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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에 대한 음모
느 6:1-9
1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그 나머지 우리의 원수들이 내가 성벽을 건축하여 허물어진 틈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함을 들었는데 그 때는 내가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였더라
2 산발랏과 게셈이 내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하고자 함이었더라
3 내가 곧 그들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이르기를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중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 하매
4 그들이 네 번이나 이같이 내게 사람을 보내되 나는 꼭 같이 대답하였더니
5 산발랏이 다섯 번째는 그 종자의 손에 봉하지 않은 편지를 들려 내게 보냈는데
6 그 글에 이르기를 이방 중에도 소문이 있고 가스무도 말하기를 너와 유다 사람들이 모반하려 하여 성벽을 건축한다 하나니 네가 그 말과 같이 왕이 되려 하는도다
7 또 네가 선지자를 세워 예루살렘에서 너를 들어 선전하기를 유다에 왕이 있다 하게 하였으니 지금 이 말이 왕에게 들릴지라 그런즉 너는 이제 오라 함께 의논하자 하였기로
8 내가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말한 바 이런 일은 없는 일이요 네 마음에서 지어낸 것이라 하였나니
9 이는 그들이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그들의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중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
공동체를 무너트리는 사탄의 전략은 언제나 리더를 먼저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실상은 나를 해하고자 함이었더라(1-3) 성벽을 다시 세우고 허물어진 곳을 다 보수하였는데 성문의 문짝을 달지 못한 것을 대적들이 들었습니다(1). 이때 산발랏과 게셈이 느헤미야를 제거하려는 생각으로 정치적 중립지역인 오노 평지에서 회담을 제안합니다(2). 느헤미야만 제거하면 성벽재건은 불가능해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언제나 지도자를 제거한 후에, 공동체를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이런 사실을 느헤미야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집중해야 되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원수들의 제안을 거절합니다(3). 느헤미야는 자기가 뭘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리더는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탄의 전략은 리더가 자기의 일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오노 평지 회담에 가지 않은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지 않은 이유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자신의 생명인 성벽 재건 공사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사탄의 방해가 있더라도 자신의 사명을 잊어버리지 않는 리더였습니다.
그들이 네 번이나 이같이 내게 사람을 보내되(4-9) 사탄이 집요하듯 대적들도 네 번이나 사람을 보내 회담을 제안합니다. 산발랏이 다섯 번째 만남을 시도할 때에는 봉하지 않은 편지를 보냅니다(5). 편지를 봉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편지의 내용을 읽어보게 한 것입니다. 편지의 내용은 “느헤미야가 유다의 왕이 되려한다”는 가짜 뉴스였습니다. 이를 퍼트려 느헤미야를 곤란하게 만들어서 이 소문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회담에 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6-7). 느헤미야는 신임 총독입니다. 왕이 부여한 행정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산발랏과 도비야에게도 얼마든지 자신의 권한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먼저였습니다(9). 만약 느헤미야가 그들이 만든 가짜 여론전에 대해서 기도하지 않고 같이 대항해 싸웠다면, 수많은 가짜 뉴스들이 재생산되고, 확대 해석이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안감에 사로잡히고 성벽 재건 공사에 집중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처럼 반응하기를 기다립니다.
적용: 사탄의 전략을 깨뜨릴 수 있는 방법은 사명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으로써 사명에 집중하고 있습니까?
사탄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지고 확장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교회의 거룩한 사역을 방해하고 영적 지도자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추한 방법을 동원합니다. 교회의 영향력이 더 이상 세상에 확대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을 대적하고 음모에 넘어지게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분별력을 갖고 넘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 설 교 >
내 손을 힘 있게 하소서
느헤미야 6:7-9, 마가복음 3:1-5 / 이성희목사
런던 장애인올림픽이 오늘까지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 선수들도 최선을 다해 경기하는 모습이 올림픽 못지않게 감동을 줍니다. 지난 주간에 사격 입사 경추장애 결선에서 금메달을 딴 강주영선수는 세계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그는 부인인 이윤경씨가 보조요원으로 함께 참여하여 기쁨이 배가 되었습니다. 손을 마음대로 못 쓰는 경추장애선수들에게는 실탄장전 등의 도움을 주는 보조요원이 함께 할 수 있는 규정이 있다고 합니다. 강선수는 대학생 때 사고로 경추를 다쳐 하반신을 쓰지 못합니다. 오른손도 쥐는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왼손으로 사격을 합니다. 경추에 장애를 입었는데 손을 쓰지 못합니다. 많은 경우에 뇌에 손상을 입으면 손을 쓰지 못하게 됩니다. 손이 아니라 다른 곳이 탈나도 손을 못 쓰게 됩니다. 손을 쓰기 위해서는 손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을 고쳐야 할 때가 많습니다.
손을 쓸 줄 안다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homo sapiens)라고 합니다. 생각하는 사람은 손을 쓸 줄 아는 사람(homo habilis)입니다. 손을 쓸 줄 아는 사람이 도구를 만들 줄 아는 사람(homo faber)입니다. 사람이 생각한다는 것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손의 숙련은 두뇌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손 솜씨는 두뇌에서 비롯됩니다. 아이들이 손으로 무엇을 만들고 색종이를 접는 놀이를 많이 하면 두뇌가 좋아집니다. 손은 두뇌의 거울이라고 합니다. 머리와 손은 항상 짝을 이룹니다. 결국 손은 마음의 대행자입니다.
손에 대한 전설이나, 신화나, 이야기 등은 한 결 같이 손을 힘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손재주도 알고 보면 손의 힘입니다. 손의 섬세함도 다 손의 힘입니다. 손은 그 자체로 힘이 있고, 또 손은 힘이 있어야 합니다.
영국의 ‘아서왕의 전설’에 의하면 수면에 선 아서는 호수에서 손이 올라와 명검 엑스캘리버(Excalibur)를 양도받고, 죽을 때에 부하 베디비아를 통하여 다시 호수에 던져서 돌려주자, 물속에서 나타난 손이 칼을 받아서 수면 밑으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호수의 손은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는 손입니다.
손의 힘이란 관리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무기로 변합니다. 권세를 얻기 위해 남을 할퀴고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의 목을 죄고, 쾌락을 위해 상대를 유혹하는 손이 됩니다. 반면에 손은 잘 다스리면 은혜의 도구로 쓰입니다. 우리의 손을 잘 쓰면 하나님의 손안에 든 연장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 그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손은 굉장한 힘이 있습니다.
베네딕트 수도원에서는 수도사들에게 매일 손을 쓰는 일 하라고 지시합니다. 손을 쓰는 일은 베네딕트 수도회의 전통입니다. 사람은 손을 써야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손은 그 자체로 많은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교도들의 신 가운데 보면 손이 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시바신은 천수천족(千手千足)의 신입니다. 인도나 네팔 등지의 힌두 신전에 가보면 신들이 있는데 힌두의 신은 많은 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교의 신들은 그 많은 손으로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한 손으로 모든 것을 주장하십니다.
야훼 하나님과 모세의 첫 만남을 보세요.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대화 가운데 모세에게 물으십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모세가 손에 있는 지팡이를 보이자 지팡이를 던져 뱀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모세에게 “네 손을 내밀어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그래도 모세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손을 품에 넣으라”고 하셨습니다. 모세의 손에 나병의 흔적이 생겼습니다. 모세가 놀라자 하나님은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와의 만남을 손을 가지고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손에 힘이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손을 힘 있게 하십니다.
느헤미야는 귀환기의 영웅입니다. 평신도로서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왕의 허락을 받아 돌아와 일을 시작했지만 방해자들이 있었습니다. 산발랏, 게셈, 도비야라는 사람들이 계속 일을 방해하며 맥 빠지게 합니다. 느헤미야의 일을 조롱했습니다. 산발랏의 다섯 번째 편지에 대하여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라고 청합니다. 이 기도는 느헤미야에게 가장 필요하고 절실한 기도일 것입니다. 세상에서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우리에게도 가장 절실한 기도가 바로 이 기도입니다. 우리도 이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세상은 하나님의 사람을 두렵게 하려고 합니다.
느헤미야 6:9 상반절을 보면 “이는 그들이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이라고 합니다. 방해자들이 느헤미야와 함께 일하는 사람을 두렵게 하려고 합니다. 겁을 주려고 합니다. 그들이 왜 두렵게 하고자 합니까? 실상은 자기들이 두려우니까 그 두려움을 느헤미야에게 돌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세상이 하나님의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야곱과 그 가족이 애급으로 이주하여 400년을 살았습니다. 오랜 후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나와서 히브리백성을 종이 되게 하여 심한 노역을 하게 하고 구박합니다. 왜 히브리 사람을 구박하는지 아십니까? 히브리 사람의 번성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히브리 사람을 두렵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왕이 “히브리 여인이 아기를 낳을 때 아들이면 죽이라”고 합니다. 왜 죽이라고 합니까? 히브리 사람이 두려우니까 죽이라고 합니다. 히브리 사람을 죽이라고 했는데 오히려 더욱 번성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급하여 모압을 지나게 되었을 때 모압의 발락왕은 선지자 발람에게 이스라엘백성을 저주하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왜 저주하라고 하였습니까? 두려우니까 그렇게 한 것입니다. 출애급기 15:15에는 “에돔 두령들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주민이 다 낙담하나이다”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급이 변방 사람들에게 큰 위협이 된 것입니다. 왜 그렇게 두려워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가데스에서 에돔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의 땅을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에돔의 밭이나 포도원을 해치지 않을 것이며, 우물물도 마시지 않고 지나가기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에돔 왕은 “안 된다”고 거절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돔을 경유하지 못하고 다른 길로 돌아서 가나안을 향했습니다. 에돔왕도 이스라엘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산상보훈을 말씀하신 예수님은 말씀의 권위가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는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가 서기관과 같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를 두려워한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위협하고, 돌로 치려 하고, 죽이려 하였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허위 죄목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였습니다.
신약에 나타난 초대교회는 끊임없이 외부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 그리스도인들이 두려우니까 그렇게 했습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을 사도행전에서는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말씀을 전하다가 공회에 잡혀 왔습니다. 공회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책잡을만한 것을 찾지 못하자 “위협하여 놓으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도들에게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위협하였습니다. 사실은 사도들을 두려워하여 위협한 것입니다. 스데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데반을 이기지 못하자 위협하였고, 그의 말에 반박할 말이 없자 귀를 막고 돌로 치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스스로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 출신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고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에게 얼마나 위협과 핍박이 많았겠습니까? 성경에는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한 자 사십 명이 그를 죽이려고 숨어서 준비”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고 합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바울의 생명 있는 복음을 두려워하여 그를 두렵게 하였던 것입니다. 생명을 전하면 누구나 이런 박해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의 허드슨 연구소의 연구원인 유대인 마이클 호로비츠의 관찰에 의하면 “유럽의 역사를 살펴볼 때 지금 박해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섬뜩할 정도로 늘어나고 있는데 이는 박해를 받았던 유대인들의 숫자에 버금가는 것이다. 해마다 전 세계적으로 15만 9천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순교하며, 2억에서 2억 5천만 명에 이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육체적 정치적 박해를 받으며 4억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마음 놓고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실정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편안하게 예수를 믿고 있으니 모두가 편안하게 예수를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순교는 옛날이야기가 아니고, 요즘에도 순교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재작년 한해에 2,175명이 순교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국제오픈도어선교회의 발표에 의하면 나이지리아에서 종교 폭동으로 2,000명이 순교하였습니다. 이라크에서 90명이 순교하였습니다. 파키스탄과 라오스에서 29명이 순교하였습니다. 이집트와 인도에서 각각 9명이 순교하였습니다. 순교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이교도들에 의하여 목숨을 잃는 것을 말하는데 지금도 이런 위협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도 살면서 예수 믿기 때문에 당하는 불이익과 억울함과 비난이 있습니다. 이런 불쾌하고 힘든 일들을 만날 때에 조금도 섭섭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순교에 비교해보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더구나 우리는 왜 그들이 예수 믿는 사람을 힘들게 하는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경외’란 말은 거룩한 두려움을 의미합니다. 경외란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 찬양, 우선순위를 올려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을 두렵게 하고, 위협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두려워하는 걸 섬김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깁니다. 하나님 섬김은 그냥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신앙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람을 섬깁니다.
열대 아메리카 산의 짖는 원숭이는 정글에서 가장 소리가 큰 짐승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소리는 가장 크지만 가장 힘세지는 않습니다. 동물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원숭이가 두려울 때 소리를 크게 지른다고 합니다. 두려운 개가 크게 짓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을 두려워하여 오히려 하나님을 사람을 두렵게 하지만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손을 힘 있게 해야 합니다.
느헤미야 6:9 하반절에는 “그들의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중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고 합니다. 산발랏의 다섯 번째 편지 내용에는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와서 페르시아 왕실에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전혀 근거가 없는 모함을 한 것입니다.
산발랏의 무고한 모함이 아닥사스다왕에게 전해질 경우, 느헤미야는 곤란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담대하게 나아갑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손을 힘 있게 해 달라고 합니다.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라는 간구는 ‘하나님께 담대한 마음을 허락해 주실 것을 소원하는 기도’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아말렉과 첫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준비되지 않은 오합지졸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잘 싸워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모세의 손이 높이 들렸기 때문에 승리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승리는 높이 들린 모세의 손 때문이었습니다. 모세의 그 손이 내려오지 않게 아론과 훌이 양쪽에서 모세의 손을 받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손이 높이 들리게 힘을 주셨습니다. 모세의 그 손은 승리의 손이었습니다. 모세는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불렀습니다. ‘여호와의 깃발’이란 뜻입니다. 모세의 팔이 높이 올라가 있어서 이겼지만 ‘모세 닛시’가 아닙니다. 모세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싸우셨고, 하나님께서 모세의 손을 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삼손은 성경에서 가장 힘센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나실인이었으므로 어릴 때부터 특별하게 성장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큰 힘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기 충동을 통제할 만큼 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특히 그는 여자에게 약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약점이었습니다. 둘째는 혼자서 성공하려면 실패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삼손은 항상 혼자서 싸웠습니다. 혼자 싸울 때는 멋지게 이길 수 있었지만 거대한 조직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습니다. 그가 사랑하던 여인 들릴라가 “당신을 결박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여러번 거짓으로 가르쳐 주었지만 결국 들릴라에게 천기누설을 하고 맙니다. 그의 머리털을 밀어버리자 그는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힘이 없어진 삼손의 두 눈을 뺐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다곤 신전에 데려가 재주를 부리게 하였습니다. 삼손은 두 기둥 사이에 서서 손으로 기둥 잡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신전의 기둥을 무너뜨리고 신전이 파괴될 때에 3,000명이 죽었습니다. 성경은 이 때 죽은 자의 수가 삼손이 살아 있을 때 죽인 자 보다 많았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삼손의 손을 힘 있게 하여 그가 원수를 갚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유에는 내과, 안과, 일반외과, 정형외과, 신경외과, 신경정신과 치유가 다 있습니다. 그 중에 한편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기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설에 의하면 손이 말랐던 그 사람은 원래 이름 난 석수였다고 합니다. 돌을 깨고 다듬는 직업을 가진 석수가 손이 말라 있으면 그는 직업도 잃어버리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을 보시고 “네 손을 내밀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에게 희망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는 손에 힘만 있으면 만사가 풀립니다. 다시 석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돈을 벌 수 있습니다. 마른 손이 풀려 손을 힘 있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희망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람의 손은 권위와 힘의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에는 여러 번 “손을 얹음”(laying on of hands)이란 말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손을 얹었다는 것은 여러 경우에 등장합니다. 첫째는 어떤 직분을 주어 임직할 때입니다. 둘째는 치유할 때입니다. 셋째는 범죄자를 돌로 칠 때입니다. 넷째는 짐승을 제물로 잡을 때입니다. 다섯째는 신약에서 축복할 때입니다. 이런 특별한 경우에 손을 얹은 것은 주의 종의 손을 힘이 있게 하신 하나님의 특별하신 배려입니다.
마가복음 16:18에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승천하시기 전에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하나님은 원수의 손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사람의 손에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치유의 권능을 하나님의 사람의 손을 이용하여 나타내 주십니다.
하나님이 힘 있게 하는 손은 주먹 쥔 손이 아니라 열린 손, 편 손입니다. 열린 손은 주먹 쥔 손보다 힘이 없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열린 손은 무엇을 담을 수 있는 그릇입니다. 열린 손은 평온함을 주는 손입니다. 열린 손의 반대는 주먹입니다. 주먹을 쥐고 있는 사람은 무엇을 억지로 움켜쥐려고 합니다. 주려고 하기보다 빼앗으려고 합니다. 주먹은 전쟁을 일으키며 항상 누군가와 대적합니다. 진정한 힘은 주먹을 쥐어서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열린 손으로만 얻을 수 있고, 열린 손으로 진정한 소원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주먹 쥔 손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줄 수 없습니다. 이미 쥐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힘을 얻으려면 손을 열어야 합니다. 손을 쫙 펴야 합니다.
한국인의 손은 기계보다 정밀한 손이라고 정평이 나 있습니다. 세계가 우리의 손에 찬사를 보냅니다. 쇠 젓가락으로 콩을 집는 유일한 민족입니다. 가전제품이나, 조립 공정이나, 생명공학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는 손이 우리의 손입니다. 우리민족은 손으로 하는 일은 잘 하는 민족입니다. 운동도 손으로 하는 운동을 발로 하는 운동보다 잘 하는 민족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민족에게 하나님이 손에 힘을 주셔야 합니다. 손의 힘이 필요합니다.
결 론
얼마 전 이라크의 ‘회교혁명 평의회’에서는 포고령 통해 새로운 형벌제도를 도입하였습니다. 이미 범죄자들에게 ‘손목절단형’을 집행하고 있는 이라크에서는 최근 범죄가 급증함에 따라 귀를 자르는 형벌을 실행한다고 하였습니다. 수족을 절단당한 전과자에게는 이마에 문신을 명령했습니다. 수족을 절단 당한 것과 및 문신을 숨기려고 성형수술을 하거나 그렇게 하도록 그 행위를 도와주는 사람들 역시 손과 귀가 잘리게 됩니다. 이슬람의 법은 참 무섭습니다. 손을 자르는 형벌은 너무 가혹한 것 같습니다.
성경도 손을 자르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 의하여 잘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구원을 위하여 자릅니다. 마태복음 5:30에는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고 합니다. 왜요? 손을 더 힘 있게 하려고 찍어버리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6:3에는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고 합니다. 왜요? 손을 더 힘 있게 하려고 모르게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원수들의 위협이나 두려움에서 우리를 건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두렵게 하는 원수들을 이기게 하시려고 우리 손에 하나님의 힘을 실어주십니다. 느헤미야를 괴롭히던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손에 힘이 있게 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의 공사가 잘 끝날 수 있도록 도우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의 손을 하나님이 힘있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방해꾼들을 극복함
느 6:5-9 / 김종택목사
대한민국의 야당 민노당 안에는 동성애 정신병자들의 인권을 위한답시고 ‘성소수자 인권 위원회’인가 뭔가가 있는가 봅니다. 정신병자들이 부끄런 줄도 모르고 정치세력화해서 나라를 더럽혀 놓으려고 작정을 한 것이지요. “그 안에서 일하는 기독교인들에게서 하늘의 복이 떠나고 땅의 복이 떠날지어다! 그런 사악한 자들의 인권을 위한답시고 그 안에서 활동하는 자들의 자손들이 머슴의 머슴이 될지어다!” 바야흐로 우리의 영적 전쟁도 중대 고비를 맞고 있습니다. 짤남(성기 잘라낸 불구 남성)이 법원으로부터 성전환을 인정받아 같은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이 짤남과 그의 (변)(태)기둥서방이 애를 입양하여 기르겠다고 소란을 피웠습니다. 그런데 이 동성애 정신병자들이 힘을 합하여 요즘 가공할 음모를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이들이 법무부에 압력을 넣어 ‘차별 금지법’을 제정하게 하고 있습니다. 정신나간 정부가 이미 국회에 그것을 제출했나봅니다. “동성애를 용인하는 행정부 관리들과 판사들과 국회의원들의 자손 대대로 동성애 정신병자들이 태어나 집안에 온통 동성애 정신병자들로 득실거릴지어다!” 그 차별 금지법은 동성애를 정신병이라고 말해도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하게 하는 악법입니다. 이 사악한 정신병자들이 동성애의 해악을 다른 자들에게 가르치지도 못하게 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 사악한 정신병자들은 정상인들이 자신들에게 ‘비정상적인 사람’이라고 말하면 명예훼손으로 고발할 기세를 보입니다.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동성애자들이 득실거리는 더러운 미국 같은 나라에서 동성애를 정신병이라고 주장했다가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하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현재 정부가 추진하려는 차별 금지법이 정상인들의 정당한 주장을 막는 악법이 아닌지 심히 우려됩니다.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은 그런 사악한 정신병자들의 나팔수 노릇 할 악법을 제정하는 것을 결사 반대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헌법에는 양심의 자유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표현의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개인과 가정과 사회와 국가를 파괴하고 좀먹은 더럽고 사악한 동성애를 정신병이라고 생각할 양심의 자유가 있고, 사람들에게 동성애의 해악을 알려 그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올바른 가치관을 갖고 살게 교육할 자유와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양심상 동성애자들을 비정상적인 자들이라 생각할 자유가 있고, 다른 자들, 특히 청소년들에게 그것이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말할 자유가 있습니다. 동성애자들의 명예를 훼손할 목적으로 그런 주장을 한 것이 아니고, 내가 사는 가정과 사회와 국가의 건전한 발전과 행복을 위해 양심에 거리낌없이 주장하는 것이니 그런 주장 때문에 동성애자들이 명예훼손으로 고발할 권리가 없습니다. 대한민국에 양심의 자유가 있으니 동성애자들도 “우리가 정상이다”라고 생각하고 말할 자유가 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들이 정상이라며 얼마나 공개적으로 강하게 주장합니까? 자신들의 주장은 펼쳐도 되고 그와 상반된 우리의 주장은 말하면 안된다는 겁니까? 우리 정상적인 자들이 동성애자들이 스스로를 정상이라고 생각한다고 법적으로 소송걸어 문제삼지 않는데 왜 동성애 정신병자들은 정상인들이 그들을 비정상이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문제삼는지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정상인들이 동성애가 정신병이고 사악한 문화라고 주장하며 인터넷에 글을 올릴 때 자꾸 동성애 정신병자들이 그것을 방해하면 정상인들의 양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므로 정상인들이 그 정신병자들에게 손해배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동성애 정신병자들이 자꾸 이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더럽혀 놓고 나라를 온통 자신들의 똥 냄새로 진동하게 하려 하기에 제가 잠시 위와 같은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우리가 이 아름다운 나라를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복으로 여긴다면 이 아름다운 나라를 허물고 있는 여우와 같은 동성애 정신병자들을 몰아내야 합니다. 제가 그전부터 “하나님 이 땅이 우상숭배와 동성애가 없는 거룩한 나라가 되게 하소서!”라고 오랜 기간 기도를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인터넷에서 동성애 추방운동을 펼치게 인도하시더군요. 여러분! 이 나라를 위해 오랜 기간 기도드리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께서 드린 기도의 내용에 따라 구체적인 행동을 하십시오. 힘과 능력이 있는데도 계속 남이 대신 하겠지 생각하며 기도만 드리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입으로 다 해먹냐?’라며 책망하십니다.
