말았다.
우리는 그의 나이 33세부터 42세까지의 10여 년간의 행적을 지금 전혀 알 수 없다. 정치적으로는 도저히 구제불능인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면서 오직 한 길 이제는 정신적 구원뿐이라는 것을 홍암은 절감하고 입산수도의 길에 올랐던 것이다. 종교인이 되기 위한 입산수도가 아니고 나라의 기운을 갱생시키기 위한 그의 입산수도였던 것이다.
그의 고향 전남 벌교의 노인들과 그의 유족들의 말을 들어 보면 홍암은 낙향한 뒤에 벌교 소재 재석산(宰釋山)에 올라가 수도하였다고 한다. 홍암이 재석산을 오르내리며 부딪힌 정신세계는 과연 어떤 세계였을까?
여기서 한가지 일화를 통해서 그가 만난 정신세계는 유교도 불교도 아닌 어떤 신적 세계였던 것 같다. 하루는 깊은 산골에서 절벽을 만나서 진퇴양난의 진경에 처하기에 붙잡았더니 절벽을 휙 날아 건너편 산등에 내려놓고는 "이런 것쯤은 스스로 뛰어갈 도력(道力)을 길러야 하느니라"하고는 어디론가 가 버렸다는 것이다. 이 일화는 나철이 만난 세계가 한국 고유의 신선사상이 아니였던가 여겨진다.
나철 홍암은 1904년 42세 때에 입산수도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그가 나온 갑진·을사 두 해는 그가 입산수도 들어가던 갑오·을미보다 더 사태가 험악해져 있었던 것이다. 일노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노골적으로 조선을 침략하고 있었던 것이다. 43세 되던 1905년에는 일본이 러시아에 승리하였고, 9월 5일에는 미국 포츠머드에서 일·노강화 회의가 열리게 되었으며, 이 때부터 일본은 한국 침략의 독무대가 되었고, 조국의 운명은 그야말로 난파 직전에 처하게 되었다.
홍암은 이 울분을 참을 길 없어서 오기호 등과 포츠마츠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을 보장 받고자 1905년 6월 일본에 밀항하였다. 이것이 홍암의 제1차 밀항인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도미가 죄절되고 말았다. 나철과 오기호 두 분은 궁성 앞에 앉아 3일간 식음을 전폐하면서 명치 천황에게 조선이 주권국가임을 선언하고 일본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였다. 그 후 4년간 제2차, 제3차, 제4차에 걸친 도일을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나철은 요주의 인물로 지목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는데 그것은 을사보호조약에 관한 불길한 소식이였다. 나철은 이 망국 조약을 저지할 결심으로 급히 귀국하기는 했으나 그 때에는 이미 조약이 체결된 이후였다. 나철이 을사조약의 소식을 들은 것은 제1차 도일 때였으며, 제2차와 그 이후의 도일은 을사조약을 폐기시키기 위한 도일이였다. 나철은 서세를 막기 위해서는 동양 3국이 동양 평화를 맺어 공동으로 싸워야 할 것을 역설하였다. 실로 당연하고 타당한 주장이였다. 그러나 일본은 눈앞의 실리에만 눈이 어두워 나철의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귀국한 나철은 나라를 팔아 넘긴 매국 정부를 전복하고 구국 정부를 수립해야겠다는 결심을 세우게 된다. 그리하여 권총 50여 정으로 오기호 등 50여 동지들과 더불어 6개 결사대를 편성하고 매국노 6적을 암살하려고 그들의 가슴에 총구를 겨눈다. 그러나 총알은 빗나가고 말았으며 1906년 "정부 전복대신안살기도사건"의 죄목으로 지도(智島)에 유배당한다. 그러나 고종황제의 내명이 있어서 같은 해 10월에 사면된다.
사면된 홍암은 분을 풀 길이 없어 제4차 도일을 하게 된다. 4년간 홍암은 불타는 애국심을 품고 정치·외교적으로 구국운동을 편다. 그러나 그의 불타는 정열은 용광로 속에 떨어지는 빗방울 정도에 불과했다. 거대한 외세와 병기로 무장한 일본제국이란 큰 바위 앞에 그것과 싸우는 계란과도 같았다.
