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6일
가톨릭 성인들
[영국] 파운틴스 수도원 5
12세기에 만든 아름다운 천장은 수도원과 그 부속 건물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 준다.
♤ 성 꼰따르도 CONTARDO 1249년 순교 순례자 페라라
성 꼰따르도 순례자는 페라리의 에스테가문 출신으로 두 동료와 함께 꼼뽀스텔라를 순례한 후,
높은 언덕에 올라가 브로니 마을을 내려다 보면서, 만일 하느님이 원하시면 이 아름다운 곳에서
죽고싶다는 예언적인 말로 기도하였다.
이런 기도를 바친 직후부터 그는 너무나 심한 고통 때문에 브로니에 그대로 머물게 된 것이다.
그의 병이 장기적인 치료를 요한다는 결론이 났을 때, 두 동료는 고향으로 돌아갔고,
꼰따르도를 두렵게 생각한 집주인은 그를 헛간으로 내쫓았음으로, 짚더미 위에서
고통을 참아받아야 하였다. 그의 죽음 이후 높은 성덕을 증명하는 수많은 기적이 일어나자,
비로소 그가 위대한 성인으로 모셔지게 되었다고 한다.
♤ 성 드로고 DROGO 혹은 드루온, 은수자(1189년 순교) 은수자
드루온으로 알려져 있는 디로고는 플란더즈 귀족의 아들이었으나, 태어나서부터 고아로 자랐다.
18세부터 그는 여러 성소를 방문하는 순회 통회자가 되어 순례하였다.
그런 다음에 드루온은 세부르그에서 6년 동안 목동으로 생활하였는데,
주위 사람들은 그의 성덕을 높이 받들고 산 성인으로 공경하였다.
그는 또 다시 순례의 길에 올랐고, 마침내 세부르그에서 죽을 때까지
그러니까 거의 40년 동안 은수자로 수덕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목동들의 수호성인이다.
♤ 성 마뇨 Magnus 1116년 순교자 오르크니
오르크니 섬나라 왕인 그는 부친으로부터 열렬한 신심을 물려 받은 크리스챤이었다.
그는 아일랜드와의 전투를 싫어하였다. 사람을 죽이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라 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웰스 사람들이 침략하여 체포되었으나, 감시의 소홀을 틈타서 바다로 뛰어내렸고,
스코틀랜드의 말콤 1세의 궁에 당도하여 환영을 받았다.
그 후 그는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지난날의 죄를 통회하며 살다가,
결국은 아일랜드의 침략에 못이겨 살해당하였다.
그는 비록 정치적 이유 때문에 살해되었지만 그의 신신심과 교회에 대한 사랑 때문에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는다.
♤ 성 바시오 Vatius 04.16 순교 셍트 500년경
♤ 성 베네딕토 요셉 라브르 benedict joseph labre 1748~1783 걸인,증거자 불로네
그는 부유한 상인의 15자녀 가운데 맏이로 불로네 근교에서 태어났다.
1770~1776년 사이 그는 수차에 걸쳐 수도회에 입회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너무도 어리고 또 신중하다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하였다.
그런 뒤에 그는 로마의 순례길을 나섰는데 맨발로 구걸하면서 기도 중에 걸어갔다.
그로부터 3~4년 동안 그는 서유럽의 성지 이곳 저곳을 순례했는데,
이탈리아의 로레토, 아씨시 그리고 바리, 스위스의 아인지엔텔른,
프랑스의 파라이-러-모니알, 스페인의 콤포스텔라 등지에서 많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어디를 가나 항상 맨발로 여행하였고, 노천이나 추녀 밑에서 밤을 세웠으며,
옷은 누더기였고, 몸은 더러웠으며, 음식은 문전걸식 하였고, 돈을 얻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의 말 수는 적었으나, 기도는 많았으며,
다른 사람들의 냉대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1774년부터 그는 로마에 머물렀는데, 낮에는 성당에서 기도로 지냈고,
밤에는 콜로세움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건강을 크게 해쳤기 때문에
걸인 수용소를 찾을 형편이 되었다.
