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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동방 사람들 중 가장 훌륭한 자였고, 당대에 있어 최고의 의인이었다고 볼 수 있으며, 다른 그 누구보다 하나님의 자랑이었던 욥도 인간인 이상 어느 정도는 부족하고 연약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음을 욥기의 뒷부분인 38장, 40장에서의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만..
어쨌든 욥의 사례는 이 험악한 세상에서의 한 인생에 있어 얼마나 큰 고통과 위기들이 닥칠 수 있는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지어는 가장 가까이에서부터의 고통과 충격과 절망들이, 시험과 방해와 혼잡들 등이 계속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어느 정도로 믿음이 진실되고 치열하며 견고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러한 대단한 믿음의 사람일지라도 악한 세력들의 공격들과 결코 별개일 수 없다는 사실과 함께 이 험악한 세상에서 연약한 육신의 몸을 입고 사는 동안 어느 정도로, 어디까지 고난을 당할 수 있고 얼마나 심각해 질 수 있는지도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인데..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고 치열한 믿음의 몸부림들과 함께 그것이 끝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반드시 합력하여 선이 된다는 실제를, 게다가 얼마나 놀라운 반전과 역전들이 될 수 있는지도 잘 보여 주는 실례인 것입니다..
특히 그러한 시련들에 있어 반드시 죄악들 때문이거나 하나님의 어떤 징계들이나 진노들이나 심판들의 성격, 차원이 아닌 경우도 있음을 보여 주고 있고, 무엇보다 악한 영적 세력과 대적들이 그 배후에서 어떤 식으로든 생각 이상으로 직간접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음도 잘 알 수 있게 하며..
더 나아가 바로 그러한 때에 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조금도 모르시지 않음을, 실상 아시면서도 그냥 그대로 두실 때가 있음을, 진정 하나님의 더 큰 뜻과 영광, 훈련과 연단, 섭리와 계획에 따라 우리 인생들에게는 잠시 가리시거나 잠잠하시거나 스스로를 숨기실 때가 있음도 잘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가장 악한 세력들도, 가장 절망적인 상황들도, 게다가 온 세상과 모든 인류들 뿐 아니라 한 인생의 모든 생사화복과 희로애락 등도 모두가 결국은 하나님의 손에 있고..
특히 믿음의 백성들에 있어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않으시며,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면, 하나님의 뜻하시고 필요하신 시간이 되면 기적 이상으로 해결될 뿐만 아니라 짐작도 못할 연단과 단련들이 됨을, 상상 이상의 역전과 예비하심들도 있게 됨을 잘 보여 주는 것입니다..
실상 욥에 있어서의 그러한 모든 일과 실상들, 그 속에서의 인고와 역전들, 또한 그를 가능하게 하고 감당할 수 있게 한 믿음과 이치들마다 원론적으로는 구약과 신약 성경 등 모든 곳들에 있어서, 또한 모든 믿음의 선배들에 있어서도 결코 다를 수 없는 것이고, 특히 그 누구보다 오늘날의 우리들에 있어서야 말로 전적으로 다를 수 없는 것으로..
아예 근원적으로는 그 개념이나 존재 자체가 구약과 신약 시대뿐 아니라 모든 시대와 나라들을 넘어, 심지어는 천지창조와 창세 전, 세상 끝 날과 부활, 영원에 이르기까지 잠시라도 분리, 별개, 변개이실 수 없는 반면 언제나 함께 이시고 그 위치와 역할과 권한에 따라 완벽하게 조화되시며 완전하게 하나되시어 한 뜻을 이루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으로 인한 일종의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인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이며, 그 역할과 조화와 역사들에 따른 실제와 경험과 성취들인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정하시고 칭찬하시며 감당하게 하시고 역전되게 하시며 믿음의 본으로 삼으시는 그러한 욥이야 말로 모든 주권과 통치와 섭리의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 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구약의 우리 믿음의 선배들과 권속들이 오실 메시야를 믿고 구원에 참예케 되고 누리게 될 수 있도록 아담과 하와 때부터 미리 구주 예수님에 대해 보이시고 안내하시며 연결될 수 있게 하신 여자의 후손에 대한 계시, 다양한 모양의 피 제사와 희생 제물들, 유월절 어린 양, 모세를 통한 장대 위의 놋뱀, 회막, 반석, 제사장들, 제사장과 선지자 역할을 했던 믿음의 선조들 등과 같은 다양한 예표와 모형과 그림자들, 약속과 계시와 상징들 등을 통해 말 그대로 오실 메시야를 믿고 구원에 참예케 된 자인 것이고..