나철 홍암이 단군교에 접하게 되는 시기는 온갖 정치적 투쟁이 좌절되고 최대의 실의에 빠져 있을 때였다. 몇 차례의 도일과 좌절 그리고 6적 살해의 미수 그리고 절망. 나철과 오기호가 일본에서 돌아와 서대문역에 내려 여관으로 가기 위해서 종로쪽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 때에 한 노인이 급히 걸어오다가 두 사람 앞에서 걸음을 멈추며 "그대가 나인영(나철)이 아닌가?" 묻고는 "나의 본명은 백전(伯佺)이고 호는 두암(頭岩)이며 나이는 90인데 백두산에 계신 백봉신형(白峯神兄)의 명을 받고 나공(羅公)에게 이것을 전하러 왔노라"하면서 백지에 싼 책을 건네주었다.
나철은 종로 노상에서 단군교에 입교하고 백봉신사(白峯神師)로부터는 입교증을 받았다. 홍암이 여관에 돌아와 두암(頭岩)옹이 준 책을 펴보니 그 책명이 『삼일신고』(三一神誥)와 『신사기』(神事記)였다. 정치적 실망과 좌절에 젖어 있던 나철 홍암의 안중에 책 혹은 그 책에 적힌 글 따위 같은 것이 관심을 끌 리가 없었다. 나철은 그 책을 그냥 덮어 한구석에 방치해 두었다. 그러나 그 책이 천고의 비밀을 담고 있고 민족정신이 아로새겨져 있는 줄은 나철 자신도 몰랐었다.
홍암이 지도 유배에서 풀려난 뒤 정훈모 동지와 제4 도일을 시도한 것은 1908년이였다. 그는 도일에 앞서 "내 생명이 붙어 있는 한 망국의 일면으로 좌시만은 할 수 없다"라 하였다. 그가 도일한 시기는 1908년 11월이었다. 같은 해 12월 5일에 그가 묵고 있던 숙소였던 청광관(淸光館) 엎 방에 투숙하고 있던 미도 두일백(彌島 杜一白)이란 69세의 노인이 이른 아침에 홍암의 방에 들어왔다. 그는 자기를 지난번 서대문역 근처에서 『삼일신고』등을 건내준 백전(伯佺)과는 아는 사이라 하면서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 『고본신가집』(古本神歌集), 『입교의절』(入敎儀節), 『봉교절차』(奉敎節次), 『봉교과규』(奉敎課規)같은 서적을 전해 주었다. 그는 "나공(羅公)의 금후사는 단군교포명서에 관한 일이니 명심하시오"하고는 나가버렸다.
며칠 후 나철 일행은 일경의 감시가 심해져 숙소를 개평관(蓋平館)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 곳에 미도옹이 다시 나타나 "국운은 이미 다했는데 어찌 바쁜 시기에 쓸데없는 일로 다니시는가? 곧 귀국하여 단군대황조의 교화를 펴시오. 이 한마디가 마지막 부탁이니 빨리 떠나시오"하고는 다시 떠나고 말았다.
이 말은 결코 정치적 해방의 포기를 의미하는 말은 결코 아니다. 바빌론 포로 기간 동안에 위대한 예언서들이 거의 씌여졌듯이 정치적 운이 다한 마당에 그 운을 돌리려고 노력하는 것은 무위일 뿐이다. 다른 방향 그 반대 방향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이러한 의도로 미도옹은 나철에게 권고한 것이다. 미도의 말을 들은 나철은 무언가 모를 감동에 사로잡혀 온 몸이 진동하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대오대각의 깨달음이 온 몸을 떨게 하면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옳다. 단군대황조께서 나를 부르시는구나. 백두천산의 백봉대신사의 그의 제자 두엄과 미도의 두 선옹(仙翁)은 대황조단군께서 내게 보낸 신선들이다. 그렇지, 이제 와서 한두 사람의 애국 정객 따위의 외교 행각쯤으로 국권을 회복해 보겠다고 한 생각은 어이없는 일이다. 나라는 망했으나 겨레는 살아야겠다. 이 살아 있는 겨레를 건지는 단군교화 운동이야말로 참된 구국 운동이다. 민족의 정신이 독립된다면 조국이 독립될 날은 반드시 올 것이다."