마침내 그는 성당에서 허물어지듯 쓰러진 후, 어느 푸주한의 집에서 임종을 맞았다.
로마의 사람들은 이 새로운 프란치스코 성인의 높은 성덕을 전혀 모르지는 않았다.
1881년, 그는 그들의 성인으로 높이 받아들여졌다.
성 베네딕토 가브르는 서방 교회 보다
동방 교회에 더 많이 알려진 수덕적인 성소를 받은 분이다.
그는 항상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보"가 된 희랍의 살로이와
러시아의 유로디비에 견줄만한 위대한 성덕을 쌓았던 것이다.
♤ 성녀 베르나뎃따 Bernardetta 1879년 동정
마리 베르나르도(베르나데트) 수비루스는 가난한 물방앗간 주인의 맏딸로 태어났다.
14세 때의 그녀는 번민하는 듯한 인상에다가 보통보다
작은 소녀로서 민감하나 쾌활한 기질이 있었으며, 다소 발육이 늦은 듯했다고 한다.
1858년 2월 11일과 7월 16일 사이, 가브 강변의
얕은 굴 속에서 그녀는 놀라운 체험을 하였다.
18 차례에 걸쳐 그는 매우 젊고 아름다운 부인을 보았는데,
그 부인이 자신에게 여러 가지 요구를 하였다.
이 부인이 나중에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로
호칭하게 되는 동정 마리아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러한 기적이 일어나는 곳에는 소문을 듣고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베르나뎃따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부인"을 보지 못하고 그말씀도 듣지 못하였으나,
무슨 혼란이나 정신적인 이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 발현이 있고난 다음부터 거짓 환시가 유행병처럼 번졌으나,
교회 당국은 그녀의 체험에 재하여 올바른 자세를 견지하였다.
몇 년 후 그녀는 의심많은 불신자들로부터 심한 고통을 받았으나
이 모든 것을 영웅적인 용기와 품위로써 물리쳤다.
1866년에 그녀는 네베르의 애덕회에 입회하였다.
여기서 그녀는 대중적으로 알려지는 위험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내 일을 계속하고자 합니다."
"무슨 일이오?" 이때 그녀의 대답은 "아픈 일"이라고 하였다.
그녀는 35세에 임종을 맞이할 때까지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삶을 살았다.
♤ 성 빠떼르노 Paternus 혹은 페어(paternus,pair)564년경 주교 아브랑슈
성 빠떼르노는 포아티에르 출신으로 그의 부친은 공직에 있었다.
그는 소년 시절에 포와투의 앙시웅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그 얼마 후에는 동료 수도자인 성 스꾸빌리오와 함께 노르망디 꾸땅스의
황량한 지방에서 은수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그랑빌이 가까운 쉬씨에 정착하였는데,
주변의 많은 은수자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 됨으로써 원장이 되었다.
그는 70세의 고령에 아브랑슈의 주교로 임명되어 13년동안 교구를 지도하였다.
그는 파리 공의회에 참석했고, 국왕 킬더베르트와는 개인적인 친분이 두터웠다.
♤ 성 아르칸젤로 archangelo 1513 수도자 볼로냐
성 아르칸젤로의 생애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볼로냐 시민들의 폭동 때문에 부친과 형제들을 잃은 뒤에
아우구스띠노회에 입회하여 유명한 수도자가 된 것은 틀림없다.
한때 그는 부친과 형제들의 살인자에게 복수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모든 일이 부질없는 짓임을 깨닫자마자 그 자리에서 복수를 포기했다고 한다.
성 아르칸젤로가 플로렌스의 대주교로 임명된 적이 있다고 하지만,
근거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의 유해는 굽비오의 성 암브로시오 성당에 안치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
♤ 성녀 엔크라시아 Encratia 304년 동정 순교자 시라고사
동정순교자. 304년에 순교함. 성녀 엔크라시아의 생애는 알 수 없고,
다만 프루덴씨우스가 지은 장시 속에 그녀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그녀는 비범한 정신의 소유자로 열렬한 믿음을 가졌던 신자였다.
