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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왕후 약방집, 감문국 소도 솟대
국사교과서 심화학습 내용입니다.
대한민국의 뿌리는 삼한(韓)입니다.
삼한의 소도와 천군에 대한 내용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꼭 알아야 할 상식입니다.
고등학교 국사교과서 40페이지에 구약 성서의 내용(도피성)과 일치하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한편, 삼한에는 정치적 지배자 외에 제사장인 천군이 있었다. 그리고 신성 지역으로 소도가 있었는데, 이 곳에서 천군은 농경과 종교에 대한
의례를 주관하였다. 천군이 주관하는 소도는 군장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죄인이라도 이 곳에 숨으면 잡아가지 못하였다.'
저는 삼한의 감문국 소도의 솟대가 있었던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소도(미리, 대구공항의 터)에서 공군장교 생활을 하였습니다.
지금도 소도입구(동촌유원지, 해안)에 살고 있습니다.
에베레스트 산 중턱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셰르파에게 에베레스트 산이 익숙한 것처럼, 저에게는 삼한의 소도가 매우 익숙한 내용입니다.
저는 1987년부터 소도를 연구하여 지금까지 소도 5곳을 발견 하였고, 30여년 동안 1,000여 회 이상 가이드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사람들은 여전히 삼한의 소도에 대한 역사를 서양의 로마 역사보다도 더 낯설게 느낍니다.
삼한의 낯선 역사를 낯설지 않게 도와 드리겠습니다.
다음의 소도에 대한 글은 제가 태어나고 자란 저의 고향집 이야기입니다.
1. 감문국 소도(입구) 유적지에 서 있는 설명판의 글
제목: 허왕후 약방집, 감문국 소도 솟대
주소: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신리 521 (봉계 2길 12)
이 집터의 전설에 의하면, 이 곳은 삼한시대 추풍령을 오고가는 사람들이 이용하던 감문국의 소도(도피성) 입구로 솟대가 있었고, 수로왕비
허왕후가 약방을 시작한 집이다.
삼한의 명지였고 약방집이었던 이 곳을 조주용(가이드, 공무원) 장로가 매입 하였다.
2019년 김천 감문국(개령면 동부연당) 사적지 복원사업과 때를 같이하여, 이 집터에 묻혀있던 돌들을 찾아 내었다.
솟대에 사용된 돌, 사도 도마가 만든 머루즙 짜는 돌 절구통, 허왕후가 떡차를 말린 돌, 약방집에서 사용하던 돌 등을 전시 한다.
※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누가 19장 40절)
감문국의 가이드북을 보면, 이 곳은 봉산면(황금소면)의 사금 채취, 상금 2리 금화마을의 김해김씨 전설, 직동의 금방앗간, 추풍령 휴게소와
관련이 있다.
글쓴이: 김천 그루터기 나눔 대표 정명남
☆ 심화학습: 삼한의 감문국
삼한시대는 BC 400년경 시작되어 기원전후까지였습니다. (참조: 국립김해박물관 역사연표)
삼한은 78개의 작은 국가(소국, 군 단위 지방자치단체)였고, 마한 54국(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 진한 12 변한
12국이 있었습니다.
삼한의 감문국은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는 AD 231년(조분왕 2년)에 석우로를 보내어 감문국을 정벌 하였습니다.
이 때는 한국에 불교가 들어오기 141년 전 이었습니다.
불교는 AD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년) 한반도에 최초로 전래 되었습니다.
삼한시대 한반도에는 한자와 함께 유학사상은 있었으나 유교가 없었고, 도교(AD 624년 고구려에 전래)도 없었습니다.
삼한시대에 무속은 조직이나 경전이 없었고 개인적인 민간신앙으로 위세가 없었으나,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이 삼한시대의 종교를
샤머니즘(무속)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2. 솟대의 돌단은 전방후원분 모형
삼한시대에 감문국 소도 솟대의 돌들입니다.