이스라엘의 포로 기간이 다 끝나고 일부가 포로 생활에서 돌아와 성전을 건축하고 예루살렘 성을 복구할 때 중요한 지도자가 바로 에스라와 스룹바벨과 느헤미야입니다. 이 때 성전 건축과 성벽복구를 방해하는 자들이 나타납니다. 에스라와 스룹바벨과 느헤미야는 그러한 때 탁월한 지도력을 보여 그 임무를 잘 완수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반드시 방해꾼들이 나타남을 명심해야 합니다. 때론 유혹과 회유로, 때론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 위협을 가하며 원수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을 방해하려 합니다.
대적자 원수들이 어떤 식으로 방해공작을 펼쳤나요? 첫째로 어떤 대적자들은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하자고 접근을 합니다.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전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로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와 같이 너희 하나님을 구하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에4:1-2).” 이게 무슨 말씀인고 하니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했을 때 앗수르는 북이스라엘 백성을 다른 곳으로 옮겨놓고 그 자리에 다른 곳에 사는 자들을 정주시켰는데, 이스라엘 땅에 살게 된 그들이 자신들의 신들도 섬기고 이스라엘이 섬겼던 하나님도 섬기며 살았었습니다. 그런데 남유다의 멸망 후 포로 기간이 끝나 일부가 예루살렘에 와서 성전을 건축하려 하자 옛날부터 그 부근으로 이주하여 살았던 자들이 성전을 같이 짓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귀향한 이스라엘인들은 그들이 종교적으로 불순한 자들이라 여겼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성전을 지어 그들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꺼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단호히 그 자들의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에4:3).” 지금도 그런가 모르지만 참으로 안타까웠던 것은 우리나라 여성신학자들과 여성신학 회원들이 약자들의 인권을 지키는 슬로건을 내걸고 운동을 할 때 동성애자들과 함께 그것을 했다는 겁니다. 한국의 여자 신학자들 몇은 실제로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건 마귀신학이지요. 이렇듯 사악한 동성애자들은 기독교와 연대하여 어떤 사회운동을 펼치려 합니다. 기독교는 단호히 그런 수작에 말려들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힘이 부족하여 동성애자들의 힘을 빌려 인권운동을 펼칩니까? 이 얼마나 미련하고도 불신앙적인 행동입니까? 인권으로 말하자면 사악한 동성애자들이 부모의 인권과 명예 형제의 인권과 명예를 얼마나 짓밟습니까? 그들의 다른 더 더러운 짓거리들은 입에 담을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위대한 신앙인들은 신앙의 순결을 지키려 애를 썼습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소돔 왕이 자기가 빼앗겼던 것을 아브라함이 전쟁하여 찾아오자 그것을 아브라함이 가져도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창14:22, 23)”라며 거절했습니다. 기독교는 순결이 힘입니다. 거룩이 힘입니다. 순결하고 거룩한 교회에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이 임합니다. 그래서 원수들은 이 교회의 순결을 더럽혀 하나님의 능력이 떠나게 하려 하고 있습니다. 교회 지도자는 이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원수들은 물리력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일을 방해합니다. 느헤미야를 따르는 자들이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려 하자 원수들이 생명을 위협합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퇴락한 곳이 수보되어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하여 다 함께 꾀하기를 예수살렘으로 가서 쳐서 요란하게 하자 하기로(느4:7,8절).” 그러자 이스라엘인들은 성벽 쌓기와 방어를 동시에 합니다. “그때로부터 내 종자의 절반은 역사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졌고 민장은 유다 온 족속의 뒤에 있었으며, 성을 건축하는 자와 담부하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건축하는 자는 각각 칼을 차고 건축하며 나팔부는 자는 내 곁에 섰었느니라(느4:16-18).”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들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당신께서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느헤미야도 대적의 위협에 기가 죽어 있는 자들에게 “너희는 저희를 두려워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라(느4:14)”고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간혹 원수의 칼에 죽는 자도 있습니다. 마귀가 하나님의 일꾼들 중에 하나를 죽게 한다고 나머지 하나님의 일꾼들이 기가 팍 죽어버리면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얼마나 마귀가 쾌재를 부르겠습니까? 여러분, 원수로부터 물리적인 핍박이 있다고 용기를 잃고 후퇴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땅에 떨어지고 마귀의 권세는 하늘을 찌르게 됩니다. 그 꼴을 보시고 싶으십니까? 앞서 가는 아군이 총에 맞아 쓰러질 때 무서워 후퇴하면 그 아군의 피를 욕보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안드십니까? 우리가 죽음도 불사한다는 결연한 각오를 가질 때 마귀 왕국의 터가 흔들립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힘이 없으셔서 마귀가 그분의 자녀를 해친다고 보십니까? 하나님 안에서 죽은 것은 그 자체가 죽음의 위협을 이긴 승리입니다. 그런 승리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꾼들을 눈동자같이 보호하시고 최후 승리를 안겨주십니다. 느헤미야와 그의 동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지키며 성벽을 완성했습니다. 원수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의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의 권세가 컸으나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철저히 보호하셨습니다. 여러분께서 하나님의 보호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며 담대히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원수는 절대 여러분의 머리카락 하나도 상하게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수들은 공권력의 힘을 빌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합니다.
성전을 함께 짓자는 제안이 거부당하자 원수들은 당시의 지배자였던 바사의 아닥사스다 왕에게 글을 올려 예루살렘에 온 자들이 성전을 짓고 성을 건축하면 다시는 왕을 섬기지 않고 배반할 것이니 그 일을 중단시키는 게 좋을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자 왕이 그들의 말만 믿고 성을 건축하지 못하게 했습니다(에4장). 그러나 얼마 후 다리오 왕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은 과거 고레스 왕이 자신들에게 성전을 건축하고 성벽을 보수하는 것을 허락했음을 다리오 왕에게 말하여 다시 허락을 받아 그 일을 완성시켰습니다(에6장). 요즘도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려는 원수들이 걸핏하면 소송을 걸어 교회 일을 방해하고 기독교 운동을 방해합니다. 사악한 동성애 정신병자들도 걸핏하면 명예훼손 운운하며 바른 말 하려는 자들의 입을 막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교회는 선한 존재입니다. 누가 뭐래도 교회를 미워하고 교회 일을 방해하려는 자들은 예외없이 악인들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말은 진리이고 선이며, 원수의 말은 거짓이고 궤변이고 악입니다. 우리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사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일을 시작하면 마귀 할아버지라도, 나라도 제국도 우리의 일을 막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유다를 멸망시켜 그 백성을 포로로 잡아가게 하셨고, 그분께서는 바사의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그들을 포로에서 해방시키시고 예루살렘에 돌아가 성전을 건축하고 성벽을 쌓게 하셨습니다. 원수들이 잠시 방해하여 일을 멈춘 적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시 왕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그 역사를 계속 진행시켜 완수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그분의 명령에 따라 일을 할 때 국가의 공권력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필요할 경우 국가 공권력의 보호아래 하나님의 일을 하게 도우십니다. “내가 또 조서를 내려서 하나님의 이 전을 건축함에 대하여 너희가 유다 사람의 장로들에게 행할 것을 알게 하노니, 왕의 재산 곧 강 서편 세금 중에서 그 경비를 이 사람들에게 신속히 주어 저희로 지체치 않게 하라. .... 내가 또 조서를 내리노니 무론 누구든지 이 명령을 변개하면 그 집에서 들보를 빼어내고 저를 그 위에 매어달게 하고 그 집은 이로 인하여 거름더미가 되게 하라(에6:8-11).” 우리가 선한 마음으로 국가를 설득하면 국가는 절대 우리의 대적자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국가 권력은 하나님께서 주신 권력이고 국가가 하나님의 통치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오해하여 기독교의 일을 잠시 방해할 수는 있으나 결국은 국가가 기독교의 협조자가 됩니다. (로마 제국은 결국 기독교를 도왔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선한 국민이 되어야 합니다. 만인에게 지탄받는 기독교라면 절대 국가를 기독교편으로 끌어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들이 선한 국민이 될 때 국가는 기독교의 원수들을 제압하는 공권력을 우리에게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국가의 공권력을 이용하여 사악한 동성애집단을 이 아름다운 금수강산에서 완전히 소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강하고 담대한 믿음과 세상을 이기는 지혜를 주시어 원수의 모든 방해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일을 완수하게 해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방해꾼들을 극복함
느 6:5-9 / 조상호 목사
대한민국의 야당 민노당 안에는 동성애 정신병자들의 인권을 위한답시고 ‘성소수자 인권 위원회’인가 뭔가가 있는가 봅니다. 정신병자들이 부끄런 줄도 모르고 정치세력화해서 나라를 더럽혀 놓으려고 작정을 한 것이지요. “그 안에서 일하는 기독교인들에게서 하늘의 복이 떠나고 땅의 복이 떠날지어다! 그런 사악한 자들의 인권을 위한답시고 그 안에서 활동하는 자들의 자손들이 머슴의 머슴이 될지어다!” 바야흐로 우리의 영적 전쟁도 중대 고비를 맞고 있습니다. 짤남(성기 잘라낸 불구 남성)이 법원으로부터 성전환을 인정받아 같은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이 짤남과 그의 (변)(태)기둥서방이 애를 입양하여 기르겠다고 소란을 피웠습니다. 그런데 이 동성애 정신병자들이 힘을 합하여 요즘 가공할 음모를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이들이 법무부에 압력을 넣어 ‘차별 금지법’을 제정하게 하고 있습니다. 정신나간 정부가 이미 국회에 그것을 제출했나봅니다. “동성애를 용인하는 행정부 관리들과 판사들과 국회의원들의 자손 대대로 동성애 정신병자들이 태어나 집안에 온통 동성애 정신병자들로 득실거릴지어다!” 그 차별 금지법은 동성애를 정신병이라고 말해도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하게 하는 악법입니다. 이 사악한 정신병자들이 동성애의 해악을 다른 자들에게 가르치지도 못하게 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 사악한 정신병자들은 정상인들이 자신들에게 ‘비정상적인 사람’이라고 말하면 명예훼손으로 고발할 기세를 보입니다.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동성애자들이 득실거리는 더러운 미국 같은 나라에서 동성애를 정신병이라고 주장했다가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하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현재 정부가 추진하려는 차별 금지법이 정상인들의 정당한 주장을 막는 악법이 아닌지 심히 우려됩니다.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은 그런 사악한 정신병자들의 나팔수 노릇 할 악법을 제정하는 것을 결사 반대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헌법에는 양심의 자유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표현의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개인과 가정과 사회와 국가를 파괴하고 좀먹은 더럽고 사악한 동성애를 정신병이라고 생각할 양심의 자유가 있고, 사람들에게 동성애의 해악을 알려 그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올바른 가치관을 갖고 살게 교육할 자유와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양심상 동성애자들을 비정상적인 자들이라 생각할 자유가 있고, 다른 자들, 특히 청소년들에게 그것이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말할 자유가 있습니다. 동성애자들의 명예를 훼손할 목적으로 그런 주장을 한 것이 아니고, 내가 사는 가정과 사회와 국가의 건전한 발전과 행복을 위해 양심에 거리낌없이 주장하는 것이니 그런 주장 때문에 동성애자들이 명예훼손으로 고발할 권리가 없습니다. 대한민국에 양심의 자유가 있으니 동성애자들도 “우리가 정상이다”라고 생각하고 말할 자유가 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들이 정상이라며 얼마나 공개적으로 강하게 주장합니까? 자신들의 주장은 펼쳐도 되고 그와 상반된 우리의 주장은 말하면 안된다는 겁니까? 우리 정상적인 자들이 동성애자들이 스스로를 정상이라고 생각한다고 법적으로 소송걸어 문제삼지 않는데 왜 동성애 정신병자들은 정상인들이 그들을 비정상이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문제삼는지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정상인들이 동성애가 정신병이고 사악한 문화라고 주장하며 인터넷에 글을 올릴 때 자꾸 동성애 정신병자들이 그것을 방해하면 정상인들의 양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므로 정상인들이 그 정신병자들에게 손해배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동성애 정신병자들이 자꾸 이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더럽혀 놓고 나라를 온통 자신들의 똥 냄새로 진동하게 하려 하기에 제가 잠시 위와 같은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우리가 이 아름다운 나라를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복으로 여긴다면 이 아름다운 나라를 허물고 있는 여우와 같은 동성애 정신병자들을 몰아내야 합니다. 제가 그전부터 “하나님 이 땅이 우상숭배와 동성애가 없는 거룩한 나라가 되게 하소서!”라고 오랜 기간 기도를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인터넷에서 동성애 추방운동을 펼치게 인도하시더군요. 여러분! 이 나라를 위해 오랜 기간 기도드리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께서 드린 기도의 내용에 따라 구체적인 행동을 하십시오. 힘과 능력이 있는데도 계속 남이 대신 하겠지 생각하며 기도만 드리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입으로 다 해먹냐?’라며 책망하십니다.
이스라엘의 포로 기간이 다 끝나고 일부가 포로 생활에서 돌아와 성전을 건축하고 예루살렘 성을 복구할 때 중요한 지도자가 바로 에스라와 스룹바벨과 느헤미야입니다. 이 때 성전 건축과 성벽복구를 방해하는 자들이 나타납니다. 에스라와 스룹바벨과 느헤미야는 그러한 때 탁월한 지도력을 보여 그 임무를 잘 완수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반드시 방해꾼들이 나타남을 명심해야 합니다. 때론 유혹과 회유로, 때론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 위협을 가하며 원수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을 방해하려 합니다.
대적자 원수들이 어떤 식으로 방해공작을 펼쳤나요? 첫째로 어떤 대적자들은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하자고 접근을 합니다.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전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로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와 같이 너희 하나님을 구하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에4:1-2).” 이게 무슨 말씀인고 하니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했을 때 앗수르는 북이스라엘 백성을 다른 곳으로 옮겨놓고 그 자리에 다른 곳에 사는 자들을 정주시켰는데, 이스라엘 땅에 살게 된 그들이 자신들의 신들도 섬기고 이스라엘이 섬겼던 하나님도 섬기며 살았었습니다. 그런데 남유다의 멸망 후 포로 기간이 끝나 일부가 예루살렘에 와서 성전을 건축하려 하자 옛날부터 그 부근으로 이주하여 살았던 자들이 성전을 같이 짓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귀향한 이스라엘인들은 그들이 종교적으로 불순한 자들이라 여겼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성전을 지어 그들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꺼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단호히 그 자들의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에4:3).” 지금도 그런가 모르지만 참으로 안타까웠던 것은 우리나라 여성신학자들과 여성신학 회원들이 약자들의 인권을 지키는 슬로건을 내걸고 운동을 할 때 동성애자들과 함께 그것을 했다는 겁니다. 한국의 여자 신학자들 몇은 실제로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건 마귀신학이지요. 이렇듯 사악한 동성애자들은 기독교와 연대하여 어떤 사회운동을 펼치려 합니다. 기독교는 단호히 그런 수작에 말려들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힘이 부족하여 동성애자들의 힘을 빌려 인권운동을 펼칩니까? 이 얼마나 미련하고도 불신앙적인 행동입니까? 인권으로 말하자면 사악한 동성애자들이 부모의 인권과 명예 형제의 인권과 명예를 얼마나 짓밟습니까? 그들의 다른 더 더러운 짓거리들은 입에 담을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위대한 신앙인들은 신앙의 순결을 지키려 애를 썼습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소돔 왕이 자기가 빼앗겼던 것을 아브라함이 전쟁하여 찾아오자 그것을 아브라함이 가져도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창14:22, 23)”라며 거절했습니다. 기독교는 순결이 힘입니다. 거룩이 힘입니다. 순결하고 거룩한 교회에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이 임합니다. 그래서 원수들은 이 교회의 순결을 더럽혀 하나님의 능력이 떠나게 하려 하고 있습니다. 교회 지도자는 이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원수들은 물리력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일을 방해합니다. 느헤미야를 따르는 자들이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려 하자 원수들이 생명을 위협합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퇴락한 곳이 수보되어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하여 다 함께 꾀하기를 예수살렘으로 가서 쳐서 요란하게 하자 하기로(느4:7,8절).” 그러자 이스라엘인들은 성벽 쌓기와 방어를 동시에 합니다. “그때로부터 내 종자의 절반은 역사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졌고 민장은 유다 온 족속의 뒤에 있었으며, 성을 건축하는 자와 담부하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건축하는 자는 각각 칼을 차고 건축하며 나팔부는 자는 내 곁에 섰었느니라(느4:16-18).”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들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당신께서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느헤미야도 대적의 위협에 기가 죽어 있는 자들에게 “너희는 저희를 두려워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라(느4:14)”고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간혹 원수의 칼에 죽는 자도 있습니다. 마귀가 하나님의 일꾼들 중에 하나를 죽게 한다고 나머지 하나님의 일꾼들이 기가 팍 죽어버리면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얼마나 마귀가 쾌재를 부르겠습니까? 여러분, 원수로부터 물리적인 핍박이 있다고 용기를 잃고 후퇴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땅에 떨어지고 마귀의 권세는 하늘을 찌르게 됩니다. 그 꼴을 보시고 싶으십니까? 앞서 가는 아군이 총에 맞아 쓰러질 때 무서워 후퇴하면 그 아군의 피를 욕보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안드십니까? 우리가 죽음도 불사한다는 결연한 각오를 가질 때 마귀 왕국의 터가 흔들립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힘이 없으셔서 마귀가 그분의 자녀를 해친다고 보십니까? 하나님 안에서 죽은 것은 그 자체가 죽음의 위협을 이긴 승리입니다. 그런 승리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꾼들을 눈동자같이 보호하시고 최후 승리를 안겨주십니다. 느헤미야와 그의 동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지키며 성벽을 완성했습니다. 원수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의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의 권세가 컸으나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철저히 보호하셨습니다. 여러분께서 하나님의 보호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며 담대히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원수는 절대 여러분의 머리카락 하나도 상하게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수들은 공권력의 힘을 빌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합니다. 성전을 함께 짓자는 제안이 거부당하자 원수들은 당시의 지배자였던 바사의 아닥사스다 왕에게 글을 올려 예루살렘에 온 자들이 성전을 짓고 성을 건축하면 다시는 왕을 섬기지 않고 배반할 것이니 그 일을 중단시키는 게 좋을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자 왕이 그들의 말만 믿고 성을 건축하지 못하게 했습니다(에4장). 그러나 얼마 후 다리오 왕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은 과거 고레스 왕이 자신들에게 성전을 건축하고 성벽을 보수하는 것을 허락했음을 다리오 왕에게 말하여 다시 허락을 받아 그 일을 완성시켰습니다(에6장). 요즘도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려는 원수들이 걸핏하면 소송을 걸어 교회 일을 방해하고 기독교 운동을 방해합니다. 사악한 동성애 정신병자들도 걸핏하면 명예훼손 운운하며 바른 말 하려는 자들의 입을 막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교회는 선한 존재입니다. 누가 뭐래도 교회를 미워하고 교회 일을 방해하려는 자들은 예외없이 악인들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말은 진리이고 선이며, 원수의 말은 거짓이고 궤변이고 악입니다. 우리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사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일을 시작하면 마귀 할아버지라도, 나라도 제국도 우리의 일을 막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유다를 멸망시켜 그 백성을 포로로 잡아가게 하셨고, 그분께서는 바사의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그들을 포로에서 해방시키시고 예루살렘에 돌아가 성전을 건축하고 성벽을 쌓게 하셨습니다. 원수들이 잠시 방해하여 일을 멈춘 적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시 왕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그 역사를 계속 진행시켜 완수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그분의 명령에 따라 일을 할 때 국가의 공권력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필요할 경우 국가 공권력의 보호아래 하나님의 일을 하게 도우십니다. “내가 또 조서를 내려서 하나님의 이 전을 건축함에 대하여 너희가 유다 사람의 장로들에게 행할 것을 알게 하노니, 왕의 재산 곧 강 서편 세금 중에서 그 경비를 이 사람들에게 신속히 주어 저희로 지체치 않게 하라. .... 내가 또 조서를 내리노니 무론 누구든지 이 명령을 변개하면 그 집에서 들보를 빼어내고 저를 그 위에 매어달게 하고 그 집은 이로 인하여 거름더미가 되게 하라(에6:8-11).” 우리가 선한 마음으로 국가를 설득하면 국가는 절대 우리의 대적자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국가 권력은 하나님께서 주신 권력이고 국가가 하나님의 통치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오해하여 기독교의 일을 잠시 방해할 수는 있으나 결국은 국가가 기독교의 협조자가 됩니다. (로마 제국은 결국 기독교를 도왔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선한 국민이 되어야 합니다. 만인에게 지탄받는 기독교라면 절대 국가를 기독교편으로 끌어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들이 선한 국민이 될 때 국가는 기독교의 원수들을 제압하는 공권력을 우리에게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국가의 공권력을 이용하여 사악한 동성애집단을 이 아름다운 금수강산에서 완전히 소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강하고 담대한 믿음과 세상을 이기는 지혜를 주시어 원수의 모든 방해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일을 완수하게 해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사단의 공격에 대항하라
느 6:1-9 / 피영민목사
서 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목사 안수받은지 24년 지났습니다. 24년 동안 주의 일을 해 오고 있는데 결코 쉽지 않습니다. 경주로 치자면 장애물을 뛰어넘는 경주와 비슷합니다. 마귀가 하나님의 일꾼들의 가는 길에 장애물을 계속 늘어놓습니다. 느헤미야의 가는 길에도 마귀가 여러 가지 장매물을 놓았습니다. 느헤미야 5장에서는 귀인과 민장들이 고리대금을 하여 백성들 사이에 내분이 생겼습니다. 이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성벽건축이 진행되지 않을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문제를 무시하거나 피하지 않았습니다. 지혜롭게 잘 헤쳐 나갔습니다. 귀인과 민장들이 회개 했고, 느헤미야의 말대로 그 동안 고리대금 했던 돈을 모두 돌려주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문제가 잘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단의 공격이 5장에서 끝이 난 것이 아니라 계속됩니다. 마귀는 포기할 줄 모르는 존재입니다. 느헤미야 6장 1절을 보면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그 나머지 우리의 대적이 내가 성을 건축하여 그 퇴락한 곳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함을 들었는데 내가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성벽건축은 모두 완성이 되었고, 문에 문짝을 달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문짝만 달면 이제는 끝나게 되는 것인데 막바지에 마귀가 다시 강력한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단이 공격을 해 왔습니다. 느헤미야가 사단의 공격을 받았듯이 우리도 사단의 공격의 대상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단과 반대편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나에게 일을 맡기지 않아서 일을 못합니다.”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는 것도, 직장 가서 부지런히 일하는 것도, 헌금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느헤미야 6장은 느헤미야의 성벽건축과정의 막바지에 임한 사단의 가장 강력한 공격입니다. 느헤미야 6장을 통해서 어떻게 공격하고 우리는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Ⅰ. 사단이 공격하는 대상은 “지도자”였다
지도자가 넘어지면 “성벽재건”은 완성될 수 없습니다. 사단이 공격하는 대상은 지도자입니다. 권투할 때에 어디를 때리면 점수가 가장 많습니까? 머리를 때리면 점수가 가장 많이 올라갑니다. 사단도 머리를 공격합니다. 유다 백성 전체를 공격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단이 매우 바쁠 것입니다. 지도자인 느헤미야를 공격 대상으로 삼아 느헤미야의 용기를 꺾으려 하고 마음을 혼동 시키려 하는 것입니다. 평안을 깨뜨리고 명성을 더럽히려 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한 명만 넘어뜨리면 성벽재건은 물 건너가고 문짝 다는 일도 이루어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역사 속에 있는 전쟁이야기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나폴레옹 전쟁, 남북전쟁, 6.25전쟁, 구약에 나타난 왕들 간의 전쟁에는 공통적으로 나타난 전략이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방 군대의 왕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장을 공격하는 것, 장교를 공격하는 것. 이것이 군대의 전략입니다. 왕을 공격해서 죽이면 신하들을 흩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장교를 공격해서 죽이면 사병들은 흩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적장의 지도자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혹시 장기를 좋아하십니까? 요즘은 장기를 잘 두지 않습니다만 저는 어렸을 적 동네 할아버지와 장기를 많이 두었습니다. 장기판에 보면 마, 상, 차, 졸 등이 있습니다. 때로는 바둑알도 있고 소주 뚜껑도 보입니다. 왜냐하면 졸이 모라자면 바둑알과 소주 뚜껑으로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중 뚜껑, 마, 상을 잡아도 이길 수 없습니다. 이기려면 궁을 잡아야 이기는 것입니다. 궁을 보호하기 위해서 두 개의 사가 진을 치고 있습니다. 저는 동네 할아버지와 장기를 둘 때 다른 것 잡지 않고 궁만 잡았습니다. 사단도 이렇게 동일한 전략을 펼칩니다. 지도자를 공격합니다. 목사, 장로, 권사 모두가 지도자들입니다. 그리고 가정에서, 직장에서도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모두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21세기는 지도자를 공격하고 조롱하는 풍조가 만연합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조롱하고, 학생들은 스승을 공격하고, 근로자들은 사용자를 매도하고, 국민은 통치자를 비난하는 풍조가 만연한 것입니다. 이런 풍조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세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도자를 위해 기도하고 지도자를 지원해야 합니다. 지도자가 든든히 서야, 가정에서도 남편이 든든히 서야, 교회서도 담임목사가 든든히 서야, 목회자들이 든든히 서야, 구역에서도 구역장이 든든히 서야, 가정도 살고, 교회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도자 된 우리는 언제나 사단이 우리를 공격한다는 것을 깨닫고 방어 태세를 잘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Ⅱ. 사단이 공격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일을 정지 시키려는 것”입니다(9절)
왜 사단이 우리를 공격하는 것입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일을 중지시키려고 하기 위함입니다. 느헤미야를 왜 공격했습니까?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사단이 느헤미야에게 관심이 많아서 공격한 것이 아닙니다. 느헤미야를 공격해서 그 일을 중지 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성벽은 완성이 되었고, 문짝만 달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문짝까지 완전히 달리게 되면 안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원수가 쳐들어와도 문은 굳건히 닫혀 있고, 성벽은 든든히 서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 백성들은 별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짝을 아직 달지 않았기 때문에 사단의 마음이 급해 진 것입니다. ‘문짝을 달면 큰일이다. 문짝을 달지 못하게 하자’라고 생각하고 사단은 총 공격을 감행한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본문 9절에 보면 “이는 저희가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저희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정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기도를 못하게 하고, 성경 읽기를 중단하게 하고, 예배를 중지시키게 하고, 전도를 못하게 만들고, 영적으로 성장하는 일을 방해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찬송가 부를 때 가사를 틀리게 합니다. 오늘 성가대를 통해 찬송가 122장을 들었습니다. 후렴부 가사를 영어로 보면 “O come, let us adore Him"입니다. ‘Adore’는 ‘경배하자’ 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미국 아이들이 가사를 바꾸어 "O come, let us ignore Him"라고 부릅니다. ‘Ignore’는 ‘무시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와서 그분을 무시하자’라고 바꾸어 부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찬송가 가사도 바꾸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침에 예배 오려고 하면 남편이 “놀러 갑시다!”라고 한다면 사단의 역사입니다. 헌금을 하려고 하면 남편이 “주식투자를 위해 달라”라고 하면 이것도 사단의 역사입니다. 사단에게 “물러갈찌어다!”라고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사단은 우리 영혼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정지시키려 하고 우리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도 정지시키려 합니다. 교회를 세우고 선교하는 일을 중지시키려 합니다. 그러므로 사단의 공격을 이기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우리의 기분에 상관없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일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기도하고 싶어 기도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기도하기 싫어도 앉아서 기도하고, 성경 읽기 싫어도 앉아서 읽고, 예배 올 때에 다른 곳에 갈까 유혹이 와도 예배에 오고, 전도하기 싫어도 전도하고, 선교하기 싫어도 선교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기분에 상관없이 계속하는(Keep on going!)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교회 나오다가 중지하고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전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오다가 나오지 않는 사람을 잘 인도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왜 중지했습니까? 사단이 공격해 넘어져서 중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의 공격 목적은 중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중단 없는 전진”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중지하지 마시고 앞으로 나아시기를 바랍니다.
