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철환이야기
1949년생 배철환은 아주 특별한 친구였다
부산중학 후 소위 일류라는 부산고나 경남고를 가지 못하고
동래의 D고에서 시골 놈인 나와 도시 놈인 그가 만났는데
키는 168정도, 얼굴은 거무죽죽 넓적하고 눈은 지긋하고 코가 뭉툭했다
입학하기 한 해 전 학교에 큰 불이 나 우리는 화학실습실에서
실험실용 큰 테이블을 책상삼아 6~8명이 모여 수업을 받았다
그러던 중 배철환은 심심하면 테이블 밑에서 뭘 꺼내 씹는데
알고 보니 그건 그가 무의식중에 붙여놓은 코딱지였다
심지어 우리가 살짝 코딱지를 붙혀놔도 용케 찾아내어 씹었다
그것뿐인가
冬服은 가을에 입으면 하복 때까지 언제나 입은 그대로였다
검은 교복의 바지나 윗옷에는 촛농같이 반지르한 콧물의 흔적이 낭자했다
하여 시내에서 동래 가는 버스나 電車를 타도 그의 옆은 항상 휑했다
내복을 들추고 이를 잡는 것은 코딱지 껌과 같이 그의 일상이 되었다
배철환은 9남1녀 중의 6번째 쯤 되었고 바로 위로 누님이 계셨는데
어떤 연유인지 그녀는 경남의 진주여고엘 다니고 있었다
당시 부친이 철도공무원이라 차비는 무료인 듯 했다
범일동 기찻길옆 그의 집 이층 다락방은 마치 다른 나라처럼 보였다
汽笛은 밤낮으로 울지 집은 후덥지근하지 형제들은 우굴 거리지
보수동 헌책방을 옮겨놓은듯한 그의 널브러진 책들 또한 신기하기만 했다
그는 권투를 배워 4개월 만에 부산학생아마츄어대회에서 2위를 했다
천부적인 재질?과 도대체 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모습에서
우리는 마치 그가 우리의 형이며 대변자처럼 생각되었다
권투를 한 이유는 단 한 가지, 누나를 잊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곁에 있고 싶어 학교를 빼먹고 누나 몰래 통학열차를 탄 적도 부지기수라
결국 누나의 오랜 설득에 맘을 달래며 샌드백을 두들긴다했다
그러나 고2쯤의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일이 터졌다
누나를 집적이던 진주농업고교 학생 셋을 흠신 두들겨 패고
결국 그의 부친은 손이 발이 되게 빌었다한다
누나를 잊으려하다가 되레 누나나 가족에게 큰 피해를 입힌 셈이었다
배철환의 IQ는 150이었다 그리고 그의 몰입도는 200점 만점에 199점이었다
한 번 책을 들면 밥도 까먹고 술도 잊는다
토요일 오후에 책을 펼치면 일요일 저녁까지도 물 몇 모금과 담배 몇 대로 견뎌낸다
밤낮을 잠도 않고 몰입하여 오직 독파讀破에만 열중이다
노을속 떼까마귀처럼 著者의 심장을 벌겋게 헤집는것 같았다
심지어는 누워서 책을 보며 담배를 피는데
방바닥에 놓인 제 왼손바닥에 꽁초를 비비고는 앗! 뜨거 한다
우리가 옆에서 떠들어도 눈도 꿈쩍 않는다
그는 그 시절 實存主義에 완전히 매료되어있었다
니체 사르트르 카프카 장용학에 빠져 그들의 저서들을 닥치는 대로 읽는데
그 몰입도는 바로 무아지경이란 단어가 적합했다
구토嘔吐나 요한일기등을 서술하면 우리는 거의 멍만 때리고 있었다
그는 여러 예술제나 대학 문예콩쿠르등등에서 장원을 줄곧 했다
학원잡지에도 산문과 시를 발표했다
그러면서 싫어하는 문학도들이 있었으니
지금은 Y대에 재직하는 대광고교출신의 M교수 등이 대표적이었다
그 이유를 지금은 확실히 기억 할 수 없지만
전혀 새로움 없는, 기성인들의 흉내뿐이라며 업신여겼던 것 같다
배철환은 대학엘 가지 못했다
우리는 똑같이 그는 S대 나는 K대에 낙방했다
나는 실력이 모자라 낙방한 것이지만
그는 문학과 술과 담배를 끊고 2개월의 집중 노력을 했으나
허사가 되자 허허, 허허허 웃기만 했다
우리의 재수再修는 나의 고향인 경남 고성의 문수암이었다
4개월의 경비는 거의 대부분 내가 부담을 했는데
9남1녀의 가정형편은 그의 호주머니에 먼지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하도 안 씻고 유유자적한 배철환은 미움을 받아 절에서 쫓겨났다
해우소에 앉은 月田비구니의 엉덩이를 훔쳐 본 죄도 있었을 터이다
대학생이된 나는 어느 날 부산 대신동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다
일 년 반만에 만난 그는 입시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친다고했다
대학도 안 간 사람이 영어강사라?