홍암의 생각이 이에 미치자 외교 활동을 단념하고, 단군교를 천하에 포명한다는 뜻을 품고 그 다음날 즉시 정훈모 동지와 함께 귀국하고 만다. 종교는 아편인가? 과연 나철의 정치적 투쟁의 의욕이 종교라는 몰핀주사를 맞고는 중독된 것인가? 외교 행각에 실패했으면 무장항쟁이란 선택이 남아 있지 않은가? 나철은 종교에서 그의 또다른 선택에 주사위를 던진다.
홍암은 이듬해 1990년 정월 보름날 밤 11시를 기하여 한성부 북부 재동 8통 10호 육간 초가집 북쪽 벽에 '단군대황신위'(檀君大皇神位)를 봉안하고, 오기호, 강석화, 최동식, 유근, 정훈모, 이석, 김인식, 김춘식, 김윤식 등 수십 명의 동지들과 모여서 제천보본(祭天報本)의 대례를 봉행하고, 천상의 억만 신들과 천하의 억만 민중을 향하여 「단군교포명서」를 선포하니 이것이 나철 홍암의 단군교 중광 후사의 시작인 것이다. 6천자에 이르는 포명서의 서두를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今日은 惟我大皇組檀君神位의 4237회 開極立道之慶節也…라 愚兄等 13人이 太白山(현 백두산) 大崇殿에서 本敎 大宗師 白峯神兄을 排謁하고, 本敎의 심오한 義와 역대의 消長된 論을 敬承하와 凡我同胞 형제자매에게 삼고 고하노니 本敎를 崇奉하와 善을 趨하며 惡을 피하여 영원한 복리가 자연히 一身一家一邦에 달하기를 희원하나이다.
오호라 넓은 바다의 천파만파 물결 하나도 그 근원을 끊으면 말라버리고, 울창한 천가지만가지 가지와 잎도 그 뿌리를 자르면 죽고 마나니, 하물며 千子萬孫의 人族이 그 조상을 잊고 어찌 번창하기를 바라리요, 그리고 안녕과 태평을 期하리오…."
단군교는 그 맥이 단군으로부터 계승되어 왔었다.
그러다가 고려가 몽고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그 도맥이 끊어지고 말았었다. 즉, 고려 원종(元宗 : 1247∼1260) 때부터 그 맥이 단절되었다. 그러니까 무려 700여년 동안 조상으로부터의 뿌리가 단절된 것이다. 이 700년간 끊어진 도맥을 홍암이 백봉대신사로부터 전수받아서 다시 이어졌기 때문에 이를 기유중광(己酉重光)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홍암이 47세 되던 1909년 기유 음력 정월 15일에 단군교를 중광하고 제1대 교주가 되었다. 교주를 도사교(都司敎)라 한다. 일을 맡는 최고 책임자란 뜻이다. 창교는 했으나 재정적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기유년 그 한 해만 하더라도 본부를 무려 다섯 번이나 옮길 정도였다. 재정적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은 대종교가 초기에 기복신앙을 강조하면 교회가 텅 비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구국의 열정을 거진 신조들이 모여들어 1910년 6월 29일 조사한 전국 교우 실태에 의하면 서울이 2,748인, 지방이 18,791인이었다. 불과 1년 5개월만에 무려 21,539명으로 급성장했던 것이다. 실로 나라 잃은 민중들이 이제 의지할 곳은 민족의 조상인 단군뿐이였음을 여실히 입증해 주고 있다. 승일연(一然)이 몽고의 침략 앞에 국운이 풍전등화 같은 때에 단군을 다시 찾은 것과 같은 맥락에서 대종교의 중광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대종교의 원리 이름은 단군교였다. 중광 이듬행딘 1910년 경술년에 단군교가 대종교로 바뀌었다. 1910년은 단군 이래 최대의 부끄러움인 한일합방이 되던 해이다. '단군교'를 '대종교'로 바꾼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본다. 첫째 이유는 나철의 친필인 '이력서'에 의하면 "檀君敎名復以檀帝 立敎名 大倧敎發佈告 名報館"으로 되어 있다. 즉, 단군교를 대종교로 바꾸는 것은 다름 아닌 단군황제 때의 이름으로 되돌아가 복원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大)는 '한'이고 종(倧)은 '검'이므로 순수한 우리말인 '한검교'로 되돌아가 이를 한자음으로 전음시킨 것이 대종교(大倧敎)란 것이다.
