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1월 04일 토요일
주님 공현 대축일 전 토요일
제1독서
<그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3,7-10
7 자녀 여러분, 아무에게도 속지 마십시오.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이는
그분께서 의로우신 것처럼 의로운 사람입니다.
8 죄를 저지르는 자는 악마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악마는 처음부터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마가 한 일을 없애 버리시려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9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씨가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10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는 이렇게 뚜렷이 드러납니다.
의로운 일을 실천하지 않는 자는 모두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도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5-42
그때에 35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36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38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3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41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42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요한 복음서는 “무엇을 찾느냐?”(1,38)라는 물음으로 시작해서
“누구를 찾느냐?”(20,15)라는 물음으로 마무리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자신을 뒤따라오는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던지신 물음은 “무엇을 찾느냐?”였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던지신 물음이 바로 “누구를 찾느냐?”라는 것이었지요.
결국 신앙의 여정은 ‘무엇’을 찾는 것에서 시작하여 인격적인 사랑의 동반자인
‘누구’를 만나서 그 사랑을 키워 가는 것이라는 말이겠습니다.
묵주 기도를 바치며 환희의 신비 5단 “마리아께서 잃으셨던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으심”을 묵상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대개 이 신비를 묵상하노라면 아들을 잃고 애태웠을 부모의 심경과,
마침내 아드님을 찾아내시고는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48) 하시는 성모님의 원망 섞인 말씀,
그리고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2,49) 하시는
아들 예수님의 조금은 배짱 좋은 대답만 떠오르지요.
그리고 순명하시는 예수님과,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시는 성모님의 모습에 마음이 많이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초점을 비껴간 묵상이라는 것을 어느 때부터인가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내용은 환희의 신비 5단입니다. ‘환희’란 터져 나오는 기쁨입니다.
자신들의 아들이면서도 하느님이신 그분을 잃었다가 가까스로 되찾은 부모의 감격과 탄성을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요?
우리 마음의 그물이 촘촘하지 못한 탓인지 우리는 삶에서 예수님을 쉽게 놓치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 놓쳐 버린 예수님을 다시, 거듭거듭, 새롭게 되찾고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김동희 모세 신부)
작년 8월, 동창 신부들과 은경축을 맞아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사제 생활 25년을 피정하는 마음으로 함께하자고 해서 결코 빠질 수 없었던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성지순례 기간 중의 본당 미사를 다른 신부들에게 부탁하고 떠났습니다.
월요일 새벽(새벽 출발 비행기였습니다),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출국 수속 중인데 본당 수녀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미사에 오시기로 했던 신부님께서 새벽 미사에 아직 도착하시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얼른 그 신부에게 전화하니, 죄송하다면서 곧 도착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날 오후에 부고를 받았습니다. 새벽 미사에 늦은 신부의 아버지께서 선종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새벽, 아버지의 임종을 기다리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미사 때문에 그 곁을 떠나 성당에 온 것이었습니다. 약간 늦었지만 말이지요. 그 신부에게 미안하기도(미사 부탁해서), 또 동시에 감사했습니다.
사제에게 미사는 정말로 중요합니다. 때로는 급한 일, 불가피한 일이 생겨도 미사가 먼저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자리이고 힘든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주님 안에서 위로와 힘을 받지만, 세상 기준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 절대 쉽지 않습니다.
요즘 사제 부족으로 참 어렵습니다. 신학교 지원자도 줄고, 신학교에 들어가서도 중간에 그만두는 학생도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교구장 주교님께서 “지금 보좌신부가 부족한 것을 넘어서, 이제 나이 70을 넘어도 2~3개 본당을 맡아야 할지도 모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제가 없으면 주님의 큰 은총을 얻는 미사도 없지요. 세상 끝까지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려면 당연히 사제가 필요합니다.
사제 부족은 우리의 신앙심과 연결되어 있기도 합니다. 최양업 신부님께서는 ‘자기를 기다리는 목자가 있으니 열심히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과로로 돌아가셨습니다. 신자들이 열심히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때, 열심한 사제도 늘어나고 사제가 되고자 하는 사람도 많아질 것입니다.
이 모든 부족을 하느님께 채워달라고만 기도해야 할까요? 물론 하느님의 힘으로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원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는 제자들의 물음에 “와서 보아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당신께서 모든 것을 알려주고, 해결해 주시면 우리로서는 너무나 편하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먼저 직접 마음을 먹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면서, 모든 것을 원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특별히 시급한 사제 부족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신앙심에 대해 다시금 묵상할 수 있는 오늘이 되셨으면 합니다.
오늘의 명언: 견소왈명(見小曰明) 작은 것의 의미를 볼 줄 알면 밝아진다(노자).
사진설명: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