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론-
petal * 1
까맣고 짧은 단발머리. 핏기 없는 하얗디하얀 얼굴. 눈에 띄게 파르르 떠는 두 손.
안 그래도 커다란데 겁에 질린 듯 크게 좌우로 흔들려 신경 쓰이는 눈동자.
하얀 시트 위에서 눈을 뜬 여자애는 상당히 놀란 듯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상한 상상을 하지는 말아야 한다.
보이는 그대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고 여기는 양호실일 뿐이다.
마치 범죄자 취급을 하는 것 같아 민주는 인상을 찌푸리며 여자애의 마이를 살폈다.
불안한 듯 눈치를 보던 여자애는 자신의 핸드폰을 민주가 꺼내 들자 눈을 크게 뜨며 그것을 낚아챘다.
본인의 핸드폰이 맞는지를 의심하는 걸까. 아니 사실은 조민주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절망스러워 보이는 여자애의 입에서 길고 굵은 탄식이 터져 나온다.
여자애는 정말 소중히 여겼는지 끊어진 핸드폰 고리를 연신 만지작거렸다.
한손으론 핸드폰을 들고 한손으론 입술을 톡톡 건드리는 여자애의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까지 맺힌다.
“핸드폰에는 아무 이상 없어. 미안. 나랑 부딪혀서 고리도 망가지고 기절까지 하고..”
솔직히 그렇게 세게 밀지도 않았다. 순전히 사고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조민주 덕에 여자애의 핸드폰이 계단을 굴렀으며 또한 핸드폰 고리가 무참히 으스러졌다.
머쓱해져 눈치를 살피며 사과하는 그에게 여자애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조민주는 소리 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는 여자애의 마이에서 이름표를 찾아냈다.
신 하경. 1학년 7반. 민주와 같은 학년이다.
하경의 입에서 들릴 듯 말듯 떨리는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흘러나왔다.
“미안해 엄마..미안 아빠.....”
*******
1시간 전.
일주일만 지나면 방학이다.
단축수업에 들어가고 벌써 며칠이 흘렀다.
선생님들도 시험이 끝나서 그런지 수업은 적당히 나갔고 몇몇 선생님들이 보여주는 영화 무한 반복은 지겨울 따름이었다.
가져오려면 좀 재밌는 것 좀 가져오던가.
저번 시간에 봤던 데는 왜 못 찾아서 봤던 데를 계속 틀어 주는 건데?
담임의 짧고 굵은 잔소리가 끝나자 민주는 어기적거리며 가방을 들었다.
반 친구들이 같이 놀자고 붙들어 매는데 오늘은 왠지 놀 기분이 들지 않았다.
가슴 한구석이 퀭 한게 오장육부 깊숙한 곳으로 스산한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듯 했다.
교실을 나와 복도에서 한참을 창밖을 바라봤다.
그런 민주의 뒤에서 ‘겨울 타냐?’라는 야유 섞인 농담이 들려왔지만 한쪽 귀를 훑고 다른 귀로 흘러 나갈 뿐 이었다.
미친듯 차가운 바람이 앙상한 나뭇가지를 요동치게 한다.
나뭇잎에 달려있던 마지막 은행잎 하나까지도 무심히 나풀거리며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민주는 인생이 참 무미건조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아 지겹다!!!!!!!!”
기지개를 펴며 크게 외쳐진 민주의 목소리는 복도를 쩌렁쩌렁 하게 울렸다.
집에나 가야겠다 싶어 가방을 고쳐 맨 민주가 창밖을 보며 계단으로 방향을 틀었는데 올라오던 여자애를 미처 발견하지 밀어버렸다.
딸랑 딸랑.. 콰직.
여자애가 들고 있던 핸드폰이 계단 밑으로 추락하면서 핸드폰에 달려있던 방울 두 개가 떨어져나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밑에서 올라오던 한 무리의 아이들에 의해 딸랑거리던 방울 두 개는 처참하게 밟혀 으스러져 버렸다.
방울을 밟은 여자애는 뭐지? 하는 얼굴로 신발 밑을 살피다 민주와 눈이 마주쳤다.
“아 미안.. 어, 어!”
방울을 바라보던 핸드폰 주인이 갑자기 픽 쓰러진다.
잘못하면 계단 밑으로 떨어지겠다 싶어 민주는 재빨리 여자애의 허리를 잡아 끌어 올렸다.
그렇게 높지는 않지만 이렇게 기절해서 떨어 지면 적어도 뇌진탕이라는 생각에 식은땀이 흘렀다.
기절한 여자애를 안고 주저앉은 민주를 보며 순식간에 벌어진 일을 목격한 애들도 깜짝 놀란 듯 웅성 거렸다.
“아 깜짝이야.. 완전 큰일 날 뻔했다. 얘 어디 아픈 거 아냐? 양호실에 데려 가야겠다. 여기 핸드폰.”
기절한 여자애와 여자애를 끌어안은 민주에게 시선이 몰렸고.
민주는 여자애가 건넨 핸드폰과 핸드폰 주인을 안아 들고 황급히 양호실로 향했다.
아.. 일진이 사납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여자애가 조그마해서 가볍다는 거였다.
******
“여자 친구야?”
양호선생님이 씨익 웃으며 민주를 향해 눈치를 줬다.
“아, 지금 농담이 나와요? 모르는 애예요.”
“그럼 앞으로 친해지면 되겠네. 귀엽게 생겼잖아.”
