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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증난다 / 권순진
어쩌다 가는 클래식 음악 연주회에서
나는 이 곡을 잘 안다 그래서 끝나는 부분이 어딘지도 안다
그걸 과시하기 위해 연주가 끝나자마자
잽싸게 박수를 쳐대기 시작하는 사람들과
뒤따라 허겁지겁 치는 박수에 짜증이 난다
우연히 이빨 쑤시며 보는 미스코리아선발대회 예선에서
지난해도 그랬고 십년 전에도 그랬지 싶은데
잘 씌워지지 않는 왕관을 머리에 걸쳐주느라 머리 쥐나는
측은한 광경과 그 왕관 아닌 이물질을 쓰고 무릎 구부리며
석고처럼 웃는 미인을 볼 때 짜증이 난다
빤한 상표 가리느라 뿌옇게 안개 들러댄 야옹이 짓에 짜증나고
나로호 발사 실패 뉴스를 전하면서 KBS가 단독 촬영한
폭발 장면이라며 거듭 '단독' 임을 강조할 때
실패한 사실보다 더 짜증이 나고
월드컵 '독점' 중계라며 나불대는 SBS가 짜증난다
그대로 보여줘도 알까 말까한 시에
부러 해상도를 낮추고 또 낮추고 숨은 그림 찾기도 넣어
문자의 입자만 고스란한 저 예술에 그 심오함에
조롱당하는 내 예술적 수준이 짜증나고
그들만의 블루스라 몰아붙이며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짜증이나 내는 한심한 내가 짜증난다
- 시집 <낙법> (문학공원,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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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아주 하찮은 이유로 짜증날 때가 많이 있다. 위에 열거한 짜증들은 사실 공분을 일으키거나 불쾌한 수준은 아니어서 그저 잠시 생각하면 쓴 웃음이 나올 정도이지 화가 날 일은 아니다. 작년 지방선거 투표장에서 무슨 참고서의 목차도 아니고 1-가, 1-나. 1-다 혹은 2-가. 2-나 이런 요상한 기호의 오만한 조합을 대할 때도 그랬고, 혈세만 축낸다며 벼락같이 없애자던 기초의회가 '신중' 검토한 결과 없던 일로 되살아난 그 '통박'에도 짜증이 났지만, 이번 과학벨트 선정을 두고 핵심시설 유치에 실패한 후보 지자체의 반발을 보면서 이젠 짜증을 넘어 슬슬 도분이 난다. 애당초 되지도 않은 일에 들러리 서고선 뒷북 쳐대는 꼴 아닌가 화가 나고, 매양 이런 식으로 들쑤셔놓는 중앙정부의 그 ‘원칙’에는 분노가 치민다.
이래저래 짜증과 화가 타의에 의해 복제 재생산되고 있는 형국이다. 마냥 사람이 좋다고 사람을 우습게 보는 것도 그렇고, 특정 지역이 특정 정치세력에 아무 까탈 없이 ‘묻지마’식 지지를 보낸다 해서 그 지역을 물로 보는 처사도 용납이 안 되는 일이다. 물론 그것은 자업자득이거나 제 무덤 제가 판 꼴이기도 하지만. 그리고 당연히 국가미래사업에 지역이기가 끼어들어 일을 그르치고 효율을 까먹어선 안 될 일이다. 이번 선정이 전문가들의 시각에서 공정하게 그 과정이 진행된 결과라 믿고 싶지만, 만에 하나 정치적인 고려가 더 작용했다면 문제의 양상은 다르다. 그 경우 해당지역민의 입장에서는 허벅지 꼬집어가며 마냥 참아낼 일은 아닌 것 같다.
ACT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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