이 곳이 삼국시대에 집터가 되었습니다.
이 돌들은 2천년 동안 가옥에 사용 되기도 하였지만, 삼한시대 솟대의 돌들이 지금까지 집터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삼한시대 레위지파 제사장들이 사용한 돌들의 특징은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않은 돌(여호수아 8: 30-31)입니다.
삼한시대 솟대의 돌들을 복원하니 전방후원분(앞에는 직선, 뒤에는 원형인 무덤)과 같은 모형이 되었습니다.
전방 위에는 다듬지 않은 넓고 큰 돌 한 개가 있는데, 제사장이 레위기의 방법대로 제사드린 돌단이며 강대상 이었습니다.
돌단 옆에는 북과 종이 걸려 있었습니다.
북은 솟대를 보고 온 죄인이 제사장에게 알리는 북입니다.
북소리를 듣고 나온 제사장은 죄인의 말을 듣습니다.
죄가 없다고 판결할 때는 종소리를 내었습니다.
그리고 소도에 있는 농토를 제공 하였습니다.
☆ 심화학습: 감문국의 영역
국립대구박물관에서 2005년 '영남 문화의 첫 관문'이라는 주제로 특별전을 열었습니다.
'김천에 뿌리 내린 최초의 작은국가 감문국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글(국립대구박물관, 통천문화사 발행, 2005, p51)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감문국의 구조와 영역은 사실상 현재의 자료로 추론하기 힘들다. 다만 당시 국읍과 읍락, 자연촌의 구조로 존재하였을 것이라는 일반론적인 추론을
대입한다면, 감문국은 현재의 개령에 존재했을 국읍을 중심으로 감천의 중ㆍ하류에 위치하면서 넓은 충적평야가 펼쳐져 있어 국읍의 형성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김천에 감문국이 있었던 역사적 사실은 문헌이나 고고학자료로 입증 되었습니다.
삼한시대 감문국 소도입구의 솟대가 봉산면 신리 521번지에 있었던 것은, 현재의 추풍령 휴게소가 지형과 교통 상황으로 현재 위치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허왕후 약방집, 감문국 소도 솟대는 삼한의 중심에 위치한 곳이며 추풍령을 넘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곳으로 있을 만한 곳에 있었습니다.
3. 솟대 위의 새는 비둘기 아니면 꿩
삼한시대 소도의 천군은 유태인 레위지파 제사장 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이 만든 삼한시대 때 솟대 위의 새는 제사용 비둘기였습니다.
제사장들이 한국에서는 비둘기를 잡을 수 없어서, 매사냥으로 잡을 수 있는 꿩을 비둘기 대신 사용 하였습니다.
꿩이 없을 때는 '꿩 대신 닭'을 사용 하였습니다.
삼한시대의 솟대를 복원작업 하면서, 김천에서 목공예를 하는 분에게 국사교과서에 나오는 소도의 솟대 사진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비둘기 모양의 조각품 3개를 주문하였지만, 새의 모양은 목공예가 마음대로 하라고 하였습니다.
솟대에 사용된 나무 기둥은 집터 안에서 고생한 대추나무를 베어 사용 하였는데, 나무에 상처가 많이 남아 있고 속 썩은 흔적이 있습니다.
삼한시대 약방집 약대추(씨알이 매우 작은 대추)의 후손으로 살아서는 천덕꾸러기였다가, 베어져 솟대에 사용되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 심화학습: 소도와 솟대의 새
초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 의하면, 솟대와 새는 삼한의 소도에서 유래 되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에 세워져 있는 솟대와 솟대 위의 새는 지방마다 모양이 다르고 의미도 각각입니다.
그러나 삼한시대의 소도와 천군을 알면 솟대의 원형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삼한시대에 소도를 다스렸던 천군의 종교는, 구약성서의 레위기에 따라 제사와 절기를 지켰던 유태교였습니다.
레위기의 방법대로 제사를 드릴 때 새는 비둘기였습니다.