Ⅲ. 사단이 공격하는 방법은 “그럴듯한 거짓말을 설득력 있게 사용하는 것”이다
사단의 공격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거짓말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입니다. 거짓말을 하는데 그럴듯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뱀의 혀를 가졌습니다. 뱀의 혀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갈라졌다는 것입니다. 이 소리, 저 소리를 하고 다닙니다. 둘째는 뱀의 혀는 미끄럽습니다. 어떤 사람의 말을 가만히 들어 보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들은 뱀의 혀를 가진 사단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그스도인들은 미끄럽게 말하지 말고 깨끗하고 정직하고 담백하게 말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단은 느헤미야의 6장에서 세 가지 거짓말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1. 1-4절은 “거짓된 우정”을 이용하고 있다.
족보도 알 수 없는 산발랏과 암몬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느헤미야를 만나고자 합니다. 오노평지에서 네 번씩이나 만나자고 합니다. 산발랏과 도비야가 “우리가 싸울 필요가 있냐? 원수될 일이 무엇이 있냐? 만나서 오해를 풀자. 서로 대화를 통해서 문제를 풀어 나가자! 말도 못하냐?”라고 말합니다. 말이 미끄럽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이런 제안을 단칼에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저 사람들이 대화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노 평지로 불러 헤치기 위한 음모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의 말은 이렇습니다. “너희들과 나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무슨 대화를 하냐? 나는 주의 일을 하고 너는 주의 일을 반대했는데 무슨 오해가 있느냐? 아무 오해도 없고 대화 할 필요도 없고, 나는 주의 일을 하고 너는 계속 주의 일을 반대하면 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느헤미야의 판단은 옳았습니다.
여러분 대화라고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이단들이 와서 뱀의 혀를 가지고 말합니다. “강남중앙침례교회에 다니세요? 우리와 성경공부하면 어떨까요? 성경공부 하자는데 나쁠게 있을까요?”라고 말합니다. 이단자들이 대화하자고 접근해도 대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실상은 그들이 성도의 영혼을 헤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대화만 하는데 헤가 없다고 반문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와가 누구와 대화하다가 인류를 원죄에 빠뜨렸습니까? 뱀과 대화하다가 그만 하나님을 거역하고 인류를 원죄라는 구렁텅이에 빠뜨린 것입니다.
저는 차를 타고 심방 다니다 보면 가끔 전봇대에 붙어 있는 전화번호를 보게 됩니다. ‘080, 060, 대화상대가 필요한 분, 만남주선’이라고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대화하는 가운데, 오고가는 눈빛 속에 싹트는 정분이라고 했습니다. 정분나서 바람나고 가정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대화도 올바른 사람과 해야 합니다. 악한 영의 지배 받고 있는 사람과 대화하면 그 사람으로부터 악령이 흘러 들어오고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와가 뱀과 대화하다가 인류를 이처럼 고통 속에 빠뜨린 것처럼 우리는 거짓대화에 빠지지 마시길 바랍니다. 요한1서 1장10절로 11절을 보면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에는 이단자들과 만나지 말고,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마라고 했습니다. 인사하다가 잘못하면 대화 시작되고 그러다 이단에 빠지기도 합니다. 사단은 ’거짓된 대화‘라는 전략을 쓴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충만한 사람과 대화해야 은혜가 임하고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2. 5-9절을 보면 “거짓된 소문”을 만들어 내고 있다.
느헤미야가 페르시아 왕을 모반하고 예루살렘의 성벽을 짓고 왕이 되려고 한다라는 거짓소문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느헤미야에게 치명타를 주는 소문입니까? 만약 이것을 페르시아 왕이 듣게 되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성벽 건축한다고 해서 보냈더니 왕이 되려고 하느냐? 내가 고약하게 여기고 잡어 와야 겠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좋지 않은 소문은 느헤미야에게 타격을 주고 어렴움을 주는 것입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중상모략(中傷謀略)에 선수입니다. 하와 앞에서 하나님을 중상모략 했습니다. “야,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한 것이 너희 유익을 위해서 그런 줄 아느냐? 선악과를 먹으면 너도 하나님과 같이 되니깐 하나님이 그게 싫어서 못 먹게 한거야”라고 하나님과 중상모략을 한 것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거짓된 소문을 만들어 내고 거짓된 소문의 전달자가 되게 합니다. 소위 ‘하더라’ 통신을 이용해서 지도자를 넘어뜨리려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알아야 할 것은 자기 눈으로 확인한 바가 아니면 거짓된 소문에 넘어가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느헤미야는 거짓된 소문에 대해서 단호하게 대처했습니다. 본문 8절을 보면 “내가 보내어 저에게 이르기를 너의 말한바 이런 일은 없는 일이요 네 마음에서 지어낸 것이라 하였나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습니다. 거짓말은 언젠가 들통 나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최근에 감기기운으로 기관지가 약해져서 쑥뜸을 뜹니다. 한약방에서 뜨는 게 아니라 제가 불을 붙여서 혼자 뜹니다. 쑥뜸을 뜨니 쑥 냄새가 납니다. 쑥냄새는 담배 냄새와 비슷합니다. 제가 지나갈 때 담배 냄새가 나더라도 담배 핀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목사님 담배 피운다고 전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눈으로 확인하지 않은 소문을 만들어 내지 말고 전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사단의 전략입니다. ‘담임목사님이 이러더라’ 들으시면 확인을 하시기 바랍니다. 대부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짓된 소문 만들지도 마시고 거짓된 소문에 전달자도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3. 10-14절은 “거짓된 예언”을 이용하고 있다.
스마야라고 하는 거짓 선지자가 산발랏에게 뇌물을 받았습니다. 뇌물을 받고 거짓예언을 하는 것입니다. 가장 고약하고 가장 사악한 방법입니다. 정상적인 일이 아니고 왜곡되게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뒤에서 뇌물을 받은 경우입니다. 스마야가 산발랏에게 뇌물을 받고서 집에 앉아서 두문불출(杜門不出)하는 것입니다. 느헤이먀아가 스마야의 집에 심방을 갔습니다. 가서 보니 스마야가 예언을 합니다. “느헤미야여, 내 말을 들으라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로다. 산발랏과 도비야가 너를 죽이러 올 것이다. 그런데 너는 살 수 있는 길이 있다. 성전에 가서 성소의 가서 숨으면 너는 살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아주 그럴듯한 예언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이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성소는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지 제사장이 아닌 사람은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올바른 분별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 온 말이 아니로다. 저는 하나님의 보내신 바가 아니로다. 나는 성소에 들어가지 않겠다.’라고 하며 거짓 예언을 물리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아무리 신령한 사람이 신령한 척하며 예언을 할지라도 여러분은 미혹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성경과 어긋나는 예언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만약, 우리 아이가 고3인데 이번에 서울대학 붙을지 떨어질지 예언 받으러 가면 안 됩니다. 그런 것 다니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업을 시작하는데 잘 될지 예언 받으러 가자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답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공부 열심히 해서 점수 잘 받았으면 서울대 합격하고 못 봤으면 떨어집니다. 그리고 남편이 자신의 사업을 지혜롭게, 부지런히 하면 성공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실패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언은 성경이 예언입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재림한다는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다시 오시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고 바르게 산 사람은 상을 주시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에게는 벌을 주실 것입니다. 명백한 예언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며 예수 믿고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면 예수님 오셨을 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고 말씀하시면서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짓된 선지자가 많은 21세기에 거짓된 예언에 미혹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중심의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중심 신앙생활을 해야 신앙이 안정되는 것입니다. 은사중심이라고, 예언중심이라고 따라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아편쟁이와 꼭 같습니다. 이것은 한번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 강한 것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헤매지 마시고 날마다 성경 읽고, 기도하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성결케 하면 하나님께서 축복 주시고, 평안케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사단은 오늘날도 거짓된 대화와 거짓된 소문과 예언을 가지고 성도를 헤치고, 하나님의 일을 중지시키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경계하시기를 바랍니다.
Ⅳ. 느헤미야는 어떻게 사단의 공격을 이겨내었는가?
1. 간단하지만 진지한 기도를 수시로 하나님께 올렸다(9절 후반, 14절)
느헤미야는 수시로 기도했습니다. 9절 후반을 보면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라고 기록되었고, 14절 후반을 보면 “무릇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의 소위를 기억하옵소서 하였노라”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일마다, 때마다 매일의 삶 가운데 수시로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자동차를 탈 때에도 ‘하나님 안전하게 지켜주세요’ 시험을 치를 때에도 ‘지혜를 주세요. 아는 것 다 맡고 모르는 것도 찍을 때 맞게 해 주세요‘라고 수시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이렇게 기도하여 사단의 공격을 물리쳤습니다.
2. 우선순위를 명백히 하였다(3절)
느헤미야는 자신의 삶의 우선순위(priority)를 명확히 했습니다. 산발랏, 도비야, 게셈이 오노 평지에서 만나자고 했을 때에도 느헤미야는 가지 않았습니다. 본문 3절을 보면 “내가 곧 저희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이르기를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떠나 정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 가겠느냐 하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한가하게 너희들을 만나고 있을 시간이 없다. 나의 우선순위는 성벽을 건축하는 것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명확히 정해 놓고 필요 없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시간은 짧습니다. 그리고 좋은 일, 선한일 만 해서는 안 됩니다. 영국 속담에 ‘선한 일은 최선의 일에 원수다(The good is the enemy of the best)’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다 좋은 일일 수도 있지만, 최선의 일을 하지 않고 좋은 일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삶의 타협 할 수 없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루를 시작할 때 꼭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한 후 하루를 시작하시기를 바랍니다.
3. 현명한 분별력을 가졌다(2절, 9절, 12절)
느헤미야는 분별력이 있었습니다. 누군가 말을 하면 사단의 말인지, 거짓말인지, 나를 헤치려 하는 말인지 분별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착한데도 어느 사회에 가든 지도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유는, 착하지만 분별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게 몇 가지 있습니다. 럭비공, 개구리, 주식가격, 여자마음입니다.
4. 담대한 용기로 이겨냈다(11절)
본문 11절을 보면 “내가 이르기를 나 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며 나 같은 몸이면 누가 외소에 들어가서 생명을 보존하겠느냐 나는 들어가지 않겠노라 하고” 담대한 용기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깨닫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천국 간다는 복음입니다. 이것은 마틴 루터가 로마 카톨릭과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대항하여 지켜낸 진리인 것입니다. 1521년 루터는 보름스 제국의회에 부름을 받아 심문을 받게 됩니다. 로마 카톨릭은 그 당시에 착한 일을 해야 천국 간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루터는 그 가르침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 믿는 자가 천국 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득의(以信得義)의 교리를 선포했습니다. 교황과 신성로마 황제는 루터에게 “이 교리를 취소하지 않겠느냐?” 할 때에 루터는 “내가 여기 서 있으니 주여 나를 도우소서!(Here I stand Lord help me!)”라고 말했습니다. 루터는 성경과 내 신앙양심에 확신하는 이 진리를 버리지 않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이 진리를 지켜냈습니다. 그러자 신성로마 황제가 브롬스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루터를 21일 안으로 아무나 죽여도 살인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루터가 용기를 가지고 종교개혁을 이뤄내서 우리는 진리를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비겁한 사람이 되지 마시고 용기 있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 론
느헤미야는 기도로, 우선순위로 현명한 분별력으로, 용기로 이겨냈습니다. 결국 성벽을 재건하고 성문 문짝도 달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단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본문 18절로 19을 보면 “도비야는 아라의 아들 스가냐의 사위가 되었고 도비야의 아들 여호하난도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의 딸을 취하였으므로 유다에서 저와 동맹한 자가 많음이라 저희들이 도비야의 선행을 내 앞에 말하고 또 나의 말도 저에게 전하매 도비야가 항상 내게 편지하여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하였느니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도비야 사람과 혼인관계를 맺은 유다 백성의 지도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제사장이었지만, 간첩 노릇을 했습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해서 언제나 옳은 쪽에 서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성도의 삶은 이생을 떠나 천국에 들어 갈 때까지는 사단과 전쟁하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사단은 우리를 공격하고 우리는 싸워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느헤미야 6장에서 좋아하는 구절이 15, 16절입니다. 본문 15절에서 16절을 보면 “성 역사가 오십 이일만에 엘룰월 이십 오일에 끝나매 우리 모든 대적과 사면 이방 사람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스스로 낙담하였으니 이는 이 역사를 우리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느헤미야는 52일 만에 성벽을 완성했습니다. 성벽을 완성하니 원수들이 낙담하고 ‘이제는 틀렸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느헤미야가 이겼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영적인 싸움에서 절대 패배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기는 존재들입니다. 싸우지 않고 피하니까 지는 것입니다. 싸우면 이깁니다. 진리와 정의가 이깁니다. 하나님은 이기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깁니다. 성도들은 승리합니다. 우리는 망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왜 승리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애가 되어 날마다 이기시고 끝까지 이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적거인= 포기하지 않는 사람
느 6:1-9 / 연제원목사
공원한쪽 귀퉁이에서 3살짜리 여자아이와 4살짜리 남자아이가 소꿉장난을 하고 놀고 있습니다. 풀을 틑어서 반찬 만들고 모래모아서 밥을 만들고 여보 맛있게 먹어! 그래 당신도 먹어! 그리고 남자아이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나 이제 아빠니까 출근해야되 그래 잘 다녀와요! 그럼 뽀뽀해줘야지! 알았어! 3살짜리 여자아이가 볼에다가 뽀뽀를 해줍니다. 그러자 4살짜리 아이가 ‘아니 볼에다 말고 입술에 해야지!’ 3살짜리 아이가 화들짝 놀라면서 하는말이 안되 우리 엄마가 그런 것 하면 안된다고 하셨어! 이러면 우리 사고치는 거야! 그때 4살짜리 남자아이가 무슨소리야 우리가 한두살 먹은 어린아이가...오빠 못믿나!!
아이가 없으면 웃을일이 없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도 어린아이가 많아야 교회가 활기찬것입니다.
어린아이가 많아야 그 교회에 꿈이 있고 비전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번주 금요일부터 우리교회에서 아주 중요한 행사중 하나인 여름성경학교가 개강합니다. 모든 교우들이 관심을 가지셔야 합니다. 내 자녀가 비록 장성했다할지라도 누구나 다 관심을 가져주셔야 합니다. 성경학교기간동안 한번 이상은 참관해주셔서 간식도 후원해 주시고 기도도 해주셔야 합니다. 내 자식이다 내 손주다 생각하시고 꼭 관심과 사랑을 가져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특별히 성경학교 교사로 몇분의 교사가 보강되었습니다. 정말 열심히 준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분들에게 힘을 주십시오. 기존교사외에 전옥미 집사님, 이진희집사님 윤인숙, 윤인옥성도님들이 수고해 주실것입니다. 더 많이 기도해주시고 격려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축복 / 옆에 분하고 함께 인사 다시한번 하시겠습니다.
영적거인은 하나님을 배경삼은 사람입니다.
성도님의 배경은 하나님이십니다. 집사님의 배경은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느헤미야는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시기전 주전 450년경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 느헤미야가 성경역사속에 등장하던 때는 이미 나라를 잃어버린지 130년이나 지난 시기였습니다. 주전 586년에 바벨론(이라크)으로부터 침략을 당하고 남유다가 멸망을 당한 상황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했을 때 바벨론은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종속시키기위해 포로로 끌고 갑니다. 그때 포로로 끌려간 유명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다니엘입니다.
그러다가 70년즘 지난후 예레미야가 예언한 것처럼 바벨론은 바사(페르시아-지금의 이란)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근동지방 대부분을 바사가 지배합니다. 이때 바사의 왕 고레스는 유대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있도록 칙령을 내립니다. 이때 42,000명이 고향 유다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때를 역사적으로 1차 포로 귀환이라고 말합니다. 그때 중심에 섯던 사람들이 에스라, 학게, 스룹바벨입니다. 그리고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해서 그들은 폐허가 된 예루살렘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때 건축된 성전을 제2차 성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그때는 1차성전 바벨론에 의해 성전이 무너지고 약 70년이 지나고 스룹바벨에 의해 성전이 재건축 되는때 이때를 2차성전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60년의 세월이 흐릅니다. 이때 느헤미야가 역사속에 등장하게됩니다.
느헤미야는 포로국에서 태어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승승장구 출세했던 사람입니다.
느헤미야1장을 보면 그는 왕을 술맡은 관원장이라고 말합니다.
왕이 먹는 모든 음료를 총괄하고 책임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 술맡은 관원장은 왕의 최측근입니다.
- 가장 신뢰하는 심복입니다.
- 왕하고 가장 가까이에서 많은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다시말하면 술맡은 관원장은 권력의 가장 핵심부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왕 왕후 다음으로 가장 영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술맡은 관원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서 2장을 보면 느헤미야가 왕에게 포도주를 드리는데 아닥사스다왕이 느헤미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네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데 무슨 염려거리라도 있느냐?’
그때느헤미야가 말합니다.
‘왕이시여 내가 고향땅 예루살렘의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예루살렘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타고 거기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환란을 당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만약 왕께서 은혜를 베푸신다면 저를 고향땅 예루살렘으로 내려가 무너진 성전을 복구하고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하게 하소서!’
