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행복이야기 901]
<고구려 이야기 20 : 태평성대를 이룬 장수왕과 남북조시대의 전개>
장수왕 시대는 중국에서는 이른바 '5호 16국'시대가 종결되고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는 시대였다. 때문에 중국대륙은 다시 한 번 거대한 소용돌이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고구려는 이러한 시대 상황을 잘 이용하여 세력 팽창 기회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장수왕은 백제의 한성을 무너뜨리고 백제 21대 개로왕을 참수하고 소수림왕 이후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던 고국원왕에 대한 복수전을 마무리 한다.
장수왕은 광개토왕의 장남이며, 이름은 '거련(巨連)'이다. 394년에 태어났으며, 모후에 대한 기록은 없다. 409년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413년 10월 광개토왕이 죽자 20살의 나이로 고구려 제 20대 왕에 올랐다. 장수왕이 즉위할 무렵 대륙의 북방에는 선비족 탁발부가 세운 북위가 세력을 형성하고 신진세력 북연을 압박하고 있었다.
북연은 초대 왕인 고운이 부하에게 살해되자 실권자인 풍발이 수습하고 왕위에 올랐다. 풍발은 후연의 모용희가 폭정을 하자 그를 살해하고 고운을 왕으로 추대했던 인물이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 스스로를 '대왕(大王)'으로 높이고 세력을 확대했다. 이 바람에 북위와 잦은 충돌을 했다. 남방에서는 동진이 남연을 병합하고 오랫동안 지속되어오던 농민봉기를 종식시켰으며, 서방에는 서진이 남량을 압박하여 정복시켰다.
국내적으로는 왕권의 위상을 높이고 조정을 일신하기 위하여 427년에 평양성으로 천도를 했다. 이로서 고구려 조정은 343년 고국원왕이 동황성을 도읍으로 정한지 84년 만에 다시 평양성으로 둘아갔다. 그리고 중국은 420년에 유유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동진은 그에게 왕위를 넘겼는데, 왕위에 오른 유유는 국호를 송(宋)으로 바꾸었다. 이로써 동진 시대는 끝이나고 이른바 '남북조시대'를 예고하고 있었다.
대륙의 남쪽은 새로운 왕조가 들어설 때 북방의 맹주 북위는 아직도 세력을 확대하고 북방통일을 꿈꾸고 있었다. 송나라가 건립될 때 당시 북방에는 아직, 북위, 서량, 북량, 북연, 서진, 하 등의 나라가 패권을 다투고 있었다. 그 세력은 북위, 북연, 북량 등으로 축소되었는데 이들중 패권 다툼이 치열했던 북위와 북연의 싸움은 고구려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한편 중국 남쪽에는 한족의 송 왕조가, 북쪽엔 선비의 위왕조가 들어서며 본격적인 '남북조 시대' 를 열었다. 이는 중국이 16국이 난립하던 혼란기를 마감하고 안정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말한다. 중원이 안정되자 장수왕은 이루어왔던 백제에 대한 복수전을 다시 시작한다. 백제는 이를 눈치채고 재빠르게 신라와 화친을 맺고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440년 신라가 고구려의 한반도 쪽 변경을 침공하여 변방장수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고구려는 군사적 대응을 검토했고, 신라는 다급하게 사신을 보내 사죄했다.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신라와 백제가 친해지자 장수왕은 454년 7월에 신라 북쪽 변경을 공격하고, 이듬해 10월에는 백제를 공격했다.
북방의 강자 위와 사돈관계 논의를 차일피일 미루며, 위와 대등한 관계를 형성하고 나라를 안정시킨 장수왕은 나제연합군과 치열한 전쟁
을 이어간다. 고구려는 백제를 공격하기 위하여 승려 도림을 백제에 잠입시켜 개로왕을 충동질하여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이게 한다. 475년 백제 백성들의 원상이 높아지자 백제를 공격하고 개로왕을 체포하고 아차성 아래서 참수했다.
고구려는 중국국가들과는 원만한 관계를 맺으며 내정에 안정을 찾았고, 백제와 신라에 대해서는 강경책을 쓰며 영토를 확장해갔다. 그래서 475년에는 백제의 도성을 빼앗았고, 486년에는 신라의 호산성을 쳐서 점령했다. 이로써 고구려 한반도 진출은 건국이래 최대였다. 장수왕은 외교와 내정을 안정시키고 태평성세를 구가하면서 무려 78년간 재위하고, 서기 491년 12월 9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부고를 받고 북위의 왕 탁발원굉은 흰색의 위모관을 쓰고, 배로 만든 심의를 입은채로 궁궐 동쪽 교외에서 애도식을 가졌다고 한다. 그는 또한 사신 알자 복야 안상을 보내 장례식에 참여토록 했다. 위왕의 이같은 애도 행위는 위와 고구려의 외교관계가 돈독했음을 보여주는 일례라고 볼 수 있다.
송천상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