4. 김수로왕과 머루의 원산지
저는 어릴적 인근 야산에서 머루와 다래를 따 먹었습니다.
머루는 한국의 자생종으로 생각 하였습니다.
그러나 알고보니 머루(포도의 일종)는 조지아가 원산지이고, 김수로왕이 한국에 가지고 왔었습니다.
머루는 성만찬에 사용 되었습니다.
김수로왕은 조지아 바투미에서 금거래소를 하다가 1세기 로마가 점령하자 초원의 길로 한국에 왔었습니다.
김수로왕은 김천시 봉산면 상금 2리 금화마을에 머물면서 금을 많이 확보하였습니다.
김해에서 금거래소를 하다가 금관가야의 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사도 도마가 한국에 왔었습니다.
blog.naver.com/story4006
사도 도마는 김수로왕의 안내를 받아 이 곳(감문국 소도입구, 김천시 봉산면 신리 521번지)에 왔었습니다.
사도 도마는 쇠로 만든 정으로 머루즙을 짜는 돌 절구통을 만들었습니다.
이 돌 절구통은 자연석에 홈만 파서 모양이 투박하고 매우 무겁습니다.
지금까지 이 돌 절구통은 미운 오리 새끼처럼 못난이로 남아 있었는데 이제는 유명한 백조가 될 수 있습니다.
☆ 심화학습: 돌 다듬는 쇠로된 정
삼한시대는 동양에 돌을 다듬는 쇠로 만든 정이 없었습니다.
AD 4세기 동양에 최초로 정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돌 절구통은 AD 42~48년 사도 도마가 한국에서 활동 할 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사도 도마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사용된 3개의 못으로 만든 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정으로 한국에서 만든 돌 조각 작품 3개가 있습니다.
영주시 평은면 강동리 산 87-3의 도마석상 히브리어 글자(알파벳 타우, 멤), 영남대학교 박물관에 있는 목자상과 성도상, 그리고 이 돌
절구통입니다.
5. 도마커피 (Thomas coffee)
삼한시대는 신구약 중간기와 같고, 소도는 도피성 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레위지파 제사장들이 한국에 와서 삼한의 천군이라는 지방 자치 단체장이 되었습니다.
삼한의 소도에서는 레위지파 제사장들이 레위기의 방법대로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켰습니다.
제사에는 유향이 필요하였고, 삼한시대에 유향과 향신료가 한국에 수입 되었습니다.
향신료 무역품 중에는 커피콩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커피콩은 군인들이 행군 할 때 씹었습니다.
김수로왕이 가지고 온 머루즙과 삼한시대에 수입된 커피콩의 이미지로 도마커피를 만들었습니다.
도마커피는 머루(포도)즙에 커피를 더한 것입니다.
커피와 머루는 나무열매이며, 옛날에는 약재였습니다.
쓴 약을 먹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달콤한 감초를 사용 하였습니다.
☆ 심화학습: 김천의 고대 무역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에 전시된 김천 송죽리 유적을 보면 비파형 청동검이 있는데, 영남의 첫 관문인 김천은 청동기 시대부터 무역의 관문
이었습니다.
김천을 관통하여 흐르는 감천은 중국에서 수입되는 감초(약방의 감초) 무역 때문에 붙여진 이름 이었습니다.
감로국은 군장(정치인, 군수)이 김천시 교동에서 다스린 국가였고, 감문국은 천군(종교인, 제사장)이 개령면에서 다스린 소도(죄인이라도 군장이
잡아가지 못하는 신성지역, 도피성)였습니다.
고대의 무역은 천군(유태인 레위지파 제사장)이 주관 하였습니다.
감문국은 향찰이 한자로 된 이름이고, 그 뜻은 '달콤한 감초를 수입하는 관문' 그리고 '감초를 무역 할 때 글을 사용하는 나라'입니다.
6. 약방집에서 사용한 돌
사도 도마가 김수로왕에게 인도 공주였던 허왕후를 중매 하였습니다.