그말은 들은 왕은 느헤미야가 워낙 충직한 심복이었기에 그의 간청을 들어줍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유대 예루살렘에 총독이란 직책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고향땅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을 성경학자들은 2차 포로귀환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으로 와서 성벽을 재건하기 시작합니다. 성벽을 재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왕의 허락이 떨어졌고 왕의 가장 신임을 받는 신하였기 때문에 성벽을 재건하는 물자와 인력 모두다 최상의 지원을 받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성벽을 재건하는 일은 별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성벽을 재건하려고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일을 시작하려고 하니까 예상치 못했던 장애물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가장 큰 장애물은 예루살렘 옆에 있는 사마리아 도시의 총독으로 있던 산발랏과 그의 부하 도비야와 게셈이 느헤미야의 일을 계속 방해하는 것입니다. 왜 방해를 했느냐?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오기전까지는 산발랏이 사마리아의 총독이었습니다. 당시 사마리아 총독이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특히 예루살렘도 완전히 폐허가 되었기에 사마리아 총독의 지배하에 있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날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는 왕의 최측근이었던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총독으로 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그 성벽이 재건되고 재정비가 되면 인근의 모든 세력들을 규합해서 예루살렘은 더 큰 도시가 되고 더 중심적인 도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마리아의 총독이었던 산발랏이 느헤미야의 수하에 들어갈 수 밖에 없습니다. 다시말하면 흡수되어 버리는 것이죠. 만약 이렇게 된다는 사마리아의 총독이었던 산발랏은 위태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와 부하들은 필사적으로 예루살렘 성벽재건을 반기를 들게 됩니다.
1-5장을 보면 조롱하고 협박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야밤을 틈타서 공격도 하고 성벽이 재건되지 못하도록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그리고 이제 느헤미야 6장에 접어 듭니다.
6장에 들어설때는 어느 상황이었냐하면 1절을 보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절 말씀을 보면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그 나머지 우리의 원수들이 내가 성벽을 건축하여 허물어진 틈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함을 들었는데...’
느헤미야가 성벽을 건축하는데 산발랏과 도비야 게셈뿐만아니라 '산발랏'에 동조하여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방해하던 또 다른 자들 구체적으로는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을 가리킵니다(4:7). 그런데 그 원수들이 무슨말을 들었냐면 느헤미야가 이제 성벽을 재건하는데 빈틈없이 다 마치고 이제 성문에 문짝만 달면 다 끝난다는 것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성벽재건이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이 원수들은 2절 말씀을 보니까 아주 집요한 마지막 방해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방해입니까? ‘만나자는 것입니다’ 그것도 ‘오노 평지 한 촌에서 만나자’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 '오노 평지'는 예루살렘 북쪽 32킬로 지점에 있는 이스라엘 땅도 아닌 사마리아와 아스돗 사이의 중립지대 계곡 사이에 있는 평지를 말합니다. 그런데 평지보다는 계곡이 맞는것같습니다. 그래서 공동번역 이나 현대어성경에서는 다 계곡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산발랏은 중립지대 ‘오노 계곡’에서 은밀하게 만나자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 까요? 2절 하반절입니다. ‘실상은 나를 해하고자 함이었더라’
그렇습니다. 산발랏 일당이 '오노계곡'에서 느헤미야를 이스라엘 영토 밖으로 꾀어 내어 살해하겠다는 음모가 숨겨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한번도 아니고 계속 만나자고 말합니다.
4절말씀을 보면 4번이나 계속 사람을 보내어 만나자고 합니다. 물론 이들은 만나서 그동안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계속 방해를 했던 것 미안하다. 이제 다 끝내가는 마당에 화해하자 회포를 풀자 이렇게 말을 해놓고 만나자고 하지만 그들의 속셈은 느헤미야를 살해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여러분에게 계속 만나자고 합니다.
어떤 저의를 가지고 만나자고 합니다. 무섭지 않습니까?
겁나지 않나요? 누가 나를 계속 협박한다면 그거 견디기 어렵습니다.
느헤미야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낍니다. 어쩌면 잠자리도 그리 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에게 있어서 더 큰 장애물은 6절, 7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대어성경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 편지에는 이런 모함이 적혀 있었다. `게셈이 내게 확인해 준 바와 같이, 그대가 지금 유다인들과 함께 반란을 준비하고 있으며, 그 목적으로 성벽도 재건하였다는 소문이 온 세상에 파다합니다. 또 그대가 왕이 되려고 한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그대는 또 예언자들까지 내세워 `유다 땅에 다시 왕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온 예루살렘에 퍼뜨리도록 하였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이런 소문은 틀림없이 바사 왕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대와 만날 것을 제안합니다. 우리가 만나면 이러한 모든 문제를 논의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 산발랏은 거짓소문을 퍼트렸습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해서 나라를 튼튼히 세워 왕이되고 반란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문이 이제 고레스 왕에게 들어가게되면 큰일이 날것이니 만나서 문제를 해결해 보자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찮은 소문이 뭐 영향을 줄까 생각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계속해서 헛소문을 내면 견디기 어렵습니다. 말이라는게 해명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애매한 소문이 들리면 해명하면 할수록 그게 더 커지게 되어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남자 신사 두분이 교회를 들려서 구경도 하고 사진도 찍고 그래서 그분들과 차한잔 마실 기회가 있었는데 그분들은 서울에서 큰 교회를 다니는 분들인데 덕소에 친구가 살아서 잠시 놀러 왔다가 비행기교회가 있어서 구경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제게 이런말을 했습니다. 여기 교회 목사님이 워낙 비행기를 좋아해서 비행기를 사다가 비행기를 건축했다는 소문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형비행기를 좋아하고 RC비행기를 날리고해서 어떤분인가 궁굼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거다 헛소문입니다. 제가 비행기 그렇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헛 소문이 덕소에 많이 돌아다녔는데 그 소문을 누가 냈을까요? 아마 우리 교회 다니던 사람이 냈을 것입니다. 아무튼 전 비행기 보다 모형 자동차를 더 좋아합니다.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왕의 신임을 받았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유다의 총독으로 와서 성벽을 재건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 산발랏이 하는 이야기가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있고 이 느헤미야의 가슴속에는 이스라엘의 회복 하나님나라의 재건이 그의 꿈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바사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나라를 재건한다는 소문이 뜬금없는이야기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문이 왕에게 전달된다면 왕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군사를 출동할것이고 그러면 이 느헤미야로서는 왕의 군대를 막을 만한 힘이 없었습니다.그런 거짓 소문이 왕에게 전달된다면 이 얼마나 두려운 일이겠습니까? 사실 여러분들이 느헤미야의 입장에 서있다면 그가 얼마나 마음 졸이고 속상해 하며 힘을 잃어 버릴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는 수산궁에 살 때 부족함이 없이 살았습니다. 술맡은 관원장으로 왕의 신임을 받는 최측근 2인자 였습니다.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처해서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예루살렘의 총독이 되었습니다. 자기 스스로 내려왔기 때문에 그는 온갖 모함을 당하고 위협을 당하고 온갖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지금이라도 애이 그만하자 내려놓고 왕궁으로 돌아가면 자기 자리를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포기하면 됩니다. 이제 성벽이 다 마무리 됬고 문짝다는일만 남았으니 이제 너희가 알아서 해라 나는 할바를 다했다. 그렇게 말하고 떠나버리면 그는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수산궁에서는 자기가 누릴 수 있는 자기 권력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느헤미야라면 돌아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지 않았을까요?
왜 여기서 사서 고생을 하는지 여기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다고 자기에게 특별히 유익이 있는것도 아닌데...개인적 입장으로 보면 바사 왕국의 술맡은 관원장이 좋지 그 자그마한 도시의 총독으로 있으면서 온갖 모함과 고생을 하는 것 다 그만두고 가겠다. 아마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되어 집니다.
그러나 여러분! 느헤미야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영적인 거인이었습니다.
영적거인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장애물 앞에서 포기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이 영적 거인입니다.
어떻게 포기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자기를 가로 막고 있는 장애물을 보면 주저 앉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등뒤에서 힘이되어 주시는 하나님을 보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습니다.
영적거인은 어디를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내앞에 놓여있는 문제를 바라보면 나는 영적
쫄짱부가 될것입니다. 그러나 내 뒤에 계신 나의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 포기하지 않는 영적거인이 될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복된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이 우리 아름다운덕소가족들이 영적거인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등뒤에 계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희 힘이 되십니다.
그 하나님이 여러분의 능력이 되십니다.
그 하나님이 여러분의 도움이 되십니다.
그 하나님이 여러분을 변함없이 사랑하시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이 지금도 나를 도와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지금까지 함께하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기도가 9절에 나와있습니다.
“이제 내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느헤미야는 두려웠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이 고백은
- 저들이 나를 죽일려고 합니다.
- 저들이 나에게 거짓 모함을 합니다.
- 저들이 나의 앞기를 가로막습니다.
- 나는 두렵습니다.
- 나는 힘이 떨어집니다.
- 나는 손을 들 수도 없을 정도로 힘이없고 다리도 후들거립니다. 그러면서 느헤미야가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에게 힘을 주옵소서” 이것이 느헤미야의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름다운 가족 여러분!
영적거인은 환경의 문제 때문에 포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영적거인은 두려움 때문에 포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영적거인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영적거인은 환경의 문제 때문에 두려움 때문에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예루살렘성을 재건하고 성벽을 재건하는 것은 느헤미야의 꿈이었습니다.
다 쓰러진 조국땅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것! 이것이 느헤미야의 비전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꿈을 꿉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그 꿈을 이루지 못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꿈을 꾸지만 기도하는 사람만이 그 꿈을 이룹니다.
느헤미야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품게하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힘들고 어려운 장애물앞에서 ‘하나님 나에게 힘을 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전 우리 아름다운덕소가족들이 기도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의 꿈을 향해 달려갈때에
여러분들이 기도의 소망을 갖고 달려갈때에
여러분들에게 어김없이 장애물이 올것입니다. 그러나 그 장애물은 뛰어넘는 방법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푸른 꿈을 갖고 고국땅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성벽을 재건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어김없이 장애물이 왔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께 주님! 이 장애물을 치워주십시오. 산발랏을 없애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제게 힘을 주십시오.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에게있는 이 인생의 장애물을 하나님 치워 주십시오! 어려운 시험좀 없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평탄하고 형통한 길을 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때론 내가 기도하는데 내가 예배중심적 삶을 사는데 왜 내게 이런 어려움이 있습니까?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이 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십니까? ‘하나님은 그 어려움을 뛰어넘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에게 어려움과 장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어려운 문제 고난의 문제 앞에 있습니까?
가끔 그 어려운 문제를 볼때마다 한숨이 나오고 걱정이 되고 두려움이 올때도 있습니다.
두주전 어떤 분이 이런말을 하셨습니다. 교회만 오면 머리가 아프다고...
사랑하는 여러분! 때론 우리를 힘들게 하고 머리를 아프게 하고 걱정을 주고 두려움을 주는 그 어떤 장애물앞에서 포기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느헤미야도 그랬습니다. 느헤미야는 망치들 힘도 없었습니다. 어쩌면 술맡았던 관원장! 옛날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손에 힘을 주시옵소서! 주의 원수들이 내가 힘이 없어서 더 이상 성벽을 재건하지 못하도록 조롱합니다! 하나님 내손에 힘을 주시옵소서!”
저는 우리 아름다운덕소가족들이 느헤미야와 같은 기도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앞에 있는 장애물들을 치워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장애물을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적거인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영적거인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어떠한 문제가 사라지기를 기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산발랏이 무너지기를 기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세상의 어떠한 유혹과 핍박이 있다할지라도 그 유혹과 핍박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이것이 여러분의 기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렇습니다.
기도가 영적거인을 만듭니다.
다 어렵습니다. 포기하지 마시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축복의 통로로 사용해 주실것입니다.
영적거인은 포기하지않습니다.
영적거인은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주여 새 힘을 주옵소서
느 6:1-9 / 서화평목사
우리 인생은 주께서 힘을 주셔야 살아갑니다. 내 힘, 내 지식, 내 경험만으로는 살아가기가 힘듭니다. 지금껏 살아온 것도 모두 주께서 은혜 주시고,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감사와 찬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느헤미야가 성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겪은 어려운 일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 70년 동안 폐허된 성을 재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주변 국가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집요한 방법으로 방해공작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과 위협 속에서도 느헤미야는 성을 재건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주께서 새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1. 위기의 때는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그 나머지 우리의 대적이 내가 성을 건축하여 그 퇴락한 곳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함을 들었는데 내가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문짝을 달기 전에 위기가 왔다는 것은 큰 일이 마무리되기 직전에 위기가 온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이젠 모든 것이 다 되었다 싶을 때', '이만하면 됐다'고 여길 때 위기가 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늘 겸손해야 합니다. 날마다 말씀앞에 서야 합니다. 신앙의 위기는 교만할 때 옵니다. 무슨 일을 벌여놓고 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못할 때 위기가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위기와 시험이 들어오는 문짝을 어서 달아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유혹과 시험을 이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2절을 보니 원수들은 평화협상이라는 가면을 쓴 채 오노 평지 한촌에서 만나자고 제의해 왔습니다. 그리고 4절을 보면 네 번씩이나 사람을 보내 만나서 평화적으로 대화를 나누자고 회유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만이었고 술수였습니다. 2절 후반부를 보면 "실상은 나를 해코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느헤미야를 오노 평지로 유인해낸 다음 그를 암살할 전략을 가진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만남을 거절했습니다. 위기를 잘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유혹의 만남, 회유하는 만남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결코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주께서 새 힘을 주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2. 위기와 도전은 가까이에서 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위기를 만날 때가 많습니다. 특히 영적으로 시험을 들게 하는 자는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가까이 있는 사람을 통해서입니다. 어쩌다 1년에 한 두 번 만나는 사람들이 시험을 줍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밤새도록 기도하고 영적으로 충만하여 집으로 돌아가면 가족 중에 은혜를 깨트리는 일들이 발생합니다. 잘 이겨야 합니다. 예수님도 보십시오. 그 당시 하나님의 일에 열심히 한다고 자부한 서기관, 바리새인들,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반대했고, 괴롭혔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적을 잘 알아야 합니다. 느헤미야를 방해한 자들은 선지자로 불리던 여선지 노아댜와 하나님의 전에서 두문불출하며 하나님 곁에 거하는 것으로 보였던 스마야입니다. 이들이 방해꾼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기에 협력할 줄 알았는데 협력은커녕 느헤미야의 생명까지도 노렸습니다.
사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좋은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부정적인 영향을 제일 많이 줍니다. 마치 스마야가 느헤미야에게 접근하듯 다정한 척 하고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파수군을 세우고 영적인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의 능력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늘 "주여 새 힘을 주옵소서"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산발랏이 다섯 번째는 그 종자의 손에 봉하지 않은 편지를 들려 내게 보내었는데"라고 했습니다. 그 편지 내용은 "네가 왕이 되기 위해 성을 재건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고 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너는 역적모의를 하고 있으니 그 죄를 면치 못할 것이다. 만나서 사실 여부를 허심탄회하게 얘기 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한마디로 중상 모략입니다. 온갖 수단을 동원한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것은 조작된 것이라"고 일축하고 의연하게 대처했습니다.(8) 사실 우리도 큰 일을 하다보면 중상모략을 당하고, 비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 일을 하려면 느헤미야처럼 의연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큰 나무는 태풍이 불어도 가지만 흔들립니다. 그러나 작은 나무는 뿌리 채 뽑힙니다. 위기와 도전은 만만치 않지만 겁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늘 가까이에서 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늘 주여! 새 힘을 주옵소서 간구하며 의지해야 합니다.
3. 주여 새 힘을 주옵소서.
느헤미야는 지치고 힘든 일들이 많았습니다. 이때 기도했습니다. 9절을 보면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이는 능력을 달라는 것입니다. 이 손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잘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힘있는 손으로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간구해야 합니다. 주여 새 힘을 주옵소서. 주께서 힘주시면 감당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그 어려운 도전과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주께서 새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의 과정 속에서도 만만치 않은 도전과 위기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새 힘을 주시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도 느헤미야처럼 원치 않는 오해로 갈등하고, 고민하고, 또 내 힘으로 풀지 못하는 문제를 안고 한숨 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한숨짓고 염려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느헤미야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주여 능력을 주옵소서" 하고 기도하여 더욱 힘있는 생활, 능력 있는 믿음생활을 해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합시다.
"주여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주여 새 힘을 주옵소서." 아멘.
반대를 넘어서는 성취
느 6:1-3, 15-16 / 이동원목사
뜻있는 일을 결심하고 시작했는데 시작하자마자 반대를 받아보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그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포기하셨습니까? 반대를 극복하고 마침내 꿈을 실현해 보셨습니까? 유명한 마더 테레사가 수녀가 되고 기도중에 인도함을 받아 2년후 그녀는 ‘사랑의 선교 수사회’를 설립합니다. 1952년에 그녀가 인도 칼카타에 가난하고 병든 버림받은 사람들을 돌아보기 위해 작은 건물을 준비하고 ‘니르말 흐리다이(순결한 마음)’라고 명명합니다. 그러나 그녀가 이 사역을 시작하자마자 직면한 것은 그 이웃에 있던 힌두교 지도자들의 격렬한 반대였습니다. 시위, 폭력, 위협이 계속되었고 그녀의 스태프들조차도 장소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가 죽지 않는 한 떠날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나를 부르신 이가 내게 맡기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우리가 시도하던 일들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그 원인은 크게 둘 중의 하나 일 것입니다. 하나는 내 잘못일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내 잘못과 상관없는 경우입니다. 내 잘못으로 겪는 어려움의 경우 문제의 해결은 오히려 간단합니다.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돌이키면 됩니다. 적어도 그것이 해결의 시작일수 있습니다. 문제는 내 잘못과 상관없이 우리가 시도하는 일들이 반대에 부딪히는 경우입니다. 기독교적 전망에서 관찰할 때 이런 반대는 주로 사단의 방해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단의 존재를 가르쳐 대적 마귀라고 합니다. 마귀는 반대하는 자입니다. 마귀의 반대는 특별히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시도할 때 더욱 현저히 작용하게 됩니다. 본문에서 느헤미야가 경험한 반대는 바로 이런 사단 마귀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도 테레사처럼 이런 반대를 넘어서서 예루살렘 성을 쌓아 올리는 역사를 성취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본문 15절을 보십시오."성 역사가 오십 이일만에--앨룰월 이십 오일에 끝나매" 느헤미야는 마침내 이 모든 반대를 극복하고 소명을 성취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절은 "--모든 대적이--낙담하였으니 이는 이 역사를 우리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16절)고 했습니다. 그런 반대가 있었고 그런 쉽지 않은 장애가 있었기에 성역사의 완성은 인간 느헤미야의 행함이 아닌 하나님의 역사임을 모두가 다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느혜미야가 직면한 반대는 무엇이었으며 그가 이런 반대를 어떻게 넘어서서 소명을 성취할수 있었을까요? 느헤미야가 직면한 반대는 바로 성도의 일상에서 날마다 직면하는 반대이기에 오늘 우리는 더욱 본문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 그러면 성도의 미숀을 방해하는 사단의 반대의 전략들과 우리의 준비는 무엇이어야 합니까?
첫째는, 타협의 전략입니다.
그것이 본문 1-4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느헤미야의 성역사를 방해하기 위하여 사단은 타협의 전략을 구사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줄곧 조롱과 방해로 일관하던 산발랏과 도비야, 게셈은 이번에는 "우리가 서로 만나 이야기하자"고 타협의 의사를 전달한 것입니다. 2절을 읽어 보십시오."산발랏과 게셈이 내게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고 한 것입니다. 우리 싸우지 말고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타협을 제안한 것입니다.
타협은 우리의 일상에서 좋은 의미로도 혹은 나쁜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는 말입니다. 우리가 시도하는 일의 목표가 동일할 때 혹은 목표는 달라도 양자 모두에게 선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판단될 때 우리는 타협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 특히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타협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넘쳐나는 극단적인 갈등과 대립은 모두 건강한 타협을 배우지 못한 때문입니다. 동일한 목표 그리고 공동의 선을 나누기 위한 타협은 결코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목표를 가진 두 사람, 두 진영 그리고 양자 모두에게 혹은 양자중 한 편에게 명백한 악을 초래할 때 타협은 용납될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산발랏, 도비야의 타협안은 궁극적으로 느헤미야를 파괴하고 성 역사를 중단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던 타협안이었습니다. 이것을 느헤미야는 분별하고 있었습니다. 2절의 마지막 부분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습니까?"---실상은 나를 해코자 함이라"
자, 이런 악의적인 타협에 대한 우리의 대비는 무엇이어야 합니까? 느헤미야의 응답은 무엇이었습니까? 첫째 분별했고, 둘째 거절했고, 셋째는 미숀에 집중했습니다. 2절 마지막 말씀은 적의 의도를 분별한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3절에 나타난 느헤미야의 대답을 읽어 보십시오. 느헤미야는 거절과 함께 자기 미숀에 집중할 것을 천명합니다. 사단의 의도는 결국 느헤미야가 소명을 수행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런 사단의 의도에 말려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런 정황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해야 할 일에 대한 집중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고난에서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것-그것은 주께서 주신 소명입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할 일은 하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둘째는, 중상의 전략입니다.
다시 말하면 음해의 전략입니다. 그것이 5-9절의 내용입니다. 타협으로 안 되자 거짓 소문을 퍼뜨리는 음해를 시도한 것입니다. 6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느헤미야가 페르샤 왕에 대한 모반을 시도하고 그가 왕이 되려 한다는 것입니다. 순 거짓말이지요. 이것이 바로 사단의 또 하나의 전략입니다. 우리 속담에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랴"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속담은 본문에 비추어 보면 사실이 아닙니다. 아니 땐 굴뚝에도 연기가 납니다. 하나님의 사람과 하나님의 사역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사단은 자주 음해적 소문(거짓 류머)을 퍼뜨리는 전략을 구사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요한8:44에서 사단을 가르쳐"--저는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런 거짓의 도구가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가 거짓을 말하는 순간 우리는 사단의 도구인 것입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이 아닌 거짓말과 중상, 험담으로 동네 사람들에게 돌이킬수 없는 성처를 입히고 돌아다니던 사람이 랍비를 찾아옵니다. 그리고 랍비에게 자기같은 사람도 용서 받을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랍비는 그에게 "정말 용서받기를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렇다"고 하자 랍비는 "한줌의 새의 깃털을 주면서 이 깃털들을 마을 동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당신이 한번이라도 음해한 일이 있는 이웃들의 집집마다 다니며 그집앞 문턱에 깃털을 한개씩 놓고 오라"고 합니다. 그가 그렇게 하고 돌아 오자 이번엔 "다시 그집들로 돌아가 그 깃털을 회수해 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다시 이웃집들로 갔을 때는 깃털들은 바람에 날아가 버린 후였습니다. 그가 힘없이 돌아오자 랍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참회하는 자들을 용서하지만 당신이 음해한 거짓말은 다시는 회수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충고합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느헤미야처럼 음해의 대상이 될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습니까? 느헤미야는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두가지입니다. 첫째 사실을 밝히고, 둘째 자기의 미숀에 집중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8절을 읽어 보십시오. "--너희의 말한바 이런 일은 없는 일이요 네 마음에서 지어낸 것이라" 사실을 밝힌 것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그 문제로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대신 기도합니다. 모든 진실을 아시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단순히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기도가 아니라 자기의 사명인 예루살렘 성 건축에 집중할수 있는 힘을 달라는 기도였습니다."--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혹시 우리 중에 중상과 음해에 시달리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사실을 밝히십시오. 그리고 더 이상 그 일에 매달리지 마시고 기도하십시오. 더 중요한 주께서 당신에게 맡기시는 소명을 이루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내 자존심 보다도 더 중요한 것--그것은 소명입니다. 마지막 숨을 거둘 때 후회없는 결산을 위해 중요한 것, 그것은 자존심보다 더 소명의 성취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도피의 전략입니다.
