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원로회 서신 205호》
- 계몽(啓夢)과 무장(武裝) -
■남길이는 해남에서 '유선골'이라는 닭집을 한다. 벌써 33년째다. 손맛이 좋은 마누라를 잘 얻어 맛있게 한다고 소문이 나니 SBS와 KBS 방송을 타 여름철에는 외지에서 온 손님들까지 바글바글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닭의 각 부위를 날 회로도 내놓고 튀기기도 하고 맨 나중에는 닭죽을 쒀 주는데 이재명이나 황교익이 먹방을 찍어도 좋을 정도였다.
여하튼 남길이는 돈을 꽤 벌어 해남과 가까운 영암에 아담한 한옥도 한 채 마련하고 그 옆에는 대지 100평짜리 게스트하우스까지 구입해서 그동안 모아놓은 분재며 수석을 깔끔하게 정리해 서울에 있는 친구들을 자신 있게 초청한다. 자칫 시골에서는 돈 좀 벌었다 치면 주변에서 갈구는데 평소 마누라의 씀씀이가 후해 복을 받았다고 아는 사람들은 칭송한다.
조류 인플루엔저니 닭에 치명적인 AI 조류독감도 거뜬하게 물리치고 그렇게 잘나가던 남길네가 코로나 한방에 나가떨어졌다. 자영업자 같은 사람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어준다 하여 철석같이 믿었던 문재인네가 1가구 2주택 하며 대출금 회수니 뭐니로 바깥일은 아무것도 모르는 마누라를 심란하게 하더니 결국에는 코로나 방역이랍시고 이것저것 들이대서 손님이 뚝 끊겨버린 것이다.
그동안 먹고살았던 터전을 처분한 것은 남길네뿐만이 아니다. 해남에서 대중목욕탕을 하던 친구는 더 폭삭 망했고 전국적 명소라고 소문나 서울 서초동에 주인 딸이 분점까지 낸 '천일관'도 버틸 재간이 없어 처분을 하려 하지만 사갈 사람도 없고 폐업을 하자니 대출금 하며 거기에 따르는 손실금이 너무 많아 적자를 감수할 수밖에 없어 죽지 못해 산다고 한다.
전에는 먹고사는데 바쁜 사람들을 계몽하여 문재인네 실체를 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이재명은 성남시장 선거에 출마하면서 기본급에 이어 성남·광주·하남 광역시 통합, 호화청사 매각 등을 공약했다. 영화배우 김부선의 공짜×을 즐기던 시절이었고 형수에게 막말을 했던 시기와도 겹치지만 그는 당선되었다.
뇌물을 받고 실형까지 선고된 전직 경찰 경무관을 경기지사 1호 신설 공공기관인 연봉 1억 2천 만원짜리 상임 이사에 정관까지 바꿔 임명하고 쿠팡 화재 당일 황교익과 먹방을 찍은 게 발각되자 재빨리 개성공단 제재를 풀고 철도를 연결하자고 화제를 돌렸다. 잽싼 건 논두렁에 시계를 던졌다는 노무현을 빼 닮았다.
김부선은 꼬치 점을 빼버린 이재명에게 지금도 괜찮으니 그만큼 공×했으면 쌀 몇 가마니라도 달라고 들볶아도 고소도 못하고 꿈쩍도 않는다. 딴청부리는 건 북한군 장교 아들에다 간첩 아니냐는 추궁을 받고도 고소도 못하고 꿈쩍도 않는 문재인을 닮았다.
그런 따위가 전 국민 기본소득 50만 원, 전 국민 기본주택 30년 장기 임대, 전 국민 1000만 원 기본대출 등을 대선 3대 기본 공약으로 발표해도 이해찬과 문빠들은 여론조사 1등이라고 손뼉 친다.
한번 이념의 늪에 빠져버린 저들에게 이재명의 실체를 계몽하기엔 역부족인 것이다.
■천재 춘원 이광수도 일본은 100년 이상을 버틸 줄 알았다. 그래서 장기전으로 계몽의 길을 택했다. 그렇게 빨리 끝날 줄 알았으면 친일을 하지 않았을 거라는 게 그를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조.중.동도 아마 그랬을 거다. 문재인과 눈이 맞아 홧김에 서방질은 해댔지만 그 대가를 치르느라 똥오줌 못 가리고 이제서야 법석이다. 그러나 문은 "언론이 시민을 위해 존재하는 한"이라는 단서를 붙여 "언론자유는 누구도 흔들 수 없다"라고 했다. 당초 "너희가 우리와 붙어먹은 게 시민을 위한 게 아니었다"는 말로 들린다. 쌤통이라는 거다.
