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식, 삼식이
(권 오 신)
'삼식(三食)'을 국어사전은 ‘아침, 점심, 저녁의 세 끼 식사’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이’라는 글자 하나를 덧붙였을 뿐인데도 그 말은 이상하게 비약되어 변질되고 만다. 국어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이 말은 바로 ‘삼식이’다.
삼식이, 이제는 은퇴하여 삼시 세 끼 아내가 차려주는 식사에 의존하는 남편들을 농조로 하는 말이라고 나름 정의해본다.
누가 지어낸 말인지 모르겠지만 정작 아내되는 사람들은 그런 말을 대놓고 쓰지는 않는 것 같다. 그래도 에둘러 하는 그들의 말 속에 은연중 그 삼식이에 대한 불편함이 서려 있음을 삼식이라는 말을 알고 있는 삼식이는 어렵지 않게 간파한다.
어떻게 삼식이로 지내게 되었는지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일 수 있다.
마땅히 집밖을 나설 일이 아주 드물다거나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해서일 수 있다. 성격상 밖으로 나다니는 것이 귀찮아서일 수도 있고 집에 머물면서 나름대로 의미있는 일을 하는 것이 좋아서일 수도 있다. 그 밖에 복합적인 이유로 삼식이로 지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내가 그런 삼식이 자신에게 불평을 할 때 '밖에서 먹는 음식은 아무래도 당신이 해주는 것만 못하다'며 이유를 대는 경우도 있다. 사실일 수도 있지만 아부성 핑계일 수도 있다.
이유야 무엇이든 삼식이 당사자는 어떻게든 불명에스런 그 상황에서 탈출하고 싶어하지만 그게 결코 녹록하지 않다.
나도 삼식이다, 삼식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부터.
누가 삼식이를, 하는 일 없이 빈둥대며 쓸데없이 잔소리만 늘어놓으며 부아질이나 하는 잔소리형, 집에 머물기는 하지만 별말 없이 아내의 말을 따라주는 순종형, 아내의 심기를 살피며 가끔은 청소 등 가사도 거들어주는 도우미형,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면 거부감 없이 해치우며 아내의 체면이 손상되는 일이면 서슴없이 대신해주는 솔선형 등으로 나누었다고 가정해본다.
그렇다면 나는 위의 어디에 해당될까.
일단 잔소리형은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다. 그렇게 간이 크지 않다.
말하기는 낯간지럽지만 아주 후하게 점수를 주어 나는 스스로를 솔선형일 수도 있다고 억지를 부려본다.
물론 하루아침에 그리 되지는 않는다. 나름대로는 노력도 해야 한다.
때로 통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는 아내가 나를 피곤한 삼식이라 생각하지 않도록 가끔은 선수를 치기도 한다. 가령 아내가 오늘은 허리가 좀 아프다거나 몸이 으스스하다는 티를 내면 일단 누워 쉬도록 하고 만약 그때가 식사후라면 앞치마를 두르면서 설거지는 내가 하겠다는 뜻을 내비친다. 또 ‘음식물 쓰레기 냄새가 심하네’라고 하면 즉시 밖에 내다버린다.
물론 그 얼마 뒤부터의 설거지나 음식물쓰레기 처리는 차츰 내 차지가 되어간다. 따지고 보면 제 꾀에 제가 넘어가는 꼴이다.
이런 식으로 지금 내가 하게 된 일은 삼시 세 끼 후 설거지, 쓰레기 분리수거, 식전과 저녁 두 차례의 집안 청소, 매주 한 차례의 이불 널어 말리기, (아직 세탁기를 조작할 줄 모르므로) 세탁 후 널어 둔 마른 빨래를 대강이라도 개켜 제자리에 갖다 놓기, 김장때면 배추 손질 등 힘든 일 거들어주기 등이다. 몇 달에 한 번씩 하는 대청소는 주로 아내가 계모임을 하는 날에 감행한다.
이만하면 세 끼 밥 정도는 얻어먹을 수는 있지 않나 생각은 하지만 아내의 생각도 꼭 그럴 것이라고 장담은 할 수 없다.