마지막으로 산발랏과 도비야는 스마야라는 거짓 선지자를 매수하여 거짓예언을 통해 느헤미야로 성전에 도피하여 숨게 함으로 사역의 현장에서 도피하게 하는 전략을 구사합니다. 그것이 10-14절까지의 내용입니다. 10절을 읽어 보십시오. 여기 나오는 스마야라는 사람은 12-13절에 의하면 뇌물 받고 고용된 거짓 선지자였던 것입니다. 그는 느헤미야에게 너를 죽이려 하는 자들이 있으니 성전에 들어가 도피해 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만일 느헤미야가 그렇게 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무엇보다 예루살렘 성 역사는 중단될 것입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사역의 현장에서 도피한 비겁자로 소문날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의 도피의 전략이었습니다. 어찌해서든 사역의 현장에서 우리를 떠나게 함으로 더이상 하나님의 일이 진척되지 못하게 하는 것-그것이 사단의 느헤미야 공작의 핵심적 전략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역자들에 대한 전략인 것을 아십니까? 목자의 자리, 교사의 자리, 섬김의 자리를 떠나고 싶은 유혹을 받으신 일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당신을 향한 사단의 공작일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느헤미야의 대응책은 무엇이었습니까? 두가지입니다. 첫째는 분별이고, 둘째는 직면입니다. 종교인의 소리라고 다 믿지 마십시오. 세상에 가장 가짜가 많은 것이 종교의 영역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일찍이 철학자 파스칼은 거짓 종교의 범람을 가장 명쾌하게 설명했습니다. "왜 가짜가 많은가? 진짜가 있기 때문이다"고. 아무도 값싼 다이아몬드를 위조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가치가 있는 곳에 거짓과 유사한 가짜 모조품이 범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영을 시험하고 분별하라고. 거짓 그리스도를 분별하라"고 촉구하지 않습니까? 느헤미야는 스마야의 거짓 예언을 분별하고 사역의 현장을 떠나 성소로 도피함을 거절했습니다. 그는 거짓 선지자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도피가 아닌 직면을 선택합니다. 그는 도피가 문제의 해결이 아닌것을 알았습니다. 현실이 어렵다고 해서 도피를 선택하지는 마십시오. 현실이 어려울수록 그 현실에 직면해야 합니다. 직면하면 그 현실을 감당할수 있는 용기는 주께서 허락하실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직면의 용기를 어떻게 얻을수 있습니까?
저는 부분적으로 느헤미야의 현실에 직면하는 용기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아래 살고 있었던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모세의 법인 말씀에 의하면 제사장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예컨대 민수기 18:7에 보면 "성소에 가까이 하는 외인은 죽이울지라"고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말씀에 순종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무엇보다 그가 순종해야 할 가장 긴급한 명령은 성의 건축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본문 11절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이르기를 나 같은자가 어찌 도망하며 나 같은 몸이면 누가 외소에 들어가서 생명을 보존하겠느냐. 나는 들어가지 않겠노라" 그는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라도 말씀에 순종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는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라도 현실에 직면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현실이 어렵더라도 도피하지 마십시오. 도피는 결코 해결이 아닙니다. 최근에 우리 사회에 급증하는 자살율의 증가는 인생 문제의 손쉬운 해결로 도피를 선택하려는 경향 때문입니다. 자살은 해결이 아닙니다. 자살은 성경적으로 인생을 죄로 마무리하는 가장 무책임한 도피에 불과합니다. 자살하지 마십시오. 도피하지 마십시오. 직면하십시오. 직면이 두렵거든 기도하십시오. 14절의 느헤미야의 기도를 기억하십시오. "내 하나님이여 도비야와 산발랏과 여선지 노야다와 그 남은 선지자들 무룻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의 소위를 기억하옵소서" 이 기도로 느헤미야는 새 힘을 얻었습니다. 그는 백성들과 더불어 마침내 성의 건축을 실현할수 있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그를 향한 모든 반대를 넘어서서 소명을 성취하는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의 설교를 마더 테레사의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칼카타에 요양소를 열자 마자 반대에 부딪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도피하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반대를 개의치 않고 기도하면서 해야 할 일에 전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의 사역을 반대하던 힌두교 성직자였던 사람이 결핵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병원에서 퇴출당한 이야기를 보고 받고 그를 요양소에 데려옵니다. 최선을 다해 그를 돌보고 그가 숨을 거두었을 때 그의 시신을 힌두교 사원으로 돌려보내어 장례하게 했습니다. 이 사건이 힌두교 지도자를 감동시켜 그녀의 사역이 인도인들, 그리고 인도 정부의 지지와 사랑을 받는 극적인 전기를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반대를 넘어 비전을 성취하게 된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는 그녀가 그런 모든 반대를 극복하고 소명에 집중할 수 있었던 삶의 비밀에 대하여 질문받았을 때 이런 유명한 대답을 남겼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한 방향 밖에는 바라 볼 수가 없습니다. 그는 뒤를 돌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계획을 가질 수가 없답니다.” 그렇습니다. 주께서 여러분과 저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심을 믿으신다면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여러분과 저도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계획 때문에 사는자가 아니라 그분의 맡기신 일을 위해 사셔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한 방향밖에는 바라 볼수가 없는 자입니다. 행여나 뒤를 돌아보려고 하지 마십시오. 다만 소명의 십자가를 질 힘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소명의 도구로 쓰임받게 될 것입니다.
적들의 음모를 분쇄하는 느헤미야
느 6:1-19 / 김동국목사
성공한 삶을 살고 싶으시다면 느헤미야의 영적 분별력을 소유하십시오. 영적 분별력은 믿음의 사람으로 하여금 승리의 깃발을 휘날리게 할 것입니다.
‘No pay No gain’이란 말처럼 대가 없는 승리는 없습니다. 비전을 가지고 전진하는 느헤미야를 기다리는 것은 평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느헤미야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비전 때문에 많은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대적자들은 집요하게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 끈질긴 기도, 자발적인 헌신을 통해서 위기를 극복하고 드디어 성벽을 완성합니다.
어려운 상황 가운데 성벽이 완성되자 대적자들은 당황하고 놀랍니다. 그러나 대적자들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단은 전쟁에서 패배한 것처럼 보여도 결코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많은 부주의한 그리스도인들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서도 끝까지 경계하지 못해 승리를 잃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사단의 마지막 전술은 ‘승자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승리자를 희생자로 삼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승리의 여유를 틈타는 사단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 조차도 그들의 승리 이후에 방심해서 실족하는 것을 성경에서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도 그런 경우였습니다.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와 아세라의 선지자들과 850대 1로 싸워 이겼습니다. 그러나 그 일로 이세벨이 자신을 죽이겠다는 소문을 듣고 도망칩니다. 그리고 로뎀 나무 아래서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가져가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치열한 싸움 가운데 신앙적 위기가 다가온 것이 아닙니다. 성공하고 축복을 누린 다음, 이제 좀 쉬려고 하는 그 마음의 여유를 틈타서 사단이 베일 속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이 우리 인생에서 가장 무서운 위기의 순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느헤미야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성공을 눈 앞에 둔 바로 그때 대적자들이 그를 공격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입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그 나머지 우리의 대적이 내가 성을 건축하여 그 퇴락한 곳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함을 들었는데 내가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라
대적들은 공격의 양상을 달리했습니다. 4장과 5장에서 대적들은 총체적으로 공격합니다. 전면전이었습니다. 그런데 6장에 들어오면서 대적들은 공격의 방향을 바꿉니다.
새로운 공격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 번째, 느헤미야 개인을 공격한다는 사실입니다. 전쟁터에서 저격수가 상대편 지휘관을 저격하는 것처럼 대적자들은 느헤미야를 목표로 집요하게 공격합니다. 두 번째, 공격방법이 다 위장되어 있습니다. 겉으로는 싸우자는 것인지 도와주려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평소에 하나님의 가르침을 잘 따랐기 때문에 이 공격을 대비하고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영적 분별력을 통해 위장된 공격에 빠지지 않고 승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성공한 삶을 살고 싶고 다시는 실패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다면 오늘 느헤미야의 분별력을 소유하십시오. 성공의 문턱에서 결코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영적 분별력은 믿음의 사람으로 하여금 승리의 깃발을 영원토록 휘날리게 할 것입니다.
대적들이 어떻게 느헤미야를 공격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산발랏과 게셈이 내게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코자 함이라
대적자들이 느헤미야를 만나자고 합니다. 그들은 “사실 우리는 당신을 반대했지만 당신은 우리의 반대를 물리치고 성벽을 완성했소. 이제 우리는 당신을 유대 총독으로 인정하니 정책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떻게 타협할 것인지 오노에서 만나 함께 이야기 합시다.” 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피곤하고 지친 유대인들에게 이런 대화와 타협의 제의는 달콤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대화란 좋은 것이다. 이제 우리는 과거를 씻고 화합할 때가 됐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때 성벽은 아직 완전히 재건되지 않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신앙적으로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했습니다. 만일 느헤미야가 긴장을 늦추고 승리의 상상에 사로잡혀 오노 평지로 갔다면 십중팔구 느헤미야는 대적들의 음모에 의해 아무도 모르는 외진 곳에서 살해당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벽 재건 사업은 그대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오노 평지에서 만나자는 그들의 제의를 거절합니다.
행동하기 전에 분별하라
우리는 때로 ‘아니오’라고 거절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행동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했습니다.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적절한 시기, 적합한 때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인 것입니다. 바로 이 분별력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분별력의 중요성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1장 10절은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절은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많은 위기와 난처한 상황 가운데서 행동하기 전에 먼저 분별할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분별해 나갈 수 있습니까? 그 첫번째 원칙은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2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합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사건을 분석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지혜로 그 상황을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자신의 마음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새롭게 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내가 하나님의 뜻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것인가?’를 생각했을 때 느헤미야는 적들의 지혜가 거짓이라는 것을 쉽게 간파할 수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를 청한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유린하고 착취했던 사람들입니다. 단지 경제적으로만 착취한 것이 아니라 신앙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린했던 사람들입니다. 우상과 간음의 문화로 이스라엘을 온통 더럽혔던 대적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은 그런 대적자들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성벽을 처음 재건하기 시작할 때 느헤미야는 그들을 향해 분명히 선포했습니다. ‘오직 너희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명록도 없다. 우리는 너희와 함께 하지 않겠다.’ 무너진 성벽보다 더 무너진 것은 이스라엘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이들과 타협하면 성벽은 재건한다 해도 신앙의 재건은 이루어 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함을 회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 사람과 다릅니다. 거룩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거룩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이 하자.’(고후 6:14~7:11)
성벽을 재건하는 것은 거룩의 영역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새롭게 한 느헤미야는 이 분명하고도 확실한 목적을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적자들이 만나자고 한 제의를 거절합니다. 그리고 다시 힘을 모으고 마음을 집중해서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어 나가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 지켜야
느헤미야에게 있어서 느헤미야를 이끌어 나가는 힘은 하나님을 향한 집중력이었습니다. 우리 일상의 삶에서 우리를 이끌어나가는 힘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에게 거룩한 사명을 맡기셨다는 그 소명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성령에 사로잡혀서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비전을 이루어 나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느헤미야를 은밀하게 제거하려는 음모는 그의 분별력과 집중력에 의해 와해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러자 대적자들은 이제 공개적으로 느헤미야를 모함에 빠뜨립니다.
느헤미야 당시에 선동죄는 중죄였습니다. 왜냐하면 페르시아 왕들은 모반을 가장 두려워해서 어떤 반역의 낌새만 느껴져도 대상자를 처형하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산발랏은 봉하지 않은 편지를 느헤미야에게 보냅니다. 그 내용은 느헤미야가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소문이었습니다. 6절과 7절을 보겠습니다.
그 글에 이르기를 이방 중에도 소문이 있고 가스무도 말하기를 네가 유다 사람들로 더불어 모반하려 하여 성을 건축한다 하나니 네가 그 말과 같이 왕이 되려 하는도다 또 네가 선지자를 세워 예루살렘에서 너를 들어 선전하기를 유다에 왕이 있다 하게 하였으니 이 말이 왕에게 들릴찌라 그런즉 너는 이제 오라 함께 의논하자 하였기로
황당하고도 위험한 소문입니다. 산발랏은 느헤미야에게 ‘이방에까지 네가 모반하려한다는 소문이 났으니 내게로 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함께 의논하자.’하고 다시 만나자는 제의를 합니다. 산발랏은 이 제안을 통해서 느헤미야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궁지로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만약 산발랏의 제의 대로 그를 만난다면 그것은 느헤미야가 소문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느헤미야가 산발랏을 만나러 가지 않으면 산발랏은 편지에 언급한 것처럼 아닥사스다 왕에게 느헤미야의 소문을 이유로 삼아서 그를 고발할 것입니다. 그러면 아닥사스다 왕은 느헤미야를 불러 들일 것이고 그 결과에 따라 느헤미야는 죽임을 당할 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바로 이런 모략의 덫을 가지고 산발랏은 느헤미야를 중상모략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단체나 사람을 헐뜯고 흉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익명의 재치가는 험담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전에 서둘러 다른 사람에게 말해야 하는 뉴스다.’ 때로 우리는 떠도는 험담 때문에 많은 상처를 주고 받습니다. 교회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어느 한 청교도는 자신이 중상모략의 범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어떤 사람의 소문을 들을 때 다음과 같이 결정하기로 자신의 행동의 원칙을 정했다고 합니다. ➊ 사실에 근거한 소문인가? ➋ 내가 그것을 확인했는가? ➌ 소문이 사실일지라도 내가 그것을 듣고 남에게 전달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인가? 그 말을 전함으로 해서 다른 형제들에게 유익을 전해줄 수 있는가?’ 그는 이 세 가지 질문을 자신에게 던짐으로 해서 자신의 혀로 짓는 잘못을 범치 않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남의 얘기를 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살펴보고 진정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인지 한 번 돌이켜 봐야 될 것입니다.
‘기도’ 억울함을 푸는 열쇠
느헤미야는 소문을 듣고 산발랏에게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정확하고 빠르게 통보합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자신이 아무리 변명한다고 할지라도 그 소문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변명도 할 수 없고 자신을 증명할 수 없는 난처한 상황에서 느헤미야는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의 손에 힘을 주십시오’라고 느헤미야는 기도합니다.
난처한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를 해결해 나가는 두 번째 영적 분별력은 ‘기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려운 상황 가운데 주님께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께 기도한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해야 할 지를 가르쳐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시편 32편 8절은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당한 상황이 말로 설명할 수 없고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라면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억울함을 푸는 열쇠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결박을 푸는 능력입니다. 느헤미야는 기도함으로써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 지를 결정하고 다시 한 번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그 능력에 의지해서 선한 목적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입니다.
세 번째 느헤미야를 향한 공격은 신앙적인 것이었습니다. 뇌물을 받은 스마야 제사장이 느헤미야를 진정 위하는 것처럼 꾸미고 가짜 예언을 합니다. 그는 느헤미야를 유인하기 위해 느헤미야와 함께 일하지 않고 자기 집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느헤미야는 함께 일해야 하는 동료가 나오지 않자 그의 집을 방문합니다. 10절에서 13절을 보겠습니다.
이 후에 므헤다벨의 손자 들라야의 아들 스마야가 두문불출하기로 내가 그 집에 가니 저가 이르기를 저희가 너를 죽이러 올터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외소 안에 있고 그 문을 닫자 저희가 필연 밤에 와서 너를 죽이리라 하기로 내가 이르기를 나 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며 나 같은 몸이면 누가 외소에 들어가서 생명을 보존하겠느냐 나는 들어가지 않겠노라 하고 깨달은즉 저는 하나님의 보내신바가 아니라 도비야와 산발랏에게 뇌물을 받고 내게 이런 예언을 함이라 저희가 뇌물을 준 까닭은 나를 두렵게 하고 이렇게 함으로 범죄하게 하고 악한 말을 지어 나를 비방하려 함이었느니라
스마야는 느헤미야를 그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율법, 모세의 율법을 범하도록 교묘하게 꾀고 있습니다. 스마야로부터 ‘오늘 밤에 대적들이 너를 죽이러 올텐데 내가 제사장이 아니냐. 그러니 너는 나와 함께 외소 즉 성소에 가서 몸을 피하자’라는 제의를 받으며 느헤미야는 한 쪽 마음에서 동요가 일어났습니다.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죽는다면 성벽은 누가 쌓을 것인가? 스마야 말을 따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일편 그런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율법에는 ‘성소에 가까이 간 외인은 죽이라’고 명령되어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도 성소에 가까이 했다가 문둥병에 들린 사실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마음에서 율법을 깨달은 느헤미야는 “나 같은 자가 어찌 외소에 들어가서 생명을 보존하겠는가? 나는 그렇게 위대하거나 뛰어난 사람이 아니다. 나는 들어가지 않겠노라.” 이렇게 말하는 느헤미야의 저의 속에는 내가 내 목숨을 보존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들어있습니다. 나는 사람을 따라 살지 않겠다는 결심이 있는 것입니다.
‘말씀’ 따를 때 난관 타개
느헤미야는 사람 중심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상황을 따라 자신의 행동을 결정해오지 않았습니다. 항상 그는 기도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고 처신해왔습니다.
위기의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세 번째 원칙은 바로 ‘말씀’입니다. 눈 가리고 아웅 하듯이 눈 앞의 상황을 벗어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가 능력인 것입니다. 빛이 어둠을 비출 때 어둠이 사라집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그렇습니다. 상황을 따라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서 선택해 나갈 때에 난관은 타개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종종 믿음의 삶을 살아가면서 이런 유혹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교육자나 교회 직분자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서 그 사람의 사상이나 철학을 말하고 그것을 따라오라고 회유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들으며 정말 이렇게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을 잘 알지 못하는데 교회 생활도 많이 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 이렇게 하라고 하면 따라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럴 때에 사람이 아닌 말씀이 중요한 겁니다. 말씀을 따라 마음을 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틴 루터가 카톨릭의 전통에 대해서 ‘아니오’라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종교개혁은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상황가운데서 우리의 행보를 결정하는 원칙은 바로 말씀입니다. 진리를 사랑하십시오. 진리에 순종하십시오. 진리를 위해 대가를 지불하십시오. 그렇게 행한다면 진리의 능력이 여러분의 삶을 축복할 것입니다.
비전을 이루기 위해
느 6:1-14 / 조상호목사
한국인의 심리를 빗댄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여객기로 개조된 B29 전투기가 운항 중에 그만 엔진이 고장나고 말았습니다. 하는 수없이 낙하산으로 비상 착륙을 시도하는데, 다들 겁이나 뛰어내릴 생각들을 안 합니다. 비행기는 곧 추락할 것 같은데 다들 주춤거리고 있으니 안되겠다 싶어 기장이 독일인 승객부터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히틀러의 명령이다. 뛰어내리시오"고 했더니, "하이! 히틀러"하며 뛰어내렸습니다. 기장은 일본 사람에게 "천황폐하의 명령이다. 뛰어내리시오"라고 했더니 일본 사람 역시 "소우데쓰까?"하며 밑으로 뛰어내렸습니다. 프랑스 사람에게는 "여보시오. 저 아래 낙하산 퍼지는 모습을 보시오. 얼마나 멋집니까? 당장 뛰어내리시오"라고 했더니 두말 않고 뛰어 내렸습니다. 미국 사람에게는 "이미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뛰어내렸으니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얼른 뛰어 내리시오"라고 했더니, 역시 군말 없이 미국 사람도 뛰어내렸습니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사람은 누구일까요? 한국 사람이었습니다. 기장이 그에게 가까이 오더니 귀에 대고 뭐라고 소곤소곤 말을 건넸습니다. 그러자 한국인이 "정말이죠?"하며 뛰어내렸습니다. 여러분, 기장이 뭐라고 했기에 한국인이 당장 뛰어내렸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뛰어내리는 데 돈 안받아요. 공짭니다"라고 그랬답니다.
아마 이 이야기는 공짜를 좋아하는 한국인의 심리를 빗대어 누군가가 만들어낸 이야기일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공짜를 좋아하는지 옛말에 '공짜라면 똥도 가져간다'는 말도 있습니다. 정말로 공짜를 좋아합니다. 물론 저도 공짜를 좋아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아마 공짜를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의 생각 속에 공짜 심리가 팽배하다보니, 모든 것을 공짜로 얻으려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땀을 흘리지 않고 살려고 합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서 얻으려고 합니다. 노력도 하지 않고 편하게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뭐라고 부르는 줄 아십니까? 도둑놈이라고 부릅니다. 그러한 심보를 도둑놈 심보라고 부릅니다.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들이 손쉽게 금메달을 딸 수 없습니다. 출전하기 전에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뼈를 깎는 훈련을 합니다. 때로는 가족을 떠나 그들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절제하면서 1년, 2년, 4년, 10년 동안 기다리며 피나는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한 대가를 통해 금메달이 주어집니다. 한번 말씀 드린 적이 있지만, 이봉주선수가 보스톤의 월계관을 쉽게 얻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심장이 터져라고 달리고, 또 달리며 훈련한 대가를 통해 영광스러운 월계관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체중감량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영자라는 게그우먼이 체중감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성형외과에 가서 지방흡입술을 받았던지, 하루에 음식을 조금만 먹고 살았든지, 매일 달리기를 했든지, 아무튼지 10개월 동안 살을 빼기 위한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98Kg의 체중이 63Kg의 체중으로, 44인치의 허리가 29.5인치 허리로, 줄어든 것입니다. 저절로 체중이 빠진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목표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목표를 세울 수 있습니다. 비전을 세울 수 있습니다. 꿈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심은 대로 거둔다, 거두기 위해서는 힘써 심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갈6:7).