박해자는 그녀의 이런 모습때문에 더욱 광분하여 갖가지 만행을 저질렀다.
수없이 때리고 모욕을 준 뒤에, 못뽑이로 옆구리를 찔렀고, 가슴을 도려내었으며,
배를 갈라 죽였다고 한다.
시인 프루덴씨우스는 자신의 생존 시에 그녀가 순교하였다고 노래하므로써,
그녀의 박해는 디오클레씨안의 때로 추정할 뿐이다.
♤ 성 요아킴 Joachim 1305년 평수사 시에나
요아킴은 히브리어로 '야훼께서 굳게 하신다'란 뜻이다.
시에나 태생인 그는 그 지방에서 유명한 피꼴로미니가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성모신심에 남다른 열성을 보였고,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기를 즐겨하였다.
14세 때, 그는 성 필립보 베니찌로부터 성모의 종 수도복을 받았으나,
자신은 사제직에 부족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대신 미사에 참례할 때에는 너무나 열심이었기에, 종종 탈혼에 빠졌다.
그는 사람들이 거들떠 보지않는 직책을 가장 좋아하였다.
시에나 사람들의 존경을 피하기 위하여,
그는 원장에게 한적한 수도원으로 보내주도록 간청하여, 아레쪼로 갔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였으니, 시에나 사람들이 그를 백방으로 찾아나섰기 때문이었다.
그는 47세의 일기로 귀천하였다.
♤ 성 윌리암 William 1317 은수자 뽈리찌
성 윌리암 뇨피는 팔레르모 근교 뽈리찌 출신인데,
까스뗄부오노 근방에서 한동안 은수자로 살다가, 걸식 수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어느 여인의 끈질긴 유혹에 휘말려서 수도원을 떠나
세속으로 돌아가려는 욕망이 끊임없이 타올랐다고 한다.
그런 고민에 빠진 그에게 하느님이 계시를 내린 것이다.
그후 그는 시실리아산으로 올라가서 아무도 모르는 혼자만의 독수생활에 빠져들었다.
여기서 그는 11년 동안 살다가 선종하니, 그의 덕을 흠모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 성 콘타르도 Contardus 증거자 에스토니아 1249년
♤ 성 투리비오 Turibius 460년경 순교 주교 아스토르가
성 투리비오는 프리쉴리아노 이단이 스페인의 여러 지역에서 판을 치고 있을 당시에
아스또르가의 주교로 착좌하였다.
그릇된 사도적 저술에 기반을 둔 이 이단들은 교묘한 마니교도와 엇비슷했고,
성직자나 평신도들에게 큰 호소력이 있어 보였다.
투리비오 주교는 처음부터 이단의 간교한 술책을 간자로 부상되었고,
따라서 투리비오와 레오 교황 사이에는 이 이단에 따른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수차례로 걸쳐 서신으로 협의한 바 있는 것이다.
뚜리비오의 이런 노력에 따라 이 이단은 크게 흔들렸다.
이를 틈타 뚜리비오는 교구내의 성직자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신자들의 윤리성 회복에 박차를 가하여 크게 성공했던 것이다.
♤ 성 프룩뚜오소 Fructuosus 665년 대주교 브라가
비시고트왕의 스페인 대장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적부터 하느님께 봉헌된 삶을 희망하다가,
양친이 사망하므로써 자기 성소를 찾게 되었다.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그는 가난한 사람과 노예 해방을 위하여
혹은 수도원을 세우는데 사용하였다.
그가 첫번째 세운 수도원은 비에르죠 근교의 산에 세운 것이다.
그 후 그느 에집트에서 은수자로 정착하려고 하였으나 왕의 명에 의해 좌절되었다.
656년, 그는 브라가의 대주교로 승품되었고, 똘레도 공의회에도 참석하였다.
배경음악 : 가톨릭성가집 134 거룩하다 부활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