어떤 근거에서 혹은 나의 어떤 면을 보고서인지 혹자들은 나를 애처가라고 하기도 한다. 나는 그것을 좋게 받아들이기 보다는 아내의 말이나 고분고분 잘 들어주는 나의 사내답지 못함과 쪼잔함을 빗대어 조롱삼아 하는 경우라고 나는 생각해 왔다. 그러나 지금은 그 말의 참뜻에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아내는 초등학교 5학년 정도의 어린 시절부터 부엌살림을 맡아했다. 어머니, 안주인의 신병 때문이었다. 엄한 아버지 시중드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살림이 넉넉지 못하여 학교 공부도 높이 할 수 없었고 나와 결혼할 때까지 살림을 도맡았다. 가끔 푸념을 하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라고 나는 집작한다.
어쩐지 피곤하거나 반찬 만들기가 귀찮을 때는 날 들으라는 듯 말한다. ‘오늘 저녁에는 또 뭐해 먹을꼬, 이제는 때 될까 겁이 나.’ 이어서 덧붙이는 ‘언제까지 이래야 돼…….’ 라는 말엔 남들처럼 며느리 없음을 한탄하는 맘도 들어 있음이리라. 요즘 세상에 며느리 덕을 보고 사는 시어머니가 몇이나 되랴만…….
어떨 때는 이러기도 했다. ‘내가 죽고 나면 당신 손수 때를 해결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지금부터 조금씩 해보소.’ 말은 맞는 말이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생각은 하고 있다.
어쨌거나 모두 삼식이인 내가 스스로 뜨끔해지는 말들이 아닌가.
비록 삼식이기는 하지만 맘 편할 때도 가끔 있다. 아내가 볼일을 보러 나가는데 돌아올 시간이 식사 시간 후일 것으로 예상되거나 친구들과의 계모임이 있는 경우 등이다. 다행인 것은 그렇게 나가면서도 밥은 솥에 있고 반찬은 어디에 있다는 말을 지나가는 말처럼 해주고 간다는 것이다. 왠지 모르게 아무 말도 없는 경우는 어렵사리 라면을 찾아 끊여 먹거나 이래저래 알아서 대충 먹지만 그래도 편하기는 매일반이다. 집 부근에는 식당도 많지만 나가려면 옷이라도 따로 걸쳐야 하니 맘을 접는다.
제법 여러 번이던 모임을 하나 둘 그만둘 때 아내는, 친구분들과 만나면 친분도 두터워지고 세상 돌아가는 소식도 듣고 좋을 터인데 왜 그러느냐고 말하지만 실상 속마음은 그게 아닌 걸 나는 다 알고 있었다.
가뭄에 콩 나듯 어쩌다 내가 나가고 없을 때 아내는 끼니를 대충 때우곤 하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식은밥에 손에 잡히는 아무 반찬이나 한두 가지로, 그것도 어떨 때는 그냥 서서 먹기도 한다는 것을.
내가 들으라는 듯 아내가 그런 말을 할 때 나는 기회다 싶어 반격을 할 때가 있다. ‘내가 집에 있으면 귀찮기는 하지만 당신도 때는 제대로 챙길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거 보란듯 내뱉는 그 말에 수긍은 하지만 그래도 내가 있으면 신경 쓰인다고 아내는 강변한다.
얼마 전, 한 방송에서 들은 이야기다.
부부가 같이 사는 60대 이상 주부들을 대상으로 ‘어떤 남편이 좋은가’라는 취지의 설문조사를 하였다면서 조사 결과를 이야기해 주었다.
용돈을 충분히 주는 남편, 외식이나 여행에 자주 동행하게 해주는 남편, 아내의 일을 잘 도와주는 남편, 성격이 자상한 남편 등 여러 ‘좋은 남편’을 꼽았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말하는 조사 결과는 충격이었다. 좋은 남편으로 가장 많이 꼽은 것이 ‘집에 없는 남편’이라는 것이다. 그 말이 나오자 현장에 있는 모든 이들이 박장대소를 하며 환호까지 하는 건 또 뭔가. 그것을 바꾸어 말하면 밖으로 나다니며 아내한테 끼니 걱정 같은 건 시키지 않는 남편이 가장 좋다는 말이 아닌가. 나도 따라 웃기는 했지만 이게 꼭 웃을 일인지 씁쓸하기도 했다.
이런 남편에게는 존대까지 써서 ‘영식님’이라고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나는 그런 영식님이 될 수 있을까, 절대 불가능이다.
사식○○, 오식××이란 험한 말도 있다고 하는데 단언컨대 나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삼식이’는 확실하다.
‘삼식이라 해도 좋다. 건강하게 늙게만 해다오!’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