오늘 본문이 바로 이와 같은 내용의 말씀입니다. 본문 6장에서 가장 중요한 절은 15절입니다. "성 역사가 오십이 일 만에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 느헤미야는 그렇게도 소원하던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벽을 52일 만에 기적적으로 재건했습니다. 그는 꿈을 이루었습니다. 비전을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이 비전이 쉽게 성취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세운 목표를 이루기 위해, 꿈을 이루기 위해, 비전을 이루기 위해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는 꿈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비로소 그 꿈을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느헤미야가 어떻게 해서 그의 비전을 이루었고 우리 또한 우리가 세운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문제에 흔들리지 않아야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있습니다. 그 문제의 산이 크든지 작든지 그것을 넘어가지 않으면 결코 비전을 이룰 수 없습니다. 느헤미야는 목숨걸고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을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어려움과 문제를 극복했습니다. 이제 문짝만 달면 모든 예루살렘 성벽 재건은 완성이 됩니다. 그러면 백성들과 느헤미야는 두발 뻗고 잠잘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벽재건의 비전을 성취하는 일은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1절과 2절을 보겠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그 나머지 우리의 대적이 내가 성을 건축하여 그 퇴락한 곳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함을 들었는데 내가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라. 산발랏과 게셈이 내게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코자 함이라." 오노 평지는 예루살렘 성에서 4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적들은 느헤미야에게 사람을 보내어 오노 평지에서 만나자고 요청하였습니다. 이 때 느헤미야는 어떻게 처신하고 있습니까? 3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곧 저희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이르기를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떠나 정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 하매" 느헤미야는 오노 평지로 나오라는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4절에 의하면 적들은 한번도 아니고 네 번씩이나 사람을 보내어 느헤미야에게 오노 평지에서 만나자고 전갈을 보내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문제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벽 재건이라는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유혹과 음모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자세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느헤미야와 같은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지난 수요일에 어느 자매님께서 점심식사를 대접해주셔서 다른 집사님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 프로 골프선수인 한 형제님이 동석하게 되었습니다. 함께 식사를 하는 도중에 그 형제님이 골프천재라고 하는 타이거 우즈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제 기억으로는 아마 그 형제님 이렇게 이야기 한 것 같습니다. "목사님, PGA 골프경기에 나가는 선수들 중에 상위 50위 이내에 드는 선수는 다 우승후보입니다. 이 말은 50위에 드는 선수는 누구나 다 우승할 수 있는 실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승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는 타이거 우즈 같은 선수가 우승을 합니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마지막 홀이나 연장전에 돌입하면 극도의 긴장감으로 인해 골프채를 잡은 손이 마구 떨려서 퍼팅에 성공을 못합니다만, 타이거 우즈는 연장전이나 막상막하의 경기에서도 어지간해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타이거 우즈 선수는 대단한 선수입니다."
저는 이 말을 들으면서 크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비록 저는 골프의 문외한이지만, 골프를 잘 치려면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골프채를 잡은 그립이 흔들리지 않아야 하고, 어깨가 흔들리지 않아야 하고, 발의 스탠스가 흔들리지 않아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골프뿐만 아니라, 볼링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을 굴린 후 계속해서 굴린 자세를 유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양궁에서도 활을 쏜 후에도 움직이지 않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흔들리지 않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세운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세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공부하는 학생들과 같은 경우에는 School C를 준비하고 있다면, Bursary를 준비하고 있다면, 유혹하는 친구들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세운 목표를 이룰 수 없습니다. 기말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 청년들은 기말시험 준비를 위해서 '노래방 가자고, 당구장 가자고 유혹하는 친구들을 '예수 이름으로 물러가라'고 단호하게 물리쳐야 합니다. 이곳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성공하려고 목표를 세웠다면 어떠한 부정적인 말에도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어떠한 비전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어떠한 목표가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오늘 느헤미야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도전해 오는 유혹을 단호하게 거부하시기 바랍니다. 장애물을 극복하고 성문의 문짝을 단 느헤미야처럼, 문제를 극복하여 비전의 마지막 문짝을 다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원리와 방법대로
느헤미야는 비전을 성취하기 위하여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인 꼼수를 내려놓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원리와 방법을 따랐습니다. 10절과 11절을 보겠습니다. "이 후에 므헤다벨의 손자 들라야의 아들 스마야가 두문불출하기로 내가 그 집에 가니 저가 이르기를 저희가 너를 죽이러 올 터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외소 안에 있고 그 문을 닫자 저희가 필연 밤에 와서 너를 죽이리라 하기로 내가 이르기를 나 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며 나 같은 몸이면 누가 외소에 들어가서 생명을 보존하겠느냐 나는 들어가지 않겠노라 하고" 자신의 친구이자 선지자였던 스마야라는 사람이 웬일인지 며칠동안 얼굴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이것이 책략인지 모르고 친구에게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그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스마야가 느헤미야를 위해 주는 척 하며, 적들이 너를 죽이려고 하니 성전 안에 들어가서 적들을 피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소나 지성소에는 누가 들어갈 수 있습니까?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거룩한 곳입니다. 민수기 18장 7절 이하에서 여호와께서 레위 자손인 제사장들에게 직임을 맡기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와 네 아들들은 단과 장 안의 모든 일에 대하여 제사장의 직분을 지켜 섬기라. 내가 제사장의 직분을 너희에게 선물로 주었은즉 거기 가까이하는 외인은 죽이울지니라." 제사장 외에 다른 사람이 성소에 들어가면 다 죽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소위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이 느헤미야에게 그곳으로 피신할 것을 권유하고 있습니다. 성전 안에 들어가면 그 누구도 찾아오지 못하게되고 결국 느헤미야는 목숨을 건지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 때 느헤미야는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느헤미야는 죽더라도 성전 안에는 들어가지 않겠노라고 합니다. 그는 제사장이 아니기 때문에 그 자신이 성전 안에 들어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랐습니다. 비록 그가 적들의 공격을 받아 어려움에 처한다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님 댁을 심방 하다 보면, 강아지를 키우는 가정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가정에서 느낀 것은 요즘 강아지는 정말 호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밥이 따로 있습니다. 옛날처럼 주인이 먹고 난 밥찌꺼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따로 개밥을 사다가 줍니다. 뿐만 아닙니다. 개가 먹는 간식이 있습니다. 또 심심하지 말라고 개가 먹는 껌도 있습니다. 개털을 빨기 위한 개샴퓨, 개가 가지고 노는 개장난감, 개가 입는 개팬티 까지 정말 없는 것이 없습니다. 개가 머리털 손질 한번 하는 데에 드는 비용은 사람 머리 퍼머하는 것보다 더 비싸다고 합니다. 또 개가 새끼를 낳을 때 고통을 덜어준다고 제왕절개 수술까지 한다고 합니다. 사람은 의료보험이 있어도 개는 의료보험이 없기 때문에, 개를 병원에 한번 데리고 가면 사람이 가는 것보다 돈이 더 든다고 합니다. 정말 '개팔자가 상팔자'라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그런데 가정에서 키우는 강아지를 보면서 새삼스럽게 느낀 것은 강아지는 정말 하는 것도 별로 없는데 주인에게서 사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주인의 말을 잘 듣고, 주는 대로 잘 먹고, 또 그 먹은 것을 잘 싸기만 해도 주인의 귀염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와 하나님 관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슨 대단한 일을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잘 따르면 우리는 사랑을 받는 줄로 믿습니다. 주인의 말을 잘 듣는 개가 주인의 사랑을 받는 것처럼, 우리가 천지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말씀대로만 살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원리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랐습니다. 바로 이러한 느헤미야와 같은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여러분, 인간적인 꼼수를 부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잔머리를 굴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잔머리 굴려봐야 문제가 해결되기는 커녕, 오히려 머리털만 빠지고 골치만 아픕니다. 여러분, 잔머리 굴리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원리와 방법대로 비전을 성취하시기를 바랍니다.
3) 기도함으로
마지막으로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5~7절을 가만히 살펴보면 적들이 느헤미야를 중상모략을 하고 있습니다. 적들은 "느헤미야가 사람들을 선동해서 왕이 되려고 한다. 느헤미야는 성벽 건축에는 관심이 없고 이 일을 통해서 그가 왕이 되려고 한다"는 악성 루머를 퍼뜨렸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이러한 악성 루머 때문에 고통을 당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헛소문 때문에 밤새도록 한숨 자지 못하고 고통 가운데 밤을 지새운 적이 있을 것입니다. 느헤미야에게 위기가 닥쳤습니다. 성벽 건축을 완성시키기는 커녕 동족들로부터 사리사욕을 위해 동족들을 이용한다는 손가락질 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더 이상 그의 비전 성취는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중상모략에 느헤미야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습니까? 그는 8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하는 말은 사실 무근이며 너희들이 멋대로 지어낸 유언비어다"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그는 자질구레하게 하나 하나 따지지 않았습니다. 긴 소리로 변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변명이나 해명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했습니다. 9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저희가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저희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정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 여러분 느헤미야의 기도를 자세하게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하나님, 나의 누명을 벗겨 주옵소서. 저는 억울합니다. 저들이 오히려 음모를 꾸미고 있고 저에게 누명을 씌우고 있습니다. 저들을 멸망시켜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자기를 방어하기 위한 기도를 드린 것이 아니라,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나에게 맡겨주신 성벽 재건의 일을 완수할 수 있도록 힘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느헤미야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또 14절을 보겠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도비야와 산발랏과 여선지 노아댜와 그 남은 선지자들 무릇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의 소위를 기억하옵소서 하였노라." 그는 거룩한 주님의 사역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비전을 이루기 위해 철저하리 만큼 기도했습니다. 물론 그도 인간이기에 속이 상했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나쁜 소문을 듣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을 것입니다. 수많은 박해를 받으면서 좌절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때마다 기도했습니다. 기도함으로 비전을 이루어갔습니다. 기도함으로 목표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여러분, 기도로 여러분들이 세운 비전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기도로 어려움을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없이 행하는 일은 위험스럽습니다. 일과 기도는 마치 삶이라는 비행기의 두 날개와 같습니다. 날개 중 어느 한쪽이라도 없으면 삶이라는 비행기는 날아갈 수 없습니다.
어느 믿음 좋은 할아버지가 손자와 함께 보트를 탔는데 그 보트를 젖는 노에 이런 문구를 새겨 놓았습니다. 한 쪽 노에는 "기도하라"고 썼고, 다른 한쪽 노에는 "일하라"고 새겨 놓았습니다. 손자가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일만 열심히 하면 되지 굳이 기도를 할 필요가 있을까요?" 할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도하라"고 새겨진 노를 끈으로 묶어 놓고 "일하라"고 씌어있는 노만 젖게 했습니다. 그러자 배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뱅글뱅글 원을 그리며 제자리에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때에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말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일만하면 이 보트처럼 앞으로 나갈 수 없단다.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것이지. 또 일은 안하고 기도만 해도 역시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단다. 일하고 기도하며, 기도하고 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바른 방법이란다."
그렇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비전을 이룰 수 없습니다. 비전은 내가 가진 능력이나 재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써 이루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해야 합니다. 느헤미야의 기도가 우리에게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주님이 주신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내 발을 힘있게 하옵소서. 마음껏 주님을 찬양하기 위해 내 목소리를 힘있게 하옵소서." 여러분, 여러분들이 세운 비전을 기도로 이루시기 바랍니다. 기도로 어려움을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을 시작할 때에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지만, 마침내 성의 문짝을 다 달았습니다. 수많은 적들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무너진 성벽을 재건했습니다. 15절을 보겠습니다. "성 역사가 오십이 일 만에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 드디어 그는 비전을 성취했습니다. 느헤미야는 비전의 사람일 뿐 아니라, 비전을 성취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느헤미야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비전의 사람 느헤미야, 비전을 성취한 느헤미야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세상에는 꿈을 꾸는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목표와 비전을 세우는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꿈과 목표와 비전을 성취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왜 그렇습니까? 비전을 이루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땀을 흘려야 수확을 거두는 것처럼, 대가를 지불해야 꿈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느헤미야의 비전 성취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오래 전에 방송에 나왔던 이야기입니다. 몸무게가 116Kg인 미혼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는 길을 가다가 한 남성으로부터 "에이 밥 맛 없어"라는 비아냥을 들었습니다. 이 여인, 아니 116Kg의 아가씨는 그 소리에 충격을 받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이어트에 들어갔습니다. 매일 사과 반쪽과 반공기의 식사로 체중을 조절하여 2년만에 60Kg을 줄이는데 성공하여 56Kg의 체중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하루의 마지막 식사시간이 오후 3시였다는 고백에 모두 감탄했다고 합니다.
주위에 보면 비만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이어트에 성공한 소수의 사람들을 단지 존경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이어트에 성공한 사람들을 바라보고 감탄하는데 머물고 있다면, 자신의 체중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이어트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고 각고의 노력을 해야 본인에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전을 성취한 느헤미야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그러나 듣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느헤미야처럼 비전 성취를 위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부 잘하는 학생은 공부해야겠다고 생각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제로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효자는 부모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여 부모님을 모시는 사람입니다. 기도의 사람은 기도의 이론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직접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의 사람입니다. 비전을 이루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느헤미야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실제로 느헤미야처럼 비전을 이루기 위한 대가를 치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느헤미야처럼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대가 치르기를 즐겨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떠한 문제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원리와 방법을 가지고 기도하셔서 세운 비전과 꿈을 성취하시기를 바랍니다.
새 역사를 이루어가는 사람들
느 6:1-14 / 류영모목사
I. 하나님은 나를 통해 일하시기를 원하신다.
저는 골프를 잘 못합니다. 골프를 잘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골프채를 잡아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외국에 나갔더니 외국에서 목회하는 친구들이 골프 치자고 해서 한번도 코치를 받아보지 않고 골프채를 잡고 필드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몇홀 돌지 못하여 "자네는 안치는 게 좋겠어. 골프하러 왔지 콩심으로 왔냐" 자꾸 홈만 파고 잔디만 뜯어 낸다는 얘기겠지요. 그 이후 골프를 또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운동이 그렇습니다만 특별히 골프는 인생을 닮았다고 합니다. 잘되는가 싶 어 방심하다 보면 웅덩이에 빠지기도 하고 벙커나 개울 창에 굴러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위기를 탈출하고 나면 다시 기회가 오지요. 언젠가 박세리 선수가 개울 창에 굴러 떨어진 공을 맨발로 물 속에 들어가 공을 쳐내고 우승을 했던 장면은 우리 모두의 가슴을 울리게 한 진한 감동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 니다. 하나님은 시험의 웅덩이와 고난의 개울 창을 통과한 사람들을 통해 새역사를 완성해 가십니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데 사람을 사 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도움이 없이도 천지를 창조하셨고 역사를 운행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쓰임받는 우리를 위해서 언제나 사람을 사용하여 역사 펼쳐 가시기를 좋아하십니다.
아담을 짓고 아담에게 천지창조 이후에 온갖 삼라만상의 이름을 짓도록 했습니다. 출 애굽을 하는데 모세를 사용하셨습니다. 어린 다윗의 손을 빌려 골리앗을 쓰러트렸는가 하면 여호수아를 앞장세워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천군천사들을 통하여 10억 중국의 백성들을 살려낼 수 있고 북녘 땅 에 있는 내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아니하 고 우리를 사용하여 이 일들을 감당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왜요? 당신의 백성들, 자녀들 에게 이것이 가장 복된 길 임을 하나님은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찬송은 천사도 흠모하겠네 그렇게 노래합니다.
우리는 지난 몇시간 느헤미야를 통해 무너진 예루살렘 성의 재건 역사를 어떻게 이루 어 가시는가를 살펴 보고 있습니다. 이 은혜를 통해 무너진 한국교회 부흥의 역사를 이 루고 무너진 민족정신을 세워갈 뿐만 아니라 무너진 기업들을 재건하고 상처난 가정과 신앙과 영성을 새롭게 세워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II. 하나님이 쓰시면?
느헤미야 6장은 예루살렘 성이 완성되는 장입니다.
본문 15절 - 16절을 보면 "성 역사가 52일만에 끝나매" 짧은 시간 안에 대 역사가 끝 나는 역사를 보고 원수들은 두려워했고 낙담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힘으로 불가능 한 일이 엄연히 이루어졌다면 저건 분명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하나님이 저들과 함께 하시는 구나. 이것을 저들이 앎이라고 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사람들의 큰 역사를 통해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임을 세계 만방에 전 하심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보면 저들은 우리 를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이 저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구나. 저 사람들을 쓰시는 구나."
바로 왕은 일개 목동 모세를 두려워했고 감옥을 지키던 교도관은 감옥에 갖힌 죄수 바 울을 두려워 했습니다. 메리 여왕은 죤 낙스가 두렵다고 떨었습니다.
불가능해 보이던 예루살렘 재건이 52일 만에 끝났습니다. 두달이 채 안걸렸지요. 하 나님이 일하기 시작하면 무슨 일이든지 완성하는데 긴 시간이 필요한게 아닙니다. 천하 의 과학자들과 의사들이 다 달라붙어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 하나님이 한번만 나를 어 루만져 주시고 내게 주목하시고 도와주시면, 오늘 예배 드리는 이 순간에도 큰 역사가 놀라운 치유의 은혜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하나님의 사람 들이 벌떡 일어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 주소서" 순종하고 달려갈 때 길지 않 은 시간 안에 큰 역사들이 일어납니다.
목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함께 손을 잡고 달려갈 때 하루에도 엄청난 길을 달려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쪽에서 끝을 잡고 줄 당기기를 하면 3m 4m 당기기도 힘이 듭니 다. 그러다가 지쳐 넘어집니다. 시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순종의 문제입니다. 협력의 문제입니다.
초대교회에 부흥운동이 얼마나 급속하게 번져갔든지 하루에도 삼천명 오천명이 주님앞 에 돌아옵니다. 나중에는 숫자를 셀 수 없으니까 "허다가 무리가 주님 앞으로 돌아왔다 날마다 구원받는 백성을 더하여 가시더라"
사도행전을 조심스럽게 읽어 내려가다 보면 거기에 많은 숫자들이 나옵니다. 백이십 문도 삼천명 오천명 그런데 거기에 토씨가 붙어 있어요. 오천명쯤이 아닙니다. 백이십 명밖에 가 아닙니다. 사도행전의 숫자 뒤에는 대개 "이나"라고 하는 토씨가 붙어있습니다. 오천명이나 삼천명이나 경탄어지요. 깜짝 놀라는 단어이지요.
지금 세계에서 제일 돈이 많은 사람은 MS사의 빌 게이츠입니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 면 100조원 정도를 가지고 있는데, 이 사람이 앞으로 한푼도 벌지않는다고 하고 100조원 을 얼마만큼 쓸 수 있느냐? 금년에 나이가 45살인데 앞으로 40년쯤 더 산다고 가정하면 40년 동안 매일같이 하루에 70억원을 쓰면 이 돈을 다 쓸 수 있습니다. 일년이 아니고 하루에 70억원. 그런데 이것이 많은 시간 걸려서 모은 돈이 아니고 지난 10년동안 맨 손으로 이룩한 부입니다. 재계 부를 평정해 버린 것입니다.
현대는 사람이 많아야 큰 일하는 것 아닙니다. 50만명이 근무하는 자동차 회사보다 단 1만명이 근무하는 전자 통신 디지털 컴퓨터 회사들이 훨씬 더 많은 부를 쌓아가는 세 상입니다. 현대도 그렇지만 영적인 세계는 말할 나위가 없지요?
III. 정상 일보직전에서 포기하겠는가?
고난없는 영광이 없고 시련없는 성공은 없습니다.
느헤미야 6장 앞부분은 이 엄청난 사역이 완성되기 직전 느헤미야에게 닥친 시련을 기 록하고 있습니다. 1장부터 5장까지도 많은 시련이 있었습니다만 그 시련들은 대게 공동 체에 닥친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사람 한 개인 느헤미야에게 닥친 시험이었습니다.
전쟁터에서 제일 많이 죽는 사람이 소대장이라고 합니다. 그 만큼 앞장서 달려가는 사람은 적탄에 노출되어 있는 거지요.
이 땅에 하나님의 자녀들 진실한 주의 백성들은 지도자입니다. 사탄의 공격에 노출되 어 있을 수 밖에 없는 게지요. 그래서 무장하고 우리가 새 시대를 달려가지 아니하면 언 제 어디에서 적탄이 날아올지 모르는 겁니다.
1절 이하에 재미있는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우리의 대적이 내가 성을 건축하여 그 퇴락한 곳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함을 들었는데 내가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라" 모든 성을 완벽하게 건축했습니다. 마지막 문짝만 달면 공사가 끝나는 바로 그 시점에서 시련이 찾아 온 것입니다. 이 땅에 완성 일보직전에서, 정상 한발자국 바로 전 에서, 시험 만나 쓰러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아메리카 대륙을 개척하던 초기에 있었던 일입니다. 금광과 유전을 찾는 사 람들이 허다했지요. 평생 금광을 찾아다니다가 지쳐서 포기하고 언덕을 개간 해 농사를 짓고 있는데 그 다음 사람이 찾아와서 바로 그 언덕 너머에서 거대 한 금광을 찾아 내는 겁니다. 평생 유전을 찾아 다니다 오두막 짓고 이제 농 부가 되어 살아가는데 그 다음 사람이 찾아와서 집 바로 뒷전에서 세계 최대 의 유전을 발견하곤 했다고 합니다.
왜 포기하십니까? 지금까지 여러분이 그렇게 끈질기게 기도했던 기도의 제목을 왜 덮 어두셨습니까? 한발자국만 더 전진해 가시기를 바랍니다. 한번만 더 일어나 도전해 보 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문짝만 달면 됩니다. 포기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한번 더 도 전해 가시기를 바랍니다.
IV. 음모 - 그러나 본질 사역에 집중하라.
느헤미야가 공사 막바지에 만난 시련 중 그 첫 번째는 그를 해하려는 음모였습니다. 산발랏이라는 원수가 깊숙한 한 촌에서 만나자고 네 번씩이나 제의를 해 왔습니다. 그 런데 2절에 보면 "실상은 나를 해코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단호히 거절합니다. 거절하는 이유인즉, 예루살렘 성벽이 온전히 완성되지 못했는데 이 중요한 일을 제쳐두고 떠돌이처럼 이곳저곳 신경쓰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거지요. "나는 오직 성벽 수축에만 힘을 쓰겠다" 각오하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제가 한소망교회를 섬기던 지난 9년동안 나 자신과의 조그마한 약속을 했었 습니다. "교인들이 대부분 한번 예배 드리기 위해서 주일 낮, 주일 밤 예배에 많이 찾아오는데 그 시간만큼은 내가 꼭 자리를 지켜야 되겠다" 나 자신하고 약속을 했습니다. 정말 제가 외국에 나가있는 동안이나 총회적인 부득이한 일 을 제외하고는 9년동안 이 약속을 성실하게 지켰습니다. 그리고 교인들도 이 약속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예배를 축복하신 것 보면 한가지 일에 집중하는 것, 가장 본질적인 사역에 온 힘을 기울이는 것을 하나님이 기 뻐하시는 것 같습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본질적인 사역은 제쳐두고 엉뚱한 일에 기웃거리는 사람은 시험 듭니다. 성도들이 은혜 받는 일 제쳐두고 이것저것 간섭이나 하려는 사람은 자신이 제 일 먼저 쓰러지고 넘어집니다. 쓸데없는 일에 신경쓰게 만드는 것이 사탄의 작전입니다. 여러분 시험을 만나더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시험은 풀기위해 존재합니다. 시험만 나보면 그 사람의 그릇과 됨됨이를 믿음의 분량을 알 수 있지요.