뿐만 아니라 원론적으로는 욥기 1장 5절에서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라고 증거되어 있는 말씀에서도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것이듯이 마찬가지로 그와 같은 방법과 통로들을 통해 마치 오늘날의 우리들이 날마다 순간마다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의지하며 그 이름으로 기도하고 찬미하면서 바로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의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과 은혜와 실제들을 덧입어 죄악들이 아닌 살아 있고 깨어 있는 말씀의 신앙이 될 수 있는 것이듯이 근본적으로는 똑같이 그 욥도 언제나 죄악들과 싸우고 범한 죄악들에서는 자복하고 돌이키면서 다른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가까이하는 살아 있는 믿음과 함께 날마다 순간마다 하늘의 힘과 은혜들을 누렸던 자인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직접적, 경험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시자 구주 예수님 이름에 약속되신 분이며 단적으로 말하면 말씀의 영이신 성령님의 시공을 넘는 하늘의 힘과 은혜와 실제들을 덧입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본질적으로 그러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 자체가 바로 말씀이시고 오직 말씀으로 하나되시어 말씀과 함께, 말씀대로 모두 실행하시고 다 이루시는 분이라는 사실이야 말로 언제라도 잊어서는 안 되는 모든 근본이자 원리인 것이며..
사실상 오늘 본문의 욥에 있어서의 모든 믿음과 칭찬의 이유, 반전과 최후 승리의 근거도 하나로 얘기하라면 다름 아니라 욥기 처음부터 끝까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이듯이 비록 육신의 몸을 입고 있는 한 인간으로서의 연약과 부족과 한계들은 없을 수 없었다고는 하더라도 그렇지만 단 한 번이라도 하나님을 비방하거나 부인하거나 대적하기보다는 오히려 완전히 반대로 그 누구보다 신실하고 깊었던 제대로 된 믿음, 곧 본질적으로는 말씀의 신앙, 말씀대로의 치열하고도 절실한 몸부림들인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욥과 같은 사례와 증거의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어떤 옛날이야기를 재미삼아 들려주시고 싶어서 기록케 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소중하고..
실상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욥을 통해 오늘날도 또 다른 모양으로 그리 크게 다르지 않거나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더 열악해 졌다고도 볼 수 있는 험한 세상, 버거운 상황과 환경들, 사탄과 음부의 세력과 공격들, 참으로 별의 별 일들이 다 있을 수 있는 우리 인생들, 사실상 그 누구보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있어서, 게다가 진정 다른 사람들이 아닌 오늘 이 말씀을 접하고 있는 이 시간 바로 나 자신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 원하시는 뜻이 있음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 이 시간 나의 작은 고민들부터 엄청난 문제들, 심지어 절망적이고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들, 게다가 사악한 세력과 원수들의 시험과 공격들일지라도, 아골 골짝과 빈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한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도 모르시지 않을 뿐 아니라 살아 역사하시는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 이상으로 더 크시고, 순간순간 보이지 않게 함께 하고 계시며, 도우시고 책임지시며 응답하시고 예비하시는 승리와 결국이 있음을 약속하시며 계시하시고 있는 것이며..
실제로 하나님의 백성된 오늘 우리 안의 그 어떠한 일과 상황들에 있어서도 원론적, 결과론적으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미 다 준비하시고 섭리하시며 예정하시고 인도하시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하시는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으로 그 하나님 아버지 자체가 조금만 따지고 봐도 그 무엇도 모르시거나 능치 못하심이 없는 전지전능의 하나님이신 것이기에 그러한 것인데 다만 우리 인생들의 입장에서는 그 무엇도 알 수 없는 것이고 하나님 아버지 보시기에 믿음으로 인한 최선이 중요한 것이자 최고이며 어떤 면에서는 전부인 것이기에 그 누구라도 각자의 자리와 상황과 형편들 속에서 믿음의 경주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며, 어떤 면에서는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오늘 이 시간 나 자신의 심령과 믿음과 영성을 보면서 현 상황에서의 하나님 아버지의 시간과 계획과 섭리와 과정과 역사 등을 어느 정도는 분별할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은 잘 살펴보면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욥처럼 그 정도까지 오래, 강하게, 참혹하게 시련을 당하게 하시지는 않고, 생각보다 많이 덜한 경우들이 대다수이며, 실상은 그 백성들에게 특수한 상황과 계획, 이후의 더 크고 놀라운 은혜와 복이 아닌 한 예상 못한 시련과 힘겨운 단련들보다는 기분 좋고 은혜 되는 하늘의 힘과 형통들을 가급적 더욱 풍성히 누리게 하시고 싶으신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본심이신 것이고..