허왕후는 인도 아유타국에서 아유르베다 의학을 가지고 한국에 시집 왔었습니다.
허왕후의 공주였을 때 이름은 스리라타나였습니다.
인도가 원산지인 대엽종 녹차를 한국에 가지고 왔었습니다.
허왕후는 추풍령을 넘어가고 오는 사람들이 방문하는 김천의 감문국 소도의 솟대가 있는 곳에서 약방을 시작 하였습니다.
허왕후는 김해에 있는 왕궁에 거주하면서 김천의 약방은 필요 할 때마다 방문 하였습니다.
김천 약방에는 허왕후 떡차를 건조시키는 돌, 유향을 가루로 만드는 돌, 커피콩을 부수는 돌 등이 있었습니다.
현재 복원작업으로 전시된 약방의 돌들은 삼한시대에 사용하였던 자연석입니다.
☆ 심화학습: 김천에서 출토된 유리 목걸이
국립대구박물관 고대문화실에는 김천에서 출토된 코발트 블루 유리 목걸이, 다크 블루 유리 목걸이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유리 목걸이는 재료 분석한 결과, 유리 원석이 인도에서만 생산되는 것입니다.
허왕후가 인도에서 시집 올 때 가져와서 김천 약방집에서 선물로 준 것이 대물림 되다가, AD 4-6세기 고분에 들어 갔다 출토된 유리
목걸이입니다.
7. 김천의 감문국 소도와 초막
김천(金泉)이라는 지명은 '금을 퍼올리는 샘'이라는 뜻입니다.
금을 채취하는 방법으로 사금 채취 밖에 없었던 시대에는, 김천이 황금을 많이 채취 할 수 있는 세계 유일한 곳 이었습니다.
지질시대에 대륙의 강물이 추풍령을 넘어서 경상분지의 육성층 퇴적암이 되었습니다.
이 때 가벼운 흙은 추풍령을 넘어 멀리 가고, 무거운 금은 추풍령을 끼고 있는 봉산면에 남았습니다.
봉산면의 옛 이름은 황금소면이었고 추풍령에는 황보, 금보 마을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종살이 할 때 금 심부름(황금 무역)을 하였기 때문에, 이집트를 탈출 할 때 금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 금으로 모세가 법궤(언약궤)를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함께 광야생활을 하였습니다.
광야생활을 기억하는 절기가 초막절이고, 유태인은 지금도 초막절에 초막을 짓습니다.
유태인의 초막절과 한국의 추석은 같은 날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삼한의 레위지파 제사장들이 레위기의 방법대로 절기를 지켰기 때문입니다.
감문국 소도입구의 솟대를 복원작업 하면서, 솟대 옆에 초막을 지었습니다.
☆ 심화학습: 허왕후 떡차
대구한의대학교 박물관은 한의과 대학을 중심으로 성장한 대학 특성과, 전통 약령시를 지닌 대구의 지역적 특성을 살리기 위하여 1995년 개관
하였습니다.
저는 대구약령시 한의약박물관을 수시로 가서 관람하고 있습니다.
저는 대구 도시농부학교에서 3년간 유기농 수업을 받았고, 다도대학원 2년간 수업 후 허왕후 떡차를 만들었습니다.
《추가 기록》
※ 이제부터는 소도를 모르면 지나가던 소도 웃습니다.^^
자세한 내용을 이메일이나 1:1 카톡으로 드립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바라며, 이 글을 전달(공유) 바랍니다.
※ 찾아 오시는 길
김천은 대한민국의 중심에 위치해 있으며, 삼한시대부터 현재까지 한국에서 접근성이 가장 좋은 곳입니다.
• 승용차: 경부고속도로 추풍령휴게소 IC에서 9Km, 김천 lC에서 4Km.
• 대중교통: 김천역에서 5Km, 봉계 가는 시내버스 15분 간격 (버스 종점에서 100m)
• KTX 김천구미역에서 12Km.