괴물천재라는 그의 명성이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내가 現代詩學에 시를 발표했을 때
그는 내게 등단을 할 거냐고 물었다
나는 우물거렸고 그는 비스듬히 웃기만하다가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기성작가들을 조소했고 등단이란 자체를 외면했다
문예반을 지도하신 소설가 최O군 선생님도 그는 꺼려했다
지금도 나는 그의 심중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다만 괴이하고 특이하고 아주 뚜렷한 친구로 기억한다
수 년 후 그는 부산 어느 소주회사의 영업사원이 되었다
그 호탕하고 털털함이 담당 지역의 업주들과 주당들을 매료시켜
제일 우수한 영업사원이 되었다
또한 회사의 참한 경리부 여직원과 결혼하여 몇 년을 살았다
고자鼓子가 될 거라고 군에서 일부러 몹쓸 병을 오래오래 앓았던 배철환
엄동설한에도 팬티차림으로 마당 수돗가에서 머리감고 낯씻는 배철환
그런 신랑이 좋아 결혼한 신부는 결국 그런 신랑이 싫어 떠났단다
그는 혼자 몸이 되었다
택시를 몰며 생계를 유지하고 창작에 몰두한다던 배철환,
어느 날 풀썩 2만여 권의 책과 燒酒兵들의 호위 속에 떠났다 한다
나는 그의 사망 소식만 바람 편에 들었지 세세한 것은 모른다
그의 작품노트도 모른다 안타까울 뿐이다
범일동 구름다리 기차길옆 그의 집은 누가 사는지 찾아 볼 용기도 없다
그 여름 밤, 해운대 백사장!
유치환 이영도선생을 모시고 벌인 우리들의 술판과 춤사위
선배인 방0권, 권0, 심0주에다 부산상고 변0환, 혜화여고 김0희등이 생각난다
또한 엊그제(6.26일)췌장암으로 생을 마감한 동래여고 김태야(예명 진도희), 우리 아래로 신0, 신* 등등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그 중에 유독 생각나고 흉내 내고 싶고 혹은 밉고 때로는 짜증나는
세칭 천재, 도라이천재, 너털도사, 배삿갓, 참피언등의 별명을 가진 배철환!
마흔 조금 넘어 떠난 부산의 아름다운 천재 기인 배철환을 그리워한다
아직도 내 몸에 한 가닥 전율을 남겨준 괴짜를 추억한다
2015.6월

첫댓글 기인이시네요 ㅎㅎ
현대 우리나라로 치면 이중섭, 이상같은 친구이죠(아니, 더0 ㅎㅎ
내 추억을 바라보듯이
하나하나 내려보았네요
어릴적 추억
누구나 기억을 꺼내면
실타레처럼
어쩌면
특별하게보다는 평범함이
그 사람에게
큰 굴곡없이 살아지는 게
아닐까
글을 보며 생각했네요
어째
작가명이 없네요
워낭님 글이시면 자작글방으로
둘까 하는 데 어떠세요
여기 두시죠 ㅎㅎ
작년 00잡지에 수록했던 글입니다
너무 독특하고 뛰어난 천재성의 친구였지요
고교시절 각종 문학콩쿠르는 휘어잡다시피 한 녀석!
아깝다ㅡㅡㅡㅡ
왜 그런 분들이 일찍 가시는지....
워낭님도
부산이 고향이신듯....
네, 부산서 30여년을~
고맙습니다 ㅎㅎ
머리 좋으신 분들은
미리 머리를 다 쏟아 썼기 때문에
일찍 소천한다는 말이 있어요 ..
지금쯤 살아계셨다면 .. 문학계의 거성이 되셨겠지요?
좋은 친구셨네요 ...
글 잘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언제 그 흔적을 찾아 가보려합니다 ㅎㅎ
운명같은 의무? ㅎㅎ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