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S정책이란?
Sex,Screen,Sports의 머릿글자를 딴 것으로,
독재정권이 국민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시행한 정책.
당신은 알고 있는가?
대한민국의 첫 프로 출범 스포츠종목이 야구라는 것을.
1982년, 미국-일본에 이어 세번째 프로야구 출범국이었다는 것도..?
당시 GNP 2000불도 안되는 개발도상국 한국이
졸속 출범이라는 비난 속에서도
무리하게 프로야구를 출범시켰던 이유가 무얼까?
(▲위 사진은 본 글과 매우 상관 있음/29만원 밖에 없으신 그 분)
쿠테타로, 정치적 정당성을 갖지 못하고 불안하게 출범한
제5공화국.
전두환이 무자비한 광주학살(1980년)을 덮고 국론을 통일시킬 묘책으로
"스포츠"를 선택했다.
1. 프로야구의 출범
1981년 6월,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전두환이 프로스포츠 출범을 지시한다.
그 지시가 내려진지 불과 9월만에 프로야구가 출범하게 된다.
(▲프로야구 출범 첫날 시구중인 전두환)
이 때, 가장 애를 먹은 부분이 "연고지 결정"이었는데,
광주를 맡기로 한 금호가 이를 거부하자 우여곡절 끝에
"해태"로 결정된다.
워낙 졸속 출범이다 보니 출범당시 해태가 보유한 프로선수는 고작 14명,
타 구단의 반정도 밖에 안되는 인원이었다.
(그 중에 8명은 광주출신이 아니었음)
이런 해태의 성적은 프로야구 초반 하위권을 맴돌았다.
허나 이 선수들은 아직 5.18의 아픔이 가시지 않은 광주의 모습을 보며,
또 "꼭 이겨서 우리 한 좀 불어줘"라고 말하던
한 할머니의 한서린 말에 가슴 끝에서 울컥하고 올라오는
그 무엇인가를 느꼈다고 한다.
광주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선수들의 노력 끝에
1983년 해태는 첫우승을 이뤄낸다.
그 날 서울운동장에서 "목포의 눈물"이 울려 퍼졌다.
이 후 해태는 19년간 9번의 우승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며
광주시민들의 한을 조금이나마 위로를 해줄 수 있었다.
2. 88올림픽 개최
올림픽이 국가 발전에 기여했다?
1980년 8월, 전두환은 서울에서 세지마 류조를 만난다.
(※세지마 류조 : 우익,박정희 시절부터 한일간의 가교 역할을 맡았던 인물)
전두환은 그에게 광주학살을 덮고 국론을 통일시킬 묘책을 구했고
세지마 류조는 그 해법으로 "올림픽"을 추천한다.
전두환은 이 아이디어에 크게 공감하며
주변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올림픽 유치에 집착하게 된다.
당시 올림픽을 치를 여건이 안되었던 한국의 실정을
잘 알고 있던 수석비서관들은 올림픽 유치를 반대했지만
전두환의 "무조건 유치시키라"는 엄명에
그들은 올림픽 유치에 열을 올리게 된다.
상대 경쟁국가는 일본(나고야).
일본은 4년전부터 올림픽 유치에 힘을 쓰고 있던 상황이었다.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유치단은
1981년 올림픽 국제 위원회 총회가 열리고 있는
독일의 바덴바덴으로 향하며
"유치 못할 경우 돌아올 생각말라"는 협박까지 듣게 된다.
이 때, 부정축재로 수감중이었던 박종규 전 청와대 실장도
국제 스포츠계 인물들과 안면이 있다라는 이유로
함께 동행한다.
절대적 수세 속에 한국 유치단에게 한줄기 빛과 같은
인물이 있었으니..
그 사람은
세계 최대의 스포츠 회장인
"아이다스 다슬러"였다.
다음은 당시 서울올림픽 유치위원 가운데 한명이었던
최만립 전 KOC 부위원장이 이 일과 관련해 한 말이다.
"유치도시 결정을 위한 투표를 닷새쯤 앞두고
호스트 다슬러 아디다스그룹 회장이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을 만나자고 했습니다.
저와 정 회장을 함께 만난 자리에서,
그는 서울올림픽 마케팅 대행을 아디다스의 자회사인 ISL에
맡길 것을 조건으로 한국 지지 운동을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그는 사마란치 이상 가는 국제스포츠계의 거물이었고,
우리는 다른 방안이 없었죠.
서울이 개최 도시로 결정된 뒤엔 약속대로 ISL이
서울올림픽의 마케팅 대행권을 차지했습니다.”
이 밀약의 영향으로 투표결과 서울 대 나고야, 52 대 27로
1988년 올림픽 개최지는 서울로 결정 된다.
하지만..
올림픽으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이 있었으니..
경제여건을 감안하지 않고 무리하게 올림픽 유치를 한
제5공화국은 엄청난 정치적 비용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군사독재 세력은 올림픽을 통해 민중들이
소유한 토지를 빼앗아 소수의 엘리트가 주인이 되는
기업도시로 서울을 만드는 기회로 이용했다.