실상 하나님의 백성들에 있어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살아 있는 믿음, 곧 본질적으로는 말씀의 신앙과 함께 그러한 능력과 흥왕의 경우들이 더더욱 많았음을 구약과 신약에서 뿐 아니라 2000년 교회사와 오늘 우리의 사역의 현장들에서도 보게 되기도 하는 것이며, 게다가 그러한 믿음의 끝은 영원한 생명, 영원한 나라인 것으로 사실상 단지 그것만으로도 상상하는 이상의 모든 행복과 축복인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더 부연하고 강조하면 현실적, 실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오늘 본문과 전후에서의 욥과 같이 실상 가장 완악해 질 수 있고 원망하기 쉬웠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로 하기가 자연스러웠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얼마든지 거세게 비방할 수도 있었으며, 어떤 면에서는 배도하기가 더 쉬울 수 있었던 갑작스러운 상황과 위기와 절망들 속에서도 욥은 끝까지 힘에 지나도록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누구보다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욱 말씀대로 치열하게 몸부림치고 있음을 군데군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인 것인데..
그렇듯 바로 오늘날 우리들에 있어서도 분명한 것은 욥처럼 그 어떤 시련과 상황들에서도 끝까지 믿음 잃지 않고, 하나님을 제쳐두거나 원망하는 등의 불신앙에 빠지지 않으며, 게다가 내 힘과 의, 세상적인 능력과 방식들에 함몰되지도 않고, 대신 진정 그와 반대로 오직 말씀대로 믿고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 힘들수록 오히려 더 치열하게 말씀대로의 하나님을 붙잡으며 말씀을 가까이하고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 곧 한 번이라도 더 말씀을 읽고 들으며 묵상하고, 말씀대로 행하며 말씀 그대로 증거하면서 나아가고 또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고 또 중요한 것이고, 긴급하고 또 긴급함을 보여 주고 증거하며 내포하고 강조하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와 함께 진정 그러한 살아 있는 믿음으로 인한 연단의 복들 뿐 아니라 합력하여 선이 되는 역사들, 참으로 하나님께서 순간순간 허락하시고 예비하시는 기적 이상의 더욱 놀라운 힘과 복들이 얼마나 실제적인지를 오늘 우리들에게도 알려 주시고 경험케 하시려는 것이고, 무엇보다 오늘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말로 다 표현 못할 시련들, 또는 절망의 시간들 가운데 있는 그 백성들에게 정말 상상도 못할 일들을 하실 수 있는 그 하나님의 힘과 역사들, 반전과 역전들이 그리 멀지 않은 하나님의 시간에 어느 정도로 까지 실질적으로 예비되어 있는지를 보이시는 것이며, 어떤 면에서는 약속하시는 것이기도 한 것이고..
더 나아가 그렇기에 이 험악한 세상에서 연약한 육신의 몸을 입고 사는 동안 그 어떠한 경우와 상황들이 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기다리고 인내하며 믿음으로 더욱 몸부림쳐야 함을 강조하시는 것일 뿐 아니라 틀림없이 말씀대로 도우시고 경험케 하시며 예비하신다는 것을 알려 주고 확신케 하시고, 정말 오래지 않아 하나님의 시간에 그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선한 것으로 실제로 누리게도 하실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사실 잘 통찰해 보면 다른 그 누구보다 바로 나에게, 좀 더 정확하게는 처음에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된 사랑, 이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 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순간순간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 붙잡으며 그 이름으로 기도하고 찬미하면서 바로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으로 인한 하늘의 힘과 은혜를 덧입어 말씀의 신앙, 말씀의 열정으로 결단하고 몸부림치게 되는 바로 나에게..
온 세상 천지만물, 흥망성쇠의 주재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미 욥의 사례처럼 어떤 식으로든 생생히 예비하시는 것이고, 그 결국은 다름 아니라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이 하나님의 세계, 믿음의 이치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또 다른 면으로는 의로운 시련의 차원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된 자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불신앙 가운데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고, 그렇게 좋아 보이는 믿음으로 서게 되었거나 준비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반대로 계속해서 죄와 세속과 정욕들 등에 헤매면서 반복하고 있다면 진정 욥의 사례, 곧 의로운 시련과 처절한 믿음, 그와 함께 하는 그 이상의 역사와 영광 등과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
그러한 죄악들, 불신앙들에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더욱 사랑하셔서라도 아비의 심정으로 하나님의 시간까지 광야 길을 둘러 가게 하시거나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들 등과 같은 징계들을 아끼지 않으시곤 하는 것도 하나님의 세계, 믿음의 세계에서의 또 다른 이치와 결과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며, 실상 그러한 경우와 사례들이 구약과 신약 성경에서 뿐 아니라 2000년 교회사, 오늘날 이 시대에 있어서도 생각 이상으로 많다는 사실은 잠시라도 간과해서는 안 되는 부분인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8~10)
('페북두란노서원66'중에서 인용과 추가/밀알서원)
*양범주목사의 '21세기 두란노서원'/2024년 12월 30일(월)2부/사진 조연진사모, 이미지 박원영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