방상훈이 몰랐을까 홍석현이 몰랐을까 김재호가 몰랐을까. 나 그만둔 뒤에 꼼짝말아라다. 소급하여 적용하면 가칭 법안 언론중재법은 조.중.동 등 모든 언론사 사주들에게 엄청난 금액의 징벌금을 박근혜 대통령에게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릴 수도 있다. 기사를 쓰자니 사주가 망하고 기사를 안 쓰자니 밥통이 떨어지고 바야흐로 먹물들 수난시대다.
이런 먹물들을 계몽한다고 자기가 제일 헛 똑똑이들인데 들을 작자들인가.
■1910년 총 한방 쏘지않고 한일합병조약에 도장을 찍은 데라우찌 초대 총독은 무단통치를 실시했다. 헌병과 경찰은 범죄 즉결처분권과 민사소송 조정권까지 그야말로 무소불위였다.
그런 엄한 상황에서 의로운 사람들은 가산을 정리하여 만주로 갔다. 감시를 피해 독립운동을 하려는 것이었다. 양정의숙에서 공부한 울산 태생 박상진도 1911년 27세의 청년으로 중국을 여행하며 손문의 신해혁명을 눈으로 보고 만주에서는 신민회가 만든 독립기지도 목격했다.
노비에서 풀려난 백성들은 물론 양민들까지 설탕 맛을 보더니 조선 때보다 삶이 더 나아졌다고 생각했다. 기본금 10만 원의 달콤함에 취한 지금의 유권자들과 흡사했던 당시 민초들을 본 박상진에게 계몽은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1915년 8월 25일 박상진은 대구 달성공원에서 손문의 조선판 신해혁명을 꿈꾸며 '대한광복회'를 결성했다. 총사령은 박상진이었고 이는 군사조직이었다. 무장을 해야 했으며 그를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했다.
■"광복회의 목적은 국권을 회복하여 공화정치를 하는 것으로 그 방법은 조선 내 자산가로부터 금전을 모집하여 군기(軍器)를 구입하고 독립을 도모하는 것이다" 1919년 경성복심법원 박상진 등 판결문이다.
일단은 중국 여행 때 반입한 권총 11정이 무장의 기초였다. 판결문은 계속된다. "비밀과 암살, 폭동과 군령은 우리의 강령이다. 폭동은 현시점에 불가능하니 암살로 미래를 준비한다" 1917년 11월 광복회는 군자금을 지원해달라는 요청을 밀고했던 전 경북관찰사 장승원을 권총으로 사살했다.
그리고 집 대문과 마을 버드나무에 "너의 큰 죄를 꾸짖고 우리 동포에게 경고한다. 광복회원"이라는 경고장을 붙여 놓았다.
"조선인 강도가 경주에서 세금 수송 마차를 털어 대구로 배송될 관금 팔천칠백 원의 행낭을 털어간 대사건이 있더라" 1915년 12월 26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기사다. 60억 원 정도 거금을 강탈한 영구미제 사건이 30년 후인 1945년에야 그 전모가 박상진의 지시에 의한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칼집 속 용천검 백두까지 빛나니 이른 때 공을 세워 개선가를 부르자"라는 전별사를 만주로 떠나는 김좌진에게 써준 것이 박상진의 마지막이었다. 1918년 1월 충남 도고면장 박응하를 처단하고 남긴 경고문이 단서가 되어 박상진은 체포되어 다른 동료들과 함께 딱 100년 전인 1921년 8월 11일 대구형무소에서 처형된다.
그가 이렇게 썼다. "이룬 일 하나 없이 가려 하니 청산이 조롱하고 녹수가 찡그린다"
일제보다 더 열악한 북조선을 염원하는 저들을 처단하지 못하고 꾸역꾸역 무능함만 토해내는 지금을 100년 후의 후세들은 무어라고 할 것인가.
2021년 8월 국치일 즈음에
지금은 무장을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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