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학창시절은 눈물겨웠다.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가 불편한 오천균(50)씨는 악착같이 학교를 다녔고, 그렇게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갔다. 죽향초(55회)를 졸업하고, 옥천중(20회)를 나와 대전고등학교, 충대 법학과를 다닐 때까지 그는 고향인 군서면 월전리에서 그 먼길을 통학했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말도 못했죠.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옥천역까지 걸어가서 기차를 타고 학교에 갔고, 학교가 파한 후에는 걸어서 대전역까지 가서 기차를 타고 오면 거의 새벽 1시에서 2시가 됐죠. 하루 4시간 정도 자면서 학교를 다녔지만, 그 때는 그 길밖에 없었어요. 찢어지게 가난해서 하숙할 돈도, 자취할 돈도 심지어는 버스를 탈 돈까지 아껴야 했으니까요.'
흔히 고등학교나 대학교에 진학하면 떠나는 출향인들에 비해 그는 제법 고향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대학 졸업 즈음까지 집에서 통학을 했으니 말이다. 그는 5형제를 남부럽지 않게 키우며 고생한 어머니께 늘 감사하다고 말했다.
◆유명한 4형제
큰 형 오항균씨는 지난달 11일 육군 정보사령관에 취임한 별 두 개의 장성급이고, 둘째인 오경균씨는 대전에서 자영업을 한다. 셋째인 오천균씨는 대전에서 변호사, 넷째인 오창균씨와 다섯째 오 균씨는 공공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오천균씨는 '형제들 하나같이 어려웠던 가난한 가정환경이 열심히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부추긴 것 같다'라고 말했다.
'저는 학교다니면서 맨날 꽁보리밥을 싸 갔어요. 그 당시에는 그게 창피해서 보리밥 위에 쌀밥을 엷게 덮어서 쌀밥인냥 만들어서 고추장과 참기름으로 막 비벼 먹었어요. 형이나 동생들도 그랬겠죠. 그만큼 어려웠고, 그것은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원동력이 된 것 같아요. 지금 형은 군 생활을 하니까 자주 못 오고, 둘째형부터 막내까지는 모두 대전 인근에 사니까 금방 모이죠. 고향을 떠났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고향에 어머니(정분규·72세)가 계시니까 한 달에 두 번 정도 찾아뵙죠.'
◆기억, 그 파편을 주워담으며
'초등학교 다니면서 서화천을 자주 헤엄쳐 다녔어요. 그 때 옷과 가방을 다 집어던지고 알몸으로 천을 건너오면, 어른들이 그 옷과 가방을 갖다 주곤 했어요.'
'옥천중학교 다닐 때 장용호 장학금을 받고 다녔어요. 그 때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저도 기회가 된다면 모교에 장학금 기탁을 하고 싶습니다.'
'그 당시 고등학교 성적이 좋아 서울대에 가려고 했었는데, 충남대 사회계열 수석으로 입학했어요. 참 여유있게 학창시절을 보냈어요. 그래서 뒤늦게 사법고시에 합격했지만.'
'33살에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청주법률공단에 3년 동안 있다가 92년에 대전 선화동에서 변호사 개업을 한 것이 시작이에요.'
고향이 본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고 마지막으로 물었다.
'고속버스나 기차를 타고 고향에 점점 가까워지면 마음이 참 따뜻하고 포근해져요. 어딘가 기댈 곳이 있다는 것,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이 살아 숨쉬고, 많은 사람들이 떠오른다는 것, 그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어요. 너무도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의 조그만 여유, 숨통이 바로 고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대전에 있는 중학교 동창 위주로 청옥회라는 모임을 구성해서 두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갖는다는 오천균씨는 짧은 시간 고향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56회 강종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