그런데 교명을 바꾼 데는 또 다른 정치적 이유도 있었던 것 같다. 즉, 한일합방으로 법적으로 조선을 집어삼킨 일본은 단군 말살의 본격적인 작업을 어용 사학자들을 내세워 진행시키는 마당에 단군교란 실체가 버젓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때 상황으로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단군'이란 두 글자로서는 교단을 도저히 수호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교단 수호의 차원에서 개명이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개명은 물론 중앙의 결의를 거쳐서 된 것이지만, 개명 과정에서 교단 분열이라는 안타까운 일이 생겼다. 즉, 동경 개평관에서 나철과 같은 방에서 미도옹으로부터 포명서를 받았던 정훈모가 개명에 의의를 제기하고 단군교를 그대로 고수하기로 고집하였다. 경술 9월에 정훈모는 이유형, 유탁, 서장보 등과 교단 분리를 선언하였다. 그 해 12월 22일에는 본당에 교인 400여 명이 모여 정의 분타를 규탄하는 집회가 있었다. 정훈모의 분파 배경에는 떳떳하지 못한 나변의 이유도 있었던 것이다.
대종교는 일제의 핍박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만주로 그 활동 무대를 옮기게 된다. 그 이후 대종교 교인들은 거의 광복군의 군대로 투입된다. 단군교는 1920년에 식도원(食道園) 주인 안순환씨의 재정 후원으로 경기도 시흥에 본부를 옮기고 단군전을 신축하였다. 한때 교세가 확충되고 활기를 띄는 듯하였으나 경리 부정으로 인한 한 교인이 일경에 밀고하는 사건이 생겨 이를 구실로 단군교는 폐교되고 말았었다. 해방 후에 단군교는 대종교 안양 교당 산하로 모두 돌아오고 말았다.
ⅱ)포교 활동과 일제의 탄압
만주로 교당 본부를 옮긴 대종교는 1910년 10월 25일 만주 북간도 삼도구(三道溝)에 지사(支司)를 설치하였다. 그 다음해인 1911년 정월 15일에는 『신리대전』(神理大全)을 저술 발간하였다. 그 해 7월 21일에는 단군 관계 고적을 찾아 강화도 마니산 제천단, 평양의 숭령전(崇靈殿), 백두산, 길림성 청파호 등을 순례하였다. 나철은 청파호에 이르러 나라 잃은 서러움과 민족의 영산인 천산(백두산)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나철은 만주땅 청파호에 총본사를 두고 포교 활동에 열중하였다. 수천년 동안 찌들여 온 민족 정기를 고취시키면서 사대주의에 시들고 잠든 민족의 가슴 속에 새 눈을 뜨게 하였던 것이다. 수많은 민중들이 나철의 강연을 듣고 대종교에 몰려들었다. 5년간에 걸쳐 만주, 러시아, 중국 등지에 30만 대신도를 거느리게 되었다. 이 숫자는 망명 동포의 80퍼센티지가 대종교에 몰려들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동북 만주에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 전선은 그 정신적 구심점을 대종교에 두고, 30만 교도들은 명실공히 항일 독립운동의 주동 세력으로 결속되었다. 대종교가 이렇게 급속히 팽창하는데 대하여 일제는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며, 대종교 말살책을 새롭게 강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15년 10월 1일 드디어 일제는 대종교를 말살할 목적으로 조선총독부령 제83호에 의거하여 「종교통제안」을 공포하였다. 이 「종교통제안」이란 조선 내의 모든 종교는 설립 연원에 따라 등로갛고 포교 인가를 받으라는 것이다. 1915년 1월에 이미 나철은 서울에 와 있었다. 일제는 나철이 이미 서울에 와 있다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 포고령을 내렸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 기회에 대종교를 불법화시키고, 그러면 나철이 다시 만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들기 위한 야비한 술책이 이면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덫에 걸려들 필요는 없다. 나철은 예측했던 것이 도래했다고 생각하고는 같은해 12월 21일자로 신교포교규칙(神敎佈敎規則)에 준하는 신청서를 총독부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일제 총독부는 일반 유사 종단의 서류마져 접수하면서도 대종교의 서류는 접수하지 않았었다. 서류를 접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교내(敎內)의 활동을 못하게 함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대종사 나철의 수도행까지도 저지하고 구속의 위협까지 가했던 것이다.