선생님의 짓궂은 농담이 별로 달갑지 않다.
잔뜩 찌푸린 얼굴의 민주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가방과 여자애의 소지품을 의자에 올려놨다.
“어디 다쳤다거나 아픈 것 같진 않은데. 그냥 놀라서 기절한 것 같네”
여자애를 유심히 관찰하던 선생님은 어깨를 한번 들어 올리며 미소 짓고는 양호실을 지키고 있으라면서 나가버렸다.
그냥 집으로 갈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 일어섰다가 왠지 뺑소니치는 기분이 들어 여자애가 깰 때 까지만 기다리기로 했다.
양호실 창문에 걸터앉아 운동장을 살폈다.
친구들이 인파 사이를 가로지르며 공을 뻥뻥 차는 게 왜 그렇게 시원해 보이는지.
당장이라도 뛰어 내려가 한번 거나하게 걷어 차 주고 싶었다.
될 수 있다면 공 말고 제일 즐거워 보이는 성철이 놈 엉덩이를.
얼마나 목청이 큰지 패스, 패스! 라고 외쳐대는 꼬락서니가 마치 나를 향해 빨리 내려오라고 손짓하는 듯 했다.
주머니에서 여자애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핸드폰 고리가 뜯어져있었다.
원래대로 라면 고리의 양쪽 끝엔 딸랑 거리는 방울이 달려있었을 것이다.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움찔.
갑자기 뒤쪽에서 무언가가 크게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뭐랄까 누군가가 자신을 놀래키기 위해 몰래 다가오는 느낌이랄까.
커다란 차가 소리없이 다가오는 느낌이랄까.
밀폐된 양호실에서 느껴지는 찝찝한 기분에 뒤를 돌아봤다.
기절했던 여자애가 언제 일어났는지 양손으로 입을 가린 채 느릿느릿 고개를 돌려 민주와 눈을 마주쳤다.
“.....누구..”
여자애는 살짝 떨면서 다시 기절할 듯 하얗게 질린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눈을 질끈 감았다.
******
“저기 정말 괜찮아? 미안해 핸드폰 고리는 내가 찾아 줄게”
하경은 뒤따라오는 민주가 너무 불편했다.
미안하다는 말도 들을 기분이 아니었다.
핸드폰 고리가 뜯어진 것이 민주의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계단에서 민주와 부딪혔을 때. 민주가 밖을 보면서 걸었듯 하경도 핸드폰을 보면서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모든 것을 민주를 탓 할 수는 없었지만 뜯겨진 핸드폰 줄을 보니 가슴이 뻐근해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저 어떻게든 빨리 집에 가 푹신한 침대에 눕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묵묵부답으로 집으로 향하는 동안 뿌옇게 흐려지는 눈을 비비며 힐끗 돌아보면 일정 간격을 유지한 민주가 눈에 비쳤다.
어디까지 따라오려는 걸까.
어디서 경보라도 배웠는지 하경은 짧은 다리를 분주히 움직이며 성큼 성큼 걸어 나갔고.
그런 하경이 주체하지 못하고 흘러내리려는 눈물방울을 걷어낼 때마다 바라보고 있는 민주는 안절부절 이었다.
일단 따라 가고는 있지만 솔직히 저런 타입의 방울 고리는 본적도 없다.
수백 년 된 절이나 고물상에 가도 찾을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낡지만 화려한 방울 이었다.
잠깐 보았지만 유난이 반짝반짝 거리며 떨어지던 것을 확실히 기억한다.
찾아 줄 수 있을까 걱정도 되었지만 미안하기도 하고 자꾸 우는 모습이 가여워서 어쩔 수가 없었다.
원래 남자란 여자의 눈물에 약한 법이다. 민주는 잘못 물렸구나..
하는 느낌이 불현듯 들었지만 죄책감은 그를 놔주지 않았다.
그는 열심히 하경의 뒤를 따랐다.
방울 고리는 부모님의 유품이었다.
끊어진 방울 끈을 부여잡고 엄마, 아빠에게 연신 미안하다고미안하다고 되뇌며 서럽게 우는 하경을 보고 그 사실을 깨달았다.
하경의 우는 모습은 그의 머리에서 떠나주질 않았고 하경의 뒤를 따르는 내내 죄책감 때문인지 민주 또한 우울해지는 기분이었다.
하경은 한참을 걸어 한 빌라로 쑥 들어 가버렸다.
"신하경. 진짜 미안해!"
하경이 살짝 고개를 돌려 민주를 바라봤다.
하경은 약간 뚱한 표정을 짓고는 입을 삐죽이 올리고 등돌려 올라가버렸다.
계단 창문으로 어렴풋이 비치는 불빛을 보아하니 하경이 3층의 오른쪽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민주는 엉거주춤 하경이 들어간 빌라를 서성이다 발길을 돌려야했다.
그러다 문득. 스토커는 이렇게 집까지 따라다니겠지? 라는 생각이 들어 인상을 썼다.
민주는 오늘 처음 본 여자애의 집 앞까지 따라온 자신의 행동이 옳은지 확신 할 수 없었다.
1학년 7반 신하경.
그 애의 우는 모습과 명찰.
그리고 뜯겨져 나간 핸드폰 고리가 민주의 머리를 맴돌았다.
눈앞의 보이는 캔을 뻥 차고 민주는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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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쪽은 신하경☆ or 조민주☆ 입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