(올림픽을 치르는 도시 서울은 화려하고
발전된 모습만 보여줘야 했다.
그리하여 미관상의 이유로..)
72만명의 주민들이 자기 집에서 쫓겨났고
거기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폭력배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구금됐다.
세입자들은 사전 공지도 없이 퇴거조치 됐고
노점상은 금지됐으며, 노숙자, 알코올중독자, 거지,
정신장애자들은 한데 모아져 수용소에 갇혔다.
이중 상계동 철거민들이 부천으로 집단 이주를 하게 되는데
이곳은 경인 고속도로변의 허허벌판.
그래도 이들은 희망을 잃지 않고 진흙탕위에 가건물을 짖고
보금자리를 마련하게 되는데
올림픽 성화봉송로 주변이라는 이유로 이마저 철거당하고 만다.
결국 철거민들은 성화봉송로에서 안보이게 땅굴을 파고 10여개월간
생활하게 된다.
이런 기가 막힌일들이 올림픽이라는 미명아래 자행되었다.
진실도 때로는 우리를 다치게 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머지않아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가벼운 상처이다.
- 앙드레지드 -
첫댓글 무섭네요..
귀신은 뭐하나...저런 놈들 안 잡아가고
ㄷㄷㄷ
스포츠 나 영화나 사실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부흥이 아니기 떄문에...뿌리가 튼튼한게 아니죠.. ㅆㅅㄲ들
못된놈........ 사이코패스.......
이런 면까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할 말 없게 만드는 대머리새끼군요. 올려주셔서 감사해요!!
정말 불과 20년전의 일인데....... 이런자료 너무 좋아요!!!!!!! 감사해요. 정말 아 시발놈...
아...정말 올림픽에 대해서는 몰랐던 사실이네요. 저 올림픽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봐야하겠네요.
저놈이랑 비슷한놈이 지금 우리 앞에...또하나 있으니....
전두환은 지가 정권을 잡고 싶어서 쿠테타 일으켜 대통령 된 놈이고, 이명박은 국민들이 뽑아줬다는게 문젭니다.
근데 3s중에서 첫번째 sex에 관한 얘기는 어디에있나요 ㅠㅠ
제목에 - 스포츠편이라고 되어있어요. 스크린이랑 섹스도 올라올 듯.. 휴, 너무 무섭다...
스포츠에 비해 비중이 적어서 빼놨어요^^;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전두환이 우민화정책의 일환으로 야간통금해제를 발표했고, 그동안 쌓였던 것을 토해내는 듯 많은 사람들이 밤거리를 활보하고 다니게 됩니다. 그로 인해 새로운 밤문화(=술,유흥업소등)가 열리게 된거죠.
하긴..따로 안올리셔도 될 듯.. 통금해제 이후로 시작된 밤문화도 그렇고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 성인 에로영화(내지는 호스티스 영화)가 붐이었잖아요. 다 이유가 있었군요. 이 ㅅㅂㄻ들.. 치가 떨린다.. 좋은 자료네요. 김멋쟁님 잘 봤어요.
미친놈 진짜 널 어떻게 죽여야하니
두화늬......그래서 내가 널 싫어해. 정말 몸서리 처지게 싫어
어린친구들이런 일을 알기나 할까...
어린친구들은 모르는 일일걸요~~이거 저도 한참 인터넷하면서 알게되었으니 말에요 귀신이 있긴 있나요? 저런놈은 안잡고 가고 있으니~~말에요
88올림픽에 이런 면이 있었다니........ 근현대사 공부 빡시게 해야겠단 걸 절실히 느끼네요. 자료 감사합니다 ㅠㅠ
와...무섭다 진짜...아직까지 살아있는게 정말 치가 떨리네요...퍼가요!
우웡 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저런거였구나...진짜 너무했다.
아 이거 근현대사 시간에 배웠는데 3s 정책만 있다는 것만 배웠어요 이렇게 자세히 알게 되네요 ㅆㅂ
박정희때도 어떻습니까? 경부 고속도로 위안부 할머니들 돈을 거기에 썻죠... 미래를 보는 눈이있다라는 수식어가 들리잖습니까? 하기 싫어 반대했습니까? 누군 모르고 반대했었냐구요? 그러니까 박정희가 영웅대접 받는겁니다 약올라서라도 정말 알아야하니다
3s 정책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진짜 미친다긔... 스포츠인들은 그래서 전두환을 그리워한다는 소리도 들었긔..그래도 전두환때는 좋았다며.;;; 스포츠에대한 투자가 이루어질때라 스포츠인들은 좋았지만... 목적이 불순한데 그걸 좋다고 그리워하는건 문제가 있다긔.......으휴,
정말 암흑시대였어요.. 그리고 그런 시대가 다시 도래할까봐 걱정되어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