총독부는 종교통제령으로 "대종교를 종교 유사 단체"라 규정지어 놓고 "대종교인은 자유가 없다"하면서 집회의 자유는 물론 교주 이하 전 간부들의 사생활과 동태를 철저히 감시하였던 것이다. 헌병과 경찰을 통해 미행시키고 감시케 하였다. 소송 사건에 있어서도 대종교 교인이면 무조건 패소 처분시키기도 했었다. 아무튼 대종교는 총독부의 가장 미움받는 대상이 되었으며 대종교 교인들은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일제에 저항했던 것이다.
ⅲ)나철 홍엄의 장엄한 순명(殉命)
인간이 어떤 죽음을 하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기독교가 이렇게 세계적인 종교가 된 가장 큰 이유는 십자가(十字架) 때문이라 해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위대한 종교의 창시자일수록 그 죽음이 장엄해야 하는가 보다. 공자, 부다, 마호메트는 제 명대로 살다 갔다. 최수운과 소크라테스는 정치권력에 의해사형을 당하였다.
대종교의 창시자 나철 홍암은 제 명을 다한 한명(限命)도 아니고, 타에 의해 사형(死刑)을 당한 것도 아니다. 그는 자기 민족과, 자기 종교와, 자기 진리를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바쳤다. 그는 크고 높은 진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쳤다. 그래서 그의 죽음을 봉명(奉命)이라 할 수 있고, 진리의 길을 따랐다고 하여 순명(殉命)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조국과 민족 그리고 그의 종교가 그와 하나이요 둘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조국과 민족이 없어지고, 종교가 폐교되는 마당에 자기 목숨이 살아 있다는 것은 의미가 없고 위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의 진솔한 삶의 태도는 살아 있다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으며 죽음으로 스스로 조국과 목숨을 바칠 시점이 바로 이 때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자기 목숨이 끝나는 장소를 선택하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였다. 죽을 때는 정해졌다. 죽을 장소를 홍암은 민족의 삼신인 환인·환웅·단군이 모셔져 있는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가 바로 그 장소라고 마음 속에 결정하고 말았다.
그는 삼성사로 향해 떠나기 전에 대종교 도사교(都司敎)란 최고 책임자의 자리를 후계자에게 넘겨 주어야 할 책임을 느꼈던 것이다. 1916년 4월 13일에 김헌(金獻)사교를 뽑아 그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영선식(靈選式)을 거행하였다. 짐작컨대 나철이 구월산 삼성사로 떠난 날짜도 영선식을 거행한 4월 13일 바로 그 날인 것으로 보인다. 나철이 구월산을 향해 떠나는 대의명분은 수도(修道)였다. 자기 목숨을 바치는 그 이상 더 큰 자기 부정이 없는 수도의 길이었다.