※ 관람방법
• 감문국 소도의 솟대는 허왕후 약방집에 들어가지 않아도 담 밖에서 관람 할 수 있습니다.
• 예약하고 허왕후 약방집에 들어가서 도마커피와 허왕후차를 맛 볼 수 있습니다.
• 김천시 감문국 유적지는 의성군 금성면에 있는 조문국 유적지와 연계하여 관람하면 좋습니다.
• 위의 내용을 초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 고대문화사 종교에 넣어 교육하여야 합니다.
삼한은 벼농사가 가능한 온대지역에 유태인 레위지파 제사장들이 와서 정착(소도)하면서 전 국민이 농경의 절기(5월, 10월)를 지켰습니다.
도피성(소도)이 있었던 나라는 세계 역사상 이스라엘과 삼한 뿐입니다.
삼한의 소도와 천군을 알아야 한국인의 정체성을 확립 할 수 있고, 대한민국의 고대문화를 깊이 알 수 있습니다.
2019. 11. 17.
대구세계문화엑스포 이사장 조국현
010 4391 4006
첫댓글 허황옥의 이름은 누가 지어 주었는지, 왜 허씨인지가 궁금합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김해 허씨는 허황옥(스리라타나)의 성씨를 따라 김수로왕의 둘째 아들이 계승합니다.
즉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는 같은 조상입니다.
참고로 김해허씨에서 인천이씨가 나오는데,
저는 인천 이씨의 분파인 흥양(고흥) 이씨 입니다
@예수님은 내 임금님
龜何龜何(구하구하) 거북아, 거북아
首其現也(수기현야) 머리를 내어라
若不現也(약불현야) 만약 내어 놓지 않으면
燔灼而喫也(번작이끽야) 구워서 먹으리
●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에 기록된 원문에는 노래의 제목이 구지가가 아니라, 영대왕가(하나님을 맞이하는 노래)입니다.
* 구지봉에서 흙으로 예배당을 지으며 노래한 찬송가였습니다.
구하소서 구하소서 구원하여 주소서
머리되신 성령이여 나타나시 옵소서
만약에 주님이 나타나지 않으면
지옥불에 태워지고 마귀밥이 됩니다.
@예수님은 내 임금님
해석이 그럴듯해 보입니다.
@갈렙 고대에 기독교가 불교로 넘어가면서 얼마나 많은 역사왜곡이 있었는가는 우리 후손이 밝힐 일 입니다.
@예수님은 내 임금님 진실을 밝히는 일은 중요합니다.
저는 왜 영주 도마상의 두상이 잘려져 나갔는지, 또 암석 상부에 다섯개의 구멍이 나 있게 되었는지 밝혀야 한다고 봅니다.
@갈렙 맞습니다.
저는 진실을 진실대로 밝히기를 원하는 사람이지 조금도 미화하거나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길 원하지 않으며
있는 사실 그대로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내 임금님 사실 구지가에서 번작이끼야를 구워먹을래라고 해석한 부분은 지나친 의역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ㅎㅎ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너그럽게 양해 부탁드립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감사합니다.
조장로님 본인이 그렇게 하길 원합니다.
조 장로님은 이 사역을 하는데,
홍보 차원에서도 전화번호를 남깁니다
아주 갈렙과 이정대가 완전히 성골이요 진골이라서 남들이 알지 못하는 아주 내밀한 비밀을 알고 있는 듯이 서로가
자화 자찬을 하면서 역사가로 나가고 있으니 모르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나아가기에 영이 어린 자들은 모두가 미혹이 되는 상태인 것입니다 과연 우리나라에 도마가 왔을까요? 도마가 올 정도라면 왜 바울은 오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왜 베드로는 오지 않았을까요? 억지로 짜 맞추려고 노력을 하지만 성경의 모든 말씀은 지금 현재 이루어
지고 있는 것을 설명하기에 역사와는 무방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