1776년 겨울, 미국 독립전쟁 당시 추위에 떨고 있는 병사들을 방문한 조지 워싱톤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봄날의 군인과 햇볕 날 때의 애국자는 아무런 일도 못한다. 장차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고통의 날을 이겨낸 사람들이다."
세상이 편하고 별 위험이 없을 때 애국을 부르짖는 입술의 애국자, 입 서비스만 하려 고 하는 사람들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피를 흘려야 할 때에 십자가가 나 를 기다리고 있을 때에 갈채가 없고 비난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을 때에 이것이 하나님 께서 내게 맡겨준 일이라고 판단되어지면 끝장을 보고야 마는 끈기, 내게 맡겨진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당당히 걸어갈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은 새역 사를 펼쳐 간다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V. 악성루머 - 그래도 하나님의 일에 집중하겠다.
두 번째 시험은 못된 소문,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것이었습니다. 느헤미야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악성루머를 만들어 봉하지 않은 편지를 보냅니다. "소문에 의하면 성을 건축 하고 네가 왕이 되려고 하는 모양인데 이 일로 나와 의논하자 내 말 안들으면 좋지 못할 게다."
성도와 교회를 쓰러뜨리려는 마귀의 두 번째 작전은 입으로 상처를 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적 침체기에 빠져드는 결정적인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자신이 마귀의 도구가 되는 줄도 모르고 입의 실수를 달고 다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입의 실수가 없으면 온전 한 자라고 했고, 작은 불씨가 산을 태우듯이 혀는 사람을 사른다고 했습니다. 언제나 중 상모략은 사람의 가슴을 찢고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가정을 더럽히고 교회와 나라와 의 인을 무너뜨립니다. 이 일들에 있어서 남자보다는 여자들이 더 실패를 많이 하는 것 같 아요.
여러분 집에 가서 부부가 한번 목을 만져 보면 남자들 울림통이 여자보다도 세배가 두껍습니다. 그래서 남자는 말을 하려면 배에 힘을 주고 용을 써야 말 이 나옵니다. 그런데 여자는 날씬하게 생겨서 입만 벌리면 말이 나오게끔 되 어있습니다. 또 은혜를 쏟는 것도 묘합니다. 남자들은 오른쪽 귀로 듣고 왼 쪽 귀로 흘린데요. 여자들은 오른쪽 귀로 듣고 모자라서 왼쪽 귀로도 듣고 입 으로 쏟는 다고 합니다.
말이라는게 참 묘하지요. 이종환과 최유라가 진행하는 「지금은 라디오 시 대」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거기보면 걸죽한 얘기들이 많이 나오는데 시골에 근무를 하고 있던 젊은이 둘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총각이고 한사람은 결혼을 한 모양입니다. 결혼한 젊은이의 부인이 아이를 낳게 되어서 시골 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총각인 친구가 축하한다고 전화를 했지요. "뭘 좀 사 갈까?" 그랬더니 "약국에 들러서 압축기 하나 사오라"고 합니다. 퇴근 길에 약국에 들어가서 압축기 달라고 그랬더니 압축기는 철물점에 있다고 그 래요. 다시 철물점에 들어가서 압축기 달라고 그랬더니 화장실이 막힌 줄 알 고 새까맣고 사발처럼 생겼고 막대기가 달려 있는 압축기를 주더래요. 그걸 신문지에 싸 들고는 "시골 병원이라 화장실이 막혔는데 손님보고 뚫으라고 하 나" 그러면서 갔지요. 병원에 도착해서 한쪽 모퉁이에 툭 던져놓고 안부를 묻 고 있는데 친구가 "압축기 사왔냐"고 묻습니다. "사왔다"고 대답하고 신문지 에 둘둘 만 것을 풀어 보니 기절 초풍할 노릇입니다. 부인이 젖이 불어서 남 편에게 시내가서 유착기 하나 사오라고 그랬는데 남편이 유착기가 뭔지 모르 니까 자기 친구에게 압축기 사오라고 한 겁니다. 이 새까맣고 사발처럼 생긴 압축기를 손에 들고는 한심해서 친구가 "야 이놈아 내 마누라가 공룡이냐 이 걸 가지고 젖을 짜게!" 불은 젖 짜려고 하다가 하수구 뚫고 만 게지요. 여러 분 단어 하나 바꾸고 나면 이렇게 우스꽝스러운게 말이라고 하는 겁니다.
Dei 새 황금문이라는 시에 보면 의로운 사람은 말을 할 때에, 이게 사실이냐 진실이냐 첫 번째 문을 통과하고, 이 말을 했을 때 유익하냐 덕을 세우 는 말이냐 두 번째 문을 통과하고, 말하는 태도가 친절하냐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하는 것이냐 세 번째 문을 통과한 다음에 말을 한다고 그랬습니다.
느헤미야가 마음의 상처나는 내 가슴을 쥐어 뜯는 말을 들었을 때에 어떻게 해결했습 니까? 9절 그는 기도하며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내 손에 힘을 주시옵소서. 무슨 얘기입니까?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손에 힘이 빠질 만큼 불쾌했지요. 그러나 이 유 언비어의 본질을 파악해 보는 겁니다. 내 손에 힘을 빼서 성을 재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사탄의 작전이다. 그렇다고 하면 나는 사탄과의 전쟁을 선포하겠다 주님 내 손에 힘을 주어서 이 성을 계속 건축하게 해 주십시오.
느헤미야는 자신의 앞날보다 하나님의 일에 더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왕이 나를 오해해서 죽인다 할찌라도 나는 끝까지 무너진 하나님의 성벽을 재건하고야 말겠다. 내 이름이 땅에 떨어진다 해도 하나님 나라에 유익이 되는 길이 있다면 나는 그 길을 선택 하겠다.
위대하신 하나님! 당신은 흥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겠습니다. 내 이름이 먹칠을 당한 다 할지라도 내가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내 가슴이 난도질을 당한다 할지라도 당신의 사역에 유익된 길이 있다고 한다면 내 사명의 길이 있다고 한다면 나는 당당히 두려워 아니하고 그 길을 가겠습니다.
묻습니다. 이런 자세로 일한 느헤미야를 하나님이 버리셨나요? 하나님은 그를 높혀 서 예루살렘 총독이 되게 했습니다. 봉하지 않은 편지는 오늘도 당신께 배달됩니다. 이 유가 있습니다. 목적이 있습니다. 당신 손에 힘을 빼는 것이 사탄의 목적입니다.
어떤 여집사님의 남편은 가끔 부인을 따라서 교회에 나옵니다. 몇번 나오다 가 안나오고 몇번 나오다가는 안나오고 그래요. 이유를 알아봤더니 이 사람이 봉하지 않은 편지를 받는데 명수입니다. 교회 갖지 않은 교회에서 일어나는 온갖 소문은 다 듣고 살아갑니다. 세상에 장로들의 비리를 그렇게도 많이 알 수가 없어요. 세상의 못된 집사 얘기 그런 것만 듣고 다녀요. 그래서 예수를 믿지 못한다는 겁니다. 교회와서도 주의 종들의 설교에 신뢰를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봉하지 않는 편지를 들고 다니는 마귀의 하수인이 되려고 하지 마십 시오.
느헤미야는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 억울합니다. 내 누명을 벗겨 주십시오. 기도하 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아닌 땐 굴뚝에도 연기가 나네요. 하나님 저 연기는 가짜 연기 입니다. 드라이 아이스입니다. 연기 좀 없애 주십시오.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내 손에 힘을 주어서 끝까지 주의 역사를 이루어 주시옵소서. 떨어지는 자신 의 명성 때문에 안절부절하지 않았습니다. 자존심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이 문 제였습니다. 이것이 새역사를 이루어가는 사람들의 성품이요 영성이요 인격이요 믿음이 었습니다.
VI. 말씀 어기라? - 말씀 지키다 죽겠다.
세 번째 시험은 위기감을 불러 일으켜 말씀을 어기게 하는 하나님을 배신하게 하는 시 험이었습니다. 느헤미야에게 스마야라고 하는 선지자 친구가 있었는데 며칠동안 얼굴이 안보여 안부차 들렸더니 어디서 뇌물을 먹고 엉뚱한 말을 합니다. "자네를 죽이려고 하 는 음모가 세계 도처에 널려있다. 가만 있다가는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려우니 몸을 피 하는게 좋겠다. 피하더라도 아무데나 피할 수 없는 게고 성소나 지성소로 몸을 숨기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마운 충고 같지만 여기에 무서운 함정이 있었습니다. 성소나 지성소엔 제사장 외엔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가까운 사람이 위하는 척 하며 하나님의 계명 말씀을 어기라는 겁니다.
이때 느헤미야가 어떻게 했습니까? "나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라고 하는 것 보니 이건 분명히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구나." 나보고 계명을 어기고 목숨을 구하라고 충고 하는 것 보니 저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구나. 그리고 단호히 말합니다. "나는 죽 어도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일을 하지 않겠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성공하느 니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히 지키다가 망하는 길을 선택하겠다. 하나님의 말씀을 범하고 목숨을 부지하는 인간이 되기보다는 당당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다가 죽어가는 사람이 되겠다. 이 얼마나 거룩한 배짱입니까? 이 얼마나 당당한 각오입니까?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었기 때문에 모든 일이 평탄하고 쉽고 그 길이 넓고 편안 하리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 길은 좁은 길입니다. 동행자가 적습니다. 돌짝 밭길 가시밭길 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피를 흘려야 되고 때로는 손해를 봐야 될 지도 모르는 길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러나 그 길은 바르고 의로운 길입니다. 감격이 있는 길입니다. 소망의 길입니다. 멋 있는 길입니다. 그 길 끝에 가면 주님께서 두팔 벌려 위로의 품에 우리를 안아 주실 것 입니다. 많은 눈물을 흘렸던 사람들을 위하여 큰 수건 준비하고 커다란 상급으로 우리 를 기다려 주실 것입니다.
VII. 나의 아버지 앞에 나를 세워 주소서
말씀을 맺습니다.
도망 다니는 군인이 승리한 적이 없고 비겁한 사람이 위대한 역사를 창조한 일이 없습 니다. 하나님이 쓰는 사람은 언제나 시련과 고난을 통과한 검증된 사람이었습니다. 느 헤미야는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그 문제를 안고 문제의 해결 자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갔 습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우리 아버지는 부유하시고 풍성하신 분이십니 다.
우리 교회가 처음 조그마한 빌딩을 얻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제가 아마 돈이 없 어 뵈었던 모양이지요. "목사님 제때 돈이 나오겠습니까?" 묻습니다. 제가 얼른 하는 대답이 "우리 아버지가 부자라서 저는 돈 때문에 염려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아이구 그러시군요. 물려 받은 재산이 많으신가 보지요. 어르신께서 큰 사업을 하시는 가 보지요." "아무튼 우리 아버지가 꽤 부자입니다."
어린 왕자가 위기를 만났을 때 했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나는 아무 것도 아닙 니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는 이 나라 임금입니다. 나를 이 나라 임금 앞에 데려다 주십시오."
나는 약합니다. 나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 나는 힘이 없습니다. 혼자 힘으로 이러지 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달려가자니 앞이 가로 막혀있고 돌아가자니 절벽입니다. 아 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 할지라도 내 아버지는 부유하신 분이시다. 우리 아버지는 위대하신 분이시다. 천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역사의 주인되신 그 분이 내 아버지 되시다. 나를 내 아버지 앞에 세워 주시옵소서. 그 문제를 가슴에 안고 주님 앞으로 달 려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내 손에 힘이 빠졌습니다. 달려갈 힘이 없어요. 내 발목에 힘이 없어요. 하 나님 내 손에 힘을 주시옵소서. 느헤미야처럼 당당히 새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된 여러 분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이 한해동안 동행하여 주실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높이는 자 를 주님께서 높여 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중심에 끌어안고 살아가는 사람을 인생에 가 장 자리로 몰아내지 아니하시고 역사에 중심으로 여러분을 인도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 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고맙고 감사합니다. 이제 문짝만 달면 되는데 한걸음만 전진하면 되는 데 얼마나 사탄은 네 인생 끝났다 포기해라 얼마나 우리를 속이고 있습니까? 아버지 하 나님 내 가슴의 상처 때문에 내가 아버지 하나님 힘들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의 사역을 망가뜨리는 어리석은 자리에 들러가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 살겠다고 계명과 말씀 을 어기는 자가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시고 주님의 말씀을 높일 때에 주께서 삶을 높여 주시고 풍성케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찾아나온 저들의 발에 힘을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달려가게 하시옵소서. 오늘 찾아나온 저들의 손에 힘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새 역사를 이루어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위기 : 본질에 집중할 때
느헤미야 6:1-14 / 류영모 목사
I. 천국 : 행복한 사역이 있는 곳
자신은 일복이 많아 어디에 가나 일에 시달린다고 생각하는 한 사람이 있었 습니다. 직장에서도 자기 혼자 일한 것만 같습니다. 집에서도 아이들은 숙제 도와 달라, 아내는 설거지 같이 하자. 빨래 같이 하자. 일거리에 치고 있었습 니다. 그러다가 아내를 따라 교회에 나왔습니다. 쉼을 얻기 위해서 교회에 나 왔는데 웬걸 교회엔 모임이 왜 그리도 많은지. 성경공부하자. 무슨 무슨 훈련 받자. 수양회 가자. 봉사해야 한다.
‘아이쿠 이러다가 나 죽겠다’ 싶어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죽어서 눈을 떠보니 자기가 천국에 와 있는 겁니다. 아름다운 산과 들, 맑은 물, 미세먼지 없는 맑은 공기, 요리하지 않아도 천지에 먹을 거리, 잔소리하는 아내도 없고 간섭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자고 싶을 때 자 고 산보하고 싶을 때 조용히 산길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꼭 한 달을 보내고 나니 심심하고 무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마을을 지키는 문지기이지 싶은 천사에게 “어디 얘기할 말동무 할 사람이 없을 까요?” 물었습니다. 여기는 그럴만한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아니면 좋은 소 일거리라도 알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여기엔 당신이 할 일이라곤 먹고 쉬고 자는 일이 전부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마침 하늘 저 건너편에 보니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왔다갔다 땀을 흘리며 일 을 합니다.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무슨 천국이 이래?’ 천사에게 부탁했습니 다. “나를 저기 지옥으로 보내주세요.” 떼를 썼습니다. 천사가 껄껄 웃으며 말 합니다. “당신 여기가 천국인줄 알았군요. 지금 지옥에 와 있습니다.”
내 곁에 사랑하고 섬길 사람이 있다는 것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내가 감당하고 땀 흘릴 일이 있다는 것, 사명이 있다는 것, 삶의 목적이 있다는 것 얼마나 근사하고 멋있는 일입니까? 천국은 사람이 미치도록 좋은 곳입니다. 천국은 일이 너무나 좋은 곳입니다. 평생 그 사명 하나로 행복하고 기쁜 곳이 천국이더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웃을 때가 있고 울 때가 있습니다. 승리할 때가 있고 커다란 위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인생길은 굴곡의 길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다가 위기를 만나면 내게 주어진 사명, 내게 맡겨진 일과 사람에 게 집중할 때이구나.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이 “위기:본질에 집중 할 때”입니다.
느헤미야는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수축하는 과정에서 많은 공격, 많은 위기를 만나 게 됩니다. 선한 일에도 방해가 있고 공격이 있습니다. 방해의 주동자는 사마리아 총독 산발랏입니다. 산발랏은 고도의 심리전이 무위로 끝나자 오늘 본문 6장에 와서 느헤미야 암살계획을 세웁니다. 예루살렘도 사마리아도 아닌 제3의 지대 오노평지에 서 만나 화해회담을 하자고 제의합니다. 물론 거짓화해요 무서운 음모가 도사려 있는 느헤미야 암살계획이었습니다.
이일 또한 실패로 돌아가자 느헤미야가 성을 수축하여 예루살렘 왕이 되고 페르시야 를 배반하려 한다는 거짓 소문 즉 봉하지 않은 편지를 보냅니다. 이 모함 또한 먹혀 들어가지 않자, 스마야라는 선지자를 돈으로 매수하여 느헤미야를 유혹합니다. 물론 이 유혹 또한 느헤미야에겐 통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집요하고도 무서운 유혹, 방해, 공격 위기상황을 어떻게 극복하고 이겨 냈습니까?
세상에 위기를 만나고 유혹하는 손길이 있어도 우왕좌왕하지 않겠다. 내게 맡겨진 일, 내게 맡겨진 사람들, 하나님이 내게 맡긴 사명에 집중하여 살겠다 결단하는 것입 니다. 위기 때마다 자신의 재주나 아닥사스다 왕의 총애를 이용하여 문제를 해결하 지 않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겨냈습니다. 어떤 유혹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이겨냈습니다. 말씀 어기라고 할 때에 차라리 말씀 지키다 죽겠다는 각오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알았습니다. 위기의 때는 하나님께 집중할 때이다. 위기의 때는 기도에 집 중할 때이다. 위기의 때는 말씀, 본질에 집중할 때이다. 이 놀라운 진리를 알았던 것입니다.
II. 집중의 능력
3맨. 맨손, 맨몸, 맨땅에서 시작된 한소망교회는 망원동 안방, 신사동 유치원, 능곡 지하 예배당 마두동 상가 시절을 넘어 드디어 1997년 11월16일 마두동 유치원 부지에 교회당을 지어 입당합니다. 얼마나 좋았던지 저도 우리교인들도 웃음이 절로 나오고 예배시간마다 춤이 절로 나왔습니다. 좋아하는 그 행복감도 17일 꼭 두 주일 예배를 드리고 같은해 1997년 12월3일 그 혹독했던 IMF가 터졌습니다. 그때 우리 국민이 겪었던 좌절과 절망감을 기억하시죠. 자고 나면 폐업, 부도, 도산... 온 국민 이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이자가 20%를 훌쩍 뛰어넘었습니다.
온 국민이 IMF로 힘들어 하던 1998년 7월7일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박세리 선수. US오픈에서 잘 치다가 그의 공이 연못 뚝에 빠지고 맙니다. 바지를 걷고 맨 발로 연못에 들어가 빠진 공을 걷어 올립니다. 드디어 우승, 우승합니다.
박세리 선수가 그때 국민에게 주었던 용기와 격려와 희망, 환호의 시간이 지금도 생 생하지 않습니까? 대부분 운동이 그렇습니다만 특별히 골프는 인생을 닮았다고 합니 다. 잘되는가 싶어 방심하다 보면 웅덩이에 빠지기도 하고 벙커나 개울창에 굴러 떨 어지기도 합니다. 위기에 빠지지만 탈출하고 나면 다시 기회가 옵니다. 어찌 골프만 그렇겠습니까? 우리 인생도, 신앙공동체도, 가정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위기는 본질에 집중할 때입니다.
느헤미야는 수많은 위기의 순간 흔들리지 않고 무너진 성벽수축을 완공합니다. “성벽 역사가 오십이 일 만인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느6:15)
성벽 역사가 52일에 끝이 납니다. 많은 학자들은 예루살렘 성벽공사가 52만에 끝나는 건 전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요세푸스 같은 학자는 2년 4개월은 족히 걸리는 공사였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2년 52일인데 2년이 빠졌다고도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북쪽 양문부터 남동쪽 샘문까지 완전히 무너진 곳 은 기초공사부터 새로 세웁니다. 그러나 나머지 지역은 남은 성벽을 잘 활용하는 지 혜를 발휘합니다. 본문 곳곳에서 나오는 “중수하다”라는 말이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repaired 수리했다는 말입니다. 지혜롭게 공사를 52일만에 완성했다는 말입니다.
이 역사를 보고 원수들은 두려워합니다. 사람의 힘으로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다면 저건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불가능한 일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기적적인 역사가 일 어난다면 도망을 가야지요. 그런데 산발랏은 마귀는 더욱 발악을 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세요. 아무리 원수가 방해를 해도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면 무슨 일이 든 완성하는데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온 재벌과 과학자가 다 매달려도 안되는 일, 하나님이 하시면 한순간 기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죽었던 기도가 살아나는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침체 되었던 교회가 다시 일어나는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목장이 살아나고 가정 이 행복의 디딤돌을 디디고 무너진 성벽을 수축하고 일어나는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문제는 집중입니다. 온 가족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하나님의 능력을 붙 들고 나아갈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지금 세계에서 돈이 제일 많은 세 사람이 있습니다.
3위 워렌 버핏 800억 달러, 2위 빌 게이츠(Bill Gates) 930억 달러, 1위 제프 베조스 (Jeff Bezos) 1370억 달러입니다.
제프 베조스(Jeff Bezos)는 1964년생 금년나이 55살쯤 되었습니다. 1994년 아마 존 닷컴을 설립한 인물로 그의 재산 190조원정도 됩니다. 그가 앞으로 100세까지 산다면 앞으로 45년을 매일 115억7천만원을 사용하면 됩니다. 이 돈을 모으는데 25년이 걸렸습니다.
여러분, 영적인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도 마찬가지입니다. 망하는데도 긴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높이 올라간 성일수록 무너지는데 큰소리 나고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붙들고 매달리면 52일만에 예 루살렘 성벽이 수축됩니다. 여러분의 가정, 목장, 기도, 영적인 능력 일어날 수 있습 니다.
III. 문짝만 달면 되는 그 때에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자나깨나 기도하는 저의 기도제목을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자나 깨나 남북평화, 민족통일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 언제까지 이 나라 이 민 족을 분단의 고통 중에 남겨 두시겠습니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기도밖에 없습니 다. 또 기도가 가장 위대한 힘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국교회의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보고 싶은 사람입니다.
저는 한소망교회를 주님의 심장 속에 있는 바로 그 교회, 신약성경 초대교회에 있는 바로 그 교회, 마지막 때 성령님이 살아 역사하는 바로 그 교회로 세워보고 싶은 사 람입니다.
여러분 또한 느헤미야가 무너진 성벽을 수축하듯 세워보고 싶은 것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교회 영적인 사역을 세워보고 싶은 사람, 하나님이 주신 가정의 기업을 세워보고 싶은 사람, 내게 맡겨주신 자녀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보고 싶은 사람, 내게 맡겨주신 사람들의 신앙을 세워보고 싶은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고난이 없는 영광이 없고, 시험이 없는 성공은 없습니다.