고등중교의 위대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는 이를 극기(克己)라고 했고, 부다는 무아(無我)라 했고, 기독교는 십자가의 길이라고 한다. 저급한 종교는 자기 부정 대신에 자기 아집과 자기 애집에 사로잡히도록 하고 목숨, 재물, 명예, 이익을 확대하도록 만든다. 나철은 긴 목숨을 구차하게 구하지도 않았고, 재무로가 명예도 바라지 않았다. 위대한 모든 성자들이 걸어 갔던 자기 부정의 수도를 단행하기 위해서 구월산으로 향했던 것이다.
나철 일행이 삼성사에 도착했을 때에 삼성사의 벽과 지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파손되어 있었다. 삼성사를 돌보지 않은지 500년이 되었다. 조선조 500년 동안 단군은 땅 속에 묻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는 한배 하느님은 이제 민족의 작은 불빛을 다시 켜게 하기 위하여 나철을 뽑을 것이다. 나철 대종사의 그 일행들은 삼성사를 돌아보고 비분강개하여 그 자리에서 통곡하고 말았다.
나철은 제자들을 데리고 삼성사 뜰의 잡초부터 뽑게 하였다. 사당 수리도 끝내고 9일 아침에는 마침 일요일인지라 천수(天水)를 드리고 향을 피워 경배식을 거행하였다. 14일에는 제자들을 모아 놓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땅은 우리 한배께서 하늘에 오르신 곳이라 예로부터 祠堂을 세우고, 신상을 모시어서 香火가 4000년 간 끊이지 아니하고 이어왔는데 불행히도 이 몇 해 동안에 제사를 폐하고 守護조차 없이하여 祠堂과 齎堂이 무너지고 비바람에 견디지 못하게 되었으니 슬프다! 존귀하신 삼성사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자손 된 자 어찌 감히 안전하기를 바라리요. 내가 大敎를 받든지 8년에 이제야 비로서 이 땅에서 檀儀를 받들게 되니 지극한 원을 마치었노라."
말을 마친 나철은 사당 옆 언덕에 올라가 북쪽으로 백두 천산(天山)과 남쪽으로 선조 묘소를 향하여 멀리 망배하직한 뒤 곧 수도실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오늘 새벽 세시부터 3일간 음식ㅇ들 끊고 수도를 하니 이 문을 열지 말라"(自今日 上年三時當始 三日間絶食修道切勿開此門)이란 21자를 써서 문중 방에 붙이고 안으로 문을 잠근 뒤에 밖에는 오직 먹 가는 소리만 들릴 뿐이였다. 이날 당직은 엄주천·안영중 두 사람이었다. 저녁 10시까지도 먹 가는 소리를 두 사람은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어찌 먹을 가는 소리였겠는가? 나라가 망해 먹이 갈고 달아지듯 그 진과 액이 다 갈아지는 듯한 소리가 아니였겠는가?
그 다음날 아침 16일에 두 사람은 밤 사이가 궁금하여 수도실 앞을 달려갔다. 아무런 인가척도 들리지 않았다. 의하하게 생각한 엄주천·안영중 두 사람은 불안한 예감이 들어 문을 떼고 방안에 들어가 보니 홍암 나철은 미소를 머금고 손과 발을 곱게 펴고 흰 두루마기를 단정하게 입은 채 반드시 누워 목숨을 거두고 있었다.
대종교에서는 죽음을 조천(朝天)이라고 한다. 대종교에는 대종교 고유의 비전되어 내려오는 숨을 조절(調息)하여 목숨을 가두는 방법이 있다. 이를 폐기조천(閉氣朝天)이라 한다. 약 하나 쓰지 않고 홍암은 폐기조천한 것이다. 검시를 맡은 의사는 "사인이 없는 사망이므로 가히 성사(聖死)라 하겠습니다. 범인(凡人)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라고 검진하였다.
홍암은 자기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를 세 가지로 밝히는 유서 「순명삼조」(殉命三條)를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다.
제1조: 죄악이 무겁고 材德이 없어서 능히 단군 神族을 건지지 못하여 오늘의 모욕을 당 하매 대종교를 위하여 죽노라.
제2조: 대종교를 받든지 8년에 발고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주신 한얼님 은혜를 갚지 못 하매 한얼님을 위해 죽노라.