느헤미야 4장-6장은 느헤미야의 엄청난 사역이 완성되기 전 그에게 닥친 시련을 기 록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밀려오는 내우외환을 하나님의 은혜, 지혜로 잘 이겨냈습 니다.
4장 5장은 성벽재건 공동체에 닥친 시험들입니다. 그러나 6장은 지도자 느헤미야 한 개인에게 닥친 시험과 위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너진 성벽을 수축하고자 할 때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공동체의 리더들이 어려움 속에서 낙심하지 말고, 넘어지 지 말고, 굳건히 서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언제 시험이 찾아옵니까?
1절 “내가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였더라”
모든 성벽을 잘 세웠습니다. 마지막 문짝을 달면 공사는 끝이 납니다. 바로 그때 위기 가 찾아옵니다. 완성 일보직전, 정상 한발자국 직전, 시험 만나 쓰러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번만 더 기도하면 되는데, 한번만 더 참으면 되는데, 한번만 더 이기면 되는데 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사탄은 우리의 비전, 우리의 꿈이 이루어지도록 보고만 있지는 않습 니다. 원수 산발랏은 중립지대 한 촌 오노평지에서 만나자고 1번 2번 3번 4번씩이 나 제의해 옵니다. 오노는 예루살렘 북서쪽 40km쯤 있는 중간지대입니다. 왜 오노 평지인지 아십니까? 유혹이 올 때 오노 Oh! No!하라고 오노평지입니다. 왜요? “실상 은 나를 해하고자 함이었더라”(느6:2) 그 속에 느헤미야를 암살하려는 음모가 숨어 있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Oh! No! 단호히 거절합니다. 성벽수축이라는 지상과제를 두고 우왕좌왕하는 것 하나님 뜻이 아니다. 사탄은 언제나 영적 에너지와 관심을 엉뚱한 곳으로 빼앗아 가려고 한다. 나는 본질에 집중하겠다.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는 것, 내 인생에 비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그것 세우는 일에 내 온 자원을 집중하겠 다. 복음에, 하나님의 말씀에, 비전에,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사역에 사랑하는 사람 들을 일으켜 세우는데 내 인생을 걸겠다. 본질에 집중할 때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 니다.
보십시오. 그 힘든 공사가 이제 다 끝났습니다. 문짝만 달면 됩니다. 온 백성들이 광장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테이프 자르고 잔치를 벌이는 일만 남았습니다. 바로 이 때 유혹이 찾아옵니다. 몸도 마음도 지쳐있던 느헤미야. 원수지만 산발랏하고도 타 협하고 잘 지내고 싶습니다. 바로 그때 산발랏으로부터 기별이 온 것입니다. 정히 만나고 싶으면 건축 헌당식날 꽃다발 보내고 축하사절로 오면 될텐데 왜 만나자는 것일까요?
바로 여기에 유혹이 있습니다. 함정이 있다는 것을 분별하게 된 것입니다. 이건 음흉한 느헤미야 암살음모였던게지요.
언제나 유혹과 공격, 반대화 비판은 이때 찾아옵니다. 반대가 있을 수 없는데, 나를 비판하고 공격할 사람이 아닌데, 생명처럼 가족처럼 여겼는데, 도무지 비판할 자격이 없는 인간인데 왜 이 일을 방해하지? 더구나 나를 위하는 척, 나를 도와주는 척, 나 니까 하는 말이라고 인심쓰는 척하고 다가옵니다. 이게 위기입니다. 분별해야 한다 는 것입니다. 아 나를 무너뜨리려고 하는구나. 여기 넘어가면 안되지. 내가 잘 서 있어야지. 결단하고 본질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번 4번 끈질긴 유혹에도 느헤미야가 꿈쩍도 하지 않자 산발랏은 봉하지 않은 편지 를 보냅니다. 봉하지 않는 편지란 전달과정에서 누구나 읽고 못된 소문이 나게 하겠 다는 거지요.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을 배신하고 성벽수축 후 자신이 왕이 되려 한다는 것입니다. 중상모략하여 더욱 나쁜 것은 그것을 자기 말로 말하는 것이 아니 라 온 세상에 소문 다 났어. “그 글에 이르기를 이방 중에도 소문이 있고 가스무도 말하기를”(느6:6) 너를 잘 아는 가스무도 그렇게 얘기하더라.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 다는 겁니다.
누구 누구가 이렇게 말하더라. 소위 “카더라”뉴스입니다. 가짜뉴스(Pake news)입니 다. 남의 말을 빙자한 중상모략, 비겁한 행동입니다. 중상모략은 소리없는 총입니다. 누구든 죽이고 파괴합니다. 그 거짓된 “카더라”뉴스에 나라가 깨지고, 교회가 깨지고, 가정이 깨지고,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깨집니다. 그래서 근간 가장 큰 죄 중에 하나 가 명예훼손 죄입니다.
봉하지 않은 편지는 오늘도 여러분에게 배달됩니다. 근간 이단교회도 교회라는 이름 으로 이단들도 목사라는 이름으로 언론에 소개됩니다. 교회 얘기, 목사 얘기, 장로 얘 기, 집사 얘기도 봉하지 않는 편지를 타고 세상에 둥둥 떠다닙니다. 이 봉하지 않는 편지를 받고 신앙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교회를 떠난 사람들 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집에서 봉하지 않은 편지를 읽고 교회 나가는 나를 핍박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요즘은 성경은 안 읽고 봉하지 않는 편지를 찾아 인터넷, SNS를 뒤지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성경 읽고 기도하는 시간보다도 인터넷 뒤지는 시간이 더 많으면 회개해야 합니다. 이미 바이러스에 오염되어 있는 것입니다. 영성이 흐트 러진 것입니다.
느헤미야를 죽이려는 음모와 공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산발랏에게 뇌물을 먹 은 거짓선지자 스마야가 느헤미야를 만납니다. 당신 신변에 위협이 다가오고 있으니 나와 함께 성소, 지성소로 피하자고 유혹합니다. 그곳은 제사장, 대제사장이나 들어 가는 곳입니다. 느헤미야가 아무리 총독이라도 아니 왕이라 할지라도 들어갈 수 없 는 곳입니다.
이때 느헤미야가 어떻게 했습니까?
“나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라고 하는 것 보니 이건 분명히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구 나” 나보고 계명을 어기고 목숨을 구하라고 충고하는 것 보니 저 사람이 하나님의 사 람이 아니구나. 그리고 단호히 말합니다. “나는 살아도 말씀 붙들고 살고 죽어도 말씀 붙들고 살리라.” 이게 승리의 길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IV.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위기: 본질에 집중할 때”라고 했을 때, 느헤미야의 본질이 무엇이었습니까? 느헤미 야의 최고 본질은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 붙들고 살겠다는 것입니다. 위기를 만 났는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 성경이 생각나지 않는다. 이 사건 속에 서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다. 이미 실패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이 귀한 사역을 두고 나는 우왕좌왕하지 않겠다는 겁니 다. 어떤 공격, 어떤 위기 앞에서도 일희일비하지 않겠다. 하나님의 뜻만 생각하겠 다는 것입니다. 나는 계속 무너진 성벽을 쌓는데, 기도하는 이 일에, 내게 맡겨진 사명을 일으키는 데에 집중하겠다.
느헤미야도 사람입니다.
똑같은 비판과 공격을 세 번 네 번 듣고 하나 이기고 나면 또 다른 무기를 들고 덤 비는 원수 앞에서 당황했을 것입니다. 처음엔 어깨에 힘이 쭉 빠졌습니다. 때로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되는데 무릎 꿇을 힘이 없습니다. 손을 모아야 하는데 손 모 을 힘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힘이 쫘악 빠질 때가 있습니다. 지금 느헤미야의 상태가 이 상태입니다.
그러다가 느헤미야 벌떡 일어나 기도합니다.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느6:9) 원수 앞에 나아가 싸우는 대신 하나님 앞으 로 달려 나아갔습니다. 하나님 내 손에 힘을 주세요. 쓰러지지 않게 해 주세요. 넘 어지지 않게 해 주세요.
9절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느6:9)
기도하는 느헤미야의 기도를 하나님은 외면하셨나요? 오늘도 우리가 내 손에 힘을 달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외면하셨나요? 홍해를 가르십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리십니다. 산발랏과 도비야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스바냐 3:16)
어깨에 힘 빼고 살지 말아라. 네 손에 힘 잃어버리면 망한다.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전능하신 하나님은, 당신 손에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당신 손을 놓지 않습니다. 느 헤미야의 손에 힘이 빠지고 어깨가 늘어진 채로 버려두지 않습니다.
♪ 주님여 이 손을 꼭잡고 가소서~ 기도하는 당신의 손을 뿌리치지 않으십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품인 “닥터 지바고”를 보면 마지막 장면에 이런 대화가 나 옵니다. 장군과 타냐와의 대화입니다. 장군이 타냐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어떻게 아버지와 헤어지게 되었느냐?” “혁명 중에 길거리는 불바다가 되고 군중들의 요란한 소리로 복잡한 상황에서 아버지의 손을 놓쳤어요. 아빠는 먼저 나를 두고 달려 나갔어요.” 그때 장군이 얘기합니다. “아무리 위기 상 황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불바다가 도시를 덮어도 사랑하는 자식의 손을 놓 고 혼자 도망가는 아빠는 없는 게야. 로마노프는 너의 아버지가 아니란다. 너의 아버지는 닥터 지바고란다.”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물며! 여러분의 위기상황 속에 이 손을 꼭 잡고 가 달라고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여러분의 손을 놓칠까요? 여러분이 위기상황속에서 손에 힘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모른척 하실까요?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겨서 보호하리라”(이사야 49:15-16)
나는 내려갈 수 없다
느 6:1-4 / 조봉희목사
저는 지난 주간에 매우 감동적인 간증을 들었습니다. CBMC, 즉 기독 실업인들의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나서 서로 교제를 나누는데 석낙진이라는 사장님과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원래 자동차용품 사업을 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교회마다 성찬용 전병과 포도주를 공급해줄 필요성을 느끼고 독일로부터 수입하는 일을 추진했습니다. 독일에서 600년 동안 성찬용 포도주를 생산하는 회사와 무역을 텄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형편상 타산이 맞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독일을 여러 번 왕래하는 출장비를 충당하기도 어려웠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척교회일수록 꼭 성찬용 전병과 포도주 보급이 절실하게 필요하기에 결코 포기하지 않고, 정말 사심 없이 헌신하여 왔답니다. 그러다 보니 사업자금을 다 쓰게 되었습니다.
사업상의 수지타산은 맞지 않고, 교회들은 꼭 필요로 하니 계속 바닥나는 장사였습니다.
현실적으로 수익성은 없는데, 교회들은 필요로 하고 있으니 도저히 그만둘 수가 없더랍니다.
그래도 4년 이상을 오직 주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하여 희생해오던 중, 작년에 전혀 뜻밖의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는데, 경비행기 사업과 독일 의료기 수입 Agency를 따게 된 것입니다.
그 동안 자신이 해온 사업 분야와는 전혀 무관한 프로젝트인데도 너무나 희한하게 길이 열려 엄청난 축복을 받게 되었다는 간증이었습니다.
개척 교회들의 성찬식을 돕기 위해 자기 사업이 바닥나도 계속 쏟아붓기만 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놀랍게 보상해주시는지 참 신비롭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경말씀 그대로, "먼저 주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더 큰 것으로 채워주시는 승리의 날을 맞이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나라 운동선수들의 아쉬운 점은 대체적으로 준결승에서 탈락하고 만다는 점입니다.
선수의 영광은 결승전에 진출하는 것인데, 마지막까지 못 가고 중도에 탈락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결승전은 Final game이라고 하는 반면, 준결승을 Semi-final이라고 합니다.
다 마치지 못하고 끝냈다는 뜻입니다. 미완성 단계로 매듭한 것입니다. 조금만 더 연습하고, 조금만 더 힘썼더라면 멋지게 이길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을 남긴 체 지고 만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진정한 실패는 당신이 충분히 가능한 높은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조금만 더 노력하고 최선을 다했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나아질 수 있었는데, 그 충분히 가능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미달한 것이, 곧 실패입니다.
그래서 이런 좋은 슬로건이 있습니다.
"오직 내가 도달하려는 높이까지만, 나는 성장할 수 있다.
오직 내가 추구하는 거리까지만, 나는 갈 수 있다.
오직 내가 살펴볼 수 있는 깊이까지만, 나는 볼 수 있다.
오직 내가 꿈을 꾸는 정도까지만, 나는 될 수 있다."
이처럼 우리 모두 최종 승리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그 어떤 악천후 속에서도 꿋꿋이 버텨나가므로 최종 승리자가 된 한 위인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느헤미야입니다.
그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가장 탁월한 리더십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그는 일찍이 자기 고국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진 체 방치된 것을 더 이상 방관할 수가 없어서 성벽 재건공사를 착수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직도 바빌로니아 통치를 받고 있는 상황이기에 너무나 어려운 점들이 많았습니다.
장애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들었습니다.
그래요. 우리가 어떤 좋은 일을 하려면 괜히 시비하고 방해하는 요인들이 생각 밖으로 많아요.
이런 와중에서도 느헤미야는 드디어 예루살렘 성벽을 쌓는 공사를 다 마치는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성문의 문짝만 달면 모든 공사를 완성하는 마지막 단계였습니다(1절).
바로 이때 산발랏이라는 반대세력의 주모자가 편지를 보내어, 우리 오노 평지에 있는 조용한 별장에서 만나 긴밀한 회동을 갖자고 제의했습니다.
그것은 곧 예루살렘 성벽 재건공사 완공을 코앞에 두고 있는 총 지도자 느헤미야를 암살하려는 모종의 계략이었습니다(2절).
이런 함정을 감지하고 있었던 느헤미야는 역시 훌륭한 지도자답게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반대세력들이 '오노 평지에서 만나자'고 하니까, 그는 "O, No"하고 거절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힘찬 표명을 합니다.
『나는 내려갈 수 없다』《I cannot go down》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도 신앙적 입지가 분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대의명분이 분명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입장이 애매하고, 처신이 어렵지만 No라고 대답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최근 서점가의 베스트 셀러 중 하나가 "No라고 말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책입니다.
그래요. 요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신앙적 입지와 대의명분이 더욱 필요한 상황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대의명분이 분명하고, 대답이 확실해야 합니다.
『나는 내려갈 수 없다』《I cannot go down》. 나는 주저앉을 수 없다. 나는 포기할 수 없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느헤미야의 확고한 신념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직장을 그만두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입니다. 인간관계도 끊고, 교회 봉사도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의 소용돌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중에 어떤 분들은 결혼 생활도 끝내고 싶은 갈등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또 어떤 젊은이들은 공부나 진학도 다 포기하고 그냥 주저앉으려는 자포자기 상태에 있을지도 몰라요. 특히 사업하는 분들 중에는 더 이상 견디기가 어려워 모든 것을 훌훌 털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싶은 고독한 싸움을 하고 계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 여자 분들 중에서도 이제는 살림이고 자식이고 간에 다 팽개치고 모든 것을 그냥 끝내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끼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오늘 아침에 이런 다짐이 다시 한번 필요합니다.
『나는 내려갈 수 없다』《I cannot go down》. 나는 주저앉을 수 없다. 나는 포기할 수 없다
1. 명확한 목적의식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중간에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마라톤 선수는 중간에 고개 길이 있다고 힘없이 주저앉지 않습니다.
그래요. 삶의 목적이 확실한 사람은 그 어떤 악천후 속에서도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늘 느헤미야는 이렇게 분명한 자기표명을 합니다(3절).
『지금 내가 큰 공사를 하고 있으니 내려갈 수 없노라.』
지금 나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큰 일, great project를 수행하고 있으니, 딴 일을 할 수가 없어요. 여기 "큰"(Great)이라는 말에 동그라미를 해 놓으세요.
당신은 지금 주님으로부터 "큰 사명을 부여받은 인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Rick Warren 목사님이 말씀하듯이, "위대한 삶은 위대한 목적에 헌신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오늘 당신도 위대한 인생을 살고 싶으신가요? 위대한 목적에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위대한 사람들이란 위대한 동기에 위대한 헌신을 한 보통 사람들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동기가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여 훨씬 더 큰 인물이 되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강력한 목적의식이 필요합니다.
소위 미시적 비전에서 거시적 비전으로 도약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지구촌교회는 주님의 위대한 명령과 위대한 위임에 위대한 헌신을 함으로써 위대한 교회를 만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혼란 가운데서도 계속 일해야 합니다
산발랏이라는 사람은 느헤미야에게 우리 잠깐 회의 좀 하자고 꼬드깁니다.
산발랏은 마음을 산란하게 만드는 사람이에요.
자그마치 네 번씩이나 계속 밀사를 보냅니다(4절).
이런 혼란의 와중에서도 느헤미야는 요동하거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지금은 어디 호화 별장주택에 가서 한가하게 토의할 때가 아니라, 현장에서 열심히 일해야 할 때라고 그의 분명한 입지를 표명합니다."
혹시 우리 중에서도 일하기보다는 이야기하기를 즐기는 분들이 계신가요?
회의보다는 행동이 더 우선되어야 합니다. 말보다 일을 좋아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변 상황이 여러 가지로 복잡하고 혼란스러워도 꿋꿋이 일하는 입지가 분명한 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중상과 비난을 들어도 계속 일해야 합니다
산발랏 일당은 느헤미야가 요지부동하니까, 이번에는 중상과 비난으로 인신공격을 합니다.
본문 5절을 보면, 이번에는 다섯 번째로 봉함하지 않은 편지를 보내, 뜬소문이 나게 한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개인적인 야심이 있어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있다는 추문을 퍼뜨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떤 좋은 일을 할 때 사람들 중에서는 괜히 시샘을 느껴 비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즘 그 사람이 교회 일에 꽤 열심인데, 목사님께 잘 보이려고 그런 것이라고 사기를 꺾는 말을 즐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숙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들이 잘 나가는 것을 싫어하고 시샘합니다.
어떤 어린아이가 자기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도둑질과 거짓말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무서운 죄에요? 글쎄. 도둑질이 더 무서운 죄겠지. 그러자 아이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도둑질 한 물건은 다시 돌려줄 수 있지만, 남에 관하여 잘못 말한 거짓말은 다시 돌려줄 수가 없잖아요!"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 종류의 보험에 들어야 하는데, 그 중에서 주둥이 보험을 꼭 들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명확한 목적의식을 품고 사는 사람답게 그 어떤 비난이나 중상모략에도 초연하는 훌륭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A. Lincoln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대하여 사람들이 공격하는 것을 다 읽고 거기에 대한 답변을 다하고자 한다면 다른 일은 전혀 하지 못할 것이다."
H.W. Beecher도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들의 빈정대는 말이나 헐뜯음에 대하여 답변하고자 한다면 그의 삶은 시시한 일에 다 낭비되고 말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불리함과 억울함 속에서도 "나는 내려갈 수 없다.《I cannot go down》 나는 주저앉을 수 없다. 나는 포기할 수 없다"고 선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명확한 영적 분별력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21세기는 지식 정보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혜입니다. 분별력입니다.
특별히 영적 지혜가 필요합니다.
느헤미야가 워낙 분명한 사명감을 갖고 일하니까, 이번에는 그를 성전 안의 밀실로 피신하면 안전할 것이라고 회유합니다(11절).
그런데 느헤미야의 탁월한 점은 그의 영적 분별력입니다. 본문 12절을 보십시다.
『내가 깨달은즉 …』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영적 깨달음이 필요한 시대적 상황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은 온갖 방법으로 우리를 유인하고 유혹합니다. 매우 합리적으로 회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성령 충만함으로 명확하게 분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에베소서 5:15-17).
우리 예수님은 사탄의 어떤 속임수에도 결코 현혹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하셨기 때문입니다.
1) 기준이 분명해야 합니다
훌륭한 리더일수록 기준(Criterion)이 분명하고 확고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위해 확고히 서지 않으면 그 어떤 것들이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습니다."
다니엘이 그 어떤 위기상황에서도 결코 내려가지 않았던 비결은 기준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적 가치관과 기준이 확고하고, 또 높은 수준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느헤미야는 영성이 탁월한 사람답게 사역의 기준 역시 확실했습니다(11절).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부여하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걸었습니다.
그는 목숨걸고 자기 사명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미국 속담에 이런 좋은 말이 있습니다. "해야 할 가치가 있는 일이라면 아주 잘할 필요가 있다." 《If anything is worth doing, then it's worth doing well》 당신의 기준이 곧 당신의 수준을 결정합니다.
2) 기도에 열중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간절히 호소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9절. 14절). 그래서 그는 80년 동안이나 황폐되어 있었던 예루살렘 성벽을 단 52일만에 완공시킵니다. 오직 기도의 위력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가 약해질수록 기력도 약해집니다. 기도가 없을수록 기운도 없어집니다.
그러나 기도가 강해질수록 기력이 넘칩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기운차게 선언한 것입니다.
『나는 내려갈 수 없다』《I cannot go down》. 나는 주저앉을 수 없다. 나는 포기할 수 없다.
기도하는 사람은 낙망을 포기합니다(누가복음 18:1).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은 요즘 어떤 위기상황에 놓여 있으신가요? "당신의 문제를 푸십시오(solve). 그렇지 않으면 그 문제들이 당신을 용해할(dissolve)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도 어떤 위기에 당면할 때마다 오직 기도에 열중하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기도만이 견딜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기도만이 극복할 수 있는 사기를 북돋아줍니다.
예수님은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가 다가올수록 더욱 더 기도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도 중간중간 포기의 유혹과 시험이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혼자서라도 산에 올라가 기도에 열중하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도가 습관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는 승리를 선포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즘 어떤 일로 심리적인 위축을 느끼고 계신가요?
직장을 그만두고 싶은 충동, 인간관계를 끊고, 교회 활동이나 봉사도 다 그만두고 싶은 의욕상실, 결혼생활을 끝내고 싶은 마음의 소용돌이, 인생의 진로나 사업의 비전을 체념하려는 허약해진 의지, 항암 치료나 건강회복에 대한 기대나 희망을 포기하려는 실의에 빠져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아침 우리 모두 믿음으로 외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내려갈 수 없다. I cannot go down. 나는 주저앉을 수 없다! 나는 물러서지 않으리라! 나는 약해지지 않으리라! 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으리라! I shall never give up!】
(기도 초청) (찬송 493장)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은 요즘 어떤 위기상황을 당면하고 계신가요?
당신은 충분히 가능한 높은 수준을 스스로 포기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당신은 지금 어떤 충동이나 갈등을 느끼고 계신가요?
모든 것을 다 훌훌 털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은 심리적 위축감에 빠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위대한 사람들이란 위대한 동기에 위대한 헌신을 한 평범한 사람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무 쉽게 체념하거나 포기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높은 기준을 세우고, 더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세운 기준만큼 당신의 수준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결코 포기하지 않고, 다 이루어내는" 최종 승리자의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