제3조: 이 몸이 가달길에 떨어진 인류의죄를 대신으로 받았으매 천하를 위하여 죽노라."
나철의 죽음은 소크라테스의 죽음도 아니고 예수의 죽음도 아니였다. 아마 인류 역사에 전무후무한 방법으로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거두었다. 「순명삼조」를 요약하면 ①인류의 신앙인 대종교를 위하여, ②우주의 참 주인이신 한배 하느님을 위하여, ③천하의 영장인 인류를 위해서이다.
우리는 여기서 죽음을 보는 동서양의 차이가 대단히 다른 것이 있지 않나 한번 생각해 본다. 이승과 저승이란 말 그대로 죽음이란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기는 정도이지 서양같이 심연(abyss)이나 무(無, nonbeing), 절망같은 것이 아니다. 나철은 살아 이루지 못한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죽어 이룩할 수 있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조천이란 말 그대로 한울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곧 죽어 신선(神仙)이 된다고 믿는다. 살았을 때보다 더 큰 위력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산 자와 죽은 자는 단절이 아니고 연속이다. 같이 어울려질 수 있다고 믿는다. 죽어 아무 할 일 없다고 생각했다면 일본을 4번이나 건너 다니며 나라 찾겠다던 홍암이 그렇게 무책임하게 생명을 끊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사일여(生死一如)의 사상이야말로 그의 죽음을 이해하는 바른 태도가 아닌가 한다.
그가 삶을 사랑하고 살아 남은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한 태도는 그의 장례의식에 관한 「유계장사칠조」(遺戒葬死七條)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1. 현재 반도 땅에는 이 몸을 묻을 곳이 없으니 화장하여 깨끗이 하라.
2. 염습은 평소 입던 무명으로 하고, 관곽은 쓰지 말고 부들이나 갈대 자리로 하라.
3. 화려한 상여는 쓰지 말로 지게로 옮기라.
4. 부고를 내지 말고, 조상을 받지 말고, 손님을 청하지 말라.
5. 명정은 다만 姓名만을 써라.
6. 敎門의 형제 자매는 喪章을 붙이지 말라."
부측에는 유해의 재는 반드시 한얼님 산(백두산) 아래 총본사 가까운 땅에 묻어라. 특별히 가족들에게는 떠나간 뒤에 몸을 깨끗이 하고, 평안히 하고 곡도 하지 말고, 상복도 입지 말고 시묘 등 옛법은 다 폐하고 다만 복은 366일간만 입어라고 했다. 기제사에도 고기, 술은 쓰지 말고 밥 한 그릇과 찬 한 가지만 차려 놓고 신주 같은 것은 만들지 말라고 했다.
관혼상제 이것은 유교 풍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행사가 아닌가? 중요하다 못해 이것 때문에 국민경제가 파탄 지경에 이르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조선의 늙은이들은 자기들이 죽은 후에 자기들을 잘 모셔 주기를 바란다. 죽어서까지 자기 자아(Ego)를 연장하고 싶어서이다. 파라밋과 같은 이집트 파라오의 무덤, 진시황제의 무덥 같은 것들은 죽음 이후의 자아를 확장하기 위한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이 거짓 자아들의 형태들이다.
홍암은 철저한 자기 부정을 통해 죽어서 살은 것이다. 나라도 국적도 없는 상황에 살아 죽으니 죽어 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는 그의 「순명삼조」와 「유계장사칠조」를 통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구세주로 죽은 것도 의인으로 죽은 것도 아니다.
나라 죽인 죄인, 단군 한배님께 못 다한 죄인, 진리에 충실하지 못한 죄인으로 죽은 것이다. 제자들은 스승의 유언을 받들어 삼베나 무명으로 시신을 염하고, 부들이나 달대 돗자리 드응로 관 대신 쓰게 하고, 상여 대신 지게에 옮기게 하고, 화장으로 깨끗이 하여 백두산 밑에 그 재를 묻었다 그리고 천상천하에 신위는 단군 한배님 한분 밖에 모실 필요가 없다고 하여 신위